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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에 넘어가지 마십시오 (신명기 5:32-33)
< 선배를 존경하는 삶 > 대학교 1학년 때, 중앙도서관 6층에서 한 선배가 정권퇴진을 외치며 투신했습니다. 그때 많은 학생들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당시 일부 학생들은 “광주에서 끔찍한 일이 있었다.”고 얘기했습니다. 신문보도가 통제되던 때였기에 그 말들이 유언비어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런 일이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데모는 해본 적이 없지만 데모 자체에 큰 거부감은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교수의 뺨을 때린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와 유사한 일들이 가끔 들렸습니다. 그때마다 진보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생겼습니다. 아무리 바른 주장도 그 주장하는 태도가 패륜적 태도라면 그 주장이 어떻게 받아들여집니까? 어느 사회든지 우파와 좌파가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달라도 지켜야 할 기본윤리는 있습니다. 결국 교수의 뺨을 때린 진보주의 학생은 진보주의를 약화시키는 진보주의의 최대 적입니다. 요새 진중권이란 인터넷 논객이 있습니다. 그는 좌측입장에서 글을 쓰는데 그의 글을 보면 손만 들지 않았다 뿐이지 글을 통해 교수의 뺨을 때리는 것 이상의 막말을 나이든 어른들에게 해댑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패륜적인 행태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낍니다. 그래서 생각이 좌측으로 기울다가도 그런 태도를 보면서 돌아섭니다. 결국 패륜적인 좌측 인사는 좌측 사상에 동조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조차 멀리하게 만드는 좌측 세력의 최대 적입니다. 캄보디아의 ‘킬링필드 사건’은 좌측의 신세대가 구세대를 학살한 사건입니다. 그때 좌측 청년들은 안경을 쓴 사람은 무조건 반동 지식인이라고 해서 다 죽였고, 손을 펴보이게 해서 손에 굳은살이 없어도 무조건 반동이라고 다 죽였습니다. 그런 식으로 당시 전 국민의 3분의 1을 학살할 때, 학살자들에게 일시적인 승리감이 있었겠지만 크게 보면 그들의 패륜적 행위는 전 세계의 좌측 사상을 몰락시키는 핵심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요새 자기만 ‘빛’이고 다른 한국교회는 대부분 ‘어둠’이라고 예언한다는 젊은 자칭 사도 목사가 있습니다. 물론 많은 목회자들이 한국교회의 어두운 측면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교회의 어둠은 오순절 성령의 역사로 막 생겨난 초대교회 때도 있었고, 성경에 나오는 수많은 교회들에도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문제없는 교회는 없습니다. 그래도 한국의 기존교회가 가진 소중한 내적 가치들이 많은데, 예언이란 수단으로 가끔씩 욕설을 섞어 한국 교회 전체를 매도하면 그런 태도는 학생이 교수의 뺨을 때려대는 태도와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결국 기존교회들이 반발했고, 한국 교회의 어두움을 안타깝게 지켜보던 목사들조차 그런 패륜적인 태도와 인격에 실망해서 등을 돌렸습니다. 결국 그 목사는 이단 시비에 걸렸습니다. 그러자 그 젊은 목사는 “예수님도 핍박당했고 선지자들도 핍박당했다.”고 하면서 마치 자신이 이 시대의 참 사도인데 바른 예언을 해서 핍박 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믿음과 인격과 자격에서 함량미달 문제로 그런 취급을 받는다는 것을 모릅니다. 요새 예언한다는 사람이 제일 많이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그 말은 거의 예외 없이 있습니다. 어떤 말입니까? “당신 사명 받았다.”는 말입니다. 사실 모든 성도들은 다 나름대로의 사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애매한 말이 어떻게 예언이 됩니까? 