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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택의 자유

신명기 조용기 목사............... 조회 수 2044 추천 수 0 2008.11.21 23: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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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신30:19-20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03년 10월 12일 주일3부설교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 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

오늘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선택의 자유’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우리의 삶속에 운명지어진 것과 우리가 선택해야 하는 일이 양분되어 있습니다. 나의 부모는 내가 선택할 수 없습니다. 운명지어진 것입니다. 아무리 탄식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부모님은 내가 택한 것이 아닙니다. 저희 아버지는 조, 두자, 천자이시고 우리 어머님은 김, 복자시고 선자신데 내가 택한 것 아닙니다. 하니님이 택해서 결혼시켜서 그 가운데 나는 운명적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선택할 여지가 없습니다. 내가 태어난 시대도 환경도 내가 택한 것이 아닙니다. 저는 일정 말기에 태어났고 또 굉장히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것도 내가 택할수 있는 것 아닙니다. 운명입니다. 이와같은 것들은 결코 내가 선택할 자유가 없습니다. 그냥 운명지어진 것으로 받아 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육 훈련은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내가 교육을 받고 훈련을 받는 것 다른 사람이 선택 안해 주어도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저는 어릴때 영어를 열심히 공부해야 온천하에 나가서 복음을 증거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영어를 공부하는 길을 내가 택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열심히 영어도 공부하고 일본어도 공부하고 불어도 공부하고 독일어도 공부했습니다. 내가 택한 것입니다. 누가 시켜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교육이나 훈련은 내가 선택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혼도 직업도 내가 살곳도 나의 선택할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운명지어진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이 또한 선택의 자유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느 분이 TV 방송에 나와서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듣고 저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습니다. “왜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빚을 지고 애기와 함께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는 여인을 막지 못했는가! 이 세상에 전쟁과 질병과 고통이 이처럼 많은데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그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었는가! 그것을 볼때 하나님은 계시지 않는다. 내 마음이 바로 하나님이다.” 그렇게 TV에서 말을 하는걸 보았습니다. 정말 듣기에 민망스럽고 당황했습니다. 이분은 성경도 하나님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크게 오해한 것입니다.

1. 인간의 운명과 선택의 자유

첫째로, 운명과 선택은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인 것입니다.
아담이 지음을 받아 에덴의 낙원에 거하게 된 것은 선택의 여지없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이요, 운명이었습니다. 아담은 스스로 자기를 지은 것은 아닙니다. 자기가 스스로 에덴을 짓고 그곳에 있은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다 미리 에덴을 만드시고 아담을 지어 주신 것이므로 운명적인 것입니다.
창세기 1장 26절로 27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자기가 원튼 원치 않든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에덴에 살도록 운명지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아담과 하와에게도 하나님은 선택의 자유를 주신 것입니다. 동산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와 선악과 나무가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아담과 하와에게 생명나무의 열매 따먹는 것은 좋아도 선악을 아는 나무의 열매는 따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는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잘못된 선택은 무서운 결과를 갖고 온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창세기 2장 15절로 17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생명을 얻는 나무 실과는 아담과 하와가 자유로 먹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악을 아는 나무의 실과는 먹으면 죽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선택은 아담과 하와에게 달렸습니다. 그것은 선택의 자유를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 잘못된 선택을 했습니다. 뱀이 와서 하와를 꾀었습니다. “정말 동산에 모든 실과를 다 먹지 말라고 하더냐?” “아니야~ 모든 실과를 다 먹되 동산 중앙에 있는 선악을 아는 실과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죽을까 하노라 하더라” 마귀가 뭐라고 말했습니까? “아니라~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 열매를 먹으면 눈이 밝아 네가 하나님처럼 될까 하나님이 두려워해서 그런다.” 유혹했습니다. 탐욕이 들어온 하와는 스스로 선택해서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 주었을때 아담이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선택해서 그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그들은 타락했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었습니다.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었습니다.

