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수24:14-25 |
---|---|
설교자 : | 이승남 목사 |
참고 : | http://www.koreacts.com |
선택은 축복의 통로
여호수아 24:14-25
남북 전쟁을 앞두고 고민하며 기도하는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에게 한 참모가 걱정스럽게 물었습니다. '각하, 하나님이 우리편이라는 확신이 없으십니까?' 그러자 링컨이 조용히 대답을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편이라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과연 하나님 편에 서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오늘 본문은 오직 하나님 편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을 뜨겁게 사랑하며 살았던 여호수아의 마지막 고별 설교입니다.
출애굽의 두 영웅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잘 아는 모세입니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어 홍해를 건너 출애굽의 대장정에 일어선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 여리고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 땅으로 백성들을 이끌고 들어간 대단한 지도자입니다.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사람들은 7년의 전쟁을 통해 가나안 땅 대부분을 정복했습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들은 더 이상 떠돌이 생활을 할 필요가 없게 되었고,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는 여유도 생겼습니다. 여호수아는 각 지파 지도자들을 세겜에 모아놓고 고별설교를 했습니다. 수 23장부터 24장까지의 말씀을 요약해보면, '하나님을 의지하십시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세요. 그것만이 살길입니다. 여기까지 인도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여러분은 섬길 대상을 명확히 하십시오.'라는 내용입니다.
본문은 성경 여호수아 전체를 마무리하는 끝 부분입니다. 29절에 보면 '여호수아가 110세에 죽었다.'고 했고, 31절에는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의 사는 날 동안과 여호수아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의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더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배경을 보면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 온지 벌써 스물 다섯 해가 지났습니다. 지금 가나안의 모든 땅이 이스라엘의 지배아래 놓여 있습니다. 모세로부터 정권을 인계 받은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을 이끌고 수많은 전투에서 크게 이겨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에 정착시킨 후 12지파에게 땅을 분배해 주었으며 나라를 안정시킨 위대한 지도자입니다. 민족의지도자 여호수아도 어느새 인생 황혼기에 접어들어 그의 인생을 결산해야 할 시간이 임박해 오고 있습니다. 수23:1-2절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사방 대적을 다 멸하시고 안식을 이스라엘에게 주신 지 오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 여호수아가 온 이스라엘 곧 그 장로들과 두령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불러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나이 많아 늙었도다. 이스라엘의 세월이 25년이 흘러갔습니다. 여호수아의 나이가 많아 늙었습니다. 그래서 온 이스라엘 곧 그 장로들과 재판장들과 유사들을 불러모았습니다.
본문은 여호수아의 일종의 유언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유언은 글자 그대로 남기고 가는 말입니다. 마지막 남기고 간 유언은 진실하게 받아 들여야 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유언은 진실합니다.
여호수아의 마지막 이 메시지는 지금까지 생사고락을 같이 해 오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여 함께 가나안 정벌에 참여했던 사랑하는 자기 백성들에게 간절한 사람의 마음을 담아 전하고 있습니다.
이 날 말씀을 듣는 사람들 가운데는 여호수아의 충실한 동역 자요 격려 자요 후원자였던 갈렙이 있었을 것이며, 대제사장도 있었을 것입니다. 또 전쟁터에서 피와 눈물과 땀을 함께 흘렸던 동지들과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전우들이 여호수아의 마지막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23-24장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단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잘 있어요, 잘 가세요'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여호와'만 찾습니다. 수23:3절을 보세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자시니라.' 23:5절을 보세요! '너희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 앞에서 그들을 쫓으사 너희 목전에서 떠나게 하시리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말씀하신 대로 너희가 그 땅을 차지할 것이라' 3절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싸우시는 분'임을 강조했고, 5절에서는 '그 땅을 주시는 하나님'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을 위해 싸워 주시는 분입니다. 우리들에게 좋은 땅을 예배해 놓고 계시는 분입니다. 여호수아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을 향하여 강조합니다. 23:11절에서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강조했고, 오늘 본문 14절에서 '우상을 버리고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고 했고, 15절에서는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고 마지막 가면서도 외쳐대고 있습니다. 본문 1절과 25절을 보면 여호수아가 마지막 고별 설교 한곳이 '세겜'이라고 합니다.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세겜에 모으고' 25절에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우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베풀었더라.
