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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약3:13-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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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창모 신부 |
참고 : | 새길교회 2004.11. 7 주일설교 |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결(성결)하고, 다음으로 평화(화평)스럽고, 친절(관용)하고, 온순(양순)하고, 자비(긍휼)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편벽)과 위선(거짓)이 없습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야고보서 3:17-18)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언10:12)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偏見)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偏僻)되이 하지 말며”(딤전 5:21)
“교회가 부흥하려면 담임목사가 폐결핵을 앓아야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반세기 동안 영락교회를 이끌어 온 한경직 목사님이 그러했고, 충현교회의 김창인 목사님과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그랬습니다. (요즘 대형교회 목사님의 상당수는 암에 걸려 투병 중입니다.) 목사가 아프면 교인들이 목사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기도하게 되고, 합심하여 열심을 내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하는 듯 싶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에게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게 일반적입니다. 아프다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참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앓고 있는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과 교훈은 상대적으로 적지 않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아픈 사람, 아픈 사회, 아픈 민족이 참 많습니다. 눈을 돌리면 아주 아프지만 치료받을 돈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참 많고, 눈만 뜨면 테러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들에 대한 지구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누가 이들을 아프게 하는가?” 에 대한 질문 없이는 아픈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절반 밖에 치유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아픈 이들에 대한 애정’과 함께 ‘이들을 아프게 한 자들에 대한 분노’가 균형을 이룰 때 문제 해결의 공의는 구현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는 반드시 관점이 충돌하게 됩니다. 피해자는 무고한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게 되고, 가해자는 미움 받을 짓을 했으니 미움을 받는 건 싸다는 입장이 맞섭니다. 비록 미워하는 모든 이유가 타당할 필요도 없고, 또 타당하지도 않다 하더라도, 가해자 없는 피해자가 있을 수 없으며 미움 받을만한 일을 하지 않고는 미워할 자 또한 있을 수 없으니, 미움받기와 미워하기는 등이 서로 붙은 샴쌍둥이처럼 묘한 방식으로 결합되어있습니다. 경우야 어떻든 미워하기 시작하면서 인생은, 사회는 불행해지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당사자가 아닌 중립적인 입장에서 편견 없이 이 둘의 관계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난이란 객관화하거나 일반화하기에는 참을 수 없이 가볍고, 주관화하거나 특수화하기에는 견딜 수 없이 무거운 문제다. 여기서 관점의 복잡성이 자리합니다.
더더욱 곤란한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구별이 거의 불가능할 때, 즉 역사에서 한 때 피해자였던 이들이 이제는 가해자가 되어버린 그런 혼란스러운 사실을 역사에서 만나게 될 때입니다.
가장 오래된 증오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폭력이라고 일컬어지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사실 따지고 보면, 아주 사소한 미움과 편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미워하기라는 날줄과 미움받기라는 씨줄로 얽힌 채,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발전하고 변형돼온 반유대주의의 변이(變異) 과정을 통해 일어난 일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오랜 진화론적 과정을 통해 비로소 인류가 탄생했다는 가설보다 더 복잡합니다. 최근 자연과학이 발견한 복잡계(complex system) 이론에 따르면, “북대서양의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태평양에서 거대한 태풍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소위 반유대주의(Antisemitism)라는 이름이 낳은 인류 최대의 비극도 따지고 보면 유대인에 대한 보잘것없는 기억(記憶)과 대수롭지 않던 편견(偏見)이 낳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증오(the Longest Hatred)’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미움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아주 먼 옛날 어떤 사람이 일종의 그릇된 생각, 즉 ‘유대인은 나쁜 놈’이라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 편견은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에게 전염되어 집단적 기억(collective memory), 즉 ‘유대인은 다 나쁜 놈’이라는 고정관념을 만들었습니다. 그 고정관념은 ‘유대인 없는 세상에서 살면 좋겠다.’는 하나의 이미지와 신앙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객관성을 띤 하나의 이론으로 발전하며 기구화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반유대주의는 하나의 사실(a fact)과 하나의 이미지(an image) 사이에서 작용한다. 그래서 반유대주의는 실체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추상적이고, 허상으로 보기에는 너무 구체적입니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이라는 생생한 인물을 통해 구현된 유대인의 이미지는 모든 유대인을 샤일록처럼 이해하고 해석하게 만듦으로써 유대인을 악마화한 사회의 기억을 영속화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오랜 세월 동안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며 인간의 기억이라는 유전자 속에 흡수-저장되어 있다가 적절한 사회적 온도와 문화적 습도를 갖춘 정치적 토양과 만나면서 가공할 만한 힘을 가진 괴물 - 이 괴물은 시대마다 모양을 달리하지만 그 본질은 하나입니다. - 로 탄생하여 역사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어느 날 그 같은 신앙을 가진 콧수염 달린 이가 나타나,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힘을 합쳐,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미명하에 유대인을 모두 멸절(滅絶)시켰습니다. 해충(害蟲)에 약을 치듯이.
반유대주의의 다양한 얼굴들
“유대인은 천성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악하며 열등하다고 여기는 일체의 태도와 행동”이라 정의할 수 있는 반유대주의는 하루아침에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2,000살도 넘은 늙은 망령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괴물처럼 출현한 돌연변이가 아닙니다. 반유대주의는 끈질긴 생명력(生命力)과 놀랄만한 유연성(柔軟性)과 뛰어난 융통성(融通性)을 갖고, 고대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긴 역사를 관통해 오늘날까지 살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반유대주의가 태어난 곳은 신화가 지배하던 그리스-로마의 땅이었고, 그것이 젖을 먹고 자란 곳은 절대 신앙을 자랑하던 기독교 천년 왕국이었으며, 마침내 그것은 ‘위대하고 순수한 피’를 가진 아리안의 독일에서 ‘악의 꽃’을 피웠습니다.
그리스-로마인이 유대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유대인으로서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이번에는 기독교도가 말했습니다. “너는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히틀러가 말했습니다. “너는 살 권리가 없다.”
반유대주의의 출발은 디아스포라 세계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던 유대인들의 독특한 신앙 - 유일신 신앙으로 대표됩니다. - 과 삶의 방식 - 안식일 준수나 까다로운 음식법, 타민족과의 결혼 금지 등 -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남다른 생활방식과 외양(外樣)은 다수의 비유대인들의 눈에 거슬릴 만큼 독특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다수의 외집단에 협력하지 않는 소수의 내집단의 배타적 태도라 눈 흘겼습니다. (여기에 반유대주의의 ‘보편성’이 자리합니다. 즉, 사회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반유대주의란 소수자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으로, 여기서 미움은 타문화의 환경 속에서 자기 동일성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소수자(minority)의 문제로 일반화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타문화 속에서 살아온 여러 민족 중에서 왜 유독 유대인에 대한 증오는 항구적(恒久的)이며, 심지어 유대인이 살지 않는 지역에서조차 극단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가 하는 문제의 ‘특수성’이 자리하게 됩니다. 또한, 유대인에 대한 반감의 정도가 모든 나라와 문화에서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 심리학적 이론은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사제 마네토(Manetho)와 아피온(Apion), 그리스의 몰론(Apollonius Molon)과 로마의 타키투스(Tacitus) 등은 바로 ‘유대인들의 반사회적 경향’을 지적한 이들이었습니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자신의 책《역사Historiae》(5.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유대인)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해 오직 증오심과 불화만을 드러내고, 따로 앉아 식사하고, 따로 잠을 자고, 색욕이 강한 종족이면서도 외국 여인들과는 성교를 금하며, 그들 사이에는 법이 아닌 것이 없을 정도다.”
기독교 세계는 그리스-로마 시대가 만들어놓은 유대인에 대한 배타적 분리주의와 사회적 반감을 거의 고스란히 이어받아 그 토대위에 새로운 신학적 편견과 차별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것은 1세기 후반 예루살렘 성전 멸망 이후 유대교와 분리되는 과정에서 ‘누가 하나님의 합법적인 상속자인가’ 하는 피할 수 없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논쟁 과정에서 유대인은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을 살해한 자’라는 교회의 고정관념이 자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여기서 제가 강조하는 것은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주장이, 실제로는 몇몇 유대인만이 예수를 죽이는 데 가담했을 뿐임에도 모든 세대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죽인 자’라는 딱지를 붙임으로써 그들을 어떤 정치적 ? 종교적 목적으로 이용하거나 공격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실을 지나치게 일반화하거나 단순화시킬 때 발생할 수 있는 오류이며, 더욱 심각한 것은 여기에 개입된 정치적 의도입니다.)
이러한 신학은 기독교 교부(敎父)들에 의해 일차적으로 복음서에서, 그리고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그 근거를 찾아 발전되어 나갔습니다. 교부들은 ‘육을 따르는 이스라엘’은 버림받았으며, 젊은 기독교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언약의 진정한 상속자인 ‘참 이스라엘’(verus Israel)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낡은 선택과 옛 약속은 파기(破棄)되었으며, 이제 교회가 하나님의 ‘새 언약’을 상속받아 ‘참 이스라엘’로 탄생하게 되었다는 교리가 그것입니다. 교부들의 주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제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교회의 박해가 가시화되었습니다.
