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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아가 이정수 목사............... 조회 수 2928 추천 수 0 2010.10.10 09:06: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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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아8:6-7 
설교자 : 이정수 목사 
참고 : 말씀의샘물 http://www.wordspring.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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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1)
본문/ 아8:6-7, 요일4:18

1. 들어가는 이야기

  나 개인적으로 신구약 성경 말씀 가운데 사랑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문장을 꼽으라면 고전13장 사랑장의 표현보다 오늘 본문 두 곳 말씀을 꼽겠습니다. 본문 말씀을 내가 이해한 대로 풀어 읽는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나를 너의 팔에 새긴 문신처럼, 너의 가슴에 새겨 넣은 도장처럼 여기라. 사랑은 죽음처럼 강한 것, 질투의 불꽃은 지옥 불과 같아 이 세상 모든 강물로도 끌 수 없는 것, 사랑은 억만금으로도 살 수 없는 것, 사랑은 그렇게 고귀한 것!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 쫓습니다. 두려움은 징벌을 생각할 때에 생기는 감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속에 두려운 감정을 품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온전한 사랑을 이루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2.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두려움 안에는 사랑이 없습니다

조지훈은 “思慕(사모)” 에서 “남자에게 있어 여자란 기쁨 아니면 슬픔!” 이라고  여자에 대한 남자의 감정을 칼 같이 단호히 표현하였습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로 로스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는 감정에는 행복, 불안, 기쁨, 분노 등 다양합니다. 그러나 우리 가슴속 깊은 곳에 있는 감정은 사랑(Love)과 두려움(Fear) 단 두 가지뿐입니다. 사랑은 모든 긍정적인 감정의 근원이며 두려움은 모든 부정적인 감정의 근원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동양에서는 예로부터 사람의 마음이 경험하는 감정을 四端(사단: 측은지심-불쌍히 여기는 마음, 수오지심-악을 미워하는 마음, 사양지심-예의를 지키는 마음, 시비지심-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 七情(칠정: 희-기쁨, 노-분노, 애-사랑, 구-두려움, 애-슬픔, 오-부그러움, 욕-욕심)으로 나누어 설명하였으나 에리자베스 퀴블로 로스의 구분을 따른다면 다음과 같이 양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에 속한 감정들: 기쁨, 보람, 평화, 승리, 즐거움, 성취감, 성공, 만족, 쾌감, 밝음, 용기, 박수 갈채, 자랑스러움, 아름다움, 따뜻함, 맑고 깨끗함, 깨달음, 지혜, 열린 마음, 나눔과 베품, 축하, 웃음, 속이 툭 터지고 시원 함, 떳떳함, 긍정적인 존재론적인 삶,... 등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려움에 속한 감정들: 슬픔, 분노, 실패, 주눅, 불안, 걱정, 쩨쩨함, 의심, 고통, 염려, 공포, 파괴, 방어적 태도, 부끄러움, 절망, 짜증, 패배, 열등감, 어리석음, 답답함, 닫힌 마음, 인색함, 상하좌우로 꼭 막힘, 애매 모호, 위선, 미안함, 후회, 부정적인 소유지향적 삶,... 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두려워하는 감정의 震源地(진원지), 두려움의 정체는 무엇인가?

첫째. 우리가 살아가면서 언제 두려운 감정을 경험하는가?
(가)자연에 대한 두려움- 천재지변, 환경오염, 산, 바다, 사막, 밀림, 등. (나)사람에 대한 두려움- 처음 만나는 사람, 데이트 신청, 가까운 사람들과의 인간관계, 거물공포증, 무대공포증, 발표공포증, 등. (다)미래에 대한 두려움- 사업의 불확실성, 노후문제, 기우(언제 무슨 일을 당할지 알 수 없다는 불안증, 정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불안감)공포증, 등. (라)생존에 대한 두려움- 진로 문제, 직장 문제, 결혼 문제, 자녀 교육 문제, 건강 문제,..등. (마)종말론적 두려움-나의 영혼이 존재하는가? 나는 천국행인가, 지옥행인가? 등.