2.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의 오해

그러므로 오늘 두 번째 여러분께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TV에서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의 오해를 제가 여기에서 풀어주고자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지구상의 비극은 인간이 스스로 택한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아파트에서 뛰어 내리는 사람을 못뛰어 내리게 하지 않았느냐. 왜 전쟁과 가난과 고통과 슬픔이 세상에 있는 것을 막지 못했느냐? 그러므로 하나님이 안계신다. 여러분 하나님은 하늘과 땅과 세계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것을 보시기 지극히 좋았더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아름답고 좋은 세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보는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의 비극적인 세계는 하나님이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스스로 선택한 삶인 것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을 반역하고 먹으면 죽는다고 한 선악과를 따먹고 이 비극적인 운명을 초래한 것입니다. 모든 것이 죽음이라는 나무의 뿌리에서 나온 것이 오늘날 이 세상의 비극인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반역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영적으로 죽고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로 말미암아 땅은 저주를 받아 가시와 엉컹퀴를 내고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17절로 18절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너의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 그리고 여인은 해산의 고통을 하고 남편과 아내는 서로 지배하고 지배 당하는 갈등과 고통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창세기 3장 16절에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다스리는데 이것이 갈등의 시작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육체적 죽음을 선언했습니다.
창세기 3장 19절에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 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가 보는 이 세상에 죄, 마귀와 세속, 질병과 저주와 가난과 전쟁과 죽음과 좌절과 절망 이런 것은 하나님이 만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런 것을 만들지 아니했고 이러한 것을 취하지 않도록 아담에게 경고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아담이 하나님을 반역하고 마귀와 짝을 지어 스스로 택한 운명이고 이것을 자기의 후손인 인류에게 물려준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하나님이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다고 했는데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제일 조건은 자유입니다. 아담이 주어진 삶의 선택의 자유가 없다면 그는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하나님은 꼭두각시를 만들어 놓지 아니했습니다. 로봇을 만든 것 아니에요.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어서 인간을 만들어 놓았지 인간을 로봇으로 만들어 놓지는 아니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의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 있는 이상 그 결과에 대한 책임도 져야 되는 것입니다. 자기가 잘못 택했으면 잘못 택한 책임을 져야합니다. 책임을 남에게 전가시킬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선악과를 먹는 날에는 정령 죽으리라고 경고했는데도 경고를 알고도 선악과를 택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2절에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고 사망의 열매로써 오늘날 우리는 온 세계의 비극과 고통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의 잘못된 선택을 남의 탓으로 돌리면 안돼요. 성경에도 보면은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 하나님 탓으로 하와의 탓으로 돌렸습니다. 당신이 지어서 내게 주신 그 여자가 주므로 먹었나이다. 자기가 선악과를 먹어 놓고 난 다음에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고 하와에게 돌렸습니다. 하와는 뱀이 나를 꾀임으로 내가 먹었나이다. 자기 책임을 뱀에게 돌렸습니다. TV에 나와서 어떤 사람 말하는 것을 들으니까 자기가 도박으로 패가 망신이 되었는데 끝까지 자기 아내 때문에 패가망신 되었다고 합니다. 도박을 할때 아내가 자꾸 돈을 빌려다 주었기 때문에 그렇다는 주장입니다. 그 아내는 말하기를 “남편이 나를 주먹으로 두들겨 패고 칼로써 죽이겠다고 협박하므로 내가 돈을 안빌려 올수가 없었다. 사돈의 팔촌까지 가면서 다 돈을 빌렸는데 안 빌리면 때리고 칼로써 죽인다고 하니까 내가 빌려왔다.” 그런데 남편은 나중에 경찰에 잡혀서 “이것은 내 죄가 아니고 내 아내 죄입니다. 내 아내가 돈을 대 주었기 때문에 내가 도박을 해서 패가망신했다.” 사람들은 자기가 선택한 길을 남에게 책임을 자꾸 짊어지우려고 합니다.