388년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난 유대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의 폭력사태는 유대교 회당에 방화가 일어나고 유대인에 대한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유대인에 대한 이미지와 박해의 정도는 그다지 ‘야만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결정적인 변화는 유대인 대량학살을 몰고 온 제1차 십자군 원정(1096년)을 통해서였습니다. 제1차 십자군의 지도자 고드푸루아 드 부용(Godefroi de Bouillon)은 그리스도의 피 값을 이스라엘에 갚자며 “단 한 사람의 유대인도 살려두지 말 것”을 명령했고, 유대인을 그리스도의 적으로 간주한 십자군들은 사명감을 갖고 그 일을 감행했습니다. 십자군의 잔인한 대량학살은 유대인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날까지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배척하고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으려하는 까닭은 신학적인 데 그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홀로코스트를 포함한 역사적인 경험 때문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유대인은 기독교인의 종이다”
십자군 운동은 유대인의 불신앙과 낮은 사회적 지위를 일깨움으로써 사회적 이탈과 지적 회의에 빠진 중세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우월한 지위와 신앙을 입증함으로써 기독교 세계의 통합을 꾀하려했던 것입니다. 이로써 “유대인은 기독교인의 종이다.”라는 유명한 명제가 탄생합니다. 본래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였던 이 명제는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회법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중세 대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조차 유대인은 죄로 말미암아 ‘영구적인 노예 상태’에 이르게 되었음을 확증했으며,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기독교인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곧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태복음서 27:25)라고 말한 자들이라며, 그리스도를 처형자의 손에 내줌으로써 벌 받을 짓을 한 유대인들이야말로 기독교인의 노예일 뿐이라 강조했습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유대인은 특별히 정해진 복장 - 둥근 모자를 쓰거나 옷에 노란색 유대 배지를 달게 했습니다. - 을 하고 다닐 것을 성문화했으며, 유대인의 교회 출입 금지와 기독교 명절에는 거리에 나와 걸어 다니는 것조차 금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영국 노리치에서 일어난 한 기독교 소년의 살해 사건(1144년)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축제인 유월절에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빵인 무교병을 기독교인의 피에 찍어 먹기 위해 저지른 짓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성체(聖體)를 모독한 유대인’에 대한 파문으로 이어져 핍박과 추방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실상 이러한 판타지는 당시 중세 유럽의 흡혈귀 전설 및 민담과 연결하여 중세의 미술, 음악, 문학, 성극, 설교 등을 통해 정형화해 나갔으며, 아울러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에서 결정된 화체설(化?說) - 성례에서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는 입에 들어가는 순간 예수의 진짜 살과 피로 변한다는 중세 기독교의 교리 - 등과 결합하여 상당한 설득력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1347~1360년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흑사병은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을 낳으면서 성난 군중으로 하여금 수천 명의 유대인을 살해하게 했습니다. 이제는 ‘신을 살해한’ 유대인의 이미지에 악마의 뿔과 꼬리를 단 셈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기독교인의 머릿속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확고한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은 것은 바로 고리대금업자의 이미지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이 고리대금업자라는 주장은, 실제로는 몇몇 유대인만이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을 뿐임에도 모든 유대인에게 ‘고리대금업자’라는 꼬리표를 붙임으로써 그들을 사회 경제적으로 공격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망상과 정치적 음모는 종종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그것은 실제로 사회적 동력으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당시 유대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고, 또 주로 무역업에 종사하면서도 길드에서 배척받았습니다.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원활한 경제활동을 위해 유대인이 고리대금업으로 손을 뻗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당시 교회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왕실을 비롯한 일부 기독교 부자들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들과 거래하면서 상호 이익을 주고받았었던 것입니다.
이미 신을 살해한 무신론자로 낙인찍혀 있던 유대인들은 이제 가난한 이들의 돈을 빼앗는 흡혈귀(吸血鬼)로 묘사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토지 중심의 유럽 봉건 사회에서 반유대주의가 보다 사회 경제적인 성격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대중들의 마음속에 유대인은 점차 은행가, 환전가, 기독교의 땅에 침투해 기생하는 착취가 등 돈과 경제의 기수라는 이미지로 자리매김해 갔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에 대한 중세의 고정관념이었으며, 이것은 근대 자본주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유럽의 반유대주의사에서 운명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 역시 유대인에 대한 중세적 신화와 생각을 고스란히 받아들였습니다. 1543년에 쓴〈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에서 루터는 유대인을 우물에 독을 탄 자, 제의적 살해자, 고리대금업자, 악마로 변신한 기독교 사회의 기생충 등으로 부르며,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를 정당화했습니다.
첫째, 그들의 회당이나 교회는 불태워져야 하며, 불태워지지 않은 것들은 먼지로 뒤덮어 아무도 타다 남은 찌꺼기나 돌멩이조차 볼 수 없게 해야 한다. 이런 일은 하나님께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하나님과 기독교의 명예를 걸고 행해져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을 저주하고 모독하고 거짓말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거나 묵과하지 말아야 한다. …… 둘째, 그들의 집을 부수고 파괴해야 한다. 회당에서 하는 짓을 거기서도 행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큰소리치듯이 그들이 우리 땅의 주인이 아니라 가여운 포로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한 지붕 밑이나 한 마구간에 집시처럼 집어넣어야 한다. 셋째, 그들에게서 기도서나 탈무드 같은 우상숭배와 거짓말과 불평을 가르치는 책들을 빼앗아버려야 한다. 넷째, 랍비들에게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 다섯째, 유대인은 귀족도 공무원도 상인도 아니기 때문에 도시지역에서 비즈니스를 하지 못하도록 유대인에게 여권 발급이나 여행 권한을 엄격하게 금지해야 한다. 그들을 집에 머물도록 하라. 여섯째, 고리 대금업을 중단하도록 해야 한다. 모든 현금이나 은금 같은 값어치 나가는 것들을 빼앗아 보관소에 넣어 두어야 한다. 그들의 재산은 고리 대금업을 통해 우리에게서 훔치거나 빼앗아 간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악한 돈은 하나님의 축복과는 반대로 저주받은 것이어서, 다시 선한 용도로 사용되어야 한다. …… 일곱째, 젊고 강한 유대인은 도리깨질, 도끼질, 괭이질, 삽질, 실톳대질, 물레질을 시켜, 아담의 자손에게 요구했던 것처럼 콧등의 땀으로 빵을 벌어먹도록 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를 이방인(goyyim) 취급하여 우리의 이마에 땀을 흘리게 하고, 자신들은 게으름 피며 화롯불 곁에 앉아 능청을 떨고 있던 것이 타당하지 않았음을 보여줘야 한다. …… 우리는 교활하며 게으른 뼈들을 우리 제도 밖으로 추방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봉사하고 우리를 위해 일할 때, 우리의 아내와 자식과 종과 가축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 관대한 자비가 그들을 착하게 만들기는커녕 자꾸만 나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을 없애 버려야 한다. …… 요약하면 당신의 영토 안에 유대인을 가진 군주와 귀족들이여, 만약 내 충고가 당신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이라면, 당신과 우리가 견딜 수 없는 이 무거운 짐, 즉 유대인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보다 나은 방법을 찾을 찌어다.
더러운 피, 열등한 유대인
유대인의 피가 세례를 통해서도 깨끗해 질 수 없는 유전적 결함을 안고 있다는 최초의 주장은 15세기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평생을 유대인 개종을 위해 살아온 도미니크회 소속의 수도사 페레르(Vincente Ferrer)가 처음으로 제기한 소위 ‘나쁜 피(mala sangre)’ 이론은, 비록 그것이 나치의 인종주의와는 성격이 달랐지만, 그동안 지속돼온 종교적 반유대주의를 축소시키는 대신 새로운 형태의 ‘인종적’ 반유대주의를 탄생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상한 혈통을 가진 ‘순수한’ 기독교인과는 달리 ‘더러운 피’를 가진 유대인들에게는 비록 그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손 치더라도 대학, 성직 및 공직의 자리에 앉을 수 없었으며, 결국 1492년 페르디난도 왕과 이사벨라 여왕의 칙령에 따라 모든 유대인이 스페인 왕국에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중세 기독교의 가치관을 붕괴시키고 세속주의와 개인주의를 새로운 사회 가치로 환원시키면서 ‘종교와 정치의 분리’라는 원칙이 세워짐과 동시에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의 종교적 차별이 수그러드는 듯 했습니다. 소위 계몽주의자들의 종교적 관용이론은 “모든 인간은 종교에 의해 판단되지 않으며 국가에 대한 유용성에 의해 판단된다.”는 중상(重商) 이론으로 발전하면서 유대인이 사는 곳마다 상업과 무역이 넘쳐나며 유럽의 경제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이 인정되면서 ‘신을 살해한 백성’이라는 전통적인 증오심도 점차 누그러져갔습니다. 여기에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이나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같은 유대인 계몽주의자들은 긍정적인 유대인의 이미지를 불어 넣어 주었다.
그러나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나타난 합리주의자들과 자연종교에 기초를 둔 급진적인 이신론(理神論, Deism)자에게 있어서 유대교는 여전히 인간의 이성을 무시하는 원시적인 종교며, 초자연적인 유일신을 신봉하는 유대인은 미신에 가까운 오류투성이의 구약성서를 믿는 어리석고 혐오스러운 존재였습니다. 근대 철학의 대가들 - 볼테르(Voltaire), 바우어(Bruno Bauer), 바그너(Richard Wagner), 뒤링(Eugen Duhring), 드홀바흐(Baron d'Holbach), 피히테(Fichte), 칸트(I. Kant), 루소(Jean-Jacques Rousseau) 등 - 조차 사상의 진보와 갱신과 자유의 이름으로 유대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존속시켰습니다.
