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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명으로 삽니다.

이사야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890 추천 수 0 2010.03.21 23:3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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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6:1-8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eolin.or.k 

 2003.1.12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에 기차를 타면 마주 앉기도 했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집사님이 표를 사서 기차를 탔는데 자기 자리가 거꾸로 앉은 자리였습니다. 자리에 아무도 앉지 않아서 편하게 가려고 앞을 보고 앉았습니다. 그런데 다음 정류장에 가니 한 분이 아이를 데리고 오셨는데 자신의 자리에 와서 자기 자리라고 내어 달라고 했습니다. 아이와 그 부인은 그 자리에 앉았습니다. 자리를 바꾸어 주고 전도도 할 겸해서 말을 걸었습니다. 교회에 나가는 집사님이라고 했습니다. 서로 자기네 교회를 자랑하며 한참 가는데 나중에 탄 집사님께서 찰떡을 커내어 아이에게 주었습니다. 자신도 아주 맛있게 먹었습니다. 조금 줄 줄 알았는데 자신들만 먹는 것입니다. 그러자 집사님이 "집사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막 12:31)는 말씀이 성경 어디에 나오지요?"라고 물었습니다. 이 때 떡을 맛있게 먹던 집사님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차리고 하는 말이 "성경에는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출 20:17)라는 말씀도 나와요."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참 욕심이 많습니다. 사람이 사는 것을 살펴보면 사람은 대강 세 가지 원리에 따라 사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가 유익의 원리입니다.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을 늘 추구를 합니다. 유익을 주면 직장을 옮기기도 하고 유익하다면 무엇이든 먹으려 합니다. 둘째는 편리의 원리입니다. 편리한 것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상품도 편리하지 않으면 수명이 길지 못합니다. 사지 않으니까요? 조금더 편하게 조금더 편하게가 오늘 시대의 구호입니다. 셋째는 쾌락의 원리입니다. 기쁨을 추구하는 인생을 산다는 것입니다. 기쁨이 있는 곳에 사람은 모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런 원리만으로 살지 않은 것을 봅니다. 세상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사람들도 보면 단순히 이런 원리로만 인생을 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무엇보다 중요시한 것은 사명의 원리입니다. 사명이면 유익이 되지 않아고 갑니다. 사명이면 편리하지 않아도 선택합니다. 사명이면 기쁨이 없고 고통이 따라도 그 길을 갑니다. 1886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왔습니다. 황무한 땅, 우상이 난무한 땅, 아직은 미개한 땅이었습니다.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6년 4월 10일 부활주일에 인천항을 통해서 들어왔습니다. 원래 언더우드는 인도 선교사로 가려고 공부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느날 그가 인도 선교사로 가기 위해 모임에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 한 사람이 한국 선교에 대한 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한국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해서 아직도 복음을 받지 않은 나라, 어둠에 싸여있는 나라다"라는 보고를 듣고 그는 하나님께 기도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시여, 한국 땅에 선교사를 보내 주시옵소서. 저는 인도로 가지만 한국 땅에 선교사를 보내주시옵소서."

이때 성령님께서 언더우드 마음을 감동시켰다고 합니다. "언더우드야, 왜 네가 가지 않고 남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느냐 한국 선교사로 네가 갈 수 없느냐"라는 감동이었습니다. 그때 그는 말했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는 처음으로 한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자신에게는 아무 유익도 없는 땅 불편한 땅 기뻐할 것 없는 고통의 땅입니다. 그러나 그는 사명으로 이 땅에 왔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불러 맡긴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일이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6만 교회, 기독교인 일천만이 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세계 최대의 교회가 있습니다. 세계 선교 강국이 되었습니다. 162개국에 1만여명의 선교사를 보내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선교사를 많이 보내는 나라입니다. 경제는 12위 수준이지만 선교는 이미 2강에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사명으로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업을 하고 직장을 다녀도 사명으로 하고 자녀를 양육해도 사명으로 양육하고 부모를 섬겨도 사명으로 섬기고 부부가 사랑해도 사명으로 사랑하고 교회를 섬겨도 사명으로 섬겨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사명자로 살아야 합니까?