둘째. 천의 얼굴을 가진 두려운 감정- 두려움은 변장의 명수입니다. 두려움은 자기 정체를 감추기 위하여 항상 다양한 상황을 연출합니다.

최윤희(아침마당 등 5 방송 고정 출연, 대기업 인기 강사)의 고백: 나도 처음 강연장에 갔을 때 사시나무 떨듯 떨었습니다. 대기실에 앉아 있는데 너무 두렵고 떨려서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그 때 나는 생각하였습니다. 내가 왜 이렇게 두려워하는 거지? 내가 왜 이렇게 떠는 거지? 왜? 왜? 왜? 그리고 나는 정답을 찾았습니다. 그것은 실제의 나보다 더 근사한 나를 보이려고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곧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좋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자, 이후로 강의 부탁이 끝나도 좋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보여주기로 마음먹고 나니까 거짓말처럼 두려움은 사라졌습니다.

직장에서 맡은 프로젝트 발표, 데이트 신청, 초대 받은 상류사회 파티, 직장의 구조 조정, 새로 부임한 교회, 새로운 창업 등을 앞 둔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합니다. 빠뜨린 것은 없나? 퇴짜 맞으면 어쩌나? 직장을 잃으면 어떻게 하나? 사람들 앞에서 웃음거리가 되면 어쩌나? 사업에 실패하면 어쩌나? 하고 두려워합니다.

셋째. 이 모든 두려운 감정의 궁극적 진원지, 궁극적 정체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입니다! 최윤희의 고백을 조금만 더 깊이 파헤쳐본다면 그 바닥에는 강의 초청이 끊어져서 먹고 살기가 어려워짐으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최윤희는 왜, 실제의 자기보다 더 멋진 자기를 보여주려고 하였는가? 더 많은 강의 초청을 받아 생존의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시도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 말한 자연, 사람, 미래, 생존, 종말에 대한 모든 두려움의 가장 밑바닥에도 죽을지도 모른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 생존의 두려움이 깔려 있습니다.

4. 마치는 이야기

생존의 두려움은 모든 존재의 존재론적 두려움입니다. 성경은 이 존재론적이며 실존적인 두려움을 극복 할 수 있는 힘은 오직 사랑뿐이라고 하십니다. 사랑은 죽음처럼 아니 죽음보다 강하도다!  온전한 사랑이 모든 두려움을 쫓아내는도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2)
본문/ 아8:6-7, 요일4:18

1. 들어가는 이야기

  우리 모두는 일상 생활에서 크고 작은 두려움(염려=걱정=근심=불안=초조)을 느끼면서 삽니다. 자녀 출산, 아이들 교육, 대학 입시, 직장 문제, 결혼 문제, 구조 조정, 노후 문제 등은 큰 두려움에 속하고, 집안 식구들 건강, 아이들의 늦은 귀가, 사랑하는 사람의 오해, 친구, 후배, 윗사람 등의 평가, 옷차림, 학교나 직장에서의 갖가지 시험, 맞선, 군입대, 아파트, 주식, 부동산 가격의 증감, 등은 작은 두려움에 속합니다. 그 외에도 문득 문득 암에 걸리면? 장애인이 되면? 집안이 망하면? 왕따 당하면? 등 막연한 두려움도 있습니다.

이 모든 두려움의 원인으로 (가)자기 불신, (나)부정적 사고 방식, (다)결과를 예측 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무지, (라)현재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 것을 상실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마)자기의 삶에 조만간 분명히 다가 올 문제에 대하여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자기 현실 등을 말 할 수 있습니다.

2. 두려움이 사람에게 미치는 심각한 폐해

첫째. 두려움은 육체와 신경 기관을 마비시켜 그 사람 자신이 평소에 가지고 있는 실력조차 발휘 할 수 없도록 사람을 옥죕니다. “하던 짓도 멍석 깔면 못 한다” 는 속담이 바로 그 뜻입니다. 그래서 감독들이 선수들에게 항상 하는 소리가 “연습은 실전 같이, 실전은 연습같이!”입니다.