그런 말이 너무 남용되면 무속인들이 하는 신점 및 신병 예언과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또한 교회에 대해서는 이런 식으로 예언합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셨는데 한국 교회는 현재 2%만이 참된 교회라고 합니다.” 성도라면 누구나 한국 교회의 타락을 느낍니다. 그것이 안타까우면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정직하게 비판해야지 예언이란 수단으로 애매모호하게 기존교회의 뺨을 치니 얼마나 비겁한 일이고, 그 동기가 의심됩니까? 결국 지난주에 그 교회가 소속된 한 장로교단이 그를 이단으로 제명하고 목사 직분까지 박탈해 출교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참 빛이신 예수님이 유대 교권주의자들이 핍박한 것처럼 자신도 한국 교권을 가진 사람들로부터 핍박받는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부인한 유대교가 아닌 예수님을 오직 구원의 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한국 기독교 교단에서 제명된 자신의 처지가 유대 교권주의자들로 핍박당한 예수님의 처지와 어떻게 같습니까? 겉모습은 비슷하지만 속은 전혀 다른 얘기입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정의감을 가지고 주장했습니다. “한국 교사들은 제대로 된 놈이 거의 없다!” 사실 그런 말은 지독한 편견과 상처의 산물입니다. 그런데 자신은 편견과 상처의 산물을 예언자적인 통찰력 혹은 정의로운 사도의 용기로 오해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자기 반 선생님에게 “이놈아! 네가 선생이며 다냐?”고 하면서 뺨을 쳤습니다. 학교는 부끄러워서 “쉬쉬!” 하며 학생주임과 교장이 그 학생에게 계속 자숙하라고 권고했지만 그 학생은 오히려 “내가 무슨 잘못이 있느냐?”고 항의했습니다. 결국 학교에서 그를 퇴학시켰습니다. 잘못된 행동을 하고도 반성이 없기에 퇴학을 당한 것입니다. 그때 그 학생을 두둔할 필요가 없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이 진리와 생명 문제와 관련된 것이라면 절대 그런 사람을 추종하거나 동정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런 동정은 영혼에 큰 마이너스가 됩니다. 또한 신(新) 사도라고 주장하는 그는 자신이 직통계시를 받는다고 합니다. 만약 직통계시의 신학적인 의미를 잘 모르고 단순히 하나님의 음성과 성령의 감동이 마음속에 주어지는 것을 직통계시란 용어로 표현했다면 그것은 신학지식의 부족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직통계시가 의미하는 원래의 의미를 따라 그들이 직통계시를 받는다고 주장했다면 성경은 그들의 새로운 계시를 따라 계속 업데이트 되어야 하고 그것은 결국 성경의 절대성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런 주장을 이단이 아니라고 할 한국 교회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결국 교단에서 제명되고 목사 직분까지 박탈되어 출교되자 지금 어떻게 나옵니까? 본인이 바로 새 교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입으로 수시로 “캘빈주의는 썩어빠졌다! 캘빈은 지옥의 제일 밑바닥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새로 만든 교단의 이름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OO)’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한국에서 ‘대한 예수교 장로회’란 이름을 붙으면 보통 이단 혐의는 벗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새 이단들은 대부분 장로교란 간판 속으로 들어가 숨습니다. 또한 교단 이름은 ‘대한 예수교 장로회’라고 정했는데 급조해서 만든 교단 내규를 보면 장로교에서 가장 중시하는 ‘장로 정치체제’는 부인합니다. 본인이 맘대로 하고 싶은데 장로 정치체제가 얼마나 귀찮겠습니까? 그런 모순 된 행동을 하는 단체로는 절대 가면 안 됩니다. 순수한 성도들은 유대 교권주의자들의 핍박을 받은 예수님을 연상하면서 무작정 동정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거듭 말씀드리지만 두 경우는 전혀 다릅니다. 성경을 나오는 수많은 믿음의 선배들을 보면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수의 뺨을 때리는 학생과 같은 버릇없는 위인들은 없다는 것입니다. 