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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삿6:11-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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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신 목사 |
참고 : | http://www.whyjesusonly.com/ |
“여호와의 사자가 아비에셀 사람 요아스에게 속한 오브라에 이르러 상수리나무 아래에 앉으니라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나의 주여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면 어찌하여 이 모든 일이 우리에게 미쳤나이까 또 우리 열조가 일찍 우리에게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이 아니냐 한 그 모든 이적이 어디 있나이까 이제 여호와께서 우리를 버리사 미디안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여호와께서 그를 돌아보사 가라사대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삿6:11-13)
믿음과 담력
한국 신자의 장점이자 단점은 잘 믿으면 못 이룰 일 없다는 식으로 믿음을 너무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따져 보아도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아 보이니 큰일이다. 우선 장점은 아무리 큰 문제가 생겨도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의뢰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그런 기도가 응답이 되면 믿음이 자라고 역으로 은혜를 더 받기 위해서라도 믿음을 키울 수 있는 온갖 방안을 강구해 노력하게 된다.
단점은 믿음을 자신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거나 장래 계획을 더 크게 성취할 수 있는 수단으로만 전락 시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또 현실적인 어떤 문제가 생기거나 조금만 영적인 침체가 와도 무조건 믿음이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간주한다. 성도간의 권면이나 목회 상담의 결론은 매번 믿음이 약해졌으니 기도하고 말씀보아 열심히 믿음을 키우라고 내린다.
한 마디로 믿음이 만병통치약이자 자칫 주님이 해야 할 역할마저 다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막상 믿음을 키우려 들어도 사실상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기도하고 말씀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조금 강해지는 것 같다가도 다시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도로 나무아미타불이 된다. 그래서 믿음을 의지에 힘입은 결단력과 지구력의 합체로 생각한다. 어떤 처지와 사건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는 담력이 믿음의 대체어가 되었다.
그리고 그 대표적 성경의 예로 믿음의 큰 용사 기드온을 든다. 그는 담력의 화신이자 믿음이 큰 위대한 용사로 가르쳐져 왔다.. 그렇게 꼽는 이유는 겨우 삼백 명의 정예부대로 13만5천의 대군을 상대해 승리했다는 사실 하나에 두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야말로 대표적인 소심증 환자였지 담력과는 거리가 멀다.
바로 이 믿음만능주의가 성경해석에도 잘못 적용된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인간의 담력, 용기, 의지로 해석될 여지는 전혀 없다. 그런 요소들은 어디까지나 믿음이 도출해낸 결과적 모습일 뿐이지 믿음 자체는 아니다.
말하자면 예배, 기도, 찬양은 믿음으로 행한 결과적 모습이지 그것 자체가 믿음이 아닌 것과 같다. 믿음이 좋은 자는 예배, 기도, 찬양에 능할 수 있지만 그런 행위에 능하다고 해서 꼭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담력, 용기, 의지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인 예배, 기도, 찬양과는 달리 인간의 내면에서 그것도 믿음과 거의 동시에 이뤄지는 눈에 안 보이는 작용 내지 활동이기 때문에 믿음과 그 구분을 명확히 짓지 못하고 서로 혼동하는 것이다.
요컨대 믿음의 사람이 담력과 용기의 사람으로 변할 수는 있어도 담력과 용기가 있다고 다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는 너무나도 간단한 진리를 많은 신자들이 자주 놓친다는 것이다. 신자가 키워야 할 것은 믿음이지 용기와 담력과 의지가 아니다.
하나님에게 사사로 세움을 받은 때부터 죽을 때까지 기드온의 모든 행적은 그가 큰 담력을 가진 위대한 용사였다는 전통적인 가르침이 틀렸다는 사실만 증명할 뿐이다. 성경 기록을 통해 구체적으로 따져 보자.
여호와의 사자에게 거짓말(?)한 기드온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삿6:11) 당시나 지금이나 타작은 원래 사방이 탁 트인 들판에서 하는 법이다. 겨와 알곡을 잘 분리할 수 있도록 통풍이 잘되어야 하고 또 타작용 기계나 황소 같은 가축을 사용하려면 넓어야 한다. 그런데도 그는 작은 욕탕 크기로 땅을 파서 만들어진 포도주 틀 즉, 사방이 막혀 외부에선 보이지 않는 곳에 들어가서 타작했다. 문자 그대로 미디안 사람에게 들킬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바로 그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큰 용사”(12절)라고 부르면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14절)는 사명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15절)라고 사양했다. 그래서 사자가 여호아가 함께 할 것이므로 두려워 말라고 했고 그는 바로 당신이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17절)라고 요구했다. 그가 바친 예물을 반석 위에 두자 사자의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21절)하게 되었다.
그러자 기드온은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로되 스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22절)라고 크게 염려했다. 당시 사람들은 여호와를 직접 대면하면 죽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사사로 세우고 죽일 리는 없지 않는가? 당연히 “여호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23절)고 달랬다.
이처럼 하나님께 소명을 받는 과정 동안에 그는 한 결 같이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여호와의 사자가 두려워말라고 자꾸 안돈시킨 것 자체가 바로 그러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지 않는가?
그런데 바로 그날 밤에 비록 하나님의 명을 따른 것이지만 기드온은 아비와 성읍사람들이 섬기는 바알의 단을 찍고 그 나무로 번제를 드리는 놀라운 일을 감행했다. 언뜻 보기에는 대단히 담대한 행동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아비의 가족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6:27)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소심한 기드온의 담력을 키우고 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 일을 명했다. 그의 아비의 집에 바알의 단이 있었고 그가 종 열을 데리고 가서 그 일을 행했다. 그렇다면 그의 집은 그가 여호와 사자에게 말한 것 같이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한 집이 아니라 오히려 유력한 가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또 아비의 가족을 염려해 밤중에 행했다고 한다. 형제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드온이 타작을 하고 있었고 종 열을 아주 비상한 일에 동원시켰으니 형제들 중에 상당한 어쩌면 장남의 위치였을 수 있다. 그가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라”고 말한 것 또한 그리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사자에게 단순히 겸손을 표한 정도를 넘어 거짓말을 한 셈이다. 그만큼 그는 사사로 세움 받는 일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하나님으로선 본격적으로 사사의 역할을 담당하기 전에 기드온이 미디안에 대해 갖고 있는 공포심을 덜어 줄 필요가 있었다. 미디안에 대한 공포가 그 군사력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고대 사람들의 사상에 의하면 오히려 그들의 신을 더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을 만들어 섬긴 이유도 다산과 풍요의 가나안 신들이 현실적 문제에선 여호와보다 더 형통케 해주는 것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또 미디안이 무력으로 자기들을 제압할 수 있는 배경에는 그들 신의 힘이 여호와보다 더 크게 작동되었다고 간주했다.
