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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삿8:4-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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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
사사기(19) 심은 대로 거둡니다 (삿 8:4-17)
거울을 보며 화난 얼굴을 하면 자신이 화난 모습으로 비춰지고 웃는 얼굴을 하면 자신이 웃는 모습으로 비춰집니다. 삶은 거울처럼 펼쳐집니다. 남에게 친절하면 남도 내게 친절하고 남을 악하게 대하면 남도 내게 악하게 대합니다. 상대의 행동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십시오. 남이 내게 불친절하거든 “나도 모르게 그에게 불친절했구나!”라고 여기고 남이 내게 섭섭한 말을 하거든 “나도 모르게 그에게 섭섭한 말을 했구나!”라고 여기십시오.
얼핏 보면 인과응보는 기독교 사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좀 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인과응보의 원리가 없다면 십자가도 없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대가가 있었기에 죄인이 살아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한다고 해서 거저 봐주고 용서한다고 해서 거저 넘어가지 않습니다. 값을 지불하고야 용서가 있고, 희생의 대가를 지불하고야 사랑이 있습니다.
심은 대로 거듭니다. 그런데 왜 그 원리에 때로 의문을 가집니까? 타이밍 때문입니다. 오늘 선한 일 하고 당장 내일 복을 받는다면 선한 일 하기 쉽고 오늘 악한 일 하고 당장 내일 벼락을 맞는다면 악행을 그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보상과 보응이 지연되기에 심은 대로 거둔다는 사실을 가볍게 여기지만 오늘 심으면 언젠가 하나님의 때에 분명히 거둡니다.
보응 방법도 다양합니다. 흔히 갑에게 해를 입히고 나중에 갑으로부터 보응을 받아야 보응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갑을 배반하면 꼭 갑에게 배반의 보응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을로부터 배반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 원리를 몰라서 보응이 아예 없는 줄로 알지만 그것은 착각입니다. 그처럼 오래 전에 자기 모르게 심어놓은 것을 현재 거둘 때가 많습니다. 그 이치를 알면 원망과 불평을 줄일 수 있습니다.
오늘의 추수는 우연이 아닙니다. 알게 모르게 심은 것이 오늘 결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상이 없거나 늦거나 적다고 불만을 가지지 마십시오. 베드로후서 3장 9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하나님의 보응이 늦어지는 것이 고맙다면 하나님의 보상이 늦어지는 것도 고맙게 여기십시오.
작은 선행 하나 해 놓고 당장 보상이 있기를 바라면서 조바심을 낸 적은 없습니까? 그때 하나님이 “그렇다면 네가 죄지을 때에 그 벌도 당장 있게 할까?”라고 하면 뭐라고 대답하겠습니까? 차라리 복이 늦어지는 것이 낫습니다. 결국 복이 늦어지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보상의 지연을 통해 보응의 지연을 생각하면서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은 공평하신 하나님입니다. 뿌린 대로 거둡니다.
< 보응과 보상 >
기드온의 3백 용사가 이스르엘 골짜기에서부터 미디안과 싸우며 요단강을 건넜습니다. 그리고 피곤한 육신을 끌고 계속 적군을 추격했습니다(4절). 그때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피곤한 상태이기에 먹을 떡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5절). 숙곳은 요단 동편의 얍복강 북쪽에 있는 갓 지파가 거주하는 성읍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선한 싸움을 하는 동족의 고통을 외면하면 안 되는데 기드온의 요청을 외면했습니다. 그들의 외면에 기드온이 분노하며 승전 후에 가혹하게 벌을 내리겠다고 했습니다(7절).
그 다음으로 브누엘로 올라가서 똑같이 떡을 구했지만 브누엘 사람들도 숙곳 사람들처럼 그 요청을 거절했습니다(8절). 브누엘은 야곱이 얍복강을 건너기 전에 하나님을 뵈었던 브니엘(창 32:30)로서 숙곳 동쪽 약 9km 지점에 위치한 역시 갓 지파의 성읍이었습니다. 그들도 동족으로서 기드온 군대를 도와주어야 마땅했지만 외면했습니다. 그러자 기드온은 그들에게도 말했습니다(9절).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 이 망대를 헐리라.”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의 반응이 한편으로는 이해됩니다. 비록 미디안이 전쟁에서 패해 쫓겼지만 아직도 기드온의 소수의 부대가 미디안 대군을 완전히 정복할까 하는 의구심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렇게 패퇴해서 칼 든 자 십이만 명이 죽었지만 여전히 남은 만 오천 명 가량이 병사가 있었습니다(10절). 그 숫자도 기드온 삼백 용사에 비하면 무려 50배입니다. 게다가 기드온의 삼백 용사 중에서도 전사자가 있었을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 차이는 커질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기드온 군대가 쉽게 이길 것이라고 여기겠습니까?
결국 그 전쟁은 기드온의 완전한 승리로 끝났습니다(11-12절). 그 소식을 듣고 숙곳 지도자들과 브누엘 사람들은 땅을 치고 후회했겠지만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무서운 심판을 받습니다(16-17절). 심은 대로 거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사명을 따라 나가는 사람을 소수라고 외면하고 상처를 주면 결국 그에 합당한 보응을 받습니다. 반면에 힘과 숫자에 쏠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나가는 사람을 도와주는 거룩한 소수가 되면 결국 그에 합당한 보상을 받습니다.
ⓒ 이한규목사 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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