1. 사명자는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한문으로 '사명'이라는 말은 '심부름 사(使)자에 목숨 명(命)자'를 붙인 말입니다. 우리말 큰 사전을 보면 "사신이나 사절이 받든 명령, 맡겨진 임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영어에서는 'calling(부른다)'혹은 'vocation(부른다)', 'mission(보낸다)'라는 말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불러 보내는 것이 사명입니다. 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맡겨준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 일을 이루어 드리는 것이 사명자의 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이사야가 사명자로 나서는 것을 봅니다. 8절 같이 읽겠습니다. 그 때가 어는 때입니까?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난 때는 어느 때였습니까? 1절을 보십시오. 웃시야가 죽던 때입니다. 웃시야왕은 유대 나라의 10대 왕입니다. 오십 이 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하였는데 참 잘하였습니다. 훌륭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잘 경외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은혜와 복을 많이 받아 사람들에게 명성이 자자해지자 교만해져 대제사장 아사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성전에서 제사장 만이 할 수 있는 분향을 드리려다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문둥병에 걸려서 죽었습니다. 사실 이사야의 웃시야의 친척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웃시야을 의지하고 많은 혜택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죽자 하나님의 성전에 나왔습니다. 사명자로의 길을 들어서는데는 첫 걸음이 하나님 앞에 나와 하나님을 만나는데서부터 있습니다. 인간 붙들고 사명받는 것 아닙니다. 환경 보며 사명 받는 것 아닙니다. 권력 붙들고 돈 붙들고 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물질에 웃시야, 권력의 웃시야, 지식의 웃시야, 인기의 웃시야로부터 하나님께 나와야 합니다. 하나님 만나야 합니다. 이것이 위대한 사명자의 첫 발견입니다. 그는 그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1-4). 살아계신 하나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념이나 철학, 종교, 사상으로서 하나님이 아닙니다. 성전에 들어가 기도하다가 만난 지극히 거룩하시고 엄위하신 하나님,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모세가, 야곱이 요셉이, 엘리야가 엘리사가, 베드로가 바울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사명자의 길을 가게되었습니다. 스펄전이 그랬습니다. 그는 절망과 회의와 방황에 빠져 있었습니다. 어느 주일 아침에 시골길을 가다가 교회에 들어가 예배를 드렸습니다.

 

 대 여섯 명이 모여 설교를 듣습니다. "여러분, 예수를 바라보십시다. 예수를 바라보십시다."라고 설교합니다. 목사님은 스펄젼을 보고는 큰 소리로 "저기 있는 청년 방황하고 있습니까? 길을 모르십니까? 예수를 바라보십시오."라고 외칩니다. 라고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때에 스펄젼은 '아, 나는 길을 잃은 사람이구나 !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생각하고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그는 하나님을 만나 거듭나게 되었고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위대한 설교자 스펄전 사명의 사람이 탄생된 것입니다. 성전에 가득찬 하나님의 영광, 천사들의 찬양을 받는 하나님의 영광, 온 땅에 가득찬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신앙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영안이 열린 것입니다. 남이 볼 수 없는 세계를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는 세계를 본 것입니다. 무너지는 왕국이 아니라 영원한 나라를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옷자락이 자신을 덮는 것을 체험한 것입니다. 심령의 공허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응답한 것입니다. 불안할 것없습니다. 두려울 것없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입니다. 이사야도 정치적으로 혼란한 상황입니다. 정권 교체기입니다. 북쪽으로부터 앗시리아의 침공위협이 있었습니다. 이때 이사야는 성전에 들어갔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그 불안의 요소가 문제가 될 것이 아닙니다.

2. 사명자는 진정한 자아를 만나 성결하게 사명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만났을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을 때, 하나님을 발견했을 때 어떤 고백을 합니까?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모두 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자아를 만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면 자신의 본질을 알게 됩니다. 진정한 자기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자기는 의인이요 거룩한 자요 애국자인줄만 알았는데 하나님을 만나니 자기는 추한 죄인이요 입술이 부정한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인간을 자신의 본질을 알 수 없습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 보면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하셨습니다. 베드로도 예수님을 만나고 제일 먼저 고백한 것도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나를 떠나소서!"라는 것입니다. 바울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의인이요 흠이 없는 사람인 줄로 알았으나 다메섹 도상에서 빛 가운데서 주님을 만난 뒤에 비로소 "죄인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라고 고백합니다. 첫 번째 영안이 열리니까 두 번째 마음 문이 열려 자신의 더러운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남만 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면 하나님을 만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추한 모습, 부끄러운 모습, 나아가서는 저주스러운 모습을 보게 됩니다. 자신의 정체와 자신의 운명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입술의 부정함을 보게 됩니다. 사명자는 먼저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사람들입니다. 서운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를 그렇게 대할 수 있냐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나를 이렇게 대해 준다고 서운한 생각을 가지면 결국 자신을 교만하게 하여 사명자로 살지 못하게 합니다. 심히 부패한 사람인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무디라고 하는 유명한 부흥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과거 구두 깁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식합니다. 그러나 정열적으로 다니며 부흥회를 인도하고 있는데 어느 마을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갔더니 아 그 마을 신문에다가 무디에 대해서 그 무식한 거 그의 허물들을 줄줄이 나열해 가지고 이렇게 험담을 늘어놓았습니다. 이 신문을 보는 동안 그 지방의 목사님들이 "이 나쁜 놈들, 이런 이런……."라고 말했습니다. 이 때 무디는 그 신문을 보면서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버려두라고. 신문에 나지 않은 허물이 훨씬 더 많으니까 그럴 것 없네" '저들이 말하고 있는 그것보다 나는 훨씬 더 부족한 사람이다. 그들이 지적하는 죄인보다 더 큰 죄인이다' 사명자는 항상 바닦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이렇게 죄를 인정할 때 하나님을 우리를 깨끗하게 하여 사명자로 사용하십니다. 주홍같은 죄 깨끗이 씻어 사용해 주십니다. 이사야를 보십시오.

