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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신16:13-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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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기동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 2007.9.2주일설교 |
즐거운 추석 명절입니다. 추석이 언제부터 유래했느냐에 대해서는 설이 많지만, 무엇보다도 이때는 풍성한 먹거리, 넉넉한 마음씨가 넘치는 때라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설이 인위적으로 새로운 한 해라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면 추석은 저절로 우려 나오는 축제의 때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춘궁기 보릿고개가 사라진지 몇 십 년 되지 않은 것을 보면 우리 민족 또한 풍족한 먹거리를 사시사철 즐기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조금 낳은 형편을 가진 사람이 소의 힘을 빌지, 그렇지 않은 다음에야 오로지 손을 사용하여 농사를 짓는 그 상황에서 아마도 한 사람이 농사지을 수 있는 양은 일 년 동안 자기 혼자 먹을 수 있는 양 정도 되지 않았을까요? 그것도 그나마 땅을 가진 농사꾼의 이야기지, 소작을 한다고 치면 소작비 주랴, 가족을 부양하랴, 아마도 그야말로 입에 풀칠하기 힘든 그런 상황이었을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농사지어 수확하는 때야말로 빈곤 속에 풍요를 느끼는 귀한 시간이었고, 풍류를 아는 우리 민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을 겁니다. 비록 풍부한 한해거리가 되지 않는다 해도 탐스러운 햇소출을 즐기는데 있어서 그것은 살아있는 자들만의 기쁨으로 생각하지 않고 차례를 통해 조상들도 살아 생 전 이 시간을 즐겼듯이 함께 즐기기를 원했고, 또 그 차례상 음복을 통해 가족, 친지들이 나누는 즐거움을 갖곤 했습니다. 그 옛날 추석날의 모습은 흥겹기 그지없습니다. 집집마다 차례를 지내고 음복하고 나면 마을 축제가 시작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보름달이 뜬 밤늦게까지 민속놀이로 온 마을은 들썩입니다. 그 즐거움의 축제에 참여하지 못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수확의 명절, 기쁨과 나눔이 있던 명절은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수확의 경험을 있는 곳이면 어디나 이러한 명절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신명기 16장에는 고대 이스라엘이 지키던 3대 절기에 대한 규정이 들어 있습니다. 레위기, 출애굽기 등에서 이 명절들에 대한 규정이 나와 있지만 제사가 너무 강조된 나머지 이 신명기만큼 그 명절의 근원적 의미가 잘 드러나 있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가장 큰 명절은 단연 유월절입니다. 그 절기는 유대인이 정월로 여기는 아빕월, 혹은 니산월에 지키는데 지금으로 보면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 사이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하던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 마지막 날 죽음의 사자가 이집트를 휩쓸고 있을 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바른 이스라엘인의 집만을 죽음의 그림자가 넘어갔다(파사: Passover)는 말에서 유래했고, 그 날은 야웨 하나님의 은혜로 맞이하게 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 해방을 기념하여 기억하는 큰 축제일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날은 또 무교절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탈출하면서 그 민족의 조상들이 미처 누룩을 넣어 빵을 구울 수 없었던 다급했던 그 순간을 기억하면서 부풀지 않은 딱딱한 빵을 먹는 전통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이 유월절에 맞추어서 부활절은 지킵니다. 예수가 바로 유월절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하는데서 비롯한 것입니다. 예수가 잡히신 때가 바로 유월절 때였고,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순례 온 많은 유대인들 앞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을 4복음서가 공통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집트 한 복판에서 죽임 당한 어린 양이 이스라엘 구원의 상징이었다면, 예수는 유월절 때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림으로 온 인류의 구원자 어린 양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유월절이 전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고유의 경험과 역사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또 다른 두 절기는 조금 성격이 다릅니다. 두 번째 절기인 칠칠절이라는 이름은 유월절로부터 일곱 이레가 지난 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이는 사실은 유월절 즈음 우기가 끝나고 강렬한 햇볕 아래 50일쯤 지나 알곡을 맺은 보리 및 밀 추수를 시작하는 때에 있었던 절기입니다.
칠칠절이 보리와 밀 수확을 막 시작하는 때 지켜지는 절기라면, 오늘 읽은 본문에 들어 있는 초막절은 보리, 밀, 그리고 그 유명한 지중해 포도 수확을 마친 때 지켜지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은 장막절이라고도 하고, 수장절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모두 수확물들을 이제 일 년의 먹거리로 저장하는 행위들과 연관된 것입니다.
