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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삼상 13: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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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8465 |
판관시대로부터 왕정체제로
이스라엘은 애굽을 탈출해서 가나안으로 이주한 후에 그곳 원주민들과 티걱태걱 하면서 지내왔습니다. 소위 '판관시대'라고 일컬어지는 그런 시기가 대략 3,4백년이 흐른 다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에게도 주변의 큰 나라들처럼 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삼상 8장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당시 판관이며 예언자이면서 제사장이었던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사무엘은 그들의 요구에 적잖이 기분이 상했을 뿐만 아니라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한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의 행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요구가 결국 사무엘을 믿지 못하겠
다는 뜻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기도하던 사무엘은 이 문제를 놓고 역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가 합당하지는 않지만 그 요구를 들어주라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늘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고 그 뜻에 순종하던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런 게 아마 역사의 흐름일 것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선택된 사울이 당면한 문제는 불레셋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근본적인 이유도 효율적인 전쟁에 있었습니다. 왕을 세우게 되면 개인의 삶이 적지 않게 손상된다는 사무엘의 경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왕을 모셔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다스려 줄 왕,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를 이끌고 나가 싸워 줄 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삼상 8:19,20). 그래서 그런지 첫 왕으로 뽑힌 사울은 기골이 장대한 대장부였습니다. 왕 즉위식이 있기 전에 이미 암몬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적이 있었던 사울은 앞으로 평생 동안 전쟁을 치러야 할 블레셋과의 일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울의 입장이 참으로 난처했습니다. 일단 전세가 불리했습니다. 불레셋 군은 병거가 삼천, 기마가 육천, 보병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5절). 전제가 불리하다고 생각한 이스라엘 군은 저마다 굴이나 바위틈이나 구덩이나 웅덩이를 찾아 몸을 숨겼고, 더러는 요르단 여울을 건너 가드와 길르앗 지방으로 달아났습니다(6,7절). 사울을 따르던 군대는 모두 떨고 있었습니다(8절). 아무리 싸움을 잘하는 천하의 사울이라고 하더라도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기가 충천하더라도 전쟁을 앞둔 사람은 긴장하게 마련인데 이미 전의를 상실해버린 군사들만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엎친 데 덮친다는 말이 있듯이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스승이며 자신을 왕으로 선택해준 사무엘이 아직 나타나지 않습니다. 10장 8절에 기록된대로 사무엘은 사울을 먼저 길갈로 보내면서 자신이 곧 뒤따라가 가서 야훼께 제사를 드리고 전쟁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약속한 칠 일이 지났지만 사무엘은 감감 무소식입니다. 그리고 군인들은 하나 둘 사울 곁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에 왕정국가라고는 하나 여전히 국가의 기강이 해이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을 무턱대고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사울은 제사장인 사무엘만이 드릴 수 있었던 번제를 자신이 직접 드렸습니다. 그 제사 행위가 끝나자 곧 사무엘 제사장이 나타났습니다. 사울이 조금 더 기다리거나 사무엘에 조금 더 일찍 왔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약간의 착오로 인해서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사울의 인사를 받는 사무엘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오?"(11절)라고 문책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변명합니다. "군인들은 하나 둘 도망치고 선생님은 정하신 때에 오지 않으시는 데다가 불레셋군은 믹마스에 집결해 있어 야훼의 노여움을 풀어드리기도 전에 불레셋군이 길갈로 쳐내려 올 것 같아서 부득이 번제를 드렸습니다."(11,12절). 사
울의 이 설명은 자기의 잘못에 대한 책임 추궁을 모면해보자는 면피성 발언이 아니라 자기가 처한 객관적 사실에 대한 해명이었습니다. 사울의 다급한 입장, 그리고 불레셋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당위성 등을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그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었을 텐대도 사무엘은 매정하게 대답합니다. "그대는 어리석은 짓을 하였소. 어찌하여 그대의 하느님 야훼께서 내리신 분부를 지키지 않았소? 지키기만 했더라면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그대의 왕조를 길이 길이 세워 주실 터인데, 이제 그대의 대는 더 이어 가지 못할 것이오. 그대가 야훼의 분부를 지키지 않았으니 야훼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다시 찾아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수령으로 세우실 것이오."(13,14절). 이 말을 끝내고 사무엘은 사울이 있는 길갈을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승자의 역사?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무엇 때문에 사무엘은 사울의 행동을 어리석다고 재단할 걸까요? 어떻게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선의로 실수를 한 사울보다는 그 실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트집 잡는 사무엘의 행위가 훨씬 비인간적이고 얄밉게 보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멀리 했다거나 부정한 게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어쩔 수 없었던 상황에 빠진 사람으로서 사무엘을 대신해서 제사를 드린 것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여전히 유지하는 가운데 다만 사무엘과의 약속만 어긴 것이기 때문에, 즉 신앙의 본질에서는 변함이 없었고 단지 그 방법에서만 약간의 착오가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적으로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사울을 가혹하게 책망합니다.