둘째. 두려움은 사람으로 하여금 거짓말, 척, 위선적 행동을 강요함으로 사람을 비인간화합니다. 즉, 속으로는 싫으면서도 좋다 하고, 좋으면서도 싫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움은 正正堂堂(정정당당)해야 할 인간관계를 파괴합니다.

셋째. 두려움은 각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부여 받은 각 사람 고유의 잠재력을 말살 시킵니다. 공포 분위기에서 자란 아이와 행복한 분위기에 자란 아이의 차이가 얼마나 다른가는 不問可知(불문가지)입니다.

넷째. 두려움은 그 두려움을 현실화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모든 유형 무형의 에너지가 그 사람이 두려워하는 바로 그 방향으로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그럴 줄 알았어, 이렇게 될 줄 알았다구, 어쩐지 이상하더라” 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다섯째. 두려움은 결과적으로 그 사람 스스로 “나는 패배자, 비겁자, 열등한 자, 못 난놈, 쓸모 없는 놈” 으로 격하시킵니다. 이 얼마나 비극입니까?

3. 두려움을 물리치는 유일한 힘은 사랑입니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There is no fear in love. But perfect love drives out fear, because fear has to do with punishment. The one who fears is not made perfect in love(NIV).

아!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입니까!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역으로 말하면 두려움 안에는 사랑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There is no fear in love=There is no love in fear!

우리는 보통  "사랑=Love" 하면 에로스(육체적 사랑), 필리아(우정적 사랑), 스트로게(혈족 간의 사랑), 아가페(신적 사랑)를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모든 사랑에 대한 이미지는 따뜻함, 애정, 용서, 화해, 자기 희생, 헌신적 봉사, 베풀고 나눔, 온화함, 평화로움, 부드러움, 따사로운 햇빛, 쌔근쌔근 잠자는 아기를 품고 있는 엄마, 잔잔한 물가에 평화롭게 쉬는 양떼,...뭐 이런 이미지를 떠 올립니다. 물론 사랑에는 그런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그렇게만 이해한다면 사랑을 반쪽만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니 오히려 성경은 그와 정 반대되는 사랑의 이미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비 친척 재산을 포기하고 갈 바를 알지 못한 채 길을 떠난 아브라함,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불태워 바치라는 명령, 장장 40년 동안의 두렵고 광대한 광야 생활, 아모리, 여부스, 브리스, 히위 족속과의 참혹한 전쟁을 치루고 얻은 가나안 땅, 드보라, 기드온, 입다, 삼손 등 사사들의 치열한 독립 전쟁, 앗수르의 억압, 바벨론에서의 70년 간 포로 생활, 가혹한 로마의 식민 지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12제자들의 순교, 바울 사도의 3차에 걸친 복음 전도 여행,... 등등.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사랑은 전쟁, 죽음, 갈등, 고통, 암흑, 위협, 절망, 참혹한 노예 생활, 영원한 죄악,...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그리하여 결국 살아남고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과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우리들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의 이미지에는 앞에 말씀 드린 그런 이미지도 있지만 전혀 또 다른 사랑의 이미지가 있습니다. 그 이미지는 죽으면 죽으리라 하는 결단, 아들이라도 불태우는 무모한 순종, 감옥, 채찍, 풍랑, 강도의 위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하나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절규하며 물과 피와 땀을 흘리신 예수님의 죽음 등입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나니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느니라 하실 때의 이 사랑은 전자의 사랑이 아니라 후자의 사랑입니다. 채찍, 감옥, 강도, 전쟁도 불사하겠다. 죽으면 죽으리라, 그리고 실제로 피와 땀을 흘리고 기꺼이 죽겠노라! 고 하는 사랑 안에 그 무슨 두려움이 있겠습니까!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3)
본문/ 아8:6-7, 요일4:18

1. 들어가는 이야기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도다(아8:6-7).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4:18). 우리 모두 아멘, 아멘, 아멘!으로 받아 모신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두려움 없는 온전한 사랑 안에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께서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롬7:21-24)” 탄식한 것처럼 우리도 역시 두려움 없는 사랑 안에 살기를 원하지만 여전히 두려움 속에 살고 있습니다. 오호라! 두려움은 우리의 실존입니다.

