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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신16:13-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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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용인) |
2007.9.23/열린교회/김필곤 목사
신앙인으로 추석이 되면 가장 힘든 것이 무엇입니까? 아마 제사와 성묘 문화일 것입니다.유교 문화권인 우리나라는 오랜 기간 동안 추석하면 차례와 성묘가 동일시되었습니다. 어릴 때 부모님이 신앙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문제로 참 많은 가슴앓이를 했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유형은 대체적으로 다섯 가지 유형이 있는 것 같습니다.
첫째 유형은 피하는 것입니다. 아예 추석이 되어도 불신 가족이 차례를 지내는 고향에 내려가지 않는 것입니다. 고향에 내려가더라도 차례와 성묘 때는 잠깐 피해버리는 것입니다.
둘째 유형은 제사에 참석은 하되 형제들의 양해를 구하여 절은 하지 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셋째 유형은 제사문제로 식구들이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갖지 않기 위하여 마음으로 기도하고 절을 함께 드립니다.
넷째 유형은 천주교인처럼 제사와 우상숭배는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고 제사와 성묘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제사는 신앙과는 무관한 단순한 의례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유형은 불신 가족을 설득하여 차례 대신 예배를 드리고 조상의 무덤을 둘러보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은 어떤 유형에 속한 것 같습니까?
첫째 유형은 문화 거부형입니다. 회피형입니다. 전통 문화를 타협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터부시하고 거부해 버리는 것입니다.
둘째부터 세번째는 문화 타협형입니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하는 것입니다. 본질과 비본질적인 것을 적당히 구분하여 본질도 비본질도 현실적 조화를 위해 적당히 타협하는 것입니다.
넷째는 문화 적응형입니다.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문화의 형식을 그대로 수용함으로 나중에 가면 본질마저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유교적 기독교, 불교적 기독교, 이슬람교적 기독교를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다섯째는 문화 변혁형입니다. 개혁형입니다. 전통문화를 인정하되 본질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리고 비본질적인 것은 수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옷도 계절에 맞게 바꾸어 입게 하는 것입니다. 본질을 수용하는 그릇으로 문화를 바꾸는 것입니다. 본질은 바뀌면 죽습니다. 그러나 비본질은 바뀌지 않으면 도태됩니다. 변화되어야 할 것이 변화되지 않으면 도태되고 변화되지 말아야 할 것이 변화되면 생명력을 잃어 버립니다.
우리가 신앙인이라고 해서 다른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시하는 것은 오만한 태도입니다. 그렇다고 그 문화를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무조건 수용하면 어리석은 태도입니다. 일부 다처제가 문화라고 해서 기독교가 그대로 수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여성할례가 전통이라고 해서 그대로 수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임금이나 남편이 죽으면 살아 있는 신하나 아내를 생매장하는 순장제를 문화라고 해서 기독교가 수용하면 되겠습니까? 본질이 잘 못되었으면 본질 자체를 변혁시켜야 합니다. 문화를 이해하되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건강한 문화로 변화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신앙인으로 추석의 문화를 어떻게 변혁시켜야 할까요?
1. 조상에게 감사하는 제사, 성묘 문화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 문화로 바뀌어야 합니다(13, 16-17).
