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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 때로는 아름답고 또는 추해지는

사사기 허태수 목사............... 조회 수 2027 추천 수 0 2011.11.16 22:5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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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삿15:14 
설교자 : 허태수 목사 
참고 : 춘천성암교회 http://sungamch.net 

힘. 때로는 아름답고 또는 추해지는
삿 15:14

 

중국 여행에서 돌아와서, 밤이 늦었지만 옮겨 심은 오엽송이 잘 자라고 있는지 궁금했습니다. 다른 것들은 모두 잘 자라겠거니 여겨지는데 예배당 들어오는 입구의 그게 제일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차에서 내리자마자 달려가서 잎을 가만히 만져 보였죠. 촉촉할까 아니면 말랐을까 염려하면서 말입니다. 나무 한그루 살리고 죽이는 거 땅이 하는 일인지 하늘이 하는 일인지 나무 잎을 만지다가 잠시 생각했습니다. 결국 저의 이와 같은 행위는 힘의 근원이 어디일까 무엇일까 하는 것이죠.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자신이 엄청나게 힘이 센 사람이 되는 꿈을 꾸어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홍길동이나 임꺽정 같은 장사들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기 자신이 장사가 된 것 같이 느끼기도 할 것입니다. 사람들이 그런 장사들을 좋아하는 것은 꼭 그들이 힘이 세서만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힘의 근원으로 보이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이죠.

 홍길동은 당시의 신분 사회에서 철저한 제약을 받는 서자 출신이었고, 임꺽정은 백정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초인적 힘은, 타고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러한 신분적 제약 때문에 겪는 설움, 분노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 장사들의 천한 태생과 서러운 삶에서 솟구쳐 오르는 그 힘을 느끼면서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고, 그들이 그 힘으로 부패한 양반들을 혼내 줄 때, 자기가 그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기라도 한 것처럼, 후련함을 맛보기도 합니다. 특히 요즘 사회에서 셀러리맨이 되어서 태곳적 힘은 모두 잃어버린 채, 비타민과 영양제 삼겹살 따위로 얻어내고 계산해낸 칼로리만 갖고 사는 사람들은 그 태곳적 힘을 그리워합니다.

***
구약성서에 나오는 삼손은 홍길동이나 임꺽정과 같은 장사입니다. 그도 그들처럼 초인적 힘으로 적을 시원하게 물리칩니다. 그러나 그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의 삶은 그들의 삶과는 너무나도 달라요. 그는 천한 태생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을 위하여 선택된 사람입니다. 그는 영웅적 면모를 보이기는 하지만 동족들로부터 존경을 받기보다는 오히려 그 힘으로 공연한 분란이나 일으키는 골칫덩어리 취급을 받습니다. 그는 정열적으로 한 여자를 사랑하여 아내로 맞이하지만 이레만에 아내를 친구에게 빼앗깁니다. 이를 참지 못하고 우직하게 행동한 것 때문에 아내와 장인까지 잃게 됩니다. 나중에 그는 들릴라라는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데, 그 여자에게서 배신을 당하여 그 긴 머리를 깎이고 두 눈을 뽑히고 쇠사슬에 묶여 감옥에서 연자맷돌을 돌리는 신세가 됩니다. 나중에 그 힘은 다시 돌아오고 그 힘으로 많은 원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는 복수를 하지만 그 자신도 그들과 함께 최후를 맞이합니다. 참으로 비극이라면 비극적인 이야기고 희극이라면 희극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삼손의 이야기에 빨려드는 것일까요? 성공적인 장사들의 영웅담보다는 그의 비극에서 훨씬 더 자신의 삶에 와 닿는 어떤 것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들은 삼손의 그 엄청난 힘의 근원에 대해서는, 그 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며, 그 통로 역할을 하는 것이 그의 긴 머리라는 것 이상을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예로부터 긴 머리는 힘의 원천으로 여겨져 왔습니다. 황제를 뜻하는 카이사르나 카이저-차르라는 말은 머리가 많고 길다는 뜻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장발이요 풍성한 머리의 소유자여야 한다는 원시사회의 유풍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최고의 영웅인 길가메시도 그 긴 머리가 빠지면서 괴력을 못 쓰게 됩니다. 그렇다고 삼손의 이야기가 당시 널리 알려진 이런 이야기를 반복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삼손의 힘의 근원에 대해서 그 이상의 것들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죠.