2. 그렇다면 두려움은 어쩔 수 없는 宿命(숙명)인가?

성경은 단호히 “No!” 라고 하십니다.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라(신30:19).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 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24:15). *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겠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18:21).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계3:15-16).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하는 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계21:8).

성경은 축복, 생명, 참 하나님을 택하고 살 것을 명령하십니다. 사랑은 축복, 생명, 참 하나님입니다. 두려움은 저주, 사망, 거짓 하나님입니다. 두려움은 사실인  것처럼 보이는 가짜(Fear= False Evidence Appearing Real)입니다. 사랑이냐 두려움이냐 그것이 문제로다(To love or to fear, that is question!) 할 때 성경은 당연히 사랑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모름지기 두려움을 내어 쫓는 사랑을 택하고 사랑 안에서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3. 두려움을 좇아내는 사랑 안에 사는 법

첫째. 유형 무형의 모든 두려움에 정면으로 맞서기로 마음먹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겁내지 말며 두려워 말며 떨지 말며 놀라지 말라(신20:3).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수1:6).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내 말을 그들에게 고하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견고한 성읍, 쇠기둥, 놋성벽이 되게 하였노라(렘1:17-1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하여 저를 대적하라(벧전5:8-9).

둘째. 내 안에 일어난 두려움의 정체를 명확히 파악할 일입니다. 상대방이 나보다 강함에서 오는 두려움인지? 부족한 정보 때문인지? 나 자신의 준비=실력 부족인지? 막연한 불안, 초조, 염려, 근심, 걱정에서 오는 두려운 감정인지? 잘 살펴야합니다. 知彼知己 百戰不殆(지피지기 백전불태)란 말은 두려움을 대적 할 때도 매우 유용한 전략입니다.

셋째. 그 두려움과 실제로 두 팔 걷어 부치고 정면승부 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다음에 하면서 미적미적 뒤로 미루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당장, 그 두려움과 맞짱 떠야합니다.

한 농부가 밭 가운데 있는 커다란 바위를 피해서 농사를 지었습니다.  그 바위에 걸려 여러 번 쟁기를 부러뜨렸지만 워낙 큰 바위라 바위를 캐낸다는 것은 엄두도 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바위에 부딪쳐 또 쟁기가 부러졌습니다. 화가 난 농부는 “50톤 짜리 크레인을 전세 내는 한이 있더라도 이 놈의 바위를 캐내고야 말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농부는 바위 아래를 파내려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점심 때 쯤 농부는 바위 뿌리를 볼 수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바위 뿌리는 겨우 한 자 정도 였습니다. 농부는 그 날로 바위를 밭에서 캐낼 수 있었습니다.

산에 오르는 일도 그렇습니다. 산 아래에서 보면 산은 아득합니다. 아이고 저런 산을 어떻게 올라가나? 싶습니다. 그러나 徐徐無欲速 汲汲無敢惰(서서무욕속 급급무감타: 빠르고자 아니하고 천천히, 감히 게으르지 아니하고 꾸준히)하여 한 걸음 한 걸음 오르면 마침내 그 아득하게만 보이던 산꼭대기에 이르게 됩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만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 하더라는 시조는 과연 명시조입니다.

두려움은 빗자루 귀신과 같습니다. 뒤돌아 도망가는 사람에게는 한없이 무섭고 어디까지든지 좇아오지만, 오지게 마음먹고 홱 뒤돌아서서 정면대결로 맞서면 한 손아귀에 들어오는 썩은 빗자루에 불과합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4)
본문/ 아8:6-7, 요일4:18

1. 들어가는 이야기

  성경은 너희는 두려워 말라, 겁내지 말라, 떨지 말라, 무서워 말라고 하시지만 우리는 여전히 두려워하며 겁내며 떨면서 삽니다. 실제 생활에서 먹고사는 문제, 자녀 교육 문제, 노후 문제, 애정 문제, 조직 내의 복잡한 인간 관계 등, 철학적이며 영적인 면에서는 절대 허무, 절대 고독, 영혼 구원 문제 등, 그리고 무엇이라 분명히 말할 수는 없지만 왠지 불쑥불쑥 두려운 감정을 느낍니다.

