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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신6: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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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수 목사 |
참고 : | 말씀의샘물교회 http://www.wordspring.net/ |
공부하는 즐거움
본문/ 신6:4-9
1. 들어가는 이야기
학생 시절 때 工夫(공부)를 잘 했던 사람이나 못 했던 사람이나 대부분 “공부=괴로움” 이지 “공부=즐거움” 으로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는 듯합니다. 학교생활의 공부는 강제적-율법적-독재적-억지로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와 집안의 강압으로 하는 공부였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학교 공부의 달인과 도사들이 공부에 대하여 쓴 글을 보니 그들도 대부분 공부=괴로움 이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끔 “학교의 우등생이 사회의 낙제생, 학교의 날라리가 사회의 우등생,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 라는 말을 듣습니다. 그런 말은 “공부=학교수업” 이라는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공부란 “공부=학교수업=성적순” 이 아니라, 각 사람이 학교를 졸업하고 살아가면서 士農工商(사농공상-학문, 군사, 정치, 농업, 각종 산업, 기업, 서비스업, 운동, 문학, 음악, 미술, 영화, 종교, 등) 중 각자가 선택한 해당 분야에서 최고의 성취를 이루기 위하여 연구-노력-인내-수련-연마하는 총체적 과정이기 때문입니다(연세동문회보를 보면 연세 동문 70% 이상이 대학 전공과는 무관한 분야에서 일하고 있다).
2. 공부하는 즐거움
영국 계관시인 존 에드워드 메이스필드의 “Sea Fever(바다를 향한 열망)”, 시인은 “나는 다시 바다로 가야겠다(I must go down to the seas again)”고 몇 번이나 반복합니다. 험난한 항해를 하고 귀항한 후 다시는 배를 타지 않으리라 결심하고 육지에서 살다가 어느 날 문득 “아, 이건 아니야! 이렇게 사는 것은 무의미 해, 나는 아무래도 다시 바다로 가야겠다!” 하는 내적 갈망을 토로한 시입니다.
나는 산행거리 20km, 산행시간 12시간 걸리는 설악산 공룡능선을 3 차례 종주 하였습니다. 이렇게 큰 산을 오르는 일은 아주 힘듭니다. 산행하는 동안 내내 “아이고, 죽겠다. 다시는 이런 험한 산엔 오지 말고 동네 산이나 부지런히 다녀야지” 합니다. 그러나 한 달 쯤 밍밍한 동네 산을 오르다 보면 “아, 이건, 아니야! 설악산 공룡능선 정도는 되어야지, 그래, 다시 설악산이다!” 합니다.
나는 공부하는 즐거움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억지로-할 수 없이-반 강제로 하는 공부는 괴로움의 극치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알고 싶어서-배우고 싶어서-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는 그것이 무슨 공부(whatever it may be!)가 되었든지 그런 공부는 즐거움의 극치입니다. 그런 공부의 즐거움을 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하니이다(시119:103)” 라고 하였습니다.
3. 일반적 의미에서 공부하는 즐거움은 무엇인가?
첫째. 유레카의 즐거움이 있습니다. 공부하는 즐거움은 무엇보다 먼저 모르던 것, 의심나던 것, 답답하던 것이 10년 묵은 체증이 뻥 뚫리듯 시원하게 깨달아 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유레카라는 말은 아르키메데스가 목욕하다가 탕의 물이 넘치는 것을 보고 부력의 원리를 발견하고 너무 기쁜 나머지 벗은 줄도 모르고 목욕탕을 뛰쳐나와 유레카!... 를 외쳤다는 고사에서 온 말로 “오, 바로 이거로구나! 오, 드디어 알아냈다!” 는 뜻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만이 아르키메데스와 같은 "유레카! 아하, 경험(aha, experience)"을 합니다. 공부하는 사람에게만이 문제의 핵심을 한 눈에 알아보는 혜안(통찰)이 열리고 문제를 快刀亂麻(쾌도난마) 할 수 있습니다.
둘째. 곳간이 차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백낙천의 勸學文(권학문).
有田不耕倉廩虛(유전불경창늠허: 밭이 있으나 갈지 않으면 곳간이 빌 것이요)
有書不敎子孫愚(유서불교자손우: 책이 있으나 가르치지 않으면 우매하리라)
倉廩虛兮歲月乏(창늠허혜세월핍: 곳간이 비면 살아가기가 구차할 것이요)
子孫愚兮禮義踈(자손우혜예의소: 자손이 어리석으면 예의가 성기리라)
若惟不耕與不敎(약유불경여불교: 밭 갈고 글 가르치지 않음은)
是乃父兄之過歟(시내부형지과여: 이 모두 부형된 사람의 허물이로다)
사회적 통계자료를 들먹이지 않아도 공부한 사람과 공부하지 않은 사람의 경제적 차이는 판이합니다. 교회도 예외가 아닙니다. 내가 전에 우연히 서울 어느 큰 교회 부목사 봉급 명세서를 보니 나이불문-가족수불문하고 학력에 따라 호봉이 다르게 책정되어 있었습니다. 공부하면 곳간이 차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셋째. 잘(well) 사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여기서 잘 산다는 것은 단순히 경제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정신-정서-품위-교양-문화적인 면에서도 잘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가끔 주변에서 경제적 풍요로움으로 값비싼 집-옷-가구-자동차-음식 등으로 휘돌아치나 예의범절, 文史哲(문사철-문학, 역사, 철학적 소양), 인간적 품격, 노블레스 오블리쥬(Noblesse Oblige-가진 자의 사회적 책임) 등 문화적으로는 수준 이하로 사는 사람들을 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잘 사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잘 산다는 것은 경제적 풍요 뿐 아니라 문화적으로 아름답게, 도덕-윤리적으로 정의롭게 사는 것이 잘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Living well and beautifully and justly are all one-thing).
유한준(조선 1732-1811)은 石農畵苑跋(석농화원발)에서 “알면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보이고, 보이면 모으게 되나니, 그 때 모으는 것은 그저 무작정 쌓아 두는 무리와는 차원이 다르다(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고 하였습니다. 공부하면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알면 잘 살아보려고 힘쓰고, 그렇게 힘쓰는 가운데 자연히 잘 사는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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