고린도후서 11장 3절에 "뱀이 그 간계로 이와를 미혹케 한것 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향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라고 바울이 말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벗어나 부패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잘못된 선택이 그렇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택하고 성령충만하고 열심히 기도하며 진실하게 사는 것을 택할수도 있고 게으르고 기도하지 않고 말씀 읽지 아니하고 세상과 마귀하고 짝해서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큰 호수는 물고기가 만들지 못합니다. 큰 호수는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호수에 사는 물고기가 오른편에 살것인가 왼편에서 살것인가 바로 헤엄을 쳐갈것인가 있는 자리에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는 자기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호수라는 그 자체는 운명지어진 것입니다. 많은 것에 우리가 운명지어져 있지만 많은 우리의 삶에 우리 스스로가 선택해야 될것이 많이 있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의 시험과 선택

셋째로, 오늘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예수님은 어떻게 선택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십주 사십야 금식하시고 광야에서 마귀의 시험을 당할 때 다른 시험이 아닌 선택의 시험인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시험을 당했습니까? 예수님도 아담과 하와처럼 시험에 넘어질수 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시험한 것이지 전혀 시험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다면 시험할 필요 없잖습니까. 예수님도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기 때문에 선택의 자유가 있어서 시험에 빠질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마귀가 시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십주 사십야 금식하신 후에 굉장히 굶주렸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와서 말했습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다. 하나님 사업도 좋지만 먹는 것이 중요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 돌을 변하여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우리가 시인하겠다.” 아예 식욕을 채우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사십주 사십야를 금식해 본 사람은 얼마나 배가 고픈지 압니다. 제가 예전에 우리 기도원에 애들을 데리고 가서 사흘동안 금식을 시켰는데 그런데 둘째 녀석이 엉엉 울면서
“밥줘~ 밥줘~”
“하루만 더 참으면 밥먹을수 있다.”
“나는 죽으면 밥될래. 나는 죽으면 밥될래.”
어린 아이지만 너무 배가 고프니까 죽으면 밥된다고 했습니다. 우리 교회 그때 나오던 어느 여전도사님이 일주일 동안 금식하고 난 다음 기도원에서 기르는 소가 여물을 먹는 것보고 “소야~ 팔자 참 좋다. 나도 소가 되어 여물이라도 실컷 먹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탄식했답니다. 사람이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굶게 되면 눈물을 뚝뚝 흘리게 되는 것입니다. 사십주 사십야를 굶었으니 얼마나 배가 고픈 상태였겠습니까. 예수님이 마귀의 꾀임을 받아 돌을 변하여 떡으로 만들수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마귀의 꾀임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단오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러니까 마귀는 예루살렘 거룩한 성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사람들이 많이 예배보러 왔다 갔다하는 것을 내려다 보게 했습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당신이 이 세상에 인기를 얻으러 왔지 않느냐? 하나님의 아들로써 인기를 얻으려고 왔는데 제일 인기를 얻을수 있는 것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고 날씬하게 내려 앉으면 만인이 보고 당신을 박수 갈채를 하고 당신이 하나님께서 보낸 사람이라고 따라갈 것이 아니냐? 그러니 인기를 얻으려면 이렇게 기적을 행하라”고 했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하였으되 저가 너를 위하여 그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저희가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리로다"
유혹을 받을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하나님이 천사가 와서 발을 받들어 돌이 발에 부딪히면 굉장한 뉴스 거리가 되고 사람들 앞에서 인기를 얻을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것을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신대"
단오하게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높은 산에 올라가서 온 천하 영광을 보여 주었습니다. 부귀와 영광을 다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 안믿는 사람들이 저보고 말합니다. “예수 안믿는 일본도 저렇게 잘살고 예수 잘 안 믿는 홍콩이나 싱가폴 사람들도 잘 사는데 꼭 예수 믿어야 잘산다고 하느냐?” 여러분 마귀도 이 세상에 부귀와 영광을 줄수가 있습니다. 마귀가 예수님을 꾄 마지막 유혹은 높은 산위에 올라가서 천하 만국의 영광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너가 내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것은 내게 넘겨 주신 것인데 내게 절하는 자에게 내가 주겠다”고 한것입니다. 마귀를 따라가도 부귀와 영광을 마귀가 줍니다. 그러나 마귀가 주는 것은 부귀와 영광과 함께 영안을 빼앗아 가고 영의 귀를 빼앗아 가고 깨닫는 마음을 빼앗아 가서 결국에는 지옥에 떨어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에 부귀, 영화, 공명이란 잠시있다 사라지는 안개와 같습니다. 잠시있는 것 취하게 하고 난 다음에 그로 하여금 영원히 하나님을 저버리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금세에도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염려하는 것이요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더하시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모든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일을 넘치게 하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진실한 그리스도를 통한 부귀와 영화인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부귀와 영화를 받으면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체험하게 되고 금새에도 은총을 입고 영원한 천국까지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 세상에 부귀와 영화를 누리게 하고 난 다음 그것을 미끼로 해서 천국을 빼앗아가 버립니다. 영혼을 멸망으로 이끌어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마귀의 유혹을 뭐라고 말했습니까?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을 선택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때문에 일생에 하나님의 성령이 주님과 함께 계십니다. 주님은 하나님을 선택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4절로 15절에 "예수께서 성령의 권능으로 갈릴리에 돌아가시니 그 소문이 사방에 퍼졌고 친히 그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시매 뭇사람에게 칭송을 받으시더라"고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선택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실 것을 알았습니다. 어마어마한 고통과 괴로움을 당하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고 치욕의 고통을 당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몸서리치는 고통인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잡히시기 전에 유혹이 왔습니다. 헬라 사람들이 와서 예수님을 헬라로 모시고 가려고 했었습니다.
