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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약2: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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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인간관계, 차별에서 사랑으로
약2:1-13
요즈음 우리 사회의 화두는 공정 사회가 되었습니다. 모 장관이 자신의 딸을 공정하지 못한 방법으로 특채를 하였다고 사표를 내었습니다. 대통령은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상생의 경영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익의 공정한 분배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세상의 패러다임이 바뀌었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정보가 소통되지 않는 시대에는 불공정이 쉽게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정보화 시대가 된 지금은 불공정한 것이 누군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노출되고 여론화되어 버립니다. 모 장관이 특채로 채용되었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인터넷이 발달되어 마음만 먹으면 그저 집에 앉아서 청와대와 언론사에 정보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축구공 3천원에 만들어 10만원에 팔아도 알지도 못했고 누가 시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쉽게 언론에 노출되고 그것이 세상에 알려지면 그 회사 제품 사지 않습니다. 환경을 해치고, 노동을 착취하고, 비윤리 경영을 하면 기업도 살아남기 힘든 시대가 이미 되어 버렸습니다. 기업의 환경, 틀, 패러다임이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결혼하여 시집에 갔습니다. 그러면 시집의 패러다임이 있는 것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면 직장의 패러다임이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적응해야 성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계속 야고보서를 보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를 기록할 때 지금 유대교 전통의 패러다임에서 기독교로 패러다임이 바뀐 사람들에게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 되었는데 아직도 과거의 패러다임 속에서 살고 있는 자에게 이제는 바뀐 패러다임의 정신에 맞게 살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이 당시 사람들은 로마의 지배하에 살았습니다. 로마는 모든 것이 신분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패러다임속에서 살았습니다. 어떤 신분의 집안에서 태어나느냐가 인생을 결정하는 요소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얼마나 신분 차별이 심했습니까? 신분이 곧 부였고 명예였습니다. 예수님 오셨을 때 한 명의 자유인 당 2.8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노예 제도나 인종 차별은 짐승 세계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 역사에 버젓이 존재하며 얼마나 많은 차별을 했습니까? 고대 그리스 국가 한 명 자유인당 3.7명의 노예가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당시 회당예배를 드릴 때도 마차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러니 세상서 상전인 사람들이 들어오면 그런 특별대우를 하고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멸시하는 것입니다. 교회가 아직 복음적 삶에 미숙하니까 세상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세속화된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어떤 이는 태어날 때부터 자유인이요 어떤 이는 노예인이 분명하니 후자의 경우 노예상태가 본인에게 유익하며 적합하노라”했을 정도로 차별대우는 당연한 것입니다. 노예는 로마시대 집안 일, 농사, 수공업과 상업, 당시 생활에 필요한 용역과 재화의 대부분을 창출 공급했지만 아무런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노예를 혹사시키든 죽이든 고문하든 즉결처분하든 팔아먹든 마음대로 했습니다. 고귀한 하나님의 생명이 재산에 불과했습니다. 심심풀이로 십자가에 못 박은 후 매질해서 죽인 여자 상전, 사람 죽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는 손님의 여흥을 위해 한 노예의 생명을 취했던 플라미니우스라는 남자. 연한 칠성장어를 먹고 싶어서 자신의 노예를 이 물고기의 먹이감으로 만든 플리오라는 귀족, 병들어서 값어치가 떨어진 노예들을 티베르 강 한가운데의 섬에 폐기 처분했던 로마의 관습, 자신의 소유 확인하기 위해 불에 달군 낙인을 노예의 얼굴에 찍었습니다.
유대 사회의 패러다임은 어떠했습니까? 유대교의 전통이 그들의 삶의 원리가 되었습니다. 유대 사회 역시 철저히 신분이 지배하는 패러다임을 가지고 있는 사회였습니다.
