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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아람인의 후손

신명기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598 추천 수 0 2010.01.29 11:5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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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신26:1-1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8921 
emoticon
2007.02.25.

요단동편에서
여러분들이 이미 잘 알고 있는 대로 유대인들은 이집트에서 소수민족으로 살다가 가나안으로 이주해온 민족입니다. 한민족도 반만년이라는 역사를 자랑하지만 유대인들도 그에 못지않은 역사를 자랑합니다. 아브라함이 바벨론문명의 발생지인 갈대아 우르를 떠나 시리아를 거쳐 가나안에 정착한 다음 그 후손들이 그곳에서 몇 대를 살았습니다. 창세기의 보도에 따르면 야곱의 복잡한 가족 문제와 흉년 등, 여러 가지 문제로 인해서 그들은 이집트로 이주했습니다. 그곳에서 거의 4백년간 소수민족으로 살다가 기원전 13세기에 출애급 했습니다. 애굽을 탈출한 다음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을 배회하다가 결국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 본문의 역사적 시점은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바로 직전 요단강 동편에서 모세가 유대인들에게 행한 연설 중의 한 대목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이집트라는 제국에서 소수민족으로 살았습니다. 중국에서 사는 조선족이나 옛 소련에서 살던 고려인의 입장과 비슷했습니다. 더구나 이집트는 아주 강력한 왕정이 발달한 나라였기 때문에 소수민족을 강압적으로 다스렸을 겁니다. 그들이 피라미드를 건축하기 위해서 이런 소수민족들을 강제적으로 동원했으리라는 건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은 그곳을 떠나기로 작정했습니다. 더 이상 소수민족의 서러움을 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에서 그랬습니다. 이런 일에 앞장 선 사람이 바로 모세입니다. 그는 이집트의 파라오와 담판을 벌인 끝에 유대민족을 이끌고 광야로 나왔습니다.
여러분은 출애굽기를 읽으면서 야훼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그런 일들이 일사천리로 진행됐으리라고 예상하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유대인들 중에서도 이집트의 권력에 한몫 낀 이들이 있고, 이집트를 떠나는 것이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는 생각을 한 사람들도 꽤나 많았을 겁니다. 그들이 광야로 나온 다음에 모세를 향해서 끊임없이 불평을 쏟아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이집트를 벗어났고, 광야생활도 마친 다음, 이제 가나안 입성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제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고생 끝, 행복 시작!” 하고 부푼 꿈에 젖었을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날을 손꼽아 기다렸겠지요. 진절머리 나는 광야생활을 끝난다는 사실만으로도 희망에 부풀어 마지막 진군나팔 소리만 기다리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가나안 입성은 모험입니다. 그 일은 자기 이름으로 등기를 마친 집으로 이사 가는 것과는 다릅니다. 가나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그들은 전혀 예상할 수 없습니다. 자칫하면 출애굽과 광야 40년의 고생이 물거품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나안의 일곱 부족과의 일전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철기문화가 발전한 이들과의 전투에서 유대인들이 이긴다는 보장은 없습니다. 더구나 모세의 더 큰 걱정은 정신적인 것이었습니다. 가나안은 바알을 섬기는 토착 신앙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입니다. 전혀 풍요롭지 못한 상태에서 겨우 생존에 급급하던 유대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면 풍요의 신인 바알에게 기울어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영혼이 기울어지면 삶 자체도 그들에게 동화될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 자기 민족들에게 야훼 하나님 신앙을 잃지 않도록 가르쳐야했습니다.
신앙을 가르친다는 건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에만 민감하게 반응하지 보이지 않는 신에게는 별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신명기에서 많은 종교적인 율법과 도덕규칙을 설명하면서 오늘 본문에서 신앙고백을 가르칩니다. 이 내용은 우리의 사도신경과 비슷합니다. 이런 신앙고백의 형식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종교생활에서는 형식도 매우 중요합니다. 그것은 태권도의 기본자세 훈련이나 바둑의 정석 훈련과 비슷합니다.