세겜 땅은 여호수아가 고별설교를 한 장소입니다. 장소가 중요합니다. 여호수아서를 보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과정에 있어서 아주 의미심장한 역할을 담당했던 지역 세 곳이 나옵니다. '길갈과 실로와 세겜'입니다.
성도의 영적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길갈'의 영적인 의미 이스라엘 자손들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 열두 개의 돌로 기념비를 세운 곳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요단을 건너야 합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모맥을 거두는 시기로 우기 때라 요당 강물이 넘쳤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지시를 받은 여호수아는 언약 궤를 맨 제사장을 앞세우고 요단강에 들어서니 강이 갈라져 길이 생겨 잘 무사히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사실 요단강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언제나 죽음의 강처럼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감히 도전하기 어려운 강으로 인식된 곳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요단강을 건넜다고 하는 것은 죽음을 통과한 것이나 다룸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죽음의 강 요단을 건너서 주께서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곳입니다. 그러니까 길갈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나타내는 장소입니다. 오늘 날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고치는 곳입니다. 우리 교회 영원한 표어가 '가르치며 전파하며 고치는 교회'입니다. 교회에서 성령의 바람으로 인격을 고칩니다.
수18:1절을 보면, 실로라는 장소는 이스라엘 민족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이 실로에 모여서 거기 회막을 세웠으니' 그들은 그곳에서 장막을 세웠습니다. 장막은 성막의 또 다른 이름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즉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곳입니다. 희막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의 만남이 이루어졌던 장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어디서나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장소를 성별하여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계시하셨습니다.
실로는 하나님과 만남의 장소입니다. 하나님과 인간과의 교제가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여러분! 주안에서 새 생명을 얻은 우리는 반듯이 실로를 찾아 나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실로는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나누는 곳입니다. 오늘 이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집 실로입니다.
세겜은 그리심산과 에벨산 사이의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도시입니다. 세겜이 어떤 곳인가 하면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처음으로 발을 디뎠을 때,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았던 곳입니다. 세겜은 이스라엘의 믿음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디 출신입니까? 아브라함은 본래 우상을 섬기던 갈데아 우르 출신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거기서 불러 내셨습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가나안 땅에 도착했을 때 제일 먼저 제단을 쌓았던 곳이 바로 세겜입니다.
창12:6-7절에 '아브람이 그 땅을 지나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주하였더라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께 그가 그 곳에서 제단을 쌓고...'
그렇습니다! 세겜은 하나님 예배의 출발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참된 모습은 바로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예배자를 찾으시고, 예배자를 만나주십니다.
요4:23절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또한 세겜은 어떤 곳인가? 야곱이 세겜에 거주하다가 불행한 일을 겪게 된 곳입니다.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 추장의 아들에게 성폭행을 당했던 곳입니다. 그 일 때문에 디나의 오라버니 시므온과 레위가 피비린내 나는 복수를 행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세겜에 머물 수 없게 된 야곱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가족들과 함께 벧엘로 갔습니다. 그 때 그 곳 세겜에서 벧엘로 출발할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야곱의 처첩들이 이방 우상을 가지고 왔는데 야곱이 그 모든 우상을 땅 속에 묻고 다짐하기를 '하나님 제가 온 생명을 다 바쳐 하나님만을 섬기기'로 작정한 곳이 바로 바로 그 현장이 세겜입니다. 다시 말해서 회개와 결단의 역사가 있었던 현장이 바로 세겜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이 세겜 땅에 들어가서 맨 처음 한 일은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것으로 모든 것을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도 제단을 쌓아야 합니다. 무너진 제단을 우리가 다시 쌓아야 합니다. 제단을 다시 쌓자는 것은 단순히 예배를 회복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처음 믿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또한 처음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야곱이 벧엘로 올라가기 전 세겜에서 행한 일도 기억해야 합니다. 그가 가족들과 함께 이방 신상들을 모두 다 땅에 묻어 버렸습니다. 우상은 그들에게 아무 도움도 줄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방해하기 때문에 그들에게 엄청난 피해를 끼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우리의 세겜에 묻어 버려야 할 것들은 무엇입니까? 아직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면 오늘 이 자리에서 묻어 버려야 합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여호수아의 고별설교의 포인트는 '바른 선택'을 요구하고 있습니다(15).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마치 갈멜 산상에서 단호한 어조로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18:21)고 했던 엘리야처럼 결단을 촉구하는 여호수아의 '메세지'입니다.