따라서 이제 미디안과 싸우러 갈 용사로 세우려면 그들 신에 대한 공포심부터 먼저 제거해야 했다. 백주 대낮에 바알과 아세라의 신상을 도끼로 찍어 내려도 아무도 그 자리에서 벌을 받거나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드온부터 확인시키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기드온은 밤중에 도적고양이처럼 그것도 평소에 만만하게 부리던 자기 종들을 시켜 살짝 해치운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제대로 성취되지 못했다. 단지 기드온이 어쨌든 당신의 명령에 순종하려는 태도만 확인한 셈이었다. 대신에 성읍사람들이 밤중에 일어난 사태를 보고 놀라고 두려워 기드온을 끌어내어 죽이려 몰려들었을 때에 기드온의 아비 요아스의 믿음이 더 돋보였다.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 산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쟁론하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경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는 자는 이 아침에 죽음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찐대 그 단을 훼파하였은즉 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 하니라.”(6:11) 너희가 바알이 가만있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기드온을 죽여 제물로 삼으려 하는데 정말 바알이 진노하였고 또 그럴 능력이 있다면 당장에 그를 직접 죽일 것이고 또 그래야 하지 않느냐고 응수했다. 요아스로선 최소한 바알이 그런 능력이 없는 신이라는 것을 믿었거나 그럴 능력이 정말 있는지 두고 보자고 말한 셈이다.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셨던 목적은 기드온이 아닌 그 아비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바알과 아세라의 신상이 찍혀 불에 태워져도 아무 피해가 없음을 시간이 지나면 기드온을 비롯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연히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장수에 그 부하
우상은 나무로 만든 조각상에 불과한지라 찍혀져 불살라졌지만 아무 일이 생기지 않았음은 너무나 당연했다. 기드온도 밤중에 조심스레 그 일을 결행할 때는 두려웠겠지만 차츰 그 신들이 아무 힘이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럼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큰 용사로 변모된 것일까? 아니다. 여전히 그런 낌새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미디안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각 부족에게 통지를 하여 저항군을 결성했다. 그러나 그 직후 또 다시 이 전쟁에 승리할지 여부를 알려달라고 하나님에게 표징을 두 번씩이나 구했다. 처음에는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고 이슬이 양털만 젖게 하고 사방 마당은 마르게 해 달라고 했고, 그 다음에는 정반대로 양털만 마르고 사방 마당이 젖게 해달고 했다.
넓은 타작마당을 두고서 엉뚱하게 좁은 포도주 틀에 숨어서 추수하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하나님의 징표를 구하기 위해선 가능한 더 넓은 곳을 골랐다. 협소한 포도주 틀에서 그런 표징이 나타나봐야 자칫 우연의 일치로 간주될 수 있고 또 크게 위로도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떡하든 더 확실하고 신비한 모습의 표징을 그것도 두 번씩이나 구할 만큼 그는 그 전쟁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 표징은 요즘 식으로 비유하자면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위에만 먹구름이 끼어 비가 내리고 나머지는 마른하늘이 되게 하고 또 그 정반대로 차위만 파란 하늘이 되고 나머지는 폭풍우가 몰아치게 하라는 요구다. 표징을 구하되 너무나 세밀하게 구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감히 그런 아이디어를 낼 수조차 없는 테스트였다. 그것도 이미 우상들을 찍어 불태워도 아무 일이 생기지 않았음을 확인한 후에 말이다. 그 이전에도 단에서 불이 나와 자기가 바친 제물을 태웠고 또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도 죽지 않았음을 경험한 그가 말이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랬다.
물론 그랬다고 해서 그의 믿음 자체가 없어지거나 크게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명령대로 우상을 제거했고 또 미디안 대적이 쳐들어오자 동족의 앞장에 서기로 헌신하여 군대 소집의 절차까지 마쳤다. 그러나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다 모여 요단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쳤다는 소식을 듣자 다시 의기소침해진 것이다. 예의 소심증이 되살아난 것이다.
한 뭉치 밖에 안 되는 양털을 드넓은 타작마당에 놓고 하나님의 표징을 구한 것은 미디안의 대군 앞에 선 자신들의 미약한 모습을 상징했다. 과연 하나님이 그런 미약한 이스라엘을 구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두 번이나 나름대로 테스트 해보려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무려 다섯 번이나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체험한 후에야 미디안과 전쟁을 치러 나간 셈이다. 구약의 기록에 전쟁을 치르기도 전에 하나님이 당신의 권능을 가시적인 표징으로 이렇게 많이 보여준 예는 없다. 그만큼 기드온이 겁쟁이였다는 반증이다.
어쨌든 모레 산 앞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과 미디안이 마침내 마주 섰다. 그런데 그 모인 숫자가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았다. 미디안은 13만5천 명(8:10)인데 반해 이스라엘은 겨우 3만2천(7:3)명이었다. 최소 4:1의 중과부적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 아주 열세인 이스라엘더러 오히려 군대 숫자가 너무 많으니 돌려보내라고 했다. 두려워서 떠는 자부터 먼저 그렇게 하라고 했다. 네 배나 큰 대적의 진용을 보고서 그 위용에 질리기 않을 자 어디 있겠는가? 시작하기 전부터 해보나 마나한 싸움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거의 포기할 단계까지 이르렀지 않겠는가? 무려 2/3가 넘는 사람이 되돌아 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최선을 다해 싸우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믿지 못할 자는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라고 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미리부터 겁에 질린 군사들을 데리고는 제대로 권능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드온에게 너를 좇는 백성이 많다고 말한 것은 인간의 상식과 이해 범위를 너무 넘어서는 말씀이었다.
그러자 이제 겨우 만 명만 남았다. 갑자기 4:1에서 13.5:1이 되었다. 가뜩이나 비교도 안 되었던 군사력의 격차가 이전에 비해서 세 배나 더 벌어졌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아직도 군사가 많다고 말씀하셨다. 이상하지 않는가? 인간 상식으로는 너무 적은 데도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왜 자꾸 많다는 말씀을 반복하셨을까?
심중으로는 틀림없이 함께 떨고 있었을 그를 하나님은 이렇게 재촉하고 위로하고 권면하려 하신 것이다. “양털 표징 사건을 기억해보라. 그 넓은 타작마당에서 오직 양털만 젖게도 했고 반대로 마르게도 하지 않더냐? 나의 그런 권능을 진정으로 믿느냐? 그렇다면 내가 많다고 하면 많은 것이지 않느냐? 숫자가 많아 강해 보이는 저들 군대보다 하나님인 내가 함께 하는 너희 군대가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진짜 믿을 수 있느냐?”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정예군으로 선발한 기준은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군사를 물가로 데려가 물을 손으로 움켜 혀로 핥는 자만 뽑고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는 돌려보내라고 했다. 전자는 사방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을 마시는 세심한 성격을 뜻하고 후자는 그런 대비는 전혀 없이 우선 갈증부터 채우는 성격을 의미한다.
지금 13:1의 전투를 벌이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물불을 전혀 가리지 않고 용맹스럽게 싸우는 자를 뽑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앞뒤 사정을 꼼꼼히 다 따져보는 자들을 싸우라고 내보면 어떻게 되겠는가? 원래 소심한 성격의 사람은 자기 계산으로 합리적 결론이 서지 않으면 좀체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법이다. 누가 봐도 아예 승부가 갈린 전투라 싸울 엄두도 내지 않을 것 아닌가? 이들은 어쩌면 처음에 두려워하는 자들은 돌아가라고 했을 때에 남들의 눈치가 보여 선뜻 돌아가지도 못한 진짜로 소심한 자들이었을 수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겁쟁이 대장 기드온 밑에 최고 겁쟁이 군사들로만 그것도 겨우 3백 명만 채운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추종자들은 지도자를 닮기 마련이다. 또 지도자도 자기와 닮은 부하라야 비교적 쉽게 잘 통솔할 수 있다. 서로의 성격과 사정을 잘 이해하고 말이 통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겁쟁이 기드온을 안돈시킬 목적으로 군사를 뽑은 것이다. 만약 우락부락하고 용맹이 넘치는 부하를 선발했다면 기드온이 통솔하기도 힘들고 스스로 주눅이 들어 기강이 안 설 것까지 하나님은 배려한 것이다.
