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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하18: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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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2007-05-20 설교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하나님의 사랑, 부모님의 사랑" 2007-05-20
하나님 앞에 다시 세우는 가정 3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삼하 18:33).
Ⅰ. 본문의 배경
오늘날 어버이를 공경하는 아름다운 풍토가 사려져간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교회뿐 아니라 세상 여기저기에서 자주 들려옵니다. 이와 관련하여 오늘 본문은 그 크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서도 파란만장한 생애를 살았던 다윗의 가정에 일어난 한 가지 비극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약 3,000년 전, 이스라엘의 제 이대 왕, 다윗의 가정에 일어났던 불화에 대한 것입니다. 다윗은 심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였으며 하나님의 섭리 아래 왕이 되었고 그 은혜를 힘입어 당시 이스라엘 왕국을 가장 강성한 나라로 번성시킨 신앙이 매우 출중한 왕이었습니다. 당대의 관습에 따라 그는 많은 후궁들을 두었고, 더불어 약 29명의 자녀들을 두었습니다. 다윗왕의 가정에는 왕좌를 차지하고자하는 왕자들의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다윗에게는 암논이라는 첫째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셋째 아들 압살롬의 여동생 다말을 범하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압살롬은 암논을 죽일 다짐을 하게 되고, 때를 기다려 결국 형을 살해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 다윗 왕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한날한시에 한 아들은 살해당하고 한 아들은 살인자가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왕의 마음은 압살롬을 떠나게 되었고, 아들은 진노하는 아버지를 피해 멀리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후, 다윗 왕은 자기 아들 압살롬이 보고 싶어졌고, 그 마음을 읽은 신하들의 도움으로 압살롬과 다시 만나 화해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에 깊숙이 새겨진 반목의 고랑은 여간해서는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압살롬은 왕인 아버지를 없애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하는 반역을 도모하게 됩니다.
II. 압살롬의 반역
한 때는 강성한 이스라엘의 영광스러운 왕이었던 다윗은 이제 사랑했던 자식을 피해 황망하게 도망가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 버렸습니다. 과연 어떻게 이 지경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그 전말을 살펴보겠습니다.
A. 반역의 불씨
발단은 이러합니다. 다윗의 셋째 아들인 압살롬은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 공주에게서 난 소생이었습니다. 압살롬에게는 아리따운 여동생이 있었는데, 그녀의 이름은 다말이었습니다. 그런데 헤브론에서 이스르엘 여인 아히노암에게서 낳은 큰 아들 암논이 배다른 동생인 다말을 몹시 좋아했습니다. 암논은 병에 걸린척하다가 자기를 간호하러온 다말을 방에 들어오게 해서 겁탈해버립니다. 그렇게 자기의 육체적인 욕망을 채우고 나니까 마음이 돌변하여 그녀를 내쫓아 버립니다. “암논이 저를 심히 미워하니 이제 미워하는 미움이 이왕 연애하던 연애보다 더한지라 곧 저에게 이르되 일어나 가라”(삼하 13:15).
압살롬은 자기 여동생을 더럽힌 암논에 대한 울분을 삭히며 언젠가는 그를 죽이고야 말리라 결심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당장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습니다. 어쩌면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암논이 큰아들이니까 그를 처치해 버리고나면 둘째를 건너서 셋째인 자기에게 왕위가 오지 않겠는가?”하는 생각 때문에 주도면밀하게 그를 해치워야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슬피 우는 동생을 달래며 말했습니다. “네 오라비 암논이 너와 함께 있었느냐 그러나 저는 네 오라비니 누이야 시방은 잠잠히 있고 이것으로 인하여 근심하지 말라”(삼하 13:20). 이때부터 압살롬은 암논을 향한 복수의 칼을 갈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이 주년 후에 에브라임 곁 바알하솔에서 양털을 깎는 일이 있을 때, 그동안 마음에 품어왔던 계획을 실행에 옮깁니다. 모든 형제들과 암논을 연회장에 초청해서 암논을 죽여 버립니다. 다윗도 물론 암논의 비행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밉기는 했어도 맏아들이 아닙니까? 자기 눈앞에서 아들들끼리 칼부림치고 한 아들이 다른 아들을 쳐 죽이는 것을 보고 나니, 아무리 압살롬이 자기 아들이라도 고와 보일 리가 없었습니다. 다윗이 크게 노하였기 때문에 압살롬은 어쩔 수 없이 그술 왕 암미훌의 아들 달매에게로 도망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날마다 그 아들을 인하여 슬퍼하였고 그 마음이 아들을 향하여 간절하니, 왕의 마음을 읽은 부하들은 압살롬을 데려와 그 부자(父子)를 화해시킵니다. 그래도 다윗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가 가시지 않았습니다. 압살롬을 사랑하는 마음은 있었지만 여전히 아들을 멀리하고 있었습니다. “왕이 가로되 저를 그 집으로 물러가게 하고 내 얼굴을 보지 말게 하라 하매 압살롬이 자기 집으로 가고 왕의 얼굴을 보지 못하니라”(삼하 14:24).