신앙은 '하나님이냐 우상이냐를,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선택하여 결단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른 선택이 축복의 통로입니다.. 우리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순간의 선택을 바로 잘 함으로 말미암아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선택을 순간적으로 잘못함으로 말미암아서 일생을 불행한 가운데 살아가는 그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선택의 윤리학'에서 인생을 성공적으로 살기 위해서 세 가지 선택을 잘 하라고 했습니다. 첫째는 직업의 선택을 잘 해야 된다고 합니다. 둘째로는 배우자의 선택을 잘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종교의 선택을 바로 잘 해야 된다고 합니다. 이 종교의 선택을 잘 하지 못하면 천국과 지옥으로 갈라지게 됩니다.바른 선택과 결단이 인생의 운명을 바꿀 수 있습니다. 본문은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을 정복하는 선두에 섰던 백전노장의 여호수아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하나님 앞에 가기 직전, 고별 설교를 하는 대목입니다.
누군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특히 이스라엘 역사의 산 증인으로서 한 시대를 이끌었던 지도자가 과거와 현재를 읽고 미래를 예견하는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우쳐주는 귀한 말씀입니다. 숱한 대가를 지불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토록 갈망했던 가나안 땅을 정복하고 정착하면서 이스라엘을 이끌어온 여호수아는 가장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할 때가 왔음을 감지했습니다. 다가온 축복 속에서 마냥 기뻐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어떤 결단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누구를 섬길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가나안 땅은 이방종교의 문화가 가득한 곳입니다. 그 속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여호와만을 섬길 것인가?' 하는 문제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선택과 결단에서 중요한 것들이 있습니다. 선택의 대상에 대한 분명한 이해와 분별이 있어야 합니다.
선택을 할 때는 집중력과 분별력이 필요합니다. 여호수아는 지금 다른 여러 신들에 대해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선택에 앞서 분별하라는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왜 이렇게 촉구하고 있을까요? 그들 중에 이미 이방 신들의 유혹에 흔들리고 있는 백성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의 결단의 촉구에 대한 백성들의 일차적인 반응은 긍정적이었습니다. 16절에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다.' 그들은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굳은 결단으로 화답을 했습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수24장에서 한 장을 넘기면 사사기가 나오는데, 여호수아가 죽은 이후 이스라엘은 아주 빠르게 영적 어두움의 시대로 진입하고 말았습니다.
여호수아 앞에서 했던 그들의 결단의 흔적은 너무 빨리 지워져 버렸습니다. 영적 혼란기의 사사 시대가 오고 말았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하나님만을 섬기겠다는 각오는 했지만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이해 없이 순수한 마음만으로 결단한 것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이해를 해야 합니다. 확신의 근거는 감정만으로는 안 됩니다. 내가 믿고자 하는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사43:1절에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선택은 행동의 변화가 따라야 합니다.
여호와를 선택한다는 것은 당시 많은 신들에 대한 유혹을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려고 한다면 강 저편에서 섬기던 이방 신들을 단호히 버려야 합니다.
새로운 출발은 과거와 깨끗한 결별을 해야 합니다 갈멜산의 영웅 엘리야도 백성들에게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분명한 선택을 하고 둘 사이에서 머뭇거리지 말라고 촉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적당주의는 어디에서도 환영을 받지 못합니다. 피곤한 삶은 애매한 선택에서 시작됩니다.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눈치를 보게 됩니다. 신앙이면 신앙, 세상이면 세상이어야 합니다. 느슨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색깔이 회색입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온도는 미지근한 것입니다. 신앙에서 중립은 없습니다. 정확한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선택은 적극적이어야 합니다.
