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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65:17-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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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70243 |
지난 2010년 3월29일 모스크바의 지하철에서 연속적으로 테러가 발생해서 39명이 죽었습니다. 체첸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 무력 투쟁을 불사하는 한 단체에 속한 이들이 그 테러를 자신들의 소행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체첸 자치 공화국은 1859년 러시아에 합병된 뒤로 꾸준히 독립 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아직 그 뜻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중국의 티베트 지역에서도 심심치 않게 폭력 투쟁이 일어나곤 합니다. 달라이 라마가 지도자로 활동하고 있는 티베트는 중국으로부터 실제적인 독립을 원합니다만 그게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로 많은 피식민 국가들이 독립을 했지만 체첸이나 티베트만이 아니라 그 이외에도 여전히 피식민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의 심정이 어떨지는 긴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이스라엘도 그런 피식민지 경험이 많은 나라입니다. 기원후 70년에 로마에 의해서 패망한 뒤에 거의 2천년 동안 나라 없이 살았습니다. 그 긴 세월을 온 세계에 흩어져 디아스포라로 살면서도 민족 정체성을 전혀 잃지 않았다는 사실은 불가사의입니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아주 고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던 시절도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그들의 신앙을 형성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고난과 시련이 사람들을 영적으로 단련시킨다는 사실은 신기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실입니다. 이런 일이 기계적으로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고난과 시련이 사람의 영혼을 피폐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래서 더 비열하고 세속적인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직하게 삶을 직면할 수만 있다면 고난과 시련은 분명히 영성에 이르는 토대입니다. 고통을 통해서 삶의 진수를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그것에 대한 실증입니다.
구약의 역사에서 가장 큰 시련은 바벨론 포로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더 정확히 말해 남(南)유대는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나라를 잃었습니다. 예루살렘이 초토화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이방인들에 의해서 완전히 짓밟혔습니다. 많은 민족 지도자들은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그들은 못 볼 꼴을 본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에게 충격이었습니다. 나라를 잃고 가련한 신세가 되었다는 표면적인 사실만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신앙의 문제가 더 심각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가나안 땅을 약속으로 받았습니다. 후손이 별처럼 많을 것이라는 약속도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여호와 하나님은 다른 그 어떤 신보다 뛰어난 분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믿는 자신들이 이방인들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더 이상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요즘도 그런 이들이 벌어집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가정에 갑자기 큰 시련이 닥치곤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이 불치병에 걸리기도 합니다. 이럴 때 사람들은 왜 이런 일이 하나님을 잘 믿는 ‘나 같은 사람에게’ 벌어지는가, 하고 신앙마저 흔들릴 수 있습니다. 바벨론 포로 시대에 그들은 완전히 자포자기의 심정이었을 겁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선포한 예언자들이 없지는 않았으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예언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50-7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대다수 사람들은 바벨론에 붙어서, 바벨론 체제에 적응해서 살아갈 방도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 벌어졌습니다. 바벨론이 페르시아에 의해서 패망하고, 그 덕분으로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의 신세를 면하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향해서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설교 본문인 사 65:17-25절에도 나옵니다.
일상과 창조
오늘 분문은 전체적으로 기쁨과 환희로 가득합니다. 바벨론 포로 귀환과 새로운 예루살렘 건설에 대한 꿈으로 부풀었을 테니까요. 18절에서 이사야는 이스라엘 백성이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19절에서는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즐거워하며 나의 백성을 기뻐’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도 기뻐하고 하나님도 기뻐합니다.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는 뜻이겠지요. 이사야는 이런 기쁨의 이유를 19b절 이후로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무엇을 기쁨의 이유로 생각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그 내용을 세 가지만 열거하겠습니다. 1) 우는 소리와 부르짖는 소리가 백성들 가운데서 들리지 않습니다. 2) 모두가 천수를 누릴 것입니다. 백 세에 죽는 자를 젊은이라고 부를 정도입니다. 3) 자기가 지은 집을 남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이고, 자기가 수확한 먹을거리를 남에게 빼앗기지 않을 것입니다.
