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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수1: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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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2007년 4월 22일 주일2부 설교 |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야훼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야훼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서론>
오늘 저는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자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혼자 살 때는 모든 일을 자유롭게 결정하고 삶의 짐도 홀로 짊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결혼하게 되면 남편과 더불어 살게 됨으로 모든 일을 서로 의논하며 살아야 됩니다. 삶의 짐도 함께 걸머지고 모든 염려, 근심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구원을 받으면 그때로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나와 더불어 사시는 하나님
나와 더불어 하나님이 함께 산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훌륭한 위인과 더불어 함께 사는 것도 마음에 감동적인데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산다면 기가 막힌 감격이 있지 않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그냥 신학적으로 통상적으로 이 생각을 받아들입니다만 제가 49년 전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한 농부 부인이 저에게 진실하게 물은 질문이 저의 가슴속에 지금도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저에게 찾아와서 진지한 태도로 저를 쳐다보면서 "전도사님, 교회는 왜 다른 종교와 다릅니까? 다른 종교는 찾아가면 그 신이 제단 위에 앉아 있어서 절을 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왜 교회는 오면 아무것도 없습니까? 전도사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성령 하나님께 대해서 말씀을 하지만 안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너무나 답답하고 간절한 소원이 있으니까 하나님께 그 소원을 편지로 아뢰고자 하오니 하나님 주소를 좀 가르쳐 주십시오." 단순한 질문이지만 굉장히 제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하나님 주소를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은 계신다고 생각했지 주소를 어떻게 압니까? 대답을 못했습니다. "아참 이상하다. 어떻게 주의 종이 하나님 주소도 모르고 주의 종 노릇 하느냐?" 그렇게 말 하더라구요. "한 주간 시간만 주시면 주소를 알아내 오겠다."고 그래서 한 주간 동안 기도하고 성경을 펼쳐 찾다찾다 요14:20의 하나님 주소를 제가 알아냈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하나님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바로 주소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한주간 뒤에 그 자매님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그리고 주님은 우리 안에 우리는 주님 안에 있으므로 하나님과 우리는 주소가 같다. 바로 자매님의 집이 하나님의 주소. 하나님은 자매님과 함께 거하신다."고 그렇게 말을 전해주니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던 것이 저의 마음에 지금도 환하게 보입니다.
수1:5로 보면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은 너무나 위대한 빽이 되지 않습니까?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있으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저는 어릴 때 아버님과 어디같이 가면 아버지가 그렇게 크게 보여요. 내가 어리니까 아버지를 쳐다보니 아버지가 장사 같고 아버지는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것 같아서 어떤 문제가 와도 아버지가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세월이 흘러 자라보니까 아버지가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알았었습니다. 그때는 굉장히 마음에 실망이 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작해서 세월이 흘러가면 갈수록 더 전지전능 하시고 무소부재 하신 것을 느끼게 되고 마음에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비평가이며 사상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은 「티끌의 윤리」라는 그의 책 속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진흙땅은 하나님이 들어 쓰실 때에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래와 흙과 불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히게 될 때에는 사파이어가 될 수 있으며, 모래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될 때에는 오팔이 될 수 있다. 또한 맨 흙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히면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래와 흙과 진흙 같은 사람이지만 전지전능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살고 그 하나님 손에 우리가 잡혀서 산다면 무엇이든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 너무나 위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고 아론의 말라빠진 지팡이에도 싹이 나고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신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 하나님이 그냥 같이 계신 것이 아니라 나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냥 이 세사에서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한다. 부부간에 서로 사랑한다. 친구 간에 사랑한다. 그런 사랑을 막연히 생각하지만 하나님만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내어 주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와 불의, 추악, 저주와 절망을 대신 짊어지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고생당하여 우리의 모든 죄과를 청산하게 하시고 값없이 하나님 품에 안기고 천국 영생 영광을 누리도록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우리가 무관심하게 평범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찌하여 나같이 죄 덩어리인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죄를 짊어지고 벌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사랑하지 않는다면 죄 덩어리인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허락할 턱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시는데 그 예수님 사랑보다도 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아들을 우리 대신 재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일3:1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요일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입에 발린 사랑이 아닙니다. 증명된 사랑인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사랑을 보여줘야지요. 하나님은 외아들을 보내시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를 흘려서 우리를 대신 속죄하게 하시므로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 가슴에 와 부딪히는 절실한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하나님은 얼마나 극진한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겠습니까?
이 하나님은 또 성경에 보면 목자가 된다고 한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거느리고 노는 사람이 아닙니다. 푸른 초장을 찾아서 양을 이끌어 가고 쉴만한 물가로 양을 인도하고 원수가 오면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하고 이끌어가는 수고로운 목자인 것입니다. 양의 안위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며 노력하는 분이 목자인 것입니다.
시23:1에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목자가 나와 같이 계신다. 이 목자가 나와 함께 하신다. 그러니 내게 부족함이 있을 턱이 있겠습니까? 목자가 양의 필요를 따라서 모든 일을 준비하시고 노력하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하나님은 천국을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으로 주시려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천국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상상 만해도 기가 막힙니다. 눈물, 근심, 탄식, 이별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앓는 것이 없는 곳,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없는 곳, 기쁨과 평안이 강물처럼 넘치는 곳, 모든 것이 그렇게 아름다운 곳 이 천국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상속으로 줄려고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능력으로 예비하신 천국이니 천국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겠습니까?
롬8:17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으로 받는 상속자가 되었으니 여러분 보통 사람들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 나는 외롭고 괴롭게 홀로 내버려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생각이 마음을 가득 채워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우리의 생각을 통하여 우리와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이 잘못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고 말로 고백하고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강하고 담대 하라.
이 위대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면 이 하나님이 우리의 빽이 되므로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강하고 담대하라. 강하고 담대하라 했는데 우리 혼자서는 강하고 담대할 수가 없어요. 너무나 풍랑이 심하고 고통이 많기 때문에 강하고 담대할 수 없어요. 그러나 이 모든 것 보다 위대한 하나님이 빽으로 계시므로 우리가 강하고 담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1:6에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왜 하나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에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사41:10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이 우리를 탁 잡고 있으면 아무리 바람이 불어와도 꺾이지 아니하고 뿌리 채 뽑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잡고 있지 않으면 폭풍우가 불어오면 인생 폭풍우에 삶이 뿌리 채 뽑히는데 하나님이 잡고 있으면 바람이 불어서 흔들려도 부러지지 않고 뿌리가 뽑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잡고 있으면 홍수가 나서 휘몰아쳐도 엄몰되지 않고 떠내려가지 않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고 있으면 불을 통해도 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 이것은 우리 마음을 강하게 담대하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술을 하는 사람과 더불어 있을 때 깡패나 강도의 습격을 두려워하지 않지요. 여러분이 어느 곳에 가든지 태권도 9단, 합기도 몇 단 하면서 굉장한 무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모시고 함께 가면 어떠한 깡패들이 와도 속으로 비웃습니다. '어~ 너 맛 좀 봐라. 까불지 마라. 나와 같이 있는 사람이 무술이 얼마나 높은지 아느냐.'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술을 하는 사람이 나와 같이 있으니 빽이 되기 때문에 마음이 담대할 수 있지요. 권력 있는 사람과 더불어 있을 때 업신여김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멸시 당하는 것은 굉장히 모욕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권력이 있는 사람, 대통령은 말할 필요 없고 장관이나 국무총리나 그렇지 않으면 도지사나 이러한 분들과 같이 행하면 어깨에 힘이 딱 들어가는 게 두려워하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습니다. 옛날에 자동차가 없을 때 모처럼 시골 할아버지의 아들이 자동차를 한대타고서 아버지를 모시고 시골장터에 나가니까 아버지가 그 차에 앉아서 창문을 열고 목을 늘 밖에 내놓고 있습니다. "아버지 위험한데 목을 밖에 내놓지 마시고 안으로 넣으십시오." 그러니까 아버지는 차타는 것이 너무나 좋아서 모든 사람을 좀 보라고 날 좀 보소. 나는 적어도 아들이 잘나서 차를 타고 다녀요. 자가용을 타고 다녀요. 그것을 좀 선전하고 싶어서 차 밖으로 목을 내내 밀고서 목이 아프도록 그렇게 차를 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권력 있는 자와 같이 있으면 무시와 멸시를 안 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돈이 많은 사람과 더불어 있을 때 삶의 부족을 두려워하지 않지요. 부자가 돈이 많으면 그 부자와 같이 지내면 그 부자의 돈을 나누어 쓸 수 있으니까 부족함이 없지요. 돈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자 집 근처만 있어도 덕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부자가 자꾸 사라지면 서민들이 더 살기가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부자가 돈을 자꾸 써줘야 서민들이 살 수 있지요. 구멍가게도 부자가 곁에 있어야 구멍가게가 운영이 된다 구요. 부자를 다 때려잡아서 나눠 먹으면 서로 좋을 것 같지만 얼마 나눠먹지 않으면 다 거지가 되어 가지고서 나중에 나눠 먹을 것 없다 구요. 부자는 부자 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부자 되도록 자꾸 만들어 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자가 돈을 해외에 가서 쓰지 않고 국내에서 쓰도록 자꾸 제도와 장비를 만들어 주어서 부자가 돈을 벌어서 자꾸 쓰면 그 돈이 가난한 사람에게로 흘러 들어가서 가난한 사람도 살게 되는데 부자를 때려잡으면 가난한 사람이 잘 살 수 있을 줄 생각하는데 오해입니다. 부자를 때려잡으면 부자는 돈이 있기 때문에 먹고 살 수 있지만 부자가 돈을 안 쓰면 가난한 사람은 굶어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부자 되게 하고 가난한 사람은 부자들이 쓰는 돈을 통해서 또 먹고 살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와 더불어 살면 우리가 물질적인 풍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6.25사변 난 이후로 억척같이 살아나온 이유는 부자인 미국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우리나라에 원조도 많이 해주고 돈도 많이 써주어서 우리가 잘 살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잘살게 되었다고 미국 물러가라고 야단이지만은 옛날을 모르고 하는 소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때 소련하고 같이 있으면 소련은 와서 기계까지 다 뜯어가 버렸을 것입니다.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해서 쓸 만한 기계는 다 뜯어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살아도 부자하고 같이 살아야 떨어지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이 많은 사람과 더불어 있을 때 삶의 부족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면 더불어 있으면 어떻게 되느냐. 세상에 무술 하는 사람이나 권력 있는 사람이나 부자하고 같이 있어도 빽이 되어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면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되겠습니까?
