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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삿6: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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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필곤 목사 |
참고 : | 2012.8.26 열린교회(용인) http://www.yeolin.or.kr |
탈출(8) 열등감으로 부터
삿6:11-18
오늘은 “탈출” 여덟 번째 시리즈로 “열등감으로부터 탈출”에 대하여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여 무능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생각하는 열등감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다 있습니다. 심리학자 맥스웰 말프는 사람의 95%는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역대 서양의 천재(天才) 78명에 대한 정신 분석을 한 독일학자 란게아이히바움은 그 중 83퍼센트가 육체의 결함이나 가족관계, 성(性)에 대한 컴플렉스의 소유자로 심하건 덜 심하건 정신병 증세를 나타냈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시져, 쟌다르크, 미켈란제로, 루터, 파스칼, 모리엘, 보올텔, 모짜르트, 뉴톤, 루소, 베토벤, 괴테, 비이런, 칸트, 나폴레옹, 헤르다링, 하이네, 쇼펜하워, 바그너, 비스마르크,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릴케 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정도의 차이이지 열등감은 있습니다. 신문에 보니까 잘생긴 인기 연예인 이병헌 씨도 열등감이 있다는 고백을 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문제는 이 열등감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입니다. 창조적으로 처리하느냐? 파괴적으로 처리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현실적이고, 적절하며, 사회에서 통용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하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육체적 결함에서 오는 열등감을 발전적으로 승화시킵니다. 괴테, 쉴러, 밀턴, 줄 베른 등과 같이 시력이 나빠지자 정신력 연마에 힘을 써 위대한 작품을 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브루크너, 모차르트, 스메타나, 드보르자크, 베토벤 등은 혹심한 청력장애라는 열등감이 오히려 소리의 아름다움으로 보상되었습니다.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司馬遷)은 흉노에게 포로가 된 패장(敗將)을 찬양했다하여 황제에게 거세를 당하였지만 이 열등감이 원동력이 되어 `사기(史記)'라는 초인적인 저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손자(孫子)는 단근형(斷筋刑)을 받고 절름발이가 된 후 `병법(兵法)'을 지었습니다. 희랍의 대웅변가 데모스데네스도 말을 잘 못하는 말더듬이었지만 그 열등감을 보상코자 자갈을 물고 해변에 서서 파도 소리를 이기는 발성 수련으로 대 웅변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열등감을 파괴적으로 처리하면 자기보다 더 약자를 만들어두고 그 약자에게 불만을 전위시켜 해소시킨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보다 형편없게 소외 격하시켜 자학함으로써 열등감을 해소시키려 합니다. 쉽게 체념해 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별수 없는 존재야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봅니다. 열등 콤플렉스에 걸려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소극적이며, 자기를 경멸하고, 자포자기하며, 좌절하고 낙심합니다. 더욱 심화될 경우 마약복용, 강도, 절도, 살인 등의 범죄행동이나 자살 등으로 이어져 파멸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열등감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습니까? 태어난 가정환경이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너무 가난하여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는 환경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알콜 중독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이혼으로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열등감을 가지고 살 수도 있습니다. 남편의 외도와 폭력으로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신체적인 결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코가 낮고, 조금 몸이 무겁고, 키가 작고, 머리가 조금 덜 났고, 눈이 조금 커지다 중단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조금 안 예쁠 수도 있고, 다리가 조금 짧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쳐보기 민망할 수도 있습니다. 얼굴의 여드름, 코의 죽은 깨, 눈의 모양, 코의 모양, 광대뼈, 이마 등이 너무 크다며, 손톱이 맘에 안 든다고 특히 기형인 병에 의한 장애, 절름발이, 대머리, 언청이, 말더듬 등의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더욱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용모가 IQ보다는 성공을 좌우한다."고 생각하며 외모에 대하여 열등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다른 사람에 비해 부족하다고 열등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출신학교가 변변치 못하다고, 학교 성적이 나쁘다고, 직장이 내놓을 만 못하다고 직업이 숨기고 싶다고 교회 다니면서도 열등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돈도 없고, 명예도, 능력도, 권력도 없다고 열등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에 오면서도 좋은 차가 아니다고 열등감을 가지고 들어 올 수도 있습니다. 열등감은 상대와 비교하여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시대 위대하게 쓰임 받은 하나님의 사람 기드온도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디안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습니다. 칠년 동안 그들은 이스라엘을 착취하며 모든 곡식과 짐승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런데 누구 하나 나서서 이들과 싸울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기드온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려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를 불렀습니다. 그 때 기드온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삿 6:15 현대어 번역) 자기 자신을 극히 약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제일 작은 자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라고 낙인찍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없습니다. 자신감도 없습니다. 사명감도 없습니다. 주어진 일을 회피합니다. 두려워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잠재력을 보지도 못합니다. 꿈도 희망도 없습니다. 자신을 쓸모없는 나약한 존재로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열등감 때문입니다. 다른 가문에 비해 자기 가문은 보잘 것 없는 가문이고 그 보잘 것 없는 가문 중에 극히 약하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가문의 아버지 집에서 자신은 가장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어떻게 열등감으로부터 탈출시켜 사명을 이루게 하십니까?
