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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신26: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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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859301 |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라!
신 26:1-11, 사순절 첫째 주일, 2016년 2월14일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어 차지하게 하실 땅에 네가 들어가서 거기에 거주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에서 그 토지의 모든 소산의 맏물을 거둔 후에 그것을 가져다가 광주리에 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으로 그것을 가지고 가서 3 그 때의 제사장에게 나아가 그에게 이르기를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 할 것이요 4 제사장은 네 손에서 그 광주리를 받아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 앞에 놓을 것이며 5 너는 또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아뢰기를 내 조상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에 내려가 거기에서 소수로 거류하였더니 거기에서 크고 강하고 번성한 민족이 되었는데 6 애굽 사람이 우리를 학대하며 우리를 괴롭히며 우리에게 중노동을 시키므로 7 우리가 우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8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9 이곳으로 인도하사 이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을 주셨나이다 10 여호와여 이제 내가 주께서 내게 주신 토지 소산의 맏물을 가져왔나이다 하고 너는 그것을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두고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 경배할 것이며 1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와 네 집에 주신 모든 복으로 말미암아 너는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과 함께 즐거워할지니라.
모세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입니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 같은 족장들이나 이사야, 예레미야, 에스겔 같은 선지자들도 중요하지만 종합적으로 볼 때 모세만한 이는 없습니다. 모세의 업적 중에서 가장 큰 것은 이스라엘 민족의 국가적 토대를 놓은 일입니다. 그 작업은 출애굽부터 시작됩니다. 모세는 40년에 걸친 이스라엘의 광야 횡단 시절에도 지도자였습니다. 그 사이에 율법도 완성했고, 예루살렘 성전의 원형인 이동용 성막도 만들었습니다. 가나안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 필요한 기초를 다졌지만 모세는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 없는 이유로 가나안에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당시 120살이었던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가나안 정착에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그걸 모은 책이 신명기입니다. 신명기에는 온갖 규정들이 나옵니다. 심지어는 이혼과 재혼에 대한 규정도 있습니다.
여러 규정 중의 하나가 오늘 설교 본문인 신 26:1-11절에 나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에서 농사를 지어 얻게 되는 첫 곡식을 하나님께 바쳐야 합니다. 그냥 바치는 게 아니라 의식을 곁들여야 합니다. 일종의 예배입니다. 그들은 처음 수확한 맏물을 광주리에 담아 성전으로 들고 와서 제사장에게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내가 오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아뢰나이다. 내가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우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렀나이다.”(3절). 제사장이 광주리를 받아서 제단에 올려놓으면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다시 뭔가를 말합니다. 그 내용이 신 26:5-10절에 나옵니다. 고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귀가 따갑게 들었을 것이며, 반복해서 자손들에게 들려준 이스라엘의 역사 이야기입니다. 자신들은 방랑하는 아람 사람으로서 애굽으로 들어가 소수민족으로 살다가 학대 받아 여호와 하나님께 호소했더니 여호와께서 해방시키시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 가나안으로 인도해 주셨고, 이 땅에서 농사지은 맏물을 하나님께 바치기 위해서 가져왔다는 내용입니다. 일종의 기도이자 찬송입니다. 10절에 따르면 이런 기도와 찬송을 드린 뒤에 맏물이 담긴 광주리를 앞에 놓고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 즉 예배해야 합니다.
생존과 운명의 토대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답은 분명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생존과 운명이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출애굽과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모든 과정을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으로 믿었습니다. 오늘 본문만이 아니라 구약성경 전체는 바로 그 사실에 대한 해명이자 고백입니다. 오늘 우리가 구약성경을 읽는 이유도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러한 시각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고 섭리하신다는 사실을 배운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런 시각을 통해서 우리는 전혀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비유적으로 설명하면, 시나 그림의 세계를 깊이 알면 새로운 삶의 차원이 열리는 거와 같습니다. 물론 그런 거 전혀 모르면서도 이 세상에서 잘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무조건 돈 버는 것에만 매진하면서도 살아갈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사는가, 하는 질문을 앞에 놓고 생각한다면 예술을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인식과 경험이라면 더 말할 거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인식하고 느끼고 경험하는 삶과 그렇지 못한 삶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큽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을 경배하라고 줄기차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존과 운명을 결정하신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경험하지 못하는 이유는 그 사실이 눈과 손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늘 오르락내리락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리와 다를 게 없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어려워서 우상에 한눈을 팔았습니다. 