시146:5에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야훼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는 것을 알면 모세와 같이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무슨 빽을 믿고 3백만 이스라엘 백성을 아무 양식도 예비하지 아니하고 의학품도 예비하지 아니하고 쓸 것도 준비하지 않고 그대로 인도하여 430년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보모당당하게 나왔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요사이 여러분 300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다른 도시로 옮긴다고 해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양식이 필요하며 차량이 필요하며 앰블런스가 필요하며 들것이 필요하며 물을 얼마나 많이 예비해야 될 것이고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지러워서 생각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1년에 한번 씩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대회를 치루는 것도 1년 동안 준비를 합니다. 1년 동안 준비 위원회를 구성해서 준비를 해서 대회 하루 치루는 데 3백만 백성을 이끌어 가는데 그들 먹어야 되지요. 입어야 되지요. 마셔야 되지요. 또 약품도 있어야 되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빈손 들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온 것은 하나님의 빽이 있었기 때문에 강하고 담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었으면 그런 자살적인 행동은 할 수가 없어요. 그들이 홍해 가에 왔을 때 창일한 홍해수가 앞을 막고 뒤에 애굽의 바로가 대 군대를 거느리고 습격해 왔을 때 얼마나 당황스럽고 고통스럽습니까? 죽는 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앞에는 홍해 바다요, 뒤에는 애굽의 대 군대가 밀어 오는데 어디 가서 삽니까? 그래도 모세가 담대한 것은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모세는 말하기를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출 14:13-14)
하나님이 같이 계실 때 이와 같이 강하고 담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지요. 다윗은 이세의 여덟 째 아들로 별로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집안에서 인간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호의호식은 형들이 다하고 더러운 일은 맡아서 했습니다. 다윗은 늘 양치기로 양을 쳤습니다.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사랑도 받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따라 갔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마음이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시면 누가 나를 헤치겠느냐. 그래서 아버지 양을 칠 때 사자나 곰이 와서 양을 물고 가면 따라가서 빼앗고 덤벼들면 막대기로 쳐서 죽였습니다. 얼마나 강하고 담대하기에 17살쯤 먹는 소년이 사자나 곰에게 덤벼듭니까? 그것은 강하고 담대한 마음이 없으면 도망을 치지 덤벼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훈련이 되었기 때문에 블레셋 대장군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나올 때 그가 나가 싸우겠다 했습니까? 사울과 그 군대 장관들과 군인들은 다 숨고 뒤돌아 가는데 다윗이 "내가 나가서 싸우겠다. 저 할례 없는 이방인을 왜 두려워하느냐!"
삼상17:47에 그는 골리앗을 대하여 나가면서 말하기를 "또 야훼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야훼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강하고 담대하게 나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빽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17살 먹은 초립동이 어떻게 대장군 골리앗을 대적해서 나갑니까? 창과 칼과 단창으로 무장한 그에게 그는 물맷돌만 가지고 나가는데 다윗은 골리앗을 본 것이 아니라 골리앗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보고 나갈 때 골리앗이 큰소리하고 나올 때 다윗이 본 하나님은 위에서 '킥'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의 손짓을 보고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골리앗을 넘어뜨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빽이 크면 우리가 담대할 수 있어요. 우리가 삶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빽이 되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살다가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무덤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사망과 음부를 이기고 부활해서 승천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삶도 죽음도 겁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는 것도 그리스도와 함께 사니 두렵지 않고 죽는 것도 예수님과 함께 같이 있으니 두렵지 않다. 삶도 죽음도 오케이다. 오늘 우리가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잠재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사람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을 확실히 알므로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죽고 나와 함께 장사지내고 나와함께 부활 승천 하셨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망아 너희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철폐된 것입니다. 죽음은 단지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낡은 몸을 벗어버리고 부활의 영생의 생명으로 갈아입는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23:4에 말하기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 하시나이다"
시91:4에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삶도 죽음도 두렵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구만리 장천 멀리계시면 몰라도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우리 안에 와서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강하고 담대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는데 왜 겁쟁이가 되어서 웅크리고 앉아 뒤로 물러가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을 선물로 주지 아니하겠느냐. 항상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여 죄악을 물리치고 마귀와 세상을 대적하여 물리치고 질병을 쫓아내고 귀신을 쫓아내고 가난과 저주를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고 사망을 발길로 차버리는 여러분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게 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택한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어 당당하게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3. 더불어 사는 조건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는 것을 알고 마음속에 내 혼자 살지 않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므로 더불어 사는 조건을 늘 이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장 가까이 더불어 사는 분이 누굽니까? 남편과 아내, 자식들과 사위.. 가족이 항상 더불어함께 살지 않습니까? 오늘 많은 가정이 파괴된 이유는 더불어함께 사는 조건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더불어함께 살기 위해서는 대화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서로 자꾸 대화를 해야 돼요. 사람은 대화의 동물입니다. 서로 말을 하고 말을 듣고 마음을 교제하는 것입니다. 대화의 통로가 깨어지면 설 분리되게 되는 것입니다. 대화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의 말에 늘 귀를 기울이고 경청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애들이 자라고 난 다음에 내게 한 가지 불평을 하는 것을 듣고 마음속에 깊이 제가 깨달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어릴 때 우리 말을 듣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면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말만하고 우리에게 말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사실 맞았어요. 내가 어떻게 생각 하냐 면 "코 흘리게 네가 뭐한다고 잔소리냐? 내말만 들어라." 코 흘리게 라고 생각하고 무시해 버리고 말만하면 "어. 내 말 들어라. 조용히 해! 아버지 말만 들어라!" 그렇게 했기 때문에 어릴 때 그들은 중대한 말을 표현할 수 없었으므로 대화가 안 되므로 고독하게 느끼고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어린아이도 어린아이대로 자기 생각이 있습니다. 청소년도 그들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생각을 경청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아내도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대화가 사라지면 교통이 사라지고 죽은 가정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약1:19에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나운서였던 이숙영씨는 자신이 쓴 「맛있는 대화법」에서 대화의 비결을 설명했습니다. 