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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과 번성의 토대

신명기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943 추천 수 0 2009.11.04 23:2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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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신6:1-9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8571 
emoticon2005.5.1.          

고대 이스라엘의 처지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인 토라는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가리키는데, 이 다섯 권의 문서가 모세의 이름을 따른다는 건 이스라엘 역사에서 모세의 위치가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점을 알려줍니다. 그들이 모세를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영도자로 여길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이집트의 소수 민족으로 전락할 운명에 처해있던 이스라엘을 해방시킨 장본인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오늘 읽은 본문의 신명기는 출애굽 이후 광야에서 40년을 보낸 다음, 가나안으로 입성하기 직전 ‘아라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행한 모세의 설교입니다. 물론 역사비평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 신명기의 내용이 실제로 모세의 설교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고대시대에는 유명인의 이름을 빌려서 글을 쓰는 게 별반 이상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명기 편집자는 전승된 많은 글을 편집, 재구성한 다음에 모세의 이름을 빌렸을 것으로 보입니다. 비록 모세의 직접적인 설교가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신명기는 이스라엘의 신앙을 정확하게 담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는다고 하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 텍스트가 어떤 상황에서 언급되고 있는가 하는 점은 분명하게 파악해야만 합니다. 모든 성서 텍스트는 그 시대의 상황을 밑에 깔고 언급되고 있기 때문에 그 상황을 이해하지 않으면 텍스트는 죽은 말씀이 되고 맙니다.
오늘 본문이 선포되고 있는 상황은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40년 광야생활을 끝내는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광야생활은 이집트로부터의 해방을 통해서 자유를 얻기는 했지만 생존의 위기를 경험하던 시기였습니다. 개인도 그렇지만 민족도 역시 좋은 것을 모두 얻을 수는 없습니다. 정신적인 자유를 얻은 반면에 세상살이의 어려움을 겪어야 하며, 거꾸로 세상살이가 편해지면 정신적으로 나태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 모든 나라가 경제와 복지 만능주의를 추구하고 있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 정신적이고 영적인 세계를 포기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비록 만나와 메추라기로 최소한의 생존은 보장되었지만 이루 말할 수 없는 어려움과 불편이 연속되던 광야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야 할 이 순간이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기회이면서 동시 위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모세는 그들에게 설교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처한 또 하나의 상황은 앞의 광야와 전혀 다른 가나안의 문명 입니다. 즉 이들은 곧 광야생활에 비해 말할 수 없이 생활조건이 향상된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지금 미지의 세계를 앞에서 두고 불안한 구석이 없지 않았겠지만 전반적으로는 한창 꿈에 부풀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흡사 6,70년대에 미국으로 이민가는 사람들의 심정과 같았다고 보면 됩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 야훼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땅이 자신들 앞에 현실로 다가왔다는 생각으로 잠이 오지 않을 정도로 흥분되었을지 모릅니다. 그들 앞에 펼쳐질 멋진 신세계로 마음이 들떠 있었겠지요. 그들만이 아니라 우리도 역시 평생 원하든 것을 소유하거나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에 마음의 중심을 놓치기 마련입니다. 모세는 그런 상황에 처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생존과 번성

위에서 설명한 두 가지 상황, 즉 광야생활을 끝냈다는 사실과 가나안 입성을 목적에 두었다는 사실은 우리 인간의 삶에 놓여 있는 훨씬 근원적인 어떤 사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광야생활은 생존에 기반을 둔 삶이었습니다. 40년 동안 이스라엘은 자신들이 살아있다는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었습니다. 이 말은 곧 생명의 가장 심층적 세계로 집중했다는 뜻입니다. 이들에게 사치스런 삶이나 미용이나 대중적인 오락은 가능하지 않았습니다. 언제 어떤 위험이 닥칠지 모른다는 생존의 위기감이 그들을 감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과정을 통해서 야훼 하나님이 그들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었습니다.
가나안의 생활은 그것과는 전혀 다릅니다. 3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니 너 이스라엘은 들어라. 성심껏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래야 너의 선조들의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에게 약속해 주신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잘 되어 크게 번성하리라.” 모든 인류의 꿈이 이 말씀에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가는 이유도 역시 자기 사업이나 후손들이 번성하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입니다. 요즘 정치권에서 민생을 챙겨라, 왜 민생을 돌보지 않느냐 하고 옥신각신 하는 것도 역시 번성하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고 있는 국민들에게 점수를 얻기 위한 목소리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3절 말씀대로 번성했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간 다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끊임없는 위기와 시련을 당했습니다. 그들은 급기야 아시리아와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를 잃었으며, 기원 70년에는 로마에 의해서 초토화한 후 2천년 가까이 나라 없이 살았습니다. 만약 하나님이 거짓말 하신 게 아니라면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았다는 말이 됩니다. 왜 이스라엘 백성들은 번성할 수 있는 길을 가지 않고 망하는 길을 갔을까요? 우리가 구약성서를 읽을 때마다 궁금하게 생각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생존을 보장해 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도 그들은 계속 불평했으며, 번성할 수 있는 길을 분명하게 제시해주었는데도 그 길을 가지 않았다는 것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도 않았고, 따라서 그 말씀대로 살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무슨 이유로 그렇게 확실한 생존과 번성의 길을 가지 않은 걸까요? 그들이 못된 민족이래서 그랬을까요? 그들에게 믿음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그들에게 진정한 예언자가 없어서 그랬을까요? 한 가지 더 질문합시다. 오늘 우리는 그들과 다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모두 ‘아니오’입니다.

왜 믿지 않을까?

