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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49: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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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469776 |
정용섭 목사
하나님의 ‘선택의 신비’
이사야 49:1-7, 주현절후 둘째 주일, 2011년 1월16일
구약성경에 나오는 핵심 사상 중의 하나는 선택, 또는 부르심입니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서 가나안으로 오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그를 선택해서 불렀기 때문입니다. 미디안에서 평범한 목자로 살아가던 모세가 출애굽의 사명을 감당하게 된 이유도 역시 하나님이 먼저 그를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도 모두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은 자신들을 선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이라는 사상을 이해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 어렵지 않지만 동의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셨다는 말은 그 이외의 민족은 선택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복음이 우리나라에 전파되기 전에 한반도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선택에서 제외되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걸까요? 이런 질문에 딱 떨어지는 대답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서는 이런 질문에 대해서 실증적인 대답을 제시하려는 게 아니라 그것과는 다른 어떤 영적 사실을 말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오늘 설교 본문인 이사야 49:1-7절이 그것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따라가겠습니다.
이사야는 49:1b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호와께서 태에서부터 나를 부르셨고 내 어머니의 복중에서부터 내 이름을 기억하셨으며” 이런 의미의 선포가 뒤로 계속됩니다. 3절에서도 “너는 나의 종”이라고 했고, 5절에서 여호와를 가리켜 “그는 태에서부터 나를 그의 종으로 지으신 이시요.”라고 했습니다. 마지막 절인 7b은 이를 다시 강조합니다. “이는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 신실하신 여호와 그가 너를 택하였음이니라.” 이사야는 하나님의 선택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표현합니다. 태와 복중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십시오. 태와 복중의 아이는 아무런 선택의 가능성이 없습니다. 의지를 행사할 수 없습니다. 젊은 남녀가 만나서 서로에게 마음을 주고 결혼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의 선택은 상황과 조건이 작용합니다. 선택받기 위해서 노력한 흔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선택은 그런 노력, 의지, 판단이 전혀 개입될 수 없는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행위입니다. 태와 복중이라는 말은 선택의 주도권이 존재론적이며, 그 주도권이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선택을 구원이라는 말로 바꿔도 됩니다.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업적으로 일어나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배타적인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간혹 타종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대다수의 한국 그리스도인들은 타종교의 구원 가능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합니다. 작년에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었던 ‘땅밟기’도 이런 생각에도 나온 겁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을 믿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할 것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은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신앙의 토대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 밖의 구원을 무조건 부정해야 하는 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일어난 구원 능력이 우주론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베드로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영으로 지옥에 내려가셔서 그곳의 영들에게 말씀을 선포했다고 합니다.(벧전 3:19)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은 모든 사람, 더 나아가 모든 피조물의 구원과 연관됩니다. 교회 안에 한정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능력을 축소시키는 일입니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 배타적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를 우리의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고유한 권능입니다. 이사야는 지금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선택이, 즉 그의 부르심이 이처럼 하나님의 고유하고 배타적인 행위라는 사실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사야의 선포를 낭만적인 것으로 보면 곤란합니다. 믿음 생활을 잘 해서 축복을 받았을 거야, 또는 축복을 받을 거야 하는 차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말하는 당시의 상황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별로가 아니라 아주 나빴습니다. 이사야 40장은 이름이 밝혀지지 않는 한 선지자의 예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기원전 6세기입니다. 이미 북이스라엘은 8세기 초에 아시리아에 의해서 멸망당했고, 이사야의 조국인 남유대는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그리고 대다수의 귀족과 학자들은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그 시대는 그야말로 암흑과 같았습니다. 자신의 조국이 이런 운명에 빠질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입니까?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선민이었습니다.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망한 것일까요?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전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반복해서 하나님의 뜻을 전달받았습니다. 이사야도 그런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이 헛수고가 되고 말았습니다. 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헛되이 수고하였으며 무익하게 공연히 내 힘을 다 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우상을 섬겼습니다. 결국 바벨론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모든 일들이 절망적으로 변했습니다. 하나님의 선민이 세상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근본적으로 회의적으로 보게 할 만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제 이사야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렇게 바꿔놓고 생각해보십시오. 말을 끔찍이 듣지 않는 자식이 있다고 합시다. 선생이라면 그런 학생이 있다고 합시다. 그 아이에게 도벽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 아이는 아무리 타일러도 듣지 않았습니다. 결국 소년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생 좀 해야 정신 차리지, 하면 되나요? 아니면 여전히 공자 왈 하면서 회개하라고 말해야 할까요? 이제 너와는 인연을 끊겠다고 윽박질러야 할까요? 경우에 따라서 다르게 처리해야겠지요. 지금 이사야의 심정은 이런 아이를 둔 부모나 교사와 비슷합니다. 당연합니다. 포로는 바로 감옥생활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허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높이신다고 말합니다. 도저히 꿈을 꿀 수 없는 일을 선포합니다. 5-7절에서 이를 자세하게 설명합니다.
