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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느2:17~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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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박봉수 목사 |
참고 : |
애물을 넘어서
느 2:17~20
육상경기 중 허들경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110미터 허들경기는 110미터 트랙에 설치된 높이 106.7cm의 허들 10개를 뛰어넘는 경기입니다.
이 경기의 특징은 우선 9.14미터마다 나타나는 허들을 계속해서 넘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 넘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또 넘어야 하고 또 넘어야 하고 경기 마칠 때 까지 계속 허들을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경기를 완주하려면 담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허들의 높이가 106.7cm인데 일반인들은 거의 모든 사람이 이 높이에 겁을 먹고 이 경기를 해 보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두려움을 없애고 뛰어보면 웬만한 사람은 대부분 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허들경기가 우리네 인생과 너무도 비슷합니다. 인생을 마치는 날까지 힘겨운 장애물이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하나 끝났나 싶으면 어느새 또 다른 것이 나타나 힘들게 합니다. 계속해서 다가오는 인생의 장애물을 넘기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넘어야 할 장애물들은 하나하나 모두가 우리를 두려워 떨게 합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그러나 또 담대한 마음으로 달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 느헤미야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과 느헤미야에게 끝없이 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온 힘을 기울여 그 장애물들을 넘고 있습니다. 성공적으로 그 장애물들을 하나씩 넘고 있습니다. 마치 금메달을 딴 선수의 허들 경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느헤미야를 자세하게 읽어보면 저들이 넘어야 했던 장애물들이 여러 가지가 나타납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귀환 이후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과정에 힘겨운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70년 넘게 그 땅을 차지하고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기 땅이라고 나타난 사람들에게 선선히 그 땅을 내줄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괴롭히고 힘들게 합니다.
다음으로 3차 포로귀환 때 백성을 이끌고 돌아온 느헤미야가 그 땅에 자리 잡게 되자 성벽을 재건하고자 했습니다. 이 때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힘을 합해서 방해했습니다. 저들의 집요한 방해가 또한 저들에게 또 다른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한 뒤에 과감한 종교개혁운동을 전개합니다. 이 때 도비야를 중심으로 일부 제사장 무리들이 성전 안에서 은밀하게 악한 일들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이 또한 저들에게는 감당키 힘든 장애물이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장애물들이 계속해서 밀려왔습니다. 그야말로 산 너머 산이었습니다. 하나 넘었나 하면 또 다른 것이 다가옵니다.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물러서지 않고 이 장애물들과 당당히 맞섰습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이 장애물들을 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장애물을 잘 넘을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이것이 장애물을 넘어야하는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이 될 것입니다.
기도했습니다.
구약성경 느헤미야는 한 마디로 기도의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장에 보면 느헤미야의 기도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내용도 기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13장 마무리도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이어지고 기도로 마치는 책이라는 말입니다.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느헤미야는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어김없이 기도부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1:4를 보면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소식을 들어보니 앞서 돌아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환난 가운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느헤미야는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2:11을 보면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한 지 삼일에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화하사”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가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돌아와 제일 먼저 다른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기도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일간의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의 마음을 감화하셨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정착해야 할 힘겨운 장애물 앞에서 저가 기도부터 시작한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4:1-4를 보면 “산발랏이 ... 비웃으며, 암몬 사람 도비야는 ...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우리 하나님이 들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성벽건축을 시작하려 하자 거센 방해가 시작됩니다. 