영향력 있는 프랑스 학자 에른스트 르낭(Ernest Renan)은 인류의 거대한 진보를 가로막고 서 있는 유대 지식인의 배타적인 경향과 광신주의를 지적하면서, 인류 문명의 사다리의 맨 꼭대기에 자리 잡은 인도-유럽인 혹은 ‘아리안’과 대조되는 인종적인 개념인 ‘셈족’이라는 말을 대중화시킨 최초의 사상가였습니다. 르낭은 셈족에게는 창의성이 떨어지고, 규율 감각이나 독립적인 정치조직을 수용할 능력이 모자란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셈족’은 신화, 서사시, 과학, 철학, 소설, 예술, 시민 생활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셈족은 ‘인간 본성의 열등한 집합체’라 단정했습니다. 르낭은 ‘셈족’의 결점을 창의성이 결여된 편협하고 원시적인 고대 히브리인에게서 추정했습니다.
한 마디로 17-18세기 유대인에 대한 계몽주의자들의 태도는 이중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종교적 관용이론이나 중상이론을 바탕으로 유대인을 한 인간으로 또는 경제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평가함으로써 유대인의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유대인을 종교집단으로는 인정할지언정 정치적으로 ‘국가 안의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으며, 유대인은 선천적으로 열등해 개량이 요구되는 존재로 보았다. 중세 기독교가 유대인을 강제로 개종(改宗)시키려 했다면, 근대의 계몽된 유럽사회는 유대인을 개량(改良)시키려 했습니다. 이로써 중세 기독교가 만들어낸 유대인에 대한 이미지는 세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히틀러의 ‘마지막 해결’
역설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비판은 오랫동안 유대교를 비판해온 기독교의 힘이 약해진 세속화와 근대화의 시대에 소생하여 새롭게 성장했습니다. 새로운 반유대주의의 이념이 새 시대에 적합한 세속화된 옷을 입고 피어났습니다. 진보-자유사상가들은 유대교의 불관용과 비역사적 아집 혹은 유대인의 고립주의적 배타주의를 공격했고, 사회주의자들은 유대인을 ‘자본주의 정신’의 화신(化身)이라고 비난했으며, 민족주의자와 인종주의자들은 인류에게 퇴보를 가져다주는 ‘외부인’과 ‘셈족’ 혈통의 특성을 유감스러워했고, 보수주의자들은 유대인이 유럽사회에서 영구적인 사회불안과 혁명적인 전복을 꾀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근대 철학자들로부터 합동 세례를 받고, 심각한 경제 불황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자라난 히틀러와 나치는 유대인의 영적 구원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해로운 영장류에 가까운 유대인의 생물학적 결함과 인종적 특성은 이들에게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영향은 자연에 대한 반자연의 승리며, 건강에 대한 질병의 승리며, 지성에 대한 본능의 승리를 의미했습니다. 생물학적 자연적 인종주의는, 유대인 개개인의 사회적 배경이나 신앙, 정치적 신념이 무엇이든지 간에, 모든(all) 유대인을 측정하는 마지막 제재규약이 되었습니다. 히틀러는 단정적으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유대인은 결코 독일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는 될 수 있다. 만약 유대인이 독일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자기 속에 있는 유대인 됨을 포기해야한다. 불가능하겠지만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진정으로 독일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첫째는 혈통 때문이요, 둘째는 성격 때문이요, 셋째는 자신의 의지 때문이요, 넷째는 그의 행동 때문이다.1)
나치는 반유대주의적 프로그램을 단계적으로 이행해 나갔습니다. 유대인에 대해 법적 식별, 토지 몰수, 강제 이주, 그리고 대량 멸절을 위한 강제적 게토화(ghettoisation) 등의 조처를 취해나갔습니다. 1935년에 제정된 뉘른베르크 법 - 1935년 9월 15일에 제정된 니치 독일의 법으로, 모든 유대인의 정치적 권리를 박탈했습니다. 독일 국민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해 유대인은 비유대인과 결혼할 수 없다는 조항이 포함되었습니다. - 같은 유대인 발본 방책은 독일인과 유대인 사이의 격리를 효과적으로 수행해 냈습니다. 줄리어스 스트레이커의〈데어 슈튀르머Der Sturmer〉같은 신문은 독일인에게 국제적인 유대인의 음모와 유대인과의 성적 접촉을 통한 인종적 오염을 경고했으며, 유대인의 사업 활동을 보이콧할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했습니다.
1938년 11월 ‘수정의 밤’(Kristallnacht) - 수정의 밤이란 유대인에 대한 독일의 대학살이 사실상 시작된 날로써 깨진 유리의 무수한 파편들이 아침 햇살에 수정처럼 빛을 발한 것에서 유래한 말이며, 이는 어둠 속에서 저질러진 만행을 역설적으로 전해줍니다. 이것은 현대 독일사에서 반유대주의가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작동한 날입니다. - 은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자행된 폭력이었습니다. 수백 명의 유대인이 살해되거나 부상당했으며, 독일에 있는 모든 회당과 많은 유대인 가게가 불타거나 파괴되었으며, 3만 명 이상의 유대 남자가 체포되어 수용소에 보내졌습니다. 독일 내에서 유대인에 대한 테러와 조롱은 미쳐 날뛰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마지막 해결’은 반유대주의의 자생적인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3제국에 의해서 고도로 조직화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냉혹한’ 조력자들과 빳빳한 제복을 입고 철 십자 완장을 찬 수천 명의 고급 관료들, 산업가, 법률가, 의사, 엔지니어, 회계사, 은행가, 사무원, 철도 공무원, 그리고 일반 노동자들의 협조와 조력으로 이룩해 낸 업적이었습니다. 역사가 힐베르크(Paul Hilberg)가 지적한대로, 이 파괴의 기계장치는 나치 독일 같이 잘 조직화되고 고도로 발달된 기술을 가진 나라, 그리고 나치 친위대(SS) 같은 완전한 지배와 통제가 가능한 전체주의적 수단을 가진 나라에서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나치의 반유대주의야말로 유대인을 서서히, 그러나 완전하게 비인격화(depersonalisation)하고 비인간화(dehumanisation)는 데 가장 성공했습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어떻게 나치가 수백 만 명의 유대인을 죽일 수 있었는지? 그것은 유대인을 ‘증오심’ 없이 죽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증오심으로 사람을 죽이면 몇 십 명밖에 못 죽입니다. 쉽게 지치기 때문입니다. 나치는 유대인을 여기(심장)가 아닌 여기(머리)로 죽였습니다.
(연쇄살인을 해 온 유영철은 불우했던 어린시절과 교도소 복역 후 소외감과 열등감으로 시작한 살인을 즐겼습니다. 잡히지 않았다면 더 많은 이들을 죽일 수 있었을 텐데... 하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치의 지독한 살충제와 독가스 속에서도 멸절(滅絶)되지 않고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시온주의라는 이름의 강력한 새로운 유전자를 배양하여 반유대주의라는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했습니다. “반유대주의가 시온주의를 낳았다.” 다시 말해서 시온주의는 반유대주의가 낳은 역사의 산물입니다. 시온주의는 각 시대의 환경마다 자신의 모양을 달리 하고 나타난 반유대주의의 악질적인 변종 세균의 공격에도 꺾이지 않고 급기야 유대국가, 즉 이스라엘을 탄생시켰습니다. (현대 이스라엘을 반유대주의 속에서 살아남은 희생자들의 문제의 해결책으로 보느냐 유대민족 국가의 부활로 보느냐에 따라 국가의 성격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1897년 시온주의의 아버지 헤르츨(Theodor Herzl)이 선언한 “팔레스타인에 공법(公法)으로 보장되는 유대민족을 위한 고향을 세운다.”는 시온주의 선언과 1917년 영국의 밸푸어 선언에서 행한 유대국가의 건립이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생존권을 침해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한다.”는 선언 사이에 상이점이 발견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이 시온주의자들에게는 약 2,000여 년의 방랑생활을 청산하고 과거 조상들이 살던 땅으로 돌아와 국가 없는 민족의 설움을 씻는 명예 회복으로 받아들였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소유했던 토지를 빼앗기고 그 땅에서 쫓겨남으로써 새로운 방랑과 수난이 시작된 식민주의로 이해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1947년 11월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와 팔레스타인 국가를 각각 둔다.”는 UN의 분할 안은 처음부터 팔레스타인 분쟁의 불씨를 남겨 둔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전자 변형을 거쳐 태어난 생물의 유전자도 유전되는 것일까요? 시온주의의 씨앗은 자신이 성장한 서구 세계의 반유대주의의 거친 토양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식(移植)되어 뿌리를 내린 팔레스타인 땅에서도 피를 먹으며 자라나 무쇠처럼 억센 나무로 자랐습니다. 탱크처럼 강해진 이스라엘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와 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이슬람 반유대주의자들의 말을 빌리면, 역사의 피해자가 이제는 역사의 가해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교활하고 비밀스럽고 사악한 ‘샤일록’으로 구현되었던 유대인의 이미지가 이제 팔레스타인의 인권을 탄압하는 잔인한 근육질의 ‘람보’로 뒤바뀐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유대인을 박해한 나치’와 ‘팔레스타인을 박해하는 유대인’이 동일시되고 있으며, 반유대주의와 시온주의 사이에 이념적 정치적 인종적 등식이 성립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희생자에서 가해자로 자리를 옮긴 유대인들이 국제사회에서 인종차별주의자로 취급받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1975년 11월 UN은 시온주의를 인종차별주의와 동일시하는 결의안(3374호)을 통과시킨바 있습니다. 이 결의안은 1991년 철회되었다가 2001년 아프리카 더반에서 열린 UN 반인종주의 회의에 상정되어 재차 거론된바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이스라엘의 보이콧으로 이슬람 국가가 발의한 결의안은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역사의 불가해한 역설이 존재합니다. 역사가는 어제까지 피해자였던 그들이 가해자로 변해버린 이 소름끼치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역사의, 증오의 불가해한 변증법을 어떻게 해명할 수 있단 말입니까? 토인비의 말대로 “인간 생활 속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은 예전에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위협당하는 생존권을 위해 또 다른 초강력 유전자를 배양해가고 있는 팔레스타인 무장 저항 단체인 하마스의 자살폭탄 실험실에서는 과연 어떤 괴물(프랑켄슈타인)이 탄생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아니, 어떤 귀추를 목격하게 될지 솔직히 말해 두렵습니다.
