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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상15:22~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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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조용기 목사 |
참고 : | 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 2010. 4. 18. 주일설교 |
“사무엘이 이르되 야훼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야훼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야훼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하니”
(삼상 15장 22~23)
할렐루야~ 옆에 계신 분들에게 주님 이 자리에 계십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항상 너와 같이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디든지 주님이 우리에게 임하여 계신 것을 우리는 믿고 입술로 고백해야 됩니다. 입술의 고백입니다.
입술로 담대하게 고백하지 아니하면 한님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서론>
저는 “회개와 용서”라는 제목으로 오늘 은혜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이 세상사람 중 형통한 삶을 원치 않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모두가 다 잘 되기를 원한다고 믿습니다. 못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삼성경제연구소와 성균관대학교에서는 만 18세 이상 되는 남녀 1천 605명을 대상으로 “한국종합사회조사”(KGSS)를 실시하면서 행복의 조건을 물었습니다. 그 결과 행복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젊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같이 70이 넘은 사람은 행복하기 틀렸지 않습니까? 젊음이 좋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남보다 잘 사는 것’ 그리고 ‘많이 배우는 것’그 뒤를 이어 그 다음 ‘종교를 갖는 것’이고 ‘가족과 여가를 보내는 것’ 등이 행복의 조건으로 선택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사람 가운데 행복하고 형통한 삶을 원치 않는 사람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뭐 여러 가지 조건을 말했지요.
젊음이 있어야 된다. 부자여야 된다. 좋은 가족관계를 가져야 된다. 그런 것 다 있지만 그런 것은 다 있다가 없어질 것입니다. 영원히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것이 영원한 행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항상 회개하고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화해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될까요?
“아 나는 회개할게 없는데요 뭘 회개할까요?”회개할게 없다는 것이 더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우상화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본론>
1. 자기의 우상화를 회개
우리가 제일 먼저 회개해야 될 것은 자기를 우상화하는 죄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삶 전체를 자기가 책임지고 자기의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내 지혜로 살고 내 총명으로 살고 내 노력으로 살고 내 힘으로 산다. 주님은 오히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겠다고 내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으로 살려면 인생이 고달프기 짝이 없다. 고달픈 인생을 내게 가져오면 내가 책임져 주겠다고 하는데 그러지 않고 나는 나를 의지하고 살겠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늘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도 자기를 의지하고 살려고 애를 씁니다. 주님은 지극히 적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극히 큰일까지 와서 맡기라는 것입니다. 큰 문제만 맡길 것이 아니라 적은 문제도 주님께 와서 맡기면 돌봐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지간하면 전부 자기가 스스로 일하려고 하지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2장 22절에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시 127:1~2)고 말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결국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서 도우지 아니하면 끝장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끝이 무너지고 말아요. 그러므로 자기의 우상화를 철저히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9장 23절로 24절에 “야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야훼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야훼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 지혜와 총명의 근본입니다. 인간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용맹을 자랑치 말고 부함을 자랑치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 얼마 안있다가 다 무너지고 쓰러지고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이 땅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자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해도 해도 안 될 때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 마음의 한 구석에 조그마한침 드러내어 하나님께 의지하고 어려울 때 도움만 청하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100%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일터에 나가서 일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고 한 그 사이에 우리 삶을 100% 주께 맡긴다. 그러면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켜 놓고 내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 필요할 때만 와서 도와주십시오.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으로 의지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과 예수님에게는 내 마음에 한구석만 내어 드리고 어려울 때 자기의 하는 일에 도움을 주기를 원하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조그마한 구석만 주님께 내놓고 내 어려울 때만 와서 도와주시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 관심없이 내 마음대로 사는 것 이것은 대단히 유치한 신앙인 것입니다.
잠언 3장 5절로 6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야훼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범사, 자고 깨고 일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 인정하라. 어떻게 하나님 인정합니까? 말로써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함께 합시다. 하나님 이 일을 이끌어 주십시오. 하나님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7절에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야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우리가 어떠한 죄와 불의와 추악한 일을 했을지라도 주님께 돌아오면 주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화해해 주시고 우리를 품어 주시는 것입니다.
회개란 히브리어로 ‘슈브’인데, 그 말은 ‘길을 바꾸다’, ‘되돌아오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 중심에 있는 죄에 대한 영적 자각으로 마음이 변화되고 생활을 돌이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회개에 대해서 시편에서는 “통회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예레미야는 “죄를 자복하는 것”이 회개라고 말했고, 에스겔은 “죄를 떠나는 것”이라고 하였고, 호세아는 “야훼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고, 스바냐는 “야훼를 찾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회개란 말을 “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마음의 변화와 돌이킴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한다”라고 할 때에는, 그저 마음으로만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 깊은 책망과 가책으로 죄에서 180도로 생활을 완전히 돌이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저 후회만 자꾸하는 것은 회개 아닙니다. 회개라는 것은 변화를 가져와야 되는 것입니다.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로 돌아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찰스 피니는 “회개란 나의 의지와 느낌과 삶을 하나님께 맞추어서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중심으로 살아오던 것을 돌이켜 하나님 중심으로 그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서 인생을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내 뜻대로 살던 것을 하나님 뜻을 따라 사는 것으로 바꾸는 그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후회라는 것을 회개라는 것으로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때 그렇게 하지 말걸 그랬다. 그 말을 하지 말걸 그랬다. 그렇게 행동하지 말걸 그랬다. 그것은 후회입니다. 후회는 100번 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단호하게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욕하던 것 이제는 욕 안해야 되겠다. 화내는 것 이제 화 안내야 되겠다. 술 마시고 담배 폈던 것 이제는 포기한다. 등을 돌린다. 그렇게 행동을 바꾸는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우리가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지금까지 불순종한 죄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2. 불순종을 회개
