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욕심의 양면성과 가난한 욕심

야고보서 노은기............... 조회 수 1890 추천 수 0 2009.05.06 23:45:33
.........
성경본문 : 약1:15-16 
설교자 : 노은기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08.07.13주일설교 

2002년 정월 추운 어느 날,
창가에는 보슬비가 소리 없이 내리고, 설교자의 이야기가 조용하게 이어지는데 어느 중년부부가 안내자의 안내를 받으면서 의자에 앉았습니다. 그 부부는 잠시 회한에 젖더니, 눈물을 주르르 흘립니다. 세상풍파에 시달려 괴로워하던 그 얼굴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종교권력에 항거하다 지친 모습에서, 새 희망의 빛이 보입니다. 이제 됐다, 안도의 한숨이 나옵니다.

 이것은 저의부부가 7년 전 새길 교회를 찾아든 모습입니다.

 새길 교회를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성년이 지난 새길 교회의 한 중심에 서 있습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아직도 새 길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새 길의 영성이 무엇인가? 하고 방황하고 있다면, 그것은 어딘가 모자라는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넘치는 것 보다 모자람을 미덕으로 생각하신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래도 소외된 이웃을 위한 헌신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꺼져가는 한국교회에 새 소망의 빛을 제시한다면, 이젠 안주에서 벗어나 주님이 가신 고난의 여정으로 떠나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그 길을 따라서 말입니다.

 ‘욕심의 양면성과 가난한 욕심’
 오늘의 주제를 화두로 제시하면서 제가 살아가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아시다시피 인천 공항 서쪽에 있는 용유도라는 작은 섬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문을 잠그지 않아도 되고, 들판에 소를 메어놓아도 누가 무어라 하지 않고, 끌어 가지도 아니하며, 이웃 간에 된장국 한 그릇, 생선 한 토막을 나눠 먹던 그런 곳 이었습니다. 지금은 섬이 아닙니다만 아직도 인천시내로 나오려면, 영종도를 거쳐 배를 타고 나오는 것이 더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까운 인천시내로 가지 않고, 공항고속도로를 타고 서울로 예배드리러 올라옵니다. 어느 사람은 집 앞에 교회가 있는데, 왜 여기까지 오느냐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제 욕심이지요.”
“시골교회 보다는 서울로 교회를 다닌다고 하면 좀 세련 되 보이잖아요.” 하고 대답합니다.

 사실은 저희 집 옆에 있는 교회를 십 수 년 다녔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청담동에 있는 그 유명한 새길 교회 까지 왔냐고요. 사연이 깁니다. 긴 사연은 다음에 말씀드리기로 하고요, 좌우간 저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이라 생각합니다. 어째든 새길 교회에 저의 신앙의 근거를 두었으니까요. 저는 37년 동안 공직에 있으면서 내내 머릿속에 떠나지 않았던 것이 있습니다. 제가 언젠 가 공직에서 그만두면 조용한 시골 마을에 가서 교회공동체를 조성하여 살고픈 저희소망 이였습니다. 마을 전체가 서로 도우며, 논밭을 가꾸어 식량을 마련하고, 어른을 공경하고 어린아이를 보듬으며, 시기하지 아니하고, 자기 이익만을 구하지 아니하며, 혹시 성질이 나서 성을 내어도 원한을 품지 아니하며, 불의에 항거하며 침묵하지 아니하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그런 곳이었으면 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시골 농촌 마을을 저는 천국으로 생각해 오고 있습니다.

 시골에서 태어나서, 시골에서 자라고, 농촌과 어촌으로 다니며, 살아왔기에 저는 도심에서 살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가끔 서울 도심에서 머무를 때, 느끼는 것인데, 새벽부터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 ‘야, 어떻게 저렇게 매일같이 어둠 컴컴한데 일어나 일을 할까’ 두려움마저 느낍니다.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저는 견딜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경쟁의 틀 속에 갇혀서 살아 남기위한 몸부림이라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보이는 것들도 모두 한 결 같이 가장높이, 최고, 우선, 빨리 등 남보다 먼저, 남보다 위에, 저 높은 곳을 향하여 줄달음치는 모습들인 것 같습니다.

 남을 이기지 않으면 안 되는, 남을 넘어서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현실이 두렵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달리기를 해서 1등 해본 적이 없습니다. 1등할 수 있는 능력도 없지만 1등을 해보려고도 안했습니다. 쉼에, 게으름에, 나중을, 배려라는 인식으로 익숙해 있는 저에게는, 그 경쟁 체제 속에서 도저히 헤쳐 나갈 수 없다는 생각이 저를 감싸고 있는 지도 모르는 것이죠. 저는 농사를 지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다 심은 다음에 동네에서 꼴찌로 심습니다. 그러면 측은히 여긴 동네 사람들이 많이 도와주거든요.

