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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상28:15-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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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윤식 목사 |
참고 : |
본문 : 삼상 28장 15-25 2011.2.16
제목 : 사울의 그린 마일(Green Mile)
본문 15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를 성가시게 하느냐 하니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다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들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 하지 아니하시기로 내가 행한 일을 알아보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 하더라 16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를 떠나 네 대적이 되셨거늘 네가 어찌하여 내게 묻느냐 17 여호와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네게 행하사 나라를 네 손에서 떼어 네 이웃 다윗에게 주셨느니라 18 네가 여호와의 목소리를 순종하지 아니하고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아니하셨으므로 여호와께서 오늘 이 일을 네게 행하셨고 19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너와 함께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니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께서 또 이스라엘 군대를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 넘기시리라 하는지라 20 사울이 갑자기 땅에 완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이니라 21 그 여인이 사울에게 이르러 그가 심히 고통 당함을 보고 그에게 이르되 여종이 왕의 말씀을 듣고 내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고 왕이 내게 이르신 말씀을 순종하였사오니 22 그런즉 청하건대 이제 당신도 여종의 말을 들으사 내가 왕 앞에 한 조각 떡을 드리게 하시고 왕은 잡수시고 길 기실 때에 기력을 얻으소서 하니 23 사울이 거절하여 이르되 내가 먹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그의 신하들과 여인이 강권하매 그들의 말을 듣고 땅에서 일어나 침상에 앉으니라 24 여인이 집에 살진 송아지가 있으므로 그것을 급히 잡고 가루를 가져다가 뭉쳐 무교병을 만들고 구워서 25 사울 앞에서 그의 신하들 앞에 내놓으니 그들이 먹고 일어나서 그 밤에 가니라 |
본문 주제 관찰 ①거짓 영의 예언이 맞을 수 있나? ②거짓 영의 예언처럼 사울은 세 아들과 함께 전사 ③사울의 최후의 만찬을 여인이 베풀어 줌 |
1. 사울의 묘비명(15-19절). (적용 : 후회 없는 삶을 살라)
①신접한 여인이 불러 낸 사무엘의 영 ②사무엘을 빙자한 악령 ③악령이 미래의 일들에 대하여 예언할 수 있나 (결)신접한 여인을 찾는 사울의 타락한 영 |
①하나님의 말씀을 버려 순종치 않은 사울 ②죄로 말미암아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도록 한다 ③순종하기 위하여 성령님께 의지 (결)순종하므로 삶이 후회 없는 삶을 살라 |
①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순종이다 ②하나님께 순종치 않으므로 이미 그는 생명은 시한부 생명을 살아가는 사울 ③사울의 묘비명 (결)하나님의 사람들로 멋지게 산 경험들이 기록되는 후회 없는 삶을 살라 |
2. 기력이 다한 사울(20-22절). (적용 :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여 새 힘을 받으라)
①충격으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 ②그토록 원치 않았던 결과 ③사형이 집행되는 오후는 기약할 수 없다 (결)기력이 다한 사울 |
①말씀을 순종치 않아 죽음으로 ②두려움을 가져 주는 실체는 ‘죽음’ ③기독교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축복 (결)죽음 앞에 겁을 내지 말라 |
①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의의 면류관을 받는 삶을 살라 ②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다 아뢰어라 ③죽음이라는 거대한 실체 앞에서도 기력이 다하지 않는다 (결)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력을 삼으라 |
3. 사울의 최후의 만찬(23-25절). (적용 : 주와 함께 축복의 만찬을 누리는 삶을 살라)
①사울의 만찬 ②사울은 신접한 여인과 결탁 ③사울에게 무교병 고난의 떡 (결)사울의 최후의 만찬 |
①사울의 만찬 희망이 없는 육적인 만찬 ②귀신과 결탁한 만찬 ③사울은 돌이키지 못할 죄를 저질렀다 (결)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만찬이 되라 |