우리나라 추석의 중심 문화는 무엇입니까? 조상 제사와 성묘입니다. 추수를 다하고 풍년을 조상의 은덕으로 생각하고 조상에게 감사하고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인하여 신앙인과 문화충돌과 갈등이 있습니다. 차례와 성묘는 고조선 때부터 있었던 문화는 아닙니다. 유교의 전례로 생긴 문화입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이 기독교를 거부하게 하는 가장 큰 요인 중의 하나였습니다. 우리 나라 천주교 초기 신자로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1759년 부유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나 24세의 나이로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습니다. 정약용의 권유로 청나라에 가서 "견진 성례"를 받고 올 정도로 신앙이 깊었습니다. 그가 정조 15년 1791년 고향으로 내려온 지 2년이 되어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어느 시대나 죽은 자를 위한 문화는 종교적인 것처럼 당시 유교 사회였기 때문에 유교적 전통에 의해 장례를 치러야만 했습니다. 장례식을 하는데 천주교인이 되기는 되었으나 유교적인 관습을 하루아침에 없애기 어려워 어머니의 혼백을 모시고 조문을 받았습니다. 그 때 외종 사촌 동생 권상연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더욱 신앙에 철저한 자였습니다. 비록 동생이었지만 형님의 장례식에 대한 신앙적 태도를 보고 "천주교인은 혼백을 모실 수 없다"고 충고를 하였습니다. 동생의 말을 듣고 이튿날 어머니의 혼백을 모신 궤연을 뜯고 상복 등을 가지고 산소에 가서 불살라 버렸고 집에 돌아와 조상의 위패도 모두 없애 버렸습니다. 얼마 뒤 권상연의 모친도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당시에는 상상도 못할 일을 과감하게 한 것입니다. 문상객을 받지 않고 천주교 의식에 따라 기도하고 장례를 치렀습니다. 이 사건은 조정에 알려졌고 윤지충과 권상연은 목베임을 당하였고 이것을 계기로 신해 사옥이라는 대대적인 천주교 핍박이 있었습니다. 홍문관에 있던 서양 서적은 다 불태워졌고 훗날 다시 신유(1801),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 박해로 이어졌습니다. 신유사옥 때 정순 왕후는 '오가 작통법'을 발동하여 다섯 가구를 하나로 묶어 통장을 세우고 천주교인들을 철저히 색출하기도 하였습니다. 신분 차별의 철폐를 부르짖는 기독교의 평등 사상은 당시 양반, 상놈, 중인, 천민 등으로 나뉘어진 철저한 신분 사회에서 지배층에게 있어서는 가시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내세관은 유교적 가치관으로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지도층에게 있어서는 나라의 기초 원리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과 같이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제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오늘날도 추석이 되면 제사 문제는 한 가정에 있어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과의 심각한 갈등 요인 중의 하나이고 그 문제에 대하여 찬반 양론이 공존하고 있습니다. 한국리서치가 서울시내 가정 주부 5백 명을 상대로 면접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의 74%가 추석 때 차례를 지내고 불교신자의 92%, 천주교 신자의 79%, 기독교신자의 53%가 차례를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왜 제사를 드리겠습니까? 유교에서는 효자로서 어버이를 섬기는 3도가 있는데 그것은 "살아 계실 때에는 봉양하고, 돌아가시면 그 상복을 입고, 상이 끝나면 제사를 지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맹자는 "뒤를 이을 아들이 없이 조상 제사를 지내지 못하게 되는 것은 가장 큰 불효다"라고 했습니다. 왜 가장 큰 불효입니까?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중국인들은 귀신을 인귀, 귀신, 명신 등으로 구분지어 생각하는데 후손의 제사로서 궤양을 풍족히 받은 영혼은 오래 동안 살고 제사가 끊어지면 주림에 못이겨 제 2차 죽음으로 적멸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사를 드릴 때는 새벽 닭이 울기 전에(닭이 울면 귀신이 가버리니까) 드리고, 밥에 수저를 꽂아두고 국에 밥을 말아둡니다. 이런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부모를 영원히 죽이기 때문에 가장 큰 불효인 것입니다. 이러한 사상을 품고 있는 유교제사가 이조시대에(13세기 이후) 외래문화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전통적 풍습처럼 정착하였습니다. 제사를 지낼 때는 조상의 은덕을 기대하고 드립니다. 조상의 도움으로 한해의 농사가 잘되었으니 그 은혜에 감사하다고 조상에게 차례를 지냅니다. 이것이 우상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우상이란 무엇입니까? 우상이란 창조주 하나님 대신에 어떤 피조물이나 어떤 무형적인 것을 하나님의 위치에 두고 섬기고 관심을 기울이며 충성을 바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 중심이 아닌 삶이 곧 우상 숭배인 것입니다. 제사를 드림으로 조상의 은덕으로 잘 살고, 제사를 지내지 않음으로 화를 받는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 중심이 아닌 조상 중심의 우상숭배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조상이 귀신이 되어 제사를 잘 드리는 후손에게 복을 줍니까? 제사를 드리는 사람들도 이것을 믿지 않습니다. 대부분 나이 드신 분들이 전통적인 추석문화를 차례를 지내고 성묘를 하기 때문에 그저 의례적으로 따라서 할 뿐입니다.
