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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느2: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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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형준 목사 |
참고 : |
비전을 품은 자의 자세
본문: 느헤미야 2:1-6
꽤 오래된 일이지만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통계자료가 있습니다. 1962년 빅터(Victor)와 밀드리드 괴르첼(Mildred Goertzel) 두 사람이 성공한 사람 413명을 선정해서 행적과 전기, 업적들을 수년간 연구했습니다. 연구 결과 매우 흥미롭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연구 대상 중 392명이 어렵고 힘든 역경을 극복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절망적이고 심각한 문제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위대한 생애를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빅터와 밀드리드 괴르첼은 연구 보고서에 결론으로 ‘고난은 장애물이 아니라 기회였다.’라고 적었습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네 가지로 반응한다 했습니다.
첫째 과거로 돌아간다.
둘째 미래에 대한 공상에 빠진다.
셋째 몸을 움츠리고 누군가 도와주기를 기다린다.
넷째 위기에 맞서 위기를 유용한 것으로 바꾼다.
이 땅을 살면서 가만히 보면 불행한 일이 사람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불행에 대처하는 삶의 자세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과 환경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잘못된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좋은 조건이 불행의 조건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절실했습니다. 절망적인 조국의 소식을 접한 느헤미야는 당장 도울 수 없다는 좌절감을 느끼는데서 끝나지 않고, 그것을 통해 민족과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위대한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느헤미야의 리더십, 느헤미야의 지도력을 살피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한국 사회는 절망적인 소식들로 가득합니다. 한 일간지 주관으로 한국 사회가 더 살기 좋아질 것이냐는 질문으로 조사했는데 77%는 나빠졌다고 대답했고, 올해도 비관적이라는 응답자가 72% 나왔다고 합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인구 십만 명당 27.4명이 자살하여, 헝가리와 함께 세계 1위의 자살 국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젊은 여성 5명 중 1명 꼴로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직종을 가지고 있다는 통계, 무려 5조에 가까운 돈을 도 박이나 유흥비로 날려버렸다는 보고, 공식 통계만 중고등학생 2만 명이 술집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있다는 사실, 한국사람 45%가 건강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데도 불구하고 화가 나면 20%가 술로 푼다고 답했습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고령화 진행이 가장 빠른 나라라는 통계가 있으며, 대립과 반목, 배신과 힘의 횡포가 여기저기 난무하고 있습니다. 통계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절망적인가는 생활 속에서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 열심히 일해야 할 텐데 일 할 곳이 없습니다. 논 팔고 소 팔아 어렵게 공부 시켰던 부모들은 대학까지 시켜주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대와는 달리 아직도 도움을 줘야 하는 현실에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 사회 어디든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가 팽배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기주의의 극단적인 모습이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혼자는 안 되니 같은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끼리 연합해서 극단적인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고 나누어 갖는 형태들을 보게 됩니다. 정의나 가치, 논리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위기의식과 불안이 가득한, 그만큼 살기 어렵고 희망 없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구나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여러분들도 절망적인 소식을 많이 듣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포기할 수 있습니까? 포기할 수 없습니다. 포기해야 할 상당부분은 우리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지나갔다 할지라도 아직 남아있는 미래, 펼쳐질 꿈마저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의 진짜 목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미래를 포기하지 않고 절망의 환경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환경으로 바꾸어가야 될 사람들의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겠습니까? 느헤미야의 모습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미래를 꿈꾸며 포기할 수 없는 한반도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느헤미야가 살았던 삶, 역사를 바꿨던 삶의 원리와 자세는 무엇일까요?
첫째, 느헤미야는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 기도하고 기다렸습니다. 기도하고 절망하지 않으며 기다렸습니다. 느헤미야가 자기 민족이 고난당하고 성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기도였습니다. 기도를 시작한 이유 중의 하나는 자기 힘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한계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만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문제 앞에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느헤미야처럼 기도하고 절망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 주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바로 고난을 당하는, 고난을 극복하는 지혜의 첫째 원리입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지속적인 기도였습니다. 기도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다가도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나타나면 기도를 중단해버립니다. 느헤미야가 맡았던 일은 왕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음모도 많았을 것입니다. 바벨론 노예 3세로 술 맡은 관원의 위치에 오를 때까지 그 동안 다양한 상황 속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시시각각으로 중요한 일이 바뀌었지만 많은 문제 가운데서도 민족을 향한 기도, 즉 예루살렘 성을 다시 건축할 수 있도록 구하는 기도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이 시작하는 2장 1절을 보면 ‘니산 월’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20년 니산 월, 니산 월은 4월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서가 시작되는 1장 1절에는 아닥사스다 왕 20년 기슬르 월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12월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느헤미야는 소식을 듣고 나서 무려 4개월 이상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기도하기를 중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지속할 수 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 당면한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우리 아픔에 동참하시는 긍휼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만이 기도를 지속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사도행전에 초대교회 야고보 선지자가 잡히는 사건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야고보가 석방되기를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 야고보를 살려주십시오!” 그러나 야고보는 그냥 순교 당하고 맙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또다시 베드로가 투옥 당합니다. 바로 내일이 사형일인데 오늘까지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기도에 응답이 없으면 곧 좌절하고 중단하게 됩니다. 여러분 중에도 기도하다가 더 급한 일이 생겨 기도하지 않고 있거나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없어서 좌절한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중단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으며 베드로가 석방되어 오기까지 지속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기를 요청합니다.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기도해야 합니까? 응답될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또 기도의 부담감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올 때까지입니다. 현실은 달라지는 것이 없다 해도 괜찮습니다. 평안은 기도응답으로 나타나는 첫째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의 기도 특징은 기도 할 기회를 만들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할 시간이 있어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기도시간에도 눈 뜨고 딴 짓합니다. 식사 기도도 할 줄 모르고 그냥 먹습니다. 기회가 있는데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기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회를 만들어 기도합니다. 임금이 느헤미야의 수심 가득한 얼굴을 보고 묻습니다. ‘왜 수심이 있느냐?’ ‘내 열조의 묘지가 있는 곳이 훼파되었습니다.’ ‘그럼 내가 무엇을 해 주기 원하느냐?’ 그 때에 느헤미야는 잠시 하나님께 묵도했습니다. 짧은 시간동안 기도할 때 이 상황에 개입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다시금 위탁하고 의뢰하는 모습입니다. 이는 기도에 대한 분명한 믿음과 습관이 전제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닙니다.