우리가 어떻게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은 이미 주어진 자신을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보고 자존감을 가지고 열등감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은 흔히 자기 자신을 너무 과도하게 평가 절하합니다.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자신을 정죄하고 모멸합니다.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기드온이 자기 개념을 어떻게 가지고 있습니까? 자기 존재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의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아개념이 지극히 부정적입니다. 이것이 더 나아가면 자기모멸, 자기 정죄에 빠지게 됩니다. 열등감이 강한 사람들은 자기 무능, 자기 열등, 자기 비하, 자기를 비웃음 등의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을 무능력한 존재로 인식하게 하고 자기 비하로 인해 스스로를 억압하고, 문제인으로 여기게 되며, 스스로를 부정적인 모습으로 변모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안 돼, 나는 별 수 없어, 나는 무능해,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지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야. 나의 눈은 너무 작아, 나는 멍청해, 나는 못생겼어, 나는 가난해, 나는 능력이 없어, 나는 입이 너무 커, 내 머리는 돌 머리야”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게 됩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의 특징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타인과 비교하여 나 중심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것들입니다. 가정환경, 외모, 부모, 유전적으로 받고 태어난 조건들 이것들 변화시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모든 주어진 조건을 "내 가문, 나"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여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다보니 타인과 비교할 수밖에 없게 되고 비교하여 열등하면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기드온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2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6:12)” 작은 가문, 작은 자일지라도 민족을 구원할 용사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지금 기드온을 보는 시각은 기드온이 보는 시각과는 180도로 다른 것입니다. 사실 므낫세 지파가 기드온이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지극히 작은 지파입니까? 요셉의 큰 아들이 므낫세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대제사장 보디베라의 떨 아스낫와 결혼하여 낳은 첫아들입니다.(창41:51) 그는 혼혈아임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아들 반열에서 축복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창48:10) 국무총리 집안의 가정이 아닙니까? 물론 장자의 축복은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정복 전쟁에 용감히 참여했고 가나안 전쟁 때 요단 서쪽 전쟁에서 앞장서 싸웠습니다. 그래서 땅을 요단강 동쪽과 서쪽을 차지한 지파입니다. 사사 기드온, 입다를 배출하여 민족을 구원한 지파입니다. 하나님이 큰 자라고 하는데 스스로 에브라임에 비해 작은 자라고 단정하고 열등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대머리입니까? 키가 작습니까? 돈이 없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실력이 없습니까? 사람들이 삼류라고 말합니까? 못생겼습니까? 차가 작습니까? 늙었습니까? 학벌이 내 놓을 것 없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큰 용사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성도는 존귀한 자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키가 작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자들입니다. 눈이 작아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자들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여 천국 백성 만들기 위해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피와 물을 다 쏟았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 주었고 하나님과 핫라인을 설치해 주셨습니다. 독특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희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 자녀로서 신분이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신앙인들은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부정적인 자아상에서 새 생명을 얻은 고귀한 존재라는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열등감을 갖기에 충분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외모가 변변치 못했습니다. 말도 잘 못했습니다. 과거 경력이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데 앞장서 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때로는 기도했는데 응답되지 않았을 때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하였습니까?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경험했습니까? 그러나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약한 것을 자랑합니다. 약한 것도 하나님 안에서는 열등감의 요소가 아니라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부득불 자랑할 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고 말씀합니다. 비교를 통해 자신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15:10)"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를 주시는 하나님의 솜씨를 인정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약점을 비하 하거나 은폐하지 말고 시인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열등감을 가지고 감추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외적조건이 내적만족과 행복을 좌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도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4장 10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민족 지도자로 하나님이 세웁니다. 그 때 모세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출4:11-1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자기 자신이 만든 틀로 자신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비교의식이 아니라 창조의식으로 단독자로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만든 이유가 있습니다. 눈을 이렇게 만든 이유가 있고 발을 이렇게 만든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나를 이 모습 이대로 만든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 것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한 시대 사용하십니다. 세상사람 다 나를 좋아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였고 지명하여 불렀습니다(사 43:1) 모태에서부터 우리를 불렀습니다(사44:2)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렘 31:3)”라고 말씀하십니다.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 딸아 내게 축복 더하노라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뿐이에요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딸아 내게 축복 더하노라”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순간순간 다가오는 열등감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2. 현재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지 말고 사명을 붙들고 쓰임 받아 열등감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왜 부정적 자아상을 갖습니까?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의 가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키 작은 것 가치가 없고, 눈 작은 것 가치가 없고, 병든 것 가치가 없고, 가난한 것 가치가 없고, 실패한 것 가치가 없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모두 가치가 없다고 평가하기 때문에 열등감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자신을 평가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힌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합니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민족 구원의 사명을 주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삿 6:14)” 기드온을 누가 쓰시겠다고 합니까?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때 열등감에 사로잡힌 기드온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5절을 보십시오. 기드온은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만한 가치 있는 무엇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문도 좋지 않고, 능력도 없고, 전술도 없고, 군인도 없고, 돈도 없고, 따르고 지지하는 사람도 없고, 인정해줄 부모도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7년 동안이나 핍박과 압제를 당하고 갖은 수탈을 당하고 있는데, 그 상황을 타개할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으로 그 일을 이루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삿 6:16)”
이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 치듯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명 붙들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명을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주어진 조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명을 붙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열등적 요소가 많이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사명 붙들고 나아가면 우리 하나님이 그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키가 작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있으면 사명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이 작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있으면 사명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으면 사업의 사명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에훗는 왼손잡이였습니다. 오른 손은 불능(불구)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를 사용했습니다. 드보라는 당시 물건처럼 취급당하는 여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드보라에게 사명을 주시고 함께하여 한 시대 사용하였습니다. 삼갈은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명을 붙들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 우연히 존재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수동적인 존재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인간은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각자 사명을 주시고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사명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나안 족속을 바라보며 자신들을 '메뚜기'같은 존재로 열등감을 가지고 사명의 땅을 바라보면서도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사명 붙들면 열등감의 노예가 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사명을 받는 순간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창12:1-3). 모세도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 때는 혼란을 경험하였지만 사명을 붙들고 40년 동안 뜨겁게 쓰임 받았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지 못할 때 열등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능력이 없다고, 공부를 못한다고, 기능이 없다고, 실력이 없다고, 다른 사람보다 머리가 둔하다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래 너 가문 별 볼일 없어, 그래 너 능력 없어 그것 내가 너보다 잘 알고 있어 그러나 내가 너를 쓰는 것은 그렇게 때문에 쓰는 거야 능력 있는 내가 있지 않느냐? 능력 있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통하여 나의 일을 할 거야” 라고 말씀합니다. 보십시오. 무한하신 하나님이 우리 곁에 있고 내 손을 잡고 계십니다.
