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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하신 하나님

신명기 복음............... 조회 수 2257 추천 수 0 2007.11.11 17:3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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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신4:26-31 
설교자 : 한태완 목사 
참고 : http://je333.com 
미국 시카고에 있는 무디 예배당에는 강단 위쪽에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표어가 붙어 있다고 합니다. 어느날 옷차림이 허름하고 불량해 보이는 사람이 교회 앞을 지나가다가 힐끗 안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표어를 보자 그는 욕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같이 못되고 나쁜 놈은 예외일 거야!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사랑하시겠어!’ 그런데 갑자기 교회당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말씀을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가운데 통로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바로 그때 다른 통로로 무디가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이 사람은 하나님께서 자기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고 기쁨으로 외쳤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신다!’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지 않는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의식 때문입니다. 누가 가르쳐 주지 않아도 내면에 있는 죄의식이 이런 위축된 태도를 가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우리의 죄를 보고 즉시 분노를 쏟아붓지 않으십니다. 대신 당신의 아들 예수님께 분노를 쏟으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오직 하나님은 자비하심으로 죄악을 사하사 멸하지 아니하시고 그 진노를 여러 번 돌이키시며 그 분을 다 발하지 아니하셨으니"(시78:38)

자비는 성령님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성품이신 자비는 인자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뜻합니다.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에 따라 유순하고 온유하여 타인을 넓게 이해하는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 마음은 관용과 친절이 내포된 마음입니다. 인간의 자비하는 마음은 성령님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성령님을 사모할 때 그 자비는 인간에게 주어집니다. 이런 사실들을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자비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을 일컫습니다. 하나님께는 절대적인 성품과 도덕적인 성품이 있습니다. 절대적인 성품은 하나님께서 영이시라는 것과 완전무결, 절대불변, 영원하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도덕적인 성품은 하나님께서 사랑이시고 인자하시고 자비로우시고 공의로우시고 의로우시고 좋으신 분이란 사실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자하심이 매우 풍성하신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중요한 것은 인류가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의 증거인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구원의 놀라운 역사를 체험하게 됩니다.

둘째, 자비는 성령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는 자비는 참된 자비라고 말씀할 수가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영원한 것이기 때문에 일시적이고 기회주의적인 인간의 자선행위를 자비로 단정 지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주신 자비만이 참된 자비입니다. 인간은 온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온전하신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에게 임할 때 인간의 자비는 참된 자비가 될 수 있습니다. 그 길은 성령님으로 말미암습니다. 성령님을 인정하고 환영하고 모셔드리고 의지할 때 하나님의 자비가 자신에게 임하게 됩니다.