지금 잘못한 것 뿐 아니라 지금까지 불순종하고 살아온 과거의 모든 죄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우상숭배에 열심이었고 폭력과 잔인한 악행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 불순종하고 사는 것이 니느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설교하라. 40일 이내에 돌아서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니느웨를 멸망시키겠다. 니느웨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늘 침공해 들어오고 이스라엘을 괴롭혔기 때문에 요나는 니느웨가 멸방받기를 원하고 회개하여 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요나서 1장 1절로 3절에 “야훼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야훼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야훼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니느웨 가는 정반대가 다시스입니다. 요사이로 말하면 지중해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것이 다시스로 가는 것입니다. 정반대로 도망을 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는 곳에서 정반대로 도망을 치면 내가 니느웨 가지 못할터이니까 그러므로 그들에게 회개하라는 설교를 안해야 그들이 죄악 가운데서 멸망 받을 수 있으니까 니느웨 사람들이 멸망받기를 원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 했는데 여기에 요나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듣지 않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순종하지 않고 듣지 않고 반대적으로 행하면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나가 탄 배가 지중해를 항해하다가 갑자기 대풍랑이 와서 배가 파선할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요나서 1장 4절로 5절에 보면 “야훼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대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파괴될 지경입니다. 사공들이 모든 화물을 바다에다 던지고 배의 기구도 던지고 하는데 요나는 배 밑창에 내려가서 선실 밑창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아에 뭐 니느웨는 안가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해서 배 밑창으로 내려가도 하나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시편 139장 7절로 10절에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그러니 하늘과 땅과 세계 어느 곳에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이곳은 하나님이 안 보실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 바로 그 자리에 계셔서 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옛날에 부산에서 제가 잘 아시는 분을 그 부인이 열심히 전도해서 교회에 모시고 나왔는데 예배 볼 동안에 담배가 피고 싶어서 몸부림을 치다가 예배를 다 드리고 신속히 집에 들어오자마자 담뱃불을 붙였습니다. “여보, 주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왔는데 왜 담배부터 피웁니까?” 그러니까 “여기는 지붕이 있어서 하나님이 못 내려 보신다. 우리집은 지붕이 아주 두껍게 되어있다.” 아무리 지붕이 두꺼워도 우리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공기가 어느 곳에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바람처럼 공기처럼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사공들이 굉장히 배가 파선지경에 이르니까 우리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왔는지 제비를 뽑자. 이유없는 재앙은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큰 재앙이 다가오는 것은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한국에서는 시골에서 어려움을 당하면 무당을 데려오고 점쟁이를 불러서 점을 치고 하는 것은 이 재앙이 무엇 때문에 오는가, 누구 때문에 오는가 그 이유를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나서 1장 9절로 12절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야훼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야훼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제비를 뽑으니까 제비가 요나에게 딱 떨어졌거든. 그래서 사공들이 요나를 보고 네가 어떻게 했기에 하나님이 이렇게 진노하사 풍랑을 내리셨는가?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서 다시스로 도망을 치고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막으려고 이 큰 풍랑을 보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그는 죽더라도 원수의 나라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전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배를 저어서 항구로 돌아가자고 말하지 않고 자기를 바다로 던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주 독한 사람입니다. 안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아주 니느웨 사람 너 죽고 나 죽고 같이 죽자. 그만큼 니느웨 사람들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바다에 던져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야훼시니라”(잠 16:9)
죽고 사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안됩니다 여러분, 죽는 것도 하나님이 눈을 감아야 줘야 죽지 마음대로 죽지는 않아요. 사는 것도 하나님 은혜로써 살고, 죽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죽는 것입니다.
내가 이번에 일본에 가니까 일본에 1년에 3만명 이상씩 자살을 한다고 그래요. 세상에 1년에 3만명 이상 자살을 하니 일본이 이렇게 되어서 되겠느냐. 사람들은 자기 생명을 쉽게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요나 보십시오. 죽으려고 해도 그렇게 쉽게 죽어지지 않습니다.
요나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가드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살았던 선지자로 하나님께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 대해 심판을 외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시 앗수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심히 괴롭혔기 때문에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면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인 것입니다. 앗수르의 서울인 것입니다. 그는 오히려 니느웨가 더 처절히 타락하여 멸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명령을 거역하고 니느웨로 가는 대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 후, 요나는 큰 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큰 물고기를 예비했다가 요나가 떨어지는 것 덥썩 마셔버렸습니다. 물었으면 죽었을 것인데 이빨이 없었던가 봐요.그 고래가 그냥 마셔버렸습니다.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고 회개할 것을 촉구했고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라도 하나님은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난 다음에 주님이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도 주지 아니하시고 일방적으로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한이 없으신 분이라 반드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그 기회를 갖고도 거역할 때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선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불순종하면 큰 고난과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우리의 모습을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도 여러분, 3일을 견뎠습니다. 3일 견디고 난 다음에는 도저히 못견디는 것이 소화가 안돼요. 3일만에 소화가 되어버렸으면 좋겠는데 내가 소화되기 참고 기다리자. 하루 있어도 소화가 안되고, 이틀이 있어도 소화가 안되고, 사흘이 있어도 소화가 안됩니다. 하나님이 명령을 내리니까 소화가 안돼요. 물고기는 바다에 떨어지는 것 하나 먹었더니만 소화불량증이 걸려서 견디지 못하니까 물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니 물고기도 괴롭고 요나도 괴롭습니다. 죄인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면 죄인도 괴롭고 우리도 괴롭습니다. 함께 고통스러워요. 회개하면 함께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 괴로우니까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고통이 계속하면 회개의 기도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요나서 2장 1절로 10절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야훼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야훼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야훼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야훼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야훼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야훼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물고기에게 육지에 가서 토해라. 해변가에 와서 웩하고 토해 버리니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튀어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소화액이 얼굴과 몸을 노랗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노란 요나가 탁 튀어 나왔습니다. 물고기는 어~ 시원하다. 한 사흘 동안 소화불량증이 나았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는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건지시매 그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왔습니다. 나와서 니느웨로 가서 외칩니다. 이제 요나가 더 힘차게 외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러분 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체험하면 더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다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냥 믿는 것하고 내게 체험해서 믿는 것하고 단수가 틀립니다. 체험을 하고 나면 굉장히 믿음이 강해져요.