이 세 절기에는 공통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와 같은 복을 주신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들고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허락하시고, 소출이 있게 하시고, 또 그것을 누릴 수 있는 복을 주시는 분, 그 분은 곧 하나님이라는 고백, 그렇기에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특히 신화적 사고가 지배적이었던 그 시대, 그 모든 소출의 근원에 대해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표현은 그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중요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16장에 나오는 세 절기에 대한 내용을 찬찬히 읽다보면 무엇인가 조금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과 칠칠절에 대한 규정을 보면 절기와 이스라엘 특수 역사와의 연관성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초막절에서는 그와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포로기 이후 디아스포라 유대남자들이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최대 명절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추수를 끝내고 그나마 노자와 제물을 마련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고 추측해보기도 합니다. 또한 여기 본문에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레위기 규정에서도 암시하고 있듯이 유대 풍습에서 초막절은 이스라엘인들이 출애굽하고 광야를 유랑하는 시기를 기억하는 절기였었다고 합니다. 이제 일 년의 삶을 보장하는 수확물을 저장하는 ‘장막’을 통해 출애굽 후 광야를 유랑하는 조상들을 보호하던 ‘장막’을 연상한 것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설이 유력하지만, Kraus라는 구약학자는 장막절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에게 광야에서 채결된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갱신하는 축제로 거행되었었고, 그것이 나중에 가나안에 정착한 후 추수제와 결합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보면 유월절은 이스라엘 조상의 출애굽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역사적 내용이 주를 이룬다는 것이 당연하다해도, 칠칠절 규정 마지막 절에 ‘당신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것을 기억하고 이 모든 규례를 어김없이 잘 지키십시오.’라는 언급이 붙어 있는데 그 연관성이 어색하기 그지없습니다. 게다가 초막절에 대해서는 그러한 내용이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절기와 역사적 사건과의 연관은 절기가 가진 원래적 의미를 넘어선 특수한 신학적 해석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9-11절에 나오는 칠칠절 규정과 13-15절 초막절 규정에는 또 하나의 차이가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수확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 강조점에 있어서는 차이를 드러냅니다. 칠칠절에서는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한다는 것 이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함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막절 규정에 보면 16절 이하에서 세 절기를 모두 언급하면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제사해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 본다면, 그저 강조하는 것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초막절이 지니는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초막절, 추석이라는 특수용어를 벗어 버리고 나면 수확, 획득, 소득이라는 일반적 의미로 수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우리가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라 해도 15절에서 말하듯이 ‘당신들이 손을 댄 모든 일’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의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들’이라고 말하면 될 텐데 성서기자는 친절하게도 일일이 함께 기뻐해야 할 자들이 누구인지 열거합니다. ‘당신, 아들, 딸, 남종, 여종,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 등을 열거합니다.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뉠 수 있습니다. 내 집에 속한 자들, 그렇지 않은 자들입니다. 내 집에 속한 자들은 사실 그 기쁨을 함께 누릴 권리를 가진 이들입니다. 함께 노력하고 힘들인 자들이지요. 하지만 ‘집’에 속했다고 해서 모두 같은 권리를 누리지는 못합니다. ‘종’은 분명 한 집에 속한 자들이지만 소유물일 뿐이지 권리자가 아닙니다. ‘가족’의 범위에는 속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 등은 구약에서 대표적으로 약자로 언급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소유가 없는 자들이며, 사회적 안전망에서 소외되고 빗겨난 자들입니다. 레위인은 12지파에 속한 자들이지만 땅을 받지 못하고, 성전의 일을 거들면서 (십일조) 받는 것으로 생을 이어가는 자들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땅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은 언제 밥줄이 끊어지고 생명의 위협을 받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가하면 여기서 ‘떠돌이’는 그냥 유랑하는 자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으로서, 그리고 고아와 과부는 아버지, 남편 없는 자로서 가부장적 가족체제와 배타적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전혀 보호와 안전의 보장을 받을 수 없는 소외층을 대변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소유했느냐, 어디에 속하느냐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에 있어서 여전히 중요한 가치로 작동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명령은 이러한 인간의 일반적인 가치를 넘어서야만 한다고 충고합니다.
