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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상29:1-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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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고진하 목사 |
참고 : | 2008.9.24 쌍문중앙감리교회 http://cafe.naver.com/scmchurch |
위기 속에서
할렐루야! 주일 아침에 예배하러 온 모든 성도님들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와 평강이 넘치시길 바랍니다. 오늘 아침에는 "위기 속에서"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을 나누길 원합니다.
오늘 말씀은 다윗이 블레셋 편에 속하여 이스라엘과 전쟁하러 나가는 것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물론 다윗은 사울 왕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차기 왕으로 기름 부음은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울 왕의 계속되는 공격과 인하여 블레셋으로 망명하게 되었고, 결국 블레셋에 속하여 이스라엘과 전쟁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다윗의 입장에서는 앞으로 갈 수도 없고 뒤로 갈 수도 없는 위기였습니다. 왜냐하면 앞으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 동족인 이스라엘과 싸울 수는 없었습니다. 만약에 이스라엘과 싸웠다면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없었을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나 자신의 꿈은 모두 좌절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과 싸울 것을 거부하면 블레셋 왕 아기스의 의심을 받아 생명이 위태해지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다윗만 위태해지면 도망이라도 가겠는데 자신을 따르는 부하 600명과 그에 따르는 가족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진퇴양난의 위기 속에서 다윗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했습니다. 아마도 몸은 블레셋에 속하여 이스라엘과 전쟁하기 위하여 진군하고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무수한 생각들이 오고갔을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위기는 우리의 인생 가운데서도 많이 있습니다. 그 크고 작은 위기와 고비의 순간들을 우리가 잘 이겨나가야 복된 인생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운동선수들도 최고의 선수들의 공통점은 위기관리능력이 탁월하다고 합니다. 즉 스코어나 상황이 몰렸을 때에도 당황하지 않고 그것을 잘 관리하고 이겨나는 선수들이 큰 선수라고 합니다.
그럼, 우리 삶의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위기 속에는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늘 말씀이 주시는 몇 가지 교훈을 배우고 우리 삶 가운데 실천하길 원합니다.
1. 잘 선택해야 합니다.
위기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잘 선택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 2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29:1 블레셋 사람들은 그 모든 군대를 아벡에 모았고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스르엘에 있는 샘곁에 진쳤더라 29:2 블레셋 사람의 장관들은 수백씩 수천씩 영솔하여 나아가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아기스와 함께 그 뒤에서 나아가더니
(1) 다윗은 위기 속에서 블레셋으로 도망했지만 더 큰 위기를 만났습니다.
블레셋은 이스라엘과 전쟁하기 위해서 수백, 수천 명씩 무리를 지어서 진군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를 다윗과 그의 부하들이 블레셋 왕 아기스와 함께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블레셋 땅에 거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위장을 했던 다윗은 겉으로는 아무 일도 없는 듯 블레셋 왕 아기스와 동행했습니다. 하지만 속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즉 다윗은 동족인 이스라엘과 전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도 아니고 자신의 미래도 망치는 것임을 분명히 알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블레셋 왕 아기스의 의심을 받지 않으려면 같이 전쟁에 나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즉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럼, 다윗은 왜 이러한 진퇴양난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다윗이 사울 왕을 피해 블레셋으로 도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다윗은 사울 왕의 집요한 추격을 너무나 힘들어했습니다. 그 사울 왕의 추격은 하루 이틀의 문제도 아니었고, 다윗 혼자만 숨으면 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부하 600명과 그에 따르는 가족들을 거느린다는 것은 다윗으로서는 도저히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을 저버리고 하나님을 적대시하는 블레셋으로 망명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위기와 문제를 피하여 블레셋으로 망명하자 모든 일이 해결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늘 말씀 보시면 더 큰 위기에 처하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습니다. 또한 사무엘상 30장을 보시면 다윗이 블레셋과 함께 전쟁을 하러 나간 사이에 아말렉 족속이 다윗과 그의 부하들의 가족이 사는 시글락 성을 쳐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모든 재산을 빼앗아 가고 가족들도 노예로 잡혀갔습니다. 문제와 위기가 있어서 하나님의 약속이 있는 땅을 저버렸더니 더 큰 위기가 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기 속에서 선택을 잘해야 합니다. 선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위기는 기회가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더 큰 위기도 될 수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막다른 곳으로 인도하시는 경우는 두 가지 경우입니다.