구약성서에서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이스라엘의 어리석음, 시행착오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 자체가 힘들다는 사실, 혹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 말이 이상하게 들리십니까? 예수님을 믿는 게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매주일 빠지지 않고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리기가 어렵다거나 헌금생활과 그리스도인다운 품성을 지키기가 어렵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마십시오. 그런 종교행위를 믿음이라고 생각하면 오히려 쉽습니다. 대개의 사람들은 그런 것을 강화하는 데 모든 힘을 쏟으면서 일종의 종교 열광주의에 빠져듭니다. 사람들이 그런 열광주의에 빠져드는 이유는 그게 쉽기 때문입니다.
종교적 열광주의가 쉽다는 말은 그런 일들이 우리를 쉽게 자극한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움직이는 힘에 따라 움직이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자극적이기 때문에 그 힘을 잃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삼성 직원의 평균연봉이 6,7천만 원이고, 이사급의 평균연봉이 6,70억원이라고 합니다. 중간 임원들은 그 중간쯤 되겠지요. 그런 상황이니까 모두가 대기업에 취업하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대기업의 노조와 하청기업의 노조가 대립적일 수밖에 없는 이런 구조로 이 사회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느 한 두 사람이 참된 노동의 해방과 평등을 주장할 수 있을까요?
4절 말씀을 보십시오. “너, 이스라엘아 들어라. 우리의 하느님은 야훼시다. 야훼 한 분뿐이시다.” 야훼 한 분만이 곧 하느님이라는 말을 이스라엘은 들어야 했습니다. 이 말은 곧 그들이 야훼를 하나님으로 생각하기 싫어했다는 뜻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게 될 이스라엘이 가나안이 섬기던 풍요의 신인 ‘바알’에게 한눈을 팔게 되리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야훼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지 모르지만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는 것은 결국 바알입니다. 이런 결과를 내다본 모세는 야훼 한 분만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거의 ‘우이독경’처럼 외치고 있습니다.
5절 말씀을 보십시오. “마음을 다 기울이고 정성을 다 바치고 힘을 다 쏟아 너의 하느님 야훼를 사랑하여라.” 야훼 하나님에게 집중하라고 거듭해서 외칩니다. 하나님 야훼를 믿고 살라는 한 마디로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 모세는 닦달하듯이 설교합니다. 마음, 정성, 힘을 기울여 야훼를 사랑하여라. 야훼 하나님을 믿는다는 게 어려운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신의 전존재를 걸지 않는 한 믿음은 거짓입니다.
우리의 전존재를 건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야훼 하나님을 이용해서 자기의 삶을 번성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님 자체에 철저하게 의존한다는 게 바로 그 뜻입니다. 지금 우리 한국교회의 신앙방식은 곧 하나님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 성령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자기의 욕망을 채우는 일들이 자주 일어납니다. 교회당과 교회조직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 서로 난투극을 벌인다거나 자식들에게 담임 목사직을 물려주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렇게 비상식적인 상태까지는 나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기복주의나 타종교에 대한 배타성 같은 행동들도 역시 모두 성령을 이용하는 태도입니다. 우리를 자극하는 이런 힘들에 휩싸일 뿐이지, 진리와 생명의 영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다면, 그는 결코 전존재를 걸고 야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모든 걸 걸어두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내다본 모세는 보기에 따라서 좀 유치한 듯한 명령을 내립니다. “집에서 쉴 때나 길을 갈 때나 자리에 들었을 때나 일어났을 때나 항상 말해 주어라. 네 손에 매어 표를 삼고 이마에 붙여 기호로 삼아라. 문설주와 대문에 써 붙여라.”(7-9). 경건한 유대인들은 이 가르침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적은 종이를 옷소매에 달거나 문설주와 대문에 붙였다고 합니다. 우리도 교인 집에 교패가 달리기도 하고, 승용차에 성구나 물고기 로고가 붙어 있기도 합니다. 성경과 찬송가를 늘 지니고 다리는 신자들도 제법 있습니다. 이런 행동들이 형식주의에 빠지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려는 자세라고 한다면 권장한 만한 현상입니다. 모세가 이런 명령을 내린 이유는 이런 형식보다는 이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말씀에 집중하기를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곧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과 멀어질 가능성이 인간들에게 많기 때문입니다.

쉐마

그렇습니다. 바로 이렇게 하나님에게 의존하고 일치하는 것만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서 새롭게 맞게 될 모든 문화적 조건이나 환경을 뛰어넘어 생존하고 번성할 수 있는 토대입니다. 모세는 오늘 본문 3절과 4절에서 ‘쉐마’(들으라!)라고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야말로 이들이 하나님과 하나 될 수 있는 가장 바른 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을 실제로 지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어떤 상황에서도 존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번성할 수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없다고 하더라도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모든 걸 갖추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삶에는 순식간에 공허와 무의미가 찾아옵니다. 그 공허와 무의미는 또 다시 우리를 자극하는 삶들을 모색하게 만듭니다. 그런 자극적인 삶을 성취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이 이전투구도 마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과정에서 우리의 영성은 소진되고 파괴됩니다. 여러분들은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무언가를 성취하면 행복하거나 만족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하나님과의 일치가 아닌 한 우리의 모든 일들은 공허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까? 부적처럼 성경을 몸에 지니고 살아야합니까? 성경공부에 매달리면 됩니까? 예배를 자주 드리는 게 바로 ‘쉐마’에 이르는 지름길인가요? 어느 하나의 길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형편에 따라서 가능한대로 하나님 말씀을 자주 접하고, 바르게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바른 자세로 성서와 자주 접하기만 한다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말씀의 깊이로 들어가 있을 겁니다. 말씀의 깊은 세계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이 세상에서 생존할 토대가, 진정한 의미에서 번성할 토대가 갖추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우리의 삶을 영적으로 가득 채우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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