3.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
요나도 물고기 뱃속에서 한 사흘있다가 나오고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들어가지고서 굉장한 강한 믿음으로 예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요나서 3장 1절로 5절에 “야훼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야훼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야~ 굉장한 나라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핍박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듣자 온 국민이 다 회개를 했다. 이게 이 나라가 살 운명인 것입니다. 온 국민이 다 회개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도 온 국민이 다 회개하면 남북통일도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문을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문을 닫아놓으면 열자가 어디 있습니까?
요나서 3장 6절로 10절에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임금부터 시작해서 온 국민 전체가 다 삼베옷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으며 통회하고 자복하고 금식하는데 하나님의 마음이 감동하고 돌이키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회개하는 사람에게 하늘나라가 역사가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니느웨의 멸망을 기대하고 온 요나는 니느웨에 회개하라 안하면 40일 이내에 멸망한다고 해놓고 난 다음에 그는 성읍 동쪽에 성벽 한곳에 천막을 치고 니느웨가 망하는 것 구경하려고 기다립니다. 내가 이렇게 외쳐도 회개할 턱이 없다. 너깟 놈들이 뭘 회개하노? 너깟 놈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아냐? 그러니 반드시 하나님이 멸망시킬 것이다. 내가 그 모습을 구경하리다. 그래서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기다리는데 햇빛이 강하게 비취니까 머리가 뜨겁지 않습니까? 하루저녁 자고 나니까 박넝쿨이 나서 잎사귀로 초막을 덮었으니 시원합니다. 여러분 박넝쿨이 하루저녁에 돋아나서 그렇게 큰 잎사귀가 펼쳐지는 것은 기적이 아니고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으로 박넝쿨을 요나의 머리 위에 펼쳐 놓으니까 요나가 그 박넝쿨을 보고 기분이 좋아서 야~ 희안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느냐.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욘 4:5)
느헤미야서 9장 17절에 보면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용서하면 받으면 버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햇빛이 비취는데 박넝쿨이 쭈굴쭈굴하고 말라 버렸습니다. 보니까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벌레가 박넝쿨에 와서 그 줄기를 씹어버리니까 박넝쿨이 그냥 말라버렸어요.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벌레까지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세밀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까? 큰 일만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것이 아니라 벌레도 예비하신다. 적은 벌레도 예비하사 이끌어 가서 박넝쿨을 물어버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한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지극히 적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극히 큰것까지라도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이 벌레가 와서 박넝쿨을 씹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야훼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욘 4:6~8)
아~ 햇빛이 비취고 있는데 니느웨 성은 무너질 줄 알았는데 안무너지고 해만 비춰서 머리만 뜨겁고 하니까 혼동 가운데 하나님 날 죽여요 죽여 살아서 뭘 하겠어요? 죽는게 낫지. 실컷 망할 것이라고 한 다음에 안 망하는 것 보니 하나님이 나보다 니느웨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 아니에요? 나 죽여주세요.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는 나으니이다. 죽는 것이 더 편안하다. 그럴 정도로 니느웨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결론>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을 요나서 4장 10절로 11절에 기록해 놓았는데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야훼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너는 박넝쿨 하나 났다가 말라지는 것도 화를 내고 야단법석을 하는데 이 니느웨 성에는 어린 아이들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 12만명이나 있다. 짐승들도 많다. 그들이 멸망받는 것을 내가 원하겠느냐? 사람들은 더구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비록 타락했어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굉장히 귀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굉장히 귀한 존재입니다. 희안하게 만들어졌어요. 사람처럼 희안하게 만들어진 존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자기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을 뿐 아니라 나중에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과 모양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맞바꾸기 해요 사람이 하나님이 되었다가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가 그렇게 맞바꾸게 할 정도의 존재가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보통 존재가 아니에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으로 왔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형상인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해서 하나님으로 하늘에 올라왔습니다. 우리는 모두다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고 함께 천당에 가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위대한 존재입니까? 굉장히 귀한 존재가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은 귀합니다. 하나님은 이 귀한 사람들이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는 영원히 지옥에서 불탈 것을 생각할 때 괴롭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했기에 사람이 되어 오셔서 사람 죄를 대신 짊어지고 몸 찢고 피 흘렸겠습니까? 사람이 그렇게 귀한 존재가 아니면 주님이 목숨을 대신해서 구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부모도 자기 자식이 못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다 잘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신 것입니다. 우리 한사람도 멸망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갈보리 십자가를 쳐다봐야 됩니다. 그 십자가를 쳐다보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내 죄와 불의와 질병과 저주와 죽음이 청산되어 버린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의 삶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믿고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매일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가지고 있는 보배는 갈보리 십자가인 것입니다. 어떤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이나 부귀나 영화도 십자가와 바꿀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축복의 그늘이 됩니다. 거기에 용서가 있고 거기에 거룩함이 있고 거기에 병고침이 있고 거기에 축복이 있고 거기에 영생복락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새로운 피조물이 된 생명의 근원이 십자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십자가를 의지하면 모두다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50여 년 전에 아프리카 콩고의 웸바라는 마을에 놀랄 만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한 마을 전체가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인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부흥이 한 여인의 진실한 회개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기도회 시간에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성령님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뜨겁게 기도하는 가운데 여자 성도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은 교회에서 봉사를 제일 많이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녀는 교회의 성미쌀을 몰래 가져다가 쓴 적이 있었는데, 기도회 이후 그것이 내내 마음에 걸려 그것을 교회에 가지고 와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실 이 쌀은 교회의 것인데 내가 가져갔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성미쌀 훔친 것 회개했습니다.우리 한국에서도 6.25사변 난 이후 어려울 때 교회 성미쌀 훔친 사람 많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성미쌀이 예배드릴 때 가득했는데 예배 후 반만 찼을 때가 많았어요. 남의 교회 그런 것 아닙니다. 우리 서대문 우리 교회에서 그랬습니다. 내게 보고가 부인회에서 와요. 목사님, 성도들에게 성미쌀 훔치지 말라고 좀 광고해 주십시오. 성미쌀 가지고 온 것처럼 보따리 봉투 가지고와서 성미쌀 담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또 한 여인이 성도들 앞에 나서며 “저는 남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인 집 계란 한 줄을 주인이 모르는 때 가져온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회개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이어서 한 남자 성도가 “저는 서점을 하고 있는데, 오래 전에 선교사님의 집에 갔다가 오면서 선교사님께 말하지도 않고 성경 한 권을 그냥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을 회개하며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성도들은 모두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거나 잘못된 것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이러한 소문이 마을로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서로 잘못을 빌고 용서하며 마을 전체가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부흥의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에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죄와 불순종을 회개할 때, 개인 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회개했는데 회개의 불길이 이웃에 붙어 나가서 온 마을 전체가 다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로 회개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나 혼자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 회개의 불길이 이웃으로 번져 나가서 온 교회, 온 나라가 회개할 수 있는 은혜 속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므로 회개는 하나님의 용서를 가져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한이 없이 많으신 분이라 회개만 하면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오직 회개하지 않으므로 망하고 버림을 받습니다. 회개하면 결코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인 강도가 예수님 우편에 매달려 마지막 목숨이 끊어질 때 주여, 주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회개도 큰 회개가 아닙니다. 주님 나라 임할 때 나를 기억해 달라는 회개의 시작을 말했을 때 주님이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당장 주님께서 용서해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는 주님 앞에 회개하면 용서받고 용서받으면 하나님과 화목하고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고개 숙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용서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니느웨 성같이 이스라엘을 핍박하던 원수라도 그 성에 임금님을 위시해서 회개할 때
주님이 전성을 건져주셨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불순종하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을 쳐도 회개하니 풍랑도 잠잠케 하고 요나도 하나님이 살려주셨습니다.
