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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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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삿19:2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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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최만자 자매 |
참고 : | 새길교회 |
오늘은 사순절 5번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겠지만 부활주일 전에 40일간주일을 빼고을 금식하며 경건하게 보내는 기간입니다. 원래는 2-3일만 지키던 것이 3세기부터 엄격하게 40일을 지키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세례를 준비하는 기간으로 지켜졌었는데, 후에 경건한 신앙생활을 훈련하는 기간으로 지키게 되었습니다. 이 때는 특별히 죄와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고, 의미를 되새기며, 그러한 삶을 실행하고자 노력합니다. 이러한 사순절에 오늘 제가 택한 성서본문을 가지고 고난에 대하여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 먼저 고난에 대한 종교적·개인주의적 이해와, 둘째로 이 세상의 무고한 수동적 고난의 의미를 찾고자 합니다.
사실 오늘의 성서본문은 주일날 아침예배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혀지기는 어려운 본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이 본문을 주일 아침예배에서 들은 분들은 거의 없을 줄 압니다. 본문에 나오는 인물이 힘이 없고 이름 없는 한 여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 본문의 내용이 너무도 잔인한 폭력을 담고 있어서 다루기가 거북한 것이 사실입니다. 참으로 거룩한 문서인 성서에 이렇게 폭력적인 문서가 끼여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늘의 본문은 두렵기까지 합니다. 사실 구약성서에는 폭력에 대한 기사가 많습니다. 성서 곳곳에 하나님이 전쟁을 주도하시는 전쟁으로 얼룩진 기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평화주의자들이나 여성들은(여성들은 폭력도 싫어하거니와 전쟁의 역사가 여성 억압과 깊이 관련된다고 하여) 구약성서에 대해 크게 거부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이 본문을 굳이 사순절 동안에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이 본문에서 고난 당하는 여성의 고난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당하는 고난의 특징은 우선 이 세상에서 가장 힘없는 자가 당하는 고난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 고난이, 어떤 목적이 있어 자발적이며 능동적으로 의식을 가진 사람이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아무런 목적도 의식도 없이 그저 폭력에 의해 당하고 있는 고난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고난이 인류 역사에 많이 있어 왔지만 우리는 이런 고난의 의미를 그렇게 신중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이런 고난은 참으로 불행한 고난이다 라거나, 설명할 수 없고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고난이라고 넘겨 버립니다. 문학작품들에서는 그것을 문학적으로 시적으로 여운을 남기면서 우리들에게 오히려 질문을 남겨 놓곤 했습니다. 케오르 큐우의 25시가 그렇고 특히 나치시대 동안의 유대인들의 학살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의 언어가 그랬습니다. 기독교 안의 신학에서도 이러한 고난에 대하여는 별로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기독교의 핵심적인 주제의 하나는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은 기독교의 정수이며 근거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이해는 성서와 신학에서 기본적인 것입니다. 물론 성서 안에는 다양한 고난의 형태들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욥의 고난, 룻의 고난 등등.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은 그러한 고난의 반열에 들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것은 신학자나 성서기자의 이해가 그 고난을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고난의 본질과 이 고난은 어떤 상관관계에 놓일 수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 고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와 같은 물음을 가지고 본문을 좀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사기는 이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거의 200년 동안 왕이 없이 지나던 기간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17장에서 서곡을 울리면서 시작되어 21장에서 실제로 종결이 납니다. 이야기의 전개는 한 레위족의 남자가 첩을 두었는데 그와 불화가 생겼고, 그 첩이 친정으로 도망하자 그를 데려오려고 처갓집으로 가서 며칠을 묵으면서 장인을 설득하여 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생긴 일입니다. 가나안 땅에 속하는 여부스라는 마을에 왔을 때 이미 해가 저물었지만 이방 나라에 머물지 않으려고 길을 재촉하여 기브아라는 곳에 갔습니다. 거기서 한 노인의 영접을 받아 쉬고 있는데 그 마을의 무뢰배들이 와서 이 레위인을 내어놓으라고 횡포를 부립니다. 