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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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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약2:14-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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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믿음과 행함(실천) 모두가 중요하다
본문 : 야고보서 2: 14~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서 2:26)
성경은 여러 곳에서 믿음을 강조하면서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 13)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 15)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 28)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이 말씀들은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약 우리의 선행으로 구원 얻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만을 강조하여 한 번 믿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어떤 죄를 지을지라도 구원받는 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이 초대교회 때부터 나타났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대표적인 이단이 소위 ‘구원파’입니다.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는 것은 마치 가위의 윗날만 강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위가 제 구실을 하려면 아래날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농부에게 풍년을 약속하고 풍년에 맞는 알맞은 해와 비를 내려 주셨어도 땅에서 농부가 씨 뿌리지 않고 수고하지 않으면 아무 열매를 거둘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해도 하늘이 돕지 않으면 풍년을 이룰 수 없습니다. 즉 아무리 땅에서 선을 행하고 의롭게 살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가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가나안 땅이 약속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그들은 갈렘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구원이 약속되어 있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믿음이 없이 선행함으로 구원 받을 수 없고,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최종목표지(천국, 극락)에 이르는 방법이 다릅니다.
불교는 하늘까지 사다리를 타고 한 걸음 한 걸음 내 힘으로 올라가겠다는 것이고, 기독교는 하늘에서 내려온 밧줄을 붙잡고 올라가겠다는 것입니다. 즉 불교는 자력으로 수행 등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열반의 경지에 이르겠다는 것이고(불교는 과거의 지은 죄를 해결할 길을 제시하지 못함),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서 주님을 바라보고 의의 길, 옳은 길, 빛의 길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한 사람이 지나가다 보고하는 말이 "왜 변변치 못하게 행동해서 거기 빠졌는가?"하고 꾸짖기만 하고 지나갔습니다. 이와 같이 유교는 윤리적으로 사람의 도리를 가르쳐 잘못을 전제적으로 경책만 합니다.
또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하는 말이 이편으로 나무 가지를 붙잡고 저편으로 돌뿌리를 딛고, 올라오라고 다만 동정의 뜻을 표하며 나오는 방법을 말해 주었습니다. 불교는 자비의 종교입니다. 자력으로 구원 얻는 지식을 제시하여 줄 뿐입니다. 그러나 자기 노력이나 힘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책망하거나, 물에서 나오는 지식을 전할 여지가 없으므로 자기 자신이 물 속에 들어가서 죽어 가는 자를 끌고 나와서 상처를 치료해 주고 새 옷을 입히고 그 사람의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공자나 석가처럼 이론만을 가르치지 않고 죄인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구속하여 하나님 아버지 집으로 데려다 주십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뿐 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나의 구원자로 고백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사도행전4:12)
어떤 종교이든 사랑과 자비를 말로만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익(無益)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13: 1)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통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고 이를 믿었음에도 다시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는 말씀을 거절하지 아니하고 순종함으로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과 말씀에 모두 순종하는 살아있는 믿음을 가집시다.
어느 잡화상을 하고 있는 사람이 그 동네에 새로 부임해 온 목사가 아주 설교를 잘 한다고 상점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칭찬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손님이 주인에게 “지난주에 목사님이 어떤 설교를 하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시간이 없어 교회에 나가 설교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설교를 잘 하는 줄 압니까?” 주인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그 목사님이 오신 후 외상값을 잘 갚아요”
무엇보다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가?를 생각해봅시다.
첫째, 아는 것보다 실천이 중요합니다.(약2:17)
빈민가에서 태어나 큰 부자가 된 깁슨이란 미국인에게 사람들이 부자된 비결에 대해 물었습니다. 깁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첫째, 술을 마시지 말 것. 둘째, 고생을 두려워하지 말고 일할 것. 셋째, 하나님을 믿고 만사를 의심하지 말 것. 이게 그 비결입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그건 누구나 다 아는 거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깁슨은 웃으며 다시 대답했습니다.