삼손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 이미 ‘나실 사람’으로 정해졌습니다. 나실 사람은, 하나님께 바쳐진 구별된 사람이라는 뜻인데, 몇 가지 지켜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곧, 술을 먹어서는 안 되며, 머리를 깎아서도 안 되며, 또 시체를 만져서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는 평생 조심스럽고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비극의 씨앗은 이미 여기에 배태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힘이 세고 성격도 호탕한 삼손으로서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도 없이 나실 사람으로 정해져서, 보통 사람들이 누리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된 것이 못마땅하고 답답했을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그런지, 그는 기존의 가치나 도덕에 도전하는 반항아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그가 아내로 맞이한 여자나, 나중에 그가 사랑하게 된 들릴라라는 여자는 모두 이방 사람들입니다. 그것도 이스라엘의 숙적인 블레셋 사람이죠. 그의 부모는 그 결혼을 극구 반대했지만, 그는 막무가내였습니다. 그 이유가 단순해요. 그가 그 여자에게 첫눈에 반했기 때문입니다(삿 14:3). 하지만 진정한 이유는, 그에게 나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규정들을 엄격히 요구할 이스라엘 여자로부터 벗어나, 그런 규정 따위는 알지도 못하는 이방 여자에게로 가서, 자유를 누리고 싶어서였을 것입니다.

 

그는 결국 나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것들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는 죽은 사자의 주검에 벌떼가 있고 꿀이 고여 있는 것을 보고 손으로 꿀을 떠서 먹음으로써, 시체를 만지거나 부정한 음식을 먹어서는 안 된다는 규정을 어겼습니다. 창녀의 집을 드나들면서, 거룩하게 구별된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지키지도 않았습니다. 별것도 아닌 일에 격분하여, 무고한 사람을 서른 명씩이나 죽이고 노략질을 했으며, 쌓아 놓은 곡식가리에 불을 놓고 농원들을 태워버렸습니다. 그래도 그가 나중까지 지키고 있던 한 가지는 머리를 깎지 않은 것인데, 그나마 들릴라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그 여자의 무릎을 베고 잠든 사이에 원수의 손에 깎이고 말았습니다.

 

삼손은 매우 감성적이고 무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수하기 딱 좋은 사람이죠. 결혼했을 때 신부측 하객들과 수수께끼를 푸는 내기를 했는데, 그걸 못 맞춰서 큰 손해를 보게 된 블레셋 사람들이 신부에게 그 답을 알아내라고 을러댑니다. 삼손은 아무리 아내에게라도 그것만은 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만 거듭 조르는 아내에게 결국은 답을 말해 주고 맙니다. 그 때문에 삼손은 내기에서 지게 되고 그에 격분하여 무고한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게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삼손의 아내와 장인을 불에 태워 죽임으로써 복수를 합니다. 입 한번 잘못 놀린 대가치고는 너무나 크죠. 그가 들릴라와 사귈 때, 블레셋 사람들이 그 여자에게 그의 힘의 근원을 알아내라고 매수를 했습니다. 삼손은 몇 번은 속이고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지만 그 여자가 거듭 조르며 눈물로 애원을 하자, 번민 끝에 사실을 말해주고 맙니다. 그래서 그런 비참한 처지에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그는 입도 가볍고 실수도 잘하고, 여자의 애원에 잘 넘어가기도 하는 무른 사람입니다.

이렇게 머리가 깎이고 난 다음에 이상한 변화가 생겼는데, 그에게서 힘이 떠나가고 그가 평범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힘의 근원이 머리카락인가? 우린 그가 머리를 깎인 다음에 힘을 잃었고, 그 다음에 감옥에서 머리가 다시 자라기 시작했다는 언급이 있은 다음에 힘을 회복했으므로 머리카락이 그의 힘의 근원인 양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의 머리카락이 힘의 근원이라는 것은 삼손의 입에서 나온 말일뿐입니다. 성령이 그에게 덮쳤다는 표현 다음에 그가 큰 힘을 쓰는 것에서 보듯이 그의 힘의 근원은 머리카락 자체가 아니라, 그 머리카락에 임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15:14). 하나님이 함께 계실 때 그는 힘을 쓸 수 있고 하나님이 그를 떠나면 그는 평범한 사람으로 돌아갔습니다(16:20). 감옥에서 다시 자라기 시작한 머리털이 그의 힘의 근원이 될 수 있다면, 그는 최후의 순간에, “하나님, 이번 한 번만 힘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나의 두 눈을 뽑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단번에 원수를 갚게 하여 주십시오”하고 기도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16:28).

