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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상1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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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경형목사 |
참고 : | 궁극교회 주일예배 |
◆ 예수 믿는 우리가 성경을 잘 알아야 함은 물론이고, 또한 믿는 사람으로서 인간세상에 살아가면서 지켜야 할 기초적인 상식도 알아야 한다. 일반적인 생활의 상식도 성경에 의미적으로 다 들어 있다. 그런데도 기독자들이 공중도덕이나 공동생활에서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 많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들에게 욕을 얻어먹고 외톨이가 되고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을 따르다가 받는 핍박이 아니라 미련하고 어리석고 목이 곧고 타락적 주관성이 강한 자기의 잘못으로 겪는 핍박이 많다.
성경에 약속의 땅을 바라보고 가는 이스라엘은 먼저 육신이 애굽을 떠나야 한다. 아울러 마음도 애굽을 떠나야 한다. 몸이 애굽을 떠났더라도 선악과 따먹은 지식에서 나온 가치판단과, 이해타산과, 자기의 행복성, 자기의 출세를 좇는다면 애굽사람들이 당한 열 가지 재앙에 해당이 된다. 예수 믿는 사람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지혜적으로 흐리면 남 때문이 아니라 자기의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자타에게 고통을 주게 된다.
믿는 사람은 자기의 신앙양심에서 ‘옳다. 아니다’ 하는 것을 웬만하면 알 수 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자기 양심을 통해 ‘옳다’ 하고 마음을 두드릴 때 이것을 짓밟아 버리면 이것은 성령 훼방 죄요, 자기가 자기의 구원을 죽이는 거다. 이러면 그만큼은 자기의 신앙이 자라지 못하고, 믿는 사람으로서 세상에게 덕이 안 된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날마다 고쳐가면서 진보 발전이 되어야지 자꾸 안 가고자 주저앉고 게으름을 피운다면 그 마음은 육성이다. 이러면 하나님께 사랑을 못 받는다. 하나님의 사랑은 보통 교회로 통해 나타난다.
세상에는 생명과를 먹은 지식과 선악과를 먹은 지식 두 가지밖에 없다. 생명과를 먹은 지식으로 사는 사람은 생명적으로 사는 운동을 하고, 선악과를 먹은 지식으로 사는 사람은 죽은 운동, 죽은 생각, 죽은 취미로 산다. 주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데, 먹고 마시는 것을 주격으로 놓고 사는 사람은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 인간은 자기의 코앞의 일도 못 보는데 사람을 외모를 취한다면 이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영원한 앞날을 미리 보겠느냐?
우리는 예수 믿으면서 날마다 물질선 인정선 생명성을 끊는 거다. 주님께서 ‘부모 형제를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고 하신 것은 당신은 빛이시니 우리가 이 주님을 따르면 세상을 사는 방법을 알게 되고, 영원히 행복하고, 영원히 영능의 실력자가 되고, 영원히 영광자가 된다는 거다. 그런데 예수 믿는 사람이 대부분 이 세 가지를 못 끊는다.
세상의 물질선 인정선 생명선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즉 영적인 깨달음의 이치를 보여주기 위해 일반계시로 임시적으로 있는 거다. 그런데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없어질 것을 붙잡으려고 자기의 소원 목적과 일생을 여기에 걸어놓고 산다. 이것은 구름 같은 인생이고 초로와 같은 인생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새날이 오면 자기의 세상은 없다.
가견적 현상적인 이 세상은 성도의 이룰구원에 이용물 사용물 활용물이다. 우리가 보는 성경책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를 부활시켜서 하늘로 데리고 가실 때 우리와 함께 하늘나라로 올라가는 게 아니라 세상이 불탈 때 같이 불에 타버린다. 우리가 말씀에 순종해서 주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진 것은 불에 안 탄다. 그 이유는 주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진 것은 물질과 상관이 없는 신령체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를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대로 지었다’고 하는 말씀에는 안 타지는 자기도 들어 있다.
그런데 성경을 문자적 표면적으로 보면 눈에 보이는 세상것을 기준으로 해석을 하게 되고, 이러면 영적인 면에 그만큼 지장이 생긴다. 그만큼 하나님의 성품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껍데기를 붙잡으면 알맹이를 놓치게 된다. 예수 믿으면서 아무리 충성봉사를 많이 하고 종교적 이력과 업적을 많이 쌓아도 자기 속이 주님의 성품을 입지 못하면 헛믿은 거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동이나 활동이 아닌 마음의 중심을 보고 역사하신다. 즉 믿는 사람의 신앙양심이나 일반적인 심성을 보고 역사하신다. 어떤 행동이나 활동이나 말을 하는 마음의 중심을 보고 역사하신다. ‘성령을 받았느냐, 아니냐’ 하는 것은 이런 면을 두고 말하는 거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 악한 데가 참 많다. 진리를 전한다고 하는 목회자들에게 악한 데가 많다. 자기의 잘못을 남에게 돌리기도 하고,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악한 일을 시켜놓고 안 시킨 것처럼, 자기는 의인인 것처럼 한다. 이것은 그 성질이 뱀의 성질이다. 이런 일들은 하나님 앞에 재앙을 받게 되니 자기 속에 이런 게 들어 있으면 자기 재앙이고, 가정의 재앙이고, 이 재앙이 자손에게도 내려가게 되니 말씀으로 이런 죄악성을 자꾸 씻어내야 한다.