진정 감사해야 할 대상은 누구일까요? 15절을 같이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덴 모든 일에 복 수실 것을 인하여”라고 말씀합니다. 조상이 복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감사 예물을 드리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조상에게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닙니다. 17절을 보십시오. 여호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을 따라 감사 예물을 드렸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풍성한 농산물을 거두고 마음으로만 감사한 것이 아니라 그 농산물을 조상에게 제사로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16).
13절을 보십시오. 타작 마당과 포도주틀의 소출을 수장한 후입니다. 타작마당은 곡식의 추수를 포도주틀은 과실의 추수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일년동안 땅에서 일하여 수확한 모든 것을 말합니다. 수장한 후라는 말은 1년 동안 농사지은 곡물이나 과실들을 추수하여 창고에 저장한 후입니다. 모든 곡식을 거둔 후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와 하나님께 감사 예물을 드린 것입니다.
우리는 추석을 조상에게 감사하는 문화가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는 문화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올 한해도 이렇게 풍년을 맞이하고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것은 조상의 은덕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40년 광야 생활에서 벗어나 가나안 땅에서 농사지어 수확을 얻은 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로 받아들이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는 추석이 되어야 합니다. 함께 감사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를 죽음으로 구원시킬 분이 누구십니까? 우리를 죄로부터 용서해 주시는 분이 누구십니까? 오직 여호와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시 127:1)”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집을 세우는 일(1)도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야만 합니다. 사람들이 집을 세우려고 노력을 하나 노력만 한다고 다 집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집을 세우려는 노력이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바벨탑을 쌓으려던 사람들이 노력이 모자라서 가 아니
라 하나님의 축복이 없어 하늘까지 쌓으려던 그들의 노력이 헛되고 말았습니다(창 11 : 1-9).
성을 지키는 일(1)도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 합니다. 파수군이 밤새워 경성하는 노력으로만 성이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축복해 주셔야 밤새워 지키는 파수군의 노력이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북한이 어려운 것은 파수꾼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유다가 바벨론에게 망할 때에 파수군이 없어 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지켜 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돈버는 일(2)도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야 합니다. 자녀를 잘 기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3-5). 건강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의 모든 일들은 하나에서 백까지 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이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 힘과 노력으로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교만이며 조상의 은덕으로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미신입니다.
이렇게 절기가 되어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배들 드리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 주십니까? “내가 열방을 네 앞에서 쫓아내고 네 지경을 넓히리니 네가 매년 세 번씩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보이러 올 때에 아무 사람도 네 땅을 탐내어 엿보지 못하리라 (출 34:24)”라고 했습니다. 시편 50편 23절에도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라고 하였습니다.
2. 죽은 자를 즐겁게 하는 문화에서 산 자가 함께 연락하는 문화로 바꾸어야 합니다.(14)
추석에 돌아가신 조상에게 제사하고 성묘하는 것은 죽은 자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추석에는 전국에서 약 1천 2백 여명이 귀성한다고 합니다. 추석이 되어 고향에 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순한 귀소본능 혹은 회귀본능일까요? 아닙니다. 추석 날 날이 밝기 전 차례를 지내기 위해서입니다. 씨족의 종가에 모여 씨족조와 선조에게 제사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성묘를 하기 위해서입니다. 효의 연장으로, 한 해 농사를 잘 짓게 한 조상의 은덕에 감사하여 죽은 조상을 즐겁게 하는 의식을 행하기 위해서입니다. 죽은 조상을 즐겁게 하려하다 보니까 죽은 자 중심의 문화가 되어 버립니다. 남자들은 명절이지만 주부들은 노동절이 되어 버립니다. 죽은 자를 위해 산 자들이 죽어나는 절기가 됩니다. 추석 음식 만들기, 제사상 차리기, 성묘하기, 설거지하기, 선물 준비하기 등으로 명절 증후군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추석에 만나 서로 용기를 주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만남의 기쁨을 나누기 보다는 제사와 성묘문제로 갈등을 겪게 됩니다. 죽은 자를 기쁘게 하는 추석 문화에서 산자들이 즐거워하는 추석 문화로 바뀌어야 합니다. 죽은 자는 산 자를 위해 추모하는 정도에서 끝내어야 합니다. 살아 계실 때 교훈을 생각하고 좋은 점들을 기리는 것입니다. 죽은 후 상 다리 불어지게 제례상을 차리고 백번 절을 한다고 죽은 조상이 즐거워하는 것 아닙니다. 부모를 즐겁게 하고 효도하는 것은 살아 계실 때 하여야 합니다. 죽으면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다윗은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을 때 "죽었으니 어찌 금식하랴. 내가 다시 돌아오게 할 수 있느냐 나는 저에게로 가려니와 저는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리라."(삼하12:23)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죽은 영혼은 다시 올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고전10:21)라고 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감사절을 어떻게 보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진정 감사절에 함께 즐거워할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14절을 가치 읽어보겠습니다. “절기를 지킬 때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거하는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연락하되”라고 말씀합니다. 연락하라는 말은 잔치하면서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입니다.