 

하나님의 능력이 삼손에게 임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지만, 최후의 삼손의 기도 다음에 엄청난 힘이 솟구친 데서 보듯이, 그 힘은 삼손 자신의 믿음이나 소원에 따라서 움직이는 면도 있습니다. 삼손의 감성적·열정적이면서도 반항적인 삶은 그가 타고난 힘을 증폭시킬지언정 약화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나실 사람으로서 지켜야 할 것을 지키지 못한 데서 느끼는 중압감도 있었겠지만 그래도 그가 마지막으로 한 가지 지키는 것이 있을 때까지는 그 힘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맨 마지막 남은 그 머리마저 깎이게 되었을 때 그는 결정적으로 힘을 잃게 되었습니다. 그 자신이 이제 더 이상 나실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 잘못된 삶을 살았다는 회의 같은 것이 그의 힘이 사라지게 한 근원적인 이유일 수 있습니다. 그가 눈이 뽑히고 지하 감옥으로 내려가 어둠 속에서 연자맷돌을 돌리면서 그런 회의를 극복하고 마지막으로 원수 블레셋 사람들을 죽이고 자기도 죽겠다는 분명한 목표를 세웠을 때 불끈하고 힘이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불타는 복수심을 넘어서는 것이 아닙니다.

삼손의 힘의 근원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삼손은 감성적, 반항적이며 복수심에 불타는 그의 삶 때문에 그 근원에 닿았다 떨어졌다 하는 식으로 살면서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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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영은 〈장사의 꿈〉 이라는 소설에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서서히 원시의 힘을 잃고 거세되어 가는 한국판 삼손을 등장시키고 있습니다. 때밀이 일봉이는 대대로 천하장사 집안에서 태어난 장사입니다. 조상들이 많이 바다에서 죽었기 때문에 그는 절대로 배를 타지 않고 서울에 와서 뭔가를 해보려고 합니다. 일봉이는 그의 건장한 체격 때문에 어느 날 영화를 찍자는 제의를 받는데 사실은 무슨 애로 영화 내지는 포르노 영화를 찍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함께 일하게 된 파트너인 애자와 동거하면서 아이까지 갖게 되는데, 사고로 아이는 유산되고, 그 여자는 돈 벌어서 일 년 후에 다시 만나자면서 떠나버립니다. 그 후 그는 전화를 받고 약속 장소에 가서 유부녀들을 상대하여 몸을 파는 직업을 갖게 됩니다. 그런 일을 따분하게 반복하던 어느 날 갑자기 그는 성 기능에 장애를 느끼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불능이 되고 맙니다. 그는 최후로 애자를 만나면, 직업상으로나 책무로 사람을 대하지 않고 진정한 사랑을 하게 되면 그것이 회복이 될 것으로 생각하고 약속 장소를 찾아가지만 애자는 오지 않습니다. 그때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밤이 되었고, 이튿날 새벽이 되었지. 애자가 이 세상에서 사라졌음을 느끼자, 나는 거세(去勢)되어 버렸다는 걸 알았고, 내가 노예였다는 사실을 깨달았어. 나는 몇 근의 살덩어리에 지나지 않았어.”

 

그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가 자신이 노예였음을 인식하고 도시에 회한의 눈물을 뿌리면서 옛날로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순간 그의 몸이 이전과 같이 회복이 된 것입니다. 그는 절뚝거리며 눈물을 흘리며 그 도시를 떠납니다.

황석영의 이 일봉이는 삼손과 닮은 구석이 있습니다. 둘 다 태고의 힘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삼손은 사자를 찢기도 하고 무고한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우직함을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일봉이는 그의 태곳적 힘을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몸을 파는 데 소진해 가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시들어가는 현대인들에 대한 풍자죠. 오늘날 많은 샐러리맨들은 자신들이 이 사회의 학교와 군대 그리고 직장에서 길들여져 사는 동안, 어린 시절 어머니한테서 물려받은 태곳적 힘, 뒷동산에서 냇가 모래밭에서 친구들과 씨름놀이 하고 힘자랑할 때 쓰던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정신없이 살다가 문득 문득, 자기 자신을 팔고 있다는 느낌, 자신이 서서히 거세되어가고 있다는 느낌을 가질지도 모릅니다.

 

이제 그들을 힘쓰게 하는 유일한 것은, 네온사인의 불빛, 두툼한 월급봉투, 승진, 성공 이런 것들인데, 그런 것은 어느 순간에는 사람들을 무력하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힘의 근원을 그런 데 두는 사람은 그런 것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힘없이 주저앉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진정한 힘의 근원이 될 수 없습니다.