우리는 이 본문의 보도를 이렇게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의 책임을 물으면서 사울의 대가 끊긴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원래 왕정 체제라는 것은 왕권이 대를 잇는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습니다. 따라서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한다면 그의 아들, 그의 손자를 통해서 왕위가 계승되어야마나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무엘상 16장 이하에 서술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사울은 다윗과의 왕권 경쟁에서 실패합니다.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죽고, 이제 사울의 사위이며 경호실장으로 활동하다가 결국 사울의 미움을 받아 추방당했던 다윗이 이스라엘의 제2대 왕으로 등극합니다. 그리고 그 뒤의 왕조는 다윗의 혈통으로 이어집니다. 사울과 다윗 사이에 벌어졌던 왕권 경쟁의 대서사는 주로 다윗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다윗의 등극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역사학자의 눈에는 분명히 다윗의 반역 행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사건은 다윗 왕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사울의 활동 초기에 그의 권위를 깎아 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분명히 이스라엘의 역사는 다윗 왕조 중심으로 기록되고 해석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말하려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다윗 왕조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입니다. 비록 다른 나라의 황실에서 벌어지는 알력과 비극과 야만과 음모가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반복되고 있기는 하지만 구약 성서는 야훼 하나님의 뜻이 그 중심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 사건도 사울과 다윗 왕조의 다툼이라는 시각보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시각에서 읽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분부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 사울의 어리석음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왕조가 끊길 만큼의 잘못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울이 처한 상황을 다시 한번 더 살펴봅시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이스라엘 보다 훨씬 강한 나라인 불레셋과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불레셋은 사울이 한 평생 동안 진절머리 날 정도로 싸워야 할 나라였습니다.
사무엘상이 끝나는 31장에 보면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은 결국 불레셋과의 전쟁으로 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왕으로 나선 사울이 치러내야 할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일단 야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게 시작이었습니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자기들이 섬기는 신에게 먼저 제사를 지내던 고대인들의 습관대로 이스라엘도 역시 야훼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전쟁이 인간의 생명을 담보하는 행위이면서, 그 승패는 인간의 계산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를 집전해야 할 사무엘은 당도하지 않고 사기를 잃은 군인들은 사울 곁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결국 사울은 자기가 직접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 행위
가 끝나자 곧 사무엘이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대가 끊어질 정도의 큰 잘못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분부'를 지키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문이 듭니다. 사울이 정말 하나님의 분부를 지키지 않을 것일까요? 사울을 먼저 길갈로 보내면서 일 주일 후에 따라갈 테니 그곳에서 기다리라고 한 사무엘의 약속이 과연 하나님의 분부였을까요? 아니면 왕을 세워 달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무엘이 공연히 트집을 잡기 위해서 상황을 꼬이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요? 야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 자체를 무시하고 무조건 전쟁을 시작하지 않고 그래도 나름대로 제사를 드린 사울의 행위는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정상 참작은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저는 사울이 하나님의 분부를 지키지 않았다는 사무엘의 책망이 정말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사울과 사무엘의 알력 관계에서 나온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분부라는 것이 직접 어떤 사건이나 사물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게 아니라 대개는 간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뜻과 사람의 개인적인 판단을 구별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자기의 개인적인 경험이 아무리 확고하더라도 경험만으로 하나님의 뜻이 담보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확인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도 역시 시간이 흘러가야 그 진위가 판단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무엘이 하나님의 분부를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
이 곧 하나님의 분부와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무엘과 사울에게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특히 사울의 운명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사무엘의 주장이 참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처럼 역사적으로 다음 세대에 산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사건 이후에 태어났다는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집중력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분부를 지키지 않았다는 사무엘의 책망에서 훨씬 근원적인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사무엘은 시종일관 하나님의 분부를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사울은 자신의 판단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사울의 잘못은 별로 크지 않은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는 절대적인 범주에서 생각하면 결정적인 문제였습니다. 