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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느5:14-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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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동원 목사 |
참고 : | 지구촌교회 |
오늘은 우리 민족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에서 자유를 얻은 지 광복 58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돌이켜 보면 우리 민족의 과거사에서 우리 민족이 주변 국가들의 부러움을 사고 동경의 대상이 된 최고의 번영의 시간은 IMF가 이땅에 찾아오기 전 20세기말까지의 반짝 10년간 동안(1987-1997)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언제 과거사에서 중국이나 소련 사람 그리고 동남아시아의 이웃들이 우리도 한국 사람들처럼 잘 살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때가 있었습니까? 물론 우리는 우리 스스로 내부적으로 안고 있는 여러가지 내면적인 부조리하고 부패한 부끄러운 자화상을 미해결의 숙제로 아프게 간직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시기에 이르러 어느정도 민족적인 자신감과 긍지를 회복한 것도 사실이었습니다. 우리는 어느정도 성공한 민족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여러 가지로 흔들리고 있습니다. 소리높은 개혁의 구호와 열망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감을 잃어버리고 있고 젊은이들은 대학을 졸업해도 미래를 전망하기 어려운 고실업의 절망을 겪고 있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너무 단순한 결론일지 모르지만 저는 성공을 관리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민족에게 주께서 허락하신 축복 혹은 성공을 관리하지 못한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공은 가장 정의되기 어려운 개념입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본 성공과 성경적 관점에서 본 성공은 전혀 다를수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소원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성공을 비판하는 사람조차도 그 비판으로 자기가 성공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는 오늘의 설교에서 일단 성공의 개념을 세속적으로 사용하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성공이라는 단어가 성경적인 의미로 성화되기를 기대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 축복할수 없는 성공은 결국 성공일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우리가 가장 보편적으로 빈번하게 사용하는 성공의 의미는 직장에서 소위 보다 많은 영향을 끼치고 우러러보는 자리에로 승급할 때 혹은 돈을 많이 벌거나 만질수 있는 자리에 있게 될 때일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느헤미야는 성공했다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내가 유다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때에--"처음에 그가 페르샤 정부의 장관의 직책을 버리고 고국 유다에 돌아가 예루살렘 성을 쌓는 일에 헌신하기로 했을 때 처음에 그는 자원봉사자의 자리에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 어느 시점에서 느헤미야는 아닥사스다 왕에 의해 정식으로 유대땅 총독의 자리에 임명됩니다. 일을 잘했고 왕의 신임을 받았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제 그는 유대땅에서 공식적으로 가장 영향력있는 자리에 서는 성공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느헤미야서 전체를 공부하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그는 계속 끝까지(12년간) 성공자로 머물러 있을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그는 성공을 잘 관리하는 모범을 보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안타까운 역사적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민족이 그리고 우리 개개인 성도들이 느헤미야에게서 배워야 할 성공을 관리하는 레슨-무엇일까요?
1. 성공의 기회를 책임으로 수용하십시오.
오늘 여러분이 본문 전체를 읽어가며 이 느헤미야라는 사람에 대하여 느끼시는 가장 두드러진 소감이 무엇입니까? 저에게서는 느헤미야의 책임감이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총독이 되었다고 해서 그에게서 어떤 유형의 자만감도 찾아 볼수가 없습니다. 본문은 그가 느낀 팽팽한 긴장과 부담 그리고 조국의 현실에 대한 책임감을 보여주지 않습니까? 우선 본문은 그가 무엇을 안하겠다는 그리고 안하였다는 고백적 선언으로 시작하지 않습니까? 14절에서는 그가"--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다"라고 말합니다. 15절에서는 이전 총독들처럼 "--백성을 압제 아니하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6절에서는 "--성의 역사에 힘을 다했다"고 고백합니다. 그에게 총독의 자리는 벼슬이 아닌 책임이었던 것입니다.