①최후의 만찬 자리를 누구와 그 자리에 앉겠는가? ②히 10:26-27의 배교자를 향한 경고의 말씀을 기억하라 ③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 다 그린 마일 (결)주와 함께 축복의 만찬을 누리는 삶을 살라 |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신 말씀의 제목은 “사울의 그린 마일”입니다. 본문의 악한 영과의 대화에서 사울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말을 듣고 그만 맥이 풀렸습니다. 그린 마일(Green Mile)은 미국의 사형수들이 사형 집행을 당하러 전기의자에 앉기까지 걸어가는 길을 말합니다. 이처럼 사울 역시 죽음을 향하여 마지막 길을 걸어가는 최후의 모습을 미리 보여준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무엇이 그를 여기까지 몰고 왔는지 우리는 그동안의 사울의 행적을 통하여 살펴 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그의 마지막 모습은 29장과 30장을 뛰어 넘어 31장에서 나타나는데 그만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을 보일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많은 기대를 했는데 그만 하나님의 부르심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천하를 호령하는 왕에서 초라하고 비참한 사형수의 모습으로 전락한 그의 모습을 봅니다. 사무엘서를 시작하면서 하나님은 가난하게도 하시며 부하게도 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한 사람은 가난하게 되고 한 사람은 부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낮춤을 받고 한 사람은 높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분이신데 한 사람은 죽게 되고 한 사람은 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처럼 가난한 자를 진토에게 일으키시며 빈궁으로부터 걸음더미로부터 올리어 귀족처럼 앉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한 사울은 산산이 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레로 사울을 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심판을 내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음에 합한 자인 다윗에게 힘을 주시고 그의 뿔을 높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알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을 인정하기 바랍니다. 우리의 살아가는 모습이 사울의 모습이 아니라 다윗과 같은 승리의 삶을 살아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사울의 묘비명(15-19절).
(적용 : 후회 없는 삶을 살라)
신접한 여인이 불러 낸 사무엘의 영으로 말미암아 논란이 되었는데 영국의 뛰어난 신학자요 설교가이자 주석가인 메튜 헨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경우에 죽은 선지자의 영혼이 하늘로부터 증인으로 와서 그가 지상에서 했던 말을 확증하도록 허용하신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사무엘이 나타난 것은 여인이 사무엘의 영을 불러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오늘 사무엘과 사울의 대화는 일면 납득이 갑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이 말하고 있는 내용이 그대로 실현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앞서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사무엘의 등장은 악령의 속임수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사무엘의 영이 가짜라면 오늘 본문에서와 같이 사무엘이 어떻게 사울과 대화를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이 남습니다. 이 같은 경우는 사무엘을 빙자한 악령이 신접한 여인의 입을 통하여 사울에게 말했다는 것이 타당한 해석입니다. 또 한 가지 의문은 악령이 미래의 일들에 대하여 예언할 수 있느냐는 의문이 여전히 남습니다. 사탄 마귀는 영적인 존재이나 미래의 일들을 예언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제한 받고 허락 받은 것만 행할 뿐입니다. 욥의 경우처럼 사탄이 하나님의 허락 하에 행동하는 것처럼 여인이 불러 올린 악한 영을 하나님께서 방치하셨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2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드로가 자신을 부인하는 장면에서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한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를 유혹하여서 예수님을 배반하고 실족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사무엘을 빙자한 악령이 신접한 여인의 입술을 통하여 사울에게 전한 말은 사울을 더욱 절망에 빠뜨리고 말았습니다. 놀랍게도 이 선언은 사울이 하나님께 범한 일들이 그대로 선언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떠났다는 것과 네 나라를 다윗에게 주었다는 것입니다.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사울이 온전한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지 않으므로 순종치 않은 것까지 사실 그대로였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의 멸망은 하나님께 순종치 않음이었습니다.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순종을 사울에게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려 순종치 않았습니다. 번제와 제사보다도 순종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다시 상고해 봅니다.