셋째, 자비는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에게 자비로 옷을 입으라고 말씀하십니다(골 3:12).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신과 같이 하나님의 자비를 본받지 아니하면 벌을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만일 하나님의 인자에 거하면 그 인자가 너희에게 있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너도 찍히는 바 되리라”(롬 11:22). 여기서 인자는 신약성경 원어인 헬라어 ‘크레스토테스’ 곧, 자비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자비로 무장하여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는 선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우리의 자비가 될 때 세상은 밝아지게 됩니다. 이웃에 대한 따뜻하고 온유한 마음인 자비가 없는 세상은 인류의 큰 고통입니다. 자비는 말이나 이론이 아닌 행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비로 무장하여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신앙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현재의 자신의 삶에 대하여 만족해하며 사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현재보다 좀더 나은 환경에서 살고 싶어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좀 더 넓고 쾌적한 집에서 살고 싶어하고, 좀더 좋은 자동차로 바꾸어 타고 싶어하며, 지금보다 더 나은 수입을 꿈꾸며 풍족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마찬가지로 출애굽하여 광야에서 생활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하루 속히 이 메마른 광 야를 벗어나 하나님이 지시하시는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 살고 싶어하는 간절한 소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들이 40년이라는 오랜 세월동안 광야에서의 삶을 살고 있었으니 그 생활이 얼마나 고달프고 권태로웠겠습니까. 누구나 이런 척박한 환경에서 오랜 기간 동안 생활하라고 한다면 아마 원망불평하지 아니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고대하던 가나안 땅에 들어간다고 해서 반드시 행복이 보장되리라는 생각 또 한 잘못된 것입니다. 행복은 환경이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사느냐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사느냐하는 것입니다. 환경은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에 따라 달라집니다. 변화됩니다. 성경을 보면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고 우상을 섬기고 인간들이 악해지고 타락하고 방탕하면 그 땅이 저주를 받아 사막과 같이 황무지로 바뀌게 될 것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신 28:23-24).
그러나 이와 반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 사막이 변하여 살기 좋은 에덴동산으로 바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 32:15, 겔 36:35).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루라도 속히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기를 원했지만,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 어떻게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고별설교 부분에 해당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삼, 사백 년후에 되어질 일을 이렇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 아들과 딸을 낳고 손자와 손녀를 낳고 오래오래 잘 살게 되면 부패하게 되고 우상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잘 살게 되어도 겸손하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 좋겠는데 도무지 그렇지를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조금이라도 잘 살게 되면 교만해지기 시작하고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며, 그 결과 마음이 부패해지고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전파된 후로 지금의 구라파는 모두 그리스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인들의 교회출석률이 5%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미국도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로 하나님을 잘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교인들의 교회 출석률이 20%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50%의 교인들만이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머지 50% 의 교인들은 장사를 하고 있든지 들과 산으로 놀러갔든지 골프장에 갔든지 딴 짓을 하고 있 다는 증거입니다.
앞으로 주 5일 근무제가 전 직종으로 확대되면 금요일이나 토요일에 멀리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더 많아질 것입니다. 자연히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되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게 되며 하나님을 멀리하다가 죄를 짓고 결국에는 우상숭배를 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십계명 중의 제 1계명이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너희에게 두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하나 님 외에 다른 신은 우상입니다. 돌부처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모두 우상입니다.
디모데후서 3: 1-5절에서, 사도 바울은 말세를 사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우상인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 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보다 자기자신을 더 사랑하므로 자신이 곧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므로 돈이 우상입니다.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므로 쾌락이 우상입니다. 과연 오늘날 이 말씀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까? 주일성수를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은 바빠 죽겠는데 교회 출석이 문제냐? 당장 돈이 필요한데 십일조가 문제냐?" 라고 자신을 합리화시킵니다. 이처럼 자기 자신 위주로 살다보니 말씀도 저버리고, 주일도 지키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시115:4- 8)