“그렇소. 그러나 당신은 아직 그걸 실천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둘째, 많은 지식보다 한가지라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날 여우와 토끼가 동네 음식점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대화는 무르익어 그들의 공통의 적인 그 지역사냥꾼들의 사냥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여우는 자기는 얼마든지 피할 수가 있기 때문에 사냥개는 전혀 겁나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쳤다. 만약 사냥개가 가까이 온다면 다락 속으로 도망해서 사냥개가 사라질 때까지 숨어있거나, 아니면 번개같이 달려나가면 어떤 사냥개도 뒤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냇가로 가서 한동안 몸을 담그고 있으면 사냥개들이 완전히 방향을 잃어버릴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뒷걸음치며 맴돌이를 하여 사냥개 눈을 완전히 혼란시킨 뒤 나무 위로 올라가서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몰러 이리저리 헤매는 얼빠진 사냥개의 모습도 구경할 수 있노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의 도피법은 무궁무진한 듯이 보였고 자신감에 넘쳐 보였습니다. 그러나 토끼는 약간은 겁먹고 당혹스러운 얼굴로 만약 사냥개들이 온다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한 가지 ‘겁먹은 토끼’처럼 달리는 것뿐이라고 부끄러운 듯이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바로 그때, 그들은 사냥개들의 나직한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토끼는 자기의 말대로 훌쩍 뛰어 넘어 겁먹은 모습으로 문을 박차고 힘껏 달아났습니다.
한편 여우는 다락에 들어가 숨을까 말까, 문밖으로 달려나가 빨리 달아날까 말까, 냇가에 들어가서 냄새를 물로 감출까 말까. 아니면 뒷걸음으로 원을 그리며 맴돌면서 개들을 어지럽게 만든 후에 나무에 올라갈까 말까 생각하느라 주저주저하고 있다가 그만 득달같이 달려온 사냥개에게 잡혀 먹히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지식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 보다는 그중 한 가지라도 우리의 삶속에서 그것을 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 말보다 실천이 중요합니다.(약2:14-17, 딤전3:8-9)
노벨평화상을 받은 테레사 수녀의 일화입니다. 부잣집에서 자란 한 젊은 수녀가 테레사 수녀에게 “저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만졌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젊은 수녀는 몸에 구더기가 들끓는 버려진 남자를 치료해줬던 것입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환자에게 사랑을 베푼 감격을 그 수녀는 그리스도의 몸을 만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테레사 수녀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렇소. 사람의 손이 닿는 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크리스천들은 긴 말보다 즉각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넷째, 듣기만 하는 것보다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마7:24-27)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어떤 목사가 교회에 새로 부임했습니다. 첫 번째 주일. 그는 “당신은 헌신했는가?”라는 제목의 설교로 교인들을 감동케 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 목사는 똑같은 제목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도 같은 설교를 반복했습니다. 듣다 못해 교인들은 대표자를 뽑아 왜 같은 설교를 하는지에 대해 항의했습니다. “한 가지 설교밖에 준비하지 못했습니까?” 이 말을 들은 목사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많은 설교를 준비했지요. 하지만 여러분이 첫 번째 설교를 듣고도 실천하지 않아 그 다음에 준비된 설교를 할 수 없었답니다. 여러분이 들은 말씀을 실행에 옮길 때 나는 준비된 다음 설교를 할 것입니다”
다섯째, 약속(서원)하는 것보다 행함이 중요합니다.(민30:2, 시15:4, 전5:4)
마태복음 21장28절 이하에 나오는 맏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대답은 시원하게 잘했지만, 종래 실천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이에 비해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거절했지만, 나중에는 뉘우치고 순종하는 마음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실천에 옮겼던 것입니다. 자신의 말로는 거절하였으나, 결국 실천함으로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실천의 종교입니다. 영국격언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다.” “일하는 농부는 앉아있는 신사보다 더 존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선생이 미국에 처음 건너가서 청소부생활을 했는데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한 백인이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당신은 청소부가 아니라 신사입니다.”라고 감탄하면서 작정했던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하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념을 생활에 실천하는 사람은 비록 청소부생활을 할지라도 신사의 대접을 받는 법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하고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무슨 일이든지 실천에 옮기라는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행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는 사람보다 무엇인가 열심히 하다가 실패하는 사람에게 성공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말만 앞서는 것보다 실천의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이 참으로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작년 뉴욕 타임스에서는 지난 1000년간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 각 분야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것을 발표했습니다.