삼상 15:22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한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인류의 역사가 증명해 줍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합니다. 죄로 말미암아 사탄이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도록 가로 막습니다. 아이들을 보아도 우리 인간의 심성이 얼마나 고약한지 모릅니다 “우리 애가 달라졌어요” 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면 하나같이 그 아이들이 얼마나 악동인 줄 모릅니다. 악을 쓰고 떼를 부리며 행패를 일삼는 것을 보면 아무리 과잉행동 장애를 가진 아이라도 저럴 수 없다 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전문가의 교육을 통하여 교정을 받으면 순화되는 모습을 봅니다. 이걸 보면서 우리 영혼이 순환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 순화 되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서는 나의 힘이 아니라 성령님께 의지하고 내가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힐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순종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 땀이 변하여 핏방울이 맺히도록 자신을 쳐야 했습니다. 순종은 끊임없는 자신을 쳐 내는 작업입니다. 나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이 순종입니다. 자아를 쳐 내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이 온전한 순종을 이룰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영적, 육적인 전투입니다. 나와의 싸움에서부터 사탄과의 싸움까지 해야 하는 힘든 영적인 여정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싸움을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패를 합니다. 넓은 길로 가기를 원하는 우리의 심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좇지 못합니다. 십자가는 영광이 아니라 먼저 수치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 수치의 십자가, 고난의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영광의 십자가를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싸움을 하다가 쓰러지고 넘어지고 힘들어서 뒤돌아가는 사람들은 영광의 십자가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어려움을 겪습니다. 특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더욱 더 책임감 있는 삶을 살아야 할 줄 믿습니다. 보통 사람들과 달리 두 배의 노력을 기울어야 합니다. 단순한 육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삶까지도 함께 하여야 하기 때문에 힘이 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벗어 버리겠습니까?
사울처럼 순종의 십자가를 벗어 버리고 오늘 막다른 길에 쳐하여 절망하시겠습니까?
내게 주어진 십자가의 무게가 너무 힘들어 벗어버리고 싶습니까?
나의 힘으로 지려고 할 땐 십자가는 고역입니다. 나의 의지로 십자가는 질 수 없습니다. 십자가에 온전히 못 박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이 이미 나의 십자가, 우리의 십자가를 다 지셨습니다. 사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몰고 가서 승리하는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하므로 예수님이 승리하셨습니다. 사탄은 패배하였습니다. 나의 힘으로는 십자가는 질 수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못 박힐 때에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주와 함께 살아갈 줄 믿습니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나를 주장하여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속하는 역사가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사울은 지금 얼마나 비참한 모습을 보이는지요? 하나님께 순종치 않으므로 이미 그는 생명은 시한부 생명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악한 영에게도 오늘이 지나고 나면 사울과 아들들이 나와 함께 있으리라 사형선고를 다시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울을 두 번 죽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의 묘비명을 기록한다면 “여기 순종하지 않아 하나님께 버림 받은 인생이 잠들다”라는 묘비명이 세워 질 것입니다. 사울을 보면서 우리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후회 없는 삶을 산 사람은 없습니다. 실수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후회를 줄이며 살 수는 있습니다. 실수를 줄이며 살 수 있습니다. 인격적으로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완벽한 사람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성령님 안에, 하나님께 속해 있어야 할 줄 믿습니다. 사울의 절망과 실패를 보면서 하나님께 돌아가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살기를 축원합니다. 앞으로 우리의 삶을 다 살고 마지막 묘비명에 하나님의 사람들로 멋지게 산 경험들이 기록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기력이 다한 사울(20-22절).