조상에게 맹세한 땅
모세가 가르친 신앙고백의 첫 마디는 이렇습니다. “나는 야훼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의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이 땅에 들어오게 된 것을 오늘 나의 하느님 야훼께 아룁니다.”(3절) 아주 단순한 고백문이지만 여기에는 모세를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한과 눈물이 서려 있습니다. 야훼 하나님은 그들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조상으로부터 전해들은 야훼 하나님의 약속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어두기는 쉽지 않습니다. 제가 보기에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그 약속을 믿지 못했을 겁니다. 믿고 싶어도 현실적으로 믿기 어려웠습니다. 생각해보세요. 가나안에는 이미 원주민들이 터를 잡고 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보다 모든 면에서 경쟁력이 월등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고생고생 끝에 가나안 길목까지 왔습니다. 모세는 자기 민족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것을 확신합니다. 그 곳으로 들어가서 햇곡식을 얻으면 하나님께 드리고 신고식을 하라고 가르칩니다. “야훼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의 선조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얼마나 감격스러웠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런 성경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성취되는 것이로구나 하고 생각하시겠지요. 우리도 그런 믿음으로 살아야겠구나 하고 다짐하겠지요. 물론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서 무조건 단순한 대답만 얻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약속의 성취라는 말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약속인지에 대해서 우리는 늘 혼란스러워합니다. 혼란할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아브라함에게 준 약속에 분명하다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약속은 매우 어려운 과정을 거쳐서 약속으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성취의 차원에서 약속이 드러났습니다. 모든 진리는 그 순간이 아니라 오히려 나중에 드러나는 법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과거의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오늘 우리가 삶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유대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생명의 알곡인 햇곡식을 들고 자신들의 생존을 지켜주신 하나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릴 때 조상들과 맺으신 야훼 하나님의 약속이 증명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의 실제적인 의미가 드러났습니다. 이해되시나요? 오늘 우리는 약속의 성취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생명을 이해하고 그 안에 들어간 만큼 하나님의 약속은 드러날 것입니다. 풀잎 끝에 맺힌 이슬 한 방울에서 하나님의 창조능력을 깊이 깨닫는 영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야훼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그런 방식으로 알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에서 생존의 터를 잡는 것에서 그 하나님의 약속을 깊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떠돌이 아람인
이런 깨달음, 이런 신앙고백은 그렇게 간단하게 주어지는 게 아닙니다. 유대인들이 걸어온 고단한 삶의 여정을 살피지 않으면 그들의 신앙고백이 얼마나 독특한지 알 수 없습니다. 모세가 그들에게 가르친 신앙고백의 두 번째 항목이 이를 웅변적으로 증언합니다. “제 선조는 떠돌며 사는 아람인이었습니다.”(5절) 모세는 그 뒤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간략하게 스케치하고 있습니다. 몇몇 안 되는 사람들이 이집트에 가서 살게 되었다는 사실은 제가 앞에서 설명한 그 내용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의 중요한 신앙고백이 바로 여기 “떠돌이 아람인”에 담겨 있습니다.
아람인들의 뿌리가 어디인지는 고고학적으로 아주 복잡하기도 하고 그렇게 정확하게 알려지지도 않았습니다. 다만 아브라함을 중심으로 한 이스라엘의 족장들이 바로 아람족에서 갈려나왔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창세기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들은 갈대아 우르를 떠나면서도 계속해서 나그네처럼 살았습니다. 그 어디에서도 뿌리를 내릴 수 없었습니다.
현대인들도 어떤 점에서 떠돌이 아람인들입니다. 오늘 우리는 고향이 없습니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가 태어난 고향에서 살다가 거기서 죽었습니다. 5백 년 전으로 돌아간다면 그런 현상이 더 확실하겠지요. 지금은 아무도 고향에 머물지 않습니다. 땅으로서의 고향이 없는 것도 그렇지만 영적인 고향이 없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가 아닐까요?
