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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신5:7-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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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72748126 |
2009년 7월 12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신명기 5장 7절~10절
설교제목 : ‘하나’님의 자녀들
너희는 내 앞에서 다른 신들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는 너희가 섬기려고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어떤 것이든지, 그 모양을 본떠서 우상을 만들지 못한다. 너희는 그것들에게 절하거나, 그것들을 섬기지 못한다. 나, 주 너희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에게는 그 죄 값으로, 본인뿐만 아니라 삼사 대 자손에게까지 벌을 내린다. (신명 5:7~10).
<성경 이야기>
성경 말씀 중에 읽는 이를 불편하게 만드는, 곤혹스럽게 만드는 구절들이 여럿 있습니다. 오늘 성경말씀 역시 그 중 하나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 이는 오늘날 현대인들을 곤혹스럽게 만드는 성경구절입니다. 이를 어찌해야할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성경의 언어는 문학적 표현이라는 점입니다. 그것은 철저하게 기록한 이의 신앙고백적 언어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지요. 대 여섯 살 되는 아이가 있다고 가정하고, 그 아이가 “우리 엄마가 제일 예뻐요”라고 말했다고 했을 때,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요? 그 아이의 어머니가 정말 세상에서 제일 예쁜 미인일까요? 그렇지는 않지요. 그건 고백적 언어일 뿐이고, 또 문학적 표현일 뿐입니다. ‘질투하시는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 역시 신앙고백적으로 표현된 문학적 어구일 뿐입니다. 신명기를 기록한 이들, 즉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갖고 있었던 무의식적 신앙고백의 문학적 표현인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런 문학적 표현이 담고 있는 메시지의 색깔이 엷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엄마가 제일 예뻐요”라는 표현이나 “우리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다”는 표현은 그것 그대로 경건하고 아름답고 소중한 의미를 여전히 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걸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런 ‘곤혹스러운 성구들’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문자에 담겨져 있는 더 깊은 뜻을 헤아려야 하는데, 문자 그대로의 뜻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입니다. 어리석은 일이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 하느님>
기독교의 신을 ‘하나님’으로 부를 것인가, ‘하느님’으로 부를 것인가를 놓고 거의 1백 년 가까이 논쟁중입니다. 저는 두 호칭을 모두 사용하고 있습니다만, 개인적으로 ‘하느님’이란 호칭을 더 선호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라는 호칭에 담겨져 있는 과도한 배타성이 싫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의 신들은 아무 것도 아니고, 다만 우리 기독교에서만 믿는 신이 유일무이한 신”이라는 극도의 배타적 신학을 담고 있는 ‘하나님’이라는 언어는 옳지 않다고 생각됐습니다. 그래서 하늘을 향한 경배의 이미지를 담고 있는 ‘하느님’이라는 호칭을 선호해왔습니다. 배타성보다는 경건성의 이미지를 품고 있는 ‘하느님’이라는 호칭이 좋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보다는 ‘하느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해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종교다원주의자는 아닙니다. 종교다원주의는 제가 부담 없이 소화해 낼 수 있는 세계가 아니라서, 저는 종교다원주의자가 아닙니다. 다만 저는 소박한 의미에서 ‘좀더 폭 넓은 종교의 세계’를 이해하는 정도일 뿐입니다. 그게 제 분량의 목회입니다.
<장일순 이야기>
최근 ‘하나님’에 대한 깊은 통찰을 발견할 수 있는 ‘장일순의 글’을 읽고나서 ‘눈이 번쩍 뜨이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늘 그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장일순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생명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지 둘이 아니다 이 말이야. 생명은 볼 수가 없어요. 볼 수가 없단 말이야. 볼 수가 없는데 하나다 이 말이야. 생명은 분명히 있는데 하나다 이 말이야. 생명이 둘이다 할 적에는 '너'와 '내'가 갈라지는 거예요. 또 현상세계에서 얘기할 적에 삼사오 이렇게 자꾸 갈라지게 되면, 그것은 결국 어떻게 되었든간에, '너'와 '나'의 대상관계라고. 그렇게 되었을 적에는 현실세계의 현상세계만 보게 되는 거지. 이 생명은 절대세계에 속하는 거지. '너'와 '나'라든가, 삼이라든가, 사라든가 이거는 상대적인 세계에 있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오늘날 모두가 하나같이 눈으로 뵈지 않는 것은 없다고 이야기를 하고 눈으로 들어오고 손으로 꽉 쥐어야만 이게 뵌다고 하는 세상이라. 그것이 다시 말하면 물질문명이요, 그거만 따라가다 보니까 해결이 안되는 거라. 어떠한 거든지 현상세계는 '너'다 '나'다 이렇게 생긴 이것은 죽게 되어 있어요. 그러나 생명의 세계는, 절대의 세계는 영원한 것이다 이 말이야. 그러니까 '너'-'나' 해서 자꾸 담을 쌓고 가게 되면 말이지 수없이 담을 쌓게 돼.”
그렇습니다. 생명의 세계는 하나입니다. 절대세계도 마찬가지로 하나입니다. 둘이나 셋이 아닙니다. ‘하나’입니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인간은 나누는데 익숙합니다. 자꾸 구분하고 분리하는 습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하고 자연(풀, 벌레, 돼지, 고양이, 나무, 태양, 달, 별…)을 구분하고 있고, 사람과 사람들끼리도 자꾸 나눕니다.(어린 아이와 어른, 남자와 여자, 양반과 상놈, 선진국민과 후진국민, 진보주의자와 보수주의자, 일등과 꼴등, 내 나라와 너의 나라 …). 또 종교의 영역에서도 자꾸 나누고 분리하고 투쟁합니다.(기독교, 이슬람, 유대교, 불교, 힌두교, 무속종교 …). 또 인생의 일들을 자꾸 나눕니다. (삶과 죽음, 건강과 질병,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 …)
그런데 장일순의 메시지에 따르면, 이런 나눔과 분리는 생명의 원리에 맞지 않고, 절대(영원)의 원리에 합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명과 절대의 원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자연은 ‘하나’이고, 사람과 사람들은 ‘하나’이고 … 더 나아가서 인류와 하느님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섬기는 신(神)은 ‘하나님’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 얼마나 훌륭한 통찰입니까?
<설교의 적용>
우리나라는, 또 지금 인류는 ‘분열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딸로서 온 인류는 ‘하나’인데, 그 ‘하나’님의 아들딸들이 둘과 셋, 십과 백, 만과 천으로 핵분열하고 있습니다. 만인이 만인에 대해서 투쟁하는 시대, 그게 오늘날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그러나 이는 안 됩니다. 이건 예수님의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 5:44)고 하셨습니다. 그 말의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구분을 말라’는 것입니다. ‘너와 너를 괴롭히는 원수들’을 구분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다 ‘하나’님의 아들딸이고, 그래서 우리는 모두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입니다. 자연과 인간은 하나이고, 사람들과 사람은 하나이고, 하나님과 사람은 하나입니다. 또 삶과 죽음은 하나이고, 행복과 불행은 하나이고, 건강과 질병은 하나이며, 성공과 실패도 하나입니다. 그냥 모든 것이 다 ‘하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축도 : 이제는 우리에게 진리의 길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언제나 어디서나 자비의 마음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넓으신 은총과, 진리의 동반자로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여기 고개 숙인 우리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어디서나 풍요로우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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