(적용 :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행하여 새 힘을 받으라)
신접한 여인을 찾아간 사울은 결국 자충수를 두고 말았습니다. 꿈으로도, 우림으로도, 선지자로부터도 하나님의 계시가 없자 죽은 영혼까지 불러내려했던 사울은 자신이 죽음으로부터 불리어 냄을 알았습니다. 그의 충격이 얼마나 큰 지 20절은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갑자기 땅에 완전히 엎드러지니 이는 사무엘의 말로 말미암아 심히 두려워함이요 또 그의 기력이 다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루 밤낮을 음식을 먹지 못하였음이니라
사울의 엎어짐은 단순한 엎어뜨림이 아니었습니다. 충격으로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문자 그대로 몸 전체가 나뒹굴어진 상태를 말합니다. 어떻게 든 자신의 운명을 되돌리려고 신접한 자까지 찾은 사울은 무너져 내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상치 못한 충격으로 사울은 땅에 엎드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이 지나고 내일이면 대적 블레셋에 의해 자신은 물론 세 아들과 함께 이스라엘 군사들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어느 누가 두렵고 떨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암이라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암은 죽음이라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지금이야 생존률이 많이 높아졌지만 몇 해 전만 해도 암은 그야말로 공포의 대상입니다. 왕의 자리에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애쓰고 힘썼던 모든 것이 졸지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사울은 사형수의 심정이 되어 심히 두려움에 떨어야했습니다. 그토록 원치 않았던 결과이기에 사울의 낙심과 절망 두려움은 더하였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형수로서 10년을 넘게 복역한 한 수감자는 하루 하루의 자신의 삶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삶은 늘 내일 오전까지만 보장된다.” 사형이 집행되는 오후는 기약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루조차 다 기약할 수 없는 것이 사형수의 심정입니다. 한국의 사형수들은 명찰조차 일반 죄수하고 틀립니다. 독방에서 언제 있을지 모르는 사형날짜를 머리 속에 담은 채 하루 하루 피 말리는 삶을 살아갑니다. 사울의 생애가 그러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은 이후 그는 무던히도 자신의 힘으로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니 이미 그는 사형수의 신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언제 있을지 알지 못하는 최후의 날을 기다리며 살아갔는데 오늘에서야 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에 의해 버림을 받았을 때는 적극적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습니다. 자신의 범죄 함을 인정하며 죄사함 받기를 원하여 하나님께 돌아가 뵈옵기를 청하였습니다.
삼상 15:24-25
사울이 사무엘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내가 여호와의 명령과 당신의 말씀을 어긴 것은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그들의 말을 청종하였음이니이다
청하오니 지금 내 죄를 사하고 나와 함께 돌아가서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 나로 하여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하니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은 지금 기력이 다하였습니다. 이와 같이 항변할 힘조차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 죄 사함을 받고 용서함을 받겠다는 의지조차 없습니다.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죽은 영혼이 나타나서 다시 한 번 자신의 죽음을 확인하였으니 얼마나 고통스러운 심정이었겠습니까? 그 말 한마디로 사울의 모든 기력이 쇠하였습니다. 하루 종일 음식이 입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내일이면 죽을 사람이 음식이 입에 넘어가겠습니까? 그 어떤 진수성찬을 가져다주어도 모래알을 씹는 느낌일 것입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림 같이 두려움이 물 밀듯이 몰려와 도저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울과 여인과의 대화에서 내레이터는 말씀의 순종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이 오늘 이 처참하고 두려운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듣지 않았던 것이었습니다. 신접한 여인은 자신은 죽음을 내놓고 사울의 말에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죽은 영혼을 불러올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사울을 위하여 하지 않았느냐 그러니 당신이 이제 내 말을 들으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하루 앞두고 여인의 입에서 사울에게 다시 한 번 말씀을 들을 것을 요구받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치 않아 죽음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사야의 외침을 기억하십시오.
사 1:18-20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희게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성경이 가리키는 것은 간단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이요 불순종은 벌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것 같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사울에게 두려움을 가져 주는 실체는 ‘죽음’이라는 단어였습니다. 죽음이라는 두려움 앞에 모든 기력이 쇠하고 마는 사울처럼 우리 보통 인간들의 삶이 다 그렇습니다. 나는 죽음 따윈 두렵지 않다고 외쳐도 막상 죽음을 앞에 두고서는 두렵고 떨리지 않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 외침은 공허할 뿐입니다. 그러나 내세에 있을 영원한 삶을 준비한 사람들은 죽음조차 아름다운 것일 줄 믿습니다. 죽음조차 기다려지는 줄 믿습니다. 죽임 이후에 “끝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죽음은 단순히 끝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죽음 이후에는 반드시 새로운 시작이 있습니다. 기독교들에게 있어서 죽음은 축복입니다. 이 땅에서 누리지 못한 축제의 삶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으로 인하여 정신을 놓고 기력이 다하며 두려워 떨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죽음이 우리를 두렵게 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 우리의 기력을 쇠하게 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 우리를 흔들리게 할 수 없습니다. 기력을 내시기 바랍니다.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죽음 앞에도 달려갈 길 다가고 믿음을 지킨 자신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울뿐만이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그러하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딤후 4:6-8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사도 바울은 전제와 같이 자신이 부어진다고 하였습니다. 전제는 제물 위에 술을 붓는 제사로 바울이 순교의 피를 흘릴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을 각오하고도 선한 싸움을 계속하는 사도 바울에게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습니다. 이처럼 모든 믿음의 선한 싸움을 하는 저와 여러분에게도 의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이 예비 된 줄 믿습니다.
