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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라

사사기 김영봉 목사............... 조회 수 2916 추천 수 0 2011.04.30 23:51:29
.........
성경본문 : 삿6:11-16 
설교자 : 김영봉 목사 
참고 : 와싱톤한인교회 http://www.kumcgw.org 
2008.1.6 2008년도 새 해에 주신 말씀 1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라”(Go in the Strength You have)
--사사기 6:11-16

1.

Happy New Year! 새 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우리식의 새 해 인사를 교회 안에서 주고 받다 보면, “내가 기복주의자가 되었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복’이라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복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저절로 복이 굴러 오기를 기다리는 경우입니다. 또한 나 혼자만 잘 되려는 욕심을 가지거나, 혹은 받은 복을 다른 사람과 나눌 생각을 하지 않을 경우에 그 복에 탈이 납니다. 무엇이 복인지 알고, 그 복을 다룰 줄 알고, 또한 그 복을 받을 태도가 되어 있다면, 복을 바라는 것도 나쁘지 않고, 복을 빌어 주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지난 주일, 저는 “성경에는 성공이 없다”는 제목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성경에 ‘성공’이라는 단어도 별로 나오지 않고, 성공을 이루는 비결에 대해서는 더 더욱 침묵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씀 드렸습니다. 성경은 성공 대신 성실을 기대한다는 말씀도 드렸습니다. 하루 하루, 맡겨진 일에 성실하고 신실하고 진실한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삶의 방법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성공할 것을 꿈 꿀 것이 아니라, 성공과 실패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실하고 성실하고 진실하게 살아갈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주일이 지난 후, 이 말씀에 대해 계속 묵상해 보았습니다. 저 자신에게도 중요한 말씀이었기 때문입니다. 며칠 동안 이 말씀을 되새김질 하는데, 또 다른 사실을 하나 발견했습니다. 성경은 ‘성공하라!’고 말하지 않지만, ‘복 받으라!’ 혹은 ‘복 되어라!’는 말씀은 성경 안에 헤아릴 수 없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성공하는 것이나 복 받는 것이나 다를 바 없어 보이는데, 왜 성경은 ‘복’이라는 말을 고집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질문하며 생각하다 보니, 성공과 복은 아주 큰 차이가 있는 말임을 알겠습니다.

성공은 내가 분투하고 추구하여 얻는 것입니다. ‘성공했다’고 하는 말은 지극히 자기 중심적인 표현입니다. “내가 주인이고, 내가 모든 것을 이루었고, 그러므로 그 결과는 내 것이다”라는 사고 방식에 근거합니다. 그 사고 방식 안에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면, “내가 복을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 중심적인 표현입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주인이시며, 그분이 나를 통해 일을 이루셨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복에 대해 권리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게 됩니다. 내가 당당히 대가를 치르고 얻은 것이 아니라, 내게는 아무 공로 없으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그 복을 주셨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복을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게 됩니다.

제가 조금 전에 “새 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라고 말씀드린 것은 바로 이런 뜻에서 드린 말씀입니다. 그래서 다시 한 번 축원하겠습니다. 성도 여러분, 새 해 복 많이 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많은 복을 받아 그 복을 나누는, 그 복을 유통시키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2.

매 년 그렇게 해 왔듯, 올 해도 ‘새 해 맞이 새벽기도회’에서 나눈 말씀 중에서 몇 가지를 뽑아, “새 해에 주시는 말씀”이라는 단기 연속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매 년 이맘 때가 되면 제 마음에는 신비로운 기대감이 들어 찹니다. 올 해에는 어떤 말씀을 주실까 하는 기대감입니다. 지난 몇년간, 저는 특별 새벽기도회 기간 동안에도 년간 계획표에 따라 성경을 통독하는 순서 대로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런데도 그 때 그 때에 맞는 기가막힌 말씀을 제공해 주셨습니다. 올 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올 해에 읽게 된 말씀은 구약성경의 사사기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정착한 후로부터 하나의 독립 국가를 이루고 왕정 제도를 수립하기 전까지, ‘사사’라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부분적으로 다스렸습니다. 사사로 불리는 사람들은 왕보다는 통치의 규모가 작고, 장군보다는 권력의 규모가 약간 큰, 중간 형태의 권력자들이었습니다. 사사기는 이 시기에 일어났던 일부 사사들의 행적을 기록한 책입니다.