하나님이 가장 미워하는 죄는 우상숭배의 죄입니다. 신명기 13장 9절을 보면, 우상숭배를 권하거나 참여시키는 자는 긍휼히 여기지도 말고 불쌍히 여기지도 말며 용서하지도 말고 아예 죽이라고 명하셨습니다. 이는 누군가 우상숭배를 하기 시작하면 우상숭배를 시작한 그 사람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온 집안이 망하고 그 민족과 나라까지 망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본문 26절에서 모세는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 증거를 삼노니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는 땅에서 속히 망할 것이라 너희가 거기서 너희 날이 길지 못하고 전멸될 것이니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하다가 결국 전멸당하게 된다는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여호수아 24:20에서도 "만일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신 후에라도 돌이켜 너희에게 화를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잘살다가도 하나님을 저버리고 이방신을 섬기며 우상숭배를 하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내리시던 축복이 그치고 대신 화를 내리시고 이들을 멸하시겠다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오늘날의 캄보디아는 가난한 나라에 속해 있습니다만, 한 때 태국 라오스 베트남 전역을 지배했고, 중국 황제가 면담을 요청했으나 돌려보낼 정도로 강대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극한우상숭배로 저들의 영광은 짧게 지나갔고, 그 자손들이 오늘날까지 저주 아래 놓여있습니다. 자원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온 국민들이 가난에 허덕이며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캄보디아 국민들은 불교를 숭상하며 특별히 뱀을 좋아하고 뱀을 극진히 섬깁니다. 그러다 보니 집에도 뱀의 그림이 많고, 장난감을 비롯하여 먹는 그릇에 조차도 뱀의 그림이 그려져 있으며, 다리의 난간도 온통 뱀을 징그럽게 그려놓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나라를 대표하 는 비행기에 조차도 일곱 머리 달린 뱀이 그려져 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캄보디아하면 세계적으로 유명한 건축물이 있습니다. 세계 7대 불가사의 중의 하나 인 앙코르사원(Angkor War)입니다. 앙코르사원은 그 옛날 수리아 바르만 2세가 20만 명의 사람을 동원하여 20년에 걸쳐 건축했습니다. 그런데 밀림 한가운데서 발견된 이 사원이 어디에서 어떻게 그 많은 돌을 가져다가 지었는지 아직도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사원에 쓰인 돌 하나 하나마다 우상들이 잘 조각되어져 있습니다. 이 사원뿐 아니라 1181년부터 1218년까지 통치했던 자야 바르만 7세는 얼굴사원을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백 년이 지난 후 그렇게 강성했던 이 나라도 소리 소문없이 저절로 없어졌습니다. 이는 외부의 침략에 의해 무너진 것이 아님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600년이 지난 후 프랑스의 고고학자에 의해 앙코르 사원이 밀림 속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채 어떻게 이렇게 짧은 시간에 강성했던 한 나라가 비참하게 망해갔는지 고고학자들이 연구하다가 이 민족이 몽땅 문둥병으로 죽은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그들이 돌에 새겨놓은 사람들의 얼굴 모습을 연구하다가 알아낸 것입니다. 점차 성한 얼굴 에서 코가 떨어져나가고 귀가 떨어져나가고 점점 얼굴 형태가 일그러지는 모습의 조각에서 이곳에 문둥병이 창궐했던 것을 알아낸 것입니다. 결국 우상을 섬기던 이 성을 하나님이 저주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상숭배죄가 얼마나 무서운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을 신격화했습니다. 김일성 동상 앞에서 절해야 하며, 그가 죽고 난 후에도 방부처리를 하여 궁에 모셔놓고 숭배하고 있습니다.
북한 주민만 절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북한을 방문하는 사람들에게조차도 절을 하도록 강요하고 있습니다. 만일 북한을 방문한 남쪽인사들이 그들이 시키는 대로 절을 했다면 심각하게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우상숭배가 극에 달한 북한정권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심판을 받고 망하게 될 것입니다. 이처럼 북한은 온 백성들을 김일성 앞에 절하게 만들고 신으로 만들어 우상화했기 때문에 그 땅이 저주를 받아 무슨 농사를 지어도 되는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남한 연구소에서 그 토양에 알맞는 신품종을 개발하여 심어보아도 농사가 잘 되지를 않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 미래까지도 다 알고 계십니다.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허물이 많고 연약한지 아시면서도 우리를 창세 전에 택하시고 하나님의 정하신 때에 불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모르고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 아시고 부르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롬 11:29).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잘 살게 되면 하나님을 멀리하게 되고 타락하게 되며 사신우상을 섬기다가 결국 망하게 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더구나 전쟁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도 다른 나라에 포로가 되어 열국 중에 흩어지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 28절에서 "너희는 거기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바 보지도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먹지도 못 하며 냄새도 맡지 못하는 목석의 신들을 섬기리라"고 했듯이, 그 나라에 포로로 잡혀가서 듣도 보도 못한 우상을 강제로, 그것도 지겹도록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회개하고 돌아오게 만듭니다.

본문 29~30절을 보면 "그러나 네가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게 되리니 만일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그를 구하면 만나리라 이 모든 일이 네게 임하여 환난을 당하다가 끝날에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그 말씀을 청종하리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하나님의 백성의 특징입니다. 참으로 우리 인간들은 간사합 니다. 편안하게 잘 살면 하나님을 멀리하다가 매를 맞고, 고통으로 죽을 지경이 되면 하나님 앞에 두손들고 돌아오는 것입니다. 마치 찬송가 330장의 가사처럼, 고통의 멍에를 벗으려고 예수님께로 나오는 것입니다. 집을 나간 탕자도 모든 것이 잘 되고 계속해서 잘 살았다면 결코 아버지께로 돌아오지 않았 을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멀리하고 타락의 생활을 하는 사람에게 오는 환난과 고통은 하나님께 돌아오게 만드는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본문 31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들에게도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비록 이스라엘이 범죄 했을지라도 회개하면 이같은 은총을 베푸시는 까닭은 당신의 "자비하신" 성품과 그들의 열조와 맺은 "언약" 때문입니다. 또한 동시에 하나님 자신이 언약에 충실함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택한 자와 택하지 않은 자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택함 받은 사람도 타락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택자는 환난과 고통이 오면 반드시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은 택한 자를 결코 버리지 아니하십니다.