우리는 누군가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무엇인가 공통분모를 찾으려 하곤 합니다. 고향이 어디냐, 어느 학교를 나왔는가, 어떤 일을 하는가, 그리고 사돈의 팔촌 쯤이든 어떻든 간에 무엇인가 연결되는 끈을 찾기만 하면 그 낯설음은 사라지고 친근감으로 만남을 기뻐하곤 합니다. 무엇인가 연결끈을 찾으려는 것에서 가장 핵심은 혈연이기도 합니다. 가족이기에 귀성길 그 고생에서도 명절이 되면 여전히 가족을 만나기 위해 찾아 길을 떠납니다. 수십 년 전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면서 만나려는 노력은 사실 죽을 때까지 계속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것을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무수히 만들어 놓는 끈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고 또 넘으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에서는 당연히 나의 것이라고 여겼던 것, 내가 노력하여 획득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 또한 복으로 받은 것임을 강조합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의 모든 소출과 당신들이 손을 댄 모든 일에 복을 주셨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15절) 이것은 결국 절대적으로 내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현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소유와 소속의 경계가 뚜렷합니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을 누릴 권리를 배타적으로 갖습니다. 그것을 넘보면 그것은 도적질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유지하려고 무지 노력합니다. 비단 물질적인 의미에서만 아니라 내가 가진 명예, 지위, 사회체계 어느 것 하나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경계와 울타리가 결코 배타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유는 함께 즐거워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풍성한 수확과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은 나의 소유, 나의 울타리를 절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신명기의 초막절 규정은 분명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누려야 하는 기쁨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굳이 나눈다면 세상적 가치는 많이 가진 자가 많이 누린다고, 그것은 각각의 능력의 차이라고 말해주고 있지만, 성서는 우리에게 달리 말합니다.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주신 것은 그 소유에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갖지 못한 자들, 소외된 자들과 함께 나누는 기쁨을 누리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명절입니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 기쁨을 누리십시오. 그리고 그 기쁨 가운데서 먹거리를 주시는 생명의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생각하는 여유를 갖기를 바랍니다. 약간의 시혜의 차원이 아니라, 함께 즐거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참된 응답이 무엇인지 숙고하고 찾을 수 있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그렇다손 치더라도 농사지어 수확하는 때야말로 빈곤 속에 풍요를 느끼는 귀한 시간이었고, 풍류를 아는 우리 민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을 겁니다. 비록 풍부한 한해거리가 되지 않는다 해도 탐스러운 햇소출을 즐기는데 있어서 그것은 살아있는 자들만의 기쁨으로 생각하지 않고 차례를 통해 조상들도 살아 생 전 이 시간을 즐겼듯이 함께 즐기기를 원했고, 또 그 차례상 음복을 통해 가족, 친지들이 나누는 즐거움을 갖곤 했습니다. 그 옛날 추석날의 모습은 흥겹기 그지없습니다. 집집마다 차례를 지내고 음복하고 나면 마을 축제가 시작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보름달이 뜬 밤늦게까지 민속놀이로 온 마을은 들썩입니다. 그 즐거움의 축제에 참여하지 못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 수확의 명절, 기쁨과 나눔이 있던 명절은 우리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수확의 경험을 있는 곳이면 어디나 이러한 명절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읽은 신명기 16장에는 고대 이스라엘이 지키던 3대 절기에 대한 규정이 들어 있습니다. 레위기, 출애굽기 등에서 이 명절들에 대한 규정이 나와 있지만 제사가 너무 강조된 나머지 이 신명기만큼 그 명절의 근원적 의미가 잘 드러나 있지는 않습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가장 큰 명절은 단연 유월절입니다. 그 절기는 유대인이 정월로 여기는 아빕월, 혹은 니산월에 지키는데 지금으로 보면 3월 중순에서 4월 중순 사이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유월절은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을 탈출하던 역사적 사건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애굽에 내린 10가지 재앙 마지막 날 죽음의 사자가 이집트를 휩쓸고 있을 때,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바른 이스라엘인의 집만을 죽음의 그림자가 넘어갔다(파사: Passover)는 말에서 유래했고, 그 날은 야웨 하나님의 은혜로 맞이하게 된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 해방을 기념하여 기억하는 큰 축제일이 되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이날은 또 무교절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탈출하면서 그 민족의 조상들이 미처 누룩을 넣어 빵을 구울 수 없었던 다급했던 그 순간을 기억하면서 부풀지 않은 딱딱한 빵을 먹는 전통의 의미를 담고 있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이 유월절에 맞추어서 부활절은 지킵니다. 예수가 바로 유월절의 어린양이라고 고백하는데서 비롯한 것입니다. 예수가 잡히신 때가 바로 유월절 때였고,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에 순례 온 많은 유대인들 앞에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다는 것을 4복음서가 공통으로 전하고 있습니다. 이집트 한 복판에서 죽임 당한 어린 양이 이스라엘 구원의 상징이었다면, 예수는 유월절 때 십자가에 매달려 피 흘림으로 온 인류의 구원자 어린 양이 되었다는 것이지요.