그런데 유독 두려움(과거의 죄가 발각되면 어떻게 하나?, 이 직장에서 쫓겨나면 어떻게 하나?, 앞으로 노후에는 뭘 먹고 사나? 등) 때문에 소화 불량, 의기 소침, 잠을 이루지 못하고, 쩔쩔매면서 만성 두려움 증후군으로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을 돕는데 인지치료(Cognitive therapy) 혹은 현실치료(reality therapy)라는 심리 상담 기법이 있습니다.

이 기법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당신이 두려워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주변에 당신과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당신의 두려움이 현실로 나타날 확률은 얼마나 됩니까? 당신의 두려움이 실제 현실로 나타난다면 그 최악의 상태는 무엇입니까? 그리고 그 때 당신의 대처 방법은 무엇입니까? 등의 도전적 질문을 던짐으로, 그 사람이 두려워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도 가지고 있는 두려움이라는 것, 그 두려움이 현실화 될 가능성이 별로 없다는 것, 그 두려움이 현실화되더라도 대처할 방법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 그 두려움의 결과가 최악의 상태라 하더라도 그가 두려워할 만큼의 정도는 아니라는 것 등을 깨닫도록 하여 그 스스로 두려움을 극복하도록 돕는 심리 상담 기법입니다.

2. 모든 두려움 가운데 최악의 두려움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실제 생활의 두려움, 철학적 영적 두려움, 근거를 알 수 없는 막연한 존재론적 두려움, 이 모든 두려움의 궁극적 뿌리는 자기 존재의 소멸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그런데 정작 현대 의학으로부터 “죽음 판정”을 받고 죽음의 두려움에 직면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의 두려움을 초월하는 현상을 보입니다.

죽음의 두려움을 직면한 사람들은 내가 이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다는 현실과 이제 내가 잃을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직시합니다. 나의 인생은 내 모습 이대로 너무 충분한 삶이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나는 나의 죽음으로 완전 無化(무화)되는 존재가 아니며 나는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존재하리라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은 두려움은 원래 실체가 없는 것인데 내가 그동안 살아오면서 괜히 두려움에 짓눌려 살았다는 것을 밝히 깨닫고 남은 시간을 담대하게 소중하게 삽니다. 진짜로 삽니다.

3. 죽음에 직면한 사람들이 아직 살아 있는 우리들에게 주는 교훈

첫째.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은 없다. 그러나 죽음조차도 막상 직면하고 보면 더 이상 두렵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을 피하여 겉으로 안정된 삶을 사는 것은 가짜 삶입니다. 그러므로 삶에서 두려움을 만나면 그 두려움과 정면 승부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진짜 삶에 이르는 유일한 길입니다.

百尺竿頭坐底人(백척간두좌저인: 백척 낭떠러지 앞에 앉아 있는 사람아)
雖然得入未爲進(수연득입미위진: 그렇게 앉았다고 진리가 깨달아지겠는가)
百尺竿頭須進步(백척간두수진보: 백척 낭떠러지 아래로 뛰어내리게)
十方世界現全身(시방세계현전신: 그래야 온전한 진리가 네 앞에 현신할 것이야)

둘째. 오만가지 잡스런 두려움 때문에 해야 할 것, 하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것, 읽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고 산다면 그보다 더 어리석은 인생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의 마지막 순간에 한 번만 더 그 바다를 보고 싶다고 하지 말라. 한 번만 더 그 산에 오르고 싶다고 하지 말라. 한 번만 더 그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하지 말라. 한 번만 더 그 음식을 먹고 싶다고 하지 말라. 한 번만 더 그 음악을 듣고 싶다고 하지 말라. 아직 살아 갈 시간이 남아 있는 오늘, 네 두 손과 두 발을 움직일 수 있는 지금, 그 일을 하라(Just do it, now!)는 것입니다.