느헤미야에게 감당키 어려운 장애물이 나타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장애물이 나타나자 바로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느헤미야의 장애물 넘는 힘은 바로 기도에서 왔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해보고 싶었지만 아직도 해 보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서핑입니다. TV나 영화에서 여러 차례 그 멋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서핑 보드를 타고 밀려오는 파도를 멋지게 타고 나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수들은 더 큰 파도를 타고 싶어서 호주 해안을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파도가 클수록 멋진 장면을 연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마치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큰 장애물이 밀려와도 기도는 서핑보드처럼 우리를 타고 넘게 해 줍니다. 기도를 잘하는 사람들은 그 장애물을 넘어도 멋지게 넘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서툴러도 기도를 하기만 하면 그 장애물에 삼키우지는 않습니다. 서핑보드를 타지는 못해도 잡고만 있어도 파도를 넘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파도가 밀려오는데 서핑보드가 없으면 정말 큰일입니다. 수영을 잘해도 파도가 밀려오면 헤어 나오기 쉽지 않습니다. 어렵사리 헤어 나온다고 해도 정말 죽을 고생을 하게 됩니다. 파도가 심하면 아무리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라 해도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가 우리를 지켜줍니다. 기도가 우리의 갈 길을 안내해 줍니다. 기도가 우리를 다가오는 장애물을 넘게 해 줍니다. 본문의 느헤미야는 마치 서핑보드 프로선수와 같습니다. 멋진 모습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넘는 선수처럼 다가오는 인생의 장애물을 어쩌면 그렇게 멋지게 넘는지 정말 부럽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라도 늦지 않습니다. 기도를 다시 시작하십시오. 기도를 더 열심히 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우리 인생의 장애물을 멋지게 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힘을 모았습니다.
2:17-8을 보면 느헤미야가 유다 사람들, 제사장들, 귀인들, 방백들, 그리고 성벽을 짓는 일에 참여한 사람들 그들을 설득합니다. 그리고 모두 힘을 합해서 이 선한 일에 동참케 합니다. 3장을 보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이 한 일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를 도와서 성벽 재건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그들이 한 일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헤미야의 호소를 받아들여 한 마음 한 뜻을 모아 밀려오는 거대한 장애물을 극복한 기록인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느헤미야의 지도력의 탁월함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지도력이란 일반적으로 “추종자들에 대한 영향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도력이 탁월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말을 잘 듣고 따르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이번에 중국선교여행을 하면서 또 한번 중국의 저력과 빠른 발전에 두려움마저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저 빠른 발전 뒤에는 중국 지도자들의 탁월한 지도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은 최근 후진타오라는 젊은 지도자가 장쩌민의 바통을 받았습니다. 세계가 이 사람의 지도력을 주목해 왔습니다. 놀랍게도 후진타오는 벌써 장쩌민보다 국민들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중국은 대내적으로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대단한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빈부격차입니다. 중국은 호리병과 같아서 국민의 5%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전체 국부의 50% 정도를 가지고 있어서 7000만 명 정도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살지만 70%가 넘는 사람들은 절대 빈곤에 가까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의 말을 믿고 참고 따라갑니다. 온 국민이 나라 발전에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점차 나아질 비전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한 마디로 지도력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국민들이 대통령을 마음으로부터 신뢰하지 않습니다. 지도자가 국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와 코드가 맞는 사람들하고만 대화하려하고 자기와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들은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대통령이 앞장서서 국민들의 힘을 갈라놓는 것처럼 비쳐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정책적 결정이 국회나 이익단체들로부터 비토를 당합니다. 국민들이 사사건건 반대하고 시위를 합니다. 뭐 하나 국책사업들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외국인들의 투자는 급격히 위축되고 있고 나라는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두 종류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하나는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로 뭉치는 공동체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힘을 모아서 그 위기에 대처합니다. 다른 하나는 위기를 만났을 때 흩어지는 공동체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서로 책임 공방을 벌입니다. 서로 다투고 싸웁니다. 자중지란이 일어나 작은 위기도 큰 위기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장애물이 다가올 때 힘을 모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냥 한 개비는 힘없이 부러집니다. 그러나 성냥 열 개비가 모여지면 쉽게 부러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혼자는 장애물 앞에 너무도 연약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면 강해집니다. 가족들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온 교인들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국민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담대히 전진해야 합니다.
