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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약2: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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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허태수 목사 |
참고 :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야고보서 2:1-13
2007.10.13
장흥에있는 감리교 연수원의뒤편은 아름다운 산입니다. 밤나무도 많고요 숲이 근사하게 어우러져 산책하기에 그만입니다. 반대편으로는 도봉산이 보입니다. 근간에 자주 그곳에서 여러 날 밤을 묵었지만 엊그제 아침엔 아주 특별한 경험을 했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창문을 열었더니 방안으로 산이 들어 온 듯이 느껴지는 거예요. 그러더니 어디서 졸졸거리며 샘물이 땅 밖으로 나왔다가 다시 땅 속 어딘가로 흘러드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졸~졸~ 그렇게 말입니다. 가만히 그 샘물 흐르는 소리를 듣자니 이런 생각이 나요.
‘봄에도 샘물은 흐르는데 이와 같지 않고, 여름에는 샘물이 더 콸콸 흐르는데 가을의 저 소리 같지 않고, 유독 가을의 저 샘물 흐르는 소리가 틀리게 들리는 것은 왜 일까?’
여러분도 봄에 흐르는 샘물 소리와 여름에 흐르는 샘물 소리와 가을의 샘물 흘러가는 소리가 틀릴 거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그렇게 들렸습니다. 어떻게 다른가 하면요, 봄의 샘물 도 졸~졸~ 흐르지만 그 소리는 어딘가 야망이 있는 소리 같습니다. 자기가 뭔가 만물의 새싹을 내게 한다는 자랑스러운 그런 거 말입니다. 여름의 그 넘치는 샘물 소리는 그러면 뭘까? 아, 그건 이제 얼마 안 있으면 만물이 열매를 낼 텐데 그거 내가 수고해서 된 일이야 뭐, 그런 생각이 들어 있어서 흐르는 소리가 조금은 건방져 보이지 않습니까? 저는 그렇게 들립니다. 그러면 가을의 그것, 가을에 흐르는 샘물의 소리는 어떻게 들립니까? 어떻게 들으면 조금은 슬픈, 모든 것을 놓아 버려서 다시 혼자가 된 듯 슬프게 들렸습니다. 다시 가난해진 어느 부자의 처량한 신세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그게 전혀 슬프지 않는 거예요. 그 아침에 듣던 샘물 흐르는 소리는 슬프지 않는 거예요. 왜 그럴까 다시 생각했죠. 가을 샘물은 가난입니다. 가난해진 존재가 가을 샘물입니다.
‘모든 걸 다 놓고 다시 빈손으로 돌아가 가볍게 흘러가니 듣기에 편안 하구나. 제들은 새싹에도 마음을 걸지 않고 열매에 대해서 집착하지도 않고 흐르니 결국 영원으로 가는구나. 가을은 모든 걸 놓고 다시 새 출발 하는 첫 날이구나!’
우리는 잠시 후에 모든 교우들과 산행을 갑니다. 가을 들판에, 가을 산에 갑니다. 거기서 우리는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요? 무슨 느낌을 갖고 걷게 될까요? 제가 바라는 것은 부디 자연의 언어로 우리가 믿는 믿음을 한 번 생각하자는 것입니다. 들판에서서 확인하는 [내가 예수를 믿는 의미]를 갖자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서두에서부터 예수를 믿는 의미를 매우 구체적인 데서 찾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마십시오”(1절).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동시에 사람을 차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임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화려한 옷에 금가락지를 한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회당에 온 경우를 가정하고 그들이 부자를 우대하고 가난한 사람을 천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2-4절).
야고보서 기자는 여기서 가상의 상황을 설정하고 있지만, 이것은 실제상황일 수 있습니다. 2절의 회당(synagoge)은 여기 문맥에서는 크리스천의 모임 즉 교회를 의미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이미 이런 차별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야고보서 기자는 그것을 일깨우기 위해서 이렇게 강한 어조로 말하고 있는 것이죠.