렌스키의 이해에 따르면, 당시 농경사회는 아홉 개의 사회계급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상층의 다섯 계급과 하층의 네 계급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상층은 통치자, 지배계급, 신하계급, 상인계급, 사제계급, 하층은 농민계급, 장인계급, 천민계급, 소모 계급입니다다. 지배계급은 보통 인구의 1% 정도였지만, 수입은 1/4 정도였다고 합니다. 지배계급과 통치자가 그 절반 이상을 차지했답니다. 신하계급은 대개 인구의 5%로서, 서기관들과 관료들로 정치 엘리트였다고 합니다. 사제계급은 제사장 1명과 사제장 34명(제사 담담 24명, 관리담당 7명, 경리담당 3명), 일반사제 약 7,200명(300명 씩 24개조) 정도의 거대한 사제계급이 형성되어 있었답니다. 대다수 하층계급인 농민계급, 장인계급, 천민계급, 소모계급은 노동력을 거의 완벽하게 이용당하며 그들의 생활필수품조차 빼앗겼다고 합니다. 불결한 천민계급은 짐꾼, 광부, 창녀, 혹은 인력거꾼 등이었고 소모계급은 평상시 인구의 5% 내지 10% 정도였답니다. “이들은 잡범(雜犯), 불량배, 거지, 떠돌이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로서, 남들의 자선이나 자신의 재치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사회에서 살았던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어 기독교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그 신분이 지배하는 삶의 윤리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야고보 선생님 시절에 교회 내에서 무슨 문제가 있었습니까?
1. 교회 내에서 차별대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2-4)
2절을 보십시오. 회당, 요즈음 말하면 예배당입니다. 예배당에 예배드리러 오는데 어떤 분이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고 들어 왔습니다. 요즈음 말하면 좋은 차를 타고 명품 옷을 입고 들어 온 것입니다. 겉모습만 보아도 권력 있는 자로, 부자로 보인 것입니다. 그러자 추차 안내하시는 집사님이, 예배 안내하시는 집사님이 눈여겨봅니다. 그리고 편한 자리에 주차하게 해 주고, 특별대우를 해 줍니다. 예배당에 좋은 자리에 앉게 합니다. 당시 유대인 회당에서 신앙의 정도에 따라 좌석을 구분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종종 교회를 보면 목사석, 장로석, 권사석 등과 같이 구분하는 경우를 봅니다. 영국 같은 나라에서는 교회에 왕이 앉는 자리가 따로 지정되어 있는 교회도 있었습니다. 여자들은 긴 드레스를 입고 남자들은 정장을 하고 마차를 타고 와서 예배를 드렸답니다. 가난한 사람이 감히 교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교회에 좌석이 있어서 아무 데나 앉을 수도 없었습니다. 미국도 그런 교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교회의 좌석은 정해져 있는데 사람은 많고 어차피 다 들어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좌석을 하나씩 세놓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도 워싱턴 시에 있는 어느 교회에 자리 하나를 세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 왔습니다. 소형차를 타고, 트럭을 타고 들어 왔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거기 서 있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시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쟁포로를 취급하듯 멸시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태도를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4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겠습니다. “너희 끼리 서로 차별하여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서로 차별하는 죄와 서로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죄를 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상은 말할 것이 없지만 하나님을 믿고 한 형제 자매된 교회 내에서도 다양한 차별대우가 있습니다.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이 교회에서도 그 지위를 인정받습니다. 부자는 그 부로 교회에서도 차별대우를 받습니다. 장로님이 되는 것도 부유한 사람, 학식 있는 사람, 지위 있는 사람들만 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목요일 날 대화를 나눈 목사님께서 자신의 친척 이야기를 했습니다. 서울의 모 대형 교회 장로님으로 봉사하시는데 그 교회에서는 비공식적으로 장로님이 되려면 십일조 천만 원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달 교인들을 위한 부조금만 백만 원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이제 나이가 들고 어려워져서 백만 원이 부담이 되어 장로 구실 못하여 조기 은퇴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돈 없으면 직분 맡기도 힘들고 돈 없으면 교회 다니기도 힘들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양반, 상놈, 중인, 천민 등의 세습 신분이 살아졌지만 가구주의 교육, 직업, 소득에 따라 저소득층, 중산층, 고소득층 계층을 분류하여 저소득층을 절대 빈곤층, 차상위계층, 차차 상위 계층으로 구분하여 차별대우를 하는 것이 오늘 사회의 현실이 아닙니까? 교회도 그 영향권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를 진단하는 재미있는 논문이 발표되었습니다.