본문 19-2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비웃어 가로되 너희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도 없다 하였느니라.” 대적들이 비웃고 협박할 때 느헤미야는 위축되지 않고 담대하게 맞섰고, 힘차게 전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2:10을 보면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대적들이 두려워했고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왜 느헤미야를 두려워했을까요? 20절에 보면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와 함께 하셔서 형통케 하실 것을 대적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탐험대가 정글을 탐험해 들어갈 때 가끔 맹수들과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맹수들이 포효를 하며 위협합니다. 호랑이나 사자나 심지어 코브라와 같은 독사들이 이빨을 드러내 놓고 살기어린 소리를 지르며 위협합니다. 그런데 맹수들은 먹이 앞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기다리다 사냥합니다. 맹수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들이 사람들이 무섭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아가는 곳에 사탄이 두려워 떱니다. 대적들이 겉으로는 위협하고 덤벼들지만 저들이 속으로는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 8:28을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 갑자기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서 소리를 질러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주님께서 가다라 땅에 가시자 귀신들이 먼저 두려워 떨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곳에 사탄이 두려워 떱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대적이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줄리어스 씨이저가 지중해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마침 큰 풍랑이 일어 배가 가라앉을 위기를 맞았습니다. 노를 젓던 사공들이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이 때 씨이저가 사공들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왜 두려워하느냐 나 씨이저가 타고 있는 한 이 배는 결코 파선되지 않을 것이다.”
씨이저의 위대한 점은 어떤 난관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갔다는 점입니다. 연약한 인간 씨이저도 저렇게 담대하게 나아갔는데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민 13-14장을 보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고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잘 아시는 대로 10명의 정탐꾼은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 어떤 장애물도 겁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너무도 크고 강해서 우리 힘으로 도저히 넘을 수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장애물이 크고 강해도 주님께서 넘지 못할 장애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한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아니 벌써 돕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끝내 그 장애물을 넘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겁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수많은 장애물들을 넘어 왔고 넘고 있고 또 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장애물은 우리가 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장애물이 내 앞에 다가올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담대하게 맞설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 떨거나 자기 힘으로 넘으려 할 때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장애물 앞에 서 있는 우리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기도하며 힘을 모아 담대하게 맞서야하겠습니다.
# 기도/ 인생의 장애물을 잘 극복하게 하옵소서.
기도하게 하시고, 힘을 모으게 하시고,
/박봉수 목사
느 2:17~20
육상경기 중 허들경기라는 것이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110미터 허들경기는 110미터 트랙에 설치된 높이 106.7cm의 허들 10개를 뛰어넘는 경기입니다.
이 경기의 특징은 우선 9.14미터마다 나타나는 허들을 계속해서 넘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 넘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고 또 넘어야 하고 또 넘어야 하고 경기 마칠 때 까지 계속 허들을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이 경기를 완주하려면 담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허들의 높이가 106.7cm인데 일반인들은 거의 모든 사람이 이 높이에 겁을 먹고 이 경기를 해 보려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일단 두려움을 없애고 뛰어보면 웬만한 사람은 대부분 넘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 허들경기가 우리네 인생과 너무도 비슷합니다. 인생을 마치는 날까지 힘겨운 장애물이 계속해서 나타납니다. 하나 끝났나 싶으면 어느새 또 다른 것이 나타나 힘들게 합니다. 계속해서 다가오는 인생의 장애물을 넘기에 온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런데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넘어야 할 장애물들은 하나하나 모두가 우리를 두려워 떨게 합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합니다. 그러나 또 담대한 마음으로 달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넘고 있습니다.
구약 성경 느헤미야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과 느헤미야에게 끝없이 넘어야 할 장애물들이 다가오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들이 온 힘을 기울여 그 장애물들을 넘고 있습니다. 성공적으로 그 장애물들을 하나씩 넘고 있습니다. 마치 금메달을 딴 선수의 허들 경기를 보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느헤미야를 자세하게 읽어보면 저들이 넘어야 했던 장애물들이 여러 가지가 나타납니다.