이에 집주인은 자기 처녀 딸을 줄 터이니 손님을 상하게 말라고 부탁하지만 막무가내로 무뢰배들이 듣지 않아 결국은 레위인이 자기 첩을 그들에게 내어주고 무뢰배들은 밤새 그 여인을 욕보인 후에 새벽에 그 집 앞 문지방에 놓고 갔습니다. 새벽에 레위인이 밖에 나와 그 여인을 보고 일어나 가자고 하지만 대답이 없자 그가 죽은 것을 알고 나귀에 태워 자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이 여인을 열두 토막을 내어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보내면서 기브아의 만행을 폭로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부족들은 기브아와 전쟁을 일으키고 여러 번의 도전 끝에 결국 베냐민 지파의 600명 남자만 남기고 모두 죽입니다. 그리고는 그 지파의 존속을 위해 길르앗 야베스 지방의 처녀 400명을 뺏어 베냐민지파에게 주고 모자라는 200명은 실로의 처녀들을 뺏어서 공급하여 베냐민 지파가 존속되게 합니다. 우리는 이야기에서 고대사회가 얼마나 여성을 억압하였으며, 전쟁과 남성들의 이기심 때문에 여성들이 희생당하고 처참한 삶을 살았던 것을 엿보게 됩니다. 사실 이러한 여성의 문제를 지금까지 대부분의 남자 신학자들은 간과하였고, 오히려 이 본문은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성 이야기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이웃환대법이 얼마나 철저한가를 논증하는 예의 경우로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예수의 교훈이 바로 이러한 이웃환대법에 연유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누구를 위한 이웃환대법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성서해석입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여성관점의 토론을 이 본문에서 지속하려 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바 대로 이 여인이 당한 고난의 형태에 주목하고,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고 있는 예수의 고난 이해와 관계지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우리는 예수의 고난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가 어떤 것인가 먼저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전통적으로 그리고 성서의 전반적 이해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계획하신 것으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게 하고 죽게 했으며, 이는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한 것이라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고난은 첫째로 속량을 위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 4장 5절 그리고 고린도전서 6장 20절, 7장 23절에서는 그의 흘린 피의 대가로 우리가 구속받았다고 합니다. 둘째로 그것은 대리 고난입니다. 우리 대신 받으신 고난으로 베드로전서 2장 21-24절에 나와 있습니다. 셋째, 우리를 위한 희생의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은 그 대표적 내용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유월절 어린양의 거룩한 희생으로 예수의 죽음은 신학적 해석을 가집니다. 그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희생되셨다는 신앙입니다. 이러한 속량과 대리와 희생의 고난 이해는 사실 구약성서에서부터 비롯합니다. 구약성서 처음에는 대속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고난은 하나님의 분노의 표시이고 죄의 결과라고 보았으나, 나중에는 교육적인 도구로 생각하여 고난의 시련을 통해 인격이 도야되고 성숙해 진다는 것으로 고난에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포로기를 맞으면서 고난에 대한 이해는 급격히 새로운 해석을 낳습니다. 고난은 바로 대속적인 것이라는 이해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계속 수난을 당하니까 단지 죄로만 그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였고, 결국 의인이 당하는 고난으로 신학적 이해를 넓히게 된 것입니다. 포로기는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차원을 갖게 한 시기였습니다. 그 대표적 내용이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의인이 당하는 고난은 대신하는 고난으로, 곧 누구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라는 사상입니다. 이 고난받는 종의 해석이 예수의 십자가 고난에 연결되었습니다. 사실 당시에 이스라엘은 여러 형태의 세상을 이끌 새로운 지도자를 추구하였는데, 그 가운데 이 고난의 종을 선택한 것은 어려운 선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의 메시아나 인자가 아닌 수난 당하는 종을 구주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초기의 이 수난사화 신학은 성만찬을 통하여 전승되었고, 교부 터툴리안에 의하여 대속적 고난의 신학으로 확립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원죄를 가지고 모태에서 형성될 때 원죄가 유전되는데, 그리스도의 대속이 은혜로써 보상이 되어서 속죄된다는 교리를 확립하였습니다. 이런 신학의 고난 이해는 오늘까지 지속되고 사순절 특히 수난주간에는 그 절정을 이루는 듯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흘러 넘치는 환영을 보기도하고 또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감격해 합니다. 