요한복음 12장 20절로 21절에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저희가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빌립을 통해서 헬라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유대 사람들이 당신을 배반하고 당신을 죽이려고 하는데 우리 헬라로 오면 환영하겠다. 유혹입니다. 예수님은 능히 헬라로 가서 대접받고 편안하게 여생을 살수도 있었습니다. 헬라로 갈것이냐 유대에 남아서 죽을 것이냐. 선택해야 되었습니다. 아주 어려운 선택입니다.
그러나 23절로 24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이 죽어야 많은 영혼을 구원합니다. 살겠다고 헬라로 가면 온 인류가 다 죽을것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은 유대땅에 남을 것을 선택했습니다. 주님은 겟세마네 동산을 피할수 있습니다. 그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는 것을 가롯유다가 알았기 때문에 로마의 군인들과 대제사장 바리새 교인, 사두개 교인 하숙들을 데리고 잡으러 온것입니다. 그러므로 겟세마네 동산을 피할 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피하고 남음이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자리에서 기도할 때 피할까 피하지 말까는 주님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얼마나 주님께서 그 선택이 어려웠던지 그가 기도할 때 이마에서 땀이 핏방울로 변했습니다. 오늘 의사들은 말하기를 사람이 너무너무 스트레스를 받으면 피하에 있는 모세혈관이 터져서 피가 탐구멍으로 넘쳐 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으셨기에 모세혈관이 터져서 땀구멍으로 피가 톡톡톡 떨어졌습니다.
마가복음 14장 36절에 "가라사대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여러분 예수님이 그 몸부림 치는 것 보십시오. 몸서리칩니다.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또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버림당하고 고통을 당하고 죽을 것을 생각할 때 몸서리 치니까 피할수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옵소서.
마가복음 10장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죽음의 길을 선택했습니다. 예수님이 선택한 것입니다. 누가 강요한 것 아닙니다. 주님이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당신이 죽음으로 우리를 살릴수 있기 때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체포 되어서 안나와 가야바 뜰에서 온갖 곤욕과 괴로움을 당할 때 또 빌라도의 법정에서 생명을 구걸하지 않고 그는 장엄한 침묵을 지켰습니다. 예수님께서 살기 위해서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빌라도가 “내가 너를 살릴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말한데도 주님께서는 생명을 구걸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택한길을 뒤돌아 보지 않았습니다. 주님이 일단 죽기로 각오하고 그길을 택한 이상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7징 11절로 14절에 보면 "예수께서 총독 앞에 섰으매 총독이 물어 가로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 말이 옳도다 하시고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고소를 당하되 아무 대답도 아니하시는지라 이에 빌라도가 이르되 저희가 너를 쳐서 얼마나 많은 것으로 증거하는지 듣지 못하느냐 하되 한마디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총독이 심히 기이히 여기더라"
장엄한 침묵입니다. 주님께서는 죽기로 작정하고 그 길을 택한 이상 뒤돌아 보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스스로 선택하여 희생제물이 되었고 그 자유의지로 선택하므로 우리의 구주가 되신 것입니다. 첫 아담은 하나님을 배반하므로 선택하고 선악과를 따먹고 배반했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님은 하나님을 순종하기로 결힘하고 죽기까지 순종하는 길을 택하여 주신 것입니다. 처음 아담의 잘못된 선택으로 우리가 다 죽었지만 마지막 아담 예수 그리스도의 올바른 선택으로 우리가 다 살게 된 것입니다.

