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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수7: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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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류공석 목사 |
참고 : | 텔아비브욥바교회 http://telavivchurch.org (이스라엘) |
실패가 하나님의 뜻이라고요?
여호수아 7:1-15
2007년 10월 20일(토)
지난 주에 우리는 여리고 전투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여호수아서의 기록이 실제적인 역사적 사건이라는 것과, 점령 전에 하나님께서 요구하셨던 것, 즉 '네 발에 신을 벗으라'고 하셨던 의미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께서 내리셨던 여리고 점령 작전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고고학 발굴을 토대로 여리고 성은 외성과 내성으로 된 이중 방어 시스템을 가지고 있는, 그 높이가 20미터에 가까운 견고한 성이라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반해 여리고 다음 공격 대상이었던 아이성은 여리고에 비하면 작은 성입니다. 이름부터 '아이'아닙니까? 물론 언덕 위에 지어진 일종의 산성이라 그리 쉬운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리고에 비하면 상대하기 괜찮은 성입니다.
바로 여기서 한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왜 여리고가 아이보다 먼저였나 하는 것입니다. 아이성 공격이 실패했다는 결과적인 기록을 염두에 두지 않고 볼 때, 단순히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면 여리고보다는 아이성이 훨씬 쉬운 상대였고, 그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견고한 성 여리고, 그 힘든 여리고성과 부딛치게 하셨나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가 아이들을 키우면서 무언가를 가르칠 때는 쉬운 것부터 가르칩니다. 그리고나서 점차 어려운 것들을 가르치게 됩니다. 쉬운 것부터 하고 어려운 것은 쉬운 것을 해낸 다음에 하도록 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어려운 여리고성을 첫번째 과제로 주셨고, 상대적으로 쉬운 아이성을 다음 과제로 주셨습니다. 왤까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면 여리고가 오히려 쉬운 상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성은 객관적인 분석으로 볼 때 상대하기 매우 힘든 상대입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 쉬울수가 있다는 겁니다. 왜냐구요? 자신의 힘으로 어렵다면 모든걸 하나님께 맡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여러고성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반면에 아이성이 오히려 힘든 상대라고 볼 수 있습니다. 보기에 만만한 상대이기 때문에 하나님께 물어보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 할려고하는 생각이 들어가기 때문에 어려운 상대가 될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보십시오. 견고한 성 여리고는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순종으로 무혈입성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이성은 쉬운 상대로만 생각하고 자신들의 판단에 따라 공격했고, 그 결과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원하신 것은 어떤 경우이든 하나님께 맡기면서 가나안을 점령해 나가길 원하셨던 것입니다. 비록 작은 성이지만 자신들의 힘을 믿고 나아갔을 때는 실패했고, 견고한 성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했을 때 무혈입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앞에는 크고 작은 일들이 놓여지게 됩니다. 그때마다 어떻게 하십니까? 힘들고 어려운 일 앞에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작은 일 앞에서는 어떠하십니까? 아마도 많은 분들이 자신의 능력과 판단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그리 할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어떻던가요? 모든 일들이 자신의 뜻대로 되던가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쉽게 봤던 일들이 오히려 잘 풀리지않고 생각지 않은 난관에 봉착하는 경우가 있었을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하나님을 의지하시기 바랍니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구하십시오. 그것은 나약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약하고 무능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아닙니다. 나에게도 지혜가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맞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이유는, 나의 지혜와 능력보다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훨씬 더 크고, 내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로운 것이며, 그럴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의 능력이 된다는 것을 알기에 그리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혜와 힘을 믿는 사람과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을 믿는 사람 중에서 누가 더 지혜롭고 누가 더 강한 사람일까요?
이년 전에 우리집 큰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주었습니다. 조립하는 것이었는데, 그리 쉬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도와줄까 하다가 그냥 놔두었어요. 어떻게 하는지 두고 봤습니다. 낑낑 맵니다. 8살 아이가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어요. 그런데 얘가 지혜가 있어요. 저에게 도와달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같이 했는데 금방 끝났어요.