겁쟁이들의 야간 전투
기드온의 미디안 전투 사건은 큰 용사들의 위대한 영웅담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심한 대장과 똑 같이 소심한 부하들이 모여서 세계 전쟁사에 유례없는 특이한 방식으로 싸운 아주 이상한 전투였다. 그 승리의 전적 또한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대승이었다. 겨우 삼백 명이 13만 5천명을 상대로 이겼으니 일당백(一當百)이 아니라 일당 450으로 싸워 이겼다. 일당백도 원자탄 같은 가공할 무기가 있다면 모를까 공상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지 실제로는 있을 수 없다.
바로 그렇다. 이 전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사령관을 뽑고 장수를 선발하여 당신의 방식으로만 전투한 것이다. 원자탄보다 더 위대하신 하나님이 원자탄 투하 이상의 승리를 이스라엘에게 안겨 주었다. 그런데 그 전투의 도구는 가공할 최신 무기가 아니라 너무나 원시적이었다. 하늘에서 레이저 광선 같은 번개나 원자탄 같은 우레를 퍼부어 이기게 한 것이 아니었다. “삼백 명을 세대로 나누고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춘”(7:16) 것이 무장의 전부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드온더러 본격적 전투에 앞서 우선 적진을 탐지해보라고 했다.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를 데리고 그 진으로 내려가서 그들의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능히 내려가서 그 진을 치리라.”(7:10,11) 또 다시 하나님이 먼저 그에게 용기를 일깨워주려 했던 것이다.
그가 적진에서 들은 말은 당연히 승리의 예보였다. 기드온이 전투 중에도 더 확실한 승리의 표징을 보기 원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셨던 것이다. “기드온이 그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 동무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려뜨리니 곧 쓰러지더라 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7:13,14)
하나님이 소심한 기드온을 위하여 이 얼마나 세심하게 배려했는가? 그분이 우리를 돌보시는 사랑에는 한도가 없다. 그 세심하고도 완전한 사랑 앞에 인간의 의지, 담력, 용기는커녕 믿음조차 설 자리라고는 아예 없다. 미디안 군사가 꿈을 꾸게 한 것, 또 그 꿈을 정확히 해몽하게 한 것, 기드온을 하필이면 바로 그 장막 곁으로 인도하여 그 말을 다 듣게 한 것 등을 보라. 전투를 앞두고 두려움에 떠는 그를 안돈시키고 담대하게 만들려고 도리어 하나님이 눈물겨운(?) 노력을 했지 않는가?
소심한 그가 그런 이상한 무장을 할 리가 없다. 하나님께 명을 받았거나 지혜를 얻었을 것이다. 나팔을 불고 빈 항아리를 깨면서 기드온의 칼이라고 외치기만 했다. 한밤중에 큰 소리와 밝은 불빛에 갑자기 혼비백산한 미디안 대군이 칼날로 아군끼리 서로 죽이는 참극이 벌어졌다. 기드온은 가만히 앉아서 손쉬운 승리를 줍기만 했다.
나팔, 횃불, 항아리, 고함 모두가 일차적으로는 적군에게 대군이 쳐들어 온 것으로 혼동하게 하려는 고도의 작전이었다. 밝은 불빛도 잠결에 갑자기 일어난 사람들에게는 혼동을 더 불러일으키는 반면에 어둠 속에서 의도적으로 불을 밝힌 자로선 상대의 움직임을 더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하면 나팔 불고 고함을 지르며 횃불을 흔들면 상대보다 오히려 자기들이 먼저 알게 모르게 힘을 얻고 용기백배하게 되는 이점도 많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하달한 전략도 겁쟁이들을 일관되게 감안한 것이었다. 한밤중에 도적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접근하게 했다.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찍을 때에 그와 그 종들이 취한 모습 그대로 답습하게 했다. 하나님은 겁쟁이는 겁쟁이인 상태로 그대로 두고 당신의 목적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달성했다.
군대를 처음 조직할 때에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自矜)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결말지어졌다. 하나님께서 시키는 일은 당신께서 반드시 당신의 방식과 때에 이루시고야 만다.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이 헛되게 돌아갈 리는 절대로 없다.
하나님이 소심한 자만 선택한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래 소심한 자는 자기 자랑도 잘 하지 못하는 법이다. 엄청난 승리를 일궈낸 사령관 기드온도 가뜩이나 소심한데다 시종일관 오직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전투가 이뤄졌다는 것을 아니까 감히 자랑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 아닌가? 하나님은 자긍하는 자가 아예 나오지 못하도록 사전에 대비한 것이다.
만약 4대1의 전투라면 담력과 용기로 똘똘 뭉쳐서 비장한 각오로 싸우면 이길 수 있다. 또 10대1의 전투도 전투력과 정신력이 월등한 쪽에서 기습 같은 작전을 감행하면 승리할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그러나 450대1의 전투는 경우가 전혀 다르다. 인간이 정신력과 군대 숫자와 무기와 전략 모든 것을 다 동원해도 도무지 승리할 재간은 없다. 원자탄도 없는 고대에 그것도 정식 칼과 창이 아닌 이상한 도구로는 더더욱 그렇다. 한국동란 때에 월등한 무기를 갖고도 원시적 무장을 한 중공군의 인해 전술에 결국 연합군이 패퇴했지 않는가?
왜 큰 용사인가?
이처럼 성경을 아무리 훑어봐도 기드온은 믿음의 큰 용사 같지 않다. 그런데도 왜 성경은 그를 두고 큰 용사라고 말하는가? 그것도 포도주 틀에 숨어서 타작하고 있는 그에게 나타나서 말이다. 참으로 흥미롭지 않는가? 얼마든지 다른 때에 소명을 심어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치사하고 부끄러운 상황에 나타나선 그를 “큰 용사여”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너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자야! 할례를 모르는 이방 족속을 왜 그리 두려워하느냐?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지 않느냐? 설령 추수한 것을 빼앗기더라도 내가 너를 굶겨 죽이겠느냐?”라고 말씀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호와를 믿는 자라면 세상과 대적 앞에 더 당당해져야 하지 않느냐?”라고 따진 것이다.
그럼에도 기드온은 자신을 먼저 되돌아보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에게 불평부터 쏟아 놓았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왜 이런 고난이 계속 생깁니까? 하나님의 공의는 굽어지고 악이 횡행하는 까닭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세상과 죄악과 사단 앞에 당당히 맞서 싸워 이기는 모습으로 당신의 공의를 바로 세운다. 신자는 가만히 앉아 있고 당신이 다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기드온이 포도주 틀에 숨어서 타작하는 것 자체가 불의와 대적할 용기와 의사가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나님이 동행하면 언제 어디서 무엇이든 그분께서 승리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 이미 보장되어 있는 승리는 거들떠보지 않고 현실적 어려움의 모든 책임을 하나님에게 떠맡기려 했다.