하나님을 찬양하던 천사들이 그의 입술을 지집니다. 그것은 네 입술도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7절 "하반절 네 악이 제하였고 네 죄가 사하여 졌느니라" 입니다. 그리고 그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응답합니다. 용서받은 죄인입니다. 보혈의 피로 의롭게 된 사람입니다. 사명자로 나선 우리도 이미 예수님의 보혈로 모든 죄가 사해진 줄 믿습니다.

찰스 콜슨이라고 하는 미국 닉슨 대통령의 법률 고문이었습니다. 최고의 지성을 자랑했습니다. 냉철했답니다. 머리가 비상했답니다. 그는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나면서 그는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걷잡을 수 없는 절망이었습니다. 그는 심한 절망감에 괴로움과 좌절을 이겨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상원의원으로 있는 세 명의 친구들이 전도하러 왔습니다. 상원의원 중 한 분은 법원에다 자기가 대신하여 감옥에 들어가겠다고 했답니다. 그들의 전도에 감동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감옥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새로워 졌습니다. 회개하였습니다. 죄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용서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똑같은 감옥인데 감옥이 백악관보다 더 좋은 천국으로 변했습니다. 어두움이 떠나고 빛이 찾아 왔습니다. 절망에서 소망이 꽃피웠습니다. 불안은 살아지고 평안이 찾아 왓씁니다. 남의 빨래 다 해줍니다. 청소를 합니다. 자기가 없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으로 새로워졌습니다. 그는 책을 씁니다. born again, 거듭남입니다. 교도소에서 전도를 합니다.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거룩한 사명자가 되었습니다.

3. 사명자는 부르시는 음성을 들을 때 자발적인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는 세 번째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사명의 눈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여야겠다는 사명의 눈입니다. 남이 볼 수 없는 것들이 보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내가 누구를 보낼꼬' 이사야는 말씀합니다. "나를 보내소서" 이 고백이 여러분과 저의 고백이 되시길 바랍니다. 할 일 많은 이 땅위에 예수님을 대신하여 일할 사람을 누구를 보낼꼬, 이 땅의 죄와 죽음으로 죽어가는 영혼을 위해 누구를 보낼 꼬, 문제 많은 회사를 정상적으로 가동시키기 위해 누구를 보낼 꼬, 이 땅의 정의와 평화를 이루기 위해 누구를 보낼꼬,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이루는 열린 교회를 세우기 위해 누구를 보낼 꼬, 가난과 헐벗음으로 죽어가고 배우지 못해 무지하게 살아가는 자를 위해 누구를 보낼 꼬 라는 질문을 받은 때 우리가 이사야 같은 대답을 해야 합니다. 귀가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이 시대 사명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을 보는 영안도 열리고 자신의 죄를 보는 마음도 열려야지만 사명의 음성을 듣는 귀가 열려야 합니다. 그리고 자발적으로 그 부르심에 헌신해야 합니다. 남이 볼 수 없는 것보고 남이 들을 수 없는 것을 듣고 헌신합니다.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노벨상을 받았습니다. 그는 사명의 음성을 듣는 사람입니다. 대통령이 끝난 다음에 고향으로 가서 주일학교 교사를 합니다. 목수가 되어 세계 곳곳에 다니며 가난한 자들에게 집을 지어 주는 해비타드(사랑의 집짓기 운동) 운동을 합니다.