사무엘을 대신해서 제사를 드렸다는 그 사실 자체보다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사울의 관점이 문제였다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사울의 관점은 자기가 당면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막강한 불레셋 병력과 이에 반해 오합지졸에 불과한 자기 군인들이 바로 그가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전쟁에서 승리해야만 왕으로서의 체면도 살리고,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에 몰두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상식적인 판단에 치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맞습니다. 사울은 그런 상식적인, 또는 합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15장에 묘사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쳐서 남녀노소, 소떼와 양떼 등, 모든 생명 있는 것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전쟁에서 이겼지만 양과 소 중에서 좋은 것들은 버리기 아까워서 살려두고 쓸모 없는 것들만 없애버림으로써 또 다시 사무엘을 통해서 책망을 듣습니다. 일반 역사학자들은 아마 사울에게 훨씬 많은 점수를 주고 싶겠지만 성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야훼께서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보다 번제나 친교제 바치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 같소? 순종하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그분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염소의 기름기보다 낫소."(삼상 15:22). 사울은 인품도 뛰어나고 전쟁의 지략도 뛰어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결정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분부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별로 진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따라서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에 반해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면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나이 늙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던 한나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뒤늦게 낳은 사무엘은 젖을 뗀 다음부터 부모의 집을 떠나 제사장 엘리와 함께 하나님의 전에서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전에서 생활하던 사무엘은 늘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집중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경험을 합니다. 간혹 버스 기사 운전석 위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어린이 그림이 걸려 있는데, 그게 바로 사무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무엘이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은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아니하고 제 잇속만 차려 뇌물을 받고는 법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삼상 8:3)고
합니다. 자식을 바르게 키우지 못한 잘못이 사무엘에게 있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분부에 마음을 두었다는 점에서 그는 사울과 비교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역시 평소에 어떤 삶의 태도를 견지하는가에 따라서 갈립니다.
자기를 성취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데 마음을 두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별로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두 사람의 삶은 결정적으로 달라집니다. 자기 자신과 그 상황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은 자기 삶에서 아무런 궁극적인 토대를 발견하지 못하고 늘 흔들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상황은 늘 변화무쌍하고 자기 성취라는 것도 다른 조건들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그렇게 지나갑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에 몰입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명의 토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궁극적인 생명을 완성시키고 유지시키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의 완성인 예수님의 부활에 마음을 집중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 부활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올 한해, 우리는 하나님의 분부보다는 자신의 답답한 상황에 치우친 사울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분부가 무엇인지 힘써 분별하는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2004.1.18>
이스라엘은 애굽을 탈출해서 가나안으로 이주한 후에 그곳 원주민들과 티걱태걱 하면서 지내왔습니다. 소위 '판관시대'라고 일컬어지는 그런 시기가 대략 3,4백년이 흐른 다음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에게도 주변의 큰 나라들처럼 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삼상 8장 이하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당시 판관이며 예언자이면서 제사장이었던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는 요구를 했습니다. 사무엘은 그들의 요구에 적잖이 기분이 상했을 뿐만 아니라 당황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후계자로 임명한 두 아들, 요엘과 아비야의 행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본이 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다시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의 요구가 결국 사무엘을 믿지 못하겠
다는 뜻을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려서부터 하나님께 기도하던 사무엘은 이 문제를 놓고 역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구가 합당하지는 않지만 그 요구를 들어주라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늘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고 그 뜻에 순종하던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서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선택했습니다. 그런 게 아마 역사의 흐름일 것입니다.