인간의 생활 속도를 빠르게 만든 지퍼, 무궁무진한 예술(작곡)을 만들어낸 피아노, 생활 도구부터 우주선까지 견고하게 만든 나사못 등이었습니다. 그 중에 금속활자도 포함되었는데 한국의 금속활자를 발표하지 아니하고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선정했습니다. 발명시점은 한국 것이 앞섰지만 제대로 적용되지 못해 대량 출판의 길을 열지 못했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성경의 대량 출판을 비롯해 책의 혁명을 이루었기 때문에 최고의 발명품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발명이 되어도 사용되지 못하거나 적용하지 못한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적용되지 못한 지식은 죽은 지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적용되지 못한 믿음은 죽은 믿음, 의미 없는 믿음입니다. 얼마나 많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것을 삶 속에 적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귀신들도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그 지식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머릿속에 갇혀 있는 믿음이었습니까? 그의 믿음은 온몸으로 행동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라 했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그대로 행동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포기해야만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했습니다. 광야 길에 들짐승의 위협을 예견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행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두려웠겠지만 행동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100세에 난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 때 그는 머리로 따지지 않고 그대로 행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이요 역사를 이루어 내는 믿음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야고보를 통해 살아있는 진짜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야고보는 반복적으로 죽은 믿음이 아닌 산 믿음을 갖도록 우리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나의 믿음이 머릿속에만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손으로, 발로, 온몸으로 적용하고 있는 믿음입니까? 말씀이 삶에 적용되는 믿음이 산 믿음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 심장을 뛰게 하며 온몸으로 퍼져서 말씀으로 살아 움직이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신 주님,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마음속으로만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도록 도와주소서. 주께서 말씀하시고 실천하신 사랑의 본을 따르게 하소서. 주의 본을 따르는 길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인내를 허락하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는 자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이웃에게 행함과 진실함의 참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하옵소서.
사랑의 주님, 우리가 말과 머리로만 주님의 일을 하지 않게 하소서.행동으로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하나님의 일을 이뤄나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한태완 목사
본문 : 야고보서 2: 14~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야고보서 2:26)
성경은 여러 곳에서 믿음을 강조하면서 믿음으로 구원받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 13)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딤후3: 15)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3: 28)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5:1)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이 말씀들은 틀림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의로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만약 우리의 선행으로 구원 얻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만을 강조하여 한 번 믿기만 하면 그 다음에는 어떤 죄를 지을지라도 구원받는 다고 주장하는 이단들이 초대교회 때부터 나타났습니다. 오늘날에도 그 대표적인 이단이 소위 ‘구원파’입니다.
오직 믿음만을 강조하는 것은 마치 가위의 윗날만 강조하는 것과 같습니다. 가위가 제 구실을 하려면 아래날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농부에게 풍년을 약속하고 풍년에 맞는 알맞은 해와 비를 내려 주셨어도 땅에서 농부가 씨 뿌리지 않고 수고하지 않으면 아무 열매를 거둘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반대로 인간이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해도 하늘이 돕지 않으면 풍년을 이룰 수 없습니다. 즉 아무리 땅에서 선을 행하고 의롭게 살아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
애굽에서 홍해를 건너가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가나안 땅이 약속되어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한 그들은 갈렘과 여호수아를 제외하고 모두 광야에서 죽었습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구원이 약속되어 있지만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점술가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모든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믿음이 없이 선행함으로 구원 받을 수 없고, 믿음은 있는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불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최종목표지(천국, 극락)에 이르는 방법이 다릅니다.