저는 우리 사회의 역사적 비극의 하나는 우리 민족이 소위 출세나 성공을 책임의 의미보다 더 벼슬따는 것, 혹은 자리를 차지하는 것으로 인식해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흔히 우리가 우리 선친이나 조상자랑을 할 때 우리는 우리 선친이 무슨 벼슬을 했다는 것을 자랑합니다.그가 그 벼슬자리에 있을 때에 이런 일을 이렇게 하셨다고 하면 자랑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이 어떻게 자랑이 됩니까? 여기에 우리의 맹목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영향력있는 자리에 서는 것을 사모하는 것은 결코 나쁜일이 아닙니다. 저는 하나님앞에 재능과 은사를 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되도록 책임있는 우리 사회의 영역들에 진출하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단순히 그리스도인들도 출세할수 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는 아니어야 합니다. 진정으로 주께서 가르치신 그대로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기 위해서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공을 갈망하는 사람마다 무거운 책임의 십자가를 질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지도자가 되는 것은 책임지는 사람이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지난 미국에서 있었던 9.11테러, 그리고 이라크 전쟁중 미국 백악관에서 아름답게 생긴 한 흑인여성이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고 설명하는 모습을 브라운관을 통해서 지켜보았습니다. 그녀는 스탠포드 대학교수를 거쳐 부시 정부에서 안보보좌관에 임명된 콘돌리자 라이스라는 여인입니다. 아마도 흑인 여성으로 인류 역사상 권력의 최정상에 도달한 여인이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말로도 번역된 그녀의 전기에 보면 그녀가 10살 먹은 소녀이었을 때 미국 수도인 워싱톤DC를 목사였던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구경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백악관을 바깥쪽 복도에서 구경하던 라이스는 갑자기 자기 아빠에게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아빠, 제가 바깥쪽에서만 백악관을 구경하는 건 피부색때문이에요. 두고 보세요. 저는 반드시 저 안으로 들어 갈 거에요." 25년후 그것은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기와 같은 흑인여성들에게 한 중요한 강연을 통해서 자신의 교육관을 이렇게 피력한바 있었습니다."교육은 신분상승을 주도하는 도구입니다. 그러나 교육이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면 그 꿈은 사라져 버립니다." 그녀는 교육을 통해서 신분 상승이 가능하지만 정말 더 중요한 것은 신분 상승이 아닌 역할이어야 한다고 강조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공의 기회를 열망하십시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앉게 될 자리나 신분때문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맡게 될 역할 때문이어야 합니다. 성공의 기회를 그 역할을 위한 책임으로 수용하십시오.
2. 성공의 기회를 섬김으로 응답하십시오.
본문을 성찰해 보면 느헤미야의 의식세계를 지배하던 중요한 것이 하나 있었음을 알수 있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이었습니다. 15절에"--백성을 압제하였으나"라는 말이 나옵니다. 그가 백성들의 현실을 직시하던 지도자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18절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백성의 부역이 중함이니라"(17절-그의 식탁에 손님만 150여명이 있을때도 있었지만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한 이유)고 말하고 있습니다. 19절의 그의 기도에서는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이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생각 깊은곳에 얼마나 백성이 자리잡고 있었는지를 알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에게 총독의 자리는 바로 이 백성들을 섬기기 위한 자리였던 것입니다. 그에게 총독의 기회는 섬김의 기회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총독의 자리에 서면서 제일 먼저 결심한 것이 이전 총독들처럼 백성들을 작취하는 일만은 결코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결심을 실천합니다. 15절에서 그는 이런 실천이 가능했던 이유를 고백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라고 했습니다. 그의 섬김의 결심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그리고 그분의 소명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이 백성을 섬기도록 부르셨다고 믿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진지한 섬김으로 이 부르심에 응답한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최 근세사의 불행은 이런 부르심앞에 진정으로 사심없이 백성들을 오직 백성들을 섬기기 위한 동기로 응답한 지도자가 별로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비판이 자조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성공을 섬김의 기회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이 나라 각계 각층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런 그리스도인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주님이 이 땅에 오시고 죽으시고 다시 사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그렇다면 섬김의 삶은 선택일수 없습니다. 섬김은 그리스도인들의 존재 양식이어야 합니다. 섬김이 우리의 삶의 실존이요, 본질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선택은 "무엇으로 어디에서 섬길 것인가?"뿐입니다. 그리고 진정한 섬김은 언제나 자기포기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섬기는 사람을 종이라고 합니다. 종에게 자기 포기가 없다면 종의 사명을 수행할수 있겠습니까? 론 새니(Lorne Sanny)는 "종에 대한 진정한 테스트는 그가 종처럼 부려질 때 정말 종처럼 행동할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참으로 섬기는 사람들이란 주인이 맡긴 사명, 그 고귀한 명령을 위해 자신의 모든 특권을 포기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 이 시대가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성공의 기회를 섬김으로 응답할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3. 성공의 기회를 최선으로 관리하십시오.