3. 부족한 부분 집중하지 말고 내게 주신 달란트 붙들고 열등감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열등감을 가지는 것은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능력이 어떤 일을 이루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못하다고 앞으로도 다른 사람보다 못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내게 없다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이룰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장점과 단점은 동시에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단점들이 있고 부끄러운 점이 있고, 비교하여 열등한 것이 있습니다. 기드온은 지금, 민족을 구원할 만한 능력이 없을 수 있습니다. 따르는 사람도, 지도력도, 군사적 전략도, 인기도, 지지도도 없을 수 있습니다. 사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당시 별 볼일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실력과 재능,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6:25). 하나님을 높이는 민족 지도자로 나서기에는 적합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나서면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을 들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가 따르지 않았습니다(8:1). 그는 다윗처럼 용기도 없었습니다.(삿6:11) 보고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였던 사람입니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27). 그렇다고 그는 강력한 믿음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여러 번 반복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17, 36, 39, 7:10)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기드온을 불러 사용하십니다. 비록 그가 부족한 자이지만 하나님을 그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현재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열등감을 가지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더욱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하지만 기드온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표징으로라도 하나님을 믿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끊임없이 질문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문제를 풀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지만 이 믿음이 점점 능력있는 믿음으로 발전합니다. 처음 기드온의 믿음을 보십시오. 13절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면 어찌하여 이런 어려움이 민족에게 다가왔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사업도 잘 되고 성공하고 자식도 잘되고 건강해야 할 텐데 민족이 망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구원해 주었다고 하는데 그것 다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지 창조를 하고, 모세를 통해 가르고, 만나를 먹이고, 반석에서 물을 내고, 그것이 지금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이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이시다면 왜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고, 우리 가정이 이렇게 어렵게 되고, 우리 민족이 왜 이런 비참한 꼴을 당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무엇을 요구합니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표징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납득할 만한 증표를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준비합니다. 무교병을 준비합니다. 자신이 만나고 있는 분이 하나님인지 사람인지를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음식을 먹으면 사람이고 먹지 않고 제사를 받으면 하나님일 것입니다. 그런데 국물을 붓게 하고 그것을 제물로 불태워 버립니다. 그 때 기드온이 어떤 고백을 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했다고 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고 여호와 살롬을 외칩니다. 그리고 바알제단을 헐어 버립니다. 믿음이 점점 성장합니다. 결국 300으로 미디안을 믿음과 전적인 순종으로 이깁니다. 이 당시 미디안 군대는 얼마나 될까요? 삿8:10을 보십시오. 135000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300명으로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7:2과 7:4을 보십시오. 믿음이 이기는 것입니다. 믿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기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이 사실을 깨닫습니다. 미디안을 물리쳤을 때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8:22)
그러나 기드온 자신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이같이 대답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8:23)
개인의 역사나 나라의 역사나 결국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행로에 우리는 서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조건을 보며 열등감에 사로잡혀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믿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어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내 믿음도 사용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시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빌 4:13)” 것입니다. 부족한 부부 집중하면 열등감만 더 커집니다. 내게 있는 것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내게 주신 달란트 믿음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 인생을 달라집니다. 아브라함 모든 것이 뛰어난 사람 아닙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거짓말도 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지 못해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겨자씨만한 믿음과 순종이 있었습니다. 야곱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 아닙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약속을 믿는 집념이 있었습니다. 