셋째. 변화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변화(직장 옮김, 인터넷, 거주 환경, 디지털 문화, 새로운 사람 만남, 새로운 직업, 구조 조정, 직업 선택, 가족 해체, 낯선 곳 등)를 두려워합니다. 구관이 명관이다, 놀던 물이 좋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는 의식에서 벗어나 유연하라는 말입니다.

먹이도 별로 없는 메마르고 황량한 숲에 새 한 마리가 둥지를 틀고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새는 먹이를 찾으러 나갔다가 폭풍우를 만났습니다. 새는 자기 둥지로 돌아가려고 있는 힘을 다 하여 날개 짓을 하였습니다. 폭풍우를 뚫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새는 폭풍우의 기류를 타고 어딘지도 모르는 방향으로 한 없이 날아갔습니다. 마침내 폭풍우는 잠잠해 졌습니다. 어느 숲 속에 떨어진 그 새는 살며시 눈을 떴습니다. 그 새의 눈 앞에 아름답고 무성한 숲, 햇빛에 반짝반짝 빛나는 시냇물, 맛있는 먹이로 충만한 세계가 펼쳐져 있었습니다. 새는 찬송가 503장 2절을 불렀습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아멘!”  人生亦如是-나는 인생의 변화 역시 이와 같다고 믿습니다.

4. 마치는 이야기

죽음에 직면 한 사람들은 아직 살아 갈 시간과 건강이 남아 있는 우리들에게 죽음보다 더한 두려움이 어디 있는가? 그러나 죽음도 막상 직면하고 보니 별 게 아니더라고 합니다. 본문의 사랑이란 미리 이 깨달음으로 현재를 사는 것입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5)

본문/ 아8:6-7, 요일4:18

1. 들어가는 이야기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두려움의 문제를 묵상하였습니다. 즉, 두려움은 우리 각 사람의 삶에 막대한 폐해를 준다, 모든 두려움의 궁극적 진원지는 죽음이다, 그런데 막상 죽음의 두려움 앞에 직면한 사람들이 발견한 것은 두려움은 두려워하는 감정 그 자체가 문제이지 죽음 그 자체조차 두려운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동안 공연히 두려움에 짓눌려 살았던 것이 후회된다, 죽음의 두려움과 직면한 사람들은 아직 살아 갈 건강과 시간이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두려움의 실체는 없다, 두려워하는 감정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두려움 때문에 단 한 번밖에 없는 삶을 무의미하게 시시하게 주눅 들어 살지 마시라, 그리고 성경은 이 모든 두려움을 몰아내는 유일한 힘은 사랑인데 이 때의 사랑은 부드럽고 따뜻한 사랑이 아니라 물과 피와 땀을 쏟으며 그 어떤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끈질기고 강인한 사랑이다, 등을 말씀 드렸습니다.