하나님은 기드온이 큰 용사라서 소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당신께서 큰 용사로 삼아주겠다는 것이다. 도저히 신자라고조차 할 수 없는 연약하고 소심한 그에게 믿음의 훈련부터 제대로 시켜서 당신의 일을 맡기려 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소심한 성격조차 활용하여, 즉 그가 하나님께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것까지 미리 다 아시고 일일이 응해주셨고 또 그의 기질에 맞는 전투 방식으로 이끄셨다.
다시 말하건대 군사를 3만2천 명에서 3백 명까지 줄인 이유는 이스라엘로 자긍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기드온이 진작 믿음이 강하고 큰 용사였다면 미디안에게 승리한 후에는 자기도 모르게 자긍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가장 연약한 기드온을 들어 사용하여 당신의 목적을 온전하게 이루려 계획한 것이다.
하나님이 범사를 주관하시는 가장 큰 원칙은 당신의 영광을 어느 누구에게도, 심지어 당신의 신실한 종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의 위엄만 높이려는 독선이 아니다. 그러는 것이 신자에게 오히려 유익이며 더 경건해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한 말을 보라.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나님이 포도주 틀에 숨은 겁쟁이를 두고 큰 용사라고 말할 리는 없다. 유대인들이 결론부터 먼저 말하는 용법을 자주 사용하는 것을 감안하면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까 큰 용사라는 것이다.
사자가 이어서 한 말에 더 확실한 증거가 있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신자더러 네 힘을 의지하라고 말할 리도 없다. 그래서 단순히 “네 힘”이 아니라 “이 네 힘”이라고 했다. 대명사 “이”는 다른 무엇을 대변한 것이다. 바로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라는 말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이 일을 나에게 맡기셨으니까 절대 패배할 수 없다”는 온전한 믿음이 바로 “이 네 힘”이라는 것이다.
기드온이 소명을 받고부터 미디안에게 대승을 거두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살펴보면 계속해서 인간의 상식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식이란 인간이 이성으로 이해하고 능력으로 통제가 가능한 범위이자, 자연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법칙의 한계를 말한다. 요컨대 상식은 눈에 보이는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상식에만 매이는 자는 항상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다. 믿음이 없어 자기 상식에만 의존하는 불신자들의 행태다.
반면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쉽게 말해 상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을 소원하여 하나님만 의지하여 이뤄내는 것이 믿음이다. 그렇다고 믿음이 자기 계획을 크게 부풀려 하나님의 힘만 빌려 이루려는 열심과 치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눈에 보이는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권능이 자신의 삶과 인생에 드러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못했던 기드온을 큰 용사로 만들기 위해선 상식을 깨트리는 작업을 통할 수밖에 없었다.
믿음에는 반드시 그 믿는 대상이 있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신자가 하나님과 상호 교통하는 바탕 위에서만 믿음이 생기고 자라고 열매 맺는다. 신자가 일방적으로 훈련하고 연습한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과 인격적 대면과 실생활에서의 체험을 통해야 한다. 믿음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드러나 객관적 진리와 하나님이 신자의 삶에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실제로 간섭한 사실, 둘만 먹고 자란다.
그러나 의지와 담력과 용기는 혼자서 훈련해도 키울 수 있다. 하나님이라는 믿음의 대상과 상호 교통이 없이 그런 것들을 아무리 키우려 노력해도 믿음이 자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과 날마다 동행하며 그분의 뜻과 계획으로 이끌리는 실제 삶에서 연단되어져야만 믿음이 자란다. 또 그렇게 실제 체험에서 자란 믿음이 있어야만 의지와 담력과 용기도 함께 자랄 수 있다.
기드온에게 우리가 본받고 배울 것은 그의 큰 믿음이나 용기 있는 행동이 결코 아니다. 그는 믿음도 약했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을 통해 아주 크게 두드러진 특징이 하나 있었다.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심과 당신께서 그를 보내었다는 두 가지 진리 아니 객관적 사실만은, 그가 아주 잘 믿었던 약하게 믿었던 간에, 명확하게 들어났다.
우리 중에 대부분은 사실 기드온보다 더 소심하고 연약하며 비겁한 존재다. 추수할 때마다 미디안이 와서 강탈해 가는데 어찌 숨어서 타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식구들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빚쟁이가 월급날마다 회사 정문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면 뒷문으로 도망치지 않을 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신자는 정문으로 당당히 나가서 빚쟁이에게 빚부터 갚아야 한다. 채무를 변제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선한 일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생활비도 모자라는 판국에 빚까지 갚아 도저히 살아갈 길이 막막해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상식적인 판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움직이시는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어떤 절망의 나락에서도 함께 하고 계시며 그런 상황 자체도 그분이 묵인 내지 연출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이다. 또 그런 고난을 통해서 그분은 우리를 더 강건하고 성숙하게 하여 결국은 정금같이 빚어주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런 고난을 통하지 않고는 그분의 궁극적 영광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까지 알기에 기꺼이 그 길을 가기를 소원하고 또 실제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기드온은 믿음의 큰 용사가 아니라 그 반대였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믿음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하는 용기, 담력, 의지도 하나 내세울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에게서 확실하게 배울 것은 하나 있다. 하나님이 시킨 일만은 자신의 어떤 두려움도 무릅쓰고 일단은 순종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묻고 또 묻고 심지어 표징을 여러 번 구해가면서 자기의 두려움을 없애려, 최소한 억누르려고 노력하며 순종은 했다. 그가 가진 미약한 의지와 담력과 용기를 바로 이 부분에 전부 투입해서 말이다.
또 바로 그것이 큰 믿음의 실체다. 요컨대 하나님과의 관계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분의 뜻대로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기드온은 그런 면에선 우리보다 큰 용사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우리는 그것마저 못할 때가 너무 많지 않는가?
8/2/2007-->
믿음과 담력
한국 신자의 장점이자 단점은 잘 믿으면 못 이룰 일 없다는 식으로 믿음을 너무 강조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따져 보아도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많아 보이니 큰일이다. 우선 장점은 아무리 큰 문제가 생겨도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의뢰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그런 기도가 응답이 되면 믿음이 자라고 역으로 은혜를 더 받기 위해서라도 믿음을 키울 수 있는 온갖 방안을 강구해 노력하게 된다.
단점은 믿음을 자신의 당면 문제를 해결하거나 장래 계획을 더 크게 성취할 수 있는 수단으로만 전락 시킬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또 현실적인 어떤 문제가 생기거나 조금만 영적인 침체가 와도 무조건 믿음이 모자랐기 때문이라고 간주한다. 성도간의 권면이나 목회 상담의 결론은 매번 믿음이 약해졌으니 기도하고 말씀보아 열심히 믿음을 키우라고 내린다.
한 마디로 믿음이 만병통치약이자 자칫 주님이 해야 할 역할마저 다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막상 믿음을 키우려 들어도 사실상 실체가 없다는 것이다. 기도하고 말씀을 보면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조금 강해지는 것 같다가도 다시 어려운 일이 생기면 도로 나무아미타불이 된다. 그래서 믿음을 의지에 힘입은 결단력과 지구력의 합체로 생각한다. 어떤 처지와 사건을 만나도 당황하지 않는 담력이 믿음의 대체어가 되었다.
그리고 그 대표적 성경의 예로 믿음의 큰 용사 기드온을 든다. 그는 담력의 화신이자 믿음이 큰 위대한 용사로 가르쳐져 왔다.. 그렇게 꼽는 이유는 겨우 삼백 명의 정예부대로 13만5천의 대군을 상대해 승리했다는 사실 하나에 두고 있다. 그러나 성경을 자세히 보면 그야말로 대표적인 소심증 환자였지 담력과는 거리가 멀다.