아버지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항상 회개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죄를 짓더라도 늘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게 도와주시옵소서.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시작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이 같이 계시고 큰 축복과 은혜를 줄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삼상 15장 22~23)
할렐루야~ 옆에 계신 분들에게 주님 이 자리에 계십니다. 인사해 주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볼지어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항상 너와 같이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디든지 주님이 우리에게 임하여 계신 것을 우리는 믿고 입술로 고백해야 됩니다. 입술의 고백입니다.
입술로 담대하게 고백하지 아니하면 한님은 역사하지 않습니다. 안에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서론>
저는 “회개와 용서”라는 제목으로 오늘 은혜의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이 세상사람 중 형통한 삶을 원치 않는 사람이 몇이나 있겠습니까? 제 생각으로는 모두가 다 잘 되기를 원한다고 믿습니다. 못되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대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행복이다.”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예나 지금이나 행복한 삶을 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요? 삼성경제연구소와 성균관대학교에서는 만 18세 이상 되는 남녀 1천 605명을 대상으로 “한국종합사회조사”(KGSS)를 실시하면서 행복의 조건을 물었습니다. 그 결과 행복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은 “젊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같이 70이 넘은 사람은 행복하기 틀렸지 않습니까? 젊음이 좋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남보다 잘 사는 것’ 그리고 ‘많이 배우는 것’그 뒤를 이어 그 다음 ‘종교를 갖는 것’이고 ‘가족과 여가를 보내는 것’ 등이 행복의 조건으로 선택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사람 가운데 행복하고 형통한 삶을 원치 않는 사람은 아마도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진정으로 행복하기 위해서는 뭐 여러 가지 조건을 말했지요.
젊음이 있어야 된다. 부자여야 된다. 좋은 가족관계를 가져야 된다. 그런 것 다 있지만 그런 것은 다 있다가 없어질 것입니다. 영원히 있는 것은 하나님 밖에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그것이 영원한 행복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항상 회개하고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화해가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회개해야 될까요?
“아 나는 회개할게 없는데요 뭘 회개할까요?”회개할게 없다는 것이 더 문제인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우상화를 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본론>
1. 자기의 우상화를 회개
우리가 제일 먼저 회개해야 될 것은 자기를 우상화하는 죄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삶 전체를 자기가 책임지고 자기의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으로 산다는 것입니다.
내 지혜로 살고 내 총명으로 살고 내 노력으로 살고 내 힘으로 산다. 주님은 오히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쉬게 하겠다고 내 지혜와 총명과 모략과 재능과 지식으로 살려면 인생이 고달프기 짝이 없다. 고달픈 인생을 내게 가져오면 내가 책임져 주겠다고 하는데 그러지 않고 나는 나를 의지하고 살겠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오늘 예수를 오래 믿은 사람도 자기를 의지하고 살려고 애를 씁니다. 주님은 지극히 적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극히 큰일까지 와서 맡기라는 것입니다. 큰 문제만 맡길 것이 아니라 적은 문제도 주님께 와서 맡기면 돌봐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어지간하면 전부 자기가 스스로 일하려고 하지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2장 22절에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셈할 가치가 어디 있느냐”
“야훼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경성함이 허사로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시 127:1~2)고 말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노력하고 애써도 결국 하나님께서 함께 계셔서 도우지 아니하면 끝장이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끝이 무너지고 말아요. 그러므로 자기의 우상화를 철저히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9장 23절로 24절에 “야훼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야훼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야훼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을 깨닫는 것이 지혜와 총명의 근본입니다. 인간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용맹을 자랑치 말고 부함을 자랑치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 얼마 안있다가 다 무너지고 쓰러지고 없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이 땅에서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자인 것을 깨닫고 하나님을 섬기는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빌리 그레함 목사님은 “해도 해도 안 될 때는 전적으로 하나님께 맡겨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실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우리 마음의 한 구석에 조그마한침 드러내어 하나님께 의지하고 어려울 때 도움만 청하지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고 100%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 일어나서 일터에 나가서 일하고 저녁에 집에 돌아오고 한 그 사이에 우리 삶을 100% 주께 맡긴다. 그러면 하나님과 함께 인생을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켜 놓고 내가 인생을 살면서 하나님 필요할 때만 와서 도와주십시오.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으로 의지하면서 인생을 사는 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과 예수님에게는 내 마음에 한구석만 내어 드리고 어려울 때 자기의 하는 일에 도움을 주기를 원하는 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내 마음에 조그마한 구석만 주님께 내놓고 내 어려울 때만 와서 도와주시고 그 다음에는 하나님 관심없이 내 마음대로 사는 것 이것은 대단히 유치한 신앙인 것입니다.