그 비결은 바로 '1 : 2 : 3의 이야기 법칙'인데 하나를 이야기 했으면 둘을 듣고 그 다음에 셋은 맞장구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편하고 아내하고 살 때 그렇게 하십시다. 내가 말은 한번하고 남편은 아내 말은 두 번 듣고 세 번째는 "옳소이다. 맞았어. 올치거니. 올치거니." 맞장구 쳐주라는 것입니다. 아주 좋은 말인 것입니다. 우리가 대화를 하려면 일방적인 자기말만 하면 안 됩니다. 가장 문제가 자기말만 하는 사람들 때문에 요란하고 복잡스러운 것입니다. 자기 말은 하나 했으면 상대방은 둘을 말하게 하고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자꾸 칭찬을 해주어 동의를 해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대화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데, 상대방의 말에 경청하지 않고 동정하지 아니하면 대화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북한하고도 자꾸 대화를 하려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빨갱이하고 이야기 했습니다. 무슨 말을 했냐. 차라리 마귀하고 말을 하지. 그러나 마귀는 대화의 상대가 안 되지만 북한은 우리 동포고 사상이 다르지만은 대결하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서로 대화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억지소리를 해도 듣고 또 우리말도 말하고 대화가 있는 이상은 주먹이 올라갔다 안합니다. 대화가 끝이면 주먹이 날라 갑니다. 대게 대화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주먹을 씁니다. 대화 할 줄 아는 사람은 말로써 해결하지 주먹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함께 살려면 대화를 해야 되고 상대를 존경하고 협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되는 것입니다. 남을 무시해 버리면 대화가 되지 않지 않습니까? 상대를 언제나 존경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에 비천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은 사람인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찍혀 있습니다. 그것을 비천한 사람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모신 사람으로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전에 대구에서 경기가 있을 때 거기에 김정일 사진이 붙은 프랭카드가 비에 젖고 있으니까 이북에서 내려온 청소년들이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하고 그 플랭카드를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한 인간에 대한 우상 숭배 이므로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겠지만 우리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가 존경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무시하고 우리가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것입니다. 아무리 장애인이라도 몸이 불구라도 그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장애인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모습으로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숙자라도 그가 비록 방탕하고 타락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거기에 있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존경해서 귀하게 여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존경하고 협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빌2:3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했습니다. 하물며 가족 간에는 남편은 아내와 자식들을 존경하고 아내는 남편과 자식들을 존경하고 서로 상대를 존경해야 되는 것입니다. 공자님도 말하기를 군자삼인지행에 필유선사라고 말했습니다. "세 사람만 가면 그 중에 선생이 한 분 있다." 저는 요사이 우리 성도들에게 많이 배웁니다. 옛날에는 내가 가르친다고 생각했는데 큰 오해에요. 나이를 먹어보니 샘이 좀 들어서 성도들과 만나면 길을 기울여서 가만히 들으면 굉장히 유익되고 교훈된 말을 많이 합니다. 얼마나 존경스러운지 몰라요. 물론 김성혜 총장님을 모시고 사는 저는 그 말에 많이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말을 안 들었어요. 그러나 요사이는 말을 많이 들으면 굉장히 유익되고 축복된 말을 해요. 존경스러워요. 서로 존경하고 산다는 것은 굉장히 은혜롭고 축복된 것입니다. 그래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함께 살기 위해서는 상대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 하나만 욕심을 채우고 나를 섬기고 나를 기쁘게 하려고 하면은 외고집에 빠지고 사람들을 괴롭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어찌하면 나와 같이 있는 사람을 평안하게 만들어 주고 기쁘게 해줄까 그런 생각을 늘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욕심을 부려서 내 행복만 추구한다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도 똑같이 나와 더불어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남을 기쁘게 해야 되겠다. 장사하는 사람도 손님을 기쁘게 하면 장사 잘되지요? 가정도 부부간에 서로 상대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면 가정이 행복해 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를 기쁘게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을 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책에서 참 재밌는 이야기를 읽었는데요. 시골마음의 한 농가에서 인절미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때에 그 집 며느리 옆에 신랑이 있고 시아버지도 있었는데 며느리가 인절미를 탁 떼어가지고 콩고물에 싹싹 부벼서 신랑보고 "여보, 입 벌려." 넣어 주었습니다. 신랑이 받아서 맛있게 먹는데 시아버지는 안주거든. 침을 꿀꺽 삼키고 먹고 싶어서 하나 달라고 하려해도 체면상 며느리에게 떡 떼서 고물에 말아달라고 말 못하고 먼 산만 바라보고 있는데 한참 있다가 시어머니가 오더니만 "야 며눌아, 네 시아버지에게 인절미 좀 드렸느냐?" "아닙니다. 잘 만 들어서 상 차려서 드릴려고 합니다." "상 차려서 드릴 동안에 먹고 싶어 어떻게 하느냐?" 손을 걷더니만 콱 하나 뜯어 가지고서 고물에 말아서 "여보, 입 벌려!" 입에 탁 넣어 주니까 와락 하고 받아서 한입 먹으면서 자기 아들보고 "너만 마누라 있나? 나도 있다." 얼마나 재밌는 일인 것입니까? 기쁘게 해준다는 것은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시어머니가 그 시아버지를 그렇게 대해주므로 얼마나 시아버지에게 기쁨을 주었습니까? 우리는 서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를 써야 될 것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사람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도 이렇게 해야 되는데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경청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꾸 하나님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주야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신6:3에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을 것이라
신30:20에 "네 하나님 야훼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66권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늘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늘 읽고 묵상하고 성경을 마음속에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음성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성경을 읽음으로 마음에 믿음이 생기고 하나님을 더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 말씀을 멀리하면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교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고 도고하고 감사하고 찬미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줄 모른다는 말은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평범한 말로 매일매일 일어난 일들을 하나님께 고하는 것은 기도요, 교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족을 만나면 그날 일어난 일을 평범하게 말하잖아요. 하나님께도 모두다 우리의 생애 속에 일어난 일을 평범하게 말하고 그 다음 내가 원하는 것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도움을 달라고 기도하고 그 다음 내 가족과 이웃을 위해서 대신 기도를 해드리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감사하는 이러한 기도의 교통이 우리의 삶속에 항상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교통이 끊어지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교통이 끊어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전에 믿고 순종하는지 안하는지를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여리고성과 그 백성을 내게 주었다고 하시고 난 다음에도 여리고성을 일곱 바퀴 돌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루에 한 바퀴씩 일곱 바퀴 돌고 칠일 째는 일곱 바퀴 돌고 고함을 치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 이미 여리고성과 그 백성을 이스라엘에게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확실히 믿고 순종하는가 안하는가를 7일 동안 시험해 보시고 난 다음에 그 다음 주님께서 허락한 것을 넘겨주신 것입니다.