동시에 벌레만도 못한 자신을 위하여 그 귀한 예수께서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감격의 고백을 하며 찬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이 대신하는 고난에 대한 이해는 우리에게는 감격적인 것이지만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고난 자체를 너무 별개로 독립시켜서 영광스럽게 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고난 이해는 자칫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감상에 빠져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여 영광의 높은 고난으로 만들어서, 십자가는 후광을 두르고 황금빛으로 빛나며 금 목거리가 되어 걸립니다. 예수의 고난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그의 고난을 오직 종교적이고 개인적인 감정만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은 지극히 낮은 고난이었습니다. 즉 예수의 고난은 그의 지상에서의 삶과 관련시켜서 이해하여야만 참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영광의 고난 이해는 진정한 고난이 더 이상은 없다는 아름답기만 한 고난입니다. 예수가 받은 고난은 저 밑바닥에 있는 소외되고 힘없는 자들을 대변하다가 당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라는 신학적 표현은, 예수의 말씀과 그의 활동과 관심의 중심 주제였던 하나님의 나라와는 별개로, 상관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와도 상관이 없어집니다. 예수의 죽음은 그를 둘러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그의 생애의 결과이지 별도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그 비참함을 지극히 사랑한 예수의 넘치는 사랑이 들어 있고, 그래서 죽도록 그들을 위하여 저항하는 저항의 십자가입니다. 예수가 빌라도와 또는 대제사장들과 적당히 타협하였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그는 그들의 주장에 맞서서 민중의 고난을 대신 지고 저항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성전종교를(그들을 경제적으로 또 생활 안에서 수탈하는) 거부하였고, 율법을 거부하였으며, 로마에 대하여 그 세력에 굴복하지 않는 정치적 모반으로 지목 받았기 때문에 고난 당한 것입니다. 그의 고난은 우리 죄를 위하여 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고 지금 우는 자, 지금 배고픈 자, 지금 가난한 자, 지금 애통하는 자들과 함께 하였기 때문에 당하게 된 고난이었습니다. 이것을 영적인 죄와 구원이라는 좁은 도식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예수의 이 고난이 철저히 소외된 자들, 그 당시 사회구성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고, 구성원의 경계 밖으로 밀려난 자들과 함께 하였기 때문에 당한 고난인 것을 우리는 기적사화를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병을 고쳐주신 예수의 기적은 온전하지 못한 이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만들어서 사회의 구성원 안으로 들여놓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그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거라사인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이방인, 백부장의 신하, 여인들, 아이들, 그리고 유대 율법의 정결법에 걸리는 부정한 사람들 곧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혈루증 여인 등 치료 불가능하여 정결법에 의해 사회 공동체로부터 처절하게 소외당한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고쳐서 그 사회 안으로 들여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인 곳이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예수의 고난은 능동적이며 공동체의 고난 속에서 고통을 주는 지배체제에 굴복하지 않는 대속의 고난입니다.
물론 예수의 고난이 우리의 심리적 정신적 고통이나 도덕적이며 개인적인 죄와 상관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실존적 죄된 인간의 구원을 예수께서 감당해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초기 예수의 수난사화를 전승시킨 집단은 바로 그 사회의 경계 밖으로 밀려났던 그룹이었고, 그들에게서는 예수의 고난이 결코 그러한 종교적 개인적인 해석으로만 머물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예수의 고난은 영광의 고난이 아닌 낮은 고난이며 고난 자체에 목적을 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사사기의 여인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예수의 고난은 이렇듯 능동적이며 의도를 가졌고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지만 그 여인의 고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신대 여성의 고난이나 아우슈비츠의 유대인의 고난을 같이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수동적 희생, 도살당하는 양과 같은 그 희생은 어떻게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난 유대인 랍비 비젤은 그의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친위대들이 유대인 남자 둘과 한 소년을 처형하였는데 남자 둘은 즉시 죽었으나 소년은 30분간 고통을 당하였다. 그 때 누군가 뒤에서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내 속에서 하나님은 저 소년과 같이 있다는 음성을 들었다.