불교는 하늘까지 사다리를 타고 한 걸음 한 걸음 내 힘으로 올라가겠다는 것이고, 기독교는 하늘에서 내려온 밧줄을 붙잡고 올라가겠다는 것입니다. 즉 불교는 자력으로 수행 등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 열반의 경지에 이르겠다는 것이고(불교는 과거의 지은 죄를 해결할 길을 제시하지 못함), 기독교는 예수님을 믿어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로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거듭나서 주님을 바라보고 의의 길, 옳은 길, 빛의 길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물에 빠져 거의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한 사람이 지나가다 보고하는 말이 "왜 변변치 못하게 행동해서 거기 빠졌는가?"하고 꾸짖기만 하고 지나갔습니다. 이와 같이 유교는 윤리적으로 사람의 도리를 가르쳐 잘못을 전제적으로 경책만 합니다.
또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하는 말이 이편으로 나무 가지를 붙잡고 저편으로 돌뿌리를 딛고, 올라오라고 다만 동정의 뜻을 표하며 나오는 방법을 말해 주었습니다. 불교는 자비의 종교입니다. 자력으로 구원 얻는 지식을 제시하여 줄 뿐입니다. 그러나 자기 노력이나 힘으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또 한 사람이 지나가다가 물에 빠진 사람을 보고 책망하거나, 물에서 나오는 지식을 전할 여지가 없으므로 자기 자신이 물 속에 들어가서 죽어 가는 자를 끌고 나와서 상처를 치료해 주고 새 옷을 입히고 그 사람의 집에까지 데려다 주었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는 공자나 석가처럼 이론만을 가르치지 않고 죄인의 형상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죄인들의 죄 값을 치르기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구속하여 하나님 아버지 집으로 데려다 주십니다.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예수 그리스도뿐 입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나의 구원자로 고백하면 영생을 얻습니다.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사도행전4:12)
어떤 종교이든 사랑과 자비를 말로만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익(無益)합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고전13: 1)
아브라함은 아들 이삭을 통해 하늘의 별과 같이 많은 자손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을 받았고 이를 믿었음에도 다시 하나님께서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는 말씀을 거절하지 아니하고 순종함으로 큰 축복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믿음과 말씀에 모두 순종하는 살아있는 믿음을 가집시다.
어느 잡화상을 하고 있는 사람이 그 동네에 새로 부임해 온 목사가 아주 설교를 잘 한다고 상점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칭찬했습니다. 하루는 어떤 손님이 주인에게 “지난주에 목사님이 어떤 설교를 하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저는 시간이 없어 교회에 나가 설교를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설교를 잘 하는 줄 압니까?” 주인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그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그 목사님이 오신 후 외상값을 잘 갚아요”
무엇보다 실천하는 것이 중요한가?를 생각해봅시다.
첫째, 아는 것보다 실천이 중요합니다.(약2:17)
빈민가에서 태어나 큰 부자가 된 깁슨이란 미국인에게 사람들이 부자된 비결에 대해 물었습니다. 깁슨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첫째, 술을 마시지 말 것. 둘째, 고생을 두려워하지 말고 일할 것. 셋째, 하나님을 믿고 만사를 의심하지 말 것. 이게 그 비결입니다.”
그러자 한 사람이 “그건 누구나 다 아는 거군요”라고 말했습니다. 깁슨은 웃으며 다시 대답했습니다.