상황이 문제가 아닙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명으로 부르시는 음성을 듣고 자발적으로 사명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자신의 홈페이지 주바라기를 운영하는 '이 지선'이라는 사람을 알고 있는 사람을 알 것입니다. 이화여대 4학년 재학중일 때 교통사고를 당하였습니다. 오빠가 연대에 다니는데 둘이 집에 가다 그만 술 취한 사람이 차를 들이 받아 차에서 퉁겨 나와서 바닥에 떨어 졌습니다. 자동차 몇 대가 불이 났습니다. 이미 의식을 잃고 35%가 3도 화상을 입었습니다. 얼굴은 눈 두 개만 남았습니다. 8개월을 눈을 못 뜨고 산 것입니다. 수술만 열 한 번을 했고, 한 번 수술을 하면 열 네 시간에서 열 여덟 시간이 걸리는 대 수술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며칠 후 정신이 들었을 때 죽으려고 했습니다. 산소호흡기로 목을 눌러 산소가 들어오지 못하게 해보았습니다. 고통 가운데 계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믿음으로 이겼습니다. 그는 성경을 읽는 가운데 사명을 발견하였습니다. 내 고통이 고통 당하는 분에게도 위로가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홈페이지를 만들어 자신의 고통을 통해 고통받는 자들을 위로합니다. 눈썹이 없으면서 눈썹의 귀중함은 알립니다. 짧아진 여덟 개의 손가락으로 사람에게 손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됩니다. 귓바퀴가 없어져서 귓바퀴가 얼마나 소중한 것을 감사합니다.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이 감동을 받습니다. 그녀로 인해 위로 받고 살 힘을 얻는 많은 이들이 그의 사이트를 찾았습니다. 사명자의 삶입니다. 그녀는 말합니다. "제가 ‘이만큼 고생했다’고 자랑하기 위함도 아니고, 여러분을 울리기 위해, 동정을 받기 위해 쓰는 것도 더 더욱 아닙니다.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 누구도 살 수 있을꺼라 말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살리셨고 또 사랑하셨음을 말씀드리고 싶어서입니다. 부디 제 이야기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되시길 기도합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부끄러운 손’에서는 “저는 요즘 교회에서 이 부끄러운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찬양합니다. 세상사람들이 보기엔 불쌍한 손이지만 하나님은 제게 이 손이 부끄럽지 않은 마음을 주십니다”

1866년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1866년 토마스 목사는 중국에서 선교사를 하다가 24살에 자기 부인이 열병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 소식을 듣고 토마스 목사는 계속 선교 해야 할 것인 아니면 영국으로 돌아가야 할 것인지 하나님께 기도를 했습니다. 그때 한국에서 온 천주교 신자 김자평과 최선일을 만납니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한국 땅에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이 없이 죽는다는 말을 듣습니다. 이 말을 들은 토마스 목사는 영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한국 땅으로 가기로 결정하고 드디어 미국의 셔먼호라는 배를 타고 한국 대동강에 들어옵니다. 그때 당시에 평양 감사였던 박규수는 셔먼호에 불을 지릅니다. 거기에 탔던 많은 사람들이 대동강에서 익사했고 토마스 목사도 가지고 갔던 한문 성경을 대동강에 던지면서 "이 성경이 녹아 흘러가는 물을 마시는 자마다 복음이 들어가게 하옵소서. 이 성경이 녹아 흘러가 땅을 적실 때마다 복음의 땅이 되게 하옵소서." 하고 대동강에 뛰어듭니다. 하지만 그는 잡혀서 대동강 양각도 섬 위에서 사형을 당하게 됩니다. 망나니 박춘권이라는 사람이 칼을 들고 그의 몸을 돌면서 망나니 춤을 출 때 토마스 목사는 성경을 들고 "형제여, 예수 예수" 하고 외칩니다. 그때 망나니가 칼로 팔을 내려칩니다. 다른 손으로 성경을 들고 "예수 예수" 할 때 또 다른 쪽 팔도 내려칩니다. 그래도 "오, 형제여 예수 믿으시오." 할 때 그의 목을 내리쳤습니다. 드디어 토마스 목사는 대동강에서 목이 잘려 죽었습니다. 그때 토마스 목사가 대동강에 던졌던 성경을 주운 최초의 어린 아이가 최치량이라는 아이였습니다. 그 집이 여관이 되었는데 주운 성경을 가져다가 그 집 벽에 발랐습니다. 20년 후에 존 마팻이 선교사로 평양에 들어가서 어느 여관집에 들어갔는데 한문 성경이 벽에 붙어 있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최치량에게 묻습니다. 그때 최치량이가 "내가 어렸을 때 대동강에 갔다가 예수쟁이가 목이 잘릴 때 던진 그 성경을 주워다가 이 벽에 발랐습니다." 하고 말합니다. 드디어 그는 존 마팻 선교사를 통해서 전도를 받고 장로가 됩니다. 그 후에 토마스 목사의 목을 쳐 죽였던 박춘권이는 김익두 목사님의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예수를 영접한 후에 자기 과거를 회개하면서 자기 집을 교회에 바치고 예수를 믿어서 장로가 됩니다. 사명자와 사명자의 가는 길에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이익이 아닙니다. 사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편리가 아닙니다. 사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쾌락이 아닙니다. 사명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바닥인 나 자신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자발적으로 헌신하여 사명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우리는 사명으로 삽니다./이사야6:1-8/ 김필곤 목사/ 2003.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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