블레셋과의 전쟁
이스라엘의 첫 왕으로 선택된 사울이 당면한 문제는 불레셋과의 전쟁이었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왕을 요구한 근본적인 이유도 효율적인 전쟁에 있었습니다. 왕을 세우게 되면 개인의 삶이 적지 않게 손상된다는 사무엘의 경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왕을 모셔야겠습니다. 그래야 우리도 다른 나라처럼 되지 않겠습니까? 우리를 다스려 줄 왕,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를 이끌고 나가 싸워 줄 왕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삼상 8:19,20). 그래서 그런지 첫 왕으로 뽑힌 사울은 기골이 장대한 대장부였습니다. 왕 즉위식이 있기 전에 이미 암몬과의 전쟁에서 크게 승리한 적이 있었던 사울은 앞으로 평생 동안 전쟁을 치러야 할 블레셋과의 일전을 앞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울의 입장이 참으로 난처했습니다. 일단 전세가 불리했습니다. 불레셋 군은 병거가 삼천, 기마가 육천, 보병은 바닷가의 모래알처럼 셀 수 없이 많았습니다(5절). 전제가 불리하다고 생각한 이스라엘 군은 저마다 굴이나 바위틈이나 구덩이나 웅덩이를 찾아 몸을 숨겼고, 더러는 요르단 여울을 건너 가드와 길르앗 지방으로 달아났습니다(6,7절). 사울을 따르던 군대는 모두 떨고 있었습니다(8절). 아무리 싸움을 잘하는 천하의 사울이라고 하더라도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면 당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시기가 충천하더라도 전쟁을 앞둔 사람은 긴장하게 마련인데 이미 전의를 상실해버린 군사들만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엎친 데 덮친다는 말이 있듯이 이스라엘의 정신적인 스승이며 자신을 왕으로 선택해준 사무엘이 아직 나타나지 않습니다. 10장 8절에 기록된대로 사무엘은 사울을 먼저 길갈로 보내면서 자신이 곧 뒤따라가 가서 야훼께 제사를 드리고 전쟁에 대해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러나 약속한 칠 일이 지났지만 사무엘은 감감 무소식입니다. 그리고 군인들은 하나 둘 사울 곁을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사울이 왕으로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이기 때문에 왕정국가라고는 하나 여전히 국가의 기강이 해이한 상태였습니다.
이런 답답한 상황을 무턱대고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사울은 제사장인 사무엘만이 드릴 수 있었던 번제를 자신이 직접 드렸습니다. 그 제사 행위가 끝나자 곧 사무엘 제사장이 나타났습니다. 사울이 조금 더 기다리거나 사무엘에 조금 더 일찍 왔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 텐데, 약간의 착오로 인해서 문제가 심각해졌습니다. 사울의 인사를 받는 사무엘은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오?"(11절)라고 문책했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입장을 이렇게 변명합니다. "군인들은 하나 둘 도망치고 선생님은 정하신 때에 오지 않으시는 데다가 불레셋군은 믹마스에 집결해 있어 야훼의 노여움을 풀어드리기도 전에 불레셋군이 길갈로 쳐내려 올 것 같아서 부득이 번제를 드렸습니다."(11,12절). 사
울의 이 설명은 자기의 잘못에 대한 책임 추궁을 모면해보자는 면피성 발언이 아니라 자기가 처한 객관적 사실에 대한 해명이었습니다. 사울의 다급한 입장, 그리고 불레셋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당위성 등을 생각한다면 어느 정도 그의 행위를 이해할 수 있었을 텐대도 사무엘은 매정하게 대답합니다. "그대는 어리석은 짓을 하였소. 어찌하여 그대의 하느님 야훼께서 내리신 분부를 지키지 않았소? 지키기만 했더라면 야훼께서 이스라엘을 다스릴 그대의 왕조를 길이 길이 세워 주실 터인데, 이제 그대의 대는 더 이어 가지 못할 것이오. 그대가 야훼의 분부를 지키지 않았으니 야훼께서는 당신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다시 찾아 당신의 백성을 다스릴 수령으로 세우실 것이오."(13,14절). 이 말을 끝내고 사무엘은 사울이 있는 길갈을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승자의 역사?
도대체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무엇 때문에 사무엘은 사울의 행동을 어리석다고 재단할 걸까요? 어떻게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선의로 실수를 한 사울보다는 그 실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트집 잡는 사무엘의 행위가 훨씬 비인간적이고 얄밉게 보입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멀리 했다거나 부정한 게 아니라 누가 보더라도 어쩔 수 없었던 상황에 빠진 사람으로서 사무엘을 대신해서 제사를 드린 것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여전히 유지하는 가운데 다만 사무엘과의 약속만 어긴 것이기 때문에, 즉 신앙의 본질에서는 변함이 없었고 단지 그 방법에서만 약간의 착오가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결정적으로 잘못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사울을 가혹하게 책망합니다.