바로 이 믿음만능주의가 성경해석에도 잘못 적용된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믿음이 인간의 담력, 용기, 의지로 해석될 여지는 전혀 없다. 그런 요소들은 어디까지나 믿음이 도출해낸 결과적 모습일 뿐이지 믿음 자체는 아니다.
말하자면 예배, 기도, 찬양은 믿음으로 행한 결과적 모습이지 그것 자체가 믿음이 아닌 것과 같다. 믿음이 좋은 자는 예배, 기도, 찬양에 능할 수 있지만 그런 행위에 능하다고 해서 꼭 믿음이 좋은 것은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담력, 용기, 의지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위인 예배, 기도, 찬양과는 달리 인간의 내면에서 그것도 믿음과 거의 동시에 이뤄지는 눈에 안 보이는 작용 내지 활동이기 때문에 믿음과 그 구분을 명확히 짓지 못하고 서로 혼동하는 것이다.
요컨대 믿음의 사람이 담력과 용기의 사람으로 변할 수는 있어도 담력과 용기가 있다고 다 믿음의 사람이 아니라는 너무나도 간단한 진리를 많은 신자들이 자주 놓친다는 것이다. 신자가 키워야 할 것은 믿음이지 용기와 담력과 의지가 아니다.
하나님에게 사사로 세움을 받은 때부터 죽을 때까지 기드온의 모든 행적은 그가 큰 담력을 가진 위대한 용사였다는 전통적인 가르침이 틀렸다는 사실만 증명할 뿐이다. 성경 기록을 통해 구체적으로 따져 보자.
여호와의 사자에게 거짓말(?)한 기드온
“마침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더니”(삿6:11) 당시나 지금이나 타작은 원래 사방이 탁 트인 들판에서 하는 법이다. 겨와 알곡을 잘 분리할 수 있도록 통풍이 잘되어야 하고 또 타작용 기계나 황소 같은 가축을 사용하려면 넓어야 한다. 그런데도 그는 작은 욕탕 크기로 땅을 파서 만들어진 포도주 틀 즉, 사방이 막혀 외부에선 보이지 않는 곳에 들어가서 타작했다. 문자 그대로 미디안 사람에게 들킬까봐 두려웠던 것이다.
바로 그 때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큰 용사”(12절)라고 부르면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14절)는 사명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15절)라고 사양했다. 그래서 사자가 여호아가 함께 할 것이므로 두려워 말라고 했고 그는 바로 당신이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17절)라고 요구했다. 그가 바친 예물을 반석 위에 두자 사자의 “손에 잡은 지팡이 끝을 내밀어 고기와 무교전병에 대매 불이 반석에서 나와 고기와 무교전병을 살랐고 여호와의 사자는 떠나서 보이지 아니”(21절)하게 되었다.
그러자 기드온은 “그가 여호와의 사자인줄 알고 가로되 스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내가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하여 보았나이다”(22절)라고 크게 염려했다. 당시 사람들은 여호와를 직접 대면하면 죽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를 사사로 세우고 죽일 리는 없지 않는가? 당연히 “여호아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안심하라 두려워 말라 죽지 아니하리라”(23절)고 달랬다.
이처럼 하나님께 소명을 받는 과정 동안에 그는 한 결 같이 두려움에 휩싸여 있었다. 여호와의 사자가 두려워말라고 자꾸 안돈시킨 것 자체가 바로 그러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셈이지 않는가?
그런데 바로 그날 밤에 비록 하나님의 명을 따른 것이지만 기드온은 아비와 성읍사람들이 섬기는 바알의 단을 찍고 그 나무로 번제를 드리는 놀라운 일을 감행했다. 언뜻 보기에는 대단히 담대한 행동 같지만 그렇지 않다. “아비의 가족과 그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므로 이 일을 감히 백주에 행하지 못하고 밤에 행하니라”(6:27)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은 소심한 기드온의 담력을 키우고 그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 일을 명했다. 그의 아비의 집에 바알의 단이 있었고 그가 종 열을 데리고 가서 그 일을 행했다. 그렇다면 그의 집은 그가 여호와 사자에게 말한 것 같이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한 집이 아니라 오히려 유력한 가문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또 아비의 가족을 염려해 밤중에 행했다고 한다. 형제들이 많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기드온이 타작을 하고 있었고 종 열을 아주 비상한 일에 동원시켰으니 형제들 중에 상당한 어쩌면 장남의 위치였을 수 있다. 그가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라”고 말한 것 또한 그리 신빙성이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여호와의 사자에게 단순히 겸손을 표한 정도를 넘어 거짓말을 한 셈이다. 그만큼 그는 사사로 세움 받는 일에 두려움을 느꼈던 것이다.
하나님으로선 본격적으로 사사의 역할을 담당하기 전에 기드온이 미디안에 대해 갖고 있는 공포심을 덜어 줄 필요가 있었다. 미디안에 대한 공포가 그 군사력에 대한 것만이 아니다. 고대 사람들의 사상에 의하면 오히려 그들의 신을 더 두려워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우상을 만들어 섬긴 이유도 다산과 풍요의 가나안 신들이 현실적 문제에선 여호와보다 더 형통케 해주는 것 같이 보였기 때문이다. 또 미디안이 무력으로 자기들을 제압할 수 있는 배경에는 그들 신의 힘이 여호와보다 더 크게 작동되었다고 간주했다.
따라서 이제 미디안과 싸우러 갈 용사로 세우려면 그들 신에 대한 공포심부터 먼저 제거해야 했다. 백주 대낮에 바알과 아세라의 신상을 도끼로 찍어 내려도 아무도 그 자리에서 벌을 받거나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드온부터 확인시키고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보여줄 필요가 있었다. 그럼에도 기드온은 밤중에 도적고양이처럼 그것도 평소에 만만하게 부리던 자기 종들을 시켜 살짝 해치운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는 제대로 성취되지 못했다. 단지 기드온이 어쨌든 당신의 명령에 순종하려는 태도만 확인한 셈이었다. 대신에 성읍사람들이 밤중에 일어난 사태를 보고 놀라고 두려워 기드온을 끌어내어 죽이려 몰려들었을 때에 기드온의 아비 요아스의 믿음이 더 돋보였다.
“요아스가 자기를 둘러 산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바알을 위하여 쟁론하느냐 너희가 바알을 구경하겠느냐 그를 위하여 쟁론하는 자는 이 아침에 죽음을 당하리라 바알이 과연 신일찐대 그 단을 훼파하였은즉 스스로 쟁론할 것이니라 하니라.”(6:11) 너희가 바알이 가만있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기드온을 죽여 제물로 삼으려 하는데 정말 바알이 진노하였고 또 그럴 능력이 있다면 당장에 그를 직접 죽일 것이고 또 그래야 하지 않느냐고 응수했다. 요아스로선 최소한 바알이 그런 능력이 없는 신이라는 것을 믿었거나 그럴 능력이 정말 있는지 두고 보자고 말한 셈이다.