가나안의 토착 종교인 바알을 여호와와 더불어서 섬겼습니다. 바알신앙은 풍요 이데올로기를 토대로 합니다. 다산과 풍년을 목표로 하는 종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 40년 동안 고난의 행군을 하다가 상대적으로 높은 수준의 문명을 구가하던 가나안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바알의 유혹에 솔깃해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나님 경험이 그렇게 명백한 게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바알숭배를 무조건 적대시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실제로 물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경제가 최고의 가치로 부각되는 현대 사회에서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해도 돈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장사도 잘 되는 게 좋고, 책을 내도 잘 팔리는 게 좋고, 교회도 어느 정도는 재정적인 토대를 필요로 합니다. 기독교인들이 공부 잘하는 게 좋고, 사회적인 지위를 얻는 게 좋습니다. 각각의 부분에서 업적을 낼 수 있는 좋은 역할을 해야 합니다. 이런 것들을 단절하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기도만 하면서 지낼 수는 없습니다. 생존경쟁의 세상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살아가려면 바알숭배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형편이 이런데도 구약의 선지자들이 바알숭배를 그 무엇보다도 우선적으로 척결해야 할 죄로 여긴 이유는 그것이 결국 하나님 신앙을 손상시킨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 신앙이 손상되면 결국 생명의 토대가, 즉 생존의 토대가 허물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우상숭배 척결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역사와 삶의 신비
하나님이 생존과 운명의 궁극적인 토대라는 사실을 어디서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요? 겉으로 확연하게 드러나지 않아서 종종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 백성들과 달리 모세와 여러 선지자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를 경험한 것일까요? 대답은 앞에서 언급한 ‘역사’입니다. 특히 역사의 신비를 뚫어보는 게 중요합니다. 고대 이스라엘이 자신들의 역사를 반복해서 서술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출애굽으로부터 가나안까지의 여정을 보면 하나님의 섭리 외에는 다른 대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애굽은 당시 최고의 제국이었습니다. 거기서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두려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런 불가능한 일을 행한 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그들은 생각한 것입니다. 홍해 사건도 하나님이 주도권을 행사했다는 사실에 초점이 있습니다. 수백만, 또는 수십만 명의 군중들이 광야를 횡단하는 것도 불가사의입니다. 그들은 만나와 메추라기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이 자신들의 역사에 개입하셨다는 신앙을 표현했습니다. 자신들의 생존이 기적적이라는 뜻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우리의 삶은 기적입니다. 우리의 출생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이후와 죽음까지의 모든 것이 기적입니다. 지금 우리가 먹고 마시며 살아가는 그 모든 과정 자체가 하나님 없이는 해명이 불가능한 만나와 메추라기 사건처럼 어마어마한 우주론적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끄셨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생각이 다른 분들도 있습니다. 두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첫째, 삶의 토대가 하나님이 아니라 자연에서 주어진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을 자연의 일부로 여기고 순리대로 살면 충분하지 굳이 하나님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은 건강한 겁니다. 그러나 저는 그런 생각에 전적으로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연원리라는 것도 하나님의 통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요즘 우주물리학계에서는 중력파 발견이 큰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13억 광년 떨어진 우주 공간에서 두 개의 블랙홀이 충돌하면서 일으킨 중력파를 과학자들이 지구에서 확인한 겁니다. 이를 통해서 우주의 비밀에 대한 해명을 물론이고, 시간여행이 실제로 가능해질지 모른다는 예측도 나옵니다. 이런 자연과학적인 사실에 근거해서 하나님을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저는 이런 사실도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에 속한다고 믿습니다.
둘째, 자신의 불행한 삶을 근거로 하나님을 생존의 토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선하신 뜻으로 이끄셨다면 자신의 삶이 이렇게 망가질 수가 없다는 겁니다. 일리가 있는 주장입니다. 구약 욥기에 나오는 욥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그래서 저 세상 사람들이 가는 스올에 내려가는 게 좋겠다고 호소했습니다. 불행한 삶을 이유로 하나님을 믿지 못하겠다는 생각은 행복과 불행의 기준을 자기에게 놓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욥은 하나님을 경험한 뒤로 자신의 생각이 짧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자신의 비참한 운명보다 더 장엄한 생명의 손길을 느낀 것입니다. 그는 욥 42:5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역사의 신비를 통해 하나님을 생존과 생명의 토대로 믿고 그를 경배하면서 영적 긴장감을 누리고 싶지만 실제 생활에 쫓기다보면 그게 잘 안될 겁니다. 흔한 표현으로 마음은 원하지만 몸이 따르지 않는다는 겁니다. 먹고 사는 것 자체가 실제 생활에서 벅찹니다. 그래서 쫓기듯이 살아갑니다. 다른 이들에 비해서 경제적인 여유가 있어 보이는 사람들도 쫓기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러다보니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하나님 경험과는 먼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잘 해보려고 노력해도 잘 되지 않습니다. 대개는 자책하면서 믿음의 깊이로 들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거나, 거꾸로 대충 그러려니 하면서 별로 문제의식 없이 교회생활을 할 뿐입니다. 맏물이 든 광주리를 들고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본문의 말씀이 별로 실감 있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예배 영성