존은 21세의 젊은 나이에 대서양을 횡단하는 노예선 그레이하운드 호의 소유주가 되었습니다. 그는 도덕을 비웃고 종교를 조롱했습니다. 심지어 훗날 그의 생애를 바꾸게 만들었던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을 가지고 농담을 만들기까지 했습니다. 어느 날 밤 그레이하운드 호는 엄청난 파도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그가 잠을 깨어 보니 선실에 물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레이하운드 호의 한쪽 옆구리가 파손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밤새도록 펌프로 물을 퍼냈습니다. 9시간 동안, 그는 선원들과 함께 배가 가라앉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다 동원했습니다. 그러나 가망이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의 희망이 배보다 더 부서졌을 때, 그는 소금물에 젖은 갑판 위에 몸을 던지며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더 이상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다면 주여, 우리 모두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자비를 받을 가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자비가 임했고 그레이하운드 호와 모든 탑승원들은 살아남았습니다. 그는 폭풍이 몰아치던 대서양에서의 그날 밤에 나타난 하나님의 자비를 결코 잊을 수 없었습니다. 회심한 그는 결국 영국으로 돌아가 많은 찬송시를 지었습니다. 그가 지은 찬송시에는 이런 것도 있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우리 하나님은 참으로 자비하신 하나님입니다. 예레미야애가 3:48-49을 보면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내 눈의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 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라고 했습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나라가 망한 후에 죽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 고 눈물을 흘리며 슬퍼하고 울부짖었습니다. 그러나 낙심 중에도 소망을 가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하나님의 백성이 결코 진멸되지 않는다는 확신이 있었 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을 불쌍히 여겨주시고 다시 회복시켜주실 것을 믿고 소망을 갖게 되었기 때문입니다(애 3:20-22).

예레미야애가 3:33을 보면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들에게 여러 가지로 고생하게 하시는 것은 이들이 미워서가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기 위해, 축복하기 위해 그리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 회개시키기 위해 주시는 징계라는 말씀입니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계3:19)

시편 103편을 보면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저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구속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케 하사 네 청춘으로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여호와께서 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압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판단하시는도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항상 경책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 로다... 아비가 자식을 불쌍히 여김같이 여호와께서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불쌍히 여기시나니 이는 저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진토임을 기억하심이로다...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치리니"라고 시편기자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찬양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성도들을 향하여,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고, 이 세상 풍속을 좇 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며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서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으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리시고 은혜로 구원을 얻게 하셨다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선포하고 있습니다(엡 2:1-6).

복음성가 "주의 자비가 내려와" 함께 부르겠습니다.

주의 자비가 내려와 내려와
주의 자비가 봄 비 같이
주의 자비가 내려와 나를 덮네
주의 자비가 내려와 내려와
주의 자비가 봄 비 같이
주의 자비가 내려와 나를 덮네
헤이-호! 주의 자비하심과
헤이-호! 주의 은혜로
헤이-호! 나는 영원히 춤추리
헤이-호! 주의 자비하심과
헤이-호! 주의 은혜로
헤이-호! 나는 영원히 춤추리

자비하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시기 바랍니다. 자비는 하나님의 성품이요 성령의 열매입니다. 그러므로 자비와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신 성품을 본받아 모든 사람들에게 자비와 긍휼을 베풀며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 기도: 자비로우신 하나님, 죄인인 저를 불쌍히 여겨주세요. 그리스도께서 저를 위하여 죽으셨음과 그의 보배로운 피가 저의 모든 죄를 씻으셨음을 믿습니다. 저는 제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그리스도를 신뢰하기에 지금 말씀을 믿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제 마음에 주님이시요 나의 구원자로 모셔 드립니다. 날마다 주님의 뜻을 행하도록 도와주세요. 참평안과 안식을 주시는 주님의 은혜 중에 거하며 사명을 감당하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곧 우리의 삶과 일치하도록 인도하소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을 찬양케 하소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신 보배로우신 나의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태릉고등학교 교사)

* 2부 : 분반(구역) 공부 자료

1. 말씀: 자비롭고 인자하신 하나님

독일 위벡 교회의 낡은 돌판에는 '주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라는 작자 미상의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너희는 나를 주라 부르면서도 따르지 않고, 빛이라 부르면서 우러르지 않고, 길이라 부르면서 걷지 않고, 삶이라 부르면서도 의지하지 않고, 슬기라 부르면서도 배우지 않고, 깨끗하다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고, 부자라 부르면서도 구하지 않고, 영원이라 부르면서도 찾지 않고, 어질다 하면서도 구하지 않고 존귀하다 하면서도 섬기지 않고, 굉장하다 하면서도 존경하지 않고, 의롭다 부르면서도 두려워하지 않나니, 그런즉 너희를 꾸짖어도 나를 탓하지 말라."
입술로 고백하는 내용과 실제로 하는 행동이 다름을 보여주는 글입니다. 세상에서 표리부동한 사람이 온전히 살 수 없듯이 하나님 앞에서도 언행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은 살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기 때문입니다. 말만 앞서는 우리를 바라보시며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귀담아 듣고 순종합시다. 주님은 자비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십니다. 주님앞에 잘난 척하지 마세요. 불쌍히 여김을 받는 나라와 민족이 복이 있고 불쌍히 여김을 받는 가정에 기적이 일어날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립시다.
"여호와는 의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103:8)