한국 사회학회 기관지인 [한국 사회학]에 발표한 서석재씨의 [중산층 대형교회론]이라는 논문이 있습니다. 그 논문에 이하면 요즈음 기독교 신자들이 새로 교회를 선택할 때 교회의 유명도나 신도들의 사회 경제적 수준 등을 기준으로 삼는 경향이 확산되고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목사의 설교 내용이나 교단의 교리, 집과의 거리 등을 주로 감안해 교회를 선택했던 과거와는 달리 대형교회 신자들 중 상당수는 소속한 교회가 [수준 높은 식자층과 중산층들이 다니는 교회]로 사회에 알려져 있어 교회에 나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교회 신자가 됨으로써 자신도 중산층으로 동일시 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교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고 비교적 편하게 다니고 이런 교회 정도는 다녀야 사회적 체면이 선다는 식의 [지위상승 욕구]나 [나도 중산층]이라는 소속감을 가지려는 신자들의 성향이 이런 교회를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출석교회를 통해 교인들의 지위가 달라지는 [교회의 사회적 지위분리]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국회의원이 다니는 교회, 어는 재벌, 어는 유명인, 어느 유명한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 어느 연예인, 어느 교수 등등으로 차별화와 계층화시켜 “당신 같은 사람들이 왜 우리 교회에 나와”라는 식의 의식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오래된 소설이고 제가 몇 차례 소개한 소설입니다만 오승재씨가 쓴 "소설 우리 예수님"이라는 소설책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교회"라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교양 있는 사람들이 다니는 교회입니다. 엘리트 신앙인들이라고 생각하는 제일 교회 교인입니다. 아주 잘 지어졌습니다. 문화시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일에 헌 누더기를 걸치고 왼팔이 없는 누더기 옷을 입은 거지가 봇짐을 걸머진 채 교회에 들어옵니다. 안내를 보던 남 집사가 떠밀어냅니다. "나 예배보러 왔소" "이런 꼴로 예배보면 안 된다."며 송 집사는 백 원 짜리 하나 쥐어 주고 보내려고 합니다. 이 때 부목사가 "어디서 왔소." 물어봅니다. "예배 보는데 어디서 온 게 무슨 상관이요, 나 집이 없는 줄 뻔히 알지 않소." "누구 소개로 왔소" "거리에서 예수 믿으라는 말 듣고 왔소." 부목사는 들여보냈습니다. 송집사는 헌금 훔치러 왔으니 보내자고 합니다. 그 주변에는 아무도 앉지 않습니다. 부목사가 나가면서 인사합니다.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이요. 그럼 다음 일요일에 많은 친구들을 데려 오겠소." 거지들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다음 주 헌금 시간에 헌금바구니를 그 앞에 돌리지 않습니다. "우리는 헌금할 수 없소." 당회에서 구제비 주고 못 오게 하였습니다. 어느 날 한 거지아이가 "우리 아저씨가 목사님 데리고 오라고 했어요"라고 급히 말합니다. 부목사가 가보니 다리 밑에서 가마니로 가리고 사는 천막에 희끄무레 죽은 시체 같은 몸이 누워있었습니다. 그는 죽은 듯 소리 없이 한 쪽 손을 들려고 하였습니다. 손에는 꼬기 꼬기 꾸겨진 100원 지폐가 있었습니다. 그는 무엇인가를 말하려다가 끝내 말을 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 내에서도 학력, 미모, 재력, 지위, 건강, 인종, 성별 등으로 차별대우를 할 수 있습니다. 차별대우하고 차별대우 받을 수 있습니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도 자유롭지 못하여 외모만 보고 기름부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 시간 야고보서를 통하여 이런 문제에 대하여 어떤 교훈을 해 주시고 있습니까?
2. 우리 그리스도 안에 사는 신앙인은 차별대우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1).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우리 자신을 향하여 속삭여 보십시오. “김 목사야 사람 차별하여 대하지 말자.” 옆 사람을 보고 우리 서로 말해 봅시다. “우리 열린 교회 식구들은 사람 차별대우 하지 말기요.” 가난하다고, 볼품없다고, 나이 들었다고, 지위 없다고, 가방끈 짧다고 무시하고 멸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도 차별대우 받는데 교회에 와서까지 차별대우를 받으면 얼마나 비참합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모든 차별을 폐해 버리고 우리를 다 하나로 만들었습니다.