잠언 3장 5절로 6절에 “너는 마음을 다하여 야훼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범사, 자고 깨고 일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 인정하라. 어떻게 하나님 인정합니까? 말로써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함께 합시다. 하나님 이 일을 이끌어 주십시오. 하나님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나님을 범사에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55장 7절에 “악인은 그의 길을, 불의한 자는 그의 생각을 버리고 야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
우리가 어떠한 죄와 불의와 추악한 일을 했을지라도 주님께 돌아오면 주님이 긍휼히 여기시고 화해해 주시고 우리를 품어 주시는 것입니다.
회개란 히브리어로 ‘슈브’인데, 그 말은 ‘길을 바꾸다’, ‘되돌아오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속 중심에 있는 죄에 대한 영적 자각으로 마음이 변화되고 생활을 돌이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회개에 대해서 시편에서는 “통회하는 것”이라고 하였고, 예레미야는 “죄를 자복하는 것”이 회개라고 말했고, 에스겔은 “죄를 떠나는 것”이라고 하였고, 호세아는 “야훼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했고, 스바냐는 “야훼를 찾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약에서는 회개란 말을 “메타노이아”라고 하는데, 마음의 변화와 돌이킴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한다”라고 할 때에는, 그저 마음으로만 후회하는 것이 아닙니다. 죄에 대해 깊은 책망과 가책으로 죄에서 180도로 생활을 완전히 돌이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저 후회만 자꾸하는 것은 회개 아닙니다. 회개라는 것은 변화를 가져와야 되는 것입니다.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로 돌아서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찰스 피니는 “회개란 나의 의지와 느낌과 삶을 하나님께 맞추어서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중심으로 살아오던 것을 돌이켜 하나님 중심으로 그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서 인생을 새롭게 살아가는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내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내 뜻대로 살던 것을 하나님 뜻을 따라 사는 것으로 바꾸는 그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후회라는 것을 회개라는 것으로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때 그렇게 하지 말걸 그랬다. 그 말을 하지 말걸 그랬다. 그렇게 행동하지 말걸 그랬다. 그것은 후회입니다. 후회는 100번 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단호하게 행동을 변화시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욕하던 것 이제는 욕 안해야 되겠다. 화내는 것 이제 화 안내야 되겠다. 술 마시고 담배 폈던 것 이제는 포기한다. 등을 돌린다. 그렇게 행동을 바꾸는 것이 회개인 것입니다. 우리가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용서함을 받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 지금까지 불순종한 죄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2. 불순종을 회개
지금 잘못한 것 뿐 아니라 지금까지 불순종하고 살아온 과거의 모든 죄를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니느웨 사람들은 우상숭배에 열심이었고 폭력과 잔인한 악행으로 악명이 높았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 불순종하고 사는 것이 니느웨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선지자 요나에게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설교하라. 40일 이내에 돌아서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니느웨를 멸망시키겠다. 니느웨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늘 침공해 들어오고 이스라엘을 괴롭혔기 때문에 요나는 니느웨가 멸방받기를 원하고 회개하여 살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요나서 1장 1절로 3절에 “야훼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향하여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되었음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요나가 야훼의 얼굴을 피하려고 일어나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여 욥바로 내려갔더니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를 만난지라 야훼의 얼굴을 피하여 그들과 함께 다시스로 가려고 배삯을 주고 배에 올랐더라”
니느웨 가는 정반대가 다시스입니다. 요사이로 말하면 지중해에서 스페인으로 가는 것이 다시스로 가는 것입니다. 정반대로 도망을 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라는 곳에서 정반대로 도망을 치면 내가 니느웨 가지 못할터이니까 그러므로 그들에게 회개하라는 설교를 안해야 그들이 죄악 가운데서 멸망 받을 수 있으니까 니느웨 사람들이 멸망받기를 원했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 했는데 여기에 요나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듣지 않기로 결심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신 것을 순종하지 않고 듣지 않고 반대적으로 행하면 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여러분 하나님의 뜻을 거역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견딜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요나가 탄 배가 지중해를 항해하다가 갑자기 대풍랑이 와서 배가 파선할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요나서 1장 4절로 5절에 보면 “야훼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에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 사공들이 두려워하여 각각 자기의 신을 부르고 또 배를 가볍게 하려고 그 가운데 물건들을 바다에 던지니라 그러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
대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파괴될 지경입니다. 사공들이 모든 화물을 바다에다 던지고 배의 기구도 던지고 하는데 요나는 배 밑창에 내려가서 선실 밑창에서 잠이 들었습니다. 아에 뭐 니느웨는 안가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피해서 배 밑창으로 내려가도 하나님을 피할 수 없습니다.
시편 139장 7절로 10절에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그러니 하늘과 땅과 세계 어느 곳에 하나님의 얼굴을 피할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죄를 지을 때 이곳은 하나님이 안 보실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하나님 바로 그 자리에 계셔서 보시고 계신 것입니다.
옛날에 부산에서 제가 잘 아시는 분을 그 부인이 열심히 전도해서 교회에 모시고 나왔는데 예배 볼 동안에 담배가 피고 싶어서 몸부림을 치다가 예배를 다 드리고 신속히 집에 들어오자마자 담뱃불을 붙였습니다. “여보, 주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왔는데 왜 담배부터 피웁니까?” 그러니까 “여기는 지붕이 있어서 하나님이 못 내려 보신다. 우리집은 지붕이 아주 두껍게 되어있다.” 아무리 지붕이 두꺼워도 우리 하나님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공기가 어느 곳에나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바람처럼 공기처럼 우리와 같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떠나지 않습니다.
