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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상28:1-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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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모든 문제는 믿음의 문제입니다(삼상강해 68)
사무엘상 28:1-19장
이한규 목사
다윗이 블레셋의 가드 지역에 있을 때 블레셋과 이스라엘 사이에 전선이 형성되었습니다. 블레셋은 수넴에 진쳤고, 이스라엘은 길보아산에 진쳤습니다. 그때 사울이 수넴에 진친 블레셋 군대를 보고 마음이 떨려서 하나님께 어떤 메시지를 달라고 구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어떤 말씀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불러 올리라고 그 여인에게 명령했습니다. 그 여인은 마치 사무엘을 불러 올린 것처럼 사무엘 목소리를 흉내내며 말했습니다.
"네가 왜 나를 불러 올렸느냐?"
사울이 대답했습니다.
"블레셋이 쳐들어왔는데 어떻게 해야 할 줄을 몰라서요."
그 얘기를 듣고 여인이 사무엘 소리를 흉내내며 그럴듯한 설교를 했습니다.
"네가 여호와를 떠난 때문이다. 네가 아말렉을 멸하라는 하나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아서 그렇다. 내일 너와 네 아들들이 죽고 이스라엘은 블레셋 사람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 버림받은 자의 모습
신접한 여인을 통해 사무엘의 혼이 이 땅에 불려 올려진 것은 그럴듯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통한 사무엘이 말이 맞는 측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은 신접한 여인의 영적 사기입니다. 하나님은 영매술을 가증스러운 것으로 여기시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영매술은 성경적 진리의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상황이 펼쳐진 것에 대해서는 두 가지 가능성이 있습니다.
1) 여인이 풍문으로 들리는 여러 소문과 정황을 보고 판단하여 사무엘 흉내를 내어 그럴듯한 설교를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2) 아니면 사무엘로 변장하여 나타난 마귀의 메시지를 그대로 전달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 사실도 모르고 사무엘인 줄 알고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이 사울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버림받은 자의 몇 가지 모습을 살펴보게 됩니다.
1.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사울이 블레셋 군대를 보고 두려워서 그 마음이 크게 떨렸습니다(5절). 사실상 사울은 수많은 전쟁을 치룬 역전의 용사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의 버림을 받게 되자 그의 마음에는 믿음보다 두려움이 더 크게 되었습니다. 엔돌의 신접한 여인마저 찾은 것을 볼 때 두려움이 사로잡힌 버림받은 자 사울의 안간힘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2. 이중성을 보입니다
사무엘이 죽자 사울은 신접한 자와 박수를 추방했습니다(3절). 백성들이 그러한 사울의 행위를 보고 칭찬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은 변장한 채 엔돌의 신접한 여인을 찾아가 묻습니다(8절). 마치 사창가를 단속한다고 하면서 본인은 사창가를 찾는 모습입니다. 이러한 이중적인 모습은 버림받은 자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3. 바른 판단력을 상실합니다
하나님이 왜 사울에게 대답지 않는지를 생각지 않고 엔돌의 신접한 여인에게 물으러 간 것! 이것은 하나님 앞에 가장 결정적인 죄악입니다. 그러한 행위가 얼마나 큰 죄악인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사울의 판단력은 흐려졌습니다.
그리고 엔돌의 신접한 여인이 사무엘 목소리를 낸다고 해서 사무엘의 영혼이 이 땅에 다시 나온 것인 줄 알았던 것! 이것도 하나님의 영적 원리에 어긋난 것이기 때문에 사무엘의 영혼이 이 땅에 나온 것이 아닙니다.
인간은 죽으면 그 영혼이 이 땅에 돌아올 수 없습니다(눅 16장). 영혼은 천국에서 지옥으로, 지옥에서 세상으로, 세상에서 천국으로 마음껏 옮겨 다니는 실체가 아닙니다.