모세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살인하였습니다. 이것 한 가지만으로도 오늘날 사회에서 매장됩니다. 다윗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 아닙니다. 유부녀를 범했고 그의 남편을 살해하게 하였습니다. 솔로몬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 아닙니다. 자식들 교육 잘 시키지 못했습니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열등감으로 인생을 망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달란트를 통해 한 시대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았습니다. 바울처럼 하나님께 내 달란트 쓰임 받아 열등감을 가질 만한 요소가 자랑거리가 되게 하여야 합니다. 사울처럼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윗에게 인기 빼앗겼다고 그것으로 열등감에 사로잡혀 인생 망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원래 바이올린 연주가였는데 시력이 나빠 악보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자 자신의 악보는 물론 다른 악기 악보까지 다 외워 세계적인 지휘자 반열에 올랐다고 합니다. 또한 체격이 왜소하고 눈이 나빴던 로널드 레이건은 연기로 열등의식을 이겨
내고 최고 통치자까지 지냈습니다. 오바마는 흑인에게도 백인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열등의식 때문에 흑백 모두를 아우르는 대통령이 되어야 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결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단점에 하나님의 은총의 햇볕을 쬐어 주면 성장하고 건강해 집니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4세 때까지 말을 못했고 7세가 될 때까지 글을 읽을 줄 몰랐답니다. 작곡가 베토벤의 음악선생님은 “베토벤은 작곡가로서는 아주 절망적이야!”라고 평가받았다고 합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어렸을 때 그의 담임선생님에게서 “저능아로 배울 수 없는 아이”라는 핀잔을 들었다고 합니다. 열등아가 되어 초등학교 3개월 다니다 학교를 그만 두었습니다. 증기기관을 발명하여 산업혁명의 계기를 만든 J 와트도 "얼간이"로 낙인 찍혀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당했었답니다.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열매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도 초등학교시절에는 "낙제생"이었습니다. "상대성원리"로 발견한 아인슈타인도 초등학교시절에는 성적이 반에서 최하위였고 선생님은 그를 "둔패기"로 취급했답니다. 나중에는 다른 아이들에게 방해가 된다 해서 등교를 금지시켰을 정도였습니다. 세계적인 놀이동산 디즈니랜드를 세운 월트 디즈니는 한때 신문사에서 삽화를 그렸으나 ‘창의성’이 없다고 쫓겨났다고 합니다. 성악가 카루소는 음악선생님으로부터 “네 목소리를 가지고는 절대로 성악가가 될 수 없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읽을 줄도 모르고 쓸 줄도 모르는 소녀였습니다. 노벨은 어릴 때부터 유난히 몸이 쇠약했고 너무도 몸이 쇠약해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겪기도 했습니다. 동생마저도 폭발사고로 죽게 되었고 아버지는 화병으로 앓아눕게 되었습니다. 링컨은 통나무로 지어진 오두막집 토방에서 태어났고 마루조차도 없는 집에서 살았습니다. 정규교육을 받은 시간은 전부 합쳐서 6개월이 고작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14세 때에 학교를 그만두고 결혼 한 후에도 런던으로 가서 극장의 마구간지기로 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자기 재능을 개발했고 역사적인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다 갖추어져 쓰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 개발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 됩니다.
우리는 이미 주어진 조건을 보며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신을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자존감을 가지고 열등감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지 말고 사명을 붙들고 쓰임 받아 열등감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족한 부분 집중하며 열등감으로 비관하지 말고 하나님이 쓰시는 미래를 기대하며 내게 주신 달란트 붙들고 열등감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2.08.26
삿6:11-18
오늘은 “탈출” 여덟 번째 시리즈로 “열등감으로부터 탈출”에 대하여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합니다. 자기 자신을 타인과 비교하여 무능하고 무가치한 존재로 생각하는 열등감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다 있습니다. 심리학자 맥스웰 말프는 사람의 95%는 열등감을 느끼고 있다고 합니다. 역대 서양의 천재(天才) 78명에 대한 정신 분석을 한 독일학자 란게아이히바움은 그 중 83퍼센트가 육체의 결함이나 가족관계, 성(性)에 대한 컴플렉스의 소유자로 심하건 덜 심하건 정신병 증세를 나타냈었다고 보고하고 있습니다. 소크라테스, 시져, 쟌다르크, 미켈란제로, 루터, 파스칼, 모리엘, 보올텔, 모짜르트, 뉴톤, 루소, 베토벤, 괴테, 비이런, 칸트, 나폴레옹, 헤르다링, 하이네, 쇼펜하워, 바그너, 비스마르크, 도스토예프스키, 니체. 릴케 등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누구나 다 정도의 차이이지 열등감은 있습니다. 신문에 보니까 잘생긴 인기 연예인 이병헌 씨도 열등감이 있다는 고백을 했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문제는 이 열등감을 어떻게 처리하느냐는 것입니다. 창조적으로 처리하느냐? 파괴적으로 처리하느냐?의 문제입니다. 건강한 사람은 현실적이고, 적절하며, 사회에서 통용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열등감을 보상하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합니다. 육체적 결함에서 오는 열등감을 발전적으로 승화시킵니다. 괴테, 쉴러, 밀턴, 줄 베른 등과 같이 시력이 나빠지자 정신력 연마에 힘을 써 위대한 작품을 쓰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브루크너, 모차르트, 스메타나, 드보르자크, 베토벤 등은 혹심한 청력장애라는 열등감이 오히려 소리의 아름다움으로 보상되었습니다. `사기(史記)'를 지은 사마천(司馬遷)은 흉노에게 포로가 된 패장(敗將)을 찬양했다하여 황제에게 거세를 당하였지만 이 열등감이 원동력이 되어 `사기(史記)'라는 초인적인 저작을 하게 되었습니다. 손자(孫子)는 단근형(斷筋刑)을 받고 절름발이가 된 후 `병법(兵法)'을 지었습니다. 희랍의 대웅변가 데모스데네스도 말을 잘 못하는 말더듬이었지만 그 열등감을 보상코자 자갈을 물고 해변에 서서 파도 소리를 이기는 발성 수련으로 대 웅변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열등감을 파괴적으로 처리하면 자기보다 더 약자를 만들어두고 그 약자에게 불만을 전위시켜 해소시킨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보다 형편없게 소외 격하시켜 자학함으로써 열등감을 해소시키려 합니다. 쉽게 체념해 버리는 것입니다 나는 별수 없는 존재야 세상을 냉소적으로 바라봅니다. 열등 콤플렉스에 걸려 매사에 자신감이 없고, 소극적이며, 자기를 경멸하고, 자포자기하며, 좌절하고 낙심합니다. 