유월절이 전적으로 이스라엘 민족 고유의 경험과 역사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또 다른 두 절기는 조금 성격이 다릅니다. 두 번째 절기인 칠칠절이라는 이름은 유월절로부터 일곱 이레가 지난 때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이는 사실은 유월절 즈음 우기가 끝나고 강렬한 햇볕 아래 50일쯤 지나 알곡을 맺은 보리 및 밀 추수를 시작하는 때에 있었던 절기입니다.
칠칠절이 보리와 밀 수확을 막 시작하는 때 지켜지는 절기라면, 오늘 읽은 본문에 들어 있는 초막절은 보리, 밀, 그리고 그 유명한 지중해 포도 수확을 마친 때 지켜지는 절기입니다. 초막절은 장막절이라고도 하고, 수장절이라고도 불립니다. 이 모두 수확물들을 이제 일 년의 먹거리로 저장하는 행위들과 연관된 것입니다.
이 세 절기에는 공통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와 같은 복을 주신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들고 나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해방을 허락하시고, 소출이 있게 하시고, 또 그것을 누릴 수 있는 복을 주시는 분, 그 분은 곧 하나님이라는 고백, 그렇기에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특히 신화적 사고가 지배적이었던 그 시대, 그 모든 소출의 근원에 대해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표현은 그 무엇보다도 가장 먼저 해야 할 중요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이 16장에 나오는 세 절기에 대한 내용을 찬찬히 읽다보면 무엇인가 조금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유월절과 칠칠절에 대한 규정을 보면 절기와 이스라엘 특수 역사와의 연관성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 초막절에서는 그와 같은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초막절은 포로기 이후 디아스포라 유대남자들이 예루살렘을 순례하는 최대 명절이었다고 합니다. 아마도 추수를 끝내고 그나마 노자와 제물을 마련할 수 있는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라고 추측해보기도 합니다. 또한 여기 본문에서는 나와 있지 않지만 레위기 규정에서도 암시하고 있듯이 유대 풍습에서 초막절은 이스라엘인들이 출애굽하고 광야를 유랑하는 시기를 기억하는 절기였었다고 합니다. 이제 일 년의 삶을 보장하는 수확물을 저장하는 ‘장막’을 통해 출애굽 후 광야를 유랑하는 조상들을 보호하던 ‘장막’을 연상한 것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설이 유력하지만, Kraus라는 구약학자는 장막절은 처음부터 이스라엘에게 광야에서 채결된 하나님과의 언약을 기억하고 갱신하는 축제로 거행되었었고, 그것이 나중에 가나안에 정착한 후 추수제와 결합하게 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해 보면 유월절은 이스라엘 조상의 출애굽에서 비롯한 것이기에 역사적 내용이 주를 이룬다는 것이 당연하다해도, 칠칠절 규정 마지막 절에 ‘당신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 하던 것을 기억하고 이 모든 규례를 어김없이 잘 지키십시오.’라는 언급이 붙어 있는데 그 연관성이 어색하기 그지없습니다. 게다가 초막절에 대해서는 그러한 내용이 언급조차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절기와 역사적 사건과의 연관은 절기가 가진 원래적 의미를 넘어선 특수한 신학적 해석의 결과에서 비롯된 것임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합니다.
9-11절에 나오는 칠칠절 규정과 13-15절 초막절 규정에는 또 하나의 차이가 있습니다. 공통적으로 수확 앞에서 기뻐하고 즐거워한다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 강조점에 있어서는 차이를 드러냅니다. 칠칠절에서는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해야한다는 것 이전에 먼저 하나님 앞에 감사해야 함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초막절 규정에 보면 16절 이하에서 세 절기를 모두 언급하면서 하나님 앞에 예물을 드리고 제사해야 한다는 것을 제외하고 본다면, 그저 강조하는 것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도 초막절이 지니는 가장 중요한 의미입니다. 초막절, 추석이라는 특수용어를 벗어 버리고 나면 수확, 획득, 소득이라는 일반적 의미로 수렴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우리가 농사를 짓는 것은 아니라 해도 15절에서 말하듯이 ‘당신들이 손을 댄 모든 일’ 그리고 그것을 통해 나의 것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마디로 ‘모든 사람들’이라고 말하면 될 텐데 성서기자는 친절하게도 일일이 함께 기뻐해야 할 자들이 누구인지 열거합니다. ‘당신, 아들, 딸, 남종, 여종,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 등을 열거합니다. 이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뉠 수 있습니다. 내 집에 속한 자들, 그렇지 않은 자들입니다. 내 집에 속한 자들은 사실 그 기쁨을 함께 누릴 권리를 가진 이들입니다. 함께 노력하고 힘들인 자들이지요. 하지만 ‘집’에 속했다고 해서 모두 같은 권리를 누리지는 못합니다. ‘종’은 분명 한 집에 속한 자들이지만 소유물일 뿐이지 권리자가 아닙니다. ‘가족’의 범위에는 속하지 않지 않습니까?