불신세상은 모든 문제의 원인이 사람이라는 것을 잘 모르고 제도나 법에 이유를 댄다. 교회는 주님이 보시는 사람의 이면적인 것을 봐야 한다. 기독자는 하나님의 기준으로 사는 거다. 영을 기준으로 사는 거다. 그래서 안 믿는 사람은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죄가 있다. 이런 게 있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들은 교인의 비위를 못 맞춘다. 세상이 우리를 감당치 못한다.
우리가 늘 옳은 생각과 옳은 가치판단을 가지고 있어야 하나님 앞에 거룩성으로 자라게 된다. 사람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은 사람의 외모 모양을 귀중히 여긴다. 그러나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신이다. 육체는 건강해도 눈에 보이는 면에서 아무것도 모른 채 나이만 먹는 사람은 불쌍하다. 이것보다 더 불쌍한 사람은 허우대도 좋고 부자인데 하나님에 대해 전혀 모르는 거다. 이건 하나님 앞에 영원히 불쌍한 거다. 이런 면을 깨달아 알라고 눈에 보이는 정신병자나 육신의 병자를 보여주는 거다. 믿는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을 보고도 영적인 면을 생각하지 못한다면 큰 문제다.
‘진리가 좋사오니’ 하고 우리 교회에 나왔으면 진리의 사람이 되어서 나가라. 옳게 믿으려고 하는 사람을 보면 예배에 빠지지 않으려고 교회 근처로 이사하는 사람이 있는데, 우리가 예수를 잘 믿으려고 예배당 가까이 이사를 해야 하겠느냐, 돈을 잘 벌기 위해 돈을 따라 이사를 해야 하겠느냐? 이런 것에 따라 자기의 미래가 결정이 난다.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라는 것은 망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 끝날까지 보존하려는 거다. 그런데 자기의 자아와 주관성이 강하면 주님의 이 말씀이 자기를 위하는 말씀이 아니라 해치려는 소리로 들린다.
성경은 사건이 다양하고, 사람들이 다양한 사건을 거치면서 마음이 여러 면으로 움직이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사건 환경 가운데서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인 것을 캐치해서 지금의 자기의 마음과 비춰보고 자기의 신앙상태를 알고 바로 서 나가야 한다. 성경의 인물을 통해 자신을 보지 못하는 사람은 남만 보는 거다.
성경에서 이런 예를 찾아보면, 삿:에서 레위사람의 첩이 행음하고 남편을 떠나 유다 베들레헴 그 아비의 집에 가서 넉 달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자 레위인이 이 첩을 찾으러 가서 데리고 오려는데 장인이 4일간을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며 더 묵고 가라고 했고, 5일째 되는 저녁에도 하루 더 묵고 가라고 했으나 이때서야 장인의 집을 떠나서 돌아오는데, 여부스(예루살렘)에 이르렀다가 이곳을 떠나 이스라엘 자손에게 속하지 아니한 기브아로 들어가서 유숙하려고 했다.
이 동리의 노인을 만나서 이 집에서 유숙하던 중에 한밤중이 되어서 이 동리의 비류들에게 첩이 수욕을 당하고 죽자 첩의 시체를 열두 덩이로 나눠서 이스라엘 사방에 두루 보내매 모든 이스라엘 족속이 기브아를 치게 되었는데, 베냐민 족속은 이스라엘과 함께 하는 대신 기브온 족속과 합세함으로 이스라엘이 동족인 베냐민을 쳐서 다 죽이고 6백 명만이 도망을 가게 되어서 이스라엘의 한 족속이 멸망하다시피 되고 말았다.
레위인은 무엇을 하느냐? 성전의 일을 돕는 직책을 맡은 자들이다. 그런데 이 레위인이 자기 위치를 이탈하니 불행한 사건이 이중 삼중으로 확대되어 나간다. 이게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거냐?
솔로몬의 말년이 좋지 않았지만 젊어서 하나님의 지혜로 백성을 다스리니 솔로몬의 지혜의 소문이 각국으로 퍼져나갔고, 수백 킬로 떨어진 남방의 스바여왕이 이 소문을 듣고 금은보화를 잔뜩 싣고 솔로몬을 찾아와서 솔로몬에게서 지혜를 받아 갔다. 이것을 표면으로 보면 솔로몬의 씨를 받아 간 거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자손이 나왔다. 이 일을 표면으로 보면 나쁘지만 영적인 면으로 보면 옳다. 신약에 남방(에디오피아)의 간다게 내시가 빌립에게 와서 복음을 받아 갔는데, 이것은 스바여왕의 영향으로 그 후대들이 복음을 따라 산 것을 말해준다.
삼손도 젊어서 말씀을 따라 살 때는 좋았는데 말년에 말씀을 떠나자 문제가 자꾸 터지고 결국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는데, 이 사건을 교회 교훈의 전승 면으로 보면 목사가 신학교에서부터 절대 정확한 진리본질로 무장이 되지 못하면 이 목사로부터 배우는 교인들은 더욱더 비진리로 내달리게 된다. 우리가 성경 속에 있는 이런 사건 속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사상들이 오늘날 우리 속에도, 내 속에도 움직이고 있음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김경형목사님의 생전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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