느헤미야의 이 같은 모습은 열왕기상 12장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솔로몬이 죽고 난 다음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여로보암과 모든 백성이 나와 왕에게 선대왕은 부역과 세금을 너무 과중하게 매겼기에 좀 줄여달라고 요청합니다. 르호보암이 3일간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3일 간 르호보암은 하나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채워주는 젊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백성들을 더 강하게 압박했습니다. 그 결과 열두 지파 중 열 지파가 배반을 하고 남과 북으로 갈려지는 비극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을 쪼개서 기도할 기회로 삼고 하나님 음성과 인도하심을 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기도하는 시간마저도 자기 정욕과 환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몰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기도 특징은 기도를 해 놓고 조급해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해 놓고 얼마나 조급해 합니까? 특히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심한지 모릅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닫힘’ 버튼을 안 누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닫힐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급한 성격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인내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기다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인내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지금 당장 주십시오!’ 내 기도 모습은 아닙니까?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님 재산이 많은 사람은 아버지께서 언제 재산을 물려주시는가에 온통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관심은 무엇이겠습니까? 유산을 물려주기는 주는데 유산을 잘 간직하고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능력을 아들이 갖출 때 물려주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을 회사의 말단 직원부터 시작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만이 하나님의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야 문제를 푸는 데만 관심이 있지만, 기도 응답이 지연될 때에 믿음을 알아보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또 기도 응답의 지연을 통해 주님 닮은 인격의 사람으로 성숙시키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지금 기도 응답이 없다해서 낙심하거나 주저앉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만들어 가는 기회로 알고 더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고자 애쓰는 사람, 그 사람이 기도하고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기다렸는데도 배우자가 나타나지 않아요.’ 왜 아직 나타나지 않나 낙심만 하고 있을 것입니까? 내 목적이 이성을 만나 결혼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목적은 좀 다릅니다. 인격의 폭과 넓이가 있어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가정을 이끌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미리 바라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금 시대가 매우 어렵습니다. 시대뿐만이 아니라 시대를 살아가는 각 개인이 어려움에 봉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우리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절망하지 않고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고난을 이기는 지혜자입니다.
둘째, 느헤미야는 고난을 이기는 절망의 시간에 기도하면서 계획을 세웠습니다. 기도하면서 내일을 잉태하되 하나님께서 일을 허락하실 때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것인가 준비했던 것입니다. 6절 말씀, 수심이 가득한 느헤미야에게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필요한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이에 대해 ‘내가 기한을 정하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건축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느헤미야는 예측 시간을 정확히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7절과 8절 말씀, 성을 건축하러 갈 때까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성을 쌓을 때 필요한 자재와 조달 계획 까지 다 세워놓고 왕에게 조목조목 요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도만하고 가만히 앉아있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그 날, 존귀하게 쓰임 받고자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기도에 관한 태도는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기도하면 된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데 계획세울 필요가 뭐 있는가? 인간의 계획은 허망한 것, 성령의 절대적인 인도하심만 받으면 되는 거야! 기도하자.’ 상당히 믿음이 좋은 사람 같은데 사실은 신비주의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도하는 정신으로 계획을 짜자. 기도하는 정신으로 사건을 분석하고 예산을 짜고 각계 각 층의 정보를 모으자. 기도도 좋지만 기도 정신을 기초로 그냥 계획을 잡아보자.’ 하는 사람은 이성주의와 합리주의에 근거를 둔 사람입니다. 쉽게 말하면 불신앙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어떤 좋은 계획이나 일정을 세우는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소망을 가지고 계획을 짜는 사람들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비가 오도록 밤새 철야기도를 했다고 합시다. 기도 응답이 떨어져서 정말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우산을 준비한 사람은 어린 아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산을 가져온 아이는 어른들에게 이런 말을 던지고 갑니다. ‘비 오라고 기도한다고 모였잖아요. 그렇다면 우산을 가지고 모여야죠.’ 기도는 하지만 사실은 믿지 못하기 때문에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그 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모습을 생각하며 현재 자기를 가꾸고 다듬고 준비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스트라이크를 던지실 때 홈런을 칠 수 있습니다. 스트라이크를 던졌더니 삼진 아웃을 당해서 ‘이런 일이 올 줄 미처 몰랐지.’ 놓치지 말고 준비하셔야 합니다. 시험 떨어졌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더 많이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형제가, 자매가 떠나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왜입니까? 더 좋은 형제와 더 나은 자매가 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준비하는 기회로 삼고 새 출발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을 만나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준비하는 모습이 기도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쥐를 가지고 실험했습니다. 대야에 물을 떠놓고 캄캄하게 만들어서 쥐를 넣었더니 3분 만에 쥐가 물에 빠져 죽더랍니다. 그런데 똑같은 환경에 가는 빛줄기를 비춰주었더니 36시간을 생존하더랍니다. 무려 700배를 버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빛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최대 40일 간 음식 없이 살 수 있다고 합니다. 4일간 물 없이 버틸 수 있다고 합니다. 4분간 공기 없이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희망 없이는 단 4초도 살 수 없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희망을 가지고 계획을 짜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절망하고 좌절하여 가만히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기도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줄 믿고 계획을 세우고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북 노회에 속해있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일을 이뤄주시면 이북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지금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하나님, 통일을 줘 보십시오. 그러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십니까? 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돈의 문제는 아니라고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합니다. 통일에 대한 실제적인 준비가 없다고 합니다. 마음으로 기도로 준비한다고요? 기도 한 다음에, 그 다음에 뭐 하실 겁니까? 통일을 위한 준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입니까?