2. 묵상 및 토의
0 나는 하나님이 참으로 자비하신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는가?
0 나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는 공의와 정의의 삶을 살고, 이웃들에게는 자비와 인자의 삶을 살고 있습니까?
0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나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셨습니까? 나는 그분이 베푸신 사죄의 은총 앞에서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0 나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에서 창조적인 삶을 살고 있는가?
0 나는 하나님만이 나의 참되고 영원한 기업인 것을 믿는가?
0 약속을 반드시 지키시는 하나님을 신뢰합니까? 그 하나님이 진행하시는 역사를 거역하는 자가 아니라, 따르는 자로 살고 있습니까?
0 나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은총과 자비를 찬양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며 살고 있는가?
0 오늘 말씀을 통해 내가 느낀 점이나 앞으로의 나의 결심, 각오, 다짐 등을 이야기 해보세요

3. 예화(1): 하나님의 자비하심

유대인의 전설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기 바로 전에 그의 보좌 주위에 있는 천사들과 의논을 하셨다고 합니다. 정의의 천사는 사람을 만들면 안된다고 말했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을 만들면 그가 동료 사람들에게 모든 종류의 사악을 자행할 것이고, 또 사람은 강퍅하고 잔인하고 부정직하여 세상은 불의로 가득 차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다음에 진리의 천사가 반발하며 “사람을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거짓되고, 그의 형제들을 속일 것이며 심지어 하나님 당신도 속일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거룩의 천사도 “사람을 절대로 만들지 마십시오. 그는 당신의 면전에서 당신의 이름을 더럽힐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자비의 천사가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서 말하기를 “저희의 하늘의 아버지, 사람을 만드시옵소서. 그가 죄를 짓고 정의와 진리와 거룩의 길에서 멀어질 때, 제가 부드러운 손길로 그를 감싸고 사랑스런 음성으로 그에게 말하여 다시 당신께 데리고 오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과연 그렇습니다. 자비의 천사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우리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하고 부패한 존재입니다.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구제불능의 존재입니다. 그러나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고, 허물을 덮어주시고, 실수를 용서해주십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죄악 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십시오. 스스로 멈출 수 없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가운데 고통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다시 주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시18:25)

* 예화(2): 자비

한 사람이 어린 딸과 함께 산지에 살면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와 딸은 잃은 양을 찾다가 그 양이 가시나무에 걸려 빠져 나오지 못하고 바둥거리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그 양을 가시덤불에서 떼어내었으나 그 양은 이미 여러 곳에 긁히고 상처가 나 있었습니다. 상처가 나고 여러 곳에 긁힌 자국을 보면서 어린 소녀는 양이 너무 불쌍하여 울면서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 저 나무가 미워요. 저 나무를 잘라버려요."
다음날 아버지와 딸은 도끼를 가지고 가시 나무를 잘라 버리려고 그 곳을 찾아갔습니다. 나무 가까이 갔을 때 그 소녀는 작은 새 한 마리가 그 가시나무 위에 앉더니 작은 부리로 양이 가시에 긁히면서 남겨놓은 털들을 쪼아 모으는 것을 보았습니다. 작은 새는 부리 가득히 털을 물고는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자세히 살피던 어린 딸은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아빠, 하나님께서 왜 이곳에 가시나무를 자라게 하시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아요. 나무의 가시들은 작은 새가 집을 지을 수 있는 부드러운 털을 모으는 일을 하는가 봐요."