4. 우리의 행사하는 선택의 자유

넷째, 우리가 행사하는 선택의 자유에 관해서 말씀하고 싶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늘 알아야 될 것은 삶의 큰 틀은 운명지어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부모님 내가 선택하지 못하고 운명지어 있고 내가 나온 시대와 내가 낳은 땅은 운명지어져 있고 내가 선택할수 없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내가 선택할수 없지만 그러나 그 안에서 살면 우리의 선택의 자유가 많이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내가 예수님을 선택하랴, 세상을 선택하랴. 우리 선택해야 됩니다. 우리가 복음 전도함을 받았을때 내가 예수님을 선택할수도 있고 예수님을 버릴수 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나중에 하나님 앞에 심판 받을때 “너가 왜 예수를 안믿었느냐?” “하나님이 나를 믿도록 안해 주었기 때문에 안믿었습니다.” 그런 변명은 할 수 없습니다. 다 복음을 듣고 난 다음에 내가 하나님을 믿을 것이냐, 안 믿을 것이냐. 성령께 순종할 것이냐, 아니할 것이냐. 자기가 선택해야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말하기를 부름을 받은 사람은 많되 택함을 받은 사람은 적다. 하나님이 불러 주셨는데 대답을 하느냐 안 하느냐는 우리에게 달린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에 버릴 사람은 부르지도 않아요. 여러분은 하나님이 여러 사람을 통해서 여러 가지 모양으로 불러주셨을 때 여러분이 예하고 대답해서 따라 나왔기 때문에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을 하나님이 부르시되 듣고도 귀를 돌리고 대답하지 않으므로 택함을 받지 못한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든지 그 다음 결과를 우리의 책임입니다.
신명기 30장 19절로 20절 자세히 들어 보세요.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하나님의 소원은 우리가 생명을 택하고 사망을 택하지 말고 복을 택하고 저주를 택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라고 간청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함게 놓았는데 너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보혈을 통해서 죄악과 절망 대신에 용서와 의와 사랑을 택하고 세속과 마귀 대신에 성령과 거룩함을 택하고 병과 고통을 대신해 치료와 건강을 택하고 저주와 가난 대신에 아브라함의 축복과 예수 그리스도의 형통을 택하고 죽음과 지옥과 영원한 멸망 대신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부활과 천국과 영광을 택하라. 주님께서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정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잘 택했습니다. 영원히 후회하지 않는 길을 택한 것입니다. 정말로 여러분 복많은 사람들인 것입니다. 복이 없는 사람은 이 길을 택하지 못합니다.
제가 저희 할머님을 전도해서 예수를 믿게 했는데 우리 할머님 많이 연로하셨는데 아무리 예수 믿으라고 해도 “ 나는 원래부터 불교를 믿었고 그동안 친구들도 다 불교 믿는 친구들이니까 난 내 길로 갈테니까 너는 예수를 잘 믿으라”고 합니다. 그래서 “할머니! 그러면요. 이땅에서 할머니와 손주지만은 이제 죽고 나면 할머님은 극락에 가고 나는 천당에 가버립니다. 극락과 천당이 거리가 얼마나 먼지 압니까? 거기에는 비행기 타고도 못가요. 할머니하고 나하고는 영원히 영원히 이별입니다. 아시겠어요?” “서로 왔다갔다 못하니?” “못하지요. 나는 천당에 가고 할머니는 소히 불교계에서 말하는 극락으로 간다고 하니까 그리 가버리면 우리는 생이별하고 영원히 못보지요.” “어이 그러면 안되지. 