느헤미야에게 왕이 ‘네가 얼마의 기간이 필요하냐?’라고 물었을 때 ‘글쎄요. 제가 가 봐야 알겠는데요.’ 라고 대답했다면 왕은 느헤미야의 준비가 덜되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즉시 왕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왕이 해야 할 것과 하나님이 해야 할 것, 하나님을 통해서 사람들이 해야 할 것 그리고 자신이 헌신할 부분을 구분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쓰실 때를 위해 지금 무엇을 준비하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기도만 계속하고 있습니까? 어떤 직장에 들어가 쓰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면, 이루어주실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로 준비 하면서 소망을 가지고 오늘 나를 가꾸는 사람이 자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은 꿈이 있지 않습니까? 그 꿈을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때를 생각하며 어떻게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 오늘을 준비해야 합니다.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어학도 준비하십시오. 돈도 있어야 합니다. 물질을 저축할 수 있는 훈련을 하십시오. 자기 시간관리도 하십시오. 몸 관리도 하십시오. 인격 관리 성품의 관리도 하십시오. 하나님이 쓰실 때 아름답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준비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삶의 특징입니다.
셋째, 느헤미야는 절망과 어둠의 시간을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느헤미야는 기도하면서 하나님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의 구체적인 기도제목이 1장 11절에 나옵니다.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이란 아닥사스다 왕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 자신의 간구와 부르짖음을 듣고 허용할 수 있도록 왕의 마음을 감동시켜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연회가 벌어졌습니다. 왕비도 함께 했는데 이는 페르시아에서 이례적인 일입니다. 큰 잔치였거나 왕의 개인적인 가족 모임이었을 것이고 왕이 굉장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왕이 느헤미야의 수심에 찬 얼굴을 발견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느헤미야야 네가 왜 수심이 있느냐? 이 즐거운 날 무슨 걱정이 있느냐?’ 느헤미야는 두려웠습니다. 왜냐면 페르시아에는 임금을 섬기는 사람이 얼굴을 붉히거나 수심에 찬 얼굴을 보이면 심하게는 사형까지 시켰습니다.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두려움 가운데서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도 기회인줄 알지 못하고 놓칩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 주신 기회인줄 알고 했던 일들을 보십시오. 느헤미야는 무엇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아뢰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제목들을 보면, 굉장히 막연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형제를 주시옵소서. 제가 사랑할 만한 형제를 주시옵소서.’ ‘하나님, 자매를 주시옵소서. 마음이 끌리고 내 마음을 온통 뺏어갈 자매를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그런 자매를 어떻게 구해다 준단 말입니까? 막연하게 기도하면 막연하게 응답이 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기회를 포착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소경 바디매오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여리고 성을 지나가는 그 순간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칩니다. 주위에서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랄 때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더 크게 불러서 ‘나를 구원하소서!’ 외쳤던 바디매오는 예수님 앞에 나아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내가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께서 물으셨을 때에 거지 소경 바디매오는 자기가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하게 구했습니다. 현실적으로 돈을 구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눈이 뜨기를 원합니다.’ 라고 구했고 원대로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자기 마음의 소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가 접근했던 방법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을 건축해야 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은 이미 십년 전에 아닥사스다 왕에 의해 반란의 여지가 있다고 해서 건축이 중단되었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접근했습니까? ‘왕이시여, 내 조상이 있는 열조의 무덤이 훼파되었나이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조상의 무덤을 귀히 여겼습니다.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왕의 동정과 왕의 관심을 사면서 신중하게 접근했던 것입니다.
어떤 일을 진행할 때 특히 청년들이나 교인들 가운데 정당하고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조건 밀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의 일이라고 해서 바른 일이라고 해서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방법이 얼마나 무지막지한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조용하고도 지혜롭게 접근했던 느헤미야는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이 만일 즐거워하시거든, 만일 제가 왕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신다면, 나로 하여금 일을 행하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겸손함과 예의가 느헤미야에게는 있었습니다. 디오게네스라는 희랍 철학자가 왕과 친구를 다룰 때에는 마치 불을 다루듯이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불은 너무 가까이 가면 타버릴 위험이 있고 너무 멀리 있으면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적당한 거리의 필요성에 대해, 즉 사람과 사람 관계 속에서 어떤 일을 해 나갈 때에 예의를 가지고 접근하며 겸손하게 나아갈 필요성을 말했습니다.