아버지 곁에서 살게 되었을지라도 아들의 마음속에 맺힌 응어리는 도무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압살롬은 서서히 대권을 향한 도전을 시작합니다. 자신을 향한 아버지의 미움을 보면서 자기가 왕위를 계승할 가망성이 없으며 더 나아가 아버지에게 계속 미움을 받다가 자신의 신변에 위협이 올지도 모른다는 정치적 위기감 때문에 그런 일을 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나저나 그는 철두철미하게 모반을 준비했습니다.
우선 사병을 길렀습니다. 그래서 50명가량 되는 개인 호위대를 거느리고 성문에 나아가 재판을 받기 위해서 들어오는 백성들을 만나 따뜻한 말로 “네가 무슨 일로 재판을 받으려고 하느냐?”고 묻곤 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억울한 사정을 호소하면 “왕께서는 네 송사를 들을 재판관을 세우지 아니하였으니 재판이나 송사가 있으면 내게로 오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공의를 베풀리라.”고 선대해주며,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을 야금야금 도적질해갑니다. 게다가 헤브론에서 수많은 비류들을 모아서 추종세력을 결집한 다음에 “압살롬이 헤브론에서 왕이 되었다!”고 크게 나팔을 불게 했습니다. 이리하여 압살롬은 자신을 지지하는 많은 무리와 함께 헤브론에서 반역을 일으켰습니다.
다윗은 압살롬을 비롯한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대적으로 변하는 위기에 봉착했습니다. 다윗은 졸지에 아들에게 쫓겨 정처 없이 피난길에 오르는 가엾은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다윗왕의 수하에서 동고동락하던 부하들이나 한 피를 이어받은 골육지친들이 반역을 일으켜도 통탄할 일인데, 자기의 속으로 낳아서 안아주고 업어주며 기르던 아들이 아비의 목을 자르고 왕이 되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것을 보게 되다니, 이는 실로 억장이 무너져 내리는 일이었습니다. 게다가 압살롬은 악에 악을 더하여 백주 대낮에 지붕에 장막을 치고 왕의 후궁들과 함께 백성들 앞에서 동침하는 전대미문의 반인륜적인 패륜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니 다윗이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수치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마치 그것은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옷을 발가벗기는 것 같은 깊은 수치였을 것입니다. 인간의 유사 이래로 흔치 않은 참극입니다. 다윗은 망치로 커다란 못을 자기 몸에 쾅쾅 박는 것 같은 큰 아픔을 느꼈을 것입니다.
