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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삿11:29-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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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오갑 교수 |
참고 : | http://www.saegilchurch.or.kr/136194 |
입다의 맹세
(사사기 11:29-40)
2013년 6월 2일 주일예배
이오갑 교수
(그리스도대학교 조직신학)
문상을 가는 일이 있다. 그런데 간혹 아직 어린 자식이 죽어서 장례를 치르는 집에 가면 정말 안타깝고 슬프다. 어떤 말로 위로해야 할지 모른다. 그 부모들 심정이 어떨까? “부모가 죽으면 산에다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도 있지만, 뭐라 말할 수 없는 큰 쓰라림과 고통을 겪으리라.
자식이 죽는 것도 견딜 수 없지만, 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한다면 어떨까? 있을 수 없는 끔찍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에, 자기 자식을 자기 손으로 죽여야 하는, 죽이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자식이 죽는 것도 아니고, 죽여야 했던 사사 입다의 이야기이다.
입다의 아버지는 길르앗인데, 길르앗이 부인을 두고도, 기생에게 가서 낳은 아들이다. 그러니까 입다는 길르앗의 서자이고, 들여온 자식이다. 그런데 본부인의 자식들인 배다른 형제들은 입다를 구박했다. 이복형제에다가 기생에게서 얻어온 자식이라고 해서, 따돌리고, 괴롭히고, 못살게 굴었다. 그런데 집안의 형제들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동족들도 그랬다는 것이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입다를 멸시하고 모욕했다. 입다가 어느 정도 크니까, 상속의 문제가 염려스러웠던 형제들은 ‘너는 다른 여자에게서 난 자식이라 가업을 잇지 못한다’며 입다를 쫓아냈다.
그래서 입다는 멀리 돕이라는 지역에 가서 살았다. 그런데 입다가 건달 끼가 있었는지, 개역성경에 따르면 “온갖 잡류가 그에게 모여왔다”고 한다. 깡패들, 건달들과 어울리면서 대장노릇을 했다는 것이다.
세월이 얼마나 흘렀을까? 이웃 나라였던 암몬이 이스라엘에 쳐들어왔다. 이스라엘의 원로들은 암몬을 물리칠 궁리를 하다가 입다에게 구원을 호소했다. 자기들이 멸시해서 쫓아내다시피 했던 입다에게 와서 이스라엘의 장관(총사령관)이 되어 암몬을 물리쳐달라고 부탁했다.
입다는 기생 아들이라고 구박받았던 것이 억울하지 않았을까? 자기를 모욕하던 자들이 다급해지니까 와서 매달리는 게 얄밉지 않았을까? 그러나 입다는 마음을 추스리고, 협상 끝에, 이번 일을 통해서 자신이 이스라엘의 한 사람이 될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머리’가 되기로 하고, 대장직을 수락했다.
입다는 암몬과 싸우기에 앞서서, 먼저 사절단을 보냈다. 그 땅의 소유권분쟁을 말로써 해결하려는 뜻이었다. 싸우지 않고 말로써 평화적으로 해결하면 더 좋다. 사절단은 “이 땅이 누구 땅이냐, 이러 저러 해서 우리 땅이 된 건데, 너희가 왜 빼앗으려고 하느냐, 물러가는 것이 옳다!”라면서 물러갈 것을 종용했다.
그러나 암몬 왕은 그 말을 듣지 않고 싸움을 고집했다. 입다도 ‘이젠 전쟁 밖에는 없다’며 싸움에 응한다. 결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입다는 전쟁터에 나가기에 앞서 하나님께 서원했다. “주께서 암몬 자손을 물리치고 무사히 돌아오면, 내 집에서 제일 처음에 만나는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겠습니다!”
번제라는 게 무엇인가? 칼로 목을 따서 죽인 다음에 불살라서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전쟁에 이기고 돌아오면 제일 처음 만나는 사람을 잡아서 하나님에게 번제로 바친다는 맹세이다.
그리고 전쟁에 나갔는데,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셨다. “아로엘에서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빔까지 크게 무찔렀더니, 암몬 자손들이 항복했다”(11;33)고 한다. 성을 스무 개나 쳐서 무찌르고, 아벨 그라빔에서는 대승을 거두고, 암몬을 물리쳤다는 것이다.
이겼다! 얼마나 좋았을까?! 그것도 대승을 거두었고, 노획물들, 전리품들은 또 얼마나 많았을까? 엄청나게 기쁘고 감격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입다는 신이 나서 집에 돌아왔는데, 그 입다를 제일 먼저 나와서 환영했던 사람은 바로 그의 딸이었다. 무남독녀 외동딸. 그 딸이 아버지가 이기고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는, 가장 먼저, 소고를 치고 춤을 추면서 나와서 환영했다. 몇 살이나 먹었을까? 순결하고 아름다운 소녀, 꽃 같은 처녀였을 텐데, 그 딸이 아무 것도 모르고 춤추면서 아버지를 맞이했다.