(제가 이창동 감독의 우리 영화〈박하사탕〉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 영화가 우리 사회의 한 평범한 사람이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는 과정, 아니 거꾸로 가해자로 변해버린 자신의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개탄하며 차라리 피해자였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타락한 사회에서는 아무도 완전히 결백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입증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반유대주의는 기억과 편견의 역사의 긴 흐름 속에서 주변의 사회적 온도와 문화적 습도를 갖춘 정치적 환경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변형되어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로마 시대는 사회적으로, 초기 기독교는 신학적으로, 중세 기독교는 보다 종교적인 방식으로, 근대 유럽에서는 경제적 인종적으로, 아랍세계에서는 정치적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반유대주의의 변형이 절정에 달해 홀로코스트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중요한 문제는 집단적 기억의 체계이며, 여기에 개입된 정치의 차원입니다. 기억의 정치란 곧 기억의 조작, 정치적 신화의 창조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가 끼어들어 기억을 조작함으로써 집단적 망각, 진실의 은폐 축소 과장, 기억의 집단적 왜곡이 생겨납니다. 따라서 문제의 본질은 기억과 편견 또는 폭력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것들을 정당한 것으로 조작하는 이데올로기적 체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반유대주의는 인간의 본질적인 심리 구조도, 불특정 다수를 차별 없이 공격하는 세균이나 바이러스도 아니며, 전염성이 높고 치료가 불가능한 사회적 질병의 일종도 아닙니다. 기억과 편견과 폭력은 결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보복의 악순환, 폭력의 악순환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이란 말입니까? 결코 화해할 수도, 양립될 수도 없는 이질적인 두 집단 사이에 벽을 쌓을 것입니까 다리를 놓을 것입니까? 아직도 팔레스타인 땅에서 계속되고 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갈등과 보복, 피의 현실은, 유대인의 눈에는 미완성의 유대국가의 생존과 안보를 위해 불가피한 조처(보복)로 비칠지 모르나, 타인의 눈에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해버린 타락한 유대인을 환기시킬 뿐입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샤론 정부의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잘못된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며, 아울러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 특히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적인 친이스라엘 중동정책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최근 세계화하고 있는 새로운 반유대주의와 반미주의 사이에는 분명히 구조적인 유사성이 있습니다. 반유대주의의 뿌리가 전혀 없던 우리 사회에서도 최근 진화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적 경향은 19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불거진 반미감정과 9.11 테러 이후 급속도로 퍼져나간 이슬람에 대한 동정적인 이해,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진상 조사,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고, 불공정한 한미행정협정(SOFA), 노무현 정부의 대미 자주권 선언, 이라크 전쟁 및 파병 반대 촛불집회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반미주의가, 중동 문제와 관련해서 언제나 미국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고 있다는 생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반유대주의적 성향이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계적으로 미국에 대한 증오심이 증대되는 만큼 유대인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미움이 증대될 것이며,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현대 이스라엘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히브리어를 부활시켰으며, 굉장한 경제력으로 나스닥에도 진출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루에도 수백 명의 테러 배후 주모자와 폭탄 제조 기술자를 살해할 수 있습니다. 모사드는 그들이 어디 숨어있는지 정확하게 찾아 낼 수 있는 정보력과 그들을 정확하게 쏴 표적 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기술과 첨단무기, 그리고 잘 훈련된 병사들이 있습니다. (실상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총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법입니다. 기운을 잃은 영혼은 마음의 평화를 잃기 때문입니다. 비폭력 평화 운동가 간디는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서 있는 영국군인에게 다가가 ‘자네는 이 작고 늙은 노인이 두렵나?’고 물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이 땅에 나라를 세운 이유였습니까? 이스라엘은 새로운 첨단 무기를 개발하고 컴퓨터 보안 프로그램과 미사일 방어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지난 2,000년 동안의 긴 박해와 나치의 학살에서도 살아남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처럼 고통 받고 있는 ‘뭇 민족의 빛’이 되기 위해 선택되고 살아왔습니다(시편 37:6, 50:2; 이사야서 42:6, 49:6, 62:1. cf. 마태복음서 5:14). 그런데 이제 실패해 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온’이 고통 받는 지구의 소수 민족에게 새로운 정신의 북극성으로서 인류 구원과 인간성 회복의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라지만(사실 이것이 히브리 성서에서 “이집트에서 고난 받는 너희를 내가 이끌어 내어 .....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출애굽기 3:17)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 고백이 아닙니까? 유대인들이 고백하는 ‘고통 받는 자들의 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아랍-팔레스타인과의 이러한 갈등과 충돌이 계속되는 한 시온주의 이념이 모든(all) 고통 받는 민족이 궁극적으로 추구할 만한 보편적인 가치로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문은 오늘날 초강대국 미국과 힘 있는 자들에게 동시에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의 미워하기와 미움받기의 비극적인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야고보서 3:13-18)을 자세히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생활을 해서,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파당심이 있거든, 여러분은 헛되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 이것은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가 아니라, 세속적이고 육욕적이고 악마적인 것입니다. 시기심과 파당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더러운 행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결(성결)하고, 다음으로 평화(화평)스럽고, 친절(관용)하고, 온순(양순)하고, 자비(긍휼)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편벽)과 위선(거짓)이 없습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
또, 유대인 하시딤에게서 전해 내려오는 다음과 같은 선문답 같은 이야기를 통해 하나의 깨달음은 얻을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숲에서 길을 잃고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빠져나갈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루가 지났습니다. 그는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쪽에서 어떤 사람이 걸어왔습니다. 그는 그 사람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하느님, 이 사람을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보세요, 나 역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입니다. 이 길로는 가지 마십시오. 내가 바로 거기서 왔거든요.”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잠언10:12)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偏見)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偏僻)되이 하지 말며”(딤전 5:21)
“교회가 부흥하려면 담임목사가 폐결핵을 앓아야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반세기 동안 영락교회를 이끌어 온 한경직 목사님이 그러했고, 충현교회의 김창인 목사님과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가 그랬습니다. (요즘 대형교회 목사님의 상당수는 암에 걸려 투병 중입니다.) 목사가 아프면 교인들이 목사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기도하게 되고, 합심하여 열심을 내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하는 듯 싶습니다. 그러나 건강한 사람에게는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게 일반적입니다. 아프다는 것이 당사자에게는 참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앓고 있는 이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과 교훈은 상대적으로 적지 않다는 점에서 역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역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오늘날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아픈 사람, 아픈 사회, 아픈 민족이 참 많습니다. 눈을 돌리면 아주 아프지만 치료받을 돈이 없어 죽어가는 사람들도 참 많고, 눈만 뜨면 테러에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들에 대한 지구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고무적인 일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왜 고통을 받아야 하는가?” “누가 이들을 아프게 하는가?” 에 대한 질문 없이는 아픈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절반 밖에 치유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아픈 이들에 대한 애정’과 함께 ‘이들을 아프게 한 자들에 대한 분노’가 균형을 이룰 때 문제 해결의 공의는 구현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에는 반드시 관점이 충돌하게 됩니다. 피해자는 무고한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하게 되고, 가해자는 미움 받을 짓을 했으니 미움을 받는 건 싸다는 입장이 맞섭니다. 비록 미워하는 모든 이유가 타당할 필요도 없고, 또 타당하지도 않다 하더라도, 가해자 없는 피해자가 있을 수 없으며 미움 받을만한 일을 하지 않고는 미워할 자 또한 있을 수 없으니, 미움받기와 미워하기는 등이 서로 붙은 샴쌍둥이처럼 묘한 방식으로 결합되어있습니다. 경우야 어떻든 미워하기 시작하면서 인생은, 사회는 불행해지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당사자가 아닌 중립적인 입장에서 편견 없이 이 둘의 관계를 판단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 점에서 고난이란 객관화하거나 일반화하기에는 참을 수 없이 가볍고, 주관화하거나 특수화하기에는 견딜 수 없이 무거운 문제다. 여기서 관점의 복잡성이 자리합니다.
더더욱 곤란한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 사이의 구별이 거의 불가능할 때, 즉 역사에서 한 때 피해자였던 이들이 이제는 가해자가 되어버린 그런 혼란스러운 사실을 역사에서 만나게 될 때입니다.