대개의 경우 하나님께서 우리를 막다른 위기로 인도하시는 경우는 두 가지 경우입니다. 하나는 이제 고난이 다 끝날 때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놀라운 기적을 예비하신 경우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지만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께 그 십자가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할 만하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물론 예수님은 마지막에는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심으로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그 십자가는 극심한 고통이었지만 그 이후에는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십자가 뒤에서는 부활과 우리를 구원하시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극심한 위기가 있을 때에 우리는 부활과 구원의 아침이 밝아오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위기를 허락하시는 것은 예비된 축복이 있기 때문에 허락하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복된 여인들 중에서 불임여성이 많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러했고,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가 그러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기를 낳을 수 없는 불가능과 그로 인한 냉대의 위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곧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과 축복으로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창세기 22장에 나오는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100세 때에 낳은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했습니다. 정말로 대책 없는 명령처럼 보였고, 아브라함의 모든 소망을 잃게 되는 위기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서 정면으로 위기를 돌파해 나갔더니 이미 하나님은 이삭을 대신할 숫양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 아브라함에게는 더 이상의 시험이 없었고 복된 약속과 축복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기 속에서 선택을 잘 해야 합니다.
물론 성경에는 위기 속에서 선택을 잘못한 이들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에서일 것입니다. 창세기 25장을 보시면 사냥하고 돌아온 에서는 배가 무척이나 고픈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 때에 야곱이 에서에게 팥죽을 줄 터니 장자의 명분을 팔라고 했습니다. 그 때에 에서는 "장자의 명분이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하면서 장자의 명분을 팔고 팥죽만을 성급히 먹었습니다.
에서는 위기의 순간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은 무시하고 자신의 배를 채울 수 있는 것만을 선택했습니다. 결국 그는 그 믿음대로 장자로서 받은 축복을 받지 못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복은 이삭에게로 그리고 에서가 아닌 야곱에서로 흘러갔습니다. 위기 순간에 조급한 것은 금물이고, 눈에 보이는 것만 급급해서 선택하면 반드시 후회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3) 위기 속에서 생각과 자신이 있어야 할 곳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그럼,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무엇을 잘 선택해야 합니까? 위기의 순간에 잘 선택해야 할 중요한 것이 많지만 그 중에 먼저 생각을 잘 선택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1:2-5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1:2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1:4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즉 위기의 순간을 기쁨으로 맞아들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고난과 위기를 인내로 잘 통과하면 그것이 결국은 우리의 성숙함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고난과 위기를 축복으로 보는 긍정적인 믿음과 태도가 필요합니다. 무조건 절망하거나 힘들게만 생각하지 말고 오히려 기쁘게 여겨야 합니다. 힘들게만 생각하면 위기는 정말 위기가 되고, 더 힘들어질 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감당할 시험만 허락하시고, 축복이 되기 때문에 허락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피할 길을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위기의 순간에 우리는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선택해야 합니다. 동물원에 가면 동물들을 구경하는데 있어서 위치가 중요합니다. 즉 우리 밖에서 동물들을 구경하면 즐거운 여행이 되지만 우리 안으로 들어가면 위험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위기가 기회가 되기도 하고 정말 위험해지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어야 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곳에 있어야 합니다.
느헤미야 6장을 보시면 느헤미야가 예루살렘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이 나옵니다. 그 때 여러 가지 대적들의 방해와 공격이 있었습니다. 느헤미야가 그 여러 가지 방해와 공격을 이기자 이번에는 대적들이 외딴 곳으로 불러내었습니다. 겉으로는 조용히 만나 대화를 나누자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암살하려고 했습니다.
