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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속 속의 크리스챤

사사기 왕대일............... 조회 수 4030 추천 수 0 2004.05.05 14:2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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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삿16:15-19 
설교자 : 왕대일 목사 
참고 : 감신대신과 교수/새길교회 
개신교 신앙은 전통적으로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이라는 원리를 신앙의 기초로 삼습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 1:17)라는 구절에서 그런 신앙 원칙을 찾았습니다.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만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말 성서에서 강조되고 있는 “오직”이란 말은 원래 그리스어 성경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로마서 1:17이 인용하고 있는 하박국 2:4에도 이런 말은 없습니다. 영어, 독일어, 라틴어 번역에도 “오직”이란 말은 없습니다. 번역본 가운데 “오직”이란 말을 첨부하는 성경이 있다면, 그것은 중국어 성경입니다. 중국어 성경에 “오직”(惟)과 “오로지”(必)란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칭의에서 시작된다는 것에 하등 이의가 없습니다. 다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만 산다”는 신앙 원리가 “믿음”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에 대해서는 가르쳐주지 않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과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세속 속의 크리스챤입니다. 예배하는 시간에 잠깐 하나님의 임재 앞에 서지만, 이 시간을 빼고 나면 우리는 한 주간 내내 세상 한 복판에서 살아갑니다. 우리가 신앙인인 것을 진정 드러내는 공간은 하나님 앞이 아닙니다. 우리가 신앙인인 것을 드러내는 자리는 단연코 세상입니다. 세상에서, 세상 한 복판에서, 세속 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크리스챤입니다. 교회 안의 크리스챤이 아니라 세속 속의 크리스챤입니다. 문제는 세속 속에서 살아가는 크리스챤의 삶이 그리 쉽지가 않다는데 있습니다. 오늘 읽은 본문 말씀이 바로 그런 아픔을 들려줍니다.  

  저는 오늘 삼손과 들릴라 이야기를 우리들의 세상살이에 대한 하나의 범례로 읽으려고 합니다. 삼손의 입장에서 들릴라의 유혹을 읽을 때 사사기 16장의 종막에 해당되는 본문의 스토리는 이 시대를 사는 크리스챤들의 위기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들릴라가 삼손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이 내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 당신이 이 세 번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을 말하지 아니하였도다(삿 16:15).  

  들릴라와 삼손 사이는 서로 연인 사이입니다. 적어도 삼손 입장에서 보면 들릴라는 삼손이 사랑하는 여인입니다. 여기 “사랑한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아하브,” 곧 지, 정, 의가 동반된 헌신을 가리킵니다(비교, 신 6:4-5). 삼손이 하나님을 사랑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삼손이 들릴라라는 여인을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들릴라는 삼손 같지 않습니다. 들릴라는 삼손을 이용해서 자기 몫을 채우는 여인으로 등장합니다. 들릴라가 하는 말에 주목해보세요. 사사기 16:15에서 들릴라가 하는 말은 사사기 16:6으로 거슬러 올라가 파악해야 합니다.

  청컨대 당신이 큰 힘이 무엇을 말미암아 있으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삿 16:6).

  들릴라의 미션(mission)은 삼손이 지닌 힘의 비밀을 캐내는 것입니다. 들릴라는 지금 성(性)을 무기로 삼손을 침공하고 있습니다. 히브리 원문에서 들릴라의 말은 수동태입니다.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이 결박되어(수동태!) 박해를 당할 수 있겠는가”고 묻고 있습니다. 삼손이 어떻게 스스로 노예가 될 수 있는지를, 들릴라가 어떻게 하면 삼손을 포로로 삼을 수 있는지를 노골적으로 묻고 있습니다. 삼손을 마음의 포로로 사로잡은 것으로 멈추지 않고 육체적인 사슬로도 묶어 놓겠다는 것입니다.

  들릴라가 삼손을 결박하려한 시도는 한두 번이 아닙니다. 들릴라는 세 번씩이나 삼손을 묶어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삼손의 거짓말로 그 시도가 수포로 돌아갔습니다.  첫 번째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자 들릴라는 “보라 당신이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청컨대 무엇으로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이제는 내게 말하라”라고 대듭니다(삿 16:10). 두 번째에서는 “당신이 이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내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삿 16:13)라고 따집니다. 세 번째에 가서는 “당신이 이때까지 나를 희롱하여 네게 거짓말을 하였도다. 내가 무엇으로 하면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삿 16:13)라고 삼손을 다그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네 번째에 가서는 “당신의 마음이 네게 있지 아니하면서 당신이 어찌 나를 사랑한다 하느뇨. 당신이 이 세 번 나를 희롱하고 당신의 큰 힘이 무엇을 말미암아 있는 것을 내게 말하지 아니하였도다”(삿 16:15)라고 쏘아대고 있습니다.

  들릴라의 말은 “점점 세게”(크레센도!)입니다. 똑같은 말은 세 번, 네 번 바꾸지 않고 점점 세게 다그칩니다. “무엇으로 당신을 결박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라는 소리가 거듭해서 들립니다. 급기야 들릴라는 삼손을 죽을 지경까지 몰아갑니다.