이번 ‘새 해 맞이 새벽기도회’는 기드온이라는 사사에 대해 읽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기드온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모르는 분들은 많겠지만, ‘기드온 성경’(Gideon Bible)에 대해서는 모르는 분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호텔에 머물러 본 사람들이라면, 호텔 방마다 한 권씩 비치되어 있는 성경책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것이 ‘기드온 협회’(The Gideons International)라는 단체에서 보급한 성경책입니다. 이 단체는 1899년에 미국에서 설립되었습니다. 사업차 여행을 하다가 우연히 만나 알게 된 세 사람의 사업가들이 이 협회를 창설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윌리엄 나이츠(William Knights)가 협회의 이름을 위해 기도한 후, “We shall be called Gideons.”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 이 협회의 이름이 ‘기드온 협회’가 되었습니다.

기드온이 살았던 당시, 이스라엘은 미디안 사람들에게 점령당해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미디안 사람들의 폭행이 얼마나 심했던지, 이스라엘 사람들은 차라리 산에 있는 동굴과 요새로 피신해 살기를 선택할 정도였습니다. 씨앗을 심어 놓고 싹을 내고 잎을 피울 즈음이면 미디안 사람들이 쳐들어와 황폐하게 만들어 놓고, 그나마 살아남은 곡식들이 영글어 갈 즈음이면 다시 나타나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사라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르던 가축까지 모두 끌고 가거나 도살해 버렸습니다. 도대체 살 수 없도록 괴롭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힘 센 장사 기드온은 자기 집에서 숨어서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힘썼습니다. 포도주 틀에서 몰래 밀이삭을 타작하고 있었다는 대목은 흥미로와 보입니다. 밀 이삭을 타작할 즈음이면, 포도 수확철은 아직도 멀었습니다. 그러니 포도주 틀 뒤에서 일하고 있는 기드온의 모습을 미디안 관리가 보았다고 칩시다. 그가 무슨 상상을 했겠습니까? “아, 포도주 철을 대비해 포도주 틀을 손 보고 있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기드온은 그렇게 하루 하루 연명하고 있었습니다. 기드온만이 아니라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 그렇게 살고 있었습니다.

3.

미디안 백성들의 폭행 때문에 살 수 없게 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어 구원을 호소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호소에 응답하기 위해 기드온을 부르셨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기드온을 방문하여 말합니다. “힘센 장사야, 주님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12절). 그러자 기드온은 기다렸다는 듯이 마음에 품고 있던 분노를 하나님 앞에 쏟아 놓습니다. 13절을 보면, 기드온의 대답이 나옵니다. 그 대답을 보면, 기드온은 오래도록 이 문제를 마음에 품고 고민해 왔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의 논지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다는데, 그렇다면 도대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데, 어찌 선택된 백성이 이 지경에 이르도록 그냥 두시는가? 과거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행하신 이적 이야기들을 많이 들었는데, 그 모든 이야기들은 뭐란 말인가? 지금 상황으로 보건대,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하신다면 이스라엘을 버리셨거나, 둘 중 하나가 아닐까? 그 외에 어찌 달리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지금 이 상황에서 하나님을 계속 믿는다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란 말인가?”

여러분, 기드온의 이 항변이 왠지 귀에 익지 않습니까? 어디서 많이 들어본 것 같지 않습니까? 우리의 입으로 가끔 내뱉었던 말과 유사하지 않습니까? 백방의 노력을 다 해 보아도 회복되지 않는 질병을 놓고, 혹은 풀 길이 없는 재정 문제 앞에서, 혹은 극복하기 힘 든 생활상의 문제를 두고 기도하면서, 혹은 전혀 기대하지 않은 사고를 만나고 나서, 우리도 이런 항변을 쏟아놓았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면 불가능한 일이없다고 배웠는데, 도대체 그 하나님은 어디 계시는가? 하나님이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렇다면 그분은 나를 버리셨다는 말인가? 성경에서 읽는 혹은 그 동안 들어온 그 많은 간증들은 무엇이란 말인가? 왜 나는 하나님의 능력을 힘 입지 못하고 있는가?