우리는 이 본문의 보도를 이렇게 해석해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울의 책임을 물으면서 사울의 대가 끊긴다는 사실을 지적했습니다. 원래 왕정 체제라는 것은 왕권이 대를 잇는다는 데에 그 특징이 있습니다. 따라서 사무엘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한다면 그의 아들, 그의 손자를 통해서 왕위가 계승되어야마나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무엘상 16장 이하에 서술된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사울은 다윗과의 왕권 경쟁에서 실패합니다.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죽고, 이제 사울의 사위이며 경호실장으로 활동하다가 결국 사울의 미움을 받아 추방당했던 다윗이 이스라엘의 제2대 왕으로 등극합니다. 그리고 그 뒤의 왕조는 다윗의 혈통으로 이어집니다. 사울과 다윗 사이에 벌어졌던 왕권 경쟁의 대서사는 주로 다윗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다윗의 등극이 아주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다른 역사학자의 눈에는 분명히 다윗의 반역 행위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사건은 다윗 왕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이스라엘의 역사를 합리화하기 위해서 사울의 활동 초기에 그의 권위를 깎아 내리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역사는 승자에 의해서 기록된 것이라는 말이 있듯이 분명히 이스라엘의 역사는 다윗 왕조 중심으로 기록되고 해석되기 때문에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가 말하려는 이스라엘의 역사는 다윗 왕조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역사입니다. 비록 다른 나라의 황실에서 벌어지는 알력과 비극과 야만과 음모가 이스라엘 역사에서도 반복되고 있기는 하지만 구약 성서는 야훼 하나님의 뜻이 그 중심축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오늘 본문 사건도 사울과 다윗 왕조의 다툼이라는 시각보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시각에서 읽어야만 합니다.
하나님의 분부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오늘 본문의 상황에서 사울의 어리석음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더구나 왕조가 끊길 만큼의 잘못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사울이 처한 상황을 다시 한번 더 살펴봅시다. 이스라엘의 왕으로 즉위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이스라엘 보다 훨씬 강한 나라인 불레셋과의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불레셋은 사울이 한 평생 동안 진절머리 날 정도로 싸워야 할 나라였습니다.
사무엘상이 끝나는 31장에 보면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은 결국 불레셋과의 전쟁으로 죽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왕으로 나선 사울이 치러내야 할 불레셋과의 전쟁에서 일단 야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게 시작이었습니다.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자기들이 섬기는 신에게 먼저 제사를 지내던 고대인들의 습관대로 이스라엘도 역시 야훼 하나님께 제사를 지내야 했습니다. 전쟁이 인간의 생명을 담보하는 행위이면서, 그 승패는 인간의 계산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데 제사를 집전해야 할 사무엘은 당도하지 않고 사기를 잃은 군인들은 사울 곁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결국 사울은 자기가 직접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 행위
가 끝나자 곧 사무엘이 도착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결국 대가 끊어질 정도의 큰 잘못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분부'를 지키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의문이 듭니다. 사울이 정말 하나님의 분부를 지키지 않을 것일까요? 사울을 먼저 길갈로 보내면서 일 주일 후에 따라갈 테니 그곳에서 기다리라고 한 사무엘의 약속이 과연 하나님의 분부였을까요? 아니면 왕을 세워 달라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요청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사무엘이 공연히 트집을 잡기 위해서 상황을 꼬이게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요? 야훼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것 자체를 무시하고 무조건 전쟁을 시작하지 않고 그래도 나름대로 제사를 드린 사울의 행위는 칭찬을 받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정상 참작은 받아야 하는 게 아닐까요? 저는 사울이 하나님의 분부를 지키지 않았다는 사무엘의 책망이 정말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사울과 사무엘의 알력 관계에서 나온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분부라는 것이 직접 어떤 사건이나 사물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게 아니라 대개는 간접적으로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말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사람들은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일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참된 뜻과 사람의 개인적인 판단을 구별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자기의 개인적인 경험이 아무리 확고하더라도 경험만으로 하나님의 뜻이 담보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진리는 시간이 지나면서 확인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뜻도 역시 시간이 흘러가야 그 진위가 판단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사무엘이 하나님의 분부를 지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고 해서 그것