위에서 열거한 세 가지 내용은 잘 보십시오. 별로 특별한 게 아닙니다. 시시해 보입니다. 자기가 노력해서 얻은 것을 자기가 먹고, 자기가 지은 집에서 자기가 산다는 것입니다. 백 세라는 말이 있지만, 그것은 모든 사람이 살만큼 산다는 뜻입니다. 별 것이 아닌 것 같지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어떤 상황인지를 염두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그들은 참혹한 전쟁을 겪었습니다. 패전국의 백성으로 살았습니다. 그들은 늘 울면서 지냈습니다. 전쟁에서 죽은 젊은이들과 노인들이 부지기수입니다. 모든 재산도 빼앗겼고, 먹을거리도 빼앗겼습니다. 그런 상황이 두 세대나 흘렀습니다. 더 이상의 고통과 시련이 없습니다. 바로 이 자리에서만 일상적인 내용은 정말 특별한 사건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에 찬 역사 경험이 하나님 신앙을 가능하게 했다는 앞서의 말씀이 바로 이것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지금 가장 낮은 자리에 내려가 있습니다. 그 자리는 생존의 차원입니다. 그 자리에서 공기는 생명의 현실들입니다. 그 자리에서 한 모금의 물은 생명 자체입니다. 그 자리에서 가족과 마주 앉은 식탁은 기쁨의 원천입니다. 거기서만 일상은 생명의 빛을 냅니다. 거기서만 일상에 깃든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눈에 들어옵니다. 고난, 일상, 창조신앙이 여기서 일치합니다.
이사야는 위에서 열거한 일상의 내용들을 말하기 전에 17절과 18절에서 하나님의 창조에 대해서 세 번이나 반복해서 언급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가 일상을 지켜주는 토대라는 뜻입니다. 창조에 대한 세 구절은 각각 중요합니다.
첫 번째는 이렇습니다.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하나님의 창조는 지난 것의 반복이 아닙니다. 늘 새롭습니다. 그 새로움은 이전 것을 기억할 필요가 없을 정도입니다. 하나님의 창조에 영혼이 열린 사람에게는 모든 세계가 새롭습니다.
두 번째는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으로 말미암아 영원히 기뻐하며 즐거워할지니라.”입니다. 하나님의 창조 행위만이 우리가 기뻐할 근거가 됩니다. 이런 말이 추상적으로 들리는 분들은 없겠지요. 자신의 능력에만 마음이 기울어진 사람들에게는 아마 그렇게 들릴 겁니다. 오늘도 태양이 떴습니다. 우리는 돈을 벌어야 합니다. 무엇이 더 본질적인 것일까요? 하나님의 창조만이 기쁨과 즐거움의 근거입니다.
세 번째는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운 성으로 창조하며 그 백성을 기쁨으로 삼고”입니다. 예루살렘이 바로 하나님에게 기쁨의 근원이 된다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유대인이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인간의 삶과 역사가 바로 하나님에게도 기쁨의 근원이라는 사실을 전하려고 한 것입니다.
세 구절이 조금 복잡해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말하는 중심은 하나님이 창조의 능력으로 새로운 삶을 허락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그런 능력을 소유하고 계신 분입니다. 거꾸로 그런 능력을 소유한 존재가 바로 하나님입니다. 이런 이사야의 메시지를 상투적인 거라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말을 건성으로 듣습니다. 사람들은 대개 자기가 원하는 것을 보장해주는 절대자를 원합니다. 사업도 잘 되고, 건강하고, 명예를 높이는 일들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취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가 컴퓨터로 무엇을 계산하고 놀이를 하듯이 하나님을 도구로 사용할 뿐입니다.
이사야도 사람들의 그런 욕구를 알기에 앞에서 제가 설명 드린 것처럼 일상적인 행복의 조건을 제시했습니다. 그들의 눈높이로 설교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상 자체가 우리 구원의 내용이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복지가 아무리 완벽하게 성취된다고 하더라도 구원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10억 원짜리 로또에 당첨되어도 그 순간에만 짜릿할 뿐이지 참된 행복, 참된 안식이 이르지 못한다는 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일상의 조건이 보장된다는 사실에서 중요한 것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가리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놓친다면 이사야가 말한 것은 바알 숭배와 다를 게 없습니다.
