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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느3: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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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한태완 목사 |
참고 : |
무너진 교회를 재건하자
본문: 느헤미야 3장 1∼6절, 찬송: 어둔밤 쉬 되리니 찬송 330장 (통 370장)
옛날 백인들이 아프리카에 진출하여 흑인 노예 사냥을 할 때입니다. 배 밑창에 갇힌 흑인들의 비참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요일이 되면 백인들은 갑판 위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간간이 갑판 아래에서는 굶주림과 질병에 신음하는 흑인들의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그러면 위에서는 더 힘찬 찬송소리가 울려 퍼집니다.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이런 모습이 한 배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출석하는 교회는 사랑은 노래하나 정작 사랑은 없는 교회는 아닙니까?
오늘날 한국의 많은 교회가 사랑이 식었거나 교회가 죽었거나 병들어 있습니다. 대다수 한국교회의 지도자의 관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보다는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 건물, 많은 교인 수, 교회재정 규모 등 세속주의와 눈에 보이는 것들입니다. 특히 개교회 주의입니다. 그나마 우리나라에 다행인 것은 특수목회를 하는 교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다문화 가정을 돌보고, 탈북자(새터민), 미혼모, 재소자, 노숙자, 소년소녀 가장 돕기 등을 주요행사로 하는 교회 또는 어렵게 농어촌 교회를 하는 운영하는 목회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대형교회가 기업화되고 세속적인 가치관을 추구하고 담임목사를 교주화하고 교회를 자식에게 세습하는 모습 등입니다.
한국교회가 예배공동체를 강조합니다. 신앙공동체, 사랑의 공동체는 외면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십시오.
삯꾼은 목자가 아닙니다. 삯꾼은 양떼에 사랑과 관심이 없고, 돈과 세상적인 명예 등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삯꾼은 살진 양을 잡아 그 기름을 먹으며(겔34:3)- 부자 교인의 헌물로 배불리며, 잔치의 윗자리와 회당의 높은 자리에 않고 지도자라는 칭함을 받기를 좋아합니다.(마23: 6- 10) 삯꾼은 이단종파(이리)에 빠지는 양 떼를 목숨을 다해 구하고 돌보지 않고 도망하고 내버려 둡니다.(요10: 12)
예수님은 공생애 중 주로 세 가지 사역을 하셨는데, 1. 천국복음을 전파 하셨습니다. 2. 제자들을 가르치셨습니다. 3, 병을 고치고 치유하셨습니다.(마4:23- 25, 눅4:31- 44) 즉 제자 가르치는 일에만 치중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대형교회 담임목사들은 은혜로운 설교에만 치중하고 양떼를 돌보는 일은 등한히 합니다.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잠27:23)하였건 만 우선순위가 바뀐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하면 십자가에 달린 종탑이 있는 건물을 연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배드리는 장소인 예배당에 불과한 것이지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교회는 아닙니다. 헬라어로 ‘주님의 집’이라는 의미로는 ‘키리아콘 도마’ 또는 ‘키리아케 오이키아’라고 하는데 그것이 오늘날 우리들이 주로 쓰는 ‘교회’라는 의미와 같은 뜻입니다.