 그런데 한편 최고가 되고픈 마음, 가장 아름다운 것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 남보다 더 뛰어나게 보이려는 욕심, 그런 욕심을 가지고 빨리빨리 새벽부터 부지런하지 않으면, 자기발전을 위해서도 그렇고, 이웃을 위한 헌신의 기틀을 마련 할 수 없을 것 같은 자괴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저는 내게 주어진 환경 속에서 일한 만큼만 얻어지는 자연의 섭리가 그렇게 좋습니다. 그것이 농부이거든요.

 새벽에 일어나 묵상을 하고, 먼동이 터오면 바쁜 걸음으로 동네 한 바퀴 돌아옵니다. 그리고 호미를 들고 밭에 나가 일을 시작 합니다. 출근시간 까지는 2~3시간 일을 할 수 있거든요. 농사를 짓다보면 ‘농작물은 농부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지요. 그런 욕심에, 자라나는 어린 새싹들과 이야기 하다 보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출근시간도 넘기는 예가 허다하지요. 내일은 일찍 끝내리라 생각하지만 역시 그렇게 되지 못합니다. 어릴 때 저녁노을이 훨씬 지난 시간까지 밭에서 돌아오지 않고 밭을 메던, 어머니의 모습을, 그 마음을, 지금은 조금 더 이해 할 것 같습니다.

 피곤함을 이기고 새벽에 일어남은 남보다 먼저라는 욕심 때문일까요? 저녁 늦게까지 달빛을 벗 삼아 시장 끼도 잊어버리고, 내일은 우리 딸 양말 한 켤레 사줘야지 하면서 밭을 메는 농부의 마음이 욕심일까요? 내가 심은 곡식 잘 가꾸기 위함이 욕심일까요? 이 곡식 잘 가꾸어 장날 내다 팔아 우리 아들 맛있는 것 사다 주어야지 하는 가난한 욕심. 그것마저 없다면 새벽에 일어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부지런함을 가져다주는 가난한 욕심, 평화주의자 마하트마 간디의 말이 생각납니다.

 ‘행복은 자기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조화를 이룰 때에 얻어지는 것이다. 만약 당신이 행복하지 못하다면 그것은 당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99% 당신만을 위해서 사용하기 때문이다’

 저는 이 같은 가난한 욕심이 나만을 위해서 사용되지 않도록 기도하며 간구합니다.

 해병대를 제대한 예비군 병사의 등에 ‘惡’이란 글씨가 노란색 한문으로 크게 씌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물었지요.

 “어이 예비군! 당신 등에 ‘惡’ 이란 글자가 크게 씌어 있는데 그 글자가 무엇을 뜻하는가?”
 “그냥 부대 구호가 그렇기 때문에 새겼습니다.”

 그 예비역 병사는 아무 생각 없이 “악”을 외쳤고, 해병대를 다녀왔다는 자부심 때문에 큰 글씨로 악할 ‘惡’자를 등에 새겼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惡’자는 여러분이 다 아시다시피 한문으로 ‘증오할 오’자도 됩니다. 증오는 아주 사무치게 미워해야 합니다. 결국 상대를 미워하고, 증오하며, 악을 유발해야 상대를 죽일 수 있다고 훈련합니다. 물론 국가가 그걸 가르치는 교관이 그 병사에게 악을, 증오를 심어주어 악한사람으로 만들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훈련이, 그 악이, 그 증오가 내 속에 있는 작은 이웃을, 친구를 죽이는 현상으로 우리의 삶 속에 알게 모르게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도 혹시 행여 우리 주변에서 그런 잘못을 행하고 있지 않을까요? 우리의 신앙이, 우리의 신념이, 이웃을 실족케 하지 않은가 반성해봅니다. 부대구호라고 무심코 아침 구보할 때, 응원할 때, ‘악’쓰던 그 병사의 내면에 증오가 성장하여, 현실로 나타난다면, 저는 연자 맷돌을 메고 바다 속으로 뛰어 내려야 합니다.