가장 오래된 증오
인류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폭력이라고 일컬어지는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 즉 홀로코스트(Holocaust)는, 사실 따지고 보면, 아주 사소한 미움과 편견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미워하기라는 날줄과 미움받기라는 씨줄로 얽힌 채, 아주 오랜 기간 동안 발전하고 변형돼온 반유대주의의 변이(變異) 과정을 통해 일어난 일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오랜 진화론적 과정을 통해 비로소 인류가 탄생했다는 가설보다 더 복잡합니다. 최근 자연과학이 발견한 복잡계(complex system) 이론에 따르면, “북대서양의 나비 한 마리의 날갯짓이 태평양에서 거대한 태풍을 만들 수 있다.”고 합니다. 소위 반유대주의(Antisemitism)라는 이름이 낳은 인류 최대의 비극도 따지고 보면 유대인에 대한 보잘것없는 기억(記憶)과 대수롭지 않던 편견(偏見)이 낳은 역사상 ‘가장 오래된 증오(the Longest Hatred)’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에 대한 미움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아주 먼 옛날 어떤 사람이 일종의 그릇된 생각, 즉 ‘유대인은 나쁜 놈’이라는 생각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 편견은 오랫동안 여러 사람들에게 전염되어 집단적 기억(collective memory), 즉 ‘유대인은 다 나쁜 놈’이라는 고정관념을 만들었습니다. 그 고정관념은 ‘유대인 없는 세상에서 살면 좋겠다.’는 하나의 이미지와 신앙이 되어버렸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객관성을 띤 하나의 이론으로 발전하며 기구화 되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반유대주의는 하나의 사실(a fact)과 하나의 이미지(an image) 사이에서 작용한다. 그래서 반유대주의는 실체로 이해하기에는 너무 추상적이고, 허상으로 보기에는 너무 구체적입니다. 예를 들어 셰익스피어의《베니스의 상인》에 등장하는 샤일록이라는 생생한 인물을 통해 구현된 유대인의 이미지는 모든 유대인을 샤일록처럼 이해하고 해석하게 만듦으로써 유대인을 악마화한 사회의 기억을 영속화했습니다.
이러한 신앙은 오랜 세월 동안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며 인간의 기억이라는 유전자 속에 흡수-저장되어 있다가 적절한 사회적 온도와 문화적 습도를 갖춘 정치적 토양과 만나면서 가공할 만한 힘을 가진 괴물 - 이 괴물은 시대마다 모양을 달리하지만 그 본질은 하나입니다. - 로 탄생하여 역사를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어느 날 그 같은 신앙을 가진 콧수염 달린 이가 나타나,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과 힘을 합쳐,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미명하에 유대인을 모두 멸절(滅絶)시켰습니다. 해충(害蟲)에 약을 치듯이.
반유대주의의 다양한 얼굴들
“유대인은 천성적으로 또는 역사적으로 악하며 열등하다고 여기는 일체의 태도와 행동”이라 정의할 수 있는 반유대주의는 하루아침에 탄생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2,000살도 넘은 늙은 망령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괴물처럼 출현한 돌연변이가 아닙니다. 반유대주의는 끈질긴 생명력(生命力)과 놀랄만한 유연성(柔軟性)과 뛰어난 융통성(融通性)을 갖고, 고대에서부터 중세를 거쳐 현대에 이르는 긴 역사를 관통해 오늘날까지 살아 활동하고 있습니다.
반유대주의가 태어난 곳은 신화가 지배하던 그리스-로마의 땅이었고, 그것이 젖을 먹고 자란 곳은 절대 신앙을 자랑하던 기독교 천년 왕국이었으며, 마침내 그것은 ‘위대하고 순수한 피’를 가진 아리안의 독일에서 ‘악의 꽃’을 피웠습니다.
그리스-로마인이 유대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유대인으로서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이번에는 기독교도가 말했습니다. “너는 우리와 함께 살 권리가 없다.” 마지막으로 히틀러가 말했습니다. “너는 살 권리가 없다.”
반유대주의의 출발은 디아스포라 세계에서 소수자로 살아가던 유대인들의 독특한 신앙 - 유일신 신앙으로 대표됩니다. - 과 삶의 방식 - 안식일 준수나 까다로운 음식법, 타민족과의 결혼 금지 등 - 때문이었습니다. 유대인의 남다른 생활방식과 외양(外樣)은 다수의 비유대인들의 눈에 거슬릴 만큼 독특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다수의 외집단에 협력하지 않는 소수의 내집단의 배타적 태도라 눈 흘겼습니다. (여기에 반유대주의의 ‘보편성’이 자리합니다. 즉, 사회 심리학적으로 말해서 반유대주의란 소수자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설명으로, 여기서 미움은 타문화의 환경 속에서 자기 동일성을 지키며 살아가려는 소수자(minority)의 문제로 일반화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타문화 속에서 살아온 여러 민족 중에서 왜 유독 유대인에 대한 증오는 항구적(恒久的)이며, 심지어 유대인이 살지 않는 지역에서조차 극단적인 형태를 띠고 있는가 하는 문제의 ‘특수성’이 자리하게 됩니다. 또한, 유대인에 대한 반감의 정도가 모든 나라와 문화에서 동일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회 심리학적 이론은 설득력을 잃게 됩니다.) 기원전 3세기 이집트의 사제 마네토(Manetho)와 아피온(Apion), 그리스의 몰론(Apollonius Molon)과 로마의 타키투스(Tacitus) 등은 바로 ‘유대인들의 반사회적 경향’을 지적한 이들이었습니다. 역사가 타키투스는 자신의 책《역사Historiae》(5.5)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유대인)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 대해 오직 증오심과 불화만을 드러내고, 따로 앉아 식사하고, 따로 잠을 자고, 색욕이 강한 종족이면서도 외국 여인들과는 성교를 금하며, 그들 사이에는 법이 아닌 것이 없을 정도다.”
기독교 세계는 그리스-로마 시대가 만들어놓은 유대인에 대한 배타적 분리주의와 사회적 반감을 거의 고스란히 이어받아 그 토대위에 새로운 신학적 편견과 차별을 쌓아 올렸습니다. 그것은 1세기 후반 예루살렘 성전 멸망 이후 유대교와 분리되는 과정에서 ‘누가 하나님의 합법적인 상속자인가’ 하는 피할 수 없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논쟁 과정에서 유대인은 ‘하나님의 아들(그리스도)을 살해한 자’라는 교회의 고정관념이 자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여기서 제가 강조하는 것은 유대인이 그리스도를 죽였다는 주장이, 실제로는 몇몇 유대인만이 예수를 죽이는 데 가담했을 뿐임에도 모든 세대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예수를 죽인 자’라는 딱지를 붙임으로써 그들을 어떤 정치적 ? 종교적 목적으로 이용하거나 공격하려 했다는 점입니다. 어떤 사실을 지나치게 일반화하거나 단순화시킬 때 발생할 수 있는 오류이며, 더욱 심각한 것은 여기에 개입된 정치적 의도입니다.)
이러한 신학은 기독교 교부(敎父)들에 의해 일차적으로 복음서에서, 그리고 사도 바울의 서신에서 그 근거를 찾아 발전되어 나갔습니다. 교부들은 ‘육을 따르는 이스라엘’은 버림받았으며, 젊은 기독교 교회야말로 하나님의 언약의 진정한 상속자인 ‘참 이스라엘’(verus Israel)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에 대한 하나님의 낡은 선택과 옛 약속은 파기(破棄)되었으며, 이제 교회가 하나님의 ‘새 언약’을 상속받아 ‘참 이스라엘’로 탄생하게 되었다는 교리가 그것입니다. 교부들의 주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하는 제도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하면서 유대인에 대한 교회의 박해가 가시화되었습니다.
388년 메소포타미아에서 일어난 유대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의 폭력사태는 유대교 회당에 방화가 일어나고 유대인에 대한 학살로 이어졌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유대인에 대한 이미지와 박해의 정도는 그다지 ‘야만적’이지는 않았습니다. 결정적인 변화는 유대인 대량학살을 몰고 온 제1차 십자군 원정(1096년)을 통해서였습니다. 제1차 십자군의 지도자 고드푸루아 드 부용(Godefroi de Bouillon)은 그리스도의 피 값을 이스라엘에 갚자며 “단 한 사람의 유대인도 살려두지 말 것”을 명령했고, 유대인을 그리스도의 적으로 간주한 십자군들은 사명감을 갖고 그 일을 감행했습니다. 십자군의 잔인한 대량학살은 유대인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날까지 유대인들이 기독교를 배척하고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으려하는 까닭은 신학적인 데 그 이유가 있다기보다는 홀로코스트를 포함한 역사적인 경험 때문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어 보입니다.)
유대인은 기독교인의 종이다”
십자군 운동은 유대인의 불신앙과 낮은 사회적 지위를 일깨움으로써 사회적 이탈과 지적 회의에 빠진 중세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우월한 지위와 신앙을 입증함으로써 기독교 세계의 통합을 꾀하려했던 것입니다. 이로써 “유대인은 기독교인의 종이다.”라는 유명한 명제가 탄생합니다. 본래 아우구스티누스의 교리였던 이 명제는 1179년 제3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교회법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중세 대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조차 유대인은 죄로 말미암아 ‘영구적인 노예 상태’에 이르게 되었음을 확증했으며,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기독교인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곧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태복음서 27:25)라고 말한 자들이라며, 그리스도를 처형자의 손에 내줌으로써 벌 받을 짓을 한 유대인들이야말로 기독교인의 노예일 뿐이라 강조했습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유대인은 특별히 정해진 복장 - 둥근 모자를 쓰거나 옷에 노란색 유대 배지를 달게 했습니다. - 을 하고 다닐 것을 성문화했으며, 유대인의 교회 출입 금지와 기독교 명절에는 거리에 나와 걸어 다니는 것조차 금했습니다.