사공들이 굉장히 배가 파선지경에 이르니까 우리 누구 때문에 이런 재앙이 왔는지 제비를 뽑자. 이유없는 재앙은 다가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큰 재앙이 다가오는 것은 이유가 있어서 그렇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 한국에서는 시골에서 어려움을 당하면 무당을 데려오고 점쟁이를 불러서 점을 치고 하는 것은 이 재앙이 무엇 때문에 오는가, 누구 때문에 오는가 그 이유를 알려고 하는 것입니다.
요나서 1장 9절로 12절에 “그가 대답하되 나는 히브리 사람이요 바다와 육지를 지으신 하늘의 하나님 야훼를 경외하는 자로라 하고 자기가 야훼의 얼굴을 피함인 줄을 그들에게 말하였으므로 무리가 알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그렇게 행하였느냐 하니라”
제비를 뽑으니까 제비가 요나에게 딱 떨어졌거든. 그래서 사공들이 요나를 보고 네가 어떻게 했기에 하나님이 이렇게 진노하사 풍랑을 내리셨는가?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피해서 다시스로 도망을 치고 있어서 하나님이 나를 막으려고 이 큰 풍랑을 보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하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 때문인 줄을 내가 아노라”
그는 죽더라도 원수의 나라 니느웨에 가서 회개를 전하지 않겠다고 결심했기 때문에 배를 저어서 항구로 돌아가자고 말하지 않고 자기를 바다로 던지라고 말한 것입니다. 아주 독한 사람입니다. 안살기로 작정했습니다. 아주 니느웨 사람 너 죽고 나 죽고 같이 죽자. 그만큼 니느웨 사람들에게 원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바다에 던져라.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야훼시니라”(잠 16:9)
죽고 사는 것도 자기 마음대로 안됩니다 여러분, 죽는 것도 하나님이 눈을 감아야 줘야 죽지 마음대로 죽지는 않아요. 사는 것도 하나님 은혜로써 살고, 죽는 것도 하나님이 허락하셔야 죽는 것입니다.
내가 이번에 일본에 가니까 일본에 1년에 3만명 이상씩 자살을 한다고 그래요. 세상에 1년에 3만명 이상 자살을 하니 일본이 이렇게 되어서 되겠느냐. 사람들은 자기 생명을 쉽게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요나 보십시오. 죽으려고 해도 그렇게 쉽게 죽어지지 않습니다.
요나는 선지자 중의 한 사람으로 가드헤벨 사람 아밋대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는 여로보암 2세가 이스라엘을 통치할 때 살았던 선지자로 하나님께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 대해 심판을 외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당시 앗수르는 이스라엘 백성을 심히 괴롭혔기 때문에 요나는 니느웨 사람들이 회개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면하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니느웨는 앗수르의 수도인 것입니다. 앗수르의 서울인 것입니다. 그는 오히려 니느웨가 더 처절히 타락하여 멸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명령을 거역하고 니느웨로 가는 대신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탔다가 풍랑을 만나 바다에 던져졌습니다. 그 후, 요나는 큰 고기 뱃속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이 큰 물고기를 예비했다가 요나가 떨어지는 것 덥썩 마셔버렸습니다. 물었으면 죽었을 것인데 이빨이 없었던가 봐요.그 고래가 그냥 마셔버렸습니다.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외치고 회개할 것을 촉구했고 니느웨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라도 하나님은 멸망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난 다음에 주님이 심판을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회개할 기회도 주지 아니하시고 일방적으로 우리를 심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한이 없으신 분이라 반드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시고 그 기회를 갖고도 거역할 때 주님께서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선지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명령에 정면으로 불순종하면 큰 고난과 고통 가운데 처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우리의 모습을 회개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도 여러분, 3일을 견뎠습니다. 3일 견디고 난 다음에는 도저히 못견디는 것이 소화가 안돼요. 3일만에 소화가 되어버렸으면 좋겠는데 내가 소화되기 참고 기다리자. 하루 있어도 소화가 안되고, 이틀이 있어도 소화가 안되고, 사흘이 있어도 소화가 안됩니다. 하나님이 명령을 내리니까 소화가 안돼요. 물고기는 바다에 떨어지는 것 하나 먹었더니만 소화불량증이 걸려서 견디지 못하니까 물위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가 몸부림을 칩니다. 그러니 물고기도 괴롭고 요나도 괴롭습니다. 죄인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면 죄인도 괴롭고 우리도 괴롭습니다. 함께 고통스러워요. 회개하면 함께 좋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정 괴로우니까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고통이 계속하면 회개의 기도를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요나서 2장 1절로 10절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의 하나님 야훼께 기도하여 이르되 내가 받는 고난으로 말미암아 야훼께 불러 아뢰었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더니 주께서 내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주께서 나를 깊음 속 바다 가운데에 던지셨으므로 큰 물이 나를 둘렀고 주의 파도와 큰 물결이 다 내 위에 넘쳤나이다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지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영혼까지 둘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워싸고 바다 풀이 내 머리를 감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야훼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내 영혼이 내 속에서 피곤할 때에 내가 야훼를 생각하였더니 내 기도가 주께 이르렀사오며 주의 성전에 미쳤나이다 거짓되고 헛된 것을 숭상하는 모든 자는 자기에게 베푸신 은혜를 버렸사오나 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야훼께 속하였나이다 하니라 야훼께서 그 물고기에게 말씀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회개하니까 하나님이 물고기에게 육지에 가서 토해라. 해변가에 와서 웩하고 토해 버리니까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튀어 나왔습니다. 아무래도 소화액이 얼굴과 몸을 노랗게 만들었을 것입니다. 노란 요나가 탁 튀어 나왔습니다. 물고기는 어~ 시원하다. 한 사흘 동안 소화불량증이 나았다. 그래서 요나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는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건지시매 그가 물고기 뱃속에서 나왔습니다. 나와서 니느웨로 가서 외칩니다. 이제 요나가 더 힘차게 외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을 체험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습니다. 여러분 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기적을 체험하면 더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한다는 것은 우리 신앙생활에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냥 믿는 것하고 내게 체험해서 믿는 것하고 단수가 틀립니다. 체험을 하고 나면 굉장히 믿음이 강해져요.