어디 그 뿐입니까? 우리는 주변에서 일어나는 참극을 보고 기드온과 같은 질문에 봉착하게 됩니다. 악한 사람의 폭행으로 인해 연약하고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피해를 당하는 것을 볼 때, 혹은 천재지변으로 인해 아무 죄도 없는 사람들이 무참히 희생 당할 때, 혹은 주일 예배 시간에 갑자기 총을 들고 나타난 괴한에 의해 하나님을 찬양하던 교인들이 희생 당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우리는 기드온과 같은 질문 앞에 마주 섭니다. 하나님은 정말 계신가?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에서 활동하고 계시다는 것이 맞는 말인가? 하나님은 정말 정의로우신 분인가? 차라리 하나님을 도외시하고 생각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 아닌가?

기드온의 항변은 우리 귀에는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들립니다. 이 질문들에 대해 누군가 속 시원히 대답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니, 천사는 기드온의 질문에 대해서는 일언 반구 답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천사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라. 내가 친히 너를 보낸다’(14절).

4.

이 지점에서 우리는 잠시 머물러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천사는 기드온의 항변에 대해 무시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말씀 안에 하나님의 답변이 들어 있습니다.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라. 내가 친히 너를 보낸다.” 얼를 들으면 동문서답같지만, 실은 이것이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제가 언젠가 한 번 인용한 적이 있었던 윌리엄 슬로운 코핀(William Sloane Coffine)의 말이 생각납니다. 우리가 비극적인 일을 앞에 두고 하늘을 향해 “What are you doing up there, God?”(“하나님, 그 위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물을 때, 하나님은 아래를 향해서 “What are you doing down there, my children?”(“내 자녀들아, 너희는 그 아래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는 겁니다. 즉, 우리는 이 땅에서 일어나는 비극에 대해 하나님에게 탓을 돌리지만, 실은 많은 경우에 그것은 우리의 책임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그 탓을 하나님께 돌리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잘못이 전혀 없는데도 불구하고 고통을 당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만, 그 때에도 엄밀하게 따져 보면 그 탓을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떤 아이가 혼자서 달려가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을 때, 너무 너무 아파서 화가 나는데, 아무리 돌아 보아도 화를 풀 곳이 없어서, 그 자리에 주져 앉아 웁니다. 한 참 울고 있는데 옆에 개구리가 지나갑니다. 그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그 개구리를 잡습니다. 그리고는 애꿎은 그 생물에게 분풀이를 합니다. 그림이 그려지십니까? 이렇듯, 누구든 어렵고 황당하고 가슴 아픈 일을 당할 때, 그 분노를 풀 대상이 필요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애꿋게 당하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믿는 사람들도 자주 하나님을 탓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그런 상황을 만나게 되면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는 하나님을 비난합니다.

그러나 하늘이 알고 땅이 압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님을 말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저주를 퍼붓는 사람 자신도 그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인정합니다. 자신이 지금 엉뚱한 사람에게 화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달리 그 분노를 표출할 사람이 없어서 하나님을 택한 것뿐입니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라고 통곡하며 눈물을 흐리는 사람들도 마음 속에서는 하나님에게 그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님을 인정합니다.

천재지변이 일어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자연에 부여하신 질서 때문이거나 혹은 인간의 무분별한 오염과 착취로 인해 생기는 일입니다. 사업에 문제가 생기고, 재정적인 어려움에 빠지고,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은 잘못된 사회 구조 때문에 생기기도 하고, 악하게 사는 사람들의 죄 때문에 일어나기도 하며, 또 때로는 우리 자신의 잘못에 의해 생기기도 합니다. 질병이 생기는 것은 우리 환경의 오염과 파괴로 인해 우리 몸에 생긴 부작용이거나, 잘못된 생활 습관이 불러온 화거나 혹은 우리의 지나친 욕심으로 인해 생긴 남용의 결과입니다.

우리가 당하는 악과 고난과 환난 중에 실제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셔서 일어나는 일은 별로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그러한 불행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시기 위해 양심의 소리를 통해, 성경 말씀을 통해, 설교 말씀을 통해 혹은 믿음의 형제 자매들의 음성을 통해 말씀해 주시고 경고해 주십니다. 그런 조언과 충고와 경고를 무시하고 살다가 화를 당하는 것입니다. 그래 놓고도,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 “하나님이 저에게 어찌 이럴 수가 있습니까?”라고 항변합니다. 그렇게 항변하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네가 나에게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라고 반문하고 싶으실 것입니다.

5.