B. 반란의 평정
자식이 아비를 죽이고자 칼을 들고 반역의 무리들과 함께 자신을 향해 돌격해 오고 있었습니다. 차마 자기 아들과 그 무리들을 대적하여 싸울 수가 없어서 도주하게 되었고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윗을 욕했습니다. 한때는 골리앗을 무찌른 다윗을 칭송하며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고 노래하던 수많은 백성들이 이제는 등을 돌린 것입니다. 시므이는 황급히 피난길에 오른 다윗에게 “피를 흘린 자여 비루한 자여 가거라 가거라”(삼하 16:7)하고 저주를 퍼부었습니다. “왕께서 명령만 내리시면 시므이를 죽여 버리겠나이다.”는 부하들의 말에 잠자코 다음과 같이 뿐이었습니다.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저에게 명하신 것이니 저로 저주하게 버려두라”(삼하 16:10). 그 속에서 다윗이 하나님만을 바라보았던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압살롬의 반역을 가만두셨을 리 없습니다. 이 모든 난리를 평정하기 위해 다윗의 부하들은 전쟁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출정하는 부하들에게 다윗은 압살롬을 선대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나를 위하여 소년 압살롬을 너그러이 대접하라”(삼하 18:5). 결국은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다윗의 토벌군이 반역의 무리를 소탕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다윗의 군대는 아들 압살롬의 군대를 보기 좋게 무찔렀습니다. 반란의 두목이던 아들 압살롬은 도망가다가 나뭇가지에 목이 걸렸는데 그만 다윗의 장수들이 찌른 창에 맞아서 절명하게 됩니다. 난은 평정되었고 이제 모든 상황은 종료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아들이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으니, 이제 누가 이 승리의 소식을 왕에게 전할 것인가가 문제였습니다. 왜냐하면 왕이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이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장수들은 꾀를 써서 충격을 줄이기 위해서 두 명의 파발꾼을 보냅니다. 첫 번째 파발꾼 아히마아스가 와서 보고합니다. 다윗 왕이 다급하게 물었습니다. “소년 압살롬이 잘 있느냐?” 첫 번째 보고자가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의 생사여부는 잘 모르겠다고 얼버무립니다. 이어서 두 번째 파발꾼인 구스 사람이 당도합니다. 왕이 제일 먼저 물어봅니다. “압살롬은 잘 있느냐?” 그랬더니 차마 죽었다는 말을 할 수 없어서 “왕을 대적하는 자들은 다 그 소년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삼하 18:32)라고 완곡한 말로 압살롬의 비참한 죽음을 알렸습니다. 그러자 다윗 왕은 심히 아파하며 문루로 올라가서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하고 아들의 이름을 계속 부르며 심히 통곡합니다.
III. 부모의 사랑
다만 다윗이 한 나라의 왕이었다면 역적들의 죽음 앞에 그렇게 울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다윗은 왕권에 대한 야욕도 없었으니 보좌가 탐나거나 아까워서 슬퍼했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하려했던 아들, 자신에게 씻을 수 없는 수치를 주었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 이러한 슬픔을 토로하는 것은 그가 아버지이기 때문입니다.
A. 다윗의 마음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을 죽이기 위해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뿐 아니라 아비를 수치스럽게 하기 위해 백성들 앞에서 백주에 아비의 후궁들과 동침하였습니다. 노골적으로 아비의 하체를 범하는 것 같은 패역을 저질렀습니다. 그 아들은 아비의 사랑하는 많은 병사들을 죽였고 온 나라를 도탄에 몰아넣었습니다. 그런데 그 반역자의 죽음을 보고 다윗이 문루에 올라가서 통곡합니다. 아무리 아비를 능멸한 아들일지라도 압살롬을 향한 다윗의 사랑을 끊을 길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왕으로서의 본성이 아니라 아버지로서의 본성 때문에 통곡하는 것입니다. 효자이건 불효자이건 관계없이 자식을 향한 부모의 심정입니다. 다윗은 자기 목에 칼을 들이대다가 실패하고 죽은 이 압살롬을 “소년”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소년”이라는 단어는 나아르(r[;n:)인데 이것은 어린아이 때로는 갓난아이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마치 그의 모든 행동이 철이 없어서 했던 것이기 때문에 그를 죽음으로 형벌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탄식하는 것 같습니다.
다윗이 압살롬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눈물을 흘렸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 눈물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로, 압살롬이 그렇게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다윗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자신을 징계하는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밧세바와 불륜을 저지르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였을 때,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가정에 내린 저주의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내가 네 집에 재화를 일으키고 내가 네 처들을 가져 네 눈앞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리니 그 사람이 네 처들로 더불어 백주에 동침하리라”(삼하 12:11). 둘째로, 압살롬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다윗이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더 많이 고통 받았던 원인입니다. 다윗은 압살롬의 죽음 앞에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새롭게 돌아보며 통곡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사람 다윗이 범죄 했을 때, 하나님 아버지께서 느끼셨던 것과 같은 고통을 이번에는 다윗이 자기 아들이 죽는 환경 속에서 느끼며 애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B. 부모의 마음
부모가 되어서 자식을 사랑하지 않거나 자식을 버리는 사람은 이미 하나님의 형상을 스스로 파괴한 사람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노력해야할 성질의 것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 부모의 자식 사랑의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부은바 된 마음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갖도록 만들어 주신 것은 하나님의 자연스러운 창조의 원리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행복을 위해 자식을 버리고 유기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한 것입니다.