 가끔 한완상 선생님이 강조하시는 易地思之를 생각합니다. 정말 상대방의 처지에서 생각하면은 그 사람의 생각을 다 알 수 있을까? 하루는 집에서 설거지를 하면서, ‘수도가량 밑으로 습기가 차면 싱크대 속에 곰팡이가 끼겠구나.’ 느끼면서, ‘결벽증이 약간 있는 집사람이 그것을 본다면 닦고 말텐데.’ 하면서 싱크대 뚜껑을 열고, 수세미를 들고 곰팡이를 닦아 냅니다. 아내가 힘들게 닦을 것을 생각해서 제가 미리 청소 하는 것 이지요. 사실은 잘했다 칭찬 받으려고요. 상대를 이해하고,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아요.
그런 상황 속에 직접 들어가지 아니하면 상대의 마음을 알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설거지를 하지 않았다면 조금이나마 아내의 생각을 읽을 수 있을 까요? 속상해하는 친구에게 슬픈 사연이 있어, “야, 너 심정 충분히 이해해.” 하여도 당사자가 느끼는 감정을 100% 이입 시킬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그런 상황에 처해 보기 전에는 말입니다. 하물며, 어떻게 2000년 전 예수의 마음을 알 수 있을까요? 십자가에 달리신 고통을 얼마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항상 역지사지하며, 고통이 있는 현장으로, 소외된 이웃이 있는 그곳으로, 정진(힘써 나아감) 하자” 하신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야고보서 1장 15~16절,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낳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라고 야고보 선생님이 세계 흩어져 있는 교회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잉태하면’에 해당하는 헬라어 쉴라부사 는 ‘함께 붙잡다’를 의미하는 쉴람바노의 제2부정과거 능동태 분사로서 여성의 임신을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개인의 의지가 죄 된 본성과 합치되는 과정을 상징하는 말로 사용되며, 이것은 죄 된 인간의 본성이(즉 사람의 마음이) 죄악의 길로 인도하여, 결국 그 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구체적인 사고와 행동으로 표출되는데, 이것이 바로 죄(하마르티아 : 죄, 과역을 맞히지 못함, 의에 길에서 떠난 모든 행동 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가 자란다는 것은 (헤 하마르티아 아포텔레스데이사) 죄 된 행동이 인간의 마음 과 의지를 완전히 장악 하여, 이 행동이 습관적이고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행해짐을 나타냅니다. 로마서 6장 23절 말씀에도 죄의 삯(죄라는 주인이 그의 종 된 사람들에게 지불하는 것은 사망이다)은 죽음이라 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영원한 생명입니다. 또한 본문에 ‘낳다’는 헬라어 단어가 두 단어가 나오는데, 앞에 나오는 ‘티크테이’로서 (현재 능동태 단수 3인칭) 영어로 it bringeth forth(낳다, 생기다, 싹이 튼다, 맺다)로써 자기 스스로 결정하여 주체적으로 낳는 것을 의미합니다.

 뒤에 나오는 '아포퀴에이'는 (현재능동태 단수 3인칭) 영어로 bringeth forth 로써 정상적인 출산과 비정상적인 출산 즉 유산 모두를 나타내는데, 여기서는 후자의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즉 죄는 이미 죽음을 잉태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는 결정으로 객체적 낳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죄는 죽음(다나토스)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국사망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면 어쩔 수 없이 필연적으로 죽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죽음은 육체적인 의미보다도 정신적인 의미가 더 강한 것 같습니다. 마지막 절(16절)에서 ‘속지 마십시오.’ 한 것은 사람이 시험을 당하는 것은 각각 자기욕심에 이끌려서 꾐에 빠지기 때문인데, 하나님이 시험하신다고 잘못 생각한다는 것이지요. 거기에 속지 말고, 하나님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욕심이 죄를 낳는다.
죄는 이 세상에서 육체적 또는 자연적 악의 원인이라 합니다. 결국 욕심은 악이라는 것이죠. (악의 개념은 지난번 길희성 형제님의 강의에서 충분히 이해 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데살로니아 교회에 사도바울은(데살로니가전서 5:22)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악은 어떤 모양(종류)이라도 버려야 한다고. 나의 일시적 기쁨을 가져다주는 욕심을 버려야 합니다. 욕심이 죄가 되고, 그 죄가 악이 되고, 그 악이 죽음에 이르지 않도록 말입니다.

 경북 봉화 구천리 시골 마을에서 자연에 순응하며, 나무와 벗 삼아 살다 가신 농사꾼 전우익 선생님의 말씀을 끝으로 마치겠습니다.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혼자만 잘 살믄, 무슨 재민겨! 여러분!

기도합니다.
주님 우리가 매일, 매일, 새롭게, 새롭게, 다짐하지만 우리의 나약함이 욕심이 되어 제 자리 걸음을 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의 용기를, 실천의 용기를, 욕심 버림의 용기를 더 하시옵소서. 여러 사람이 어우러져 천국을 이루게 하소서 주님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10 야고보서 묵상과 기도의 유익 약1:14  김남준 목사  2008-08-27 2030
9 야고보서 생각을 이탈하게 하는 죄를 파괴하는 길(2) 약1:14  김남준 목사  2008-08-27 1573
8 야고보서 죄의 속임과 계획 약1:15  김남준 목사  2008-08-27 1934
7 야고보서 욕심, 죄, 무욕 약1:12-15  길희성 형제  2008-06-20 2010
6 야고보서 사단의 전술 전략 약4:7  한태완 목사  2007-11-26 2560
5 야고보서 실행하는 신앙 약19-25  강종수 목사  2007-11-11 2075
4 야고보서 헛되고 허무한 인생 약4:14-16  한태완 목사  2007-11-07 3265
3 야고보서 실천합시다. 약2:14-26  한태완 목사  2007-11-06 2636
2 야고보서 드리는 신앙 약2:19-24  강종수 목사  2007-07-15 2079
1 야고보서 하나님의 위로를 얻는 법 file 약4:5-10  강종수 목사  2007-06-10 2529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