히10:38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매사에 우리가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인가, 아닌가를 생각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선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매사에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압니까? 우리 마음에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선택할 때 하나님 편에 서서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 갈까, 놀러갈까 선택을 우리가 하는데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예배드리는 것이 기쁘시게 하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예배드리러 가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물질이 있을 때 내가 하나님 먼저 위해서 섬길까 그렇지 않으면 내 필요한데 쓸까? 하나님 편에 서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필요한데 먼저 드리고 그 다음에 내가 쓰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할 것이다. 또 그렇게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 있을 때 그들에게 전도할까, 말까. 전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고 생각되면 전도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에게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안될까 생각해보고 그것이 좋으면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범사에 선택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내 생각대로 선택하지 말고 하나님 편에 서서 선택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에녹은 3백년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매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주 야훼를 기뻐하라 저가 내 마음에 소원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4. 긍정적인 생각과 꿈과 말을 하라
그 다음에 우리는 긍정적인 생각과 꿈과 말을 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1:9에 말씀한데로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야훼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셨으므로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람과 살기가 참 힘듭니다. 하나님도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람과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 수도관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까? 상수도관, 하수도관이 있지요. 여러분이 상수도가 되고 싶습니까? 하수도가 되고 싶습니까? 상수도는 맑은 물이 콸콸 흘려서 부엌에도 목욕탕에도 양식장에도 또 농사짓는데도 아름답게 사용되지만 하수도에는 온갖 썩은 것, 더러운 것, 냄새나는 것 구정물이 흘러가지 않습니까? 오늘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상수도관처럼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며 믿음, 소망, 사랑이 넘쳐나고 의, 평강, 희락이 넘쳐나며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생각이 넘쳐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수도 같은 사람이 되어서 늘 원망, 불평, 탄식, 욕하고, 비난하고, 공격하고, 시기, 분노, 질투로 꽉 들어찬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여러분과 더불어 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생각해 보십시오. 아내가 하수도 같은 아내가 있으면 데리고 살겠습니까? 입만 열면 썩은 냄새가 콸콸 나고, 비난하고, 공격하고, 원망하고, 탄식하면 그 아내하고 살수가 없습니다. 남편도 한가지지요. 남편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상수도같이 맑고 밝고 환하면 온 아내와 가족들이 살기가 좋은데 남편이 원망, 불평, 탄식하고 늘 욕을 하고 흉한 소리를 하면은 같이 못살잖아요. 여러분은 항상 내가 상수도냐, 하수도관이냐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수도관이 되어 있습니다. 아예 입만 열면 썩은 냄새가 콸콸 쏟아져 나와요. 그러니 하나님이 어떻게 복을 주겠습니까? 마음에 상수도같이 맑고, 밝고, 환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늘 환경을 보고 주님을 보지 않고 두려워하는 사람과 살기 힘듭니다.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면 내가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다가오더라도 주님께서 같이 계시므로 주님이 나를 붙들어서 도와주신다. 그런 확실한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는데 주님은 교회 와서 잠시 만나보고 그 다음에는 사회로 나가면 성경 속에 주님을 집어넣어 버립니다. '주님 성경 안에 가만히 계세요. 일주일 동안 나는 당신을 못 만나겠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는 주님 없이 세상만 바라보고 삽니다. 세상의 모든 고난과 괴로움과 부정적인 것을 바라보고 원망, 불평, 탄식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사용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어려움이 다가오더라도 주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저가 나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이다. 그가 그 사자를 내게 보내어 나의 모든 길에서 나를 지키신다. 주께서 내 손으로 나를 붙들어서 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심이라. 말씀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환경을 대결해 나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해 주실 것인데 언제나 주님은 제켜 놓고 환경만 바라보고 나는 못해요. 안돼요. 할 수 없어요. 죽어요. 절망이요. 좌절이요, 포기하고 말면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이 사용할 수도 없고 우리가 더불어 살기도 힘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희망을 꿈꾸고 말하지 않으면 나도 낙심하고 남도 낙심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나 마음속에 희망을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희망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희망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희망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모든 절망은 정복되어 버리고 만 것 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을 받은 우리들은 절망인 옛사람은 지나가고 희망의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언제나 십자가를 통하여 말씀을 읽고 희망을 생각하시고 희망을 꿈꾸시고 희망을 믿으시고 희망을 말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믿음대로 될 것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절망을 생각하고 절망을 꿈꾸고 절망을 믿고 절망을 말하면 나도 죽고 남도 죽습니다. 다른 사람도 이와 같은 절망을 들으면 절망이 가슴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의학계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플라시보'(Placebo)라는 말과 '노시보'(Nocebo)라는 말이 있습니다. 플라시보란 말은 약 효과 없는 밀가루를 주면서 좋은 약이라고 하는데 좋은 약 인줄 알고 먹고 난 다음에 건강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약방에 밤에 손님이 와가지고서 "지금 사람이 죽어 가는데 빨리 약을 달라." "어떻게 죽어 가느냐.." "모르겠다. 사지가 뒤틀고 아주 열이 높고 죽어간다." 밤중이 되어서 병원에 갈수도 없고 시골인데 하나있는 약방에 와서 약을 달라는데 무슨 약을 줄지 모릅니다. 그래서 약사가 밀가루를 봉투에 싸가지고서 "굉장히 좋은 약이니까 이 약 먹으면 당장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오라고.. 그렇게 보냈는데 내일 아침에 안 오거든요. 그래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떻게 안 옵니까?" "얼마나 좋은 약인지 먹고 직통으로 나아 버렸다." 플라시보입니다. 밀가루를 먹었는데 아주 좋은 약이라고 생각하고 난 다음에 생각이 약이 되어 가지고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노시보라는 말은 건강한 사람도 부정적인 말을 하면 죽인다는 것입니다. 나이 7,80이 된 할머니를 만나가지고서 "아이고, 안색이 왜 그렇습니까? 영 죽게 되었네요. 이제 며칠 못살겠네요." 그러면 진짜 며칠 못살고 죽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노시보는 말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이몬 톤 박사의 자료에 의하면 159명의 말기 암 환자를 대상으로 훈련을 했습니다. "당신은 삽니다. 건강합니다. 암으로 안 죽습니다." 그렇게 말을 했는데 평균 수명이 24.4개월로 연장되고 또 훈련을 그렇게 말을 듣지 않는 환자 보다 2배 이상 생명을 오래 살았으며 14명은 완전히 암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암으로 필연적으로 죽어가는 사람도 병원에서 시험을 해보고 "당신은 삽니다. 건강합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용기를 주니까 그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래살고 또 완전히 암에서 나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말을 하고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새사람이 된 것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믿고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옛날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용서받은 의인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활, 승천, 영생, 복락을 얻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을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태도가 사실보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떠한 어려운 문제가 다가와서 망하지 않습니다. 문제에 대한 태도 때문에 우리가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가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은 10%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90%는 우리가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태도를 취하므로 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살면 우리는 모든 일에 성공을 하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사는 택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빼어나게 훌륭한 남편과 함께 사는 부인이 한없이 행복한 것처럼 우주에 비교할 자가 없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구주 예수님과 보혜사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사는 우리야말로 너무나 행복하고 평안하고 기뻐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은 여러분의 주님이 되시고 형님이 되시고 신랑이 되시고 구주가 되시고 보혜사 성령님이 여러분을 돕기 위해서 항상 같이 계시고 천군, 천사들이 우리와 더불어 함께 계시는데 무엇을 두려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항상 기도하고 강하고 담대한 신앙을 가지고 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다 같이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우리는 종종 하나님 없는 외로운 무력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행동 할 때가 많습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개도 주인과 같이 가면 강하고 담대해지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있고 하나님이 우리 빽이 되니 하나님을 의지하고 강하고 담대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사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서론>
오늘 저는 ‘더불어 사는 삶’이라는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여자가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혼자 살 때는 모든 일을 자유롭게 결정하고 삶의 짐도 홀로 짊어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결혼하게 되면 남편과 더불어 살게 됨으로 모든 일을 서로 의논하며 살아야 됩니다. 삶의 짐도 함께 걸머지고 모든 염려, 근심도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것이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구원을 받으면 그때로부터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살게 되는 것입니다.
<본론>
1. 나와 더불어 사시는 하나님
나와 더불어 하나님이 함께 산다는 것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상에 훌륭한 위인과 더불어 함께 사는 것도 마음에 감동적인데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산다면 기가 막힌 감격이 있지 않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은 그냥 신학적으로 통상적으로 이 생각을 받아들입니다만 제가 49년 전 목회를 처음 시작할 때 한 농부 부인이 저에게 진실하게 물은 질문이 저의 가슴속에 지금도 메아리치고 있습니다. 저에게 찾아와서 진지한 태도로 저를 쳐다보면서 "전도사님, 교회는 왜 다른 종교와 다릅니까? 다른 종교는 찾아가면 그 신이 제단 위에 앉아 있어서 절을 하고 예배를 드릴 수 있는데 왜 교회는 오면 아무것도 없습니까? 전도사님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님 성령 하나님께 대해서 말씀을 하지만 안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나는 너무나 답답하고 간절한 소원이 있으니까 하나님께 그 소원을 편지로 아뢰고자 하오니 하나님 주소를 좀 가르쳐 주십시오." 단순한 질문이지만 굉장히 제게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때까지 저는 하나님 주소를 생각해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냥 하나님은 계신다고 생각했지 주소를 어떻게 압니까? 대답을 못했습니다. "아참 이상하다. 어떻게 주의 종이 하나님 주소도 모르고 주의 종 노릇 하느냐?" 그렇게 말 하더라구요. "한 주간 시간만 주시면 주소를 알아내 오겠다."고 그래서 한 주간 동안 기도하고 성경을 펼쳐 찾다찾다 요14:20의 하나님 주소를 제가 알아냈습니다. 거기에 보니까 하나님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바로 주소가 내 안에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내가 한주간 뒤에 그 자매님에게 "예수님은 하나님 안에 그리고 주님은 우리 안에 우리는 주님 안에 있으므로 하나님과 우리는 주소가 같다. 바로 자매님의 집이 하나님의 주소. 하나님은 자매님과 함께 거하신다."고 그렇게 말을 전해주니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던 것이 저의 마음에 지금도 환하게 보입니다.