우리는 어떻게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불의 때문에 당하는 모든 고통과 고난은 거룩한 구속적인 고난이라고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예수의 수난은 역사적으로 독특하고 유일한 것으로 그리고 아무도 그런 고난을 같이 할 수 없는 대속적인 거룩한 고난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불의로 고통받는 그 고통을 대신한 것이라면, 고통을 당하는 모든 고난은 예수의 고난의 형상을 갖습니다. 예수의 고난은 역사적 원형(historical prototype)이 되고 그 빛에 조명된 모든 고난들, 아무 항변도 못하고 오직 당하기만 한 저 수동적 모든 고난은 또한 예수의 고난의 자리에 함께 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수난의 실체는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이 사람 자신이 하나님이 된다는 언명입니다. 우리는 사사기의 여성 이야기가 고대의 한 전설적인 이야기로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고 더구나 그것이 대속적 의미를 갖는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참으로 가부장적 구조의 폭력이 얼마나 불의한 것인지를 성서 안에서 소리치고 폭로해 줍니다. 이 이야기는 이 여인의 수난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도 변형된 가부장적 억압의 논리에 희생당하는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사야서의 고난의 종의 모습은 이 여인의 형편과 일치합니다. 예수의 고난은 대속 고난의 원형이며 그 빛 때문에 불의로 인해 당하는 모든 고난은 구속의 의미를 갖습니다.
사순절은 고난의 재해석을 하는 때입니다. 높은, 영광스러운 고난이 아니라 낮은 고난으로 신학적 반성을 해야 할 때입니다. 사사기의 성폭행의 고발은 낮은 고난으로 가장 힘없는 자에 대한 관심의 표명입니다. 이 수난주간에 이름 없이 당하는 모든 고난(구성조직의 자리에서, 가정, 사회, 국가, 노인, 어린이, 외국인 근로자)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경건 훈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한 모든 고난 자체에 대한 의미 부여가 필요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사실 오늘의 성서본문은 주일날 아침예배 설교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혀지기는 어려운 본문입니다. 여러분 중에 이 본문을 주일 아침예배에서 들은 분들은 거의 없을 줄 압니다. 본문에 나오는 인물이 힘이 없고 이름 없는 한 여인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 본문의 내용이 너무도 잔인한 폭력을 담고 있어서 다루기가 거북한 것이 사실입니다. 참으로 거룩한 문서인 성서에 이렇게 폭력적인 문서가 끼여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오늘의 본문은 두렵기까지 합니다. 사실 구약성서에는 폭력에 대한 기사가 많습니다. 성서 곳곳에 하나님이 전쟁을 주도하시는 전쟁으로 얼룩진 기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평화주의자들이나 여성들은(여성들은 폭력도 싫어하거니와 전쟁의 역사가 여성 억압과 깊이 관련된다고 하여) 구약성서에 대해 크게 거부감을 가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이 본문을 굳이 사순절 동안에 생각하려고 하는 것은 이 본문에서 고난 당하는 여성의 고난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이 여인이 당하는 고난의 특징은 우선 이 세상에서 가장 힘없는 자가 당하는 고난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다음에는 이 고난이, 어떤 목적이 있어 자발적이며 능동적으로 의식을 가진 사람이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아무런 목적도 의식도 없이 그저 폭력에 의해 당하고 있는 고난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고난이 인류 역사에 많이 있어 왔지만 우리는 이런 고난의 의미를 그렇게 신중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이런 고난은 참으로 불행한 고난이다 라거나, 설명할 수 없고 무어라 말할 수 없는 고난이라고 넘겨 버립니다. 문학작품들에서는 그것을 문학적으로 시적으로 여운을 남기면서 우리들에게 오히려 질문을 남겨 놓곤 했습니다. 케오르 큐우의 25시가 그렇고 특히 나치시대 동안의 유대인들의 학살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의 언어가 그랬습니다. 기독교 안의 신학에서도 이러한 고난에 대하여는 별로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사실 기독교의 핵심적인 주제의 하나는 고난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은 기독교의 정수이며 근거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닙니다. 고난을 통하여 구원을 얻는다는 이해는 성서와 신학에서 기본적인 것입니다. 물론 성서 안에는 다양한 고난의 형태들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욥의 고난, 룻의 고난 등등. 