우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포로귀환 이후 가나안 땅에 정착하는 과정에 힘겨운 장애물을 만났습니다. 70년 넘게 그 땅을 차지하고 살던 사람들이 갑자기 자기 땅이라고 나타난 사람들에게 선선히 그 땅을 내줄 리 만무합니다. 그래서 괴롭히고 힘들게 합니다.
다음으로 3차 포로귀환 때 백성을 이끌고 돌아온 느헤미야가 그 땅에 자리 잡게 되자 성벽을 재건하고자 했습니다. 이 때 호론 사람 산발랏과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힘을 합해서 방해했습니다. 저들의 집요한 방해가 또한 저들에게 또 다른 장애물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한 뒤에 과감한 종교개혁운동을 전개합니다. 이 때 도비야를 중심으로 일부 제사장 무리들이 성전 안에서 은밀하게 악한 일들을 꾀하고 있었습니다. 이 또한 저들에게는 감당키 힘든 장애물이었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온 느헤미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런 장애물들이 계속해서 밀려왔습니다. 그야말로 산 너머 산이었습니다. 하나 넘었나 하면 또 다른 것이 다가옵니다. 어느 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들이 물러서지 않고 이 장애물들과 당당히 맞섰습니다. 그리고 성공적으로 이 장애물들을 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장애물을 잘 넘을 수 있었을까요? 그 답을 찾아보겠습니다. 이것이 장애물을 넘어야하는 우리에게 귀중한 교훈이 될 것입니다.
기도했습니다.
구약성경 느헤미야는 한 마디로 기도의 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1장에 보면 느헤미야의 기도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내용도 기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13장 마무리도 기도입니다. 그러니까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이어지고 기도로 마치는 책이라는 말입니다.
조금 자세히 살펴보면 느헤미야는 장애물을 만날 때마다 어김없이 기도부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살펴보겠습니다.
1:4를 보면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가로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 소식을 들어보니 앞서 돌아간 이스라엘 백성들이 큰 환난 가운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느헤미야는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통곡하며 기도를 시작합니다.
2:11을 보면 “내가 예루살렘에 이르러 거한 지 삼일에 내 하나님이 내 마음을 감화하사”라고 했습니다. 느헤미야가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에 돌아와 제일 먼저 다른 일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 앞에서 기도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3일간의 기도 중에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의 마음을 감화하셨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정착해야 할 힘겨운 장애물 앞에서 저가 기도부터 시작한 것을 말씀해 주는 것입니다.
4:1-4를 보면 “산발랏이 ... 비웃으며, 암몬 사람 도비야는 ... 곧 무너지리라 하더라/ 우리 하나님이 들으시옵소서”라고 했습니다. 성벽건축을 시작하려 하자 거센 방해가 시작됩니다. 느헤미야에게 감당키 어려운 장애물이 나타난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장애물이 나타나자 바로 하나님께 기도를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한 마디로 느헤미야의 장애물 넘는 힘은 바로 기도에서 왔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해보고 싶었지만 아직도 해 보지 못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서핑입니다. TV나 영화에서 여러 차례 그 멋진 모습을 보았습니다. 서핑 보드를 타고 밀려오는 파도를 멋지게 타고 나가는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수들은 더 큰 파도를 타고 싶어서 호주 해안을 찾아다닌다는 것입니다. 파도가 클수록 멋진 장면을 연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마치 이와 같습니다. 아무리 큰 장애물이 밀려와도 기도는 서핑보드처럼 우리를 타고 넘게 해 줍니다. 기도를 잘하는 사람들은 그 장애물을 넘어도 멋지게 넘습니다. 그러나 기도가 서툴러도 기도를 하기만 하면 그 장애물에 삼키우지는 않습니다. 서핑보드를 타지는 못해도 잡고만 있어도 파도를 넘을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파도가 밀려오는데 서핑보드가 없으면 정말 큰일입니다. 수영을 잘해도 파도가 밀려오면 헤어 나오기 쉽지 않습니다. 어렵사리 헤어 나온다고 해도 정말 죽을 고생을 하게 됩니다. 파도가 심하면 아무리 수영을 잘하는 사람이라 해도 빠져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렇습니다. 기도가 우리를 지켜줍니다. 기도가 우리의 갈 길을 안내해 줍니다. 기도가 우리를 다가오는 장애물을 넘게 해 줍니다. 본문의 느헤미야는 마치 서핑보드 프로선수와 같습니다. 멋진 모습으로 밀려오는 파도를 넘는 선수처럼 다가오는 인생의 장애물을 어쩌면 그렇게 멋지게 넘는지 정말 부럽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이라도 늦지 않습니다. 기도를 다시 시작하십시오. 기도를 더 열심히 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도 느헤미야처럼 우리 인생의 장애물을 멋지게 넘을 수 있을 것입니다.