2. 이치가 그런 줄 알아도 현실 속에서 우리는 또 다시 두려움 속에 삽니다

우리 전 시대에는 크고 작은 불만이야 있지만 평생 직장이 거의 보장되었습니다만 오늘의 무한 경쟁 시대(이태백: 이십 대 태반이 백수이다, 삼팔선: 38세가 되면 옮겨갈 직장을 생각해야한다, 사오정: 45세 정년, 오륙도: 56세에도 회사에 남아 있다면 월급 도둑이다, 청백전: 청년 백수 전성 시대)는 평생 직장(목사직도 예외는 아니다!)이란 없고 각자의 평생 직업만 있을 뿐입니다. 여기 우리 시대 청년(20-30대)들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만약 55세에 정년을 맞은 경우 평균수명이 60-70세인 옛날 같으면 자식들 봉양 받으면서 5-10년 정도 살다 가면 되었지만 생명과학, 의학 기술, 사회복지 제도의 발달로 수 년 내로 평균수명이 80-90세가 되면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 없이 25-35년을 살아야 하니 노후문제는 눈 앞의 현실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더욱이 점점 더 고도화해 가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貧益貧 富益富(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국가, 계층, 개인별로 갈수록 그 간극이 확대되고 있으니 더욱 그러합니다. 여기 우리 시대 중년(40-50대)들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아날로그 부모 세대와 디지털 자녀 세대 간의 도덕적, 윤리적, 문화적, 경제적 가치관의 괴리로 핵가족 안에서도 심각한 갈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남편의 불안한 직장, 폐경기에서 오는 심리변화 등으로 아내는 아내대로 불안합니다. 그러나 특히 힘없는 중년의 남자들이 느끼는 심리적 압박감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은 모두 아내 편, 말이 통하지 않는 자녀들, 직장 상사의 눈치와 치고 올라오는 후배가 주는 스트레스, 하나 둘 껌뻑 껌뻑 켜지는 건강 적신호 등으로 말입니다. 여기 우리 시대 家庭(가정)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3. 아무리 현실이 그렇다 하여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첫째. 인류 역사 속에 두려움이 없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우리 시대와 다른 시대(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 시대, 요즈음 유행하는 주몽 시대, 삼국시대, 고려시대, 이조시대 등)와 바꾸어 살고 싶다는 분이 계십니까? 내 생각엔 한 사람도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왜? 확률적으로 볼 때 우리들 중 십중팔구는 그런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평생 중노동과 비인간적 종살이 하다가 굶어 죽거나 전염병에 죽거나 전쟁터에 끌려가 칼에 맞아 이름 모를 골짜기 까마귀 밥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러합니까? 그러므로 지금, 여기, 오늘, 이 나라, 이 시대가 좋은 줄 알고 마땅히 감사, 감사, 감사하고 살아야 합니다.

둘째. 기독교 신앙이란 사랑이 두려움을 쫓아낸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신학자 폴 틸리히는 “존재에의 용기(Courage to Be)”에서 “사람은 존재론적으로 두려워한다. 허무와 무의미에 대한 두려움, 죄와 그 결과에 대한 두려움, 운명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바로 그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세상 생명 있는 모든 존재(동물, 식물, 벌레, 아메바까지도)는 두려워합니다. 두려움은 존재론적 감정입니다. 두려움은 생명가진 모든 존재의 宿命(숙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사람 속에 두려움을 견뎌내고 이겨내고 넘어 설 수 있는 특별한 축복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신의 성품=하나님의 생기입니다.

성경의 인물 모두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아브라함,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기드온, 사무엘, 다윗, 예레미야, 느혜미야, 에스더, 욥, 성모 마리아, 베드로, 요한, 야고보, 바울 사도, 그리고 예수님까지도 자기의 삶을 두려워하였습니다. 이 모든 사람들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그냥 두려워한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출생 자체를 저주 할만큼 두려움에 떨었습니다(요3:1-26, 렘20:14-18, 마26:36-46 등). 그러나 저들은 산의 뿌리가 뽑히고 바닷물이 천길만길 솟아올라 뒤집어지는 그 지독한 깜깜한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생기로 겨우 숨쉬면서 결코! 결코! 결코! 하나님의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끈질긴 강인한 사랑입니다. 하여, 마침내 두려움을 넘어서 자기 삶을 살아냈습니다.

셋째. 사랑은 죽음의 두려움보다 강합니다.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의기소침하십니까? 하고는 싶지만 돈 걱정, 이웃 눈치, 자기 불신, 실패 등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주저 하고 계십니까? 나중에 돈 많이 벌어 놓고 여유가 있으면 전원생활, 여행, 읽고 싶었던 책, 만나고 싶었던 사람, 먹고 싶었던 것, 가고 싶었던 곳, 하고 싶었던 일을 하겠다고 생각하십니가? 물론 그럴 수 있겠지요. 그런데 여행도 산행도 책도 먹고 싶었던 것도 평소에 연습해두지 않으면 외롭고 힘들고 지루하고 맛없고 생뚱맞고 낯설어 할 수 없는 법입니다. 두려움은 두려움을 낳고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합니다. 지금 당장 사랑하기 시작하십시오. 사랑은 더욱 크고 아름다운 사랑을 불러 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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