이러한 때에 영국 노리치에서 일어난 한 기독교 소년의 살해 사건(1144년)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축제인 유월절에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빵인 무교병을 기독교인의 피에 찍어 먹기 위해 저지른 짓이라는 소문이 퍼지면서 ‘성체(聖體)를 모독한 유대인’에 대한 파문으로 이어져 핍박과 추방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사실상 이러한 판타지는 당시 중세 유럽의 흡혈귀 전설 및 민담과 연결하여 중세의 미술, 음악, 문학, 성극, 설교 등을 통해 정형화해 나갔으며, 아울러 제4차 라테란 공의회(1215년)에서 결정된 화체설(化?說) - 성례에서 사용되는 빵과 포도주는 입에 들어가는 순간 예수의 진짜 살과 피로 변한다는 중세 기독교의 교리 - 등과 결합하여 상당한 설득력을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1347~1360년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흑사병은 ‘유대인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소문을 낳으면서 성난 군중으로 하여금 수천 명의 유대인을 살해하게 했습니다. 이제는 ‘신을 살해한’ 유대인의 이미지에 악마의 뿔과 꼬리를 단 셈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기독교인의 머릿속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확고한 고정관념으로 자리 잡은 것은 바로 고리대금업자의 이미지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이 고리대금업자라는 주장은, 실제로는 몇몇 유대인만이 고리대금업을 하고 있을 뿐임에도 모든 유대인에게 ‘고리대금업자’라는 꼬리표를 붙임으로써 그들을 사회 경제적으로 공격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런 이데올로기적 망상과 정치적 음모는 종종 정당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그것은 실제로 사회적 동력으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당시 유대인은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고, 또 주로 무역업에 종사하면서도 길드에서 배척받았습니다. 상황이 이러했으므로 원활한 경제활동을 위해 유대인이 고리대금업으로 손을 뻗는 경우가 많아졌는데, 당시 교회는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었으므로, 왕실을 비롯한 일부 기독교 부자들은 유대인 고리대금업자들과 거래하면서 상호 이익을 주고받았었던 것입니다.
이미 신을 살해한 무신론자로 낙인찍혀 있던 유대인들은 이제 가난한 이들의 돈을 빼앗는 흡혈귀(吸血鬼)로 묘사되기 시작했으며, 이는 토지 중심의 유럽 봉건 사회에서 반유대주의가 보다 사회 경제적인 성격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는 증거입니다. 대중들의 마음속에 유대인은 점차 은행가, 환전가, 기독교의 땅에 침투해 기생하는 착취가 등 돈과 경제의 기수라는 이미지로 자리매김해 갔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에 대한 중세의 고정관념이었으며, 이것은 근대 자본주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유럽의 반유대주의사에서 운명적인 역할을 담당하게 됩니다.
종교 개혁자 루터 역시 유대인에 대한 중세적 신화와 생각을 고스란히 받아들였습니다. 1543년에 쓴〈유대인과 그들의 거짓말에 관하여〉에서 루터는 유대인을 우물에 독을 탄 자, 제의적 살해자, 고리대금업자, 악마로 변신한 기독교 사회의 기생충 등으로 부르며, 유대인에 대한 차별과 박해를 정당화했습니다.
첫째, 그들의 회당이나 교회는 불태워져야 하며, 불태워지지 않은 것들은 먼지로 뒤덮어 아무도 타다 남은 찌꺼기나 돌멩이조차 볼 수 없게 해야 한다. 이런 일은 하나님께 우리가 그리스도인임을 보여드리기 위해서 하나님과 기독교의 명예를 걸고 행해져야 한다. 나아가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을 저주하고 모독하고 거짓말하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에게 관용을 베풀거나 묵과하지 말아야 한다. …… 둘째, 그들의 집을 부수고 파괴해야 한다. 회당에서 하는 짓을 거기서도 행하기 때문이다. 그들이 큰소리치듯이 그들이 우리 땅의 주인이 아니라 가여운 포로임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한 지붕 밑이나 한 마구간에 집시처럼 집어넣어야 한다. 셋째, 그들에게서 기도서나 탈무드 같은 우상숭배와 거짓말과 불평을 가르치는 책들을 빼앗아버려야 한다. 넷째, 랍비들에게 더 이상 가르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 다섯째, 유대인은 귀족도 공무원도 상인도 아니기 때문에 도시지역에서 비즈니스를 하지 못하도록 유대인에게 여권 발급이나 여행 권한을 엄격하게 금지해야 한다. 그들을 집에 머물도록 하라. 여섯째, 고리 대금업을 중단하도록 해야 한다. 모든 현금이나 은금 같은 값어치 나가는 것들을 빼앗아 보관소에 넣어 두어야 한다. 그들의 재산은 고리 대금업을 통해 우리에게서 훔치거나 빼앗아 간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악한 돈은 하나님의 축복과는 반대로 저주받은 것이어서, 다시 선한 용도로 사용되어야 한다. …… 일곱째, 젊고 강한 유대인은 도리깨질, 도끼질, 괭이질, 삽질, 실톳대질, 물레질을 시켜, 아담의 자손에게 요구했던 것처럼 콧등의 땀으로 빵을 벌어먹도록 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를 이방인(goyyim) 취급하여 우리의 이마에 땀을 흘리게 하고, 자신들은 게으름 피며 화롯불 곁에 앉아 능청을 떨고 있던 것이 타당하지 않았음을 보여줘야 한다. …… 우리는 교활하며 게으른 뼈들을 우리 제도 밖으로 추방해야 한다. 그들이 우리에게 봉사하고 우리를 위해 일할 때, 우리의 아내와 자식과 종과 가축이 해를 입을까 염려하기 때문이다. …… 관대한 자비가 그들을 착하게 만들기는커녕 자꾸만 나쁘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들을 없애 버려야 한다. …… 요약하면 당신의 영토 안에 유대인을 가진 군주와 귀족들이여, 만약 내 충고가 당신에게 적합하지 않은 것이라면, 당신과 우리가 견딜 수 없는 이 무거운 짐, 즉 유대인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보다 나은 방법을 찾을 찌어다.
더러운 피, 열등한 유대인
유대인의 피가 세례를 통해서도 깨끗해 질 수 없는 유전적 결함을 안고 있다는 최초의 주장은 15세기 스페인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평생을 유대인 개종을 위해 살아온 도미니크회 소속의 수도사 페레르(Vincente Ferrer)가 처음으로 제기한 소위 ‘나쁜 피(mala sangre)’ 이론은, 비록 그것이 나치의 인종주의와는 성격이 달랐지만, 그동안 지속돼온 종교적 반유대주의를 축소시키는 대신 새로운 형태의 ‘인종적’ 반유대주의를 탄생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고상한 혈통을 가진 ‘순수한’ 기독교인과는 달리 ‘더러운 피’를 가진 유대인들에게는 비록 그들이 기독교로 개종했다손 치더라도 대학, 성직 및 공직의 자리에 앉을 수 없었으며, 결국 1492년 페르디난도 왕과 이사벨라 여왕의 칙령에 따라 모든 유대인이 스페인 왕국에서 추방되고 말았습니다.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중세 기독교의 가치관을 붕괴시키고 세속주의와 개인주의를 새로운 사회 가치로 환원시키면서 ‘종교와 정치의 분리’라는 원칙이 세워짐과 동시에 유대인과 기독교인 사이의 종교적 차별이 수그러드는 듯 했습니다. 소위 계몽주의자들의 종교적 관용이론은 “모든 인간은 종교에 의해 판단되지 않으며 국가에 대한 유용성에 의해 판단된다.”는 중상(重商) 이론으로 발전하면서 유대인이 사는 곳마다 상업과 무역이 넘쳐나며 유럽의 경제 발전에 긍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이 인정되면서 ‘신을 살해한 백성’이라는 전통적인 증오심도 점차 누그러져갔습니다. 여기에 멘델스존(Moses Mendelssohn)이나 레싱(Gotthold Ephraim Lessing) 같은 유대인 계몽주의자들은 긍정적인 유대인의 이미지를 불어 넣어 주었다.
그러나 17~18세기 계몽주의 시대에 나타난 합리주의자들과 자연종교에 기초를 둔 급진적인 이신론(理神論, Deism)자에게 있어서 유대교는 여전히 인간의 이성을 무시하는 원시적인 종교며, 초자연적인 유일신을 신봉하는 유대인은 미신에 가까운 오류투성이의 구약성서를 믿는 어리석고 혐오스러운 존재였습니다. 근대 철학의 대가들 - 볼테르(Voltaire), 바우어(Bruno Bauer), 바그너(Richard Wagner), 뒤링(Eugen Duhring), 드홀바흐(Baron d'Holbach), 피히테(Fichte), 칸트(I. Kant), 루소(Jean-Jacques Rousseau) 등 - 조차 사상의 진보와 갱신과 자유의 이름으로 유대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존속시켰습니다.