먼저 너와 네 자녀입니다. 돌아가신 조상이 아닙니다. 가족 식구가 함께 즐거워해 합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명절이 되어야 합니다. 일가 친척 만나 스트레스 받고 명절에 돌아오면서 차 속에서 싸움을 하고 일주일 동안 말을 하지 않는 그런 명절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안에서 일년을 돌아보며 진정 함께 잔치하고 기뻐하는 명절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족만 즐거워할 것이 아니라 그동안 나를 위해 수고해 준 사람과 함께 즐거워해 합니다. 아무런 재산도 자유도 없는 일년 동안 묵묵히 일해 주었던 노비와 함께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추수할 기업이 없이 오직 성전에서 하나님을 위해 봉사하고 자신들을 위해 헌신해 준 레위인들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수확의 계절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구조적으로 추수할 것이 없어 늘 가난하게 사는 소외 계층과 함께 즐거워하라고 했습니다. 자기 집을 나와 여행하는 객, 남편을 잃고 홀로 고달픈 인생을 사는 과부, 부모 없이 홀로 사는 고아 등과 함께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감사절은 지금까지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과 수고의 떡을 먹을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과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 기뻐하는 절기가 되어야 합니다. 공동체가 함께 즐거워하는 최고의 절기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함께 더불어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일년 추수를 하는 마당에 이런 말씀을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가 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추수는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입니다. 내 것 많이 거두었다고 다 내 것이 아닙니다. 무엇이든 어떻게 홀로 이루었겠습니까? 함께 이룬 것입니다. 추석을 맞이할 때 우리의 어려운 일가 친척들을 돌보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가난한 이웃들, 나를 위해 수고해 주고 도움을 준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앞으로 인류에게 다가올 심각한 문제 중의 하나는 무엇이겠습니까? 부의 불균형입니다. 부자의 나라라고 하는 미국도 2천 5백만명 굶주림 허덕이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 인구의 약 15억명이 열악한 주거환경 속에 허덕이고 있으며 이중 1억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집 없는 노숙자들이라고 유엔은 추정하고 있습니다. 독일의 경제사회학자 마르틴과 하랄트 슈만은 "세계화"가 결국은 "20대 80"의 사회를 가져올 것이라는 우울한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자본가를 포함한 20%만이 국경을 넘나들며 진보와 자기실현을 할 수 있을 뿐 나머지 80%는 실업이나 불안정한 고용상태에서 20%가 생산하는 부에 종속되어 살수밖에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선진국 부유층 20%가 전세계 소득의 86%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사는 사회가 될 수 있도록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추수를 감사할 때면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주인공이 되어야 하겠다고 다짐을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함께 더불어 기뻐하는 문화로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얼마든지 저력이 있습니다. 결코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인구로 볼 때도 그렇게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세계 무역 12권 안에 드는 나라입니다. 선진국에서 발달된 자동차, 선박, 비행기 반도체, 철강 이 중 부족한 것은 비행기뿐입니다. 반도체 일 위의 나라입니다. 선박, 철강, 자동차 강국입니다. 요즈음 미국이 세계 최강국이지만 우리 나라와 비슷한 로마가 한 때 세계를 흔들었습니다. 16세기 스페인, 17세기 화란, 18세기 프랑스, 19세기 영국이 세계의 최강국이 되었습니다. 인구로 보나 땅으로 보나 우리보다 큰 나라들이 아닙니다. 다 신앙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한 시대 그들을 사용했습니다. 오늘 우리나라를 세계 제 2위의 선교 국가로 만든 이유가 있습니다. 가장 큰 교회가 우리나라에 있고 우리나라처럼 신앙의 정열이 뜨거운 나라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문제는 이제 이 은혜를 나만 소유하지 않고 나누는 정신을 실천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한 시대 이 나라와 우리 교회 우리가 쓰임 받아야 할 줄 압니다.
