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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신6: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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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부겸 목사 |
참고 : | http://blog.naver.com/malsoom/92799842 |
2009년 11월 8일 주일설교
성경말씀 : 신명기 6장 4절~5절
설교제목 : 분도(分道)의 길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신명 6:4~5)】
<책 이야기>
우리나라의 국기에는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고, 일본의 국기에는 태양문양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차이를 아시는지요? 저도 잘 몰랐습니다만, 최근 읽은 책 『성상파괴주의와 성상옹호주의』(진형준 지음, 살림출판사)를 통해서 그 문양들에 깃들어 있는 놀라운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 책에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저지르는 오류 중의 하나는 태극문양과 일장기의 문양을 놓고, 전자를 이원론적이라고 후자를 일원론적이라고 규정하는 태도입니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태극문양의 이질적인 두 항은 대립하고 있다기보다는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습니다. 그것들은 겉모양이 다르다고 해서 싸우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태극문양에서 이질적인 것들을 조화롭게 만드는 ‘보이지 않는 큰 원리’를 상상하게 되고, 그 이질적인 것을 낳은 동일한 모태를 상상하게 됩니다. 즉 태극문양에서는 그 어느 것도 배타성에 의해 배제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붉은 빛의 해를 상징하는 일장기의 경우에는 해(밝음, 빛)와 대립되는 달, 어둠 등은 추방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두 항을 설정해 놓은 태극문양이 오히려 일원론(一元論)적인 세계관을 보여주고 일장기의 문양은 이원론(二元論)이 극단화된(이질적 항목이 배재된) 독단론의 세계관을 보여줍니다.”
저는 이 글을 읽고 뭔가 번뜩이는 통찰을 얻은 것 같았습니다. 특히 유일신(唯一神)을 섬기는 기독교 신앙과 관련해서, 오늘날 기독교 신학의 장벽을 깨트릴 수 있는 훌륭한 지혜를 얻는 듯 했습니다.
<성경 이야기>
이제 성경을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 주는 오직 한 분뿐이시다.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의 하나님을 사랑하여라.(신명 6:4~5)】뭐 더 이상의 설명이나 해설이 필요 없을 정도로 분명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성경구절입니다. 기독교는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저는 앞서 인용한 그 책의 내용을 읽으면서 무릎을 탁치는 통찰력을 얻었습니다. 즉 우리가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소위 일장기 식의 신앙생활을 해왔는데, 이는 일원론적인 신앙생활이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즉 우리 한국교회 성도들은 일장기 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생활을 해왔는데, 즉 하나님 한분 만을 태양처럼 섬기고 ‘나머지 것들’은 모두 쓰레기처럼 내다버렸는데, 이는 일원론적인 신앙이 아니라 이원론적인 신앙생활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어둠이나 슬픔, 심지어는 악(惡)조차도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뭇가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 5:45)”고 하신 것이 아닐까요?
그래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품에서 나온 나뭇가지들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에 대해서 조롱하고 비난하고 힐난하는 사람들조차도, 또 우리 기독교적 복음과 배치되는 다른 종교와 철학조차도 모두 다 하나님의 품에서 나온 하나님의 나뭇가지들입니다. 우리들은 좁은 식견과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래서 좀처럼 소화가 되지 않는 일들이 벌어진다고 해도 우리는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은 한 분이신 하나님의 뜻과 섭리에 의해서 진행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일장기의 문양에서처럼, ‘하나님 이외의 것들’은 모두 쓸어버리겠다는 식의 신앙생활은 굉장히 위험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한 분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삶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태극의 문양에서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신앙생활의 지혜를 배워야 합니다. 우리와 다른 것들에 대해서- 정말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것들이라고 할지라도- 최대한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중에 신중을 거듭해야 하고, 그 다른 것들을 조화롭게 포용할 수 있는 관대함을 지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조화와 포용이 진정으로 한 분이신 섬기는 자의 자세이기 때문이고, 특히 우리와 다른 그런 것들 역시 하나님의 품에서 나온 하나님의 나뭇가지들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태극문양이 일깨워주는 유일신 신앙의 참된 영성입니다. 유일신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우리들이 갖춰야할 삶의 태도는 관대함입니다. 우리 한국교회가 1백여년 동안 우리 사회에 대해서 행한 독선적 태도는 명백히 잘못된 것입니다. 또 세계교회가 2천년의 역사 동안 전 세계 인류에게 가한 오만한 죄악은 반드시 수정되어야 합니다.
<전도(傳道)를 분도(分道)로>
그렇다면 우리는 한국교회 1백년 역사, 그리고 세계교회 2천년 역사동안 잘못되게 지속되어온 오만하고 독선적인 태도를 어떻게 수정할 수 있을까요? 글쎄요. 그 엄청난 일을 단번에 해결 할 수 있는 방안이 쉽게 도출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오늘 다만 제가 제안 할 수 있는 한 가지 대안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제 개인적 차원의 대안 모색 이야기를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젊었을 때부터 저는 세 마디 말을 자주 묵상하곤 했습니다. 즉 구도자(求道者), 수도자(修道者), 전도자(傳道者).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하나님의 진리를 닦는 사람,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세 마디 말 중에서 제 마음 속에 걸리는 말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전도자였습니다. 전도자라면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사람인데, 그건 듣는 사람이 하나님의 진리를 모른다는 전제 속에서 이뤄지는 행위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우월적 지위에 있는 내가 하나님의 진리를 모르는 열등한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뭔가를 일깨워준다는 교만한 자세가 그 말, 전도자 속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왠지 꺼림칙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문득 ‘전도’라는 말보다는 ‘분도’라는 말이 훨씬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분도(分道)라는 말에는 우월적 지위나 교만한 발상이 끼어들 수 없는 평등하고 겸손한 자세가 들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더불어 사는 이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무지몽매한 이들을 깨우치거나 가르치거나 일깨우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추구하고 닦으면서 깨달은 하나님의 진리를 이웃들과 나누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도의 과정을 통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배워서 우리 모두가 더욱 더 하나님의 진리와 가까워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분도(分道)에 깃들어 있는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강조의 말씀>
저는 우리 한국교회가 사용하고 있는 용어 중 ‘전도’라는 말을 폐기할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전도(傳道)가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분도(分道)할 뿐입니다. 우리가 분도의 정신으로 돌아갈 때, 우리는 한 분이신 하나님을 일원론적으로 섬길 수 있는 것이며, 기독교가 그간 행해온 잘못된 길을 올바르게 돌이킬 수 있는 것입니다.
<설교를 마치면서>
이제 설교말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오늘 설교말씀의 제목을 ‘분도(分道)의 길’이라고 잡아보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 ‘분도(分道)의 길’이라는 설교말씀의 제목을 깊이 묵상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바랍니다. 잠깐 기도하겠습니다.
* 축도
이제는 진리의 길을 몸소 보여주신 예수님의 놀라운 은혜와, 우리의 생명과 영혼을 언제나 치유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은총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성령님의 아름다운 동행이 사랑하는 수도교회 교우들 머리 위에 언제나 충만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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