또 느헤미야가 평소에 기회를 잡을 준비가 된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왕이 언제 가느냐고 묻지 않고 언제 돌아올 수 있는지를 물었던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즐겁게 환송해 주면 그 땐 통곡하셔야 합니다. 꼭 돌아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느헤미야는 평소에 자기 삶 속에서 신뢰와 정성으로 왕을 섬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를 필요로 하도록 평소에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포착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은 기회를 주십니다. 기도할 기회를 주시고 친구를 살릴 기회를 주시고, 부서를 살릴 기회를 주시고, 민족을 살릴 기회를 주시는데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놓쳐버리고 맙니다. 가족을 구원할 기회, 친구를 인도할 기회, 복음을 듣게 할 기회를 주님께서 주셨어도 영적으로 어둡고 무감각하면 깨닫지 못합니다. 느헤미야가 만약 기회를 놓쳤다면 새 역사를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이루실 때를 민감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기회를 포착하긴 하는데 하나님 뜻을 나타내는 데 쓰지 않고 자기 뜻과 욕망, 영광을 드러내는 데 쓰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나님 뜻을 드러내도록 주신 기회를 자기 뜻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는 잘못으로 인해 오히려 공동체와 하나님을 어렵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하는 제일 우선순위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감당케 해 달라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지난 구정 때,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상을 당해서 합천 해인사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경남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알지만, 절 주위에는 절대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집사님은 해인사 근처에서 예수를 믿으셨으니 제가 신기해서 물었습니다. ‘집사님, 어떻게 해서 교회 나가게 되셨습니까?’ 집사님이 6살 때 어머니가 마루에 앉아서 흥얼흥얼 부르시던 노래가 찬송가였다는 것입니다. 집사님은 경찰이셨는데 군부정치가 들어오면서 경찰에서 해직되었습니다. 먹고 살 길이 막연하지 않습니까? 해직 당하면 다른 기회와 길도 다 막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시고 우리를 먹이시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지 않겠다고 하시면 먹지 않겠습니다. 식구 네 식구인데 하나씩, 하나씩 굶어죽겠습니다.’ 3년 간 그렇게 기도했답니다. 집사님 형이 수 백 억대의 부자인데도 형제 도움 하나 받지 않았답니다. ‘하나님 앞에 승부를 걸리라!’ 하나님께서 먹여주시지 않으면 굶고 먹여주시면 먹고 3년 간을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는데 기적적으로 복직이 되셨습니다. 지금은 은퇴 하셨는데 ‘목사님, 제가 연금을 받는다니요,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려운 상황 놓고 기도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제 미래까지도 보장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다면 기회입니다. 우리 믿음을 알아보시고 인격의 성장이 이루어지는 기회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셨고, 자기 자녀까지 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워 어려움을 주시겠습니까? 다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낙심하기 위해서 우리 기도가 지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그 날을 바라보며 자신을 준비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참 귀합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는 사람은 쓸모없습니다. 준비하시고 기도하면서 기다리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우실 때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형준 목사
본문: 느헤미야 2:1-6
꽤 오래된 일이지만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던 통계자료가 있습니다. 1962년 빅터(Victor)와 밀드리드 괴르첼(Mildred Goertzel) 두 사람이 성공한 사람 413명을 선정해서 행적과 전기, 업적들을 수년간 연구했습니다. 연구 결과 매우 흥미롭고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연구 대상 중 392명이 어렵고 힘든 역경을 극복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절망적이고 심각한 문제를 극복하는 과정을 통해서 위대한 생애를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빅터와 밀드리드 괴르첼은 연구 보고서에 결론으로 ‘고난은 장애물이 아니라 기회였다.’라고 적었습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사람이 고난을 당하면 네 가지로 반응한다 했습니다.
첫째 과거로 돌아간다.
둘째 미래에 대한 공상에 빠진다.
셋째 몸을 움츠리고 누군가 도와주기를 기다린다.
넷째 위기에 맞서 위기를 유용한 것으로 바꾼다.
