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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신17: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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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상호 목사 |
참고 : | 세광교회 http://sk8404.or.kr |
악을 제하고 교회를 개혁하라
신 17:1-13, 롬 1:17
2005. 10. 30, 오전(종교개혁 488돌)
본문조명(신 17:1-13)
:1 흠이나 악질이 있는 우양을 하나님께 드리지 말라. 종교개혁은 공로나 행함을 강조하는 데서의 해방인데 구원받은 감격으로 주님께 무엇을 드릴 때는 좋은 것으로 드려야 합니다.
:2-7 악행자나 우상숭배자를 재판할 때는 공정하게 하고 반드시 두 세 사람의 증거가 있을 때에만 사형을 집행할 수 있습니다. 억울한 죽임이 없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8-12 대법원에 상소할 일은 바로바로 올리고 눈에 보이는 대로 판결하여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지 않아야 합니다.
그 대신 어떤 사람이 판결 언도에 불복하고 방자하게 구는 오만한 자(천자히 12절)는 사형으로 다른 백성들로 하여금 그러지 못하게 하도록 하셨습니다.
롬 1:17
오늘은 종교 개혁 488돌을 맞는 주일입니다. 요즘 들어 제2의 종교 개혁이 일어나야 하지 않느냐는 소리가 점점 증폭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 종교 개혁자 루터에 대해서 살펴보면서 우리의 의식을 새롭게 하고자 합니다.
종교 개혁은 1517년 10월 31일 루터가 95개조 항의문을 비텐베르그의 교회당 정문 게시판에 계시하면서부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16세기는 현대사의 전환점이 되었고, 신교(新敎)는 마틴 루터(M. Luther)의 종교 개혁 운동으로 말미암아 점화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1483년 10월 10일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시골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1546년 2월 18일에 63세의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성실한 부인 가트린이 있었고 저들 사이에 네 자녀가 있었습니다. 루터는 그 어린 시절을 만스펠트(Mansfeld)에서 보내면서 1497년까지 농촌 학교에서 공부하였습니다. 그 후 1501년에 다시 에르푸르트(Erfurt:유명론의 보루로 명성을 떨치던) 대학에서 학문을 습득하였습니다. 1502년에 그 곳에서 학사 학위를 받았고 3년 뒤에 철학박사 학위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루터의 아버지는 그에게 비싼 법령집(Corpus iuris)을 졸업 선물로 주었는데 이는 아버지가 자기의 아들을 부와 권세와 영화가 보장된 법관으로 만들고자 하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루터 역시 그런 꿈에 부풀어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던 1505년 7월 2일 천둥 번개가 치는 을씨년스러운 날에 친구와 함께 고향집을 향하여 가고 있는데 비를 피하러 나무 밑에 들어갔다가 옆에 있는 친구에게 벼락이 떨어져 쓰러져 죽는 것을 보면서 충격을 받고 하나님께 서원 합니다. "...목숨만 구해 주신다면 수도원에 들어가겠습니다"라고 서원합니다. 너무나 무서웠을 뿐만 아니라 인생의 무상함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곧장 어거스틴파 수도원으로 들어갑니다. 이 때 가족들은 모두가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법관의 푸른 꿈을 가지고 모두가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수도사가 되겠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후 1507년에 신부 안수를 받게 되고, 1512년에 신학 박사가 된 그는 비텐베르그(Wittenberg) 대학에서 주석을 집필하면서<시편(1513-1515), 로마서(1515-1516), 갈라디아서(1516-1517), 히브리서(1517-1518) 그리고 1519년에 다시 시편 주석을 썼습니다.> 11개의 수도원을 순회하면서 설교하였습니다.
이 때는 벌써 그의 마음속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을 때였습니다. 그 시절에 루터가 깨달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서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은 율법만 행사하시는 공의의 하나님 뿐 아니라 자신이 보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에게 용서해 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Ⅰ. 루터를 깨운 하나님의 말씀
루터가 종교 개혁자로서 일할 수 있도록 루터를 일깨운 말씀은 로마서 1장 17절이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성경 말씀입니다.
루터는 이 성경구절을 로마 여행 중에 깨달았습니다. 1510년 11월부터 1511년 4월까지 수도사들이 순례 여행을 떠나게 되는데 그 코스 중에 하나가 성 계단 성당(Scala Santa) 내부에 "빌라도의 계단", 또는 "거룩한 계단"이라는 이름의 28계단이 있습니다. 이 돌계단은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예수님께서 재판을 받으시러 밟고 올라가신 계단! 죄악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수치와 모욕과 고통을 당하신 예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해 그 계단을 로마로 옮겨와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예배당을 지어 보존해 오고 있는 것입니다.