힘을 모았습니다.
2:17-8을 보면 느헤미야가 유다 사람들, 제사장들, 귀인들, 방백들, 그리고 성벽을 짓는 일에 참여한 사람들 그들을 설득합니다. 그리고 모두 힘을 합해서 이 선한 일에 동참케 합니다. 3장을 보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이름과 그들이 한 일을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느헤미야를 도와서 성벽 재건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과 그들이 한 일의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헤미야의 호소를 받아들여 한 마음 한 뜻을 모아 밀려오는 거대한 장애물을 극복한 기록인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묵상하면서 느헤미야의 지도력의 탁월함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지도력이란 일반적으로 “추종자들에 대한 영향력”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도력이 탁월하다는 것은 사람들이 존경하고 말을 잘 듣고 따르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저는 이번에 중국선교여행을 하면서 또 한번 중국의 저력과 빠른 발전에 두려움마저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저 빠른 발전 뒤에는 중국 지도자들의 탁월한 지도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은 최근 후진타오라는 젊은 지도자가 장쩌민의 바통을 받았습니다. 세계가 이 사람의 지도력을 주목해 왔습니다. 놀랍게도 후진타오는 벌써 장쩌민보다 국민들로부터 신임을 받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중국은 대내적으로 국가 발전을 가로막는 대단한 장애물들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빈부격차입니다. 중국은 호리병과 같아서 국민의 5%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전체 국부의 50% 정도를 가지고 있어서 7000만 명 정도는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잘살지만 70%가 넘는 사람들은 절대 빈곤에 가까운 삶을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도자의 말을 믿고 참고 따라갑니다. 온 국민이 나라 발전에 힘을 모으고 있습니다. 점차 나아질 비전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한 마디로 지도력의 위기를 맞고 있는 것 같습니다. 국민들이 대통령을 마음으로부터 신뢰하지 않습니다. 지도자가 국민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와 코드가 맞는 사람들하고만 대화하려하고 자기와 코드가 맞지 않는 사람들은 적대시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대통령이 앞장서서 국민들의 힘을 갈라놓는 것처럼 비쳐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정책적 결정이 국회나 이익단체들로부터 비토를 당합니다. 국민들이 사사건건 반대하고 시위를 합니다. 뭐 하나 국책사업들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외국인들의 투자는 급격히 위축되고 있고 나라는 휘청거리고 있습니다.
두 종류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하나는 위기를 만났을 때 하나로 뭉치는 공동체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힘을 모아서 그 위기에 대처합니다. 다른 하나는 위기를 만났을 때 흩어지는 공동체입니다. 어려운 일을 만났을 때 서로 책임 공방을 벌입니다. 서로 다투고 싸웁니다. 자중지란이 일어나 작은 위기도 큰 위기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장애물이 다가올 때 힘을 모을 수 있어야 합니다. 성냥 한 개비는 힘없이 부러집니다. 그러나 성냥 열 개비가 모여지면 쉽게 부러지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혼자는 장애물 앞에 너무도 연약합니다. 그러나 여러 사람이 힘을 합하면 강해집니다. 가족들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온 교인들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국민이 힘을 모아야 합니다.