이러한 성경적 원리로 인해 기독교에서는 제사를 금지하는 것입니다. 만약 제사를 드릴 때 정말 죽은 아버지의 영혼이나 할아버지의 죽은 영혼이 살아 와서 정말 제사상 앞에 있다면 우리도 절하지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독교에서도 명절 때 어른들에게 세배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사상에서 아버지의 죽은 영혼이 찾아오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영혼을 가장한 귀신이 와서 우리의 절을 대신 받는 것이고, 결국 우리는 귀신에게 절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사를 금하신 것입니다.
* 모든 문제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사울의 실패와 버림받는 길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서 무슨 교훈을 얻습니까. 우리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절대로 후퇴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1) 믿음이 없으면 사울처럼 불안과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2) 믿음이 없으면 몸 안에서 분열적 현상일 일어나 정신과 육체가 따로 놀게 됩니다. 그래서 이중적인 삶의 행태를 보이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3) 믿음이 없으면 바른 판단력이 생기기 않습니다.
크고 작은 정신적 문제는 대개 불안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 불안함이 삶의 건전성과 창조성과 용기를 빼앗아가 버립니다. 그런데 가장 치명적인 불안은 어디서 옵니까.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으로부터 옵니다. 믿음이 있으면 어려운 일에서 잠깐 안정을 잃는 순간이 있을지라도 절대 불안에 사로잡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어도 불편함에 처할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참으로 잘 믿으면 불안함에 사로잡히지는 않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안 믿어도 편안하게 살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없으면 참 평안도 없습니다.
현대는 불확실성의 시대입니다. 그래서 현대인의 가장 큰 병은 불안이라는 병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기에 늘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고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십니다.
시편 3편을 보면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해도 두려워 않겠다는 다윗의 고백이 나옵니다. 그리고 찬송가 470장을 보면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라고 하는 찬송가 저자의 고백이 나옵니다. 이런 고백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자에게 주어지는 복된 고백입니다.
그런데 믿는 자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평안의 근거가 어디에 비롯됩니까. 산 소망으로부터 비롯됩니다. 믿음은 우리에게 소망을 준다. 소망이 있는 사람은 환난이 환난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고, 그러한 결말을 알기에 환난 중에서도 평안이 유지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상황은 절망적일 수 있으나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의 미래는 희망적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결코 안됩니다. 이런 믿음이 있으면 환난이 있어도 그 환난이 인내의 시험장이 됩니다. 그리고 인내는 연단을 가져다주고, 연단은 결국 소망의 바탕이 됩니다. 이러한 복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결국 믿음의 문제는 소망의 문제입니다. 소망이 확실하면 불안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조급함이 사라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서울역의 1등 대합실과 3등 대합실을 가 보십시오. 개찰이 시작되면 1등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여유 있게 천천히 걸어 나갑니다. 반면에 3등 대합실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서로 먼저 타려고 뛰고 밀치고 야단법석을 떱니다. 왜 그러한 차이가 있습니까.
1등 대합실 손님은 고급 인생이고 3등 대합실 손님은 하급인생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단지 1등 대합실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자기 표에 지정된 좌석 번호가 기재되어 있기 때문에 천천히 가도 자신의 보증되어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므로 구태여 뛸 필요가 없습니다. 반면에 3등 대합실의 손님은 뛰지 않으면 자신의 자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뛸 수밖에 없습니다. 자리에 대한 믿음의 소망이 확실하지 않으면 뛰는 조급한 인생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지금 무엇인가를 향해 조급하게 뛰고 계십니까. 그래서 마음이 불안하십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여러분들은 확실한 미래가 보장된 사람들입니다. 미래가 보장되고 미래를 볼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뛰면서 서두르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한 소망이 있으면 현재의 삶이 어렵다고 정신 못차릴 정도로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일이 보이기 때문이다. 내일이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산 소망이 어디에서 옵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옵니다. 어려움이 찾아올 때마다 더욱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꼭 붙들어 마음의 넉넉함과 여유를 찾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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