아무리 악한 부모라고 할지라도 자녀들을 향해서는 그러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압살롬이 칼을 들었을 때 그의 소원은 자기의 아버지의 목에 칼을 꽂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들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하나님과 모든 백성들 앞에서 목 놓아 울었습니다. 다윗이 “얼굴을 가리우고 큰 소리로 부르되 내 아들 압살롬아, 압살롬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하며 울부짖는 모습은 마치 압살롬 없는 자신의 인생은 아무 가치가 없다고 고백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다윗은 이 압살롬의 죽음에 직면하면서 다윗 속에 있는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부모들 속에 두신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와 같은 사랑은 사악한 인간들 마음에서 기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악한 인간들 속에 이런 마음을 불어넣어 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그 마음으로 이 세상에 있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서로를 사랑하며 살게 해주셨습니다. 결국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부모님의 사랑에는 공통점이 있는데, 이는 그 속에 감춰진 사랑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우리 시대의 아버지, 어머니는 마음속에 있는 사랑을 다 표현하지 못하고 사셨습니다. 그래서 그 감추어진 사랑을 자녀들은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아비를 죽이려고 했던 아들을 위해 우는 다윗의 마음처럼 부모의 사랑은 참으로 극진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형 암논을 죽였을 때 진노하던 아버지의 모습을 기억하던 아들 압살롬은 자기가 죽을 때 아버지가 저렇게 대성통곡할 것이라는 상상키나 했겠습니까?
자식도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을 수 있고, 부모도 자식으로부터 상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목해야할 한 가지 사실은 자식이 부모로부터 받은 상처는 아주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으나 부모가 자식으로부터 받은 상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쉽게 지워진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자식의 상처는 부모님을 깊이 사랑하고 섬기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자식들로부터 받은 수많은 고통과 아픔이 마음속에 남아있어도 자식들의 작은 사랑과 섬김을 보면 그 모든 상처가 봄 눈 녹듯이 풀어지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인 우리들이 부모님의 마음을 그렇게 시원하게 해드리는 것은 얼마나 어렵습니까? 우리 자신도 우리 자식들에게 완전한 부모가 되지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면서 가슴 저 밑바닥에 부모님을 원망하며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그러나 부모님은 작은 섬김과 효도에도 감화를 받고 태산처럼 큰 상처를 잊어버리고 사십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부모님의 피와 살을 받아 태어났고 또 그분들의 극진한 보살핌 때문에 오늘과 같은 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식에게 상처를 준 것보다 부모님에게 상처를 준 죄가 더 크고 아픈 것임을 기억해야할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가고 우리의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면 마음에 그렇게 한이 되고 슬픔이 될 수가 없습니다. 저의 할머니는 고생을 많이 하시다가 이제야 손자에게 효도를 받으실만한 때가 되었는데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께서는 11월에 돌아가시고 저는 1월에 대학교수가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한 삼 년만 더 사셨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는 생각이 들지만 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자식에게 있어서 최고의 선물은 부모님이 살아계신 것입니다. 이제 효도할 시간과 물질이 생겼는데 돌아다보니까 우리를 그렇게 길러주셨던 부모님이 그 자리에 안 계십니다. 살아계실 적에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을 그분들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어리석은 자가 우리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곁에 부모님이 살아계신다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주신 소중한 기회임을 기억하고 그분들을 지극정성으로 섬기십시오.
IV.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슬픔과 고통이 많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습니까? 부모의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하나님을 공경하듯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속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사랑을 부어주시어 자식들을 그렇게 사랑하도록 해주셨습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의 그림자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피조세계를 놀랍도록 보존해 가십니다.