이 땅을 살면서 가만히 보면 불행한 일이 사람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이 아니라 불행에 대처하는 삶의 자세가 어떠하냐에 달려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조건과 환경에서 출발했다 하더라도 잘못된 자세와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좋은 조건이 불행의 조건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삶의 자세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조국과 민족을 생각하는 마음이 절실했습니다. 절망적인 조국의 소식을 접한 느헤미야는 당장 도울 수 없다는 좌절감을 느끼는데서 끝나지 않고, 그것을 통해 민족과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위대한 사람으로 서게 됩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느헤미야의 리더십, 느헤미야의 지도력을 살피고 있는 중입니다. 오늘 한국 사회는 절망적인 소식들로 가득합니다. 한 일간지 주관으로 한국 사회가 더 살기 좋아질 것이냐는 질문으로 조사했는데 77%는 나빠졌다고 대답했고, 올해도 비관적이라는 응답자가 72% 나왔다고 합니다. 경찰청 통계에 따르면 인구 십만 명당 27.4명이 자살하여, 헝가리와 함께 세계 1위의 자살 국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젊은 여성 5명 중 1명 꼴로 유흥업소에 종사하는 직종을 가지고 있다는 통계, 무려 5조에 가까운 돈을 도 박이나 유흥비로 날려버렸다는 보고, 공식 통계만 중고등학생 2만 명이 술집에서 아르바이트 하고 있다는 사실, 한국사람 45%가 건강을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데도 불구하고 화가 나면 20%가 술로 푼다고 답했습니다. 한국은 세계에서 고령화 진행이 가장 빠른 나라라는 통계가 있으며, 대립과 반목, 배신과 힘의 횡포가 여기저기 난무하고 있습니다. 통계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절망적인가는 생활 속에서 쉽게 느낄 수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 열심히 일해야 할 텐데 일 할 곳이 없습니다. 논 팔고 소 팔아 어렵게 공부 시켰던 부모들은 대학까지 시켜주면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기대와는 달리 아직도 도움을 줘야 하는 현실에 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더욱 심각한 것은 우리 사회 어디든 이기주의와 자기중심주의가 팽배하다는 사실입니다. 이기주의의 극단적인 모습이 집단 이기주의입니다. 혼자는 안 되니 같은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끼리 연합해서 극단적인 방법으로 이익을 취하고 나누어 갖는 형태들을 보게 됩니다. 정의나 가치, 논리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스스로 자기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위기의식과 불안이 가득한, 그만큼 살기 어렵고 희망 없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구나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여러분들도 절망적인 소식을 많이 듣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포기할 수 있습니까? 포기할 수 없습니다. 포기해야 할 상당부분은 우리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과거는 지나갔다 할지라도 아직 남아있는 미래, 펼쳐질 꿈마저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녀로서 삶의 진짜 목표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미래를 포기하지 않고 절망의 환경을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아름다운 환경으로 바꾸어가야 될 사람들의 삶의 자세는 어떠해야겠습니까? 느헤미야의 모습을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미래를 꿈꾸며 포기할 수 없는 한반도의 상황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느헤미야가 살았던 삶, 역사를 바꿨던 삶의 원리와 자세는 무엇일까요?
첫째, 느헤미야는 절망적인 소식을 들었을 때 기도하고 기다렸습니다. 기도하고 절망하지 않으며 기다렸습니다. 느헤미야가 자기 민족이 고난당하고 성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먼저 한 일은 기도였습니다. 기도를 시작한 이유 중의 하나는 자기 힘으로 극복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한계를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만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어느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문제 앞에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느헤미야처럼 기도하고 절망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 주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바로 고난을 당하는, 고난을 극복하는 지혜의 첫째 원리입니다.
느헤미야의 기도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지속적인 기도였습니다. 기도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하다가도 더 중요하고 급한 일이 나타나면 기도를 중단해버립니다. 느헤미야가 맡았던 일은 왕을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정치적인 음모도 많았을 것입니다. 바벨론 노예 3세로 술 맡은 관원의 위치에 오를 때까지 그 동안 다양한 상황 속에서 능동적으로 대처해야 할 일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시시각각으로 중요한 일이 바뀌었지만 많은 문제 가운데서도 민족을 향한 기도, 즉 예루살렘 성을 다시 건축할 수 있도록 구하는 기도를 중단하지 않았습니다. 본문이 시작하는 2장 1절을 보면 ‘니산 월’이라고 되어있습니다. 아닥사스다 왕 20년 니산 월, 니산 월은 4월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런데 느헤미야서가 시작되는 1장 1절에는 아닥사스다 왕 20년 기슬르 월이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12월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느헤미야는 소식을 듣고 나서 무려 4개월 이상 하나님 앞에 엎드리며 기도하기를 중단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도를 지속할 수 있다고 했습니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사람, 당면한 문제보다 더 크신 하나님,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 우리 아픔에 동참하시는 긍휼의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만이 기도를 지속할 수 있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사도행전에 초대교회 야고보 선지자가 잡히는 사건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야고보가 석방되기를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 야고보를 살려주십시오!” 그러나 야고보는 그냥 순교 당하고 맙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또다시 베드로가 투옥 당합니다. 바로 내일이 사형일인데 오늘까지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기도에 응답이 없으면 곧 좌절하고 중단하게 됩니다. 여러분 중에도 기도하다가 더 급한 일이 생겨 기도하지 않고 있거나 기도했는데도 응답이 없어서 좌절한 사람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중단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으며 베드로가 석방되어 오기까지 지속적으로 기도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기를 요청합니다. 선을 행하다 낙심하지 말기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제까지 기도해야 합니까? 응답될 때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또 기도의 부담감이 사라지고 마음에 평안이 올 때까지입니다. 현실은 달라지는 것이 없다 해도 괜찮습니다. 평안은 기도응답으로 나타나는 첫째 현상이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의 기도 특징은 기도 할 기회를 만들어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기도할 시간이 있어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기도시간에도 눈 뜨고 딴 짓합니다. 식사 기도도 할 줄 모르고 그냥 먹습니다. 기회가 있는데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기도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회를 만들어 기도합니다. 임금이 느헤미야의 수심 가득한 얼굴을 보고 묻습니다. ‘왜 수심이 있느냐?’ ‘내 열조의 묘지가 있는 곳이 훼파되었습니다.’ ‘그럼 내가 무엇을 해 주기 원하느냐?’ 그 때에 느헤미야는 잠시 하나님께 묵도했습니다. 짧은 시간동안 기도할 때 이 상황에 개입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다시금 위탁하고 의뢰하는 모습입니다. 이는 기도에 대한 분명한 믿음과 습관이 전제될 때에 나타날 수 있는 현상입니다. 어느 날 갑자기 되는 것이 아닙니다.