그걸 본 순간, 입다의 가슴이 어땠을까? 말도 안 된다고 했겠다. 황망하고, 믿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잘 못 본 것이기를, 실제가 아니기를 얼마나 바랐을까? 그러나 사실이고, 실제였다.
입다가 왜 그런 무모한 맹세를 했을까? 왜 말도 안 되는 그런 서원을 했을까? 고대 세계에는 사람을 희생제물로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또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풍습도 있었다. 몰록 숭배의 풍습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그런 풍습을 엄격하게 금지하셨다(레 18;21, 20;2-5, 신12;31, 18;10).
그런데 왜 입다는 사람을 제물로 드리겠다는 무지한 서원을 했을까? A. 펜나(Penna)라는 학자는 입다의 성격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입다가 건달이고 주먹 대장으로서, 호탕하고 충동적인 기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깊이 생각해보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맹세해버리고 말았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찮다. 알베르토 소긴(Soggin)이라는 학자는 ‘입다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입다가 이스라엘의 원로들과 협상한 것이라든지, 암몬 왕에게 사절단을 보내서 협상으로써 물리치려고 했던 것이라든지...’ 그런 것을 볼 때, 입다는 신중하고 빈틈없는 사람이지 호탕하고 충동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설명이다. 일리 있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신중한 사람이 왜 그런 무모한 맹세를 했느냐? 거기에 대해서는 대답이 없다.
내가 볼 때, 입다가 그렇게 어리석고 무모한 맹세를 한 까닭은 불안했기 때문이다. 입다가 전쟁에 나갈 때, 싸움에서 질 수 있고, 자기가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불안한 것이다. 이겨야 하는데, 살아 돌아와야 하는데... 어떻게 될지 모른다. 보장이 없다. 질 수 있다. 자기가 죽을 수 있다. 그러니까 불안했다.
불안 때문에 하나님께 맹세했다. “내가 이기고 무사히 돌아오면 집에서 제일 먼저 보는 사람을 번제물로 바치겠다. 그러니까 이기게 해 달라! 돌아오게 해 달라!” 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자기 딸을 자기 손으로 죽여서 제단에 바치는 것이었다.
불안을 이겨야 한다. 불안을 견디고, 불안을 극복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불행하게 된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다. 불안이 인간의 가장 큰 원수라고 할 수 있다. 성경에는 사람들이 불안을 이기지 못해서 잘못되고 실패하는 이야기들이 많이 나온다. 불안이 일을 그르치게 하고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앗아갈 수 있다.
성경에서만이 아니라 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불안이 일을 망치고, 사람을 망치고, 파괴하기까지 하는 일이 많다. 멀쩡한 사람들이 어이없는 일을 한다.
며칠 전 신문에서, 강남에서 학원가 전문 상담을 하다가 사교육 없는 세상을 위한 연구소를 차리고 활동하는 시민운동가의 기사를 읽었다. 공부를 많이 시킨다. 강남에서만 그런 건 아니다. 공부 잘하게 하기 위해서 돈도 많이 쏟아 넣고. 아이에게 밀착해서 공부하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든다. 왜 그런가? 그 시민운동가가 지적하는 이유는 “내 아이를 승자로 만들어야 하는 욕심”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 아이만 처질 수 있다는 불안”이라는 것이다.
말을 꺼내기 조심스럽지만, 유명대학생인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한 일이 있었다. 우등생인 고등학생 아들이 어머니를 살해한 일도 있었다. 성적 때문에 뛰어내리는 아이들도 여기저기에 있다. 그런 현실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런 불행은 어느새 가까이, 아주 가까이 와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뤼크 페리라는 프랑스 현대 철학자는 “세계화 시대에 왜 공포가 확산되는가?”라는 강연에서 이런 말을 했다. “고뇌, 공포에 사로잡힐 때 사람들은 어리석어지며 자기중심적으로 변한다.” 두려움, 공포, 불안, 조급증... 그것이 사람들을 어리석게 만들고, 자기도 망치고 남들도 망치고, 심지어는 자식까지도 망치고, 가정이나 사회나 교회나 문화를 망가뜨려놓는다. 입다의 이야기가 어찌 입다 만의 이야기일까?