그러므로 기드온에게 주신 천사의 말씀, 즉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라. 내가 친히 너를 보낸다”는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의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를 정확히 지적해 줍니다. 이 말씀은 이렇게 풀어 볼 수 있습니다.

"힘센 용사 기드온아, 너는 너에게 주어진 그 힘을 가지고 무엇을 했느냐? 나는 너에게 용사가 될만한 힘과 능력을 주었는데, 너는 그 힘을 너 하나 잘 먹고 잘 사는 일에만 사용하고 있지 않느냐? 비겁하게 포도주 틀 뒤에 숨어서 타작이나 하고 있는 네가, 도대체 누구를 탓하고 있는거냐? 모세가 일으켰던 기적을 보고 싶으냐? 지금 모세처럼 나서서 내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는 사람이 있느냐? 너같은 사람도 숨어서 일신상의 안일을 위해 살고 있는데, 누가 나선다는 말이냐?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는데, 내가 천사라도 보내서 전쟁을 하라는 말이냐? 네가 정말 네 동족의 아픔에 대해 그렇게 마음 아파 한다면, 네가 나서라. 내가 너에게 준 그 힘만 가져도 충분하다. 그 힘을 가지고 나서라.”

기드온은 하나님의 뜻을 단박에 알아 차렸습니다. 아니, 그 자신도 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헌신하고 희생해야 하는데, 모두 다 숨어서 제 일신상의 안일만을 꾀하고 있는 것이 문제인 것을, 기드온도 알고 있었습니다. 모두 다, 쥐 죽은 듯이 숨어서 지냈던 것입니다. 기드온 자신도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 그 허점을 파고 드셨습니다. “네가 나서라”는 말씀에 대해 기드온은 갑자기 할 말이 없어졌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다른 핑게를 댑니다. 자신의 가문은 별 볼 일 없는 므낫세 지파 가운데서도 가장 약한 가문이며, 그 가문 안에서도 자기 집안은 가장 보잘 것 없는 집안이고, 자신은 그 자식 중에서도 막내라는 겁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일을 위해 나설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겁니다. 실은, 기드온은 강한 신체와 용맹성을 겸비한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의 부름 앞에서 뒤로 물러섭니다. 누군가 하나님을 위해 나설 사람이 있어야 한다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자신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다시금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을 것이다”(16절)라고 확증해 주시면서 기드온을 포도주 틀 앞으로 끌어 내십니다.

6.

2008년 새 해에 이 이야기를 읽을 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하여라”고 하신 명령이 바로 저에게 그리고 여러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처럼 들렸습니다. 우리는 포도주 틀 뒤에 숨어서 곡식을 타작하고 있는 기드온과 별로 다를 바 없이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닙니까? 나의 관심은 오직 나와 내 가족에만 묶여 있는 것은 아닙니까? 나와 내 가족이 편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상관 없는 것처럼 살고 있는 것 아닙니까? 우리는 과연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힘이 얼마나 큰지 알고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얼마나 큰 가능성을 숨겨 두셨는지 까맣게 모르는 채, 개인적인 안락만을 추구하며 살아온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능력과 은사와 물질을 나와 내 가족만을 위해 사용해 온 것이 아닙니까?

때로 주변에서 일어나는 재난과 사고와 고난들을 보고는 “신이 존재한다면 어찌 저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따져 묻기는 즐기지만, 정작 그 아픔을 줄이기 위해 한 일은 무엇입니까? 혹시나 강 건너 불을 보듯이 한가한 질문을 하기만 좋아했지, 그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고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것이 있습니까? 지구 온난화라는 불편한 진실(Inconvenient Truth)에 대해 토론하기는 좋아했지만, 그것을 위해 무엇 하나라도 행하고 있습니까? 각박해지는 세태에 대해 한탄하고 비판하기는 좋아하지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할 일을 찾아 보았는지요?