선택은 때(기회)와 시기가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고 했습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오늘 택하라'입니다. 선택을 미루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매우 중요한 시기에 있으니 지금 선택하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어떤 특별한 순간이 왔을 때 특별한 선택을 한다면 전혀 다른 인생이 되고, 인생의 축복이 주어집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특별한 기회를 주실 때를 '카이로스'라고 합니다. 선택은 빠른 결단이 요구됩니다. 미루어서는 안 되고 때를 놓쳐서는 안됩니다. '마틴 루터'는 사탄의 최상의 전술 전략은 사람들로 하여금 '차차 하지. 다음에 하지. 나중에 하지' 하는 마음이 생기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강철왕 카네기는 자신의 성공 비결을 묻는 기자들에게 '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수만 번의 기회 중에 아주 중요한 몇 번의 기회를 잘 선택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신 것이야말로 참으로 큰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고후6:2절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이 바로 선택의 때요, 결단의 때입니다. 기회는 머무르지 않습니다.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선택했다면 확실히 실천해야 합니다. 작심삼일은 절대 안됩니다.
여호수아의 결단을 보세요!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15)
신앙생활은 섬김입니다.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고, 주의 종들을 섬기고, 성도들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 섬김의 삶은 성경의 핵심 내용입니다. 하나님이 강조하신 강조 점의 중심도 이 섬김의 삶입니다. 10계명 가운데서 6가지 계명이 '이웃을 섬기라'는 내용입니다.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예수님이 이 섬김의 정신을 강조하셨습니다. 산상수훈에서 예수님은 높아지려고 하지말고 낮아지라고 하셨습니다.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대접하라고 강조하셨습니다. 이웃에게 물 한 모금 마시게 하는 것이 곧 나를 섬기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법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 많은 법 중에 가장 많은 법은 섬김의 법입니다. 하나님 백성에게는 두 가지 삶이 있습니다. 하나는 구원받는 삶이고, 또 하나는 구원받은 후의 섬김의 삶입니다. 일반적인 섬김의 삶에도 향기가 있고 감동이 들어있고 따뜻한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자원봉사' 얼마나 신선하고 향기롭습니까? 그런데 주님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섬김의 삶에는 더 큰 영향이 들어 있습니다. 거기에 치유와 회복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칭찬도 섬김의 삶입니다. 내 칭찬 한마디가 누군가에게는 희망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도 젊은이도 어른도 모두 칭찬을 좋아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합니다. 여성들은 '젊다, 예뻐졌다.'라는 칭찬의 말 한마디면 모든 여성들은 깜빡 죽습니다. 그 칭찬의 말한 마디는 보약보다 효과가 더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것이 이 섬김의 삶입니다. '내가 세상에 온 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고 도리어 섬기려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섬기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찾아오는 모든 병자들을 일일이 손으로 만져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너희도 이렇게 하라'는 당부였습니다.
섬김에는 몇 가지의 원리가 있습니다. 섬김에는 높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듯 중심으로 섬기는 것이요, 하나님을 섬기듯 사람을 잘 섬기는 것입니다.
섬김에는 길이가 있습니다. 언제나 섬기는 자세가 같아야 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 없이 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섬김은 이론이 아닙니다. 섬김은 형식이 아닙니다. 섬김은 삶 그 자체입니다. 14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 여기 '성실'은 '온전함', '순수함'을 의미하며, '진정'은 '견고함', '확실함'을 의미하는 말로 이것은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잡다한 생각이 없이 오직 하나님만 향하는 순수한 마음과, 어떠한 유혹에도 견딜 수 있는 견고한 마음가짐으로 섬기라는 의미입니다.
종은 주인만을 섬길니다. 종의 신분으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성도에게 필요한 자세입니다.
주님은 섬기는 자를 귀히 여기신다고 했습니다. 요12:26절에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저를 귀히 여기시리라'
주님은 막10:43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잘 섬기는 자는 이웃도, 교회도 잘 섬깁니다. 오늘 본문에서 여호수아는 여호와 하나님을 잘 섬기겠노라고 결단합니다. 백석교회 성도여러분이 주님의 섬김의 본을 보여 주시길 바랍니다
백석교회 http://www.baekseokchurch.kr
한국교회 설교기념관 http://www.koreacts.com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