제가 우리 아들을 지혜롭다고 하는 이유를 아시겠습니까? 자기가 하겠다고, 할 수 있다고 끝까지 우기는 것이 지혜로울까요? 아니면 아빠에게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 지혜로울까요? 도와달라고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겁니다. 얘는요, 아빠가 자기보다 지혜롭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마찬가지예요. 우리에게 지혜가 없고 능력이 없어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훨씬 더 지혜롭고 능력있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어떤일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인도하심을 구하십시오. 자신의 생각이 있을지라도 일단은 다 내려놓고 하나님께 고하시고 인도하심을 구하십시오. 큰 일이든 작은 일이든 먼저 하나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그럴 때 문제가 풀리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봅니다.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순종으로 여리고에 무혈입성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음 공격 대상을 아이성으로 정하고 정탐꾼을 보냅니다. 아이성은 요르단 계곡에서 서쪽의 중앙산악지대로 올라오는 길목에 있습니다. 아이성을 지나면 벧엘, 실로, 세겜이 있고 남으로는 기브아, 예루살렘, 헤브론이 있습니다. 요르단 서쪽을 점령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되고 꼭 점령해야 할 성입니다.
이제 정탐꾼들이 돌아왔습니다. 그들이 보고 합니다. "아이 성에는 우리와 싸울 사람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갈 필요는 없습니다. 이천명이나 삼천명 정도만 보내서 공격하게 하시면 됩니다."
이 말을 들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는 삼천명 가량을 아이성으로 보냅니다. 그리고 성을 함을 함락하지 못한채 패배하게 됩니다.
보십시오. 앞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이성을 공략하면서 전혀 하나님을 의지하는 모습이 보이지 않습니다. 여리고라는 난공불락의 요새를 점령한 이후 승리의 자만심에 도취되어 아이성같은 작은 성은 너무나 쉽게 보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아이성을 공격하지 전에 하나님의 뜻을 구하지도 않고 도우심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실수입니다. 백성들이야 그렇다치고 지도자인 여호수아만큼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구했어야 했습니다. 만약 여호수아가 아이성을 치기 전에 하나님의 뜻을 구했다면 하나님께서는 여리고에서의 문제를 분명히 알려주셨을 것이고, 그 문제를 해결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아이성 공략은 성공으로 끝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수아 역시 승리의 기쁨에 젖어 정탐꾼들의 말만 듣고 그리 했습니다. 그 결과 그에게 돌아온 것은 예상치 못한 패배였습니다.
패배의 소식을 접한 여호수아의 모습을 보십시오. 6절에 보면 슬퍼하며 자기 옷을 찢었습니다. 법궤 앞에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저녁까지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나서 그가 하나님께 말합니다. 7-9절까지가 그의 기도인데, 그 내용을 보면 이때까지도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아이성을 치면서 하나님을 뜻을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저의 자만을 용서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맞는데 그렇지 않고 "왜 우리를 이곳으로 오게하셔서 가나안 족속의 손에 죽게 하십니까? 우리가 요단 강 동쪽 땅에 머무르는 것이 더 좋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런 여호수아에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라! 왜 얼굴을 땅에 대고 있느냐?" 그리고 무엇이 문제인지를 말씀하십니다. 11절로 계속되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는 아이성의 패배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한 사람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여리고를 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성은 모두 불태우되 금과 은과 구리와 쇠로 만든 물건을 태우지 말고 하나님의 집 창고에 넣어두라고 하셨습니다(수 6:24).
그러나 한 사람이 그러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물건을 훔쳐 몰래 감추었습니다. 누구입니까? 아간이라는 사람입니다. 아간은 여리고성을 점령하는 과정에서 몇가지 물건을 가져다 숨겼습니다. 21절에 있는 것처럼 시날, 즉 바벨로니아에서 온 아름다운 겉옷과 이백 세겔의 은과 오십 세겔 정도의 금이었습니다. 이백 세겔의 은은 대략 2.3키로 정도의 은이고 오십 세켈의금은 대력 600 그람에 해당되는 양입니다. 사실 그렇게 대단한 양도 아닙니다.