아니, 좀 더 좁게 생각해 보십시다. 밖에 있다가 집에 들어올 때마다 “집안 꼴이 이게 뭐냐?”며 짜증내기는 잘하지만, 집안 꼴을 바꾸기 위해 무엇을 했습니까? 한인 이민 사회를 두고 비판하는 분들, 참 많습니다. 그런데 정작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뭐 하나라도 희생하고 봉사한 것이 있습니까? 한 편에는 방관적인 비판자들이 있고, 다른 한 편에는 이권과 명예를 위해 분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둘만 가지고 안된다는 것, 모두가 다 압니다. 그 둘 사이에 적극적인 사랑을 가지고 희생하며 헌신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들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교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담임목사로서 저의 바램은 교회의 모든 일들이 교우들의 마음에 흡족한 기쁨을 안겨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을 때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늘 부족함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 부족함을 발견했을 때, “교회가 하는 일이 뭐 이러냐?”라고 비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필요한 것은 그렇게 문제 의식을 느끼시는 분이 직접 그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서는 것입니다. 주차 문제가 짜증나고 답답하다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나서서 헌신하는 분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를 제기하고 비판하는 것도 때로 도움이 됩니다. 하지만 진실로 필요한 것은 문제를 발견했을 때 말 없이 나서서 그 문제가 해결되도록 헌신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돌아 보니, 우리 모두가 기드온을 참 많이도 닮지 않았습니까? 우리 자신에게 일어난 일이든, 우리 주변에 일어난 일이든,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데, 우리는 개인적인 안일을 포기하기 싫어서 포도주 틀 뒤에 숨어서 타작이나 하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그러면서 하나님을 향해 무엇하고 있느냐고 항의했던 것 아닙니까? 내가 능히 할 수 있는 일을 회피하면서,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하고 탓을 하고 있었던 것 아닙니까? 나의 문제가, 우리 가정의 문제가, 우리 사회의 문제가, 우리 교회의 문제가 그리고 우리 국가의 문제가 모두 다른 사람에게 원인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바로 나에게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닙니까?

7.

2008년 새 해에 주시는 첫 번째 말씀, 즉 “너에게 있는 그 힘을 가지고 가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나 자신만이 아니라 이웃과 사회와 교회를 보라고 요청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 얼마나 큰지를 보게 하며, 또한 그 기대를 위해 우리에게 이미 주신 능력과 은사가 얼마나 큰지를 깨닫게 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문제 해결을 위해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를 찾고, 그 일을 위해 나설 것을 요청합니다. 내 가정을 위해, 내 교회를 위해, 내 사회를 위해, 내 국가를 위해 내가 할 일을 찾아 헌신하고 봉사하고 희생할 것을 요청합니다. 포도주 틀 뒤에서 걸어 나올 것을 요청합니다. 개인적인 관심사로부터 걸어 나오기를 요청합니다. 냉소적 비판자의 모습을 떨쳐 버리기를 요청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능력과 은사와 물질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헌신하도록 요청합니다.

그것이 우리 모두를 복되게 하는 길입니다. 그같은 헌신과 희생과 봉사를 마다한 채, 자신의 포도주 틀 뒤에 숨어 자기 자신의 안일만을 위하면서 복이 굴러 들어오기를 바라는 것이 기복주의입니다. “새 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를 주고 받으면서 그같은 ‘눈 먼 복’이 굴러 들어와 주기를 기대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하나님은 그런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그런 복을 받으면 사람은 타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복처럼 보이지만 실은 화입니다. 진정한 복은 자신의 포도주 틀 밖으로 걸어 나와 자신에게 주어진 능력과 은사와 물질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도록 희생하고 봉사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그 사회의 복덩이가 되라고 불러 내셨습니다. 그 부름이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회의 복덩이가 되도록 나설 사람을 찾습니다. 자신의 이익과 안일보다는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 희생하며 헌신할 줄 아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그런 사람들이 가정에도 필요하고, 교회에도 필요하며, 직장에서도 필요하고, 우리 사회에서도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사람들이 나서서 이렇게 살아주기를 기대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이 나서서 이렇게 살아주기를 기대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처럼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이요 희망이 되었듯, 그분을 따라 매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야만 우리 가정이, 우리 교회가 그리고 우리 사회가 희망을 말할 수 있습니다.

존경하는 성도 여러분, 이 부름 앞에서 어찌 하시겠습니까?

오늘도 “내가 누구를 보낼까?” 물으시며
포도주 틀 밖으로 걸어나올 사람을 찾으시는 주님,
저희가 여기 있습니다.
저희를 불러 주소서.
저희를 꺼내 주소서.
저희에게 주신 능력과 은사와 물질로써
주님의 뜻을 위해 일하도록
저희를 이끌어 주소서.
저희가 매일 십자가를 지고 걸어감으로
우리 가정의,
우리 교회의,
우리 사회의 복덩이가 되도록 도우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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