그러면 내가 너를 만나봐야지.” “그러면 손주 따라 가야지요.” “그럼 어떻게 하노?” “예수를 구주로 모셔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할머님이 손주따라 오려고 회개를 하고 예수를 구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성령 받고 난 다음에는 늘 하신 말씀이 이 말씀인 것입니다. “복이 있어야 예수를 믿지 복이 없으면 예수를 못믿는 거야. 아무나 믿는줄 알아? 복있는 사람이어야 예수를 믿는거다.” 나는 그 말씀이 내 귀에 쟁쟁하고 내 가슴에 남아 있습니다. 복이 있어야 예수를 믿지 복없으면 예수를 못믿습니다. 여러분은 너무나 복이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오늘 예수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운명은 우리의 선택의 갈림길에 있습니다. 알콜 중독자인 아버지 밑에 자란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은 다 자라서 결혼하여 분가해 나갔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난 다음에 심리학자들이 이 알콜 중독자의 자식으로 태어난 자란 이들이 어떻게 사느냐 가보니까 맏아들 집에 가보니까 맏아들은 아에 술을 입에도 안댑니다. 몸서리 칩니다. 아버지가 알콜 중독자였기 때문에 우리 가정이 얼마나 고통을 당했는데 나는 술을 보지도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는 아주 깨끗하게 잘삽니다. 자기 아내와 자식들과 잘살고 사업도 잘합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을 찾아 가니까 아에 알콜 중독자가 되어 곤드레 만드레가 되어 있습니다. 정신 차리지 못하고 부인도 도망치고 자식들은 고아원에 가고 처참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두 아들에게 심리학자들이 똑같이 물었어요. 어떻게 해서 똑같은 알콜 중독자 아버지 밑에 태어났는데 이렇게 되었습니까? 그러니까 맏아들도 똑같이 물어요. “선생님! 선생님의 아버지가 술망나니라면 선생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술을 피해야지~” 둘째 아들도 똑같이 물었습니다. “선생님의 아버지가 술주정뱅이요, 술독에 빠져 살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아이고~ 아버지 영향을 받아서 나도 술먹고 술독에 빠지겠지” 선택에 달린 것입니다. 똑같은 아버지의 똑같은 두 자식이 그 모양인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시를 지었는데 돛담배 두척 바다에 떳네. 한배 동으로 가고 다른배 서로 가네. 똑같은 돛단배가 바다에 떳는데 왜 한배는 동으로 가고 다른배는 서로 갑니까? 그것은 바람은 똑같이 부는데 돛의 방향에 따라서 한배 동으로 가고 한배 서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똑같은 세상에 살고 똑같은 시절에 살아도 마음 먹기에 따라서 한 사람은 성공하고 한 사람은 실패하고 한 사람은 복받고 한 사람은 저주받고 한 사람은 천당가고 다른 사람은 지옥갑니다. 마음에 어떻게 선택하는 가에 달려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지 다른 사람을 원망해서는 안됩니다. 우리 앞에는 항상 두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하나님의 길과 세상길이 있습니다. 생명의 길은 좁고 험합니다.
마태복음 7장 14절에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
예수 믿고 하나님 섬기고 사는 것이 쉽지가 않으니까 사람들이 그 길을 찾는 사람이 적지요. 여러 가지 절제를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살려니까 힘이 들지요. 그러니까 좁고 험한 길이지만 예수를 믿고 안에 들어와 보면 참으로 넓고 좋은 길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을 이기고 하나님의 성령과 사는 것보다 더 의와 평강과 희락과 믿음, 소망, 사랑이 넘치는 것이 없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그 안에 들어오기도 전에 벌써 좁은 길을 걷지 못하고 세상으로 나갑니다.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길은 넓고 편합니다.