수1:5로 보면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것은 너무나 위대한 빽이 되지 않습니까?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있으면 무엇이 두렵겠습니까? 저는 어릴 때 아버님과 어디같이 가면 아버지가 그렇게 크게 보여요. 내가 어리니까 아버지를 쳐다보니 아버지가 장사 같고 아버지는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할 것 같아서 어떤 문제가 와도 아버지가 해결하지 못할 문제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세월이 흘러 자라보니까 아버지가 별 볼일 없다는 것을 알았었습니다. 그때는 굉장히 마음에 실망이 되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작해서 세월이 흘러가면 갈수록 더 전지전능 하시고 무소부재 하신 것을 느끼게 되고 마음에 감동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영국의 비평가이며 사상가인 존 러스킨(John Ruskin)은 「티끌의 윤리」라는 그의 책 속에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진흙땅은 하나님이 들어 쓰실 때에 무엇이 될 수 있을까요?" 그리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모래와 흙과 불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히게 될 때에는 사파이어가 될 수 있으며, 모래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게 될 때에는 오팔이 될 수 있다. 또한 맨 흙이 하나님의 장중에 붙잡히면 다이아몬드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모래와 흙과 진흙 같은 사람이지만 전지전능 무소 부재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살고 그 하나님 손에 우리가 잡혀서 산다면 무엇이든지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신 하나님이 너무나 위대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고 아론의 말라빠진 지팡이에도 싹이 나고 잎이 피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같이 계신 것이 얼마나 좋습니까? 이 하나님이 그냥 같이 계신 것이 아니라 나를 극진히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냥 이 세사에서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하면 부모님이 자식을 사랑한다. 부부간에 서로 사랑한다. 친구 간에 사랑한다. 그런 사랑을 막연히 생각하지만 하나님만 우리를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내어 주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죄와 불의, 추악, 저주와 절망을 대신 짊어지게 하시고 십자가에서 못 박혀 몸 찢고 피 흘려 고생당하여 우리의 모든 죄과를 청산하게 하시고 값없이 하나님 품에 안기고 천국 영생 영광을 누리도록 길을 열어 놓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을 우리가 무관심하게 평범하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찌하여 나같이 죄 덩어리인 우리를 위해서 예수님이 대신 죄를 짊어지고 벌을 받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우리 사랑하지 않는다면 죄 덩어리인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허락할 턱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님을 너무나 사랑하시는데 그 예수님 사랑보다도 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 아들을 우리 대신 재물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요일3:1에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하셨는가."
요일4:10에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은 입에 발린 사랑이 아닙니다. 증명된 사랑인 것입니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해도 사랑을 보여줘야지요. 하나님은 외아들을 보내시고 그를 십자가에 못 박혀 몸 찢고 피를 흘려서 우리를 대신 속죄하게 하시므로 사랑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우리 가슴에 와 부딪히는 절실한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하나님은 얼마나 극진한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시겠습니까?
이 하나님은 또 성경에 보면 목자가 된다고 한 것입니다. 목자는 양을 거느리고 노는 사람이 아닙니다. 푸른 초장을 찾아서 양을 이끌어 가고 쉴만한 물가로 양을 인도하고 원수가 오면 지팡이와 막대기로 보호하고 이끌어가는 수고로운 목자인 것입니다. 양의 안위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생하며 노력하는 분이 목자인 것입니다.
시23:1에 "야훼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이 목자가 나와 같이 계신다. 이 목자가 나와 함께 하신다. 그러니 내게 부족함이 있을 턱이 있겠습니까? 목자가 양의 필요를 따라서 모든 일을 준비하시고 노력하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 하나님은 천국을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으로 주시려고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천국이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상상 만해도 기가 막힙니다. 눈물, 근심, 탄식, 이별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앓는 것이 없는 곳,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없는 곳, 기쁨과 평안이 강물처럼 넘치는 곳, 모든 것이 그렇게 아름다운 곳 이 천국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에게 상속으로 줄려고 예비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전지전능, 무소부재하신 능력으로 예비하신 천국이니 천국이 얼마나 아름답고 좋겠습니까?
롬8:17에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라"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상속으로 받는 상속자가 되었으니 여러분 보통 사람들이 아닌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 나는 외롭고 괴롭게 홀로 내버려둔 존재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이 함께 계신다는 생각이 마음을 가득 채워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우리의 생각을 통하여 우리와 같이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생각이 잘못되면 안 되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 것을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고 말로 고백하고 감사하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2. 강하고 담대 하라.
이 위대한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시면 이 하나님이 우리의 빽이 되므로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강하고 담대하라. 강하고 담대하라 했는데 우리 혼자서는 강하고 담대할 수가 없어요. 너무나 풍랑이 심하고 고통이 많기 때문에 강하고 담대할 수 없어요. 그러나 이 모든 것 보다 위대한 하나님이 빽으로 계시므로 우리가 강하고 담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수1:6에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 왜 하나님이 같이 계시기 때문에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사41:10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하나님이 우리를 탁 잡고 있으면 아무리 바람이 불어와도 꺾이지 아니하고 뿌리 채 뽑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잡고 있지 않으면 폭풍우가 불어오면 인생 폭풍우에 삶이 뿌리 채 뽑히는데 하나님이 잡고 있으면 바람이 불어서 흔들려도 부러지지 않고 뿌리가 뽑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잡고 있으면 홍수가 나서 휘몰아쳐도 엄몰되지 않고 떠내려가지 않지요.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고 있으면 불을 통해도 타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 이것은 우리 마음을 강하게 담대하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술을 하는 사람과 더불어 있을 때 깡패나 강도의 습격을 두려워하지 않지요. 여러분이 어느 곳에 가든지 태권도 9단, 합기도 몇 단 하면서 굉장한 무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모시고 함께 가면 어떠한 깡패들이 와도 속으로 비웃습니다. '어~ 너 맛 좀 봐라. 까불지 마라. 나와 같이 있는 사람이 무술이 얼마나 높은지 아느냐.' 두려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무술을 하는 사람이 나와 같이 있으니 빽이 되기 때문에 마음이 담대할 수 있지요. 권력 있는 사람과 더불어 있을 때 업신여김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멸시 당하는 것은 굉장히 모욕인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권력이 있는 사람, 대통령은 말할 필요 없고 장관이나 국무총리나 그렇지 않으면 도지사나 이러한 분들과 같이 행하면 어깨에 힘이 딱 들어가는 게 두려워하지 않고 무시당하지 않습니다. 옛날에 자동차가 없을 때 모처럼 시골 할아버지의 아들이 자동차를 한대타고서 아버지를 모시고 시골장터에 나가니까 아버지가 그 차에 앉아서 창문을 열고 목을 늘 밖에 내놓고 있습니다. "아버지 위험한데 목을 밖에 내놓지 마시고 안으로 넣으십시오." 그러니까 아버지는 차타는 것이 너무나 좋아서 모든 사람을 좀 보라고 날 좀 보소. 나는 적어도 아들이 잘나서 차를 타고 다녀요. 자가용을 타고 다녀요. 그것을 좀 선전하고 싶어서 차 밖으로 목을 내내 밀고서 목이 아프도록 그렇게 차를 탔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 권력 있는 자와 같이 있으면 무시와 멸시를 안 당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돈이 많은 사람과 더불어 있을 때 삶의 부족을 두려워하지 않지요. 부자가 돈이 많으면 그 부자와 같이 지내면 그 부자의 돈을 나누어 쓸 수 있으니까 부족함이 없지요. 돈에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부자 집 근처만 있어도 덕을 보는 것입니다.
오늘날 부자가 자꾸 사라지면 서민들이 더 살기가 힘이 듭니다. 왜냐하면 부자가 돈을 자꾸 써줘야 서민들이 살 수 있지요. 구멍가게도 부자가 곁에 있어야 구멍가게가 운영이 된다 구요. 부자를 다 때려잡아서 나눠 먹으면 서로 좋을 것 같지만 얼마 나눠먹지 않으면 다 거지가 되어 가지고서 나중에 나눠 먹을 것 없다 구요. 부자는 부자 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얼마든지 부자 되도록 자꾸 만들어 줘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부자가 돈을 해외에 가서 쓰지 않고 국내에서 쓰도록 자꾸 제도와 장비를 만들어 주어서 부자가 돈을 벌어서 자꾸 쓰면 그 돈이 가난한 사람에게로 흘러 들어가서 가난한 사람도 살게 되는데 부자를 때려잡으면 가난한 사람이 잘 살 수 있을 줄 생각하는데 오해입니다. 부자를 때려잡으면 부자는 돈이 있기 때문에 먹고 살 수 있지만 부자가 돈을 안 쓰면 가난한 사람은 굶어 죽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는 부자 되게 하고 가난한 사람은 부자들이 쓰는 돈을 통해서 또 먹고 살 수 있게 되고 그렇게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자와 더불어 살면 우리가 물질적인 풍족을 누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6.25사변 난 이후로 억척같이 살아나온 이유는 부자인 미국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우리나라에 원조도 많이 해주고 돈도 많이 써주어서 우리가 잘 살게 된 것입니다. 지금은 잘살게 되었다고 미국 물러가라고 야단이지만은 옛날을 모르고 하는 소리인 것입니다. 우리가 그때 소련하고 같이 있으면 소련은 와서 기계까지 다 뜯어가 버렸을 것입니다. 북한에 소련군이 진주해서 쓸 만한 기계는 다 뜯어가 버리고 만 것입니다. 살아도 부자하고 같이 살아야 떨어지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돈이 많은 사람과 더불어 있을 때 삶의 부족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러면 더불어 있으면 어떻게 되느냐. 세상에 무술 하는 사람이나 권력 있는 사람이나 부자하고 같이 있어도 빽이 되어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고 강하고 담대할 수 있는데 하나님이 우리와 같이 계신다면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해야 되겠습니까?