애매모호한 예언이 아니라 진짜 예언을 해도 그 태도가 몰상식한 태도라면 아무리 맞는 예언을 하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도 그것은 주님의 삶과는 전혀 다른 길을 가는 거짓 선지자의 헛된 쇼가 됩니다. 그런 곳을 추종하면 구원의 여부 이전에 그 영혼이 심각하게 침탈되고, 오랜 세월을 방황하며, 가정과 후대가 흔들리며, 지혜와 창조성도 사라질 것입니다. 부모의 뺨을 때리고 잘되는 자식이 없듯이 ‘사회적 부모’인 어른과 선생과 선배의 뺨을 때리고 잘 되는 영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몰상식하고 비인격적인 사람에게 진정한 의미의 축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 교인들은 이단에 절대 빠지지 말고, 윤리는 인간적인 것이고 율법적인 것이니까 필요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자칭 영성주의자들의 말에 절대 귀를 기울이지 마십시오. 구원받는 신자가 구원받지 못한 불신자보다 바른 상식과 더 높은 윤리의식을 가져야 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 후배를 존중하는 삶 > 좌측의 극단도 문제지만 우측의 극단도 문제입니다. 어떤 목사는 좌측 사람들에 대해 강단에서 “이 빨갱이 새퀴들!”이라고 욕합니다. 그러면 비슷한 생각을 가진 성도들조차 “왜 목사님이 저런 어투를 쓸까?”라고 하면서 생각이 돌아섭니다. 결국 우측의 극단주의자도 우측 사상을 가진 사람들의 최대 적이 됩니다. 가장 복된 모습은 아랫사람은 윗사람을 존경하고 윗사람은 아랫사람을 존중하는 모습입니다. 요새 한국 교회에서 목회자가 카리스마가 있다고 하면 무엇부터 연상합니까? ‘욕과 반말’부터 연상합니다. 또한 카리스마를 가졌다는 어떤 목사는 집회에서 노인들의 머리를 안수한다고 하면서 “요놈! 저놈!”이라고 머리를 때립니다. 그런데도 여자 할머니들이 머리를 서로 대려고 합니다. 얼마나 복이 없는 모습입니까? 그런 비인격적인 단체에는 아무리 화려한 은사로 유혹해도 절대 발도 들여놓지 마십시오. 진짜 카리스마는 주님처럼 삶과 언어에서 바르고 부드럽고 인격적인 카리스마가 진짜 카리스마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반말을 쉽게 쓰는 목자는 무조건 조심하십시오. 20세 이상이 되었으면 청년에게도 반말을 조심하고, 나이든 어른에게는 더욱 반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매한 성도라고 생각하고 반말을 하는 식으로 함부로 말하면 듣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상처가 쌓이면서 언젠가는 그 상처가 폭발해서 큰 문제가 됩니다. 예언한다는 사람들을 보면 예언의 정확성 여부를 떠나 언어와 인격 면에서 문제되는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 상황에서 나오는 말은 예언이 아니라 자신의 상처와 야욕의 표출에 다름이 아닙니다. 결국 시간이 지나면서 예언한다는 사람의 예언이 사람마다 그 패턴에서 거의 차이가 없음을 발견하고, 또한 인격적인 문제점이 점차 드러나면서 나중에는 성도들의 마음이 홱 돌아섭니다. 그런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일전에 한 교회가 예언을 통해 몇 천 명으로 커졌습니다. 그러다가 곧 이단 시비에 걸렸습니다. 그러자 교단도 그 교회를 걱정하면서 선배 목사들이 그 교회 담임목사에게 예언을 주의하라고 권했습니다. 그 권고를 수용해서 담임목사가 일반 목회를 하는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왜냐하면 예언사역을 하면서 평소에 성경을 깊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언한다는 목회자에게 대개 있는 고질적인 습관인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 똑같은 예화를 반복하는 습관을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성도들이 들고 일어났습니다. 그 전에는 설교할 때 같은 예화를 반복하면서 어떤 예화는 5번 이상 반복해 써먹고, 어떤 예화는 10번 이상 반복해 써먹어도 무슨 무서운 예언을 할까봐 성도들이 조용히 들었는데, 더 이상 예언을 안 하니까 성도들이 목사의 카리스마에 도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불평했습니다. “왜 매일 똑같은 말만 하나? 아무리 좋은 예화도 10번 이상 써먹으면 어떻게 은혜 받는가? 말씀 연구도 안 하나?” 