그 때 느헤미야는 "지금 성벽 재건하는 일이 바쁘기 때문에 못 나간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동족 중의 한 명이 지금 암살 위험이 있으니 성전의 성소로 피하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성소는 제사장만이 들어가는 곳으로 느헤미야가 들어가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이 되었습니다. 물론 그 때에도 느헤미야는 성소로 들어가라는 제의를 거절했고, 그 제의는 곧 나쁜 의도에서 제안된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느헤미야가 모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의 자리를 충실히 지켰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가 있어야 할 자리를 충실히 지키니 52일 만에 성벽을 재건할 수 있었고, 그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큰 부흥이 임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정과 일터 그리고 교회를 떠나지 말고 잘 지켜야 합니다. 그것이 복된 인생이 되는 지름길이고, 그곳을 떠나면 위기는 더 커질 수밖에 없습니다.
2.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두 번째 위기 속에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입니다. 3-5절의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9:3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가로되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느냐 아기스가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에게 이르되 이는 이스라엘 왕 사울의 신하 다윗이 아니냐 그가 나와 함께 있은지 여러 날 여러 해로되 그가 망명하여 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그의 허물을 보지 못하였노라 29:4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에게 노한지라 블레셋 방백들이 그에게 이르되 이 사람을 돌려보내어 왕이 그에게 정하신 그 처소로 가게 하소서 그는 우리와 함께 싸움에 내려가지 못하리니 그가 전장에서 우리의 대적이 될까 하나이다 그가 무엇으로 그 주와 다시 화합하리이까 이 사람들의 머리로 하지 아니하겠나이까 29:5 그들이 춤추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하던 이 다윗이 아니니이까
(1) 블레셋 방백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다윗이 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블레셋과 함께 전쟁에 나가고 있었을 때에 하나님의 역사는 원수들을 통해서 나타났습니다. 즉 블레셋의 지휘관들이 아기스 왕에게 묻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이 히브리 사람들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까?"그러자 아기스 왕이 다윗을 적극 변호했습니다. 즉 다윗이 블레셋으로 망명한 이후부터 잘못한 일이 없으니 믿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블레셋 지휘관들은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 사람을 돌려보내야 합니다. 그가 전쟁터에 나가서 마음을 바꾸면 우리가 힘들어집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이 춤추면서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라고 했던 다윗이 아닙니까?"
이것은 하나님께서 블레셋 지휘관들을 통해서 다윗에게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즉 "다윗아 너 지금 뭐하려는 거야? 너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거냐? 너는 누구냐? 너는 블레셋의 골리앗을 죽인 이스라엘의 장군이요 이스라엘의 왕이 될 사람이잖아?"라고 묻고 계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은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다윗에게 제정신을 차리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원수의 입을 통해서도 다윗이 제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경우는 구약성경에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못했을 때에 하나님은 이방 민족을 통해서 이스라엘을 징계하셨습니다. 그 징계 속에는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이 들어있었습니다.
(2) 위기 속에서 하나님과의 채널이 끊어져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기 속에서 하나님과의 채널에 막히면 안 됩니다. 요즘은 보통 유선으로 TV를 보지만 옛날에는 안테나로 TV를 보는 경우가 대다수였습니다. 그래서 주파수가 잘 안 맞으면 화면이 잘 안 왔습니다. 그러면 정보 전달이 잘 안 되었습니다.