느헤미야의 이 같은 모습은 열왕기상 12장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과는 너무나도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솔로몬이 죽고 난 다음 아들 르호보암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여로보암과 모든 백성이 나와 왕에게 선대왕은 부역과 세금을 너무 과중하게 매겼기에 좀 줄여달라고 요청합니다. 르호보암이 3일간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3일 간 르호보암은 하나님 음성을 듣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을 채워주는 젊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 백성들을 더 강하게 압박했습니다. 그 결과 열두 지파 중 열 지파가 배반을 하고 남과 북으로 갈려지는 비극이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시간을 쪼개서 기도할 기회로 삼고 하나님 음성과 인도하심을 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기도하는 시간마저도 자기 정욕과 환경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몰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느헤미야의 기도 특징은 기도를 해 놓고 조급해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왜입니까?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도해 놓고 얼마나 조급해 합니까? 특히 한국 사람들은 얼마나 심한지 모릅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닫힘’ 버튼을 안 누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닫힐 때까지 기다리는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기다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급한 성격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게 인내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기다릴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하나님, 인내하는 마음을 주십시오. 지금 당장 주십시오!’ 내 기도 모습은 아닙니까?
기도하다가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모님 재산이 많은 사람은 아버지께서 언제 재산을 물려주시는가에 온통 신경을 씁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관심은 무엇이겠습니까? 유산을 물려주기는 주는데 유산을 잘 간직하고 유용하게 쓸 수 있는 능력을 아들이 갖출 때 물려주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들을 회사의 말단 직원부터 시작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만이 하나님의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야 문제를 푸는 데만 관심이 있지만, 기도 응답이 지연될 때에 믿음을 알아보기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따로 있습니다. 또 기도 응답의 지연을 통해 주님 닮은 인격의 사람으로 성숙시키는데 관심이 있습니다. 지금 기도 응답이 없다해서 낙심하거나 주저앉지 말고 하나님께서 나를 만들어 가는 기회로 알고 더 간절히 매달리십시오. 그렇게 하나님 앞에 서고자 애쓰는 사람, 그 사람이 기도하고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목사님, 저는 지금까지 기다렸는데도 배우자가 나타나지 않아요.’ 왜 아직 나타나지 않나 낙심만 하고 있을 것입니까? 내 목적이 이성을 만나 결혼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의 목적은 좀 다릅니다. 인격의 폭과 넓이가 있어 아름다운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할 수 있는 사람, 하나님의 사람으로 가정을 이끌어갈 수 있는 사람이 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미리 바라보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지금 시대가 매우 어렵습니다. 시대뿐만이 아니라 시대를 살아가는 각 개인이 어려움에 봉착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습니다. 왜입니까? 우리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살아야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기를 기도하면서 절망하지 않고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이런 사람이 고난을 이기는 지혜자입니다.
둘째, 느헤미야는 고난을 이기는 절망의 시간에 기도하면서 계획을 세웠습니다. 기도하면서 내일을 잉태하되 하나님께서 일을 허락하실 때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설 것인가 준비했던 것입니다. 6절 말씀, 수심이 가득한 느헤미야에게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일이 이루어지기까지 필요한 시간이 얼마나 되는지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이에 대해 ‘내가 기한을 정하고’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을 건축할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겠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느헤미야는 예측 시간을 정확히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계속해서 7절과 8절 말씀, 성을 건축하러 갈 때까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예상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대비해야 하는가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성을 쌓을 때 필요한 자재와 조달 계획 까지 다 세워놓고 왕에게 조목조목 요청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도만하고 가만히 앉아있었던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그 날, 존귀하게 쓰임 받고자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기도에 관한 태도는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기도하면 된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다 알아서 하시는데 계획세울 필요가 뭐 있는가? 인간의 계획은 허망한 것, 성령의 절대적인 인도하심만 받으면 되는 거야! 기도하자.’ 상당히 믿음이 좋은 사람 같은데 사실은 신비주의자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도하는 정신으로 계획을 짜자. 기도하는 정신으로 사건을 분석하고 예산을 짜고 각계 각 층의 정보를 모으자. 기도도 좋지만 기도 정신을 기초로 그냥 계획을 잡아보자.’ 하는 사람은 이성주의와 합리주의에 근거를 둔 사람입니다. 쉽게 말하면 불신앙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도는 어떤 좋은 계획이나 일정을 세우는 것과 비교할 수 없습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소망을 가지고 계획을 짜는 사람들이 진정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어느 교회에서 비가 오도록 밤새 철야기도를 했다고 합시다. 기도 응답이 떨어져서 정말 비가 오기 시작하는데 우산을 준비한 사람은 어린 아이 하나밖에 없습니다. 우산을 가져온 아이는 어른들에게 이런 말을 던지고 갑니다. ‘비 오라고 기도한다고 모였잖아요. 그렇다면 우산을 가지고 모여야죠.’ 기도는 하지만 사실은 믿지 못하기 때문에 계획을 세우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그 날 하나님 앞에 나아갈 모습을 생각하며 현재 자기를 가꾸고 다듬고 준비할 줄 아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스트라이크를 던지실 때 홈런을 칠 수 있습니다. 스트라이크를 던졌더니 삼진 아웃을 당해서 ‘이런 일이 올 줄 미처 몰랐지.’ 놓치지 말고 준비하셔야 합니다. 시험 떨어졌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더 많이 준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형제가, 자매가 떠나갔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왜입니까? 더 좋은 형제와 더 나은 자매가 될 수 있도록 자기 자신을 준비하는 기회로 삼고 새 출발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사람을 만나 아름다운 가정을 만들기 위해서 준비하는 모습이 기도하는 삶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이 쥐를 가지고 실험했습니다. 대야에 물을 떠놓고 캄캄하게 만들어서 쥐를 넣었더니 3분 만에 쥐가 물에 빠져 죽더랍니다. 그런데 똑같은 환경에 가는 빛줄기를 비춰주었더니 36시간을 생존하더랍니다. 무려 700배를 버텼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희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빛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최대 40일 간 음식 없이 살 수 있다고 합니다. 4일간 물 없이 버틸 수 있다고 합니다. 4분간 공기 없이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희망 없이는 단 4초도 살 수 없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희망을 가지고 계획을 짜는 사람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절망하고 좌절하여 가만히 있다면, 그 사람은 정말 기도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줄 믿고 계획을 세우고 주님께서 이루어 주실 소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북 노회에 속해있는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 통일을 이뤄주시면 이북으로 들어가 복음을 전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 지금 우리는 무엇을 준비해야 합니까? ‘하나님, 통일을 줘 보십시오. 그러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하십니까? 통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돈의 문제는 아니라고 많은 학자들이 이야기합니다. 통일에 대한 실제적인 준비가 없다고 합니다. 마음으로 기도로 준비한다고요? 기도 한 다음에, 그 다음에 뭐 하실 겁니까? 통일을 위한 준비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할 것입니까?