호텔에서 일하는 어떤 사람이 한 이야기인데, 그들은 현관에서 손님이 내리면 우선 손님의 신발을 본다고 합니다. 신발 뒷굽이 닳았으면 별 볼일 없는 사람이니 내버려 두고 뒷굽이 닳지 않았으면 달려가서 영접을 한다는 것입니다. 나는 그이야기를 들은 이후 구두 신는 행위가 더욱 부담스러워 졌습니다. 자구 구두의 뒤를 보게 되어서 말입니다. 또 어떤 목사님이 호텔에서 경험한 것인데, 프라자 호텔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복장을 수수하게 하고 갔다고 합니다. 현관에서부터 종업원들이 눈치를 주고 왜 왔느냐고 하면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를 초대한 사람들이 제법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과의 모임을 끝내고 나오니까 종업원들의 태도가 아까와는 180도 다르게 변해 있더라는 얘기죠. 이것은 오늘 우리 사회에서 지금도 변함없는 얘기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호텔이 그렇고 세상이 다 그렇다 하더라도 교회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에요. 하지만 본문 6절,“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라는 구절에서 보듯이, 이미 그 당시 교회들도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물질주의 문명이 극도로 발달하고 사람을 그가 가진 것으로 판단하는 요즘의 세태 풍조는 교회들도 가난한 사람들을 무시하고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야고보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을 택하셔서, 믿음이 좋은 사람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약 2:5)
여기에서 야고보서와 사회주의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사회주의는 가난한 사람을 부자 만들어주겠다고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였는데, 야고보서는,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택하여 부자가 되게 하신 것이 아니라, 믿음 좋은 사람이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은 야고보서만이 아니라 성서 전체에서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이죠. 복음서에서는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이 선포된다고 하였습니다(눅 4:18).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가난한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서 고린도교회가 시작되었다고 하였습니다(고전 1:26ff.).
이와 같이 주님은 가난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부르시고, 기쁜 소식을 선포하셔서, 믿음을 갖게 하시고,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가난한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준다고 선전하는 일부 대형교회들의 구호와는 너무나 다릅니다. 예수님은“너희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왜냐하면(hoti) (너희가 부자가 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기 때문이다”(눅 6:20)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성서는 가난한 사람을 받아들이지만, 그를 부자로 만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떳떳한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떳떳한 하나님 나라의 구성원 말입니다. 이미 본문 5절에서 가난한 사람을“믿음 좋은 사람”이 되게 하고,“그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였다고 하고, 7절에서는 그들에게 존귀한 이름을 주셨다고 합니다. 이는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지고 명예가 회복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뜻을 모르고 가난한 사람을 무시하고 업신여기는 사람들에게 야고보서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을 압박하는 사람은 부자들이 아닙니까? 또 여러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사람도, 바로 그들이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그 존귀한 이름을 모독하는 사람도, 바로 그들이 아닙니까?”(6-7절)
그들이 부자를 우대하고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지만, 그들을 법정으로 끌고 가고 모독하는 사람들은 바로 그 부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것은 사실은 제 발등을 찍는 행위이며 스스로를 열등하게 여기는 행위라는 것이에요.
8-11절에서 야고보서 기자는 한 단계 높여서 그들이 아무리 착하게 살고 율법을 잘 지켜도 가난한 사람을 차별하면 그 모든 것이 쓸모없게 된다고 합니다.