시146:5에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야훼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는 것을 알면 모세와 같이 강하고 담대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무슨 빽을 믿고 3백만 이스라엘 백성을 아무 양식도 예비하지 아니하고 의학품도 예비하지 아니하고 쓸 것도 준비하지 않고 그대로 인도하여 430년 종살이하던 애굽에서 보모당당하게 나왔습니까? 생각해 보세요. 요사이 여러분 300만 도시에 사는 사람들을 다른 도시로 옮긴다고 해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양식이 필요하며 차량이 필요하며 앰블런스가 필요하며 들것이 필요하며 물을 얼마나 많이 예비해야 될 것이고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지러워서 생각할 수 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1년에 한번 씩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대회를 치루는 것도 1년 동안 준비를 합니다. 1년 동안 준비 위원회를 구성해서 준비를 해서 대회 하루 치루는 데 3백만 백성을 이끌어 가는데 그들 먹어야 되지요. 입어야 되지요. 마셔야 되지요. 또 약품도 있어야 되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빈손 들고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온 것은 하나님의 빽이 있었기 때문에 강하고 담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었으면 그런 자살적인 행동은 할 수가 없어요. 그들이 홍해 가에 왔을 때 창일한 홍해수가 앞을 막고 뒤에 애굽의 바로가 대 군대를 거느리고 습격해 왔을 때 얼마나 당황스럽고 고통스럽습니까? 죽는 것은 필연적인 것입니다. 앞에는 홍해 바다요, 뒤에는 애굽의 대 군대가 밀어 오는데 어디 가서 삽니까? 그래도 모세가 담대한 것은 하나님이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모세는 말하기를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야훼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야훼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출 14:13-14)
하나님이 같이 계실 때 이와 같이 강하고 담대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마찬가지지요. 다윗은 이세의 여덟 째 아들로 별로 사랑을 받지 못했습니다. 집안에서 인간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호의호식은 형들이 다하고 더러운 일은 맡아서 했습니다. 다윗은 늘 양치기로 양을 쳤습니다. 교육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사랑도 받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 때문에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따라 갔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마음이 강하고 담대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같이 계시면 누가 나를 헤치겠느냐. 그래서 아버지 양을 칠 때 사자나 곰이 와서 양을 물고 가면 따라가서 빼앗고 덤벼들면 막대기로 쳐서 죽였습니다. 얼마나 강하고 담대하기에 17살쯤 먹는 소년이 사자나 곰에게 덤벼듭니까? 그것은 강하고 담대한 마음이 없으면 도망을 치지 덤벼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훈련이 되었기 때문에 블레셋 대장군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모욕하고 나올 때 그가 나가 싸우겠다 했습니까? 사울과 그 군대 장관들과 군인들은 다 숨고 뒤돌아 가는데 다윗이 "내가 나가서 싸우겠다. 저 할례 없는 이방인을 왜 두려워하느냐!"
삼상17:47에 그는 골리앗을 대하여 나가면서 말하기를 "또 야훼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야훼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강하고 담대하게 나갈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빽이 되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자기 힘으로 17살 먹은 초립동이 어떻게 대장군 골리앗을 대적해서 나갑니까? 창과 칼과 단창으로 무장한 그에게 그는 물맷돌만 가지고 나가는데 다윗은 골리앗을 본 것이 아니라 골리앗 뒤에 계신 하나님을 보았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보고 나갈 때 골리앗이 큰소리하고 나올 때 다윗이 본 하나님은 위에서 '킥' 아마 그랬을 것입니다. 다윗은 그 하나님의 손짓을 보고 강하고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골리앗을 넘어뜨릴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빽이 크면 우리가 담대할 수 있어요. 우리가 삶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우리의 빽이 되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와서 살다가 우리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 무덤에 들어갔다가 사흘 만에 사망과 음부를 이기고 부활해서 승천했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는 삶도 죽음도 겁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는 것도 그리스도와 함께 사니 두렵지 않고 죽는 것도 예수님과 함께 같이 있으니 두렵지 않다. 삶도 죽음도 오케이다. 오늘 우리가 여러분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모든 사람들은 잠재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주로 모신 사람은 예수께서 죽었다가 부활하신 것을 확실히 알므로 그리스도가 나와 함께 죽고 나와 함께 장사지내고 나와함께 부활 승천 하셨으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죽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입니다. 사망아 너희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희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철폐된 것입니다. 죽음은 단지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 낡은 몸을 벗어버리고 부활의 영생의 생명으로 갈아입는 과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23:4에 말하기를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 하시나이다"
시91:4에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같이 계시면 삶도 죽음도 두렵지가 않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이 구만리 장천 멀리계시면 몰라도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가 내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께서 우리 안에 와서 우리와 같이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따라 말씀하세요. 나는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강하고 담대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같이 계시는데 왜 겁쟁이가 되어서 웅크리고 앉아 뒤로 물러가겠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누가 나를 대적하리요? 그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에게 주신 이가 그 아들과 함께 무엇을 선물로 주지 아니하겠느냐. 항상 여러분은 하나님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강하고 담대하여 죄악을 물리치고 마귀와 세상을 대적하여 물리치고 질병을 쫓아내고 귀신을 쫓아내고 가난과 저주를 물러가라고 호통을 치고 사망을 발길로 차버리는 여러분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께서는 사자와 독사를 밟으며 젊은 사자와 뱀을 발로 누르게 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같이 계시므로 택한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어 당당하게 살 수 있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3. 더불어 사는 조건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과 더불어 산다는 것을 알고 마음속에 내 혼자 살지 않고 하나님과 더불어 살므로 더불어 사는 조건을 늘 이뤄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가장 가까이 더불어 사는 분이 누굽니까? 남편과 아내, 자식들과 사위.. 가족이 항상 더불어함께 살지 않습니까? 오늘 많은 가정이 파괴된 이유는 더불어함께 사는 조건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더불어함께 살기 위해서는 대화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서로 자꾸 대화를 해야 돼요. 사람은 대화의 동물입니다. 서로 말을 하고 말을 듣고 마음을 교제하는 것입니다. 대화의 통로가 깨어지면 설 분리되게 되는 것입니다. 대화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의 말에 늘 귀를 기울이고 경청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 애들이 자라고 난 다음에 내게 한 가지 불평을 하는 것을 듣고 마음속에 깊이 제가 깨달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어릴 때 우리 말을 듣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려면 아버지가 일방적으로 말만하고 우리에게 말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사실 맞았어요. 내가 어떻게 생각 하냐 면 "코 흘리게 네가 뭐한다고 잔소리냐? 내말만 들어라." 코 흘리게 라고 생각하고 무시해 버리고 말만하면 "어. 내 말 들어라. 조용히 해! 아버지 말만 들어라!" 그렇게 했기 때문에 어릴 때 그들은 중대한 말을 표현할 수 없었으므로 대화가 안 되므로 고독하게 느끼고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것입니다. 어린아이도 어린아이대로 자기 생각이 있습니다. 청소년도 그들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생각을 경청해 줘야 되는 것입니다. 