마태복음 7장 13절에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신명기 11장 26절로 28절에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좇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복과 저주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지요. 남을 원망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미국에 아주 친한 두 친구가 있었어요. 그들은 청년때 똑같이 망나니였습니다. 술을 퍼먹고 싸움도 하고 방통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두 사람이 술집에 손을 잡고 가다가 교회 앞을 지나가는데 그 교회에 간판이 있는 겁니다. “오늘 저녁 설교는 죄의 값은 사망이다”하는 것으로 설교한다고 간판이 붙어 있습니다. 그래서 한 사람은 “야~ 교회 들어가자.” 다른 사람은 “야~ 웃기는 소리하네. 교회는 전부다 미친 사람들이 들어가는 거야. 이 세상에 술먹고 방탕하고 얼마나 자유롭고 좋으냐? 나는 안들어간다.” 그러니까 한 친구가 “오늘 나는 너와 함께 술집에 가지 않겠다. 나는 교회 들어가겠다.” 그래서 그 사람은 교회 들어가고 다른 사람은 술집에 들어갔습니다. 수십년의 세월이 지났습니다. 술집에 간 이 사람은 살인을 범하고 중죄인이 되어서 감옥에서 신문을 받아 보니까 그날 같이 가다가 교회로 들어간 그 친구인 로버트 클리브랜드는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똑같은 사람의 길이 이렇게 달라질수 있습니까? 다같이 청년의 시절에 술먹고 방탕했는데 하루저녁 갈림길에 섰습니다. 교회로 가느냐, 술집으로 가느냐. 갈림길에서 로버트 클리브랜드는 교회를 택했고 친구는 술집을 택했고 세월은 흘러가서 한 사람은 대통령이 되고 한 사람은 사형수가 되어서 감옥에서 신문에 그 기사를 보고 눈물을 줄줄 흘리게 된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될까요? 우리는 마태복음 6장 29절로 33절의 말씀대로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는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면 다른 것은 하나님이 돌보아 주시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를 택하시고 하늘나라의 의를 선택하게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코카콜라의 창업자인 아사지 캔들리는 알콜 중독자였습니다. 항상 술에 찌들려 있었습니다. 캔들리는 자기 의지력으로 술을 떼려고 노력을 해도해도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루 술이 취해서 집에 들어오는데 귀에 벼락같은 소리가 들리어 자신의 본능적 욕구를 절제하는 사람이 성공한다. 캔들러는 들어오자마자 자기 아내에게 “여보 여보! 내가 술취해서 비틀 거리며 오는데 내 귀에 소리가 들리기를 자기의 본능을 절제하는 사람이 성공한다고 그러는데 이게 뭡니까?” “하나님이 당신에게 계시해준 것입니다. 당신은 나와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시고 주님께 부르짖어 본능을 제어하십시오. 십자가에 못박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며 십일조를 드리고 살면 우리에게 희망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내의 말을 듣고 아내의 간절한 기도를 받고 술을 딱 끊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 나가면서 그의 수입의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에게 기회가 왔습니다. 영세한 코카콜라 회사가 있는데 코카콜라를 처음 만든 영세한 회사가 법원에 경매 처분을 당했는데 그것을 2,300불에 사들여서 그 코카콜라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그 부부가 키웠습니다. 1920년 딴 사람에게 매도될때 그 가치는 무려 2,500만 달러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아내와 그는 정말 하나님을 믿고 주님 선교 사업으로 일생을 보내게 된것입니다. 술에 찌들어진 사람이 하루에 그의 길을 올바르게 선택했습니다. 술 주정뱅이 길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고 십일조 드리고 하나님을 섬기는 길을 선택하자 하나님이 사업의 기회를 주었고 법정관리에 들어간 망한 조그만한 시작하는 코카콜라의 회사를 인수해서 그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키웠습니다. 오늘날 코카콜라란 온 천하에 안 들어가는데가 없고 모르는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서면 하나님이 정말로 축복을 주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자유를 가졌으되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세상 자랑을 따라가는 길을 걸어가지 말고 믿음, 소망, 사랑의 길을 택해서 가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잘되면 자기 탓이요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말합니다. 자기의 잘못된 선택은 남의 책임으로 돌리수가 없습니다. 잘못된 선택을 회개하고 내일을 위하여 새롭고 올바른 선택을 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고 하나님 섬기는 것을 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을 택하고 예수님을 택하고 말씀을 택하고 그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삶을 택하면 하나님이 여러분 일생에 같이 하여 주어서 여러분 영혼이 잘되고 범사에 잘되며 강건할 뿐 아니라 천국 영생을 얻어 영원한 영광속에 들어갈수 있게 되실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리는 이 세상에 태어나서 운명지어진 것도 있지만 그러나 우리의 삶에 많은 것을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운명지어진 것은 하나님께 내어 맡기고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에는 언제나 하나님을 택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택하고 말씀을 택하고 천국을 택하고 영생을 택하게 도와 주시옵소서. 그래서 영원히 후회하지 않는 우리들이 되게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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