그런데 아간은 그것들이 너무나 갖고 싶어 그리 했다는 것입니다. 아간, 그 한사람의 탐욕에서 나온 불순종이 아이성의 패배를 가져왔다는 것이지요. 결국 아간은 그 죄가 발각되어 사해 북쪽 유대광야에 있는 아골 골짜기라는 곳에서 돌무더기에 묻혀 죽게 됩니다.
저는 예전에 아간의 범죄를 보면서 아간의 죄가 있기는 하지만 너무 가혹하지 않나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겨우 한 사람의 죄 때문에 아이성 공격이 패배했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좀 더 자세히 보면 아간의 범죄를 보면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떠한 상태입니까? 약속의 땅,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점령해야 하는 중차대한 과업을 앞에 두고 있습니다. 여리고라는 견고한 요새를 점령했다고는 하지만 이제 겨우 하나 점령한 것입니다. 앞으로 수많은 성들과 적들이 그들 앞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단순한 군대가 아닙니다. 애굽의 노예였던 이들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 애굽에서 구해내셨고, 광야에서 훈련시키신 사람들입니다. 이제 가나안 땅에 새로운 하나님의 역사를 세워나갈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순전한 믿음이었고 거룩이었습니다.
레위기 19:2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가나안 땅을 약속하시면서 그 땅에 들어가는 이들에게 하셨던 말씀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설 수 있는 것은 거룩에 있습니다. 거룩을 잃어버리면 그 이름은 하나님의 백성일지 모르지만 실제로는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도 능력도 상실하고 맙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의 믿음과 거룩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요구하셨습니다. 그래야만 약속의 땅을 차지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간이라는 사람이 그것을 깨버렸습니다. 그것도 첫 전투에서 말입니다.
이것을 그냥 놔두는 것이 옳을까요? 한번의 실수로 보고 그냥 덮어두는 것이 옳을까요? 그것이 자비이고 은혜일까요?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유익이 될까요?
만일 그냥 놔두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냥 덮어두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시간이 지날수록 아간과 같은 이들이 점점 늘어났을 것입니다. 아간과 같은 범죄가 점점 퍼져 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덮어버렸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이 과연 가나안 땅을 점령할 수 있었을까요?
아니요. 이스라엘 백성들은 절대 가나안 땅을 점령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혹 점령했더라도 극히 일부분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가나안 땅에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여호수아서의 전개와 결말은 패배와 범죄로 얼룩지고 말았을 것입니다.
군대에는 기강이 필요합니다. 기강이 흔들리면 아무리 많은 병력일지라도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군대에서의 기강은 거룩과 순종입니다. 거룩과 순종이 있을 때 하나님의 백성들 앞에 여리고는 무너집니다. 그러나 이 거룩과 순종을 잃어버렸을 때는 작은 성 아이 앞에서도 패배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거룩과 순종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들의 정체성이요 힘이요 승리의 원천임을 잊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신약성경에도 나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라는 부부가 나옵니다. 이들은 초대교회의 멤버였습니다. 당시 초대교회는 날마다 수천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또한 가난한 이들을 위해 많은 구제사업을 했기에 상당히 많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모든 교인들이 자원해서 헌금을 했습니다. 아무도 아까워하거나 인색하게 하는 이들 없이 모두가 기쁨으로 자원하여 헌금을 했습니다.
이러한 흐름 가운데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땅을 팔아 헌금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속였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땅을 팔아 전액 다 헌금하려고 하나님께 작정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땅을 팔아 돈을 받아들고 보니까 너무 커 보인 겁니다. 그래서 일부를 몰래 숨겨놓고 나머지를 헌금하면서 그것이 다인 것처럼 속이며 헌금했다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속인 그 죄의 대가로 그들 역시 죽게됩니다.