그러나 오늘 본문에 나오는 이 여인은 그러한 고난의 반열에 들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것은 신학자나 성서기자의 이해가 그 고난을 무관심하게 지나쳐 버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독교가 말하는 고난의 본질과 이 고난은 어떤 상관관계에 놓일 수 있는 것입니까? 그리고 이 고난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와 같은 물음을 가지고 본문을 좀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사사기는 이전에도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와서 거의 200년 동안 왕이 없이 지나던 기간의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17장에서 서곡을 울리면서 시작되어 21장에서 실제로 종결이 납니다. 이야기의 전개는 한 레위족의 남자가 첩을 두었는데 그와 불화가 생겼고, 그 첩이 친정으로 도망하자 그를 데려오려고 처갓집으로 가서 며칠을 묵으면서 장인을 설득하여 처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다가 생긴 일입니다. 가나안 땅에 속하는 여부스라는 마을에 왔을 때 이미 해가 저물었지만 이방 나라에 머물지 않으려고 길을 재촉하여 기브아라는 곳에 갔습니다. 거기서 한 노인의 영접을 받아 쉬고 있는데 그 마을의 무뢰배들이 와서 이 레위인을 내어놓으라고 횡포를 부립니다. 이에 집주인은 자기 처녀 딸을 줄 터이니 손님을 상하게 말라고 부탁하지만 막무가내로 무뢰배들이 듣지 않아 결국은 레위인이 자기 첩을 그들에게 내어주고 무뢰배들은 밤새 그 여인을 욕보인 후에 새벽에 그 집 앞 문지방에 놓고 갔습니다. 새벽에 레위인이 밖에 나와 그 여인을 보고 일어나 가자고 하지만 대답이 없자 그가 죽은 것을 알고 나귀에 태워 자기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는 이 여인을 열두 토막을 내어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보내면서 기브아의 만행을 폭로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부족들은 기브아와 전쟁을 일으키고 여러 번의 도전 끝에 결국 베냐민 지파의 600명 남자만 남기고 모두 죽입니다. 그리고는 그 지파의 존속을 위해 길르앗 야베스 지방의 처녀 400명을 뺏어 베냐민지파에게 주고 모자라는 200명은 실로의 처녀들을 뺏어서 공급하여 베냐민 지파가 존속되게 합니다. 우리는 이야기에서 고대사회가 얼마나 여성을 억압하였으며, 전쟁과 남성들의 이기심 때문에 여성들이 희생당하고 처참한 삶을 살았던 것을 엿보게 됩니다. 사실 이러한 여성의 문제를 지금까지 대부분의 남자 신학자들은 간과하였고, 오히려 이 본문은 창세기 19장의 소돔과 고모라성 이야기와 더불어 이스라엘의 이웃환대법이 얼마나 철저한가를 논증하는 예의 경우로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래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는 예수의 교훈이 바로 이러한 이웃환대법에 연유된다고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누구를 위한 이웃환대법인지를 묻지 않을 수 없는 성서해석입니다. 저는 오늘 이러한 여성관점의 토론을 이 본문에서 지속하려 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린바 대로 이 여인이 당한 고난의 형태에 주목하고, 우리가 오늘날 이해하고 있는 예수의 고난 이해와 관계지어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우리는 예수의 고난에 대한 우리들의 이해가 어떤 것인가 먼저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전통적으로 그리고 성서의 전반적 이해로는 그리스도 예수의 고난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죽음은 하나님께서 섭리하시고 계획하신 것으로,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어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게 하고 죽게 했으며, 이는 창세 전부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엡1:4) 한 것이라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의 고난은 첫째로 속량을 위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 4장 5절 그리고 고린도전서 6장 20절, 7장 23절에서는 그의 흘린 피의 대가로 우리가 구속받았다고 합니다. 둘째로 그것은 대리 고난입니다. 우리 대신 받으신 고난으로 베드로전서 2장 21-24절에 나와 있습니다. 셋째, 우리를 위한 희생의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10장 45절은 그 대표적 내용을 보여 줍니다. 그래서 유월절 어린양의 거룩한 희생으로 예수의 죽음은 신학적 해석을 가집니다. 그는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희생되셨다는 신앙입니다. 이러한 속량과 대리와 희생의 고난 이해는 사실 구약성서에서부터 비롯합니다. 구약성서 처음에는 대속의 개념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고난은 하나님의 분노의 표시이고 죄의 결과라고 보았으나, 나중에는 교육적인 도구로 생각하여 고난의 시련을 통해 인격이 도야되고 성숙해 진다는 것으로 고난에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포로기를 맞으면서 고난에 대한 이해는 급격히 새로운 해석을 낳습니다. 