여러분, 궁극적으로 우리는 이 땅에 고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적인 차원에서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신앙적인 차원을 말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에서 볼 때 이곳이 고향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잠시 여기서 머물러 살다가 하늘로 돌아갑니다. 이건 아무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오늘의 삶이 무의미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늘은 곧 은폐된 생명의 나라입니다. 오늘의 삶은 그런 하늘의 생명과 연결되기 때문에 귀하고 아름답습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의 삶이 ‘떠돌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엘리스터 맥그레스는 <내 평생에 가는 길>에서 여행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합니다. 성경은 그 여행의 지도라고 합니다. 여행을 가는 사람이 지도가 없다면 혼자서 길을 찾아야하니까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이미 앞에서 그 길을 다녀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지도를 잘 살펴야만 여행을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도 그런 지도의 하나입니다.
떠돌이가 감당해야 할 가장 큰 어려움은 생존의 불안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광야에서 그걸 뼈저리게 겪었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무엇보다도 신앙적인 불안을 겪었고, 광야에서는 먹을거리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생존의 불안이 오히려 그들의 신앙을 강하게 만들었다는 게 신기합니다. 광야 40년은 이스라엘에게 그야말로 가장 순수한 신앙의 시기였습니다. 흡사 허니문과 같은 시기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그들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간 것은 신앙적인 차원에서 본다면 오히려 불행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 훨씬 심각한 신앙적인 혼란을 겪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가나안의 삶을 포기할 수도 없었겠지요. 그게 바로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함께 즐겨라.
어쨌든지 이제 떠돌이 아람인의 후손으로 살다가 이제 가나안에 정착해서 햇곡식을 거두어들이게 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너희와 너희 집에 주신 온갖 좋은 것을 먹으며 즐겨라.”(11a) 여러분은 이런 말씀을 읽을 때 무슨 생각이 드십니까? 이제 우리가 보릿고개를 넘고, 개인소득 2만 달러 시대에 들어왔으니까 정말 많이 쓰고 멋지게 살아야 하는구나, 그게 하나님의 축복이구나 하고 생각이 드시나요? 여러분, 본문의 내면을 들어야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가나안의 생활이라는 게 광야생활보다야 낫겠지만 그렇게 풍요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나안에 들어가서도 4백 년 동안 원주민들과 함께 살면서 때로는 협조하고 때로는 경쟁했습니다. 실제로는 가나안에서도 생존의 위기는 늘 있었고, 기껏 해봐야 그냥 끼니를 걱정하지 않을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런데도 모세는 그들에게 “온갖 좋은 것을 먹으며 즐겨라.”하고 말합니다. 어떻게 즐길 수 있다는 말인가요?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상대적입니다. 하루에 한 끼만 먹다가 두 끼 먹으면 그게 온갖 좋은 것을 먹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말씀이 가리키는 더 중요한 것은 온갖 것이 즐거움의 길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의 온갖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입니다. 따뜻한 밥이나 국에서 모락모락 올라오는 김을 보셨나요? 그걸 즐길 수 있나요? 쑥과 냉이를 캐는 즐거움을 알 겁니다. 된장찌개 하나만 놓고도 먹는 즐거움을 마음껏 느끼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산해진미 앞에서도 그걸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온갖 것을’을 즐기라고 모세를 통해서 주신 이 말씀은 온갖 것을 소유하라는 게 아니라 온갖 것에서 하나님의 은총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이럴 때 우리는 삶을 실제로 즐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마지막으로 한 마디 하는 걸 잊지 않는군요. “너희뿐 아니라 너희 가운데 있는 레위인과 떠돌이도 함께 즐기도록 하여라.”(11b) 하나님의 은총으로 주어진 삶의 즐거움을 우리가 어떻게 주변의 떠돌이와 함께 나눌 수 있을까요? 이것은 원래 떠돌이였으며, 지금도 근본적으로는 떠돌이라 할 우리에게 주어진 숙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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