그것은 전쟁 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쟁 중에서 중요한 것은 통신이라고 합니다. 통신이 막히면 완전히 고립되기 때문에 죽기 쉽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위기 상황에서 하나님과 우리의 채널이 막히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늘 우리를 말씀을 통해서 인도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채널을 항상 하나님께 고정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위기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많은 경우에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혹은 기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규칙적으로 성경을 읽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꼭 성경을 통해서만 말씀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오늘 말씀에서처럼 원수의 입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또한 어떤 상황이나 사건을 통해서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또한 민수기 22장을 보시면 발람 선지자가 물질에 눈이 어두워 하나님의 뜻을 저버릴 때에 하나님은 나귀를 통해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어디에 있든지 무엇을 하든지 들으려고 하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묻고 들으려고 하면 언제 어디나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지만, 들으려고 하는 마음이 없으면 성경을 읽거나 예배하는 시간에도 하나님의 말씀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린 사무엘이 하나님 앞에서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자, 우리 옆의 분들과 함께 점검해 보겠습니다. "하나님 말씀이 잘 들리세요?"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3) 주시는 말씀을 붙들고 결단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위기 속에도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마음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그 들려온 말씀을 붙들고 결단하고 순종하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말씀은 우리의 생명줄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위기 상황에서 들려온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분명히 결단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렇게 결단할 때에 중요한 것은 먼저 자기 소속과 나아갈 방향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물론 다윗의 소속은 블레셋이 아니었고 다윗이 공격할 대상은 이스라엘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붙들고 결단할 때에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분명히 결단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더불어 우리는 말씀을 붙들고 결단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결단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요한복음 8:29을 보시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 예수님은 혼자가 아니셨고 늘 하나님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럴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만을 행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 것인지를 분별하고 행할 때에 위기가 기회와 축복이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향이 늘 하나님께서 무엇을 기뻐하실 것인지에 초점에 맞추어지길 원합니다. 그럴 때에 더 이상 위기 속에 있지 않게 될 것입니다.
3. 악을 떠나야 합니다.
세 번째 위기 속에서 우리는 악을 떠나야 합니다. 9-11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29:9 아기스가 다윗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네가 내 목전에 하나님의 사자같이 선한 것을 내가 아나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은 말하기를 그가 우리와 함께 전장에 올라가지 못하리라 하니 29:10 그런즉 너는 너와 함께 온 네 주의 신하들로 더불어 새벽에 일어나라 너희는 새벽에 일어나서 밝거든 곧 떠나라 29:11 이에 다윗이 자기 사람들로 더불어 일찌기 아침에 일어나서 떠나 블레셋 사람의 땅으로 돌아가고 블레셋 사람은 이스르엘로 올라가니라
(1) 다윗은 결국 시글락으로 돌아왔습니다.
블레셋 왕 아기스는 다윗의 출전을 거부하는 블레셋 지휘관들의 의견을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블레셋이라는 나라는 다섯 개의 부족이 한 나라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쟁과 같은 일을 제외한 일들은 각기 독립적으로 운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기스가 블레셋 지휘관들의 의견을 무시할 경우 블레셋 자체 내의 동맹이 깨질 위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기스는 다윗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지금껏 내게 선하게 대했지만 블레셋의 다른 지휘관들이 너의 출전을 반대하니 너는 나와 함께 이번 전쟁에 갈 수 없다. 내일 새벽에 일어나 너의 부하들을 데리고 시글락으로 돌아가라"
물론 다윗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입니다. 겉으로는 의심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과 부하들 그리고 가족들의 안전에 이상이 없었고, 속으로는 동족인 이스라엘과 싸우지 않아서 너무 좋았을 것입니다.
(2) 악인들에게서 소외당하는 것은 복이고 하나님의 보호입니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였고 보호였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을 아셨고, 다윗이 전쟁에 나가서는 안 될 것임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원수들을 통해서 다윗이 전쟁에 나가는 것을 반대하게 하셨고, 결국 아기스 왕 조차도 어쩔 수 없기 허락하게 되었습니다.
때로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악인들의 소외를 받곤 합니다. 그럴 때에 때로 우리는 잘못 생각해서 "왜 나는 세상에서 이리 왕따를 당하는가? 왜 나는 사회에 적응하기가 힘든가?"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악인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소외를 당하는 것은 복중의 복입니다.