중세의 신자들은 이 계단을 무릎으로 한 계단씩 올라가며 그리스도의 고난을 상기하면서 기도하며 올라가는 계단이었습니다. 특별히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는 의미인지 그 계단에는 유리 조각을 깔아 놓고 무릎으로 기어올라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무릎으로 기어올라갔다 무릎으로 기어 내려와야 하는 계단! 그렇게 함으로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마음을 표시하고 그렇게 함으로서 구원받고 죄사함을 받는다고 하는 그릇된 인식을 가지고 그렇게 한 것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순례객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데 이것은 무지한 행동일 뿐입니다. 우리 개신 교인들은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가 로마를 방문하여 스칼라 산타 28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올라가면서 고통스런 고행을 하다가 번개같이 이 성경 구절이 떠오른 것이고 그를 지배한 것입니다. 의롭게 되는 것은 믿음으로 되는 것이지 이렇게 고행하고 자기 노력으로 의인되는 것은 절대로 아니라고 하는 것을 깨닫고 벌떡 일어나서 그 계단을 뛰어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그로부터 4년 후인 1515년 11월 비텐베르그 대학에서 로마서 강의를 준비하던 중, 이 구절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는 기록하기를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표현만은 도무지 이해 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이 하나님께서 의로우시고, 불의한 자들을 심판하심에 있어서 의로우시다 는 그런 의미인 줄로 생각했다....나는 주야로 생각하다가 드디어 하나님의 의라는 것은 은혜와 긍휼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의(예수=복음)를 의미하는 것이요, 또 우리가 그 의(복음)를 믿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 말미암아 산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사람이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복음! 곧 예수를 믿음으로 은혜의 구원을 받는 것을 말한다......내가 이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다시 태어나는 느낌을 받았으며 천국 문이 내 앞에 활짝 열려진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루터는 이것을 비텐베르그의 어거스틴 수도원 탑 안에서 발견하였고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이것을 가리켜 "탑의 경험"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사실 루터는 이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교황청에서 시키는 대로 법령과 전통에 매여 그것들이 제일 옳은 줄 알고 그것들을 지키려고 애썼으며, 내가 멸망 받게 된 것은 이 육체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내 몸을 괴롭게 하고 학대하고 증오하였다고 루터가 1531년 쓴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루터로 하여금 종교 개혁의 횃불을 들도록 하였던 것은 이 하나님의 말씀! 로마서 1장 17절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믿음, 오직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는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믿음은 하나님의 의를 믿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 곧 복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고 하였습니다. 그 의는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를 믿는 자에게는 모든 죄에서 용서를 받고, 죄 사함을 받아 무죄인으로 의롭다 칭해 주는 칭의의 은총이었습니다.
바로 이 성경의 빛이 로마의 루터를 살리고 독일과 구라파와 세계를 살리고 은총의 세계로 인도한 것입니다. 행함으로만 구원받는다고 가르친 1000년이 넘는 로마 카톨릭의 이단 사상에서 모든 영혼을 해방시킨 자유의 복음이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의 새로운 출발이었고, 너무나 성경으로부터 멀리 떠나갔던 인생들이 비로소 미로를 벗어나 성경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것은 축복의 시작이었습니다.
Ⅱ. 개혁 운동의 출발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당시 독일 비텐베르그 대학에는 매 금요일마다 신학자들이 모여 신학적 문제에 토의하는 모임이 있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정오 경, 젊은 두 수도사는 비텐베르그 시의 성교회 (城敎會) 정문 앞에 나타났습니다. 당시 그 건물은 대학 부속 예배당으로 사용하였던 고로 교수나 학생들의 게시판으로 알려 졌습니다.
거기에 도착한 두 수도사는 인쇄소에서 가지고 온 라틴어로 쓰여진 한 문서를 꺼내어 나무로 만든 문짝 위에 못질하여 달았습니다. 그 글 서문에 "진리를 밝히고 싶은 열망심에서 문학사요, 신학사이며, 신부인 루터의 사회로 다음의 논제들이 비텐베르그에서 토의되겠습니다. 이 구술토의에 참석할 수 없는 분은 서신으로라도 의견을 전해 주기를 간청하는 바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아멘'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로 그 공개 토론 내용의 문서가 저 유명한 95개조문이었습니다. 이 문서가 공개된 지 2주만에 전 독일을 불질렀고, 4주만에 전 구라파를 변화시키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 때가 저 유명한 면죄부(속죄권)판매를 위하여 교황의 깃발을 들고 비텐베르그 시를 흥분시키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그 당시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 성당(ST. Peter' s) 완공을 위하여 막대한 공사비를 충당시키기 위해서 속죄권 판매를 강권하고 있었던 때입니다. 100년 동안 끌어오던 공사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1506년부터 속죄권 판매를 재개한 것입니다.