더욱 심화될 경우 마약복용, 강도, 절도, 살인 등의 범죄행동이나 자살 등으로 이어져 파멸에 이를 수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열등감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습니까? 태어난 가정환경이 좋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모님이 너무 가난하여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는 환경일 수 있습니다. 아버지가 알콜 중독으로 어려운 시절을 보낼 수도 있습니다. 부모의 이혼으로 누구에게도 말 못하는 열등감을 가지고 살 수도 있습니다. 남편의 외도와 폭력으로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신체적인 결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코가 낮고, 조금 몸이 무겁고, 키가 작고, 머리가 조금 덜 났고, 눈이 조금 커지다 중단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조금 안 예쁠 수도 있고, 다리가 조금 짧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쳐보기 민망할 수도 있습니다. 얼굴의 여드름, 코의 죽은 깨, 눈의 모양, 코의 모양, 광대뼈, 이마 등이 너무 크다며, 손톱이 맘에 안 든다고 특히 기형인 병에 의한 장애, 절름발이, 대머리, 언청이, 말더듬 등의 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더욱 열등감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용모가 IQ보다는 성공을 좌우한다."고 생각하며 외모에 대하여 열등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정신적으로 다른 사람에 비해 부족하다고 열등감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출신학교가 변변치 못하다고, 학교 성적이 나쁘다고, 직장이 내놓을 만 못하다고 직업이 숨기고 싶다고 교회 다니면서도 열등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을 돈도 없고, 명예도, 능력도, 권력도 없다고 열등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교회에 오면서도 좋은 차가 아니다고 열등감을 가지고 들어 올 수도 있습니다. 열등감은 상대와 비교하여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한 시대 위대하게 쓰임 받은 하나님의 사람 기드온도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당시 미디안이라는 나라가 이스라엘을 쳐들어 왔습니다. 칠년 동안 그들은 이스라엘을 착취하며 모든 곡식과 짐승을 빼앗아 갔습니다. 그런데 누구 하나 나서서 이들과 싸울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기드온을 사용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려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기 위하여 그를 불렀습니다. 그 때 기드온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기드온이 그에게 대답하되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비 집에서 제일 작은 자니이다(삿 6:15 현대어 번역) 자기 자신을 극히 약한 자라고 생각합니다. 제일 작은 자라고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라고 낙인찍는 것입니다. 자존감이 없습니다. 자신감도 없습니다. 사명감도 없습니다. 주어진 일을 회피합니다. 두려워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잠재력을 보지도 못합니다. 꿈도 희망도 없습니다. 자신을 쓸모없는 나약한 존재로 생각해 버리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열등감 때문입니다. 다른 가문에 비해 자기 가문은 보잘 것 없는 가문이고 그 보잘 것 없는 가문 중에 극히 약하다는 것입니다. 또 그런 가문의 아버지 집에서 자신은 가장 작은 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기드온을 어떻게 열등감으로부터 탈출시켜 사명을 이루게 하십니까?
우리가 어떻게 열등감을 극복할 수 있습니까?
1. 하나님은 이미 주어진 자신을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바라보고 자존감을 가지고 열등감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은 흔히 자기 자신을 너무 과도하게 평가 절하합니다.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고 자신을 정죄하고 모멸합니다.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기드온이 자기 개념을 어떻게 가지고 있습니까? 자기 존재에 대하여 어떻게 평가하고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습니까?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의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아개념이 지극히 부정적입니다. 이것이 더 나아가면 자기모멸, 자기 정죄에 빠지게 됩니다. 열등감이 강한 사람들은 자기 무능, 자기 열등, 자기 비하, 자기를 비웃음 등의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자신을 무능력한 존재로 인식하게 하고 자기 비하로 인해 스스로를 억압하고, 문제인으로 여기게 되며, 스스로를 부정적인 모습으로 변모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안 돼, 나는 별 수 없어, 나는 무능해, 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지는 것이 모든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야. 나의 눈은 너무 작아, 나는 멍청해, 나는 못생겼어, 나는 가난해, 나는 능력이 없어, 나는 입이 너무 커, 내 머리는 돌 머리야” 부정적인 자아상을 가지게 됩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힌 사람의 특징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타인과 비교하여 나 중심으로 자신을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미 주어진 것들입니다. 가정환경, 외모, 부모, 유전적으로 받고 태어난 조건들 이것들 변화시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어떤 태도로 대하느냐가 중요합니다. 모든 주어진 조건을 "내 가문, 나" 자기 자신에서 출발하여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러다보니 타인과 비교할 수밖에 없게 되고 비교하여 열등하면 열등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기드온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2절을 큰 소리로 같이 읽겠습니다. “큰 용사여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도다(삿6:12)” 작은 가문, 작은 자일지라도 민족을 구원할 용사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지금 기드온을 보는 시각은 기드온이 보는 시각과는 180도로 다른 것입니다. 사실 므낫세 지파가 기드온이 생각한 것처럼 그렇게 지극히 작은 지파입니까? 요셉의 큰 아들이 므낫세입니다. 요셉이 애굽의 대제사장 보디베라의 떨 아스낫와 결혼하여 낳은 첫아들입니다.(창41:51) 그는 혼혈아임에도 불구하고 야곱의 아들 반열에서 축복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창48:10) 국무총리 집안의 가정이 아닙니까? 물론 장자의 축복은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가나안 정복 전쟁에 용감히 참여했고 가나안 전쟁 때 요단 서쪽 전쟁에서 앞장서 싸웠습니다. 그래서 땅을 요단강 동쪽과 서쪽을 차지한 지파입니다. 