이런 상황을 벗어나는데 최선은 예배 영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섭리가 개입되어 있는 역사의 신비가 예배에 압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에 따라서 다르긴 하지만 최소한 일주일에 한 번은 의무적으로라도 예배에 참석하는 게 좋습니다. 자녀들에게도 그런 습관이 몸에 베이게 가르치는 게 좋습니다. 얼마 전 교회에 오면서 집사람과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일과 수요일에 한번 씩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거나 성경공부를 하는 것은 일상과의 단절 같은 것이라고 말입니다. 일상이 주기적으로 단절되지 않으면 과잉됩니다. 억지로라도 끊어줘야만 일상이 오히려 살아납니다. 저는 지금 율법적인 신앙이 옳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 삶의 근본 토대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경험하는 게 중요한데, 그 사실이 예배라는 형식에 들어 있으니, 일단 예배에 몰두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로 알고 바로 경험하기만 한다면 예배에서 삶의 깊이를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험은 자기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존재 신비와 하나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모든 종교 행위가 예배에 집중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교회는 한 달에 한번 성찬예식을 집행합니다. 성찬은 예배의 중심입니다. 성찬을 집행할 때 저는 예배에서 경험할 수 있는 절정의 평화와 기쁨을 느낍니다. 성찬대 위에 빵과 포도주가 놓여 있습니다. 우리는 빵을 예수님의 몸으로, 포도주를 예수님의 피로 믿습니다. 작은 사물에 불과하지만 그 빵과 포도주는 예수님의 몸입니다. 물리적으로 볼 때도 예수님의 몸을 이룬 원소가 지금 저 빵에 들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구 안의 모든 원소는 순환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빵을 떼어서 신자들의 손에 놓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몸입니다.’ 하면 그것을 받는 사람은 ‘아멘’ 합니다. 빵을 손을 잡아서 떼어 다른 사람의 손에 놓는 행위는 위대한 겁니다. 거룩한 의식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원초적이고 진정한 코이노니아가 성찬의식에서 발생합니다. 우리가 기꺼이 자신의 것을, 사실 자신의 것은 하나도 없고 잠시 관리하고 있을 뿐인데, 나눠서 다른 이에게 전달해줄 수 있다면 오늘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많은 문제들이 해결될 겁니다. 그렇습니다. 빵과 포도주를 통한 이 의식을 통해서 우리는 신비롭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될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도 하나 됩니다. 성찬이 바로 교회와 인류의 미래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신랑으로 맞게 될 종말의 축제를 성찬에서 우리는 앞당겨 경험하고 있습니다.
성찬식으로 대변되는 예배는 하나님과의 관계만이 아니라 사람과의 관계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관계의 깊이는 아주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 될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른 사람과 하나 되기 때문입니다. 이건 단순히 교리가 아니라 실제로 개인과 공동체의 삶을 건강하게 하는 능력입니다. 보십시오. 성찬의 빵을 뗄 때 더 많이 먹는 사람도 없고 더 적게 먹는 사람도 없습니다. 모두 똑같은 것으로 만족해합니다.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이 왔다고 해서 성찬을 거부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의 몸과 피를 받는 사건은 너무나 거룩하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영적인 화염과 같은 사건인데, 인간 사이의 차이는 다 사라집니다. 예배의 영성 안으로 깊이 들어간 사람이라면 삶의 전혀 새로운 차원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모세는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경배하라는 말과 더불어서 11절에서 예배의 즐거움을 ‘레위인과 너희 가운데에 거류하는 객’와 함께 나누라고 했습니다. 이어지는 12절에서 십일조를 언급합니다. 이것은 삼년에 한번 내는 헌금제도인데,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한 구제비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구제는 단순히 어려운 이를 돕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이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라는 믿음의 실천입니다. 성찬의 신학적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은 구제마저 자기를 실현하는 기회로 여기거나 단순히 박애주의로 보겠지만, 그래서 그런 일에서도 밀당이 일어나기도 하는데, 구약과 신약은 신앙의 본질로 봅니다. 구약에는 모든 빚이 탕감되는 안식년과 희년제도도 나옵니다. 하나님을 생명의 근원으로 믿는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시대는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라는 말을 외면하거나 어색하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으로 이름붙일 수 없는 것을 경배하라고 요구합니다. 제3 독서인 눅 4:1-13절에는 예수님이 세 가지 시험받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번째 시험에서 마귀는 세상의 권위와 영광을 보여주면서 자기에게 절하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유혹했습니다. 예수님은 신 6:13절을 인용해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그렇습니다. 저도 예수님의 이 말씀을 여러분에게 그대로 드립니다. 하나님 여호와를 경배하는 일에 몰입하십시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통해서 여러분은 생명을, 즉 영혼의 참된 평화를 얻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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