십계명 중에서 제 5계명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물론 맨 먼저 부모들이 존경받을 만하게 살아야 되겠습니다. 부모들은 올바른 가정을 가꾸어서 자녀들이 하나님을 느끼며 살도록 만들어 주어야합니다. 그러면 말하지 않아도 그 자녀들이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하고 섬길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들이 올바른 가정을 못 이루면 자녀들이 참 하나님을 느끼며 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가정에서 효자가 나오리라 기대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바로 영혼의 아버지인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입니다. 젊었을 적에는 자기 좋을 대로 다니면서 부모님을 떠나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 철이 들게 되면 부모님이 계신 가정으로 돌아가고 싶어집니다. 하늘 아버지께서 창조하신 우리 영혼도 그분을 떠나 있는 만큼이나 그분께로 돌아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을 가지게 하는 종교의 씨앗입니다. 너무나 오래 떨어져 있어서 영혼의 아버지이신 우리 하나님을 잊어버렸지만 지금도 하나님은 변함없이 우리를 돌보시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죄인 된 우리는 우리 스스로 그분께 돌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친히 당신께로 돌아갈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위해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고 우리의 죄를 그분에게 친히 담당시키고 십자가에 달리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진 빚을 그분이 모두 청산하였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모든 죄를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분과 교제를 누릴 특권을 얻게 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느니라”(요 1:12). 든든한 부모와 형제가 있는 자는 고난과 시련을 만나도 외롭지 않으며 당당하게 맞설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인생의 모든 고난을 혼자 당하며 슬퍼했으나 그분의 자녀가 된 이후로는 고아와 같이 우리를 내버려두시지 않으시는 그분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영혼의 아버지께로 돌아가는 자만이 이러한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으신 것과 내 죄를 고백하고 그분을 구주로 모시기만 하면 우리는 영혼의 아버지인 하나님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아버지와의 화목이 얼마나 기쁩니까? 그런데 우리가 창조주 하나님 아버지와의 화목을 누린다면 얼마나 기쁠지 한 번 생각해보십시오. 제 아버지와 아들인 저 사이에 그리고 제 아들과 아버지인 저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를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제가 돌아가신 제 아버지와 군대에 있는 제 아들과 깊이 화해하지 않았다면 여러분들에 이런 설교를 하기는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화해하십시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께로 피하십시오. 이 세상이 홀로 있는 것 같아서 눈물을 흘리며 괴로워하고 인생에 고통스러운 일들로 인해서 마음이 찢어지는 것 같았던 옛날에는 두려움과 원망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고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사 43:1).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도 우리를 이토록 사랑해주셨는데, 우리의 영혼의 아버지는 우리를 얼마나 많이 사랑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철들기 전에 육신의 아버지의 사랑을 몰랐던 것처럼 아직 영혼에 철이 들지 못했기 때문에 하늘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범죄 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자녀인 우리의 죽음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가 범죄하고 실패하고 신앙에서 떨어질 때, 죽어가는 우리를 보고 “내 아들아! 내 딸아! 내 아들아! 내 딸아! 네가 어찌하여 죽어 가느냐?”하시며 슬퍼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힘입어서 이제껏 살아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그 사랑을 우리 부모의 마음속에 부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부모의 사랑의 생명싸개 속에 고이고이 보호해주셨기에 우리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지으시고 그리스도 안에 다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효도해야합니다. 또한 우리가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자기의 외아들을 죽기까지 우리에게 내어주신 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되새기며 우리 육신의 부모님을 성심껏 공경하는 그런 복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런 열린 심정을 가지고 부모님을 공경하고 사랑하며 그분들과 더불어 영적인 연합을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합니다. 그럴 수 있도록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끝까지 매달려 기도하십시오. 그래서 부모와 자식 간에 아름다운 연합을 통해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 가정에 흘러넘치도록 우리부터 먼저 하나님 앞에서 깊이 깨어지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육신의 아버님과 화해하십시오. 그리고 영의 아버님과 화해하십시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이 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런 화해와 용서, 그리고 세상을 이기는 능력과 축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부모와 자식이 서로 사랑하고 위로하고 용서하고 마침내 죽음이 갈라놓을 때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다시 만날 소망을 가진 채 헤어지는 그런 복된 가정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 나눔의 시간
1. 지난 주간의 말씀“네 부모를 공경하라”(룻 1:16)를 듣고 실천했던 삶이나 한 주간 받은 은혜를 말해 봅시다.
2. 삼하 18:33 설교 말씀의 전체적인 내용을 보고 깊이 다가왔던 부분을 서로 말해봅시다. 특히, 아버지 다윗과 아들 압살롬의 애증에 대해서 나누어 봅시다.
3. 반란의 수괴였던 압살롬의 죽음과 함께 이루어진 반란의 평정 소식을 접하였을 때, 아버지 다윗의 마음이 어떠했을지 이야기해 봅시다.
4. 다윗의 경험을 통해서 나타난 부모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나누어 보고, 우리의 기억을 더듬어서 부모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던 추억을 말해봅시다.
5. 두 아버지와의 화목-하나님 아버지, 육신의 부모님-을 이루며 살아가기 위해 우리에게 당장 필요한 결심은 무엇입니까? 2007-05-20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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