마음속에 큰 근심이 있으십니까?
죽음을 가져다주는 커다란 장애물로 마음이 심히 두려우십니까?
죽음이라는 원수 마귀가 우리를 위협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다 아뢰일 때 모든 근심과 두려움이 물러날 줄 믿습니다.
♬ 마음 속에 근심 있는 사람
죽음 앞에 겁을 내는 자여 주 예수 앞에 다 아뢰어라
하늘나라 바라보는 자여 주 예수께 아뢰라
주 예수 앞에 다 아뢰어라 주 우리의 친구니
무엇이나 근심하지 말고 주 예수께 아뢰라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죽음 앞에 두려운 사람들이 아닙니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실체 앞에서도 기력이 다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는 불행한 죽음을 맞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에게는 죽음도 두렵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는 아름다운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력을 얻으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력을 얻고 우리에게 예비 된 영원한 복락을 누리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사울의 최후의 만찬(23-25절).
(적용 : 주와 함께 축복의 만찬을 누리는 삶을 살라)
사울의 앞날은 정해졌습니다. 그는 내일이면 세 아들들과 함께 죽게 됩니다. 자신 혼자만 죽는 것이 아니라 세 명의 아들들과 함께 죽는 다는 생각으로 기력이 다했습니다. 이에 여인이 기력을 잃은 사울에게 기운을 차리게 음식을 먹을 것을 권유합니다. 처음에는 음식을 거부한 사울이 여인과 또 함께 데려간 두 명의 부하가 강권하자 그들의 말을 듣고 침상에 앉았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신접한 여인의 말을 들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금지한 신접한 여인의 말을 들으므로 영영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드디어 사울은 말을 듣고 여인이 살진 송아지를 잡고 무교병을 만들어 준 음식을 먹었습니다. 신전한 여인이 송아지를 잡아서 사울을 위하여 대접했는데 얼마나 융숭한 대접이었습니까? 그러나 사울은 신접한 여인과 결탁하고 있습니다. 무당의 말을 듣고 무당이 해주는 음식을 먹었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극히 혐오하고 싫어하는 일을 자신도 모른 채 끝까지 행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울의 최후의 만찬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최후의 만찬을 마치고 고난의 현장으로 가셨습니다. 사울 역시 최후의 만찬 후에 자신의 길로 갔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길은 고난 끝에 오는 영광의 길을 갔다면 사울은 앞이 보이지 않는 두려움의 길을 간 것뿐입니다. 신접한 여인이 사울을 위하여 만찬을 베푼 음식 중에 무교병이 있었습니다. 무교병은 고난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말씀을 봅니다.
신 16:3
유교병을 그것과 함께 먹지 말고 이레 동안은 무교병 곧 고난의 떡을 그것과 함께 먹으라 이는 네가 애굽 땅에서 급히 나왔음이니 이같이 행하여 네 평생에 항상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온 날을 기억할 것이니라
여인이 사울의 기력을 북돋고자 한 것이 그 자신도 알지 못하는 채 사울에게 무교병 고난의 떡을 만들어 줌으로 사울의 최후의 만찬 후에 있을 고난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무교병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 할 때의 고난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애굽 땅에서 종살이 하던 고난을 상징합니다. 이들이 출애굽 하면서 떡, 빵을 구울 시간이 없었습니다. 밀가루 반죽을 반죽통에 넣은 채 옷에 싸서 어깨에 지고 떠날 정도 급하게 떠나야 했습니다.