반대로 세상에서 악인과 함께 지내는 것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즐겁기만 하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왠지 세상에서는 불편하고 하나님의 집에 오면 살 맛 나야 정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무나 놀랍고 신기해서 하나님은 악인들을 통해서도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악인들이나 어떠한 상황을 통해서 우리가 죄짓지 못하게 막으십니다. 우리는 그 은혜에 정말로 감사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지 않으면 죄짓지 않고 살아가기에 너무나 힘든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처한 상황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도 그러합니다. 우리의 마음도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지 않으면 자꾸 죄에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충만히 우리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유혹이 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몸에 좋지 않은 상한 음식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음식을 먹는 순간 입에서 거부 반응이 일어납니다. 거부 반응이 일어나야 건강한 것이고, 그래야 건강도 지킬 수 있습니다. 반대로 상한 음식인데도 거부반응도 없고 입에서 꿀꺽 꿀꺽 잘 넘어간다면 그것은 몸이 병들고 면역체계가 깨진 것이고 앞으로 건강을 지켜 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 말라는 죄가 좋아 보이는 것은 이미 성령 충만하지 않은 것이고 이미 영적으로 병들고 시험에 든 것입니다. 반대로 성령 충만하면 옳은 것을 기쁨과 자원함으로 행하는 건강한 마음이 됩니다. 그것이 복된 것이고 영적으로 건강한 것입니다.
(3) 위기를 새로 출발하는 기회로 삼으십시오.
어느 음란 잡지와 음란 비디오에 빠져 있는 한 남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이따금 출장을 가게 되면 항상 그 일로 넘어졌다고 합니다. 그 때마다 집사님은 처절하게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 저를 지켜주세요! 저를 붙들어 주세요!" 하지만 억제치 못할 충동으로 유흥가를 배회했습니다. 쉽게 그 죄를 이길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섬기는 교회의 목사님에게 기도부탁을 하고 합심하여 더 강하게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부터 놀라운 일이 생긴 것입니다. 죄를 지으러 가는 날마다 술집 문이 닫혔거나 가는 길에 교인을 만나기 시작했습니다. 집사님은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막으시고 죄를 짓지 못하도록 보호하심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번은 회사에서 바이어를 접대하느냐고 술집에 갔는데, 술집 아가씨가 귀에 속삭이듯이 "아저씨 예수 믿으세!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집사님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고 계시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그곳을 뛰쳐나왔습니다. 그리고 그 때부터 죄를 이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위기 속에서도 죄를 짓지 못하게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있습니다. 그 한없는 사랑과 용서를 깨달았다면 우리는 위기를 죄를 떠나 새롭게 출발하는 기회로 삼아야 합니다.
어차피 하나님께 택함 받은 우리는 맘 놓고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성령께서 끝까지 우리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 환경을 통해 우리를 막으시거나 그것이 안 되면 징계하십니다. 그러므로 어차피 함께 갈 수 없는 악인들과 함께 하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6:14-16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6: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어차피 죄에서는 떠날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극단적인 상황에서는 우리를 때리시고 징계하시더라도 우리를 결단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육신의 부모가 자녀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하늘 아버지는 더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억지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따르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3:12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바울은 예수님께 자신이 사로잡힌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서신서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에 늘 그리스도의 종, 즉 노예로 소개했습니다. 자신에게 자유가 있는 것 같지만 실지로는 순종할 자유 밖에는 없음을 알았습니다. 순종하지 않으면 주인이 가만 안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억지 종이 되지 않았습니다. 즉 이제는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고 했습니다.
어차피 하나님께 사로잡힌 몸, 어차피 천국 백성으로 천국을 상속받고 영원한 복을 누리고 살아갈 존재라면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고 했습니다. 억지 신앙이 아니라 자원하는 신앙을 가지고 주의 뜻을 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제는 끌려가지 말고 기쁨으로 좇아가는 신앙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주위 분들과 함께 인사하겠습니다. "이제 그만 포기하시고 끌려가지 말고 좇아가세요!"
오늘 우리는 위기 속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배웠습니다. 위기 속에서 생각이나 있어야 할 자리를 잘 선택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또한 위기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고 신속히 결단하고 순종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위기 속에서 보호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악에서 떠나 새 출발하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럴 때에 위기가 축복이 되고 새로운 기회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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