느헤미야에게 왕이 ‘네가 얼마의 기간이 필요하냐?’라고 물었을 때 ‘글쎄요. 제가 가 봐야 알겠는데요.’ 라고 대답했다면 왕은 느헤미야의 준비가 덜되었다고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정확하게 계산하고 있었기 때문에 즉시즉시 왕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왕이 해야 할 것과 하나님이 해야 할 것, 하나님을 통해서 사람들이 해야 할 것 그리고 자신이 헌신할 부분을 구분할 줄 알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젊은 시절,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쓰실 때를 위해 지금 무엇을 준비하느냐는 것입니다. 무엇을 준비하고 계십니까? 기도만 계속하고 있습니까? 어떤 직장에 들어가 쓰임 받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면, 이루어주실 주님을 믿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으로 준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기도로 준비 하면서 소망을 가지고 오늘 나를 가꾸는 사람이 자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 쓰임 받고 싶은 꿈이 있지 않습니까? 그 꿈을 위해 진정으로 기도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때를 생각하며 어떻게 하나님 앞에 어떤 모습으로 설 것인가 오늘을 준비해야 합니다. 실력이 있어야 합니다. 어학도 준비하십시오. 돈도 있어야 합니다. 물질을 저축할 수 있는 훈련을 하십시오. 자기 시간관리도 하십시오. 몸 관리도 하십시오. 인격 관리 성품의 관리도 하십시오. 하나님이 쓰실 때 아름답게 쓰임 받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준비하셔야 합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사람의 삶의 특징입니다.
셋째, 느헤미야는 절망과 어둠의 시간을 어떻게 극복했습니까? 느헤미야는 기도하면서 하나님 주신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느헤미야의 구체적인 기도제목이 1장 11절에 나옵니다. ‘이 사람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옵소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사람이란 아닥사스다 왕입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느헤미야 자신의 간구와 부르짖음을 듣고 허용할 수 있도록 왕의 마음을 감동시켜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연회가 벌어졌습니다. 왕비도 함께 했는데 이는 페르시아에서 이례적인 일입니다. 큰 잔치였거나 왕의 개인적인 가족 모임이었을 것이고 왕이 굉장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왕이 느헤미야의 수심에 찬 얼굴을 발견하도록 도우셨습니다. ‘느헤미야야 네가 왜 수심이 있느냐? 이 즐거운 날 무슨 걱정이 있느냐?’ 느헤미야는 두려웠습니다. 왜냐면 페르시아에는 임금을 섬기는 사람이 얼굴을 붉히거나 수심에 찬 얼굴을 보이면 심하게는 사형까지 시켰습니다. 왕의 심기를 불편하게 해서는 안 되었습니다. 느헤미야는 두려움 가운데서도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다.’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도 기회인줄 알지 못하고 놓칩니다. 느헤미야가 하나님 주신 기회인줄 알고 했던 일들을 보십시오. 느헤미야는 무엇 무엇이 필요한지를 정확하게 아뢰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제목들을 보면, 굉장히 막연해 보일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 형제를 주시옵소서. 제가 사랑할 만한 형제를 주시옵소서.’ ‘하나님, 자매를 주시옵소서. 마음이 끌리고 내 마음을 온통 뺏어갈 자매를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그런 자매를 어떻게 구해다 준단 말입니까? 막연하게 기도하면 막연하게 응답이 옵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기회를 포착하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시각장애인이었던 소경 바디매오 이야기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여리고 성을 지나가는 그 순간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외칩니다. 주위에서 시끄럽다고 조용히 하랄 때에 ‘다윗의 자손 예수여!’ 더 크게 불러서 ‘나를 구원하소서!’ 외쳤던 바디매오는 예수님 앞에 나아갈 기회를 얻었습니다. ‘내가 무엇 해주기를 원하느냐?’ 예수님께서 물으셨을 때에 거지 소경 바디매오는 자기가 무엇이 필요한지 정확하게 구했습니다. 현실적으로 돈을 구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눈이 뜨기를 원합니다.’ 라고 구했고 원대로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 평소에 자기 마음의 소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의 소원은 무엇입니까? 이것을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느헤미야가 접근했던 방법을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을 건축해야 합니다.’ 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예루살렘 성은 이미 십년 전에 아닥사스다 왕에 의해 반란의 여지가 있다고 해서 건축이 중단되었던 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접근했습니까? ‘왕이시여, 내 조상이 있는 열조의 무덤이 훼파되었나이다.’ 페르시아 사람들은 조상의 무덤을 귀히 여겼습니다. 왕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왕의 동정과 왕의 관심을 사면서 신중하게 접근했던 것입니다.