한 때 해지지 않는 나라 영국은 18세기 경제적인 큰 위기를 만났습니다. 빈부 격차가 심화되었습니다.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총체적으로 부패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소망이 없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1720년경에 태어난 아이가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입니다. 그의 어머니는 스잔나입니다. 교회사에 빛나는 믿음의 어머니입니다. 19명의 자식을 낳았습니다. 가난하다고 굴하지 않고, 약하지 않고, 자식을 영적 부유함으로 길렀습니다. 말씀으로 길렀습니다. 이 아이가 옥스퍼드 대학에 들어가서 어머니가 가르쳐 주신대로 신앙 생활을 하였습니다. 당시 대학이 오늘 우리 대학처럼 타락했습니다. 대학이 지성의 탑이 아니라 방종과 방황과 음란과 타락의 탑이었습니다. 그때에 요한 웨슬레와 형제 찰스 웨슬레가 옥스퍼드에 다니면서 성경 읽기 운동을 하고, 기도하는 홀리 클럽 (HOLY CLUB)을 만들었습니다. 몇 천명이 모인 대학에 4명이 모여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이 은혜를 받자 옥스퍼드 대학이 변했습니다. 영국은 서서히 저주와 어두움과 방황의 땅에서 빛이 비추기 시작한 땅이 되었습니다. 요한 웨슬레의 영적 부흥 운동은 영국을 살렸습니다. 우리의 시대를 보면서 비관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함께 기뻐하는 정신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세상은 변화되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풍요로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용하시길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마른 막대기도 사용하십니다. 물멧돌도 사용하십니다. 왼손잡이 에후도 사용하고, 겁쟁이 기드온, 사기꾼 야곱, 40년 간 처가살이한 모세, 아내를 내어 놓은 아브라함, 배반자 베드로, 살인 방조자 바울도 하나님은 사용하였습니다. 추석을 맞이하여 우리는 함께 즐거워하는 문화를 만드는데 쓰임 받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3. 지난 과거 조상에게 종속된 문화가 아니라 오는 미래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기뻐하는 문화로 바꾸어야 합니다.(15).
우리의 삶에서 전통은 중요합니다. 전통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습니다. 과거의 축적물이 전통입니다. 이 전통문화는 마치 물과 같은 것입니다. 물고기가 물이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오염된 물은 갈아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 조상들이 차례와 성묘 문화로 지내었기 때문에 지금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통이기 때문에 아무 생각없이 그 전통대로 해야 한다고 그릇된 전통을 답습해서는 안됩니다. 조상이 추석을 그렇게 지내었느니 우리도 그렇게 지내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전통도 바뀌는 것이고 잘 못된 과거 전통은 변혁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핵가족 시대이고 아이가 하나 둘 밖에 없습니다. 조금 지나면 이 문화는 바뀌지 말라해도 바뀔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과거 지향적이어서는 안됩니다. 과거에 묶여서는 안됩니다. 늘 미래 지향적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의 고향이 아니라 미래의 본향 천국을 향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절기를 지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15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찌니라.” 아멘. 일년 추수를 마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하나님께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기대하고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그 중에는 일년 동안 풍성한 수확을 거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중에는 일년 동안 흉년으로 아무 것도 거두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일년 동안 부모가 돌아가신 분들도 있었을 것이고, 불의의 사고를 만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사업에 실패한 사람도 있을 것이고, 질병에 걸린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비록 올해 많은 것을 거두지 못했지만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수실 것을 기해하면서 온전히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풍성한 추수를 할 때입니다. 사람들은 만나 서로 부자된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아직 문제가 잘 풀리지 않고 태풍으로 수확이 감소되고, 여러 가지 복잡한 문제로 마음이 우울하다 할지라도 우리 하나님께서 미래에 복을 주실 것을 기대하고 온전히 기뻐하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네 모든 물산이라는 것은 한 해 동안 얻은 수확물, 소득, 수입을 말합니다. 네 손을 댄 모든 일이라는 것은 내가 하는 모든 것, 사업과 직업, 모든 활동 범위를 가리킵니다. 하나님께서 확실하게 축복해 주실 것을 약속하는 말씀입니다. 아직 이런 약속된 복을 받지 못하였을지라도 복 주실 것을 인하여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미래에 복 받을 것을 믿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온전히 즐거워하라는 말씀은 '마음껏 즐거워하라', '충분히 즐거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앞으로 모든 일에 더 많은 복을 주실 것을 인하여 온전히 즐거워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기도 응답해 주실 것을 믿고 마음껏 즐거워하는 명절이 되어야 합니다.