아간의 범죄와 같은 예입니다. 지금 예수님의 부활과 성령의 강림으로 인해 교회가 시작되었습니다. 날마다 예배하고 떡을 떼며 사랑으로 섬깁니다. 그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 마치 천국을 보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온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중차대한 과업이 교회에 주어졌습니다.
이러한 교회에 있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대한 절대적인 순종의 믿음이며 또한 거룩함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기초이고 정체성입니다. 교회의 능력이 어디에 있습니까? 순종의 믿음입니다. 거룩입니다. 이것을 상실하면 교회는 세상의 여느 공동체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저 하나의 친목단체로 전락하고 맙니다.
그런데 교회의 근간을 뒤흔드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누구에 의해? 바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에 의해서 말입니다. 이들의 죄를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냥 은혜로 덮어두어야 합니까? 그래도 헌금 했으니까 은혜로 덮어두자고 해야합니까? 사람들은 그런 생각을 할 지 모르나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을 그냥 놔두면 이러한 죄가 삽시간에 퍼지게 됩니다. 그것이 죄의 전염성입니다. 죄는 전염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냥 방치하면 삽시간에 퍼지게 됩니다. 이것은 공동체나 개인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되었다면 초대 교회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거룩한 공동체로 세상에 빛을 발할 수 있었을까요? 계속해서 예배가 살아있고 사랑의 섬김이 있는 천국으로 남아있었을까요? 이후 있게 될 모진 박해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는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었을까요? 땅끝까지 증인이 되라는 선교의 명령을 이루어낼 수 있었을까요?
천만에요. 그러기는 커녕 세상에 손가락질 당하고 짓밟혔을 것입니다. 예배는 드려졌겠지만, 그리고 적당히 성도간의 교제는 있었겠지만, 그 내면에서는 죄로 가득하여 서로를 정죄하고 속이며 스스로 무너졌을 것입니다. 죄에 물든 교회가 무슨 능력을 발휘할 수 있고 영혼을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범죄를 그냥 놔두었다면 초대교회는 잠시 있다가 사라졌을 것이고, 사도행전의 기록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셨어요. 아간의 경우도 그렇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도 분명 회개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그 기회를 살리지 못했고 결국 죽음이라는 대가를 받게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보면 아이성의 패배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아간이, 또한 그와 같은 자가 있는 한 이스라엘은 패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패배 자체가 하나님의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죄를 안고 성공하는 것보다는 그 죄 때문에 패배하는 것이 이스라엘을 위해 옳다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비록 죄 때문에 실패가 왔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패배를 통해 이스라엘이 다시금 깨닫고 돌아서길 원했던 것입니다. 아이성의 패배를 통해 처음에는 낙심하였지만 그 원인을 알고 그 원인을 제거했을 때 이스라엘은 다시금 거룩한 하나님의 군대로 설 수 있었고, 이후 아이성을 점령했고, 나아가 가나안 온 땅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아이성의 패배는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의 자비이고 은혜입니다. 그 패배가 없었다면 가나안 땅은 이스라엘의 소유가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시간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말씀하고 계십니까? 성령님께서 여러분들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계십니까? 그 음성에 귀를 기울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음성에 순종하는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성공 뒤에 자만하기 쉽습니다. 특히 어려웠던 일을 해낸 후에, 혹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일 앞에서 자만하기 쉽습니다. 일이 잘 될 때, 잘 풀릴 때 방심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명심하십시오. 일의 크고 작음에 상관없이, 또한 그 일이 어렵고 쉬움과도 상관없이, 모든 일에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도우심을 구하는 것이 정말 지혜있고 능력있는 것임을 말입니다.
그리고 실패 후에 결코 낙심하지 마십시오. 실패라는 결과만 보지 말고 실패에 담겨져 있는 하나님의 뜻을 살펴보십시오. 실패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며 무엇을 요구하고 계신가를 겸손히 들으십시오. 혹 그 실패가 나의 죄 때문이라면, 나의 불순종 때문이라면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용서를 구하십시오. 더 이상 내 안에 아간을 방치하지 마십시오. 내 안에 아간이 있는 한,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있는 한 문제는 해결되지 않습니다. 내 안에 있는 아간을 제거하십시오.