그런가 하면 레위인, 떠돌이, 고아, 과부 등은 구약에서 대표적으로 약자로 언급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소유가 없는 자들이며, 사회적 안전망에서 소외되고 빗겨난 자들입니다. 레위인은 12지파에 속한 자들이지만 땅을 받지 못하고, 성전의 일을 거들면서 (십일조) 받는 것으로 생을 이어가는 자들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땅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것은 언제 밥줄이 끊어지고 생명의 위협을 받을지 모르는 위태로운 삶을 의미합니다. 그런가하면 여기서 ‘떠돌이’는 그냥 유랑하는 자들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으로서, 그리고 고아와 과부는 아버지, 남편 없는 자로서 가부장적 가족체제와 배타적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전혀 보호와 안전의 보장을 받을 수 없는 소외층을 대변하는 자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소유했느냐, 어디에 속하느냐는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삶에 있어서 여전히 중요한 가치로 작동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명령은 이러한 인간의 일반적인 가치를 넘어서야만 한다고 충고합니다.
우리는 누군가 낯선 사람을 만났을 때 무엇인가 공통분모를 찾으려 하곤 합니다. 고향이 어디냐, 어느 학교를 나왔는가, 어떤 일을 하는가, 그리고 사돈의 팔촌 쯤이든 어떻든 간에 무엇인가 연결되는 끈을 찾기만 하면 그 낯설음은 사라지고 친근감으로 만남을 기뻐하곤 합니다. 무엇인가 연결끈을 찾으려는 것에서 가장 핵심은 혈연이기도 합니다. 가족이기에 귀성길 그 고생에서도 명절이 되면 여전히 가족을 만나기 위해 찾아 길을 떠납니다. 수십 년 전 헤어진 가족을 그리워하면서 만나려는 노력은 사실 죽을 때까지 계속되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것을 나쁘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무수히 만들어 놓는 끈을 넘어서기가 쉽지 않고 또 넘으려고 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오늘 본문에서는 당연히 나의 것이라고 여겼던 것, 내가 노력하여 획득한 것이라고 여겼던 것들 또한 복으로 받은 것임을 강조합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의 모든 소출과 당신들이 손을 댄 모든 일에 복을 주셨기 때문에 즐거워하는 것입니다.’(15절) 이것은 결국 절대적으로 내 것이라고 주장할 것이 없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현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소유와 소속의 경계가 뚜렷합니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을 누릴 권리를 배타적으로 갖습니다. 그것을 넘보면 그것은 도적질이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유지하려고 무지 노력합니다. 비단 물질적인 의미에서만 아니라 내가 가진 명예, 지위, 사회체계 어느 것 하나 예외가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그 경계와 울타리가 결코 배타적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유는 함께 즐거워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풍성한 수확과 열매를 맺게 하신 분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은 나의 소유, 나의 울타리를 절대화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신명기의 초막절 규정은 분명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들이 누려야 하는 기쁨이 무엇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굳이 나눈다면 세상적 가치는 많이 가진 자가 많이 누린다고, 그것은 각각의 능력의 차이라고 말해주고 있지만, 성서는 우리에게 달리 말합니다.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주신 것은 그 소유에 기뻐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것으로 갖지 못한 자들, 소외된 자들과 함께 나누는 기쁨을 누리라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명절입니다. 오랜만에 가족을 만나 기쁨을 누리십시오. 그리고 그 기쁨 가운데서 먹거리를 주시는 생명의 하나님의 보편적 사랑을 생각하는 여유를 갖기를 바랍니다. 약간의 시혜의 차원이 아니라, 함께 즐거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참된 응답이 무엇인지 숙고하고 찾을 수 있는 시간을 갖기를 원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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