3. 왜 우리가 외모를 보고 차별대우해서는 안 됩니까?
1) 우리가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1)./신분적 이유
1절을 보십시오.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무슨 믿음입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어떤 예수님입니까? 영광의 주이신 예수님이십니다. 영광의 주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낮아지시고 십자가에 돌아가시기까지 하였습니다. 나와 옆에 있는 사랑하는 형제를 위해 그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누가 이런 믿음을 가진 것입니까? 너희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완전히 신분이 바뀌었습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세계에서 사는 것입니다. 아직도 신분으로 사람을 차별대우하는 그런 세계에서 살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람을 신분으로 차별대우하신 분이 아니십니다. 당시 유대인 중에서 가장 하층민이라으로 천대와 멸시를 받았던 사람들을 예수님은 차별대우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들, 병든 사람들, 배고픈 사람들,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 소외된 사람들의 친구였습니다. 당시 아무도 상대하지 않고 부정탄다고 생각했던 문둥이, 간음한 여자, 부정한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는 혈루증 앓은 여인, 심지어는 죽은 자,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자, 병든 자, 세리들의 친구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바리새인들도 인정하였습니다.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참되시고 아무도 꺼리는 일이 없으시니 이는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않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심이니이다(막 12:14)”
“그들이 물어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아노니 당신은 바로 말씀하시고 가르치시며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진리로써 하나님의 도를 가르치시나이다 (눅 20:21)”
5절 보세요.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이라고 반복해서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간절한 호소입니다. 하나님이 가난한 자도 차별하지 않고 택했다는 것입니다. 택해서 어떻게 했다는 것입니까? 믿음에 부요한 자가 되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하여주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제 완전히 신분이 바뀐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못생겼어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사람들입니다. 아무리 가난하여도 존귀한 자이고 천하와도 바꿀 수 없는 영적 생명이 있는 자입니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시 16:3)”라고 했습니다. 권력이 없어도 우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벧전2:9)”입니다. 존재가 다는 사람들입니다. 과거가 아무리 추해도 우리는 주님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시103:2-5)” 아무리 무능력해도 차별대우 받을 사람이 아닙니다. 부인도, 자녀도, 집도, 승용차도, 건강치도 못한 사도 바울이었지만 바울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3)”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앙인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외모만 보고 차별대우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외모만 보고 차별대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열린 교회를 차별대우 없는 교회로 만들어야 합니다. 이 땅의 어떤 사람도 차별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유일한 곳이 있다면 그것은 교회여야 합니다. 이 땅의 차별을 철폐한 것은 기독교입니다. 복음이 제대로 들어가면 가는 곳마다 차별이 없어집니다. 교회는 그 어떤 사람이 온다할지라도 차별 없이 왕자와 공주처럼 환영받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이 이 땅에 교회를 세워 놓은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 예수 믿으니 믿는다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도 차별대우 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외모로 취하는 것은 합리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6-7)/합리적 이유
논리적인 이유로도 타당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무조건 교회에서 가난한 자는 업신여기고 부자는 대우하는 것은 현실을 볼 때 타당성도 없고 합리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부자를 잘 대해주었는데 현실적으로 부자들은 어떻게 했다는 것입니까? 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그렇게 잘 대해 주는 너희를 억압하고 법정으로 끌고 갔다는 것입니다. 가난하여 빚을 빌리고 갚지 못하면 무례를 행하고 권리를 박탈해 버렸다는 것입니다. 현실적인 이해타산이 걸리면 피도 눈물도 없다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어떻다는 것입니까? 7절을 읽어 보십시오. 아름다운 이름을 우리 주인의 이름을 말씀합니다. 우리 주님을 비방한다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교회에서 대우해 준만큼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들에게 좀더 나은 혜택을 받기 위해 차별대우를 해 주었는데 결국 돌아오는 것은 정치적 모욕과 신앙적 비방만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이 얼마나 모순된 판단이냐는 것입니다. 실제를 보고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 판단이냐는 것입니다.