이사야는 유대인들이 이를 착각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무엇인지를 묵시문학적 상상력으로 설명합니다. 25절 말씀을 보십시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이 구절은 사 11:6-9절의 요약입니다. 적대적인 관계가 해체되는 세상입니다. 일상의 완전한 변혁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세상을 예상할 수 없으며, 그걸 기대하지도 않습니다. 기존의 질서에 길들여졌기 때문입니다. 그 질서를 강화하는 것으로만 만족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기독교인들은 타종교를 원수처럼 대합니다. 불교인들은 모두 지옥에 갈 거라고 공공연하게 떠듭니다. 어떤 교회 지도자들은 북한 정권을 마귀를 대하듯 합니다. 동성애자들을 신성모독자로 몰아갑니다. 마치 기독교가 중세기에 마녀사냥을 했듯이 특정 집단을 증오합니다. 사람은 자기와 다른 생각을 하는 대상을, 그래서 뭔가 낯선 대상을 불편하게 생각하기 마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는다면 그런 선입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수 있는 날을,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날을 우리가 기다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차원의 생명 사건입니다. 그것은 현재의 하늘을 늘리고 현재의 땅을 양적으로 늘리는 게 아니라 질적으로 새로운 하늘과 땅을 만드는 것입니다. 전에 아무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그런 세상입니다.
새 생명인 부활
하나님이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신다는 이사야의 메시지는 언제 현실이 될까요? 어느 때가 되어야 우리는 더 이상 생존을 위해서 상대방과 싸우지 않아도 되는 완전한 평화를 경험할 수 있을까요? 사실 원수 관계만이 아니라 우리는 가까운 사람들끼리도 싸우고 삽니다. 선의의 경쟁이라고 말하지만, 사실은 서로에게 상처를 내는 일이 많습니다. 요즘 대학생들끼리 우정을 찾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교회끼리도 경쟁합니다. 교인들끼리도 다툽니다. 심지어 부부사이에도 팽팽한 긴장이 그치지 않습니다. 이런 삶이 피곤하지 않으시나요? 이런 데서 벗어나서 완전한 안식에 거하는 때가 언제일까요? 그것이 가능하기는 할까요?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시간이 있으면 경쟁력을 키우는데 몰두하는 게 훨씬 현실적인 삶이 아닐까요? 저는 이 시간에 여러분들에게 이런 무거운 주제에 대한 구체적인 대답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대답을 드려도 별로 실감 있게 전달되지 않을 겁니다. 그뿐만 아니라 궁극적인 대답은 아무도 제시할 수 없습니다. 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새로운 생명이 인류 역사에서 일어난 한 사건을 전하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바로 그것입니다. 나사렛 목수 요셉의 아들 예수는 2천 년 전 유월절 전날에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삼일 만에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늘로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그는 세상의 마지막에 다시 오셔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실 겁니다. 바로 이 사실이 기독교 신앙의 요체입니다. 그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놓여 있습니다. 만약 부활이 없다면 기독교의 모든 가르침은 모래 위에 세운 집이 되고 맙니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의 교훈과 놀라운 치유 능력, 그리고 지난 기독교 2천 년 역사도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제자들의 환상이거나 사명감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라고도 말합니다. 빈정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냥 믿을 수 있는 현상이 아닙니다. 사람은 결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수는 없습니다. 이리는 어린 양을 잡아먹으려고 하고, 어린 양은 이를 보고 무조건 도망치려고 합니다. 그게 하나님의 창조 원리입니다. 그들 사이에 평화가 불가능하듯이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는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 당시에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심지어 제자들도 그걸 믿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빈 무덤과 부활 현현을 경험했는데도 부활을 믿기는 힘들었습니다. 믿지 못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만약 부활을 쉽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뭘 모르든지 아니면 자기 최면에 걸린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의 부활은 완전히 새로운 생명의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제 정신으로는 믿기 힘들 정도로 이질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이사야가 한 말을 기억하십시오. 이 창조 앞에서 이전 것은 기억되지 않고, 마음에 생각나지도 않습니다. 여러분이 어머니 자궁에서의 삶을 기억하지 못하듯이 부활 이전과 이후는 질적인 단절이 있습니다. 부활 이전과 이후가 완전히 상관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지금 우리의 삶이 부활 이후의 삶 못지않게 소중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다릅니다. 부활은 하나님의 새 창조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새 하늘과 새 땅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2010년 부활절입니다.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온갖 일들이 벌어집니다. 벌어지지 말아야 할 불상사도 끊이지 않습니다. 불안하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하고, 짜증스럽기도 합니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자라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기억해야 합니다. 그 창조의 능력과 신비 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그것의 진수가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의 부활로 우리는 새로운 생명을 약속으로 얻었습니다. 힘을 내십시오. 기뻐하십시오. (부활절, 4월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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