남편은 아내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아내도 남편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대화가 사라지면 교통이 사라지고 죽은 가정이 되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약1:19에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나운서였던 이숙영씨는 자신이 쓴 「맛있는 대화법」에서 대화의 비결을 설명했습니다. 그 비결은 바로 '1 : 2 : 3의 이야기 법칙'인데 하나를 이야기 했으면 둘을 듣고 그 다음에 셋은 맞장구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남편하고 아내하고 살 때 그렇게 하십시다. 내가 말은 한번하고 남편은 아내 말은 두 번 듣고 세 번째는 "옳소이다. 맞았어. 올치거니. 올치거니." 맞장구 쳐주라는 것입니다. 아주 좋은 말인 것입니다. 우리가 대화를 하려면 일방적인 자기말만 하면 안 됩니다. 가장 문제가 자기말만 하는 사람들 때문에 요란하고 복잡스러운 것입니다. 자기 말은 하나 했으면 상대방은 둘을 말하게 하고 그 다음에 세 번째는 자꾸 칭찬을 해주어 동의를 해주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대화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데, 상대방의 말에 경청하지 않고 동정하지 아니하면 대화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북한하고도 자꾸 대화를 하려는 이유가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빨갱이하고 이야기 했습니다. 무슨 말을 했냐. 차라리 마귀하고 말을 하지. 그러나 마귀는 대화의 상대가 안 되지만 북한은 우리 동포고 사상이 다르지만은 대결하고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서로 대화를 해야 되는 것입니다. 억지소리를 해도 듣고 또 우리말도 말하고 대화가 있는 이상은 주먹이 올라갔다 안합니다. 대화가 끝이면 주먹이 날라 갑니다. 대게 대화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주먹을 씁니다. 대화 할 줄 아는 사람은 말로써 해결하지 주먹을 쓰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함께 살려면 대화를 해야 되고 상대를 존경하고 협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남을 나보다 낫게 여겨야 되는 것입니다. 남을 무시해 버리면 대화가 되지 않지 않습니까? 상대를 언제나 존경해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에 비천한 사람이라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은 사람인 것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찍혀 있습니다. 그것을 비천한 사람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모신 사람으로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전에 대구에서 경기가 있을 때 거기에 김정일 사진이 붙은 프랭카드가 비에 젖고 있으니까 이북에서 내려온 청소년들이 눈물을 흘리고 통곡을 하고 그 플랭카드를 내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한 인간에 대한 우상 숭배 이므로 절대로 있을 수가 없는 일이겠지만 우리 하나님의 형상은 우리가 존경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 무시하고 우리가 생존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것입니다. 아무리 장애인이라도 몸이 불구라도 그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지음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장애인으로 보지 말고 하나님의 모습으로 보아야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숙자라도 그가 비록 방탕하고 타락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거기에 있는 것을 알고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존경해서 귀하게 여겨야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를 존경하고 협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빌2:3에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했습니다. 하물며 가족 간에는 남편은 아내와 자식들을 존경하고 아내는 남편과 자식들을 존경하고 서로 상대를 존경해야 되는 것입니다. 공자님도 말하기를 군자삼인지행에 필유선사라고 말했습니다. "세 사람만 가면 그 중에 선생이 한 분 있다." 저는 요사이 우리 성도들에게 많이 배웁니다. 옛날에는 내가 가르친다고 생각했는데 큰 오해에요. 나이를 먹어보니 샘이 좀 들어서 성도들과 만나면 길을 기울여서 가만히 들으면 굉장히 유익되고 교훈된 말을 많이 합니다. 얼마나 존경스러운지 몰라요. 물론 김성혜 총장님을 모시고 사는 저는 그 말에 많이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말을 안 들었어요. 그러나 요사이는 말을 많이 들으면 굉장히 유익되고 축복된 말을 해요. 존경스러워요. 서로 존경하고 산다는 것은 굉장히 은혜롭고 축복된 것입니다. 그래야 함께 대화를 나누고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함께 살기 위해서는 상대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나 하나만 욕심을 채우고 나를 섬기고 나를 기쁘게 하려고 하면은 외고집에 빠지고 사람들을 괴롭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어찌하면 나와 같이 있는 사람을 평안하게 만들어 주고 기쁘게 해줄까 그런 생각을 늘 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가 욕심을 부려서 내 행복만 추구한다면 다른 사람은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다른 사람도 똑같이 나와 더불어 행복을 추구할 권리와 가치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남을 기쁘게 해야 되겠다. 장사하는 사람도 손님을 기쁘게 하면 장사 잘되지요? 가정도 부부간에 서로 상대를 기쁘게 하려고 노력하면 가정이 행복해 질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를 기쁘게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을 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책에서 참 재밌는 이야기를 읽었는데요. 시골마음의 한 농가에서 인절미를 만들고 있었는데 그때에 그 집 며느리 옆에 신랑이 있고 시아버지도 있었는데 며느리가 인절미를 탁 떼어가지고 콩고물에 싹싹 부벼서 신랑보고 "여보, 입 벌려." 넣어 주었습니다. 신랑이 받아서 맛있게 먹는데 시아버지는 안주거든. 침을 꿀꺽 삼키고 먹고 싶어서 하나 달라고 하려해도 체면상 며느리에게 떡 떼서 고물에 말아달라고 말 못하고 먼 산만 바라보고 있는데 한참 있다가 시어머니가 오더니만 "야 며눌아, 네 시아버지에게 인절미 좀 드렸느냐?" "아닙니다. 잘 만 들어서 상 차려서 드릴려고 합니다." "상 차려서 드릴 동안에 먹고 싶어 어떻게 하느냐?" 손을 걷더니만 콱 하나 뜯어 가지고서 고물에 말아서 "여보, 입 벌려!" 입에 탁 넣어 주니까 와락 하고 받아서 한입 먹으면서 자기 아들보고 "너만 마누라 있나? 나도 있다." 얼마나 재밌는 일인 것입니까? 기쁘게 해준다는 것은 체면을 차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 시어머니가 그 시아버지를 그렇게 대해주므로 얼마나 시아버지에게 기쁨을 주었습니까? 우리는 서로 자기를 낮추고 남을 기쁘시게 하려고 애를 써야 될 것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사람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도 이렇게 해야 되는데 하나님과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항상 경청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자꾸 하나님을 가르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되는 것입니다. 주야로 하나님 말씀을 읽고 하나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우리들이 되어야 되는 것입니다.
신6:3에 이스라엘아 듣고 삼가 그것을 행하라 그리하면 네가 복을 받을 것이라
신30:20에 "네 하나님 야훼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이시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 66권을 통하여서 우리에게 늘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늘 읽고 묵상하고 성경을 마음속에 받아들이면 하나님의 음성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고 성경을 읽음으로 마음에 믿음이 생기고 하나님을 더 깨달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교통하기 위해서 말씀을 멀리하면 절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의 교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하나님께 기도하고 간구하고 도고하고 감사하고 찬미해야 되는 것입니다. 기도할 줄 모른다는 말은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평범한 말로 매일매일 일어난 일들을 하나님께 고하는 것은 기도요, 교제인 것입니다. 우리가 가족을 만나면 그날 일어난 일을 평범하게 말하잖아요. 하나님께도 모두다 우리의 생애 속에 일어난 일을 평범하게 말하고 그 다음 내가 원하는 것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님 도움을 달라고 기도하고 그 다음 내 가족과 이웃을 위해서 대신 기도를 해드리고 예배하고 찬양하고 감사하는 이러한 기도의 교통이 우리의 삶속에 항상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이 교통이 끊어지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교통이 끊어지게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범사에 하나님을 믿고 순종해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기 전에 믿고 순종하는지 안하는지를 시험해 보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여리고성과 그 백성을 내게 주었다고 하시고 난 다음에도 여리고성을 일곱 바퀴 돌게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하루에 한 바퀴씩 일곱 바퀴 돌고 칠일 째는 일곱 바퀴 돌고 고함을 치라고 한 것입니다. 왜냐, 이미 여리고성과 그 백성을 이스라엘에게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확실히 믿고 순종하는가 안하는가를 7일 동안 시험해 보시고 난 다음에 그 다음 주님께서 허락한 것을 넘겨주신 것입니다.