결국 장로 7명 중에 4명이 연판장을 돌리고 당회에서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희들에게 교회를 맡기고 안식년 갔다 오십시오.” 그때 장로들에게는 목사님이 이제 조금 깊이 성경을 보고 말씀을 연구하면서 같은 예화도 안 하고 은혜롭게 말씀을 전해주기를 원하는 선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런 장로들의 권고에 목사는 깊은 굴욕을 느꼈지만 이미 무너진 둑이었습니다. 결국 “알았습니다. 그렇게 하죠.”라고 하고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날 저녁 담임목사가 집에 돌아가서 사모님과 그 얘기를 했습니다. 사모님이 노발대발 했습니다. “당신! 어떻게 그런 결정을 받아들여요? 당장 취소하세요.” 그러자 목사님은 다음 날 긴급 당회를 소집해서 최강수를 두었습니다. “장로님! 어제 결정 취소합니다. 나는 안식년 가지 않고 대신 40일 금식기도를 하겠습니다.” 장로들은 속으로 당회의 결정을 사모님의 말 한 마디로 뒤집는 목사님에 대해 분통이 터졌지만 40일 금식기도를 한다니까 더 이상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드디어 목사님이 40일 금식기도에 돌입했습니다. 그래도 한번 마음이 돌아선 장로들의 마음이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에 문제만 생겼다 하면 금식한다면서 어디에 갔다 오는 담임목사에 대해 평소에도 약간의 의구심이 있었는데, 그때는 오기로 40일 금식기도를 한다고 생각하니까 장로들의 눈에는 담임목사의 40일 금식기도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상처를 감추기 위한 몸부림처럼 보였습니다. 결국 40일 금식은 끝났지만 목사와 장로의 갈등은 복원되지 않았고, 결국 담임목사는 40일 금식기도의 후유증 때문에 얼마 후에 죽었습니다. 그래도 장로들은 전혀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에게 예언을 한다고 거짓선지자의 길을 가다가 천벌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장로들은 담임목사의 장례식에 교회시설을 전혀 이용하지 못하게 하면서 영구차는 교회를 쓸쓸하게 떠났습니다. 한때 몇 천 명 교회를 담임하며 카리스마를 자랑하던 목사였지만 그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인생을 마감했습니다. 그 장면은 신앙생활의 핵심이 점치는 식이 되면 안 되고, 더 나아가 화려한 은사와 기적이 되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잘 교훈합니다. 이제 분별력을 키우십시오. 예언은 예언자의 삶과 동떨어질 수 없고, 예언자의 삶은 주님의 삶과 동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의 맥락 및 주님의 삶 전체의 맥락과 맞지 않는다면 어떤 예언도 받아들일 가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기적 집회나 은사 집회를 열어 기적과 은사를 시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모습들은 결코 영혼의 득이 되지 못하고 독이 된다는 것을 잘 아셨기 때문입니다. < 결코 치우치지 마십시오 > 구원은 단순합니다. 주님 믿으면 구원받고, 구원받은 성도는 대 평안을 노래해야 합니다. 그런데 구원받은 성도가 고난을 이기지 못해 예언을 찾고, 예언에서 들은 어떤 말로 불안에 떨고, 그 불안을 잠재우려고 또 다시 예언을 받는 악순환을 반드시 끊어야 합니다. 지금도 진리와 안식을 찾아 허둥대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마음의 감동을 통해 혹은 성경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아무개야! 나를 어디서 찾니? 내가 여기에 있단다. 뭐가 그렇게 두렵니?” 믿음이 자꾸 흔들리면 언젠가 카리스마를 가장한 사람에게 진짜 칼을 맞아 결국 큰 상처를 입고 영혼이 거의 반신불수가 됩니다. 그러므로 예언을 너무 좋아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되지 않고 인격이 갖추어지지 않은 사람이 아무리 천사처럼 예언해도 그것은 참된 예언의 아닙니다. 특히 어른의 뺨을 때리는 식으로 행동하는 극단적인 자칭 예언자를 따르면 심각한 불행을 자초하는 행위가 됩니다. 주님은 마태복음 11장 29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은 스스로 온유하다고 하셨습니다. 이 구절에 나온 ‘온유’와 가장 비슷한 단어가 바로 ‘중용’이란 단어입니다. 