입다가 전쟁에 나갈 때, 자기 속에서 일어나는 불안을 이겼었더라면, 그런 무지한 서원을 안 했을 것이고, 눈에 넣어도 안 아플 꽃 같은 딸을 자기 손으로 죽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불안하다. 전쟁에 나가는 것이 왜 불안하지 않겠는가? 칼로 사람들을 죽이고 죽는 전쟁 앞에서 불안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꼭 전쟁이 아니어도, 살다보면 불안한 일이 많이 생긴다. 이게 잘 될지... 어떻게 되는 건 아닌지... 구조조정이 닥치는 데 살아남을 수 있을지... 취업대란이라는데 취직할 수 있을지... 자식들은 커가는 데 여전히 비정규직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이렇게 끝나고 마는 건 아닌지...
상황이 나쁘고, 주변 조건이 안 좋아서 뿐만 아니라 인간 자체가 약하다. 힘이 부친다. 자신도 없다. 게다가 상황은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니 더 불안하다. 사는 일 자체가 막막하고 아득하다. 그러니까 힘들고, 불안하다.
그러나 문제는, 불안하다고 해서, 뭐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데 있다. 불안하다고 해서 뭐가 나아지는 것도 아니다. 불안이 뭔가를 해줄 수 있는 게 아니다. “너희들이 염려한다고 키를 한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는 말이다. 오히려 불안은 더 힘들게 하고, 문제를 더 크게 만들고, 더 나쁘게 만들 수 있다. 잘 견디고 있는 옆 사람까지도 흔들리게 만든다.
불안하기 때문에 열심히, 더 악착같이 할 수는 있다. 워커홀릭! 불안하기 때문에 더 일에 집착하는 것이다. 사람에 더 집착하는 경우도 있고, 돈에 더 집착하기도 하고, 술에 더 집착하거나 약물에 더 집착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것이 그 사람을 망친다. 중독이다. 노예가 되는 것이기도 하다. 그 사람의 정신과 육체를 갉아 먹는다. 자유가 없고, 편하지 않다. 자기도 망치고 가족과 주변도 망쳐놓는다. 불안을 잊으려고 한 것이지만, 불안에 먹히고 만 것이다. 불안을 잊는 게 아니라 이겨야 한다. 불안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믿음으로 이긴다. 믿음이 있으면 불안을 이기고, 믿음이 없으면 불안에게 먹히고 만다. 입다가 불안에 사로잡혀서 그런 무모한 맹세를 했던 것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이라는 믿음, 또한 하나님은 전능해서 대적할만한 자가 없다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의 뜻이 아니라면 결코 이스라엘이 패전할 수 없으며, 혹시 이스라엘이 패전한다고 해도, 거기에는 이스라엘을 위한 어떤 다른 선한 뜻이 있어서 그렇다는 믿음, 그래서 그 하나님과 함께라면 져도 지는 게 아니고 죽어도 죽는 게 아니라는 믿음, 그런 믿음이 있었다면, 입다가 그렇게 자기 집안 사람 중에서 하나를 잡아 바치겠다는 무모한 맹세를 했겠는가?
불안은 사람을 죽이지만, 믿음은 사람을 살린다. “믿음으로 구원을 얻고, 믿음으로 산다”고 했지만, 믿음은 사람을 살린다. 자기 자신을 살리고, 가족과 주변과 사회를 살리는 길이다.
믿음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예수는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렇게 하찮은 참새라도,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다”(마10;29-30)고 말했다.
우리 하나님은 바로 그런 하나님이다. 우리는 그 하나님의 자녀이다.
전통적으로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른다. 힘도 있고, 사랑도 있고, 자녀를 위해 끝까지 희생하고 헌신하고, 자녀를 좋게 해주는 어버이와 같다는 뜻이다.
세상의 부모는 힘이 없고, 지식이 없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힘이 있고,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것을 행할 수 있는 전능한 분이다.
세상의 부모는 자식을 나쁘게 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나쁘게 하는 일이 없다. 세상의 부모는 자식을 학대하는 일이 있고, 버리는 일도 있지만, 하나님은 어떤 경우든지, 자녀를 사랑하고, 잘 되게 하고, 귀하게 여긴다.
혹시 우리에게 어렵고, 힘든 일이 생길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잘되게 한다. 우리를 강하게 한다든지, 인격적으로 성숙하게 한다. 그런 저런 이유로써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지만, 그것마저도 우리를 좋게 하기 위해서, 잘되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다.
그런 믿음을 가지면, 불안을 이길 수 있다. 그런 전능하신 하나님, 선한 의지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그분과 함께, 험한 바다와 같은 인생을 헤쳐 나가기를 바란다. 굳센 믿음을 가지고 시시각각 닥쳐오는 불안들을 극복하고, 날마다 참된 평화와 자유를 누리기를 기원한다.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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