사실 대자연은 서로서로 조화를 이루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고하고 노력한 대가로 얻은 것이 가라지라면 이 얼마나 화나는 일입니까? 그러나 주님께서는 가라지나 가시나무들일지라도 뽑거나 베어버리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세상의 끝 날에 심판하실 이가 따로 있기 때문에 오늘 우리는 가시나무도 가라지도, 좌절과 실패와 죄에 시달린 우리의 형제 자매들도 다 품에 안고 언젠가 우리 주님이 보상하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우리의 일인 것입니다. 자비는 성령의 열매 중 하나이며, 긍휼과 불쌍히 여기는 것으로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합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 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눅6:36)

* 예화(3):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고

한 아이가 학교에서 신발을 도둑맞았다. 신발을 훔쳐 간 도둑 때문에 그 학급에서 소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신발 도둑을 잡는 일은 아주 쉽다. 아이들은 순진해서 훔친 신발을 그냥 신고 다니기 때문이다. 신발 검사 결과 신발을 훔친 아이는 금방 드러났다. 신발을 훔치는 것은 나쁜 일이다. 그리고 훔친 신발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담임선생님은 신발을 잃어버린 아이를 불렀다. 아마도 이 아이는 집안 살림이 넉넉한 아이였던 모양이다. 선생님이 그 아이에게 말했다. “신발을 그 아이에게 주면 안 되겠니? 너는 부자라서 신발이 여러 켤레 있잖아?” 선생님은 신발을 훔친 아이가 너무 가난해서 학교에 신고 올 신발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신발을 훔친 것은 나쁜 일이다. 돌려주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것이 ‘정의’다. 그러나 세상은 정의로만 움직이지 않는다. 정의보다 더 큰 개념은 자비를 베풀고 품어 주는 것이다. 사랑은 덮고, 품어 주고, 변화시키는 힘이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의를 붙들어야 한다. 나의 의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의인 십자가를 붙들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관계에서는 사랑을 붙들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사랑을 붙들어 방종에 빠져들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의를 붙들어 다른 사람을 정죄한다는 것이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삼하22: 26)

* 예화(4): 징계 속에 감춰진 사랑

영화 <오즈의 마법사>에 보면 도로시, 겁 많은 사자, 허수아비, 양철 인간이 자신에게 중요한 것을 얻기 위해 마법사를 찾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이 마법사가 있는 곳에 다가가자 ‘펑’ 하고 불꽃이 튀면서 거대한 녹색 연기가 치솟는다. 그리고 연기가 걷히자 위협적인 모습의 머리가 나타나 각자의 소원을 말하라고 한다. 하지만 전지한 마법사는 사실 그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그는 두뇌를 갖고 싶다는 허수아비에게 “소의 여물이나 될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놈이 두뇌를 요구하다니 뻔뻔스럽구나”라고 소리칠 뿐이었다.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오즈의 마법사와 같은 존재로 생각한다. 그분이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이해나 사랑이나 자비가 전혀 없는, 불꽃과 연기에 둘러싸인 두려운 존재라고 믿는다. 이는 하나님의 징계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되는 오해다. 부모들은 잘 알겠지만, 자식을 징계하는 것은 결코 재미있는 일이 아니다. 나도 자녀들에게 훈계하기 위해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이 징계를 가했던 적이 여러 번 있다. 하지만 부모는 자식을 징계해야 할 책임을 무시할 수 없다. 자녀를 징계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지상의 부모들과는 달리 징계의 목적과 범위는 물론,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한계까지 알고 계신다. 하나님의 징계는 그분의 완전한 사랑에서 우러나온다. 이런 점에서 그분의 징계는 완전하다.
"여호와의 자비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렘애3:22,23)

* 예화(5): 하나님의 자비하심

당신 눈에는 자비로 흘러넘치는 하나님의 잔이 보이는가?
아니면 그저 잔이 마를까 노심초사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에는 너무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드는가?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결코 모자르는 법이 없습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자비하심은 결코 우리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죄악 된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구하십시오. 스스로 멈출 수 없다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죄 가운데 고통받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주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얼어붙은 마음을 녹여 다시 주님 안에 사는 우리가 되길 소망합니다.
* 기도: 인자와 긍휼로 이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기 원하여 쉬지 않고 중보하는 지체들 위에 성령의 능력을 덧입히시며 주께 돌아오는 자들이 주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소서. 주님의 자비하심과 인자하심을 본받아 우리도 형제를 사람하고 용서하게 하소서.

4. 찬송: (337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1.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말 들으사 죄인 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2. 자비하신 보좌 앞에 꿇어 엎드려 자복하고 회개하니 믿음 주소서
3. 주의 공로 의지하여 주께 가오니 상한맘을 고치시고 구원하소서
4. 만복 근원 예수시여 위로하소서 우리 주와 같으신 이 어디 있을까

[후렴]
주여 주여 내말 들으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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