본문 16절에 보면 느헤미야는 이 성 역사에 힘을 다했다고 했습니다.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그는 달리 땅을 사지 아니했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기 개인의 안위를 위한 떡고물에 관심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나의 모든 종자도 그렇게 일했다고 했습니다. 느헤미야의 참모들도 동일한 심정으로 주의 소명에 최선을 다했다는 말입니다. 느헤미야인들 그의 노후 복지에 관심이 없었겠습니까? 느헤미야인들 편안한 인생을 누리고 싶은 유혹이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저는 매 순간 순간 느헤미야를 지배한 것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최선을 다하면 나머지는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리라는 믿음말입니다. 우리는 그런 증거를 그의 마지막 기도에서도 찾아 볼수 있습니다. 19절을 보십시오."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무슨 내용입니까? 내가 백성을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으니 내 나머지 인생은 주께서 은혜로 책임져 달라는 기도 아닙니까?
그것이 또한 바울의 고백이요, 기도가 아니었습니까?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디모데 후서4:7-8) 내가 최선을 다하여 싸우고 달렸으니 '이제 후로는', '이제 후로는' 주님이 책임져 주시고 상급주심을 믿는다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바울은 그것이 자신뿐만 아니라 주의 재림을 사모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기대이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후회없는 최선입니다. 내 역량을 넘어선 것은 어쩔수 없지 모를지만 주어진 사역의 장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주5일 근무제를 원론적으로 반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걱정은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지나치게 편의주의적 인생을 지향하게 하고 인생에 대한 최선의 갈망을 포기하게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염려가 있습니다. 아직은 좀 더 최선의 땀을 흘려야 할 때라는 생각은 기우일까요?
저는 최선이라는 단어를 생각할때마다 우리 시대의 성실한 그리스도인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을 곧 바로 떠올리게 됩니다. 대통령의 자리에서 퇴임한후 더욱 큰 존경을 받고 해비타트 운동에 헌신하고 세계 분쟁이 있는곳에 평화의 전령의 사명을 다하며 복음을 전하는 아름다운 그의 인생의 모토가 바로 최선이었습니다.-"왜 최선을 다하지 않는가?"(Why not the Best?) 그가 이 모토를 인생의 좌우명으로 채택한 동기가 있었습니다. 그가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한후 임관 직전 해군 제독과의 인터뷰가 있었습니다. 여러 가지 질문이 던져진후 제독은 그에게 해군 사관학교 시절의 성적을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있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제독은 "잘했군"하는 칭찬 대신에 다시 이렇게 반문했다고 합니다.-"그것이 자네가 최선을 다한 결과인가?" 청년 장교 카터는 땀을 흘리며 "글쎄요, 최선을 다했다고 까지는 말씀드릴 수 없겠지요."하자, 제독은 벼락같은 음성으로 되물었다고 합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못했는가?" 그날 그 제독의 음성이 카터에게는 주님의 음성처럼 들려 졌다고 합니다. "왜 최선을 다하지 않았는가?"
어느날 우리 모두 우리 몫의 인생을 다 살고 우리 인생의 주인되신 분, 우리의 창조자요 심판자이신 그분앞에 섰을 때에 꼭 같은 질문을 우리는 듣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그대가 나를 믿고 나의 부르심을 받아 살아 온 최선의 결과인가?" 그때 여러분과 저는 어떤 대답을 하게 될까요?
"주님,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만 고백할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은 성공이라고 주께서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성공을 사모하는 우리 민족 우리교회 우리 인생이 되기를 기도하십시다.
<설교 적용 질문>
1. 본문의 대의는 무엇입니까?
2. 본문 14절은 느헤미야가 이스라엘 총독이 되었을 때의 삶의 태도를 어떻게 증언하고 있습니까?
3. 본문이 보여주는 지도자로서 느헤미야가 백성을 대하는 태도는 무엇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4. 본문을 통해 성공을 관리하기 위해 우리가 배워야 할 레슨은 무엇입니까?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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