중용은 언뜻 보면 동양 사상 같지만 사실상 기독교인에게도 가장 중요한 삶의 실천 덕목 중의 하나입니다. 주님은 치우치지 않는 온유한 마음에 진정한 평안에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치우치지 않는 삶은 복을 받는 필수원리입니다. 왜 하나님은 때로 고난을 주십니까? 극단적으로 치우지지 말라는 뜻입니다. 본문 32-3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런즉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령하신 대로 너희는 삼가 행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명하신 모든 도를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삶을 얻고 복을 얻어서 너희의 얻은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 신명기는 가나안 땅의 축복을 앞두고 행한 모세의 3편의 고별설교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신명기를 보면 성경에서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말씀이 가장 많이 나옵니다. 가나안의 축복을 준비하려면 그 말씀이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본문에서도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을 때 생명과 복을 받고, 그 복과 영향력이 장구하게 된다고 합니다. 또한 가나안 정복전쟁을 앞두고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말씀을 주실 때도 여호수아 1장 7절에서 이런 말씀을 주십니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얼마나 놀라운 축복의 말씀입니까? 이 세상에 절대적인 의미의 만사형통은 없지만 최종적인 의미의 만사형통은 있습니다. 그 만사형통의 축복을 누가 얻습니까? 성경은 “말씀대로 살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사람이 얻는다.”고 했습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을 때 좌로 가든지 우로 가든지 형통하다는 말씀이 얼마나 역설적인 진리입니까? 그 말씀을 못 믿어서 “좌로 가야 됩니까? 우로 가야 됩니까?”라고 점을 친다면 그것이 얼마나 믿음이 없는 불행한 모습입니까? 이제 극단적인 신앙을 멀리하십시오. 한자에 ‘지나칠 과’자가 들어간 단어 중에 좋은 단어는 거의 없습니다. 과식, 과음, 과로, 과민, 과열, 과장, 과시, 과속, 과대 등 셀 수 없이 많습니다.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는 옛말이 과언이 아닙니다. 지나쳐도 그렇게 좋지 못한데 극단으로 치우치면 얼마나 문제가 많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극단적인 이원론 신앙도 절대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기도를 하겠다고 하루에 8시간씩 새벽기도를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은 기도의 기본원리도 모르는 이원론 사상입니다. 밤 12시 30분에 일어나서 새벽기도를 시작해서 아침 8시 30분에 새벽기도를 끝내고 직장에 출근해서 근무시간 내내 졸기만 하면 믿는 사람으로서 그것이 얼마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전도를 막는 행위입니까? 성경에서 “항상 기도하라!”는 말은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하루에 2시간 이내로 기도하고 나머지는 매 순간 기도하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 좋습니다. 기도하는 삶도 성스러운 삶이지만 직장인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직장생활 하는 것도 성스러운 삶이고, 사업가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사업하는 것도 성스러운 삶이고, 학생이 기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것도 성스러운 삶이고, 주부가 기도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살림을 하는 것도 성스러운 삶입니다. 이원론은 가장 신앙적인 것 같으면서도 가장 신앙을 해치는 것입니다. 