하나님이 원래 의도하셨던 목적은 기드온이 아닌 그 아비에 의해 성취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바알과 아세라의 신상이 찍혀 불에 태워져도 아무 피해가 없음을 시간이 지나면 기드온을 비롯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연히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장수에 그 부하
우상은 나무로 만든 조각상에 불과한지라 찍혀져 불살라졌지만 아무 일이 생기지 않았음은 너무나 당연했다. 기드온도 밤중에 조심스레 그 일을 결행할 때는 두려웠겠지만 차츰 그 신들이 아무 힘이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럼 어떤 일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한 큰 용사로 변모된 것일까? 아니다. 여전히 그런 낌새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는 미디안이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이스라엘 각 부족에게 통지를 하여 저항군을 결성했다. 그러나 그 직후 또 다시 이 전쟁에 승리할지 여부를 알려달라고 하나님에게 표징을 두 번씩이나 구했다. 처음에는 양털 한 뭉치를 타작마당에 두고 이슬이 양털만 젖게 하고 사방 마당은 마르게 해 달라고 했고, 그 다음에는 정반대로 양털만 마르고 사방 마당이 젖게 해달고 했다.
넓은 타작마당을 두고서 엉뚱하게 좁은 포도주 틀에 숨어서 추수하던 그였다. 그랬던 그가 하나님의 징표를 구하기 위해선 가능한 더 넓은 곳을 골랐다. 협소한 포도주 틀에서 그런 표징이 나타나봐야 자칫 우연의 일치로 간주될 수 있고 또 크게 위로도 되지 않을 것이다. 어떡하든 더 확실하고 신비한 모습의 표징을 그것도 두 번씩이나 구할 만큼 그는 그 전쟁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그 표징은 요즘 식으로 비유하자면 고속도로를 달리는 차 위에만 먹구름이 끼어 비가 내리고 나머지는 마른하늘이 되게 하고 또 그 정반대로 차위만 파란 하늘이 되고 나머지는 폭풍우가 몰아치게 하라는 요구다. 표징을 구하되 너무나 세밀하게 구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감히 그런 아이디어를 낼 수조차 없는 테스트였다. 그것도 이미 우상들을 찍어 불태워도 아무 일이 생기지 않았음을 확인한 후에 말이다. 그 이전에도 단에서 불이 나와 자기가 바친 제물을 태웠고 또 하나님을 직접 대면하고도 죽지 않았음을 경험한 그가 말이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씩이나 그랬다.
물론 그랬다고 해서 그의 믿음 자체가 없어지거나 크게 줄어든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미 하나님의 명령대로 우상을 제거했고 또 미디안 대적이 쳐들어오자 동족의 앞장에 서기로 헌신하여 군대 소집의 절차까지 마쳤다. 그러나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 사람들이 다 모여 요단을 건너와서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쳤다는 소식을 듣자 다시 의기소침해진 것이다. 예의 소심증이 되살아난 것이다.
한 뭉치 밖에 안 되는 양털을 드넓은 타작마당에 놓고 하나님의 표징을 구한 것은 미디안의 대군 앞에 선 자신들의 미약한 모습을 상징했다. 과연 하나님이 그런 미약한 이스라엘을 구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두 번이나 나름대로 테스트 해보려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는 무려 다섯 번이나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체험한 후에야 미디안과 전쟁을 치러 나간 셈이다. 구약의 기록에 전쟁을 치르기도 전에 하나님이 당신의 권능을 가시적인 표징으로 이렇게 많이 보여준 예는 없다. 그만큼 기드온이 겁쟁이였다는 반증이다.
어쨌든 모레 산 앞 골짜기를 사이에 두고 이스라엘과 미디안이 마침내 마주 섰다. 그런데 그 모인 숫자가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았다. 미디안은 13만5천 명(8:10)인데 반해 이스라엘은 겨우 3만2천(7:3)명이었다. 최소 4:1의 중과부적이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이상한 명령을 내렸다. 아주 열세인 이스라엘더러 오히려 군대 숫자가 너무 많으니 돌려보내라고 했다. 두려워서 떠는 자부터 먼저 그렇게 하라고 했다. 네 배나 큰 대적의 진용을 보고서 그 위용에 질리기 않을 자 어디 있겠는가? 시작하기 전부터 해보나 마나한 싸움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거의 포기할 단계까지 이르렀지 않겠는가? 무려 2/3가 넘는 사람이 되돌아 간 것은 어쩌면 자연스런 일이기도 했다.
하나님은 당신을 믿고 최선을 다해 싸우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믿지 못할 자는 지금이라도 당장 돌아가라고 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도 미리부터 겁에 질린 군사들을 데리고는 제대로 권능을 발휘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기드온에게 너를 좇는 백성이 많다고 말한 것은 인간의 상식과 이해 범위를 너무 넘어서는 말씀이었다.
그러자 이제 겨우 만 명만 남았다. 갑자기 4:1에서 13.5:1이 되었다. 가뜩이나 비교도 안 되었던 군사력의 격차가 이전에 비해서 세 배나 더 벌어졌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아직도 군사가 많다고 말씀하셨다. 이상하지 않는가? 인간 상식으로는 너무 적은 데도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왜 자꾸 많다는 말씀을 반복하셨을까?
심중으로는 틀림없이 함께 떨고 있었을 그를 하나님은 이렇게 재촉하고 위로하고 권면하려 하신 것이다. “양털 표징 사건을 기억해보라. 그 넓은 타작마당에서 오직 양털만 젖게도 했고 반대로 마르게도 하지 않더냐? 나의 그런 권능을 진정으로 믿느냐? 그렇다면 내가 많다고 하면 많은 것이지 않느냐? 숫자가 많아 강해 보이는 저들 군대보다 하나님인 내가 함께 하는 너희 군대가 훨씬 더 강하다는 것을 진짜 믿을 수 있느냐?”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당신의 정예군으로 선발한 기준은 더 이해할 수 없었다. 군사를 물가로 데려가 물을 손으로 움켜 혀로 핥는 자만 뽑고 무릎을 꿇고 마시는 자는 돌려보내라고 했다. 전자는 사방 주위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을 마시는 세심한 성격을 뜻하고 후자는 그런 대비는 전혀 없이 우선 갈증부터 채우는 성격을 의미한다.
지금 13:1의 전투를 벌이려면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물불을 전혀 가리지 않고 용맹스럽게 싸우는 자를 뽑아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데 앞뒤 사정을 꼼꼼히 다 따져보는 자들을 싸우라고 내보면 어떻게 되겠는가? 원래 소심한 성격의 사람은 자기 계산으로 합리적 결론이 서지 않으면 좀체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 법이다. 누가 봐도 아예 승부가 갈린 전투라 싸울 엄두도 내지 않을 것 아닌가? 이들은 어쩌면 처음에 두려워하는 자들은 돌아가라고 했을 때에 남들의 눈치가 보여 선뜻 돌아가지도 못한 진짜로 소심한 자들이었을 수 있다.
말하자면 하나님은 겁쟁이 대장 기드온 밑에 최고 겁쟁이 군사들로만 그것도 겨우 3백 명만 채운 셈이다. 예나 지금이나 추종자들은 지도자를 닮기 마련이다. 또 지도자도 자기와 닮은 부하라야 비교적 쉽게 잘 통솔할 수 있다. 서로의 성격과 사정을 잘 이해하고 말이 통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여전히 겁쟁이 기드온을 안돈시킬 목적으로 군사를 뽑은 것이다. 만약 우락부락하고 용맹이 넘치는 부하를 선발했다면 기드온이 통솔하기도 힘들고 스스로 주눅이 들어 기강이 안 설 것까지 하나님은 배려한 것이다.