신약성경에서 ‘교회’라고 할 때는 그러한 단어를 쓰지 않고 ‘에클레시아’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그것은 건물을 가리키지 않고 그리스도인들의 지역적 모임을 가리켰습니다. 다시 말하면 초대교회에서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회’라는 단어를 읽거나 들을 때 ‘건물’이 떠오르지 않고 ‘회중’이 떠올랐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경의 여러 곳에서 이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저희와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고전1:2)
이 말씀에 의하면 교회란 ‘그리스도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라고 정의되어질 수 있습니다. 또 “아시아의 교회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아굴라와 브리스가와 및 그 집에 있는 교회가 주 안에서 너희에게 간절히 문안하고”(고전16:19),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골4:15), “빌레몬과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빌레몬1:2) 등의 말씀에 나오는 ‘그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지 생각해 보세요. 이 말씀들은 ‘교회’를 ‘건물’이 아닌 ‘회중’으로 인식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밖에도 성경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고전3:16-17),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고후6:16)하였습니다. 이 말씀들에서도 성전은 교회건물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유대인의 회당을 가리켜 ‘성전’이라고 표현된 곳도 있으나 그것은 오늘날 사이비종교 교단의 건축물도 ‘교회’라고 표현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교회목사들이 화려한 교회건축에 열을 올리고 교회건물을 우싱화시키고 있으나 하나님은 이같은 행위를 기뻐하지 않습니다.(사66:1, 마24:1-2, 행17:24, 행7:47-48, 막13:1-2)
말세를 만난 지금은 교회(회당)건물을 건축할 시기가 아닙니다. 곧 모든 것이 무너지고 없어질 것들입니다. 예수님은 교회건물을 지으라고 명령하신 적이 없으며, 초대교회 당시 교회건물을 지은 적이 없습니다.(고전16:19, 롬16:5, 몬2 등)
혹자는 교회건물 건축을 강조하기 위하여 솔로몬 왕의 성전건축과 베벨론으로 잡혀갔던 유다백성들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파괴된 성전을 재건축하였던 사실(에스라서, 학개서)을 들어 말하나, 성경에서의 건축은 반드시 건물건축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성경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마21:42, 막12:10, 눅20:17, 롬15:20, 고전3:10, 벧전2:7)
즉 구약에서의 우상(눈에 보이는 것)과 신약시대 이후의 우상(탐욕 등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의 의미가 다른 것처럼, 구약시대의 성전건축의 의미는 신약시대 이후로는 성도들의 회중인 교회재건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부패하고 세속화되고, 맛 잃은 소금이 되어 훼파되었습니다. 성전이 훼파된 소식을 들은 느헤미야는 앉아서 울고 슬퍼하며 하나님 앞에 금식하고 기도하였습니다.(느1:3-4)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과 농토를 재건하면서 성벽을 다시 쌓았습니다. 이 일을 지휘한 사람이 느헤미야입니다. 느헤미야는 바빌로니아의 술관원 즉 왕의 옆에서 왕을 가까이 모시며 일했던 사람입니다. 왕의 신임을 받고 평생을 호사하며 살 수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고 고향 땅 예루살렘을 다시 중건하는 이야기가 느헤미야서입니다. 느헤미야가 자기의 직위를 포기하고 적군이 늘 노리는 고향땅 예루살렘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가 훌륭한 것이 아닙니다. 느헤미야의 진짜 위대한 점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로 이끌어 하나님의 일에 동참케 한 것이 느헤미야의 훌륭한 점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느헤미야는 양문을 가장 먼저 건축합니다. 양문이란 말 그대로 양이 다니는 문입니다. 대문을 먼저 건축한 것도 아니고, 시급한 곳부터 시작한 것이 아닙니다. 양문은 제사지내는 양이 통과하는 문입니다. 즉 하나님께 드릴 예배를 제일 먼저 생각하고 건축을 시작하였다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가장 먼저 하나님과의 예배 회복을 중심에 놓았습니다. 중심이 어디에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예배를 다른 어떤 일보다 소중히 여기는 사람, 즉 중심이 예배에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21세기를 가리켜 갈브레이드는 ‘불확실성의 시대’라 표현하였고,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라고 말을 합니다. 말 그대로 중심이 없는 시대입니다. 내가 중심을 세우면 그것이 진리가 되는 시대입니다. 내가 옳으면 그것이 진리입니다. 가치를 따라 살기보다는 나에게 흥미가 있으면 선택하는 시대가 신세대식 사고방식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미래사회에서 신앙을 지켜나가고 훌륭한 신앙의 전통을 후손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중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 중심의 사고가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민족, 나의 가정, 나의 미래를 부흥시킬 수 있는 힘인 것입니다.