5b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여호와 보시기에 영화롭게 되었으며 나의 하나님은 나의 힘이 되셨도다.” 아직은 영화롭게 되지 못했습니다. 아직은 하나님의 힘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곧 그렇게 될 것입니다. 6절은 포로들이 돌아올 것이며, 이스라엘이 이방의 빛이 될 것이고, 하나님은 이들을 통해서 땅 끝까지 구원을 베풀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놀라운 선언입니다. 이게 도대체 가능한 일인가요? 지금 그들의 처지가 어떤지를 먼저 봐야 합니다. 본문이 정확하게 말합니다. “사람에게 멸시를 당하는 자, 백성에게 미움을 받는 자, 관원들에게 종이 된 자”(7a)입니다. 이것은 사실적인 표현입니다. 당시의 이스라엘은 이런 상태였습니다. 이어지는 말씀을 보십시오. “왕들이 보고 일어서며 고관들이 경배하리니” 지금은 멸시당하는 포로 신세지만 나중에는 세상의 힘 있는 이들로부터 기립 박수를 받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당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사야의 이런 말을 귀담아 들었을까요? 그런 사람도 있었겠지만, 그렇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이런 말을 누구나 다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패배주의와 냉소가 팽배한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메시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사야는 몽상가인가요? 극단적인 이상주의자인가요? 그는 무슨 근거로 이스라엘이 세상의 빛이 되고 세상으로부터 경배를 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걸까요?
근거는 오늘 설교의 주제인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것이 분명하다면 이스라엘의 회복은 시간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역사의 주관자이시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선택이 분명한 사실이냐 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을 증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여기에는 영적인 시각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알아듣는 사람이 있었고, 알아듣지 못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성과 인격으로 이런 능력이 주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이것마저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것은 신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은 신비이고, 그것을 깨닫는 것 또한 신비입니다. 다르게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신비라고 해서 말도 되지 않는 것을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구원은 신비이지만, 말이 안 되는 신비가 아니라 말이 되는 신비입니다. 지금 우리가 여기서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사실을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살아온 삶의 한 귀퉁이에서 약간의 방향이 바뀌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들었지만 그중에 우리의 영혼이 공명되었다는 사실도 신비입니다. 솔직하게 자신의 삶을 통찰한다면 그럴만한 자격이나 능력이 없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신비 아닌 것이 없습니다. 여기 물 한 컵이 있습니다. 이것이 왜 이 순간에 이 자리에 있을까요? 컵 안의 물은 알래스카의 빙하가 녹은 물일지도 모릅니다. 이사야는 자신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사실을 역사에서 볼 수 있었습니다. 그의 영적인 눈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사야의 신탁은 그대로 성취되었을까요? 부분적으로는 성취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 생활을 끝내고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성취되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왕과 고관들이 경배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다윗과 솔로몬 시대의 명예를 찾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 뒤로 패망의 길을 다시 갔습니다. 그들이 세상에 빛으로 나타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민족이라는 사실을 증명해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사야의 예언이 근본적으로 실패했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이사야의 신탁은 다른 방식으로 성취되었습니다. 이사야가 미처 알지 못하고 선포한 ‘이방의 빛’은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앞에서 인용한 6b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이사야는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과 역사 섭리는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주현절 둘째 주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 신성이 나타난 순간을 기리는 절기입니다. 예수님은 원래 선재적으로 하나님이시지만 우리에게 하나님으로 나타난 순간이 있습니다. 이 절기는 우리에게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신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초월적인 하나님이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오셨다는 것보다 더 큰 사건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사야가 신탁을 받아 선포한 것처럼 예수를 ‘이방의 빛’으로 택하셔서 구원 경륜을 실행하셨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요? 얼마나 신비로운 일인가요?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요? 요즘 날씨가 춥습니다. 구제역으로 대한민국의 돼지와 소들이 무자비하게 살처분되고 있습니다. 주식값은 올라가지만 서민들의 생활은 추위처럼 밑으로 떨어지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힘든 일도 많을 겁니다.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빛이십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신비로운 구원 사건입니다. 그를 찬송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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