사사 기드온, 입다를 배출하여 민족을 구원한 지파입니다. 하나님이 큰 자라고 하는데 스스로 에브라임에 비해 작은 자라고 단정하고 열등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대머리입니까? 키가 작습니까? 돈이 없습니까? 실패했습니까? 실력이 없습니까? 사람들이 삼류라고 말합니까? 못생겼습니까? 차가 작습니까? 늙었습니까? 학벌이 내 놓을 것 없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와 함께하시며 우리를 큰 용사로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씀해주시고 있습니다. 성도는 존귀한 자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키가 작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자들입니다. 눈이 작아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자들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온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여 천국 백성 만들기 위해 십자가에서 예수님을 피와 물을 다 쏟았습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 주었고 하나님과 핫라인을 설치해 주셨습니다. 독특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희귀한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하나님 자녀로서 신분이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신앙인들은 죽어 마땅한 존재라는 부정적인 자아상에서 새 생명을 얻은 고귀한 존재라는 긍정적인 자아상을 가져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열등감을 갖기에 충분한 조건이 있었습니다. 외모가 변변치 못했습니다. 말도 잘 못했습니다. 과거 경력이 예수 믿는 사람을 죽이는데 앞장서 내 놓을 것이 없습니다. 때로는 기도했는데 응답되지 않았을 때도 있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고난을 당하였습니까? 얼마나 많은 실패를 경험했습니까? 그러나 열등감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약한 것을 자랑합니다. 약한 것도 하나님 안에서는 열등감의 요소가 아니라 자랑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부득불 자랑할 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 11:30)"고 말씀합니다. 비교를 통해 자신을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된 자신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고전15:10)"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존재를 주시는 하나님의 솜씨를 인정하여야 합니다. 자신의 약점을 비하 하거나 은폐하지 말고 시인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열등감을 가지고 감추려 할 필요가 없습니다. 외적조건이 내적만족과 행복을 좌우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모세도 열등감이 있었습니다. 출애굽기 4장 10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의 민족 지도자로 하나님이 세웁니다. 그 때 모세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출4:11-12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뇨 누가 벙어리나 귀머거리나 눈 밝은 자나 소경이 되게 하였느뇨 나 여호와가 아니뇨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자기 자신이 만든 틀로 자신을 바라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비교의식이 아니라 창조의식으로 단독자로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이렇게 만든 이유가 있습니다. 눈을 이렇게 만든 이유가 있고 발을 이렇게 만든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나를 이 모습 이대로 만든 이유가 있다는 말입니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는 것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한 시대 사용하십니다. 세상사람 다 나를 좋아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나를 좋아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우리를 사랑하고 있습니까? 독생자를 주시기까지 사랑합니다. 그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였고 지명하여 불렀습니다(사 43:1) 모태에서부터 우리를 불렀습니다(사44:2)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렘 31:3)”라고 말씀하십니다. 환난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나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다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 딸아 내게 축복 더하노라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그것뿐이에요 사랑한다 아들아 내가 너를 잘 아노라 사랑한다 내딸아 내게 축복 더하노라”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하시는 하나님과 함께 순간순간 다가오는 열등감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2. 현재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지 말고 사명을 붙들고 쓰임 받아 열등감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왜 부정적 자아상을 갖습니까?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의 가치를 부정적으로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키 작은 것 가치가 없고, 눈 작은 것 가치가 없고, 병든 것 가치가 없고, 가난한 것 가치가 없고, 실패한 것 가치가 없고 내가 가지고 있는 것들 모두 가치가 없다고 평가하기 때문에 열등감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자신을 평가하며 열등감에 사로잡힌 기드온에게 하나님은 무엇을 합니까?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민족 구원의 사명을 주십니다. 14절을 보십시오. “너는 가서 이 너의 힘으로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라 내가 너를 보낸 것이 아니냐 하시니라 (삿 6:14)” 기드온을 누가 쓰시겠다고 합니까? 하나님이 쓰시겠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 때 열등감에 사로잡힌 기드온은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15절을 보십시오. 기드온은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라고 말합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할 만한 가치 있는 무엇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문도 좋지 않고, 능력도 없고, 전술도 없고, 군인도 없고, 돈도 없고, 따르고 지지하는 사람도 없고, 인정해줄 부모도 없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7년 동안이나 핍박과 압제를 당하고 갖은 수탈을 당하고 있는데, 그 상황을 타개할 아무것도 없는데 무엇으로 그 일을 이루겠느냐는 것입니다.