  날마다 그 말로 그를 재촉하여 조르매 삼손의 마음이 번뇌하여 죽을 지경이라(삿  16:16).  

  이것은 결코 유혹이 아닙니다. 이것은 차라리 도전입니다. 이것은 결코 시험이 아닙니다. 이것은 공개적인 선전포고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의 모습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박해 같은 것은 없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에게 매섭게 몰아닥쳤던 박해와 순교는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대신,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에는 유혹이 있습니다. 시련이 있습니다. 도전이 있습니다. 거짓이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유혹과 도전, 시련과 거짓이 충만한 세상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답게 선하게 살고, 바르게 살고, 용감하게 살고자 원하지만, 그러나,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은 우리를 선하게 살게 하기보다는 악하게 만듭니다. 바르게  살기보다는 요령껏 살게 만듭니다. 용감하게 살게 만들기보다는 비굴하게 살게 만듭니다. 신앙생활이 아닌, 생활신앙을 엉망으로 몰고 갑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삼손은 들릴라의 공격에 어떻게 대처하였습니까? 안타깝게도 삼손은 자기를 조이는 위기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채 마냥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잠만 자고 있습니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삼손이 하나님의 사람인데도, 삼손이 유혹 당하고 있는 순간인데도, 하나님의 신은 삼손에게 침묵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의 신은 삼손과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삼손이 힘이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신이 그와 함께 하실 때였습니다(삿 13:25). 삼손은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어”(삿 14:6; 15:14) “사자를 염소새끼를 찢는 것처럼” 찢었었습니다. 나귀의 턱뼈를 손에 쥐고 일천 명과 맞서 싸워 이겼었습니다. 삼손도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삿 15:18; 비교, 16:28).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는, 삼손에게 하나님의 신이 함께 했다는 기록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삼손은 지금 세속의 유혹 앞에 완전 무방비 상태입니다. 하나님의 신이 하나님의 사람으로부터 떠날 때 하나님의 사람은 완전히 무기력한 인간이 되고 맙니다. 유혹 속의 삼손! 이 유혹 앞에 삼손은 점점 더 자신의 본질을 노출하게 됩니다. 들릴라가 붙들고 늘어지자 처음에는 “마르지 않은 푸른 칡 일곱으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고 대꾸하였습니다(삿 16:7). 그 다음에는 “쓰지 않은 새 줄로 나를 결박하면 내가 약해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삿 16:11)고 대꾸하게 됩니다. 그 다음에는 “나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위선에 섞어 짜면 되리라”(삿 16:13b)고 대꾸하게 됩니다.

  삼손의 고백이 점점 핵심을 향해서 이동하고 있습니다. 들릴라가 점점 세게 대들자, 삼손이 점점 약하게 물러서는 형국입니다. 삼손의 고백이 굵은 줄에서 가는 줄로 옮겨가고 있습니다. 몸에서 머리로 이동해 가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들릴라에게 자기 비밀을 털어놓고야 맙니다.

  삼손이 진정을 토하여 그에게 이르되 내 머리에는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내가 모태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이 되었음이라 만일 내 머리가 밀리우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라(삿 16:17).

  무엇이 삼손을 무참히 망가뜨리고 있습니까? 성(性)입니다. 삼손은 지금의 성(sex)의 노예가 되어 있습니다. 성적인 도전 앞에서 하나님의 사람 삼손은 참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습니다(삿 14:2; 16:1,4).

  성 문제가 심각합니다. 우리 교회 안팎에서 성 문제가 심각합니다. 그것이 무서운 것은 은밀하게 저질러지기 때문입니다. 사사롭게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한 개인이 성적으로 순결하지 못하면 하나님의 성소는 온통 더렵혀지고 맙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한 개인이 성적으로 성결치 못하면, 하나님 신앙 공동체 전체가 다 부정하게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삼손이 당하는 문제이며 오늘 우리가 겪는 문제입니다.

  마침내 삼손이 비밀을 털어놓자 들릴라는 이 기쁜(?) 소식을 블레셋의 방백들에게 전합니다.

  “한 번만 더 올라오십시오. 삼손이 나에게 속마음을 다 털어놓았습니다.” 그러자 블레셋 사람의 통치자들이 약속한 돈을 가지고 그 여자에게 올라왔다(삿 16:18, 표준새번역).

  이 구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블레셋의 방백들이 맨 처음 들릴라와 어떻게 거래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블레셋 방백들이 삼손을 없애고자 들릴라를 매수하였기 때문입니다.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이기어서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일천 일백을 네게 주리라(삿 16:5).

  표준새번역은 이 구절을 이렇게 옮겨놓았습니다.

  블레셋 사람의 통치자들이 그 여자를 찾아와서 말하였다. “너는 그를 꾀어 그의 엄청난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잡아 묶어서 꼼짝 못 하게 할 수 있는지 알아내어라. 그러면 우리가 각각 너에게 은 천백 세겔씩 주겠다.”(삿 16:5).