당시에 교황청은 면죄부 판매원들을 모집하여 판매하도록 하였는데 당시에 면죄부 판매 실적을 가장 많이 올린 사람은 몸이 뚱뚱한 도미니크 교단 출신의 수도사 텟젤(Johann Tetzel 1465-1519)이었었는데 텟젤은 당대의 웅변가요, 학자로 유명하였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크게 외치기를 "속죄권(면죄부)을 사면, 살아 있는 사람은 즉시 죄를 용서받을 것이요, 연옥에 있는 자를 위하여 속죄권을 사면, 그 돈(은화)이 헌금함 속에 떨어져 소리가 나는 순간 곧 천국으로 올라간다'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일입니까! 성경에 어디 그렇게 말씀하는 곳이 한 군데나 있습니까? 루터가 성경을 연구해 보니 이같은 사기꾼이 없고, 이처럼 큰 이단이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죄권에 대한 부당함을 만천하에 설교하면서, 95개조 항에 달하는 공개 토론 제목을 제의한 것입니다. 그 중심 내용은 "속죄 권은 사람의 죄를 속할 수 없다. 속죄권은 죄의 벌을 면할 수 없다. 속죄권이 연옥에 있는 영혼을 구할 수 없다. 믿음으로 회개한 자는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를 받았다"라고 하는 내용들이었습니다.
당시 그 성의 교회 안에는 화려한 금과 은 등의 그릇으로 꽉차 있었습니다. 로마 교황은 말했습니다. "성경에 베드로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라고 했는데 우리에게는 은과 금이 많다."라고 하면서 교만한 소리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토마스 아킴퍼스는 말하기를 로마 카톨릭은 은과 금은 많지만 예수의 이름이 없다"라고 하면서 맞서기도 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교회의 타락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성직을 매매했습니다. 성직을 돈을 받고 팔았기 때문에 당시에 신부들 중에는 성경을 읽을 수 없는 사람도 있었고, 어떤 이는 돈으로 대 주교직을 샀으나 죽어서야 성당에 들어 갈 수 있었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 모두가 교회의 타락상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상 숭배 행위가 공공연하게 교회에서 일어났습니다. 성자들을 숭배하고, 유물 숭배행위도 활발했습니다. 베들레헴 말구유에서 뽑아 왔다는 볏집! 예수님께서 달려 돌아가신 십자가에서 짤라 왔다는 나무 조각! 성자의 엄지손가락! 예수님께서 쓰셨던 가시 면류관! 세례요한의 머리카락! 등과 같은 유물을 숭배하는 행위가 자행되었고, 그것들을 소지하면 병도 고침 받고 은혜 받는다는 미신 적인 행위가 용납이 되었습니다. 완전히 비 성경적인 행위들이 난무했습니다.
성자의 날에는 각처에서 온 순례객들은 이 성자들의 유골과 그들이 입었다고 하는 의복에 입을 맞추려는 사람들의 행렬로 줄을 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갖가지의 유골들과 성의(거룩한 옷) 앞에 입맞추고, 거기에 대해 기도하면 죄사함을 받는 다고 가르쳤고 그렇게 믿어 왔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하나님은 루터를 일으키셔서 우리가 구원을 얻는 길은 면죄부를 사는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유골이나, 성상(聖像)이나, 유물들에 입을 맞추고 기도함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것이라고 소리를 지르게 한 것입니다. 바로 그 소리가 면죄부 판매 때문에 점화된 것입니다. 이 면죄부 판매 운동이 아니었다면 종교 개혁이 지연되었을는지 모릅니다.