그 때 하나님은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6절 말씀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하리니 네가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을 치듯 하리라 하시니라 (삿 6:16)”
이 말씀이 여러분과 저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디안 사람 치기를 한 사람 치듯하게 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명 붙들고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사명을 붙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주어진 조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사명을 붙드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열등적 요소가 많이 있지만 하나님이 주신 사명 붙들고 나아가면 우리 하나님이 그 사명을 이룰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니다. 키가 작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있으면 사명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눈이 작도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있으면 사명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돈이 없어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있으면 사업의 사명을 이룰 수 있는 것입니다. 에훗는 왼손잡이였습니다. 오른 손은 불능(불구)자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사명을 주시고 그를 사용했습니다. 드보라는 당시 물건처럼 취급당하는 여자였습니다. 하나님은 드보라에게 사명을 주시고 함께하여 한 시대 사용하였습니다. 삼갈은 소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사명을 붙들고 하나님께 쓰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 땅에 우연히 존재하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수동적인 존재로 지으신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목적을 추구하는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인간은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목적을 가지고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각자 사명을 주시고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여해 주신 사명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했기 때문에 가나안 족속을 바라보며 자신들을 '메뚜기'같은 존재로 열등감을 가지고 사명의 땅을 바라보면서도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사명 붙들면 열등감의 노예가 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사명을 받는 순간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창12:1-3). 모세도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 때는 혼란을 경험하였지만 사명을 붙들고 40년 동안 뜨겁게 쓰임 받았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지 못할 때 열등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능력이 없다고, 공부를 못한다고, 기능이 없다고, 실력이 없다고, 다른 사람보다 머리가 둔하다고 열등감에 사로잡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래 너 가문 별 볼일 없어, 그래 너 능력 없어 그것 내가 너보다 잘 알고 있어 그러나 내가 너를 쓰는 것은 그렇게 때문에 쓰는 거야 능력 있는 내가 있지 않느냐? 능력 있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통하여 나의 일을 할 거야” 라고 말씀합니다. 보십시오. 무한하신 하나님이 우리 곁에 있고 내 손을 잡고 계십니다.
3. 부족한 부분 집중하지 말고 내게 주신 달란트 붙들고 열등감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열등감을 가지는 것은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능력이 어떤 일을 이루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못하다고 앞으로도 다른 사람보다 못하라는 법은 없습니다. 내게 없다고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 이룰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장점과 단점은 동시에 있는 것입니다. 온전한 사람은 세상에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단점들이 있고 부끄러운 점이 있고, 비교하여 열등한 것이 있습니다. 기드온은 지금, 민족을 구원할 만한 능력이 없을 수 있습니다. 따르는 사람도, 지도력도, 군사적 전략도, 인기도, 지지도도 없을 수 있습니다. 사실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당시 별 볼일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실력과 재능,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바알신과 아세라신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6:25). 하나님을 높이는 민족 지도자로 나서기에는 적합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나서면 “너나 잘하세요.”라는 말을 들을 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에브라임 지파가 따르지 않았습니다(8:1). 그는 다윗처럼 용기도 없었습니다.(삿6:11) 보고 미디안 사람에게 알리지 아니하려 하여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였던 사람입니다. 두려움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27). 그렇다고 그는 강력한 믿음의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이 사실을 여러 번 반복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17, 36, 39, 7:10)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이런 기드온을 불러 사용하십니다. 비록 그가 부족한 자이지만 하나님을 그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현재 부족한 부분이 있다고 열등감을 가지고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부족하기 때문에 더욱 전적으로 하나님께 의지할 수 있습니다. 여러 가지로 부족하지만 기드온에게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표징으로라도 하나님을 믿은 믿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끊임없이 질문하고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고 문제를 풀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겨자씨만 한 믿음이지만 이 믿음이 점점 능력있는 믿음으로 발전합니다. 처음 기드온의 믿음을 보십시오. 13절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면 어찌하여 이런 어려움이 민족에게 다가왔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사업도 잘 되고 성공하고 자식도 잘되고 건강해야 할 텐데 민족이 망했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조상을 기적적인 방법으로 구원해 주었다고 하는데 그것 다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천지 창조를 하고, 모세를 통해 가르고, 만나를 먹이고, 반석에서 물을 내고, 그것이 지금 나와는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런 이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이시다면 왜 나를 이 모양 이 꼴로 만들고, 우리 가정이 이렇게 어렵게 되고, 우리 민족이 왜 이런 비참한 꼴을 당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무엇을 요구합니까?