고난은 바로 대속적인 것이라는 이해입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이 계속 수난을 당하니까 단지 죄로만 그 이유를 설명하기에는 부족하였고, 결국 의인이 당하는 고난으로 신학적 이해를 넓히게 된 것입니다. 포로기는 그런 의미에서 이스라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차원을 갖게 한 시기였습니다. 그 대표적 내용이 이사야 53장에 나오는 고난받는 종의 노래입니다. 의인이 당하는 고난은 대신하는 고난으로, 곧 누구를 위하여 받는 고난이라는 사상입니다. 이 고난받는 종의 해석이 예수의 십자가 고난에 연결되었습니다. 사실 당시에 이스라엘은 여러 형태의 세상을 이끌 새로운 지도자를 추구하였는데, 그 가운데 이 고난의 종을 선택한 것은 어려운 선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영광스러운 모습의 메시아나 인자가 아닌 수난 당하는 종을 구주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초기의 이 수난사화 신학은 성만찬을 통하여 전승되었고, 교부 터툴리안에 의하여 대속적 고난의 신학으로 확립되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원죄를 가지고 모태에서 형성될 때 원죄가 유전되는데, 그리스도의 대속이 은혜로써 보상이 되어서 속죄된다는 교리를 확립하였습니다. 이런 신학의 고난 이해는 오늘까지 지속되고 사순절 특히 수난주간에는 그 절정을 이루는 듯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이 흘러 넘치는 환영을 보기도하고 또 십자가의 고통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고 감격해 합니다. 동시에 벌레만도 못한 자신을 위하여 그 귀한 예수께서 못 박혀 피 흘리셨다는 감격의 고백을 하며 찬송을 부릅니다.
그런데 이 대신하는 고난에 대한 이해는 우리에게는 감격적인 것이지만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고난 자체를 너무 별개로 독립시켜서 영광스럽게 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고난 이해는 자칫 중요한 부분을 간과하고 감상에 빠져서, 그리스도의 고난을 영광스럽게 생각하여 영광의 높은 고난으로 만들어서, 십자가는 후광을 두르고 황금빛으로 빛나며 금 목거리가 되어 걸립니다. 예수의 고난을 이렇게 이해하는 것은 그의 고난을 오직 종교적이고 개인적인 감정만을 중심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은 지극히 낮은 고난이었습니다. 즉 예수의 고난은 그의 지상에서의 삶과 관련시켜서 이해하여야만 참된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영광의 고난 이해는 진정한 고난이 더 이상은 없다는 아름답기만 한 고난입니다. 예수가 받은 고난은 저 밑바닥에 있는 소외되고 힘없는 자들을 대변하다가 당한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죄를 용서하기 위하여'라는 신학적 표현은, 예수의 말씀과 그의 활동과 관심의 중심 주제였던 하나님의 나라와는 별개로, 상관관계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나와도 상관이 없어집니다. 예수의 죽음은 그를 둘러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그의 생애의 결과이지 별도로 독립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인간의 비참한 현실을 표현할 뿐만 아니라, 그 안에 그 비참함을 지극히 사랑한 예수의 넘치는 사랑이 들어 있고, 그래서 죽도록 그들을 위하여 저항하는 저항의 십자가입니다. 예수가 빌라도와 또는 대제사장들과 적당히 타협하였다면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그는 그들의 주장에 맞서서 민중의 고난을 대신 지고 저항하였던 것입니다. 예수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여 성전종교를(그들을 경제적으로 또 생활 안에서 수탈하는) 거부하였고, 율법을 거부하였으며, 로마에 대하여 그 세력에 굴복하지 않는 정치적 모반으로 지목 받았기 때문에 고난 당한 것입니다. 그의 고난은 우리 죄를 위하여 라는 추상적 개념이 아니고 지금 우는 자, 지금 배고픈 자, 지금 가난한 자, 지금 애통하는 자들과 함께 하였기 때문에 당하게 된 고난이었습니다. 이것을 영적인 죄와 구원이라는 좁은 도식으로만 해석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다시 반복하지만 예수의 이 고난이 철저히 소외된 자들, 그 당시 사회구성의 중심부에서 밀려나고, 구성원의 경계 밖으로 밀려난 자들과 함께 하였기 때문에 당한 고난인 것을 우리는 기적사화를 통해서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병을 고쳐주신 예수의 기적은 온전하지 못한 이들을 온전한 인간으로 만들어서 사회의 구성원 안으로 들여놓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를 따르던, 그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거라사인 수로보니게 여인과 같은 이방인, 백부장의 신하, 여인들, 아이들, 그리고 유대 율법의 정결법에 걸리는 부정한 사람들 곧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혈루증 여인 등 치료 불가능하여 정결법에 의해 사회 공동체로부터 처절하게 소외당한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들을 고쳐서 그 사회 안으로 들여놓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모인 곳이 하나님 나라라고 합니다. 예수의 고난은 능동적이며 공동체의 고난 속에서 고통을 주는 지배체제에 굴복하지 않는 대속의 고난입니다.