어떤 일을 진행할 때 특히 청년들이나 교인들 가운데 정당하고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무조건 밀고 나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의 일이라고 해서 바른 일이라고 해서 사람들에게 접근하는 방법이 얼마나 무지막지한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조용하고도 지혜롭게 접근했던 느헤미야는 자기에게 주어진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에는 ‘왕이여, 만세수를 하옵소서. 왕이 만일 즐거워하시거든, 만일 제가 왕에게 은혜를 입었다고 생각하신다면, 나로 하여금 일을 행하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겸손함과 예의가 느헤미야에게는 있었습니다. 디오게네스라는 희랍 철학자가 왕과 친구를 다룰 때에는 마치 불을 다루듯이 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불은 너무 가까이 가면 타버릴 위험이 있고 너무 멀리 있으면 혜택을 받지 못합니다. 적당한 거리의 필요성에 대해, 즉 사람과 사람 관계 속에서 어떤 일을 해 나갈 때에 예의를 가지고 접근하며 겸손하게 나아갈 필요성을 말했습니다.
또 느헤미야가 평소에 기회를 잡을 준비가 된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왕이 언제 가느냐고 묻지 않고 언제 돌아올 수 있는지를 물었던 것에서 알 수 있습니다. 즐겁게 환송해 주면 그 땐 통곡하셔야 합니다. 꼭 돌아와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도록 느헤미야는 평소에 자기 삶 속에서 신뢰와 정성으로 왕을 섬겼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를 필요로 하도록 평소에 성실하게 살아가는 모습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를 포착하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삶 가운데 하나님은 기회를 주십니다. 기도할 기회를 주시고 친구를 살릴 기회를 주시고, 부서를 살릴 기회를 주시고, 민족을 살릴 기회를 주시는데 영적으로 깨어있지 않으면 놓쳐버리고 맙니다. 가족을 구원할 기회, 친구를 인도할 기회, 복음을 듣게 할 기회를 주님께서 주셨어도 영적으로 어둡고 무감각하면 깨닫지 못합니다. 느헤미야가 만약 기회를 놓쳤다면 새 역사를 쓸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기도하며 기다리며 하나님께서 이루실 때를 민감하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기회를 포착하긴 하는데 하나님 뜻을 나타내는 데 쓰지 않고 자기 뜻과 욕망, 영광을 드러내는 데 쓰는 사람도 많습니다. 하나님 뜻을 드러내도록 주신 기회를 자기 뜻을 드러내는 기회로 삼는 잘못으로 인해 오히려 공동체와 하나님을 어렵게 만드는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기도하는 제일 우선순위는 하나님 앞에 합당한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입니다. 어떤 일을 감당케 해 달라는 것은 그 다음입니다.
지난 구정 때,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상을 당해서 합천 해인사를 다녀왔습니다. 제가 경남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알지만, 절 주위에는 절대 전도가 되지 않습니다. 집사님은 해인사 근처에서 예수를 믿으셨으니 제가 신기해서 물었습니다. ‘집사님, 어떻게 해서 교회 나가게 되셨습니까?’ 집사님이 6살 때 어머니가 마루에 앉아서 흥얼흥얼 부르시던 노래가 찬송가였다는 것입니다. 집사님은 경찰이셨는데 군부정치가 들어오면서 경찰에서 해직되었습니다. 먹고 살 길이 막연하지 않습니까? 해직 당하면 다른 기회와 길도 다 막히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이런 일이 제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시고 우리를 먹이시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먹이지 않겠다고 하시면 먹지 않겠습니다. 식구 네 식구인데 하나씩, 하나씩 굶어죽겠습니다.’ 3년 간 그렇게 기도했답니다. 집사님 형이 수 백 억대의 부자인데도 형제 도움 하나 받지 않았답니다. ‘하나님 앞에 승부를 걸리라!’ 하나님께서 먹여주시지 않으면 굶고 먹여주시면 먹고 3년 간을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는데 기적적으로 복직이 되셨습니다. 지금은 은퇴 하셨는데 ‘목사님, 제가 연금을 받는다니요,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어려운 상황 놓고 기도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는 제 미래까지도 보장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어렵고 힘든 일을 만났다면 기회입니다. 우리 믿음을 알아보시고 인격의 성장이 이루어지는 기회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셨고, 자기 자녀까지 주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아쉬워 어려움을 주시겠습니까? 다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낙심하기 위해서 우리 기도가 지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실 그 날을 바라보며 자신을 준비하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참 귀합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는 사람은 쓸모없습니다. 준비하시고 기도하면서 기다리십시오. 절망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세우실 때에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는 여러분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형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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