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면 표징을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납득할 만한 증표를 보여 주라는 것입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염소 새끼 한 마리를 준비합니다. 무교병을 준비합니다. 자신이 만나고 있는 분이 하나님인지 사람인지를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 음식을 먹으면 사람이고 먹지 않고 제사를 받으면 하나님일 것입니다. 그런데 국물을 붓게 하고 그것을 제물로 불태워 버립니다. 그 때 기드온이 어떤 고백을 합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했다고 합니다. 24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고 여호와 살롬을 외칩니다. 그리고 바알제단을 헐어 버립니다. 믿음이 점점 성장합니다. 결국 300으로 미디안을 믿음과 전적인 순종으로 이깁니다. 이 당시 미디안 군대는 얼마나 될까요? 삿8:10을 보십시오. 135000명이나 됩니다. 그런데 300명으로 싸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7:2과 7:4을 보십시오. 믿음이 이기는 것입니다. 믿고 나아가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기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기드온은 이 사실을 깨닫습니다. 미디안을 물리쳤을 때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8:22)
그러나 기드온 자신은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이같이 대답하는 것입니다.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8:23)
개인의 역사나 나라의 역사나 결국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 행로에 우리는 서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의 조건을 보며 열등감에 사로잡혀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작은 믿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있어서 사용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작은 내 믿음도 사용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 내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나를 통해 하시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는(빌 4:13)” 것입니다. 부족한 부부 집중하면 열등감만 더 커집니다. 내게 있는 것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내게 주신 달란트 믿음으로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 인생을 달라집니다. 아브라함 모든 것이 뛰어난 사람 아닙니다. 아내를 누이라고 속이는 거짓말도 했습니다. 아버지를 떠나지 못해 망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겨자씨만한 믿음과 순종이 있었습니다. 야곱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 아닙니다. 형을 속이고, 아버지를 속이고, 욕심으로 가득 찬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약속을 믿는 집념이 있었습니다. 모세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이 아닙니다. 살인하였습니다. 이것 한 가지만으로도 오늘날 사회에서 매장됩니다. 다윗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 아닙니다. 유부녀를 범했고 그의 남편을 살해하게 하였습니다. 솔로몬 모든 것이 갖추어진 사람 아닙니다. 자식들 교육 잘 시키지 못했습니다.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열등감으로 인생을 망치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달란트를 통해 한 시대 하나님의 손에 쓰임 받았습니다. 바울처럼 하나님께 내 달란트 쓰임 받아 열등감을 가질 만한 요소가 자랑거리가 되게 하여야 합니다. 사울처럼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윗에게 인기 빼앗겼다고 그것으로 열등감에 사로잡혀 인생 망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세계적인 지휘자 토스카니니는 원래 바이올린 연주가였는데 시력이 나빠 악보를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자 자신의 악보는 물론 다른 악기 악보까지 다 외워 세계적인 지휘자 반열에 올랐다고 합니다. 또한 체격이 왜소하고 눈이 나빴던 로널드 레이건은 연기로 열등의식을 이겨
내고 최고 통치자까지 지냈습니다. 오바마는 흑인에게도 백인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열등의식 때문에 흑백 모두를 아우르는 대통령이 되어야 하겠다는 꿈을 가지고 결국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단점에 하나님의 은총의 햇볕을 쬐어 주면 성장하고 건강해 집니다.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4세 때까지 말을 못했고 7세가 될 때까지 글을 읽을 줄 몰랐답니다. 작곡가 베토벤의 음악선생님은 “베토벤은 작곡가로서는 아주 절망적이야!”라고 평가받았다고 합니다. 발명왕 에디슨은 어렸을 때 그의 담임선생님에게서 “저능아로 배울 수 없는 아이”라는 핀잔을 들었다고 합니다. 열등아가 되어 초등학교 3개월 다니다 학교를 그만 두었습니다. 증기기관을 발명하여 산업혁명의 계기를 만든 J 와트도 "얼간이"로 낙인 찍혀 아이들로부터 놀림을 당했었답니다. 사과나무에서 떨어지는 열매를 보고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뉴턴도 초등학교시절에는 "낙제생"이었습니다. "상대성원리"로 발견한 아인슈타인도 초등학교시절에는 성적이 반에서 최하위였고 선생님은 그를 "둔패기"로 취급했답니다. 나중에는 다른 아이들에게 방해가 된다 해서 등교를 금지시켰을 정도였습니다. 세계적인 놀이동산 디즈니랜드를 세운 월트 디즈니는 한때 신문사에서 삽화를 그렸으나 ‘창의성’이 없다고 쫓겨났다고 합니다. 성악가 카루소는 음악선생님으로부터 “네 목소리를 가지고는 절대로 성악가가 될 수 없어”라는 혹평을 받기도 했다고 합니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에서 가난한 농부의 딸로 태어나 읽을 줄도 모르고 쓸 줄도 모르는 소녀였습니다. 노벨은 어릴 때부터 유난히 몸이 쇠약했고 너무도 몸이 쇠약해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겪기도 했습니다. 동생마저도 폭발사고로 죽게 되었고 아버지는 화병으로 앓아눕게 되었습니다. 링컨은 통나무로 지어진 오두막집 토방에서 태어났고 마루조차도 없는 집에서 살았습니다. 정규교육을 받은 시간은 전부 합쳐서 6개월이 고작이었습니다. 셰익스피어는 14세 때에 학교를 그만두고 결혼 한 후에도 런던으로 가서 극장의 마구간지기로 일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자기 재능을 개발했고 역사적인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다 갖추어져 쓰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 개발하여 하나님께 쓰임 받으면 됩니다.
우리는 이미 주어진 조건을 보며 열등감에 사로잡히지 말고 자신을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자존감을 가지고 열등감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우리는 현재 자신의 가치를 부정하지 말고 사명을 붙들고 쓰임 받아 열등감으로부터 탈출해야 합니다.
우리는 부족한 부분 집중하며 열등감으로 비관하지 말고 하나님이 쓰시는 미래를 기대하며 내게 주신 달란트 붙들고 열등감에서 탈출해야 합니다.
열린교회/김필곤목사/2012.0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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