Ⅲ. 종교개혁의 영적 전투
다음해 7월, 당황한 교황은 루터를 로마로 소환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철모르는 어린 신부의 생각 없는 장난인 줄 알고 가볍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루터로 인해 면죄부 판매는 망쳐졌고, 그들의 정체는 들어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이르자 교황은 루터를 소환하기에 이르렀고, 추기경인 카제타누스(Cajetanus)를 시켜 루터의 주장을 철회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그런가 하면 루터의 마음을 돌리려고 회유 정책을 쓰기도 했습니다. 1518년 12월에 교황은 그의 시종 밀티쯔(Miltitz)를 시켜 루터에게 황금의 장미(Golden Rose)와 교황의 교서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황금의 장미는 교황에 의한 축복으로 알고 누구나 받기를 바라는 명예였습니다. 그러나 불의를 향해 싸움을 시작한 루터는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신자들은 다 복음의 제사장이기 때문에 교황권이 일반 사람들 보다 우월할 수는 없으며, 신자들이 다 제사장이기 때문에 교황만 성경 해석권이 있다는 것은 잘 못된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종교 개혁의 싸움을 쉬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1520년 6월 15일 루터에게 파문장이 발행되었고, 국회를 통해서 화형을 시키도록 압력이 가해졌습니다. 그리고 1921년 4월 17일 독일의 보름스(Worms)에서 소집되는 국회는 루터에게 출두 할 것을 명했습니다.
이 때 친구들이 그를 만류하였습니다. 그 때 루터는 유명한 말을 하였습니다. "원수들이 보름스의 기왓장만큼 많을지라도 나는 가리라."하면서 국회로 들어갈 때에 100여명의 기병들이 그를 둘러 쌓다고 했습니다. 그 때 루터는 국민들로부터 황제 이상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국민의 4/3이 루터를 지지했는데 이것은 교황청으로부터 착취받고 억압받은 민중들의 울분을 대변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루터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 후에 프레드릭공의 특별한 배려를 받아 발트부르크(Wartburg)에 은신해 있으면서 신약 성경을 헬라어에서 독일어로 번역함으로 성경이 교황청의 성경이 아니라 모든 신자의 성경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 성경을 손에 쥘 수 있게 된 것도 이 같은 개혁자들의 수고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종교 개혁가 파렐의 말을 기억해야 합니다. "종교 개혁자들이 로마 카톨릭을 비난한 것은 저들이 잘못 살아가는 것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잘못 믿고 있는 것에 대해서 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부패한 생활을 살아도 좋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잘못된 교리 때문에 바로 믿지 못하는 것처럼 위험한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오늘 종교 개혁 488주년을 맞이하면서 종교 개혁은 중세기 교회사 가운데 한 사건으로 끝난 것은 아닙니다. 교회 개혁은 과거에도 그러했고, 지금도 계속 요구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인이 되어야 할 자리에 사람이 주인 노릇 하는 것을 용납해서는 안됩니다. 이제 성경으로 바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말씀으로 받을 줄 아는 의식으로 개혁해야 합니다.
교회 내에 잠재되어 있는 온갖 인본주의, 불의한 일들! 외식주의와 바리새적인 의식! 물량주의와 기복주의! 극단적 이기주의! 교권주의와 교권 장악을 위한 금권선거와 비 성경적인 요소들을 향한 제 2의 종교개혁을 위해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쓰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어떤 단체에서 지적하였듯이 기독교인의 가장 큰 윤리적 문제는 정직성의 상실이라고 했습니다. 도대체 믿을 수 없다는 말이 쉽게 나오고 있습니다. 정말 믿을 수 없는 행동에 그 동안 빠져 있다고 하면 이 시간 우리는 돌이켜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다행스럽게도 좋은 교리적 지식을 가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에 수반되어야 마땅한 삶이 없다는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삶이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빛의 자녀들임으로 마땅히 빛의 자녀들의 열매인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의 열매를 맺어야 하는데 오늘 우리에게 이런 것이 있는가 물어 봐야 합니다. 물론 타락한 성직자들도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을 비판하기 전에 그럼 나는 괜찮은가 하는 것입니다. 이 점은 우리가 기도해 주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도 온전한 삶과 성도의 삶과 사명을 위해서 바로 살아가면서 섬기는 종들이 많이 있기에 이 나라와 이 민족과 교회들이 존재한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자로서의 바른 삶이 있는가를 살펴보고 내 자신이 나를 개혁하려 하고, 살아 움직이려 하고, 바로 해 보려고 하는 몸부림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의 영광!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라고 하는 말들은 종교 개혁자들의 한결같은 구호였습니다. 오늘도 이 구호는 우리의 입을 통해서 외쳐져야 할 것이고 계속되어야 할 과제입니다. 한국 교회와 우리 교회 안에서 이일이 계속되어야 할 일이며, 더 나아가서는 로마 카톨릭을 향한 신령한 도전을 해야 합니다. 혼합주의와 종교 일치 주의라고 하는 무서운 사탄의 책략 앞에 우리 스스로 각성하면서 개혁자의 반열에 함께 서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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