영향력 있는 프랑스 학자 에른스트 르낭(Ernest Renan)은 인류의 거대한 진보를 가로막고 서 있는 유대 지식인의 배타적인 경향과 광신주의를 지적하면서, 인류 문명의 사다리의 맨 꼭대기에 자리 잡은 인도-유럽인 혹은 ‘아리안’과 대조되는 인종적인 개념인 ‘셈족’이라는 말을 대중화시킨 최초의 사상가였습니다. 르낭은 셈족에게는 창의성이 떨어지고, 규율 감각이나 독립적인 정치조직을 수용할 능력이 모자란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셈족’은 신화, 서사시, 과학, 철학, 소설, 예술, 시민 생활이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는 셈족은 ‘인간 본성의 열등한 집합체’라 단정했습니다. 르낭은 ‘셈족’의 결점을 창의성이 결여된 편협하고 원시적인 고대 히브리인에게서 추정했습니다.
한 마디로 17-18세기 유대인에 대한 계몽주의자들의 태도는 이중적이었습니다. 그들은 한편으로는 종교적 관용이론이나 중상이론을 바탕으로 유대인을 한 인간으로 또는 경제적 가치를 지닌 존재로 평가함으로써 유대인의 권리를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유대인을 종교집단으로는 인정할지언정 정치적으로 ‘국가 안의 국가’로 인정할 수 없다는 태도를 취했으며, 유대인은 선천적으로 열등해 개량이 요구되는 존재로 보았다. 중세 기독교가 유대인을 강제로 개종(改宗)시키려 했다면, 근대의 계몽된 유럽사회는 유대인을 개량(改良)시키려 했습니다. 이로써 중세 기독교가 만들어낸 유대인에 대한 이미지는 세속화되기 시작했습니다.
히틀러의 ‘마지막 해결’
역설적으로 유대인에 대한 비판은 오랫동안 유대교를 비판해온 기독교의 힘이 약해진 세속화와 근대화의 시대에 소생하여 새롭게 성장했습니다. 새로운 반유대주의의 이념이 새 시대에 적합한 세속화된 옷을 입고 피어났습니다. 진보-자유사상가들은 유대교의 불관용과 비역사적 아집 혹은 유대인의 고립주의적 배타주의를 공격했고, 사회주의자들은 유대인을 ‘자본주의 정신’의 화신(化身)이라고 비난했으며, 민족주의자와 인종주의자들은 인류에게 퇴보를 가져다주는 ‘외부인’과 ‘셈족’ 혈통의 특성을 유감스러워했고, 보수주의자들은 유대인이 유럽사회에서 영구적인 사회불안과 혁명적인 전복을 꾀하고 있다고 보았습니다.
근대 철학자들로부터 합동 세례를 받고, 심각한 경제 불황과 정치적 불안정 속에서 자라난 히틀러와 나치는 유대인의 영적 구원을 불가능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해로운 영장류에 가까운 유대인의 생물학적 결함과 인종적 특성은 이들에게 영원하고 불변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의 영향은 자연에 대한 반자연의 승리며, 건강에 대한 질병의 승리며, 지성에 대한 본능의 승리를 의미했습니다. 생물학적 자연적 인종주의는, 유대인 개개인의 사회적 배경이나 신앙, 정치적 신념이 무엇이든지 간에, 모든(all) 유대인을 측정하는 마지막 제재규약이 되었습니다. 히틀러는 단정적으로 이렇게 선언했습니다.
유대인은 결코 독일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아주 드물게는 될 수 있다. 만약 유대인이 독일인이 되기를 원한다면 자기 속에 있는 유대인 됨을 포기해야한다. 불가능하겠지만 최대한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진정으로 독일인이 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첫째는 혈통 때문이요, 둘째는 성격 때문이요, 셋째는 자신의 의지 때문이요, 넷째는 그의 행동 때문이다.1)
나치는 반유대주의적 프로그램을 단계적으로 이행해 나갔습니다. 유대인에 대해 법적 식별, 토지 몰수, 강제 이주, 그리고 대량 멸절을 위한 강제적 게토화(ghettoisation) 등의 조처를 취해나갔습니다. 1935년에 제정된 뉘른베르크 법 - 1935년 9월 15일에 제정된 니치 독일의 법으로, 모든 유대인의 정치적 권리를 박탈했습니다. 독일 국민의 순수한 혈통을 지키기 위해 유대인은 비유대인과 결혼할 수 없다는 조항이 포함되었습니다. - 같은 유대인 발본 방책은 독일인과 유대인 사이의 격리를 효과적으로 수행해 냈습니다. 줄리어스 스트레이커의〈데어 슈튀르머Der Sturmer〉같은 신문은 독일인에게 국제적인 유대인의 음모와 유대인과의 성적 접촉을 통한 인종적 오염을 경고했으며, 유대인의 사업 활동을 보이콧할 것을 적극적으로 장려했습니다.
1938년 11월 ‘수정의 밤’(Kristallnacht) - 수정의 밤이란 유대인에 대한 독일의 대학살이 사실상 시작된 날로써 깨진 유리의 무수한 파편들이 아침 햇살에 수정처럼 빛을 발한 것에서 유래한 말이며, 이는 어둠 속에서 저질러진 만행을 역설적으로 전해줍니다. 이것은 현대 독일사에서 반유대주의가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작동한 날입니다. - 은 ‘유대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리낌 없이 자행된 폭력이었습니다. 수백 명의 유대인이 살해되거나 부상당했으며, 독일에 있는 모든 회당과 많은 유대인 가게가 불타거나 파괴되었으며, 3만 명 이상의 유대 남자가 체포되어 수용소에 보내졌습니다. 독일 내에서 유대인에 대한 테러와 조롱은 미쳐 날뛰고 있었습니다.
히틀러의 ‘마지막 해결’은 반유대주의의 자생적인 폭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제3제국에 의해서 고도로 조직화된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냉혹한’ 조력자들과 빳빳한 제복을 입고 철 십자 완장을 찬 수천 명의 고급 관료들, 산업가, 법률가, 의사, 엔지니어, 회계사, 은행가, 사무원, 철도 공무원, 그리고 일반 노동자들의 협조와 조력으로 이룩해 낸 업적이었습니다. 역사가 힐베르크(Paul Hilberg)가 지적한대로, 이 파괴의 기계장치는 나치 독일 같이 잘 조직화되고 고도로 발달된 기술을 가진 나라, 그리고 나치 친위대(SS) 같은 완전한 지배와 통제가 가능한 전체주의적 수단을 가진 나라에서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나치의 반유대주의야말로 유대인을 서서히, 그러나 완전하게 비인격화(depersonalisation)하고 비인간화(dehumanisation)는 데 가장 성공했습니다.
여러분은 아십니까? 어떻게 나치가 수백 만 명의 유대인을 죽일 수 있었는지? 그것은 유대인을 ‘증오심’ 없이 죽일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증오심으로 사람을 죽이면 몇 십 명밖에 못 죽입니다. 쉽게 지치기 때문입니다. 나치는 유대인을 여기(심장)가 아닌 여기(머리)로 죽였습니다.
(연쇄살인을 해 온 유영철은 불우했던 어린시절과 교도소 복역 후 소외감과 열등감으로 시작한 살인을 즐겼습니다. 잡히지 않았다면 더 많은 이들을 죽일 수 있었을 텐데... 하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나치의 지독한 살충제와 독가스 속에서도 멸절(滅絶)되지 않고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시온주의라는 이름의 강력한 새로운 유전자를 배양하여 반유대주의라는 공격으로부터 자신들을 방어했습니다. “반유대주의가 시온주의를 낳았다.” 다시 말해서 시온주의는 반유대주의가 낳은 역사의 산물입니다. 시온주의는 각 시대의 환경마다 자신의 모양을 달리 하고 나타난 반유대주의의 악질적인 변종 세균의 공격에도 꺾이지 않고 급기야 유대국가, 즉 이스라엘을 탄생시켰습니다. (현대 이스라엘을 반유대주의 속에서 살아남은 희생자들의 문제의 해결책으로 보느냐 유대민족 국가의 부활로 보느냐에 따라 국가의 성격은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1897년 시온주의의 아버지 헤르츨(Theodor Herzl)이 선언한 “팔레스타인에 공법(公法)으로 보장되는 유대민족을 위한 고향을 세운다.”는 시온주의 선언과 1917년 영국의 밸푸어 선언에서 행한 유대국가의 건립이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생존권을 침해하지 않을 것을 분명히 한다.”는 선언 사이에 상이점이 발견됩니다. 그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독립이 시온주의자들에게는 약 2,000여 년의 방랑생활을 청산하고 과거 조상들이 살던 땅으로 돌아와 국가 없는 민족의 설움을 씻는 명예 회복으로 받아들였지만, 팔레스타인 사람들에게는 소유했던 토지를 빼앗기고 그 땅에서 쫓겨남으로써 새로운 방랑과 수난이 시작된 식민주의로 이해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1947년 11월 “팔레스타인에 유대국가와 팔레스타인 국가를 각각 둔다.”는 UN의 분할 안은 처음부터 팔레스타인 분쟁의 불씨를 남겨 둔 결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유전자 변형을 거쳐 태어난 생물의 유전자도 유전되는 것일까요? 시온주의의 씨앗은 자신이 성장한 서구 세계의 반유대주의의 거친 토양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식(移植)되어 뿌리를 내린 팔레스타인 땅에서도 피를 먹으며 자라나 무쇠처럼 억센 나무로 자랐습니다. 탱크처럼 강해진 이스라엘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와 해를 입히기 시작했다. 이슬람 반유대주의자들의 말을 빌리면, 역사의 피해자가 이제는 역사의 가해자가 되어 버렸습니다. 교활하고 비밀스럽고 사악한 ‘샤일록’으로 구현되었던 유대인의 이미지가 이제 팔레스타인의 인권을 탄압하는 잔인한 근육질의 ‘람보’로 뒤바뀐 것입니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유대인을 박해한 나치’와 ‘팔레스타인을 박해하는 유대인’이 동일시되고 있으며, 반유대주의와 시온주의 사이에 이념적 정치적 인종적 등식이 성립된 것입니다.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희생자에서 가해자로 자리를 옮긴 유대인들이 국제사회에서 인종차별주의자로 취급받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1975년 11월 UN은 시온주의를 인종차별주의와 동일시하는 결의안(3374호)을 통과시킨바 있습니다. 이 결의안은 1991년 철회되었다가 2001년 아프리카 더반에서 열린 UN 반인종주의 회의에 상정되어 재차 거론된바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과 이스라엘의 보이콧으로 이슬람 국가가 발의한 결의안은 채택되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역사의 불가해한 역설이 존재합니다. 역사가는 어제까지 피해자였던 그들이 가해자로 변해버린 이 소름끼치는 오늘의 현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이 역사의, 증오의 불가해한 변증법을 어떻게 해명할 수 있단 말입니까? 토인비의 말대로 “인간 생활 속에서 가장 비극적인 일은 예전에 고통을 당하던 사람들이 이번에는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위협당하는 생존권을 위해 또 다른 초강력 유전자를 배양해가고 있는 팔레스타인 무장 저항 단체인 하마스의 자살폭탄 실험실에서는 과연 어떤 괴물(프랑켄슈타인)이 탄생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아니, 어떤 귀추를 목격하게 될지 솔직히 말해 두렵습니다.