3.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
요나도 물고기 뱃속에서 한 사흘있다가 나오고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들어가지고서 굉장한 강한 믿음으로 예언을 하게 된 것입니다.
요나서 3장 1절로 5절에 “야훼의 말씀이 두 번째로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내가 네게 명한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라 하신지라 요나가 야훼의 말씀대로 일어나서 니느웨로 가니라 니느웨는 사흘 동안 걸을 만큼 하나님 앞에 큰 성읍이더라 요나가 그 성읍에 들어가서 하루 동안 다니며 외쳐 이르되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하였더니 니느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금식을 선포하고 높고 낮은 자를 막론하고 굵은 베 옷을 입은지라”
야~ 굉장한 나라입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핍박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듣자 온 국민이 다 회개를 했다. 이게 이 나라가 살 운명인 것입니다. 온 국민이 다 회개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도 온 국민이 다 회개하면 남북통일도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문을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문을 닫아놓으면 열자가 어디 있습니까?
요나서 3장 6절로 10절에 “그 일이 니느웨 왕에게 들리매 왕이 보좌에서 일어나 왕복을 벗고 굵은 베 옷을 입고 재 위에 앉으니라 왕과 그의 대신들이 조서를 내려 니느웨에 선포하여 이르되 사람이나 짐승이나 소 떼나 양 떼나 아무것도 입에 대지 말지니 곧 먹지도 말 것이요 물도 마시지 말 것이며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다 굵은 베 옷을 입을 것이요 힘써 하나님께 부르짖을 것이며 각기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에서 떠날 것이라 하나님이 그들이 행한 것 곧 그 악한 길에서 돌이켜 떠난 것을 보시고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사 그들에게 내리리라고 말씀하신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니라”
임금부터 시작해서 온 국민 전체가 다 삼베옷을 입고 잿더미 위에 앉으며 통회하고 자복하고 금식하는데 하나님의 마음이 감동하고 돌이키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고 회개하는 사람에게 하늘나라가 역사가 임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니느웨의 멸망을 기대하고 온 요나는 니느웨에 회개하라 안하면 40일 이내에 멸망한다고 해놓고 난 다음에 그는 성읍 동쪽에 성벽 한곳에 천막을 치고 니느웨가 망하는 것 구경하려고 기다립니다. 내가 이렇게 외쳐도 회개할 턱이 없다. 너깟 놈들이 뭘 회개하노? 너깟 놈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아냐? 그러니 반드시 하나님이 멸망시킬 것이다. 내가 그 모습을 구경하리다. 그래서 성읍 동쪽에 초막을 짓고 기다리는데 햇빛이 강하게 비취니까 머리가 뜨겁지 않습니까? 하루저녁 자고 나니까 박넝쿨이 나서 잎사귀로 초막을 덮었으니 시원합니다. 여러분 박넝쿨이 하루저녁에 돋아나서 그렇게 큰 잎사귀가 펼쳐지는 것은 기적이 아니고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기적으로 박넝쿨을 요나의 머리 위에 펼쳐 놓으니까 요나가 그 박넝쿨을 보고 기분이 좋아서 야~ 희안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느냐.
“요나가 성읍에서 나가서 그 성읍 동쪽에 앉아 거기서 자기를 위하여 초막을 짓고 그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를 보려고 그 그늘 아래에 앉았더라”(욘 4:5)
느헤미야서 9장 17절에 보면 “주께서는 용서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은혜로우시며 긍휼히 여기시며 더디 노하시며 인자가 풍부하시므로 그들을 버리지 아니하셨나이다”
용서하면 받으면 버림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 햇빛이 비취는데 박넝쿨이 쭈굴쭈굴하고 말라 버렸습니다. 보니까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벌레가 박넝쿨에 와서 그 줄기를 씹어버리니까 박넝쿨이 그냥 말라버렸어요. 천지와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이 벌레까지도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세밀하신 하나님이신 것입니까? 큰 일만 하나님이 예비하시는 것이 아니라 벌레도 예비하신다. 적은 벌레도 예비하사 이끌어 가서 박넝쿨을 물어버린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예비한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은 지극히 적은 것으로부터 시작해서 지극히 큰것까지라도 우리를 위해서 예비하시는 것입니다. 이 벌레가 와서 박넝쿨을 씹어버린 것입니다.
“하나님 야훼께서 박넝쿨을 예비하사 요나를 가리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그의 괴로움을 면하게 하려 하심이었더라 요나가 박넝쿨로 말미암아 크게 기뻐하였더니 하나님이 벌레를 예비하사 이튿날 새벽에 그 박넝쿨을 갉아먹게 하시매 시드니라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욘 4:6~8)
아~ 햇빛이 비취고 있는데 니느웨 성은 무너질 줄 알았는데 안무너지고 해만 비춰서 머리만 뜨겁고 하니까 혼동 가운데 하나님 날 죽여요 죽여 살아서 뭘 하겠어요? 죽는게 낫지. 실컷 망할 것이라고 한 다음에 안 망하는 것 보니 하나님이 나보다 니느웨 사람을 더 사랑하는 것 아니에요? 나 죽여주세요.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는 나으니이다. 죽는 것이 더 편안하다. 그럴 정도로 니느웨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결론>
그런데 하나님의 생각을 요나서 4장 10절로 11절에 기록해 놓았는데 우리 다 같이 한번 읽어 보십시다.