겁쟁이들의 야간 전투
기드온의 미디안 전투 사건은 큰 용사들의 위대한 영웅담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소심한 대장과 똑 같이 소심한 부하들이 모여서 세계 전쟁사에 유례없는 특이한 방식으로 싸운 아주 이상한 전투였다. 그 승리의 전적 또한 기네스북에 오를 만한 대승이었다. 겨우 삼백 명이 13만 5천명을 상대로 이겼으니 일당백(一當百)이 아니라 일당 450으로 싸워 이겼다. 일당백도 원자탄 같은 가공할 무기가 있다면 모를까 공상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이지 실제로는 있을 수 없다.
바로 그렇다. 이 전투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이 사령관을 뽑고 장수를 선발하여 당신의 방식으로만 전투한 것이다. 원자탄보다 더 위대하신 하나님이 원자탄 투하 이상의 승리를 이스라엘에게 안겨 주었다. 그런데 그 전투의 도구는 가공할 최신 무기가 아니라 너무나 원시적이었다. 하늘에서 레이저 광선 같은 번개나 원자탄 같은 우레를 퍼부어 이기게 한 것이 아니었다. “삼백 명을 세대로 나누고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춘”(7:16) 것이 무장의 전부였다.
그리고 하나님은 기드온더러 본격적 전투에 앞서 우선 적진을 탐지해보라고 했다. “네가 내려가기를 두려워하거든 네 부하 부라를 데리고 그 진으로 내려가서 그들의 하는 말을 들으라 그 후에 네 손이 강하여져서 능히 내려가서 그 진을 치리라.”(7:10,11) 또 다시 하나님이 먼저 그에게 용기를 일깨워주려 했던 것이다.
그가 적진에서 들은 말은 당연히 승리의 예보였다. 기드온이 전투 중에도 더 확실한 승리의 표징을 보기 원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아셨던 것이다. “기드온이 그곳에 이른즉 어떤 사람이 그 동무에게 꿈을 말하여 이르기를 내가 한 꿈을 꾸었는데 보리떡 한 덩어리가 미디안 진으로 굴러 들어와서 한 장막에 이르러 그것을 쳐서 무너뜨려 엎드려뜨리니 곧 쓰러지더라 그 동무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다른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이라 하나님이 미디안과 그 모든 군대를 그의 손에 붙이셨느니라 하더라.”(7:13,14)
하나님이 소심한 기드온을 위하여 이 얼마나 세심하게 배려했는가? 그분이 우리를 돌보시는 사랑에는 한도가 없다. 그 세심하고도 완전한 사랑 앞에 인간의 의지, 담력, 용기는커녕 믿음조차 설 자리라고는 아예 없다. 미디안 군사가 꿈을 꾸게 한 것, 또 그 꿈을 정확히 해몽하게 한 것, 기드온을 하필이면 바로 그 장막 곁으로 인도하여 그 말을 다 듣게 한 것 등을 보라. 전투를 앞두고 두려움에 떠는 그를 안돈시키고 담대하게 만들려고 도리어 하나님이 눈물겨운(?) 노력을 했지 않는가?
소심한 그가 그런 이상한 무장을 할 리가 없다. 하나님께 명을 받았거나 지혜를 얻었을 것이다. 나팔을 불고 빈 항아리를 깨면서 기드온의 칼이라고 외치기만 했다. 한밤중에 큰 소리와 밝은 불빛에 갑자기 혼비백산한 미디안 대군이 칼날로 아군끼리 서로 죽이는 참극이 벌어졌다. 기드온은 가만히 앉아서 손쉬운 승리를 줍기만 했다.
나팔, 횃불, 항아리, 고함 모두가 일차적으로는 적군에게 대군이 쳐들어 온 것으로 혼동하게 하려는 고도의 작전이었다. 밝은 불빛도 잠결에 갑자기 일어난 사람들에게는 혼동을 더 불러일으키는 반면에 어둠 속에서 의도적으로 불을 밝힌 자로선 상대의 움직임을 더 세밀하게 관찰할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하면 나팔 불고 고함을 지르며 횃불을 흔들면 상대보다 오히려 자기들이 먼저 알게 모르게 힘을 얻고 용기백배하게 되는 이점도 많다.
따지고 보면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하달한 전략도 겁쟁이들을 일관되게 감안한 것이었다. 한밤중에 도적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접근하게 했다. 바알과 아세라 목상을 찍을 때에 그와 그 종들이 취한 모습 그대로 답습하게 했다. 하나님은 겁쟁이는 겁쟁이인 상태로 그대로 두고 당신의 목적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달성했다.
군대를 처음 조직할 때에 “너를 좇은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붙이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스려 자긍(自矜)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고 말씀하신 그대로 결말지어졌다. 하나님께서 시키는 일은 당신께서 반드시 당신의 방식과 때에 이루시고야 만다. 그분의 입에서 나온 말이 헛되게 돌아갈 리는 절대로 없다.
하나님이 소심한 자만 선택한 또 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원래 소심한 자는 자기 자랑도 잘 하지 못하는 법이다. 엄청난 승리를 일궈낸 사령관 기드온도 가뜩이나 소심한데다 시종일관 오직 하나님의 지시에 의해 전투가 이뤄졌다는 것을 아니까 감히 자랑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 아닌가? 하나님은 자긍하는 자가 아예 나오지 못하도록 사전에 대비한 것이다.
만약 4대1의 전투라면 담력과 용기로 똘똘 뭉쳐서 비장한 각오로 싸우면 이길 수 있다. 또 10대1의 전투도 전투력과 정신력이 월등한 쪽에서 기습 같은 작전을 감행하면 승리할 가능성은 여전히 있다. 그러나 450대1의 전투는 경우가 전혀 다르다. 인간이 정신력과 군대 숫자와 무기와 전략 모든 것을 다 동원해도 도무지 승리할 재간은 없다. 원자탄도 없는 고대에 그것도 정식 칼과 창이 아닌 이상한 도구로는 더더욱 그렇다. 한국동란 때에 월등한 무기를 갖고도 원시적 무장을 한 중공군의 인해 전술에 결국 연합군이 패퇴했지 않는가?
왜 큰 용사인가?
이처럼 성경을 아무리 훑어봐도 기드온은 믿음의 큰 용사 같지 않다. 그런데도 왜 성경은 그를 두고 큰 용사라고 말하는가? 그것도 포도주 틀에 숨어서 타작하고 있는 그에게 나타나서 말이다. 참으로 흥미롭지 않는가? 얼마든지 다른 때에 소명을 심어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치사하고 부끄러운 상황에 나타나선 그를 “큰 용사여”라고 불렀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너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신자야! 할례를 모르는 이방 족속을 왜 그리 두려워하느냐? 내가 너와 항상 함께 하지 않느냐? 설령 추수한 것을 빼앗기더라도 내가 너를 굶겨 죽이겠느냐?”라고 말씀하고 싶었던 것이다. “여호와를 믿는 자라면 세상과 대적 앞에 더 당당해져야 하지 않느냐?”라고 따진 것이다.