이원론은 관계를 깨고,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깨고, 정상적인 사회생활과 가정생활을 깹니다. 영성이 있고 기도한다는 어떤 엄마는 매일 기도원을 다니면서 가정을 등한시합니다. 결국 초등학교 6학년 아이가 거의 매일 저녁에 혼자서 라면만 끓여먹습니다. 그것은 영성이 좋은 것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기본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엄마 밑에서 자란 아이가 나중에는 똑같이 극단적인 길을 갑니다. 그래서 분별력을 잃고 극단적인 맹신주의자가 되거나 아니면 인터넷 등에서 기독교를 신랄하게 비난하는 극단적인 불신주의자가 됩니다. 결국 극단주의는 ‘자기와 자기 교회’를 키우는 데는 효과적인 방법은 될 수 있지만 장기적이고 전체적인 의미에서는 전도를 막아서 ‘전체와 전체 교회’를 퇴보시킵니다. 얼마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속이 상하시겠습니까? 이제 아무리 화려한 은사와 영성이 있어보여도 이원론은 결코 따르지 마십시오. 아들이 영성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육신의 부모를 업신여기거나 반대로 부모가 아무리 영성이 깊다고 해도 아이들과 장난하면서 함박웃음도 한번 주지 않고 사는 것은 거룩한 삶이 아니라 불행한 삶입니다. 진리의 99%는 평범한 것에서 발견되고, 참된 영성은 평범한 삶에서 오히려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영성을 특이하고 괴상한 행동을 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예수 믿고 ‘인물’이 되어야지 예수 믿고 ‘괴물’이 되면 안 됩니다. 언뜻 보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는 사람은 티가 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눈에 보이는 성공은 늦어지고 더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티가 나지 않는 중에서 최선을 다해 주님을 바라보고 헌신하면 괴상하고 특이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도 그가 가진 구원은 결코 잃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축복이 예비되고, 결국 최종 승리자가 되고, 천국에서는 어느 누구보다 큰 상급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성도의 삶에 광야의 고난을 허락하십니까? 결국 한 가지입니다. 치우치지 않는 건강한 신앙을 가지라는 뜻입니다. 결국 치우치면 문제와 불안은 끊임없이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말만 듣고 분별력을 잃어버린 치우친 삶을 살지 마십시오. 자기가 스스로 사도라고 주장한다고 해서 갑자기 모든 목회자와 교회 위에 우뚝 선 사도가 되는 것입니까? 사도 바울이 스스로 사도라고 했다고 해서 자신도 그래도 된다는 말입니까? 아닙니다. 시간을 두고 그의 삶과 주장을 찬찬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자칭 사도라는 사람의 말만 듣고 무조건 그 사람을 따라가지 마십시오. 영혼과 관련된 문제는 시간을 두고 깊이 생각하면서 특별히 예언한다는 사람의 삶도 찬찬히 지켜보십시오. 애매한 점을 치면서 예언이라고 하고, 믿음의 선배를 짓밟고, 수시로 입에 반말과 욕설을 담고, 같이 사역하다 보면 인격적인 허점이 너무 많아서 ‘사도’는 고사하고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에 어울릴 사람을 사도라고 추종한다면 얼마나 어리석고 안타깝고 불행한 일입니까? 이단을 항상 경계하십시오. 한국 교회가 아무리 부족한 모습이 있어도 한국 교회는 주님을 핍박한 유대교와는 달리 여전히 예수님을 온전한 구원의 주로 섬기는 기독교 교회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평범한 보통 기독교 교단이 이단으로 규정하고 목사직을 박탈해 출교시켰다면 일단 그 단체를 멀리하십시오. ‘출교’만 생각하고 바르지 못한 동정심을 가지면 그 마음에 사단의 사주를 받는 이단이 똬리를 틀 수 있습니다. 항상 치우지지 않는 건강한 신앙을 통해서 예수 믿고 인물 되는 진정한 축복의 주인공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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