절대 죄를 가볍게 보지 마십시오. 죄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대충 덮어두고 넘어갈 것이라면 예수님께서 굳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깨뜨립니다. 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파괴시킵니다. 죄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무너뜨립니다. 죄는 하나님의 계획을 멈추게 만듭니다.
지난 주 제자훈련 시간 때 큐티를 실습했었는데, 한 형제가 그러더군요. '몸은 이미 죄용서를 받아 세례를 받았기에 괜찮지만 발은 더러워질 수 있다. 더러워진 발을 씼어야겠다'고 말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발을 씻어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여리고 점령 전에 "네 발에서 신을 벗어버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죄에 대한 해결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죄의 문제가 있습니까? 이 시간 그 죄의 문제를 해결받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죄가 있을지라도 우리를 위해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에 의지해서 용서를 구할 때 주홍같이 붉은 죄라도 용서해주십니다.
명심하십시오. 여러분에게 있는 아간을 제거하십시오. 그래서 다시금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거룩을 회복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당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있기를 바랍니다. 여리고 작전에서 순종이 있었을 때 승리가 주어졌습니다. 반면 한 사람의 불순종이 아이성의 패배를 가져왔습니다. 우리가 붙잡아야할 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만이 우리의 나아갈 길입니다. 우리가 봐야할 것, 우리의 시선이 고정되어야 할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분에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어느 선교사님의 고백입니다. 동남아 지역에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이신데,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런데 낙심하게 되었습니다. 교회를 세우지 못해서 낙심한 것 아닙니다. 선교의 방해가 심해서 낙심한 것도 아닙니다. 방해가 있었지만 방해 때문은 아닙니다. 그런데 낙심했어요. 왜 낙심하게 되었는지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아간의 범죄 기사가 있는 본문 말씀을 읽던 중에 자신이 낙심한 원인을 찾아내었습니다.
이 선교사님은 교회를 개척할 때 크고 멋지게 해보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그렇지 못했고 예배처도 늘 쫒겨다니듯 했습니다. 큰 돈을 들여 선물도 준비했는데 정작 사람들이 오지 않아 교인들끼리만 나누어 가졌어요. 이런 저런 일들로 낙심이 되었는데, 정작 보니까 자신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이지요.
자기의 힘으로 교회를 크고 멋지게 해보려는 생각, 그래서 이름도 알리고 싶고, 난 이렇게 한다고 자랑도 하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이지요. 그 과정에서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지 못했고 겸손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순종하지 못했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해결되지 않은 죄의 문제를 보았던 것이지요.
그 문제를 깨닫고 나니까 제대로 보이더랍니다. 자기 건물은 아니지만 이미 교회가 세워졌고, 복음이 전해지고 있고, 나아가 더 전해질 수 있는데, 아간처럼 다른 데에만 눈이 밝아져서 그냥 주저 앉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지요. 아간을 돌에 묻지 않고 아간과 동행하면서는 결코 다른 성들을 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나서 이 선교사님은 하나님께 회개하고 다시금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예배처도 어렵고 선교의 방해도 있지만, 이에 절대 낙심하거나 굴하지 않고 한 형혼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한 마을이라도 복음을 전하기 위해 기쁨으로 헌신하고 계십니다.
아간은 아름다운 겉옷과 금은에 마음을 빼았겼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시선을 빼앗는 것이 무엇입니까? 무엇이 우리를 낙심케 합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봐야할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해결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 시간 성령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깨달음의 은혜를 주시길 바랍니다. 더불어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도 주시길 바랍니다.
거룩과 순종, 순종과 거룩은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이며 능력의 원천입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거룩의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이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순종이 있을 때 우리 앞에 있는 여리고든 아이성이든 무너지는 역사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거룩과 순종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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