그들은 소유의 가치와 인격의 가치를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좋은 시계를 차고 있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부자인 사람은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좋은 옷을 입은 사람은 참으로 신앙 인격이 좋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심리학에는 후광효과 초두효과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모순된 판단입니까? 외모가, 소유가 곧 그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생각입니까? 특히 그 당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좋은 자리는 신앙의 경륜이 있고 신앙심이 깊은 사람을 위하여 마련한 것인데 무조건 옷 잘 입고 손에 값진 금반지를 끼웠다고 해서 그 자리에 앉힌다는 것은 얼마나 모순된 행동이며 비합리적인 발상입니까?
인간의 가치는 외적인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의 참된 가치는 인간 그 자체에 있습니다. 한 사람이 우주보다 더 귀한 존재입니다. 세상적인 성공을 거두었다고 귀한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출세 명예가 있다고 귀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말로 할 수 없이 고귀한 가치를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셨기 때문에 존귀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을 외모나 선입견이 아니라 실제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그런 실수를 많이 합니까?
지난 목요일 고등학교 때 같이 학교를 다녔던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 목사님과 대화하다 요즈음 사람들이 너무나 외모로 사람을 판단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겪었던 여러 사례들을 말했습니다. 자신이 교수로 모 대학에서 가르칠 때 학기 초가 되어 전체 학생이 개강 수련회를 했답니다. 자신이 타고 다니는 액셀 승용차를 타고 가서 교직원 주차장에 주차하려고 하니까 안내하는 학생이 주차를 못하게 하더라는 것입니다. 차량 안내하는 신입생이었는데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트럭과 승합차들이 주차해 있는 곳으로 보내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설명하는 것이 구차하여 학생이 인도하는 대로 가서 차를 대고 개강 수련회에 참여했답니다. 그 후 지도 교수가 배정되어 반에 들어갔는데 그 학생이 자신을 보고 놀라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학생들이 있는 가운데서 교수님인지 모르고 엑셀 차를 타고 와서 그렇게 차별대우를 했노라고 외모를 보고 판단한 자신의 실수를 고백하고 공개적으로 사과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이런 차별대우를 받기도 하고 이런 차별대우를 하기도 합니다. 아마 누구도 차별대우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그 학생이 지금은 목사가 되었는데 가끔 전화하며 그 때 일을 기억하며 목회한다고 합니다. 아마 그 목사님 그것 하나만 잊지 않고 목회해도 성공적인 목회를 할 것입니다.
왜 겉모습만 보고 차별 대우를 하지 말아야 합니까?
3)외모만 보고 차별대우를 하는 것은 사랑의 법에 위배되기 때문입니다.(8-9)/성경적 이유
우리 주님께서 주신 최고의 법은 무엇입니까? 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사랑의 법입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최고의 법인 사랑의 법에 저촉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이제 최고의 법 즉 사랑의 법에 의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차별대우 하는 것,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 그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랑의 법을 어기는 죄라는 말씀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하는 것 그것 뭐 대단한 것인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인간은 인간관계에 있어서 어쩔 수 없지 않는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커다란 죄라는 것입니다. 9절을 읽겠습니다. 사람을 차별 대우하면 죄짓는 것입니다. 어떤 죄와 같다는 것입니까? 11절을 보십시오. 살인죄와 간음죄와 같습니다. 외모를 사람을 취하는 것을 아주 사소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외모로 사람을 취한다면 우리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4. 그러면 어떻게 하면 차별대우하지 않고 올바른 대인 관계를 가질 수가 있습니까?
대인 관계의 명저로 현재까지 2천 만부가 팔렸다는 '카네기 처세론'(원제:How to win Friends and influence People)에서는 좋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 째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대하고,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라.
둘 째 결코 다투려 하지 말고 비판이나 불평, 비난(3C: Criticize, Condemn, Complain)을 하지 말아라.
세 째 설사 당신이 옳더라도 당신이 틀릴 수도 있음을 인정하라.
네 째 항상 웃으면서 상대방의 이름을 기억해 두어라
오늘 본문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우려야 합니다.
1) 우리는 인생의 결산의 때가 있다는 것을 알고 사랑의 법으로 말하고 행동하여야 합니다(12).