히10:38에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저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노력해야 되는 것입니다. 매사에 우리가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인가, 아닌가를 생각하고 하나님 편에 서서 선택해야 되는 것입니다. 매사에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압니까? 우리 마음에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선택할 때 하나님 편에 서서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주일날 교회 갈까, 놀러갈까 선택을 우리가 하는데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겠습니까? 하나님이 예배드리는 것이 기쁘시게 하지요. 그러면 하나님이 예배드리러 가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내가 물질이 있을 때 내가 하나님 먼저 위해서 섬길까 그렇지 않으면 내 필요한데 쓸까? 하나님 편에 서서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필요한데 먼저 드리고 그 다음에 내가 쓰는 것이 하나님이 기뻐할 것이다. 또 그렇게 선택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람들과 같이 어울려 있을 때 그들에게 전도할까, 말까. 전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이라고 생각되면 전도하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남에게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 내 하나님께 영광이 될까, 안될까 생각해보고 그것이 좋으면 그렇게 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범사에 선택이 굉장히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내 생각대로 선택하지 말고 하나님 편에 서서 선택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총을 베풀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보면 에녹은 3백년 동안 하나님을 기쁘시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데리고 가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매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기쁘게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주 야훼를 기뻐하라 저가 내 마음에 소원을 이루어 주시겠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4. 긍정적인 생각과 꿈과 말을 하라
그 다음에 우리는 긍정적인 생각과 꿈과 말을 하고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수1:9에 말씀한데로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야훼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셨으므로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람과 살기가 참 힘듭니다. 하나님도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사람과 살기를 원치 않습니다. 여러분 수도관에는 몇 가지가 있습니까? 상수도관, 하수도관이 있지요. 여러분이 상수도가 되고 싶습니까? 하수도가 되고 싶습니까? 상수도는 맑은 물이 콸콸 흘려서 부엌에도 목욕탕에도 양식장에도 또 농사짓는데도 아름답게 사용되지만 하수도에는 온갖 썩은 것, 더러운 것, 냄새나는 것 구정물이 흘러가지 않습니까? 오늘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이 상수도관처럼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며 믿음, 소망, 사랑이 넘쳐나고 의, 평강, 희락이 넘쳐나며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는 생각이 넘쳐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수도 같은 사람이 되어서 늘 원망, 불평, 탄식, 욕하고, 비난하고, 공격하고, 시기, 분노, 질투로 꽉 들어찬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여러분과 더불어 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생각해 보십시오. 아내가 하수도 같은 아내가 있으면 데리고 살겠습니까? 입만 열면 썩은 냄새가 콸콸 나고, 비난하고, 공격하고, 원망하고, 탄식하면 그 아내하고 살수가 없습니다. 남편도 한가지지요. 남편이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이고 상수도같이 맑고 밝고 환하면 온 아내와 가족들이 살기가 좋은데 남편이 원망, 불평, 탄식하고 늘 욕을 하고 흉한 소리를 하면은 같이 못살잖아요. 여러분은 항상 내가 상수도냐, 하수도관이냐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수도관이 되어 있습니다. 아예 입만 열면 썩은 냄새가 콸콸 쏟아져 나와요. 그러니 하나님이 어떻게 복을 주겠습니까? 마음에 상수도같이 맑고, 밝고, 환하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리고 늘 환경을 보고 주님을 보지 않고 두려워하는 사람과 살기 힘듭니다.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면 내가 염려, 근심, 불안, 초조, 절망이 다가오더라도 주님께서 같이 계시므로 주님이 나를 붙들어서 도와주신다. 그런 확실한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는데 주님은 교회 와서 잠시 만나보고 그 다음에는 사회로 나가면 성경 속에 주님을 집어넣어 버립니다. '주님 성경 안에 가만히 계세요. 일주일 동안 나는 당신을 못 만나겠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나가서는 주님 없이 세상만 바라보고 삽니다. 세상의 모든 고난과 괴로움과 부정적인 것을 바라보고 원망, 불평, 탄식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을 사용하기가 힘든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어려움이 다가오더라도 주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은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저가 나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극한 염병에서 건지실 것이다. 그가 그 사자를 내게 보내어 나의 모든 길에서 나를 지키신다. 주께서 내 손으로 나를 붙들어서 내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않게 하심이라. 말씀을 의지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환경을 대결해 나가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축복해 주실 것인데 언제나 주님은 제켜 놓고 환경만 바라보고 나는 못해요. 안돼요. 할 수 없어요. 죽어요. 절망이요. 좌절이요, 포기하고 말면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이 사용할 수도 없고 우리가 더불어 살기도 힘든 것입니다. 우리는 항상 희망을 꿈꾸고 말하지 않으면 나도 낙심하고 남도 낙심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언제나 마음속에 희망을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희망을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희망을 믿어야 되는 것입니다. 희망을 말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부활하심으로 모든 절망은 정복되어 버리고 만 것 입니다. 우리는 희망을 위해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름을 받은 우리들은 절망인 옛사람은 지나가고 희망의 새사람이 된 것입니다. 언제나 십자가를 통하여 말씀을 읽고 희망을 생각하시고 희망을 꿈꾸시고 희망을 믿으시고 희망을 말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 믿음대로 될 것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절망을 생각하고 절망을 꿈꾸고 절망을 믿고 절망을 말하면 나도 죽고 남도 죽습니다. 다른 사람도 이와 같은 절망을 들으면 절망이 가슴을 치게 되는 것입니다. 의학계에서 사용하는 용어로 '플라시보'(Placebo)라는 말과 '노시보'(Nocebo)라는 말이 있습니다. 플라시보란 말은 약 효과 없는 밀가루를 주면서 좋은 약이라고 하는데 좋은 약 인줄 알고 먹고 난 다음에 건강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떤 약방에 밤에 손님이 와가지고서 "지금 사람이 죽어 가는데 빨리 약을 달라." "어떻게 죽어 가느냐.." "모르겠다. 사지가 뒤틀고 아주 열이 높고 죽어간다." 밤중이 되어서 병원에 갈수도 없고 시골인데 하나있는 약방에 와서 약을 달라는데 무슨 약을 줄지 모릅니다. 그래서 약사가 밀가루를 봉투에 싸가지고서 "굉장히 좋은 약이니까 이 약 먹으면 당장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 내일 아침에 오라고.. 그렇게 보냈는데 내일 아침에 안 오거든요. 그래서 전화를 걸었습니다. "어떻게 안 옵니까?" "얼마나 좋은 약인지 먹고 직통으로 나아 버렸다." 플라시보입니다. 밀가루를 먹었는데 아주 좋은 약이라고 생각하고 난 다음에 생각이 약이 되어 가지고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노시보라는 말은 건강한 사람도 부정적인 말을 하면 죽인다는 것입니다. 나이 7,80이 된 할머니를 만나가지고서 "아이고, 안색이 왜 그렇습니까? 영 죽게 되었네요. 이제 며칠 못살겠네요." 그러면 진짜 며칠 못살고 죽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노시보는 말하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사이몬 톤 박사의 자료에 의하면 159명의 말기 암 환자를 대상으로 훈련을 했습니다. "당신은 삽니다. 건강합니다. 암으로 안 죽습니다." 그렇게 말을 했는데 평균 수명이 24.4개월로 연장되고 또 훈련을 그렇게 말을 듣지 않는 환자 보다 2배 이상 생명을 오래 살았으며 14명은 완전히 암이 나았다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암으로 필연적으로 죽어가는 사람도 병원에서 시험을 해보고 "당신은 삽니다. 건강합니다. 이길 수 있습니다." 용기를 주니까 그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래살고 또 완전히 암에서 나을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부정적인 말을 하고 살면 안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새사람이 된 것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믿고 꿈꿔야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나는 옛날 사람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된 것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용서받은 의인입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은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활, 승천, 영생, 복락을 얻은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것을 생각하고 꿈꾸고, 믿고, 말을 하는 여러분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태도가 사실보다 굉장히 중요합니다. 어떠한 어려운 문제가 다가와서 망하지 않습니다. 문제에 대한 태도 때문에 우리가 망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문제가 우리를 망하게 하는 것은 10% 밖에 안 된다는 것입니다. 90%는 우리가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태도를 취하므로 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태도를 취하고 살면 우리는 모든 일에 성공을 하고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사는 택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빼어나게 훌륭한 남편과 함께 사는 부인이 한없이 행복한 것처럼 우주에 비교할 자가 없는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구주 예수님과 보혜사 성령님, 삼위일체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사는 우리야말로 너무나 행복하고 평안하고 기뻐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 아버지가 되시고 예수님은 여러분의 주님이 되시고 형님이 되시고 신랑이 되시고 구주가 되시고 보혜사 성령님이 여러분을 돕기 위해서 항상 같이 계시고 천군, 천사들이 우리와 더불어 함께 계시는데 무엇을 두려워 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께서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항상 기도하고 강하고 담대한 신앙을 가지고 살게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다 같이 고개 숙여 기도드리겠습니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여, 우리는 종종 하나님 없는 외로운 무력한 사람으로 생각하고 행동 할 때가 많습니다. 내 아버지 하나님이시여, 개도 주인과 같이 가면 강하고 담대해지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과 같이 있고 하나님이 우리 빽이 되니 하나님을 의지하고 강하고 담대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놀라지 말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사는 우리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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