담대히 전진해야 합니다.
본문 19-20을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이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이 이 말을 듣고 우리를 업신여기고 비웃어 가로되 너희의 하는 일이 무엇이냐 왕을 배반코자 하느냐 하기로 내가 대답하여 가로되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 그의 종 우리가 일어나 건축하려니와 오직 너희는 예루살렘에서 아무 기업도 없고 권리도 없고 명록도 없다 하였느니라.” 대적들이 비웃고 협박할 때 느헤미야는 위축되지 않고 담대하게 맞섰고, 힘차게 전진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사실 하나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2:10을 보면 “호론 사람 산발랏과 종 되었던 암몬 사람 도비야가 이스라엘 자손을 흥왕케 하려는 사람이 왔다 함을 듣고 심히 근심하더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왔다는 소식을 들은 대적들이 두려워했고 크게 걱정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왜 느헤미야를 두려워했을까요? 20절에 보면 “하늘의 하나님이 우리로 형통케 하시리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와 함께 하셔서 형통케 하실 것을 대적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탐험대가 정글을 탐험해 들어갈 때 가끔 맹수들과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그 때 맹수들이 포효를 하며 위협합니다. 호랑이나 사자나 심지어 코브라와 같은 독사들이 이빨을 드러내 놓고 살기어린 소리를 지르며 위협합니다. 그런데 맹수들은 먹이 앞에서는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조용히 기다리다 사냥합니다. 맹수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자기들이 사람들이 무섭고 두렵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나아가는 곳에 사탄이 두려워 떱니다. 대적들이 겉으로는 위협하고 덤벼들지만 저들이 속으로는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 8:28을 보면 예수님께서 갈릴리 건너편 가다라 지방에 가셨을 때 갑자기 귀신들린 자 둘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서 소리를 질러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여 우리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때가 이르기 전에 우리를 괴롭게 하려고 여기 오셨나이까” 주님께서 가다라 땅에 가시자 귀신들이 먼저 두려워 떨고 있는 장면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곳에 사탄이 두려워 떱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대적이 우리를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줄리어스 씨이저가 지중해 바다를 건너고 있었습니다. 마침 큰 풍랑이 일어 배가 가라앉을 위기를 맞았습니다. 노를 젓던 사공들이 두려워서 벌벌 떨고 있었습니다. 이 때 씨이저가 사공들에게 이렇게 말했답니다. “왜 두려워하느냐 나 씨이저가 타고 있는 한 이 배는 결코 파선되지 않을 것이다.”
씨이저의 위대한 점은 어떤 난관 앞에서도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담대하게 앞으로 나아갔다는 점입니다. 연약한 인간 씨이저도 저렇게 담대하게 나아갔는데 주님과 함께 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담대하게 나아가야 합니다.
민 13-14장을 보면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보고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잘 아시는 대로 10명의 정탐꾼은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그렇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에 그 어떤 장애물도 겁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 앞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너무도 크고 강해서 우리 힘으로 도저히 넘을 수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장애물이 크고 강해도 주님께서 넘지 못할 장애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태산이 높다 하되 하늘 아래 뫼일 뿐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한 두려워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두려워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도와주실 것입니다. 아니 벌써 돕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끝내 그 장애물을 넘게 될 것입니다. 두려워 말고 겁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인생을 사는 동안 수많은 장애물들을 넘어 왔고 넘고 있고 또 넘게 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장애물은 우리가 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넘게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은 장애물이 내 앞에 다가올 때 우리가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담대하게 맞설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 떨거나 자기 힘으로 넘으려 할 때 하나님을 실망시켜드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장애물 앞에 서 있는 우리를 주목하고 계십니다. 기도하며 힘을 모아 담대하게 맞서야하겠습니다.
# 기도/ 인생의 장애물을 잘 극복하게 하옵소서.
기도하게 하시고, 힘을 모으게 하시고,
/박봉수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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