이 곧 하나님의 분부와 일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무엘과 사울에게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보면, 특히 사울의 운명을 통해서 우리는 오늘 사무엘의 주장이 참되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처럼 역사적으로 다음 세대에 산다는 것은 행운입니다. 특히 예수님의 사건 이후에 태어났다는 것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집중력
그러나 저는 하나님의 분부를 지키지 않았다는 사무엘의 책망에서 훨씬 근원적인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신앙을 발견할 수 있다고 봅니다. 사무엘은 시종일관 하나님의 분부를 생각하는 사람이었지만 사울은 자신의 판단에 충실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사울의 잘못은 별로 크지 않은 것 같지만 하나님의 뜻이라는 절대적인 범주에서 생각하면 결정적인 문제였습니다. 사무엘을 대신해서 제사를 드렸다는 그 사실 자체보다는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던 사울의 관점이 문제였다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우리가 살펴보았듯이 사울의 관점은 자기가 당면한 상황에 놓여 있었습니다. 막강한 불레셋 병력과 이에 반해 오합지졸에 불과한 자기 군인들이 바로 그가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 전쟁에서 승리해야만 왕으로서의 체면도 살리고, 궁극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릴 수 있었습니다. 이런 생각에 몰두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보다는 자기의 상식적인 판단에 치중할 수밖에 없습니다. 맞습니다. 사울은 그런 상식적인, 또는 합리적인 사람이었습니다. 15장에 묘사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아말렉을 쳐서 남녀노소, 소떼와 양떼 등, 모든 생명 있는 것을 죽이라고 했습니다. 사울은 전쟁에서 이겼지만 양과 소 중에서 좋은 것들은 버리기 아까워서 살려두고 쓸모 없는 것들만 없애버림으로써 또 다시 사무엘을 통해서 책망을 듣습니다. 일반 역사학자들은 아마 사울에게 훨씬 많은 점수를 주고 싶겠지만 성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야훼께서 당신의 말씀을 따르는 것보다 번제나 친교제 바치는 것을 더 기뻐하실 것 같소? 순종하는 것이 제사 드리는 것보다 낫고, 그분 말씀을 명심하는 것이 염소의 기름기보다 낫소."(삼상 15:22). 사울은 인품도 뛰어나고 전쟁의 지략도 뛰어난,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손색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결정적인 한계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분부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별로 진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따라서 순종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에 반해 사무엘은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하면서 살아온 사람이었습니다. 나이 늙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던 한나가 하나님께 기도해서 뒤늦게 낳은 사무엘은 젖을 뗀 다음부터 부모의 집을 떠나 제사장 엘리와 함께 하나님의 전에서 살았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하나님의 전에서 생활하던 사무엘은 늘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집중했는데,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경험을 합니다. 간혹 버스 기사 운전석 위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어린이 그림이 걸려 있는데, 그게 바로 사무엘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무엘이 모든 면에서 완벽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의 두 아들은 아버지의 길을 따르지 아니하고 제 잇속만 차려 뇌물을 받고는 법대로 다스리지 못하였다"(삼상 8:3)고
합니다. 자식을 바르게 키우지 못한 잘못이 사무엘에게 있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분부에 마음을 두었다는 점에서 그는 사울과 비교되는 사람이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도 역시 평소에 어떤 삶의 태도를 견지하는가에 따라서 갈립니다.
자기를 성취하는 일에 매달리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려는 데 마음을 두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겉으로는 별로 큰 차이가 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이 두 사람의 삶은 결정적으로 달라집니다. 자기 자신과 그 상황에만 집중하는 사람들은 자기 삶에서 아무런 궁극적인 토대를 발견하지 못하고 늘 흔들리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상황은 늘 변화무쌍하고 자기 성취라는 것도 다른 조건들에 의해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은 그렇게 지나갑니다. 반면에 하나님의 뜻에 몰입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명의 토대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궁극적인 생명을 완성시키고 유지시키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 생명의 완성인 예수님의 부활에 마음을 집중하는 사람들은 결국 그 부활의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올 한해, 우리는 하나님의 분부보다는 자신의 답답한 상황에 치우친 사울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말고 궁극적인 하나님의 분부가 무엇인지 힘써 분별하는 것에
마음을 두고 살아야 하겠습니다. <2004.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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