자유의 율법은 복음을 말씀합니다. 8절에 나온 최고의 법 사랑의 법을 말합니다. 언젠가는 결산을 볼 때가 있는 사람인 것처럼 이 사랑의 법으로 말하고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이 땅의 대인 관계는 언젠가 하나님 앞에서 결산을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12)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설 것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가 다 하나님 앞에 설 사람들입니다. 이 땅의 아름다운 미모, 신분, 인종, 돈, 권력, 명예 등이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언젠가는 다 놓고 하나님께 가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삶으로 이 땅의 삶을 결산하길 원하십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1-3)” 얼마나 대한 한 일입니까? 그러나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으면 궁극적으로는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합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2-23)” 대단한 일을 했는데 왜 그렇습니까? 불법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전13:13)” 사랑은 신분을 초월합니다. 사랑이 세상을 바꿉니다. 큰 믿음은 큰 역사를 만들고 큰 사랑을 큰 변화를 만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 의해 노예 제도가 무너졌습니다. 신분 사회가 변하였습니다. 여성 차별이 무너졌습니다. 인종 차별이 무너졌습니다. 모든 차별이 무너진 좀 더 나은 사회로 되어 가고 있습니다. 차별대우를 없애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평등보다 공정보다 더 차원 높은 사랑으로 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4-7)”
“눈으로 사랑을 말하지 말아요 입술로 사랑을 말하지 말아요... 사랑은 주는 거예요”
교회가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에서 사랑지수와 교회 성장의 관계를 학자들이 연구하였습니다. 서로 다른 교단 8600명을 대상으로 사랑지수 측정을 하였습니다. 사랑 지수 65이하인 12개 교단 2개를 제외하고는 모두 쇠퇴하였다고 합니다. 65이상 나온 13개 교단은 지난 10년 동안 성장하였다고 합니다. 과거는 목회자의 리더십, 훌륭한 시설, 위치, 신학 사상, 전도 열정 등이 교회 성장의 주요인이었는데 지금은 사랑이라고 말을 합니다.
2) 우리는 있는 것 보며 편견 가지고 차별 대우하지 말고 없는 것 보며 긍휼로 채워주어야 합니다(13).
가난한 사람을 보면서 멸시하고 무시한 사람 자신도 긍휼 없는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긍휼을 베풀면 심판을 이기고 자신의 베푼 긍휼로 자랑할 날이 올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의 실제적인 측면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었음을 증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없는 것보고, 모자라는 것 보고 차별대우하지 말고 없는 것, 모자라는 것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채워주어야 합니다. 불쌍히 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세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의 약점을 이용하여 장사하고, 남의 부족을 빼앗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 의사는 환자의 병을 이용해서, 법조인은 죄인의 죄를 이용해서, 학자는 학생들의 무식을 이용해서, 장의사는 초상집의 죽음의 아픔을 이용해서 공정성을 잃어버리고 무엇인가 더 빼앗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서 살아가는 신앙인은 그것이 아닙니다. 부족함을 채워주는 사람이고 기본적으로 긍휼의 마음으로 대인관계를 갖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망하는 것 아닙니다. 자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긍휼을 행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속한 것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좋은 조건을 보면서 그 조건을 선호하며 편견을 갖지 말고 오히려 그 사람에게 부족한 것을 보고 그 사람의 부족을 채워 주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꼭 가난한 사람, 어려운 사람, 부족한 사람만 불쌍히 여김의 대상은 아닙니다. 힘 있고, 능력 있고 권력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모두는 결함이 있고 부족한 것이 서로 있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없는 부분들을 채워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 보십시오. 병자들, 무리들, 굶주린 자들. 그들의 있는 것 보고 차별대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없는 것보고 멸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없는 것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마 14:14)”
굶주리는 사람을 보고 불쌍히 여겼습니다. 짐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차별대우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 (마 15:32)”
방황하는 사람을 보고 차별대우한 것이 아니라 불쌍히 여겼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막 6:34)”
긍휼은 바로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입니다. 우리 교회 우리 가정 우리 사회는 이것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할 때 주님은 기뻐할 것이고 사람들은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입니다. 동물은 약육강식의 법칙이 통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도와주게 만들었습니다. 하와를 돕는 배필로 만들었습니다.
열린교회/김필곤 목사/2010.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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