그럼에도 기드온은 자신을 먼저 되돌아보기는커녕 오히려 하나님에게 불평부터 쏟아 놓았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 왜 이런 고난이 계속 생깁니까? 하나님의 공의는 굽어지고 악이 횡행하는 까닭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이 세상과 죄악과 사단 앞에 당당히 맞서 싸워 이기는 모습으로 당신의 공의를 바로 세운다. 신자는 가만히 앉아 있고 당신이 다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기드온이 포도주 틀에 숨어서 타작하는 것 자체가 불의와 대적할 용기와 의사가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하나님이 동행하면 언제 어디서 무엇이든 그분께서 승리케 하실 수 있다는 믿음이 없었다. 이미 보장되어 있는 승리는 거들떠보지 않고 현실적 어려움의 모든 책임을 하나님에게 떠맡기려 했다.
하나님은 기드온이 큰 용사라서 소명을 주신 것이 아니라 이제부터 당신께서 큰 용사로 삼아주겠다는 것이다. 도저히 신자라고조차 할 수 없는 연약하고 소심한 그에게 믿음의 훈련부터 제대로 시켜서 당신의 일을 맡기려 한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소심한 성격조차 활용하여, 즉 그가 하나님께 표징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것까지 미리 다 아시고 일일이 응해주셨고 또 그의 기질에 맞는 전투 방식으로 이끄셨다.
다시 말하건대 군사를 3만2천 명에서 3백 명까지 줄인 이유는 이스라엘로 자긍하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기드온이 진작 믿음이 강하고 큰 용사였다면 미디안에게 승리한 후에는 자기도 모르게 자긍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가장 연약한 기드온을 들어 사용하여 당신의 목적을 온전하게 이루려 계획한 것이다.
하나님이 범사를 주관하시는 가장 큰 원칙은 당신의 영광을 어느 누구에게도, 심지어 당신의 신실한 종에게도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신의 위엄만 높이려는 독선이 아니다. 그러는 것이 신자에게 오히려 유익이며 더 경건해지는 지름길이기 때문이다.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한 말을 보라.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 하나님이 포도주 틀에 숨은 겁쟁이를 두고 큰 용사라고 말할 리는 없다. 유대인들이 결론부터 먼저 말하는 용법을 자주 사용하는 것을 감안하면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까 큰 용사라는 것이다.
사자가 이어서 한 말에 더 확실한 증거가 있다. “너는 이 네 힘을 의지하고 가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신자더러 네 힘을 의지하라고 말할 리도 없다. 그래서 단순히 “네 힘”이 아니라 “이 네 힘”이라고 했다. 대명사 “이”는 다른 무엇을 대변한 것이다. 바로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라는 말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이 이 일을 나에게 맡기셨으니까 절대 패배할 수 없다”는 온전한 믿음이 바로 “이 네 힘”이라는 것이다.
기드온이 소명을 받고부터 미디안에게 대승을 거두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살펴보면 계속해서 인간의 상식이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상식이란 인간이 이성으로 이해하고 능력으로 통제가 가능한 범위이자, 자연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법칙의 한계를 말한다. 요컨대 상식은 눈에 보이는 영역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상식에만 매이는 자는 항상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일희일비할 수밖에 없다. 믿음이 없어 자기 상식에만 의존하는 불신자들의 행태다.
반면에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다. 쉽게 말해 상식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을 소원하여 하나님만 의지하여 이뤄내는 것이 믿음이다. 그렇다고 믿음이 자기 계획을 크게 부풀려 하나님의 힘만 빌려 이루려는 열심과 치성을 뜻하지는 않는다. 대신에 눈에 보이는 것에 일희일비하지 않고 눈에 안 보이는 하나님의 섭리와 권능이 자신의 삶과 인생에 드러나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혀 그렇지 못했던 기드온을 큰 용사로 만들기 위해선 상식을 깨트리는 작업을 통할 수밖에 없었다.
믿음에는 반드시 그 믿는 대상이 있게 마련이다. 말하자면 신자가 하나님과 상호 교통하는 바탕 위에서만 믿음이 생기고 자라고 열매 맺는다. 신자가 일방적으로 훈련하고 연습한다고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과 인격적 대면과 실생활에서의 체험을 통해야 한다. 믿음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에 드러나 객관적 진리와 하나님이 신자의 삶에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 실제로 간섭한 사실, 둘만 먹고 자란다.
그러나 의지와 담력과 용기는 혼자서 훈련해도 키울 수 있다. 하나님이라는 믿음의 대상과 상호 교통이 없이 그런 것들을 아무리 키우려 노력해도 믿음이 자라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나님과 날마다 동행하며 그분의 뜻과 계획으로 이끌리는 실제 삶에서 연단되어져야만 믿음이 자란다. 또 그렇게 실제 체험에서 자란 믿음이 있어야만 의지와 담력과 용기도 함께 자랄 수 있다.
기드온에게 우리가 본받고 배울 것은 그의 큰 믿음이나 용기 있는 행동이 결코 아니다. 그는 믿음도 약했고 용기는 더더욱 없었다. 그러나 그의 일생을 통해 아주 크게 두드러진 특징이 하나 있었다. 오직 하나님이 함께 하심과 당신께서 그를 보내었다는 두 가지 진리 아니 객관적 사실만은, 그가 아주 잘 믿었던 약하게 믿었던 간에, 명확하게 들어났다.
우리 중에 대부분은 사실 기드온보다 더 소심하고 연약하며 비겁한 존재다. 추수할 때마다 미디안이 와서 강탈해 가는데 어찌 숨어서 타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식구들 먹고 살기도 빠듯한데 빚쟁이가 월급날마다 회사 정문에 와서 기다리고 있다면 뒷문으로 도망치지 않을 자는 그리 많지 않다.
그럼에도 신자는 정문으로 당당히 나가서 빚쟁이에게 빚부터 갚아야 한다. 채무를 변제하는 것이 윤리적으로 선한 일이라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생활비도 모자라는 판국에 빚까지 갚아 도저히 살아갈 길이 막막해 보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상식적인 판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움직이시는 전지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분은 우리의 어떤 절망의 나락에서도 함께 하고 계시며 그런 상황 자체도 그분이 묵인 내지 연출하고 계심을 믿기 때문이다. 또 그런 고난을 통해서 그분은 우리를 더 강건하고 성숙하게 하여 결국은 정금같이 빚어주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그런 고난을 통하지 않고는 그분의 궁극적 영광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까지 알기에 기꺼이 그 길을 가기를 소원하고 또 실제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분명 기드온은 믿음의 큰 용사가 아니라 그 반대였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믿음의 필수 요소라고 생각하는 용기, 담력, 의지도 하나 내세울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에게서 확실하게 배울 것은 하나 있다. 하나님이 시킨 일만은 자신의 어떤 두려움도 무릅쓰고 일단은 순종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묻고 또 묻고 심지어 표징을 여러 번 구해가면서 자기의 두려움을 없애려, 최소한 억누르려고 노력하며 순종은 했다. 그가 가진 미약한 의지와 담력과 용기를 바로 이 부분에 전부 투입해서 말이다.
또 바로 그것이 큰 믿음의 실체다. 요컨대 하나님과의 관계만은 어떤 일이 있어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분의 뜻대로 이어가겠다는 것이다. 기드온은 그런 면에선 우리보다 큰 용사였던 것만은 틀림없다. 우리는 그것마저 못할 때가 너무 많지 않는가?
8/2/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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