“그렇소. 그러나 당신은 아직 그걸 실천하지 못하고 있지 않습니까”
둘째, 많은 지식보다 한가지라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느 날 여우와 토끼가 동네 음식점에서 맛있는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대화는 무르익어 그들의 공통의 적인 그 지역사냥꾼들의 사냥개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여우는 자기는 얼마든지 피할 수가 있기 때문에 사냥개는 전혀 겁나지 않는다고 큰소리를 쳤다. 만약 사냥개가 가까이 온다면 다락 속으로 도망해서 사냥개가 사라질 때까지 숨어있거나, 아니면 번개같이 달려나가면 어떤 사냥개도 뒤따라오지 못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가장 가까운 냇가로 가서 한동안 몸을 담그고 있으면 사냥개들이 완전히 방향을 잃어버릴 것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뒷걸음치며 맴돌이를 하여 사냥개 눈을 완전히 혼란시킨 뒤 나무 위로 올라가서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몰러 이리저리 헤매는 얼빠진 사냥개의 모습도 구경할 수 있노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그의 도피법은 무궁무진한 듯이 보였고 자신감에 넘쳐 보였습니다. 그러나 토끼는 약간은 겁먹고 당혹스러운 얼굴로 만약 사냥개들이 온다면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한 가지 ‘겁먹은 토끼’처럼 달리는 것뿐이라고 부끄러운 듯이 솔직하게 털어놓았습니다. 바로 그때, 그들은 사냥개들의 나직한 울음소리를 들었습니다. 토끼는 자기의 말대로 훌쩍 뛰어 넘어 겁먹은 모습으로 문을 박차고 힘껏 달아났습니다.
한편 여우는 다락에 들어가 숨을까 말까, 문밖으로 달려나가 빨리 달아날까 말까, 냇가에 들어가서 냄새를 물로 감출까 말까. 아니면 뒷걸음으로 원을 그리며 맴돌면서 개들을 어지럽게 만든 후에 나무에 올라갈까 말까 생각하느라 주저주저하고 있다가 그만 득달같이 달려온 사냥개에게 잡혀 먹히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성경의 지식을 아무리 많이 알고 있어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우리들 자신이 무엇을 얼마나 알고 있느냐 보다는 그중 한 가지라도 우리의 삶속에서 그것을 행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셋째, 말보다 실천이 중요합니다.(약2:14-17, 딤전3:8-9)
노벨평화상을 받은 테레사 수녀의 일화입니다. 부잣집에서 자란 한 젊은 수녀가 테레사 수녀에게 “저는 오늘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만졌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젊은 수녀는 몸에 구더기가 들끓는 버려진 남자를 치료해줬던 것입니다.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던 환자에게 사랑을 베푼 감격을 그 수녀는 그리스도의 몸을 만졌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테레사 수녀가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그렇소. 사람의 손이 닿는 곳에 주님이 계십니다. 크리스천들은 긴 말보다 즉각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넷째, 듣기만 하는 것보다 실천하는 것이 중요합니다.(마7:24-27)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어떤 목사가 교회에 새로 부임했습니다. 첫 번째 주일. 그는 “당신은 헌신했는가?”라는 제목의 설교로 교인들을 감동케 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 목사는 똑같은 제목의 설교를 했습니다. 그 다음 주일에도 같은 설교를 반복했습니다. 듣다 못해 교인들은 대표자를 뽑아 왜 같은 설교를 하는지에 대해 항의했습니다. “한 가지 설교밖에 준비하지 못했습니까?” 이 말을 들은 목사는 조용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많은 설교를 준비했지요. 하지만 여러분이 첫 번째 설교를 듣고도 실천하지 않아 그 다음에 준비된 설교를 할 수 없었답니다. 여러분이 들은 말씀을 실행에 옮길 때 나는 준비된 다음 설교를 할 것입니다”
다섯째, 약속(서원)하는 것보다 행함이 중요합니다.(민30:2, 시15:4, 전5:4)
마태복음 21장28절 이하에 나오는 맏아들은 아버지의 명령을 받고 대답은 시원하게 잘했지만, 종래 실천에 옮기지 못했습니다. 이에 비해서 작은 아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거절했지만, 나중에는 뉘우치고 순종하는 마음에서 아버지의 말씀을 실천에 옮겼던 것입니다. 자신의 말로는 거절하였으나, 결국 실천함으로 순종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실천의 종교입니다. 영국격언에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악을 행하는 것이다.” “일하는 농부는 앉아있는 신사보다 더 존귀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도산 안창호선생이 미국에 처음 건너가서 청소부생활을 했는데 얼마나 열심히 일을 했는지 한 백인이 “당신은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당신은 청소부가 아니라 신사입니다.”라고 감탄하면서 작정했던 것보다, 더 많은 돈을 지불하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념을 생활에 실천하는 사람은 비록 청소부생활을 할지라도 신사의 대접을 받는 법입니다. 나는 할 수 없다하고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무슨 일이든지 실천에 옮기라는 말씀입니다. 아무것도 행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는 사람보다 무엇인가 열심히 하다가 실패하는 사람에게 성공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말만 앞서는 것보다 실천의 생활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사람이 참으로 성공하는 사람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작년 뉴욕 타임스에서는 지난 1000년간 인간이 만들어낸 것 중 각 분야 최고의 자리를 차지한 것을 발표했습니다.