***
우리는 나약하고 금욕적인 모습의 예수상에 익숙해서 힘이 센 예수, 삼손과 대등한 상상을 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예수를 힘이 센 사람으로 거듭 묘사하고 있습니다. 신약의 삼손이라는 말이죠. 그것이 분명한 사실인 것은 그런 증언을 하는 자들이 바로 예수의 적대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가 병자들을 고쳐 주고 귀신을 내쫓는 것을 보고, 예수가 베엘제불에 들려서 그의 힘으로 그런 짓을 한다고 모함합니다(마 12:24; 막 3:22; 눅 11:15). 그들이 두려워하고 모함을 할 정도로 예수의 힘은 컸고 그들에게 위협적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예수의 힘은 분명 삼손의 힘과는 다른 것입니다. 삼손의 힘은 신전 건물을 무너뜨리는 괴력이지만, 예수의 힘은 병든 사람을 고쳐주고 귀신들린 사람에게서 귀신을 내쫓는 능력이요, 그들을 억누르고 죄인으로 매도하는 종교지배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삼손의 힘이 물리적인 것이라면 예수의 힘은 무엇인가를 ‘해내는 힘’ 곧 능력입니다. 살리는 힘입니다.

 

예수는 그의 힘의 근원과 목적을 분명하게 선포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에게 왔다”(눅 11:20). 여기서 ‘능력’은 헬라어 성경에서는 ‘손가락(daktylos)’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두 손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식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크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손가락’의 자리에 ‘하나님의 영’을 두었는데, 하나님의 손에 사로잡히는 것과 성령에 사로잡히는 것을 동일시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12:28).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손에, 하나님의 영에,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힘은 분명한 목적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가난과 병마와 귀신들림에 시달리던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 나라의 현실을 이룩하는 것입니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사의 중심에 서 있다는 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능력이 있었으며, 권위가 있었으며, 적대자들에게는 위협적이었습니다. 적대자들이 예수를 모함하려고 예수는 하나님의 힘이 아니라 마귀의 힘을 빌려서 일한다고 하자 예수는 그런 일을 하는 동안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내쫓을 수 있느냐?”, “먼저 힘센 사람을 묶어 놓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서 세간을 털어 갈 수 없다. 묶어 놓은 뒤에야, 그 집을 털어 갈 것이다”(막 3:23, 27). 예수는 사탄을 내쫓고 있는 자신이 어떻게 사탄이 될 수 있느냐는 반론을 제기하면서, 자신이 하는 일을 ‘사탄에 대한 강도 짓’으로 풍자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강도일 리는 없지만 악마적 세력에 대해서는 강도와 같이 행동할 수밖에 없다고 강력하게 말하는 것입니다. 강도가 사람들을 꽁꽁 묶어놓고는 세간을 털어가는 것과 같이, 예수는 먼저 악마적 세력과 정면 대결을 하여 그들을 결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려면 그 악마적 세력보다 힘이 더 세야 하는데,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일하는 그는 그런 일을 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힘이 있다는 선언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가지고 있는 나약한 예수 상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능력 있는 예수의 모습입니다.

삼손은 장사였지만 그 힘의 근원에 확고하게 붙어있지 못했습니다. 그의 힘은 그를 더더욱 추하게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잘못 살고 있다는 의식은, 하나님의 구원사의 중심에 서 있지 못하다는 의식은 그를 비극적 삶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일봉이는 장사였지만, 자본주의의 화려한 꿈속에서 뭔가 잘못 살고 있다는 의식은 그를 서서히 거세되게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어디에선가 힘을 얻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힘의 근원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그 힘은 아름답습니까? 아니면 추한 힘입니까? 혹 그것은, 마치 노트북컴퓨터가 배터리를 빼면 쓸모없는 것이 되듯이, 어느 순간에 한꺼번에 잃어버릴 수도 있는 그런 것은 아닌가요? 이를테면, IMF가 닥쳤을 때, 주가가 폭락했을 때,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은 일봉이처럼 무너지고 거세되는 공포를 느끼지는 않았습니까? 그렇다면 돈을 버는 재미나, 주식이 오르는 재미는 우리에게 삶의 근원적인 힘이 될 수 없습니다. 어떤 형편에 있든, 무엇을 하든, 자신의 하루하루의 삶이 가치 있고 의미 있는 것이라는 의식, 이 사회에서 정의를 실현하고, 작은 사람들이 기를 펴고 사는 세상을 이루는 데 기여한다는 의식, 자신이 역사의 주체로 서 있다는 의식, 하나님의 구원사의 한복판에 서 있다는 의식만이 언제까지나 마르지 않는 힘의 근원이 될 수 있습니다. 예수는 이런 확고한 의식이 있었기에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는 진정한 장사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떤 힘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의 힘, 사람을 살리는 힘, 고치는 힘, 사랑하는 힘, 용서하는 힘은 많이 가져도 추해지지 않습니다. 가질수록 더욱 아름다워 집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이 힘, 십자가의 힘을 지녀야 합니다. 세상이 비웃지만 마침내 세상을 무릎 꿇리는 그 힘이야 말로 우리가 사모하고 지녀야 할, 구하는 자들마다 더욱 크게 받을 수 있는 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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