출 12:33-34
애굽 사람들은 말하기를 우리가 다 죽은 자가 되도다 하고 그 백성을 재촉하여 그 땅에서 속히 내보내려 하므로
그 백성이 발교되지 못한 반죽 담은 그릇을 옷에 싸서 어깨에 메니라
출 12:39
그들이 애굽으로부터 가지고 나온 발교되지 못한 반죽으로 무교병을 구웠으니 이는 그들이 애굽에서 쫓겨나므로 지체할 수 없었음이며 아무 양식도 준비하지 못하였음이었더라
출애굽의 급박한 상황을 보여주듯 허리에 띠를 두르고 손에 지팡이를 쥔 채 허겁지겁 떠나야 했습니다. 유월절을 지나고 홍해 바다를 건너기 전까지 바로의 군대가 쫓아오는 급박한 상황에서 오는 고난과 괴로움의 상징이 무교절이었습니다. 유교병(발효 시킨 떡)을 먹을 시간이 없어 누룩을 넣지 않은 발효되지 못한 무교병을 먹어야 했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과거 자신의 조상들이 애굽에서 고통당하였던 것을 잊지 않기 위해 무교절을 지킵니다. 레위기 23장 6절에서도 칠일 동안 무교병을 먹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무교병은 고난의 떡입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께서 장차 십자가에 달려 고난을 받으실 것을 예표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사울의 최후의 만찬은 아무런 희망이 없는 육적인 만찬이었습니다. 그 만찬이 베풀어진 자리조차 악한 영과의 자리에 함께한 만찬이었습니다. 살진 송아지를 잡아 안심 등심 구이를 먹더라도 사울은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지 않기를 원하였습니다.
고전 10: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사울은 돌이키지 못할 죄를 저질렀습니다. 마치 최후의 만찬에 가롯 유다가 함께 한 것처럼 사울은 신접한 여인을 찾는 자체가 귀신과 결탁한 것입니다. 귀신이 주는 만찬의 자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하는 만찬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하는 만찬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인생의 최후의 만찬이 벌어진다면 그 자리에 누구를 초대하겠습니까? 최후의 만찬 자리에 누구와 앉아 있겠습니까? 최후의 만찬 자리를 누구와 그 자리에 앉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기쁨의 자리에 앉기를 축원합니다. 고난과 괴로움이 지나고 자유와 해방을 맞본 이스라엘처럼 예수님과 함께 할 때 기쁨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히브리서 말씀을 봅니다.
히 10:26-27
우리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한즉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고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것과 대적하는 자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으리라
이 말씀은 히브리서 기자가 사울을 위하여 준 말씀인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의 이 말씀은 배교자를 향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사울은 죄를 범하였고 그에게는 다시 속죄하는 제사가 없었습니다. 오직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을 기다리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므로 그를 태울 맹렬한 불만 있을 것입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찔림이 있기를 바랍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심장과 폐부를 찌르기를 원합니다. 이 말씀이 우리의 심령 골수를 찌르기를 원합니다. 이 말씀의 찔림으로 우리의 영혼이 울림 받고 깨닫게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모두는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다. 충분히 말씀이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죄를 범합니다. 나는 죄 없는 사람이다. 나는 사람들을 찌른 범죄자가 아니다. 나는 사람들을 속인 사기꾼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은 범법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런 단순한 죄가 아니라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 하는 것이 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이 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죄를 범치 않기를 소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아 죽음의 길을 간 사울을 보면서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는 하나님께 버림 받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시를 바랍니다. 사울은 여인이 해준 무교병을 먹고 고난과 두려움의 길을 갔습니다. 무교병을 먹고 간 것이 사울에게 그린 마일입니다. 그린 마일을 걸을 수밖에 없는 사형수의 심정이 되어 그 어느 밤보다 긴 고통스러운 밤을 지새워야만 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그린 마일을 걷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 다 그린 마일입니다. 우리는 그린 마일이라는 더 이상 피할 수 없고 더 이상 벗어나 갈 수 없는 막다른 한계적 상황을 살아갑니다. 아무리 돈에 걱정이 없고 삶에 근심 걱정이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근본적인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인생이라면 누구나 그린 마일을 경험하는 날이 옵니다. 그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나는 사형수가 아니기 때문에 그린 마일 따위는 없다고 외쳐보지만 죽음 앞에서는 공허할 뿐입니다. 절박한 상황에서 아무 도울 힘이 없는 헛된 우상을 찾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힘을 주시는 하나님을 찾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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