“야훼께서 이르시되 네가 수고도 아니하였고 재배도 아니하였고 하룻밤에 났다가 하룻밤에 말라 버린 이 박넝쿨을 아꼈거든 하물며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너는 박넝쿨 하나 났다가 말라지는 것도 화를 내고 야단법석을 하는데 이 니느웨 성에는 어린 아이들 좌우를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 아이들이 12만명이나 있다. 짐승들도 많다. 그들이 멸망받는 것을 내가 원하겠느냐? 사람들은 더구나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비록 타락했어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굉장히 귀한 존재입니다. 사람은 굉장히 귀한 존재입니다. 희안하게 만들어졌어요. 사람처럼 희안하게 만들어진 존재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을 자기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을 뿐 아니라 나중에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과 모양으로 오신 분이 예수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맞바꾸기 해요 사람이 하나님이 되었다가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가 그렇게 맞바꾸게 할 정도의 존재가 사람인 것입니다. 여러분 보통 존재가 아니에요. 예수님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으로 왔습니다. 그러니 사람의 형상인 예수님이 죽었다가 부활해서 하나님으로 하늘에 올라왔습니다. 우리는 모두다 예수님과 함께 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고 함께 천당에 가서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존재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위대한 존재입니까? 굉장히 귀한 존재가 사람인 것입니다. 사람은 귀합니다. 하나님은 이 귀한 사람들이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기를 원하십니다. 그런데 믿지 않는 자는 영원히 지옥에서 불탈 것을 생각할 때 괴롭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했기에 사람이 되어 오셔서 사람 죄를 대신 짊어지고 몸 찢고 피 흘렸겠습니까? 사람이 그렇게 귀한 존재가 아니면 주님이 목숨을 대신해서 구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느 부모도 자기 자식이 못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자식이 다 잘되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었기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신 것입니다. 우리 한사람도 멸망받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와 불의, 추악과 저주, 절망과 죽음을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으셨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갈보리 십자가를 쳐다봐야 됩니다. 그 십자가를 쳐다보고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내 죄와 불의와 질병과 저주와 죽음이 청산되어 버린 것을 기억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의 삶이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며 강건하고 생명을 얻되 넘치게 얻는 역사가 나타나는 것을 믿고 감사해야 되는 것입니다. 매일 십자가를 바라보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찬송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가지고 있는 보배는 갈보리 십자가인 것입니다. 어떤 지위나 명예나 권세나 돈이나 부귀나 영화도 십자가와 바꿀 수 없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에게 영원한 축복의 그늘이 됩니다. 거기에 용서가 있고 거기에 거룩함이 있고 거기에 병고침이 있고 거기에 축복이 있고 거기에 영생복락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새로운 피조물이 된 생명의 근원이 십자가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십자가를 의지하면 모두다 구원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50여 년 전에 아프리카 콩고의 웸바라는 마을에 놀랄 만한 부흥이 일어났습니다. 한 마을 전체가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기적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인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러한 부흥이 한 여인의 진실한 회개 때문에 일어났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교회에서 기도회 시간에 사람들이 모여서 기도할 때 성령님이 역사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뜨겁게 기도하는 가운데 여자 성도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은 교회에서 봉사를 제일 많이 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그녀는 교회의 성미쌀을 몰래 가져다가 쓴 적이 있었는데, 기도회 이후 그것이 내내 마음에 걸려 그것을 교회에 가지고 와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사실 이 쌀은 교회의 것인데 내가 가져갔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성미쌀 훔친 것 회개했습니다.우리 한국에서도 6.25사변 난 이후 어려울 때 교회 성미쌀 훔친 사람 많습니다. 왜냐하면 교회 성미쌀이 예배드릴 때 가득했는데 예배 후 반만 찼을 때가 많았어요. 남의 교회 그런 것 아닙니다. 우리 서대문 우리 교회에서 그랬습니다. 내게 보고가 부인회에서 와요. 목사님, 성도들에게 성미쌀 훔치지 말라고 좀 광고해 주십시오. 성미쌀 가지고 온 것처럼 보따리 봉투 가지고와서 성미쌀 담아 가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또 한 여인이 성도들 앞에 나서며 “저는 남의 집에서 일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주인 집 계란 한 줄을 주인이 모르는 때 가져온 적이 있습니다. 그것을 회개합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이어서 한 남자 성도가 “저는 서점을 하고 있는데, 오래 전에 선교사님의 집에 갔다가 오면서 선교사님께 말하지도 않고 성경 한 권을 그냥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을 회개하며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러자 성도들은 모두 자신이 과거에 저질렀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빌거나 잘못된 것을 되돌려 주었습니다. 이러한 소문이 마을로 퍼져나갔습니다. 사람들은 너도 나도 서로 잘못을 빌고 용서하며 마을 전체가 주님 앞으로 돌아오는 부흥의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야고보서 5장 16절에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죄와 불순종을 회개할 때, 개인 뿐 아니라 마을 전체가 구원받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이 회개했는데 회개의 불길이 이웃에 붙어 나가서 온 마을 전체가 다 회개하고 주님께로 돌아오는 큰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진실로 회개하고 진정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돌아올 때 나 혼자만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그 회개의 불길이 이웃으로 번져 나가서 온 교회, 온 나라가 회개할 수 있는 은혜 속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러므로 회개는 하나님의 용서를 가져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비와 긍휼이 한이 없이 많으신 분이라 회개만 하면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서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에게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오직 회개하지 않으므로 망하고 버림을 받습니다. 회개하면 결코 버림을 받지 않습니다. 사람을 죽인 강도가 예수님 우편에 매달려 마지막 목숨이 끊어질 때 주여, 주님 나라가 임할 때 저를 기억하여 주시옵소서. 회개도 큰 회개가 아닙니다. 주님 나라 임할 때 나를 기억해 달라는 회개의 시작을 말했을 때 주님이 오늘날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당장 주님께서 용서해서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는 주님 앞에 회개하면 용서받고 용서받으면 하나님과 화목하고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이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다 같이 고개 숙여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이 많으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용서할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니느웨 성같이 이스라엘을 핍박하던 원수라도 그 성에 임금님을 위시해서 회개할 때
주님이 전성을 건져주셨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명령을 정면으로 불순종하고 니느웨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도망을 쳐도 회개하니 풍랑도 잠잠케 하고 요나도 하나님이 살려주셨습니다.
아버지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항상 회개하게 도와주시옵소서.
죄를 짓지 않는 의인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죄를 짓더라도 늘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오게 도와주시옵소서.
옛 생활을 버리고 새 생활을 시작하게 도와주시옵소서. 그래서 하나님이 같이 계시고 큰 축복과 은혜를 줄 수 있게 해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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