3장에 보면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이 나오는데 모두가 자기의 필요한 일을 했습니다. 느헤미야서를 읽어보면 75명의 대표가 일을 했습니다. 오늘 이 책은 지금 느헤미야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책에 이름이 나와 있지 않은 사람이 바로 느헤미야입니다. 사실, 느헤미야가 가장 수고를 많이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느헤미야가 자신의 이름을 제외하고 예루살렘 성 건축에 수고한 75명이나 되는 사람들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 귀한 교훈을 줍니다. “제가 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하신 것입니다”라는 뜻입니다. 얼마나 은혜롭습니까. 하나님 일은 하면 할수록 힘이 나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가 은혜 받는 비결이요, 부흥하는 비결입니다.
느헤미야는 각자가 한 일을 일일이 기록함으로 그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성경말씀과 같은 마음을 가지기를 원합니다. 느헤미야는 무너진 성벽을 건축하였는데 하나님이 세워주신 교회마다 함께 무너진 성벽을 수축하는 여러분이 되십시다.
참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모습이 보여져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이 다스리는 (왕) 나라이며,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나라이며, 사랑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롬14:17)
하나님 나라는 죽어서만 가는 나라가 아니라 먼저 내 마음에 임해야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 21)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해야 합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6:33)
오늘날 한국교회가 원로목사 밑에 당회장, 그 밑에 부목사, 강도사, 전도사, 장로, 안수집사, 권사, 권찰, 서리집사, 평교인 순으로 서열화, 관료화 되어 가고 있습니다. 또 한 집단(단체)의 성패는 그 지도자에 달려있는데, 한국교회는 단지 신학교를 졸업하기만 하면 평생 교회의 치리자가 될 수 있습니다. 이는 매우 잘못된 제도입니다. 아울러 한국교회에는 많은 목회자가 섬기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과 모세의 자리(마23:2)에 앉아 있습니다. 목사가 죽어야 한국교회가 삽니다.
그리고 십일조와 헌금을 걷는 데는 성경적으로 하면서 십일조와 헌금을 쓸때는 성경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즉 많은 교회가 십일조와 헌금을 교역자의 생활비와 교회건축과 건물유지비용, 기도원 건축, 교인묘지, 교제비 등으로 90%이상을 사용하고 구제비로는 고작 10%미만을 사용하고 있는 교회가 많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십일조와 헌금 사용에 대해서 분명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즉 십일조를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해 사용하라고 하셨습니다.(신14:28-29, 신26:12, 렘22:16 등) 또 성경의 많은 곳에 가난한 자와 궁핍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도와줄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렘22:16, 시112:9. 잠14:21, 31, 잠19:17, 잠21:13, 잠22:9, 잠29:7, 사58:7, 눅6:38, 고후9:9, 갈2:10 등)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거하지 않습니다.(요일3:17)
오늘날 타락하고 훼파된 교회를 다시 재건합시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을 부르고 계십니다. 성전재건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학개는 성전재건을 미루면 무서운 삶의 시련이 닥칠 것을 예언했습니다.(학1:2-11)
잠자는 성도여 이제 깨어 일어납시다. 주의 일에 전심코자 하는 형제여 함께 모입시다. 내가 하는 일을 당신은 할 수 없고, 당신이 하는 일을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힘을 합하면 하나님 나라 건설과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아름다운 일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작은 물방울처럼 모여 예수의 큰 강을 이룹시다. 새 술은 새부대에 담아야 합니다.(마9:17, 눅5:37-38)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님을 따라 기드온의 300명 용사(삿7장)처럼 교회개혁의 횃불을 높이들 성도여 모입시다.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며(롬14:17), 초대교회와 같이 나눔과 사랑과 성령충만한 교회를 이룩합시다.
* 기도: 사랑과 자비가 풍성하신 하나님, 우리에게 귀한 사명과 하나님의 성전을 허락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 이름 높이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공동체가 되게 하시고, 주님 오시는 날 주님으로부터 칭찬받을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먼저 예수님이 왕이 되어 다스리시고 성령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마음과 교회에 임하게 하옵소서. 우리 구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갈릴리공동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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