인간의 생활 속도를 빠르게 만든 지퍼, 무궁무진한 예술(작곡)을 만들어낸 피아노, 생활 도구부터 우주선까지 견고하게 만든 나사못 등이었습니다. 그 중에 금속활자도 포함되었는데 한국의 금속활자를 발표하지 아니하고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를 선정했습니다. 발명시점은 한국 것이 앞섰지만 제대로 적용되지 못해 대량 출판의 길을 열지 못했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반면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는 성경의 대량 출판을 비롯해 책의 혁명을 이루었기 때문에 최고의 발명품으로 선정되었습니다. 발명이 되어도 사용되지 못하거나 적용하지 못한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적용되지 못한 지식은 죽은 지식입니다.
마찬가지로 적용되지 못한 믿음은 죽은 믿음, 의미 없는 믿음입니다. 얼마나 많이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얼마나 그것을 삶 속에 적용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귀신들도 하나님과 성경에 대한 지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귀신들은 그 지식에 따라 행동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행동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그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머릿속에 갇혀 있는 믿음이었습니까? 그의 믿음은 온몸으로 행동하는 믿음이었습니다. 고향을 떠나라 했을 때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그대로 행동했습니다. 자신의 소유를 포기해야만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동했습니다. 광야 길에 들짐승의 위협을 예견했지만 하나님의 음성을 따라 행했습니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두려웠겠지만 행동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100세에 난 아들을 바치라고 했을 때 그는 머리로 따지지 않고 그대로 행했습니다. 바로 그것이 살아있는 믿음이요 역사를 이루어 내는 믿음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야고보를 통해 살아있는 진짜 믿음을 가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행동하는 믿음입니다. 야고보는 반복적으로 죽은 믿음이 아닌 산 믿음을 갖도록 우리를 권고하고 있습니다. 나의 믿음이 머릿속에만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까? 아니면 손으로, 발로, 온몸으로 적용하고 있는 믿음입니까? 말씀이 삶에 적용되는 믿음이 산 믿음입니다. 말씀이 우리의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 심장을 뛰게 하며 온몸으로 퍼져서 말씀으로 살아 움직이는 삶이되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신 주님, 저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읽고 마음속으로만 결심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행동으로 나타내 보이도록 도와주소서. 주께서 말씀하시고 실천하신 사랑의 본을 따르게 하소서. 주의 본을 따르는 길이 힘들고 어려울지라도 포기하지 않는 인내를 허락하소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이웃을 사랑하는 자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이웃에게 행함과 진실함의 참사랑을 실천하며 살게 하옵소서.
사랑의 주님, 우리가 말과 머리로만 주님의 일을 하지 않게 하소서.행동으로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모든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하나님의 일을 이뤄나갈 수 있는 저희들 되게 도와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아멘.
/한태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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