(제가 이창동 감독의 우리 영화〈박하사탕〉을 높이 평가하는 이유는 그 영화가 우리 사회의 한 평범한 사람이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는 과정, 아니 거꾸로 가해자로 변해버린 자신의 어찌할 수 없는 현실을 개탄하며 차라리 피해자였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타락한 사회에서는 아무도 완전히 결백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입증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반유대주의는 기억과 편견의 역사의 긴 흐름 속에서 주변의 사회적 온도와 문화적 습도를 갖춘 정치적 환경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변형되어 나타났습니다. 그리스-로마 시대는 사회적으로, 초기 기독교는 신학적으로, 중세 기독교는 보다 종교적인 방식으로, 근대 유럽에서는 경제적 인종적으로, 아랍세계에서는 정치적으로 작용했습니다. 그리고 20세기에 들어와서는 반유대주의의 변형이 절정에 달해 홀로코스트로 나타났습니다.
결국 중요한 문제는 집단적 기억의 체계이며, 여기에 개입된 정치의 차원입니다. 기억의 정치란 곧 기억의 조작, 정치적 신화의 창조와 같은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정치가 끼어들어 기억을 조작함으로써 집단적 망각, 진실의 은폐 축소 과장, 기억의 집단적 왜곡이 생겨납니다. 따라서 문제의 본질은 기억과 편견 또는 폭력 그 자체라기보다는 그것들을 정당한 것으로 조작하는 이데올로기적 체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반유대주의는 인간의 본질적인 심리 구조도, 불특정 다수를 차별 없이 공격하는 세균이나 바이러스도 아니며, 전염성이 높고 치료가 불가능한 사회적 질병의 일종도 아닙니다. 기억과 편견과 폭력은 결코 자연적인 현상이 아닙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보복의 악순환, 폭력의 악순환을 멈출 수 있는 방법이란 무엇이란 말입니까? 결코 화해할 수도, 양립될 수도 없는 이질적인 두 집단 사이에 벽을 쌓을 것입니까 다리를 놓을 것입니까? 아직도 팔레스타인 땅에서 계속되고 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갈등과 보복, 피의 현실은, 유대인의 눈에는 미완성의 유대국가의 생존과 안보를 위해 불가피한 조처(보복)로 비칠지 모르나, 타인의 눈에는 피해자가 가해자로 변해버린 타락한 유대인을 환기시킬 뿐입니다. 이에 대한 책임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 샤론 정부의 팔레스타인 문제에 대한 잘못된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며, 아울러 유일한 초강대국인 미국, 특히 부시 행정부의 일방주의적인 친이스라엘 중동정책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최근 세계화하고 있는 새로운 반유대주의와 반미주의 사이에는 분명히 구조적인 유사성이 있습니다. 반유대주의의 뿌리가 전혀 없던 우리 사회에서도 최근 진화하고 있는 이스라엘에 대한 비판적 경향은 1980년대 민주화 과정에서 불거진 반미감정과 9.11 테러 이후 급속도로 퍼져나간 이슬람에 대한 동정적인 이해, 그리고 한국전쟁 당시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진상 조사, 미군 장갑차에 의한 여중생 사망 사고, 불공정한 한미행정협정(SOFA), 노무현 정부의 대미 자주권 선언, 이라크 전쟁 및 파병 반대 촛불집회 등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반미주의가, 중동 문제와 관련해서 언제나 미국이 일방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고 있다는 생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반유대주의적 성향이 자리잡아가고 있습니다. 따라서 세계적으로 미국에 대한 증오심이 증대되는 만큼 유대인에 대한 새로운 형태의 미움이 증대될 것이며,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현대 이스라엘에는 힘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히브리어를 부활시켰으며, 굉장한 경제력으로 나스닥에도 진출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루에도 수백 명의 테러 배후 주모자와 폭탄 제조 기술자를 살해할 수 있습니다. 모사드는 그들이 어디 숨어있는지 정확하게 찾아 낼 수 있는 정보력과 그들을 정확하게 쏴 표적 살해할 수 있을 만큼의 충분한 기술과 첨단무기, 그리고 잘 훈련된 병사들이 있습니다. (실상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총을 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법입니다. 기운을 잃은 영혼은 마음의 평화를 잃기 때문입니다. 비폭력 평화 운동가 간디는 자신에게 총을 겨누고 서 있는 영국군인에게 다가가 ‘자네는 이 작고 늙은 노인이 두렵나?’고 물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들이 이 땅에 나라를 세운 이유였습니까? 이스라엘은 새로운 첨단 무기를 개발하고 컴퓨터 보안 프로그램과 미사일 방어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지난 2,000년 동안의 긴 박해와 나치의 학살에서도 살아남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유대인은, 자신들처럼 고통 받고 있는 ‘뭇 민족의 빛’이 되기 위해 선택되고 살아왔습니다(시편 37:6, 50:2; 이사야서 42:6, 49:6, 62:1. cf. 마태복음서 5:14). 그런데 이제 실패해 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온’이 고통 받는 지구의 소수 민족에게 새로운 정신의 북극성으로서 인류 구원과 인간성 회복의 희망을 보여주는 것이라지만(사실 이것이 히브리 성서에서 “이집트에서 고난 받는 너희를 내가 이끌어 내어 .....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올라가기로 작정하였다”(출애굽기 3:17)는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 고백이 아닙니까? 유대인들이 고백하는 ‘고통 받는 자들의 편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아랍-팔레스타인과의 이러한 갈등과 충돌이 계속되는 한 시온주의 이념이 모든(all) 고통 받는 민족이 궁극적으로 추구할 만한 보편적인 가치로 인정받기는 어려울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의문은 오늘날 초강대국 미국과 힘 있는 자들에게 동시에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가 유대인의 미워하기와 미움받기의 비극적인 역사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은 무엇이겠습니까?
오늘 본문(야고보서 3:13-18)을 자세히 읽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지혜 있고 이해력이 있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러한 사람은 착한 생활을 해서, 지혜에서 오는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나타내 보이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속에 지독한 시기심과 파당심이 있거든, 여러분은 헛되이 자랑하지 말고, 진리를 거슬러 속이지 마십시오. 이것은 위에서 내려오는 지혜가 아니라, 세속적이고 육욕적이고 악마적인 것입니다. 시기심과 파당심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온갖 더러운 행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위에서 오는 지혜는 먼저 순결(성결)하고, 다음으로 평화(화평)스럽고, 친절(관용)하고, 온순(양순)하고, 자비(긍휼)와 선한 열매가 풍성하고 편견(편벽)과 위선(거짓)이 없습니다. 정의의 열매는,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이 평화를 위하여 그 씨를 뿌려서 거두어들이는 열매입니다.”
또, 유대인 하시딤에게서 전해 내려오는 다음과 같은 선문답 같은 이야기를 통해 하나의 깨달음은 얻을 수는 있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숲에서 길을 잃고 혼자가 되었습니다. 그는 빠져나갈 길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하루가 지났습니다. 그는 당황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쪽에서 어떤 사람이 걸어왔습니다. 그는 그 사람에게 달려가 말했습니다. “하느님, 이 사람을 만나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때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보세요, 나 역시 길을 잃고 헤매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이것뿐입니다. 이 길로는 가지 마십시오. 내가 바로 거기서 왔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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