물론 예수의 고난이 우리의 심리적 정신적 고통이나 도덕적이며 개인적인 죄와 상관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실존적 죄된 인간의 구원을 예수께서 감당해 주셨음을 믿습니다. 그러나 초기 예수의 수난사화를 전승시킨 집단은 바로 그 사회의 경계 밖으로 밀려났던 그룹이었고, 그들에게서는 예수의 고난이 결코 그러한 종교적 개인적인 해석으로만 머물 수 없음을 지적합니다. 예수의 고난은 영광의 고난이 아닌 낮은 고난이며 고난 자체에 목적을 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사사기의 여인 이야기로 돌아가 봅니다. 예수의 고난은 이렇듯 능동적이며 의도를 가졌고 의를 이루기 위한 것이지만 그 여인의 고난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정신대 여성의 고난이나 아우슈비츠의 유대인의 고난을 같이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수동적 희생, 도살당하는 양과 같은 그 희생은 어떻게 의미를 갖는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난 유대인 랍비 비젤은 그의 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친위대들이 유대인 남자 둘과 한 소년을 처형하였는데 남자 둘은 즉시 죽었으나 소년은 30분간 고통을 당하였다. 그 때 누군가 뒤에서 하나님은 어디 있는가라고 물었다. 나는 내 속에서 하나님은 저 소년과 같이 있다는 음성을 들었다.
우리는 어떻게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불의 때문에 당하는 모든 고통과 고난은 거룩한 구속적인 고난이라고 우리는 말해야 합니다. 예수의 수난은 역사적으로 독특하고 유일한 것으로 그리고 아무도 그런 고난을 같이 할 수 없는 대속적인 거룩한 고난으로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가 불의로 고통받는 그 고통을 대신한 것이라면, 고통을 당하는 모든 고난은 예수의 고난의 형상을 갖습니다. 예수의 고난은 역사적 원형(historical prototype)이 되고 그 빛에 조명된 모든 고난들, 아무 항변도 못하고 오직 당하기만 한 저 수동적 모든 고난은 또한 예수의 고난의 자리에 함께 서 있는 것입니다. 예수의 수난의 실체는 하나님에게 버림받은 이 사람 자신이 하나님이 된다는 언명입니다. 우리는 사사기의 여성 이야기가 고대의 한 전설적인 이야기로 오늘날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고 더구나 그것이 대속적 의미를 갖는다는 말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참으로 가부장적 구조의 폭력이 얼마나 불의한 것인지를 성서 안에서 소리치고 폭로해 줍니다. 이 이야기는 이 여인의 수난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도 변형된 가부장적 억압의 논리에 희생당하는 모든 이들을 대신하여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사야서의 고난의 종의 모습은 이 여인의 형편과 일치합니다. 예수의 고난은 대속 고난의 원형이며 그 빛 때문에 불의로 인해 당하는 모든 고난은 구속의 의미를 갖습니다.
사순절은 고난의 재해석을 하는 때입니다. 높은, 영광스러운 고난이 아니라 낮은 고난으로 신학적 반성을 해야 할 때입니다. 사사기의 성폭행의 고발은 낮은 고난으로 가장 힘없는 자에 대한 관심의 표명입니다. 이 수난주간에 이름 없이 당하는 모든 고난(구성조직의 자리에서, 가정, 사회, 국가, 노인, 어린이, 외국인 근로자)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 우리들이 해야 할 경건 훈련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러한 모든 고난 자체에 대한 의미 부여가 필요합니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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