마지막으로 12-13절에서 야고보서 기자는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는 사람은 결국은 심판을 받게 되며, 그 심판을 받지 않는 길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것뿐이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기자는 이와 같이 3단계의 점층법을 써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기거나 무시하거나 차별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기자가 이렇게까지 강조하는 것은 가난한 사람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역사적 사실, 구원의 현실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가난을 미화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부자가 나쁘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는 가난한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주겠다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가난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 하나님이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여서 당신의 사역의 주역들로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입니다. 가난한 상태에서 일어나는 복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야고보서 본문에서 초대교회는 가난을 부끄러운 것이나 극복해야 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가난한 사람들을 하나님이 받아들이고 명예롭게 하셨다고 보는 관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가을 들판이나 산이 우리에게 주는 느낌은 무엇일까요? 거창하게 말해서 [가을이 우리에게 주는 신앙의 의미]는 뭘까요? 빈손 아닐까요? 봄이나 여름을 그렇게 치열하게 살았지만 결국 다시 모든 것을 훌훌 또는 가볍게 놓아 버리는 그 거대한 [빈 손]말입니다. 자연은, 가을은 가난합니다. 그많은 열매를 위해 수고를 하고 결실을 보았어도 그는 쓸쓸합니다. 그래서 동양의 철인 노자는 [진리는 가을의 얼굴을 지녔다]고 했습니다. 가을은 빈손입니다. 가을은 빈 마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원으로 가는 겁니다. 영원이란 비어있는 존재, 물질세계의 언어로 말한다면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입니다. 우리가 오늘 들판으로 나가 가을, 쓸쓸해지는 가을을 만나게 될 때 이런 교훈이 일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나 신앙은 [가난]입니다.
3박4일의 영성훈련 동안 많은 말씀을 듣게 됩니다. 말씀을 전하는 분들은 목사도 있고 평신도도 있습니다. 그들은 각자 다양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많이 배운 목사도 있고, 미국의 비버리 힐스에 집을 두고 요트를 즐기던 갑부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들의 간증과 말씀을 들은 후에 거기 참여했던 40여명의 훈련생들로부터 느낌을 듣는 시간이 있습니다. 어제 어느 젊은 집사가 말했습니다. 그는 춘천에서 올라간 장로교회 집사인데, 3박4일동안 많은 분들의 말씀과 간증 그리고 같은 조의 조원들의 삶을 들어보니 대략 다음과 같다는 것이었습니다. “작으나 크나 돈이 잘 벌리고 부자로 살 때는 하나님과의 인연을 멀리하거나 끊고 살다가 결국 쫄딱 망하게 되니까 다시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이었답니다. 그래서 자기는 그걸 명심하고 잘살 게 되더라도 결코 하나님과의 인연을 멀리하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가을에, 빈손이 될 때, 가난하면 하나님을 만나거나 찾게 된다는 말 아닙니까? 그러니 신앙은 교회는 [가난]입니다. 그걸 보러 가을 들판으로 이제 나가봅시다. 그리고 그걸 느끼고 볼 수 있다면, 당신은 인생 가운데 가장 멋진 10월의 하루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10월의 오늘은 여러분과 제게 아주 멋진 날입니다. 그동안 허목사를 통해 하시던 하나님의 음성 대신에 그분이 직접 하시는 설교를 들으러 가는 날입니다. 모처럼 하는 하나님의 라이브라서, 하나님의 음성을 생생하게 들을 때 좀 더 잘 들으시라고 몇 가지 포인트를 짚어 드렸습니다. 이왕 우리가 모였으니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라는 노래하나 선물로 흥얼거리면서 산으로 떠나겠습니다.
눈을 뜨기 힘든 가을 보다 높은 저 하늘이 기분 좋아
휴일 아침이면 나를 깨운 전화
오늘은 어디서 무얼할까
창 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없어 바라면 죄가 될테니까
가끔 두려워져 지난밤 꿈처럼 사라질~까 기도해
매일 너를 보고 너의 손을 잡고 내곁에 있는 너를 확~인해
창 밖에 앉은 바람 한 점에도 사랑은 가득한 걸
널 만난 세상 더는 소원없어 바라면 죄가 될테니까
살아가는 이유 꿈을 꾸는 이유
모두가 너라는 걸 네가 있는 세상 살아가는 동안 더 좋은 것은 없을꺼야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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