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은 신앙인이 아닙니다. 신앙인은 모든 과거를 은혜로 해석하고 감사합니다. 그리고 현재의 삶 가운데 하나님 앞에 영광을 돌리고 미래를 소망 가운데 기대하는 사람들입니다. 미래 잘 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자식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 것을 기대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행복하게 될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복 주실 것을 인하여 즐거워해야 합니다. 올해 보다 내년이 내년보다 내 후년이 더 좋아질 것을 믿고 즐거워하여야 합니다. 기도가 반드시 응답될 것을 기대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추석에 불평하고 원망하며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명기 12장 7절 말씀에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受苦)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처지에 있든지 불확실한 미래 앞에 공포로 떨 것이 아닙니다.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의지하고 감사로 기대하면 기대한 만큼 풍성한 열매가 맺히는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에 처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근거로 미래를 추측합니다. 어떤 질병이 다가오면, 어떤 난관이 다가오면, 어떤 극한 상황이 몰려오면 그것으로 다가올 미래의 부정적인 모습을 생각하면 근심과 염려, 걱정의 노예가 되어 버립니다. 그러나 미래는 우리의 추론이나 논리, 생각대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자들의 과학적 법칙에 따라 미래가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과학의 법칙대로 내 논리적 사고의 순서대로 미래가 전개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치 앞을 내다 볼 수 없습니다. 미래는 내 손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분은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시간의 주인이시고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은 어떻게 합니까? 원망하거나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 나사로가 살아났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렸습니다. 광야에 장정만 5000명이 있습니다. 먹을 것이 없습니다. 겨우 있는 것은 어린아이의 한 끼 식사 분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입니다. 그 때 그 위기 상황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합니까?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미래에 대한 분명한 기대가 있었습니다. 아직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5000명 먹을 것이 이미 있는 것처럼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기도 응답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의 신실성을 그대로 믿는 것입니다. 그 결과 다 배불리 먹고 12바구니를 거두었습니다. 다니엘도 죽음의 위기에 처했습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면 이제까지 쌓아 놓은 국무 총리의 지위와 명예를 다 잃어버릴 순간이었습니다. 지위와 명예만 잃은 것이 아니라 목숨까지 잃어버릴 순간입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합니까?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단 6:10)"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입술을 열어 공개적으로 감사하는 것입니다. 기도한 내용이 이루어 질 것을 확신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사자가 입을 다물고 더 왕의 신뢰를 받게 됩니다. 지위는 그대로 지켜졌고 재산은 하나도 손해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죽이려했던 원수들이 사자의 밥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15절 말씀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너는 칠 일 동안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를 지키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모든 물산과 네 손을 댄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을 인하여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 (신 16:15)” 추석을 맞이하여 이런 복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추석이 과거에 종이 되는 문화가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기대하며 기뻐하는 문화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문화 변혁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추석 문화를 조상에게 감사하는 제사, 성묘 문화에서 하나님께 감사하는 예배 문화로 바꾸는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13, 16-17).
죽은 자를 즐겁게 하는 문화에서 산 자가 함께 연락하는 문화로 바꾸고(14)
지난 과거 조상에게 종속된 문화가 아니라 오는 미래에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으로 기뻐하는 문화로 변혁시키는 주인공들이 되어야 합니다.(15)
2007.9.23/열린교회/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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