  표준새번역성경은 “우리가 각각 너에게 은 천백 세겔씩 주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원래 히브리어 본문에는 세겔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냥 “우리가 각각 너에게 ‘은 일천 일백’을 주리라”입니다.

  주전 11세기 말 당시 블레셋 사람들이 살던 도성은 다섯 개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에서 블레셋의 방백들이 들릴라를 찾아와서 삼손의 큰 힘의 비밀이 어디에 숨어 있는지를 알려주면 “우리가 각각 은 일천 일백을 네게 주리라”라고 제안했을 때 본문에서 블레셋 사람들이 들릴라를 매수하는 대가로 제시하는 금액은 은 오천 오백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 방백이 일천 일백 씩 내게 되니까 다섯 방백이면 은 오천 오백이 아닙니까?

  재미있는 것은 원문에 돈의 단위를 알려주는 명칭이 없다는 점입니다. 세겔인지, 데나리온인지, 달란트인지, 아무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은 오천 오백이라고만 말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백지 수표같은 암시입니다. 이 돈의 액수가 굉장히 많다는 것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그 엄청난 돈의 공세 앞에서 들릴라는 주저 없이 블레셋 방백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맙니다. 큰돈을 어렵지 않게 벌 수 있다는 생각에 들릴라가 블레셋 사람들에게 매수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사람이 살아야 되는 세상은 물질주의, 배금주의가 판을 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돈이면 다”라는 가치가 온 세상 사람들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배금주의는 우리 교회 안에서도 위세를 떨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어느새 부자들의 교회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교회의 문턱을 도저히 넘어설 수가 없습니다.

  들릴라가 마침내 삼손의 머리를 밀었습니다.

  들릴라는 삼손을 자기 무릎에서 잠들게 한 뒤에, 사람을 불러 일곱 가닥으로 땋은 그의 머리털을 깎게 하였다. 그런 다음에, 그를 괴롭혀 보았으나, 그의 엄청난 힘은 이미 그에게서 사라졌다(삿 16:19, 표준새번역).

  표준새번역은 들릴라가 삼손의 “일곱 가닥으로 땋은 머리”를 깎았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원문에서 이 구절은 애매합니다. 그냥 들릴라가 삼손의 머리털 “일곱 가닥을” 밀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험적으로 “일곱 가닥을 밀고 괴롭혀본즉” 삼손이 아무 힘도 못쓰고 말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원문을 그대로 따라 읽을 경우 들릴라는 삼손의 머리를 모두 민 것이 아닙니다. 들릴라는 삼손의 머리털 일곱 가닥(!)만을 밀었습니다. 그런데도 삼손은 자기 힘을 잃어버리고야 말았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머리털 일곱 가닥이란 아주 작은 수치입니다. 아침 세수할 때 빠지는 머리가 이보다 훨씬 많습니다. 실패는 지극히 작은 데서 출발합니다! 지극히 작은 일, 지극히 사소한 일에서부터 하나님의 사람답게 사는 은혜가 여러분에게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여기에 나오는 일곱이란 단어는 히브리어로 “쉐바”입니다. 이 말은 동사형으로는 “맹세한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삼손의 머리털 일곱가닥이란 삼손이 맹세한 것을 암시합니다. 들릴라는 삼손이 하나님께 맹세한 것을 파괴시켜 버렸습니다. 삭도로 삼손의 맹세를 뭉개 버렸습니다. 그래서 삼손은 눈알이 뽑히게 되었습니다. 빛의 아들이 암흑 속에 살게 되었습니다.

  삼손의 실패는 세속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무엇을 지켜야 할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바로 몸가짐입니다. 영혼과 마음이 아닌 몸의 관리가 소중함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몸의 신앙, 몸의 신학, 몸의 경건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를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성(sex)과 돈으로 도배된 거리의 물결 속에 피동적으로 끌려갔다가 망가지고만 하나님의 사람의 최후를 비정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유대 탈무드에 이런 가르침이 있습니다(Makkoth 24a).

  이사야는 신앙의 원칙을 여섯 개로 설명하였다. “옳게 살고 바른 말 하는 사람, 착 취로 돈을 벌지 않는 사람, 뇌물을 뿌리치는 사람, 살인하자는 소리를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는 사람, 악한 일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감는 사람이다”(사 33:15). 이것을 미가는 세 개로 줄였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것은 정의를 실천하는 일, 기꺼이 은혜에 보답하는 일, 조심스레 하나님과 살아가는 일이다”(미 6:8). 이사야는 그것을 다시 두 개로 줄였다. “너희는 바를 길을 걷고 옳게 살아라”(사 56:1). 다시 하박국은 그것을 하나로 줄였다. “의로운 사람은 그의 신실함으로 살리라”(합 2:4).

  이것을 신약의 말로 바꿔 들어봅니다.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3b, 20).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 그것이 바로 성화의 삶입니다. 믿음으로 의로워지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새 사람이 되었기에, 그 삶에 그리스도의 뜻을 이루는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구체적으로 몸으로, 생활로,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거룩해지는 삶! 그것이 바로 세속 속의 크리스챤이 좇아가야 할 삶의 좌표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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