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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께서 부르실 때에

이사야 김남준 목사............... 조회 수 2228 추천 수 0 2011.10.20 10:4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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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6:1 
설교자 : 김남준 목사 
참고 :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76 주께서 부르실 때에  2005-05-04

 

<이사야를 선지자로 부르시다> 웃시야왕의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 (사6:1)

 

성도라 해서 다 같이 똑같은 성도가 아니듯, 선지자나 사도도 다 같지 않고 전하는 말씀의 깊이에 있어서 차이가 있었다. 그러한 점에서 본문의 이사야는 예레미야나 에스겔 등과 같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 깊이를 가졌던 선지자였다. 선지자들마다 다른 강조점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이사야는 특별히 하나님 영광의 신학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사무침이 그 성경책에 온통 배어있다. 이것은 그의 소명의 체험과 관련이 있다. 이것과 관련되어 신약에서도 한 가지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바울과 사도바울의 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구원, 곧 기독론과 구원이 중심적 전파내용이었으나, 사도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강조하였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에 자기의 외아들을 보내신 것도 다 사랑의 동기였다라고 하는 시각을 가지고 구원의 역사를 풀어나가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품을 강조함으로, 그 사랑이라고 하는 신학적 구도를 가지고 하나님의 모든 창조와 구속의 모든 사역을 풀어간 것이다. 이렇듯 각각의 다른 시각으로 하나님의 구원역사를 봄으로 말미암아, 눈부시며 찬란하게 다가오는 하나님의 구원계시의 다양성을 만나게 된다.

 

사도바울이 사울이었을 때, 다메섹에서 예수를 만난 그가 그리스도였음을 알고 나서 충격을 받았다.
예수가 그리스도시며 그를 믿는 자만이 구원에 도달한다는 사실이 그에게 최고의 충격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일생동안 예수그리스도 곧 구주의 유일성 전파에 강조점을 두었다.
구약의 호세아도 마찬가지였다. 타락한 한 여자를 물질을 주면서까지 계속해서 데려왔던 것은 그의 소명과 연결된다.
타락한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절절한 사랑을 뼛속깊이 타들어가는 심정으로 느끼며, 일생동안 여호와께로 돌아가자라고 외쳤던 것이다.

 

이렇듯 이사야도 소명 체험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는 천사들 가운데 계신 놀라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다.
한없이 비천하며 티끌과 같은 인간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뵈옵는 것이다. 일찍이 경험한 바 없는 그 임재는 곧 영광이었다. 충만한 영광이 가득한 그 빛을 받으면서, 선지자는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된다. 이 하나님의 임재의 찬란한 영광 앞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든지 다음의 두 가지의 부인 할 수 없는 효과가 있다.

 

첫째는 자기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크기와 위대함에 있어 하나님은 끝없이 무한, 영원, 위대하고 광대한 분이시며, 자신은 그 하나님 앞에서 마치 바람에 날리는 티끌과 같은 존재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것이 영광이 신자에게 가르쳐주는 경험이다. 이를 깨달은 사람은 절대 교만 할 수 없다. 즉, 하나님을 만나면 교만해 질 수 없는 것이다. 큰 산 앞에서도 인간이 아무것도 아님을 느끼는데, 심지어 끝이 없으신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이름을 알 수 없는 벌레 하나보다 자신이 나은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무한 앞에서의 유한은 그것이 큰 유한이든 작은 유한이든 상관없다. 상대적인 것이 아무 의미가 없다. 모두 아무것도 아님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인간인가를 알게 된다.
전자가 존재와 관련된 것이라면, 두 번째의 후자는 도덕과 관련이 있다. 자신 옷의 더러운 것을 빛 가운데로 나갔을 때 확인되어지듯이, 찬란한 영광 앞에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죄인인가를 깨닫게 된다. 영광의 효과, 그 영광의 빛이 비치기 전에는 자신의 결점이 무엇인지 모른다. 참 괜찮다라고 생각했으나, 그러다 경광의 빛이 비추게 되면, 그때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이 생각나 그 빛 앞에 자신이 너무나 불결한 죄인임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자신이 얼마나 부족하고 더러운 죄인인가 깨닫게 되어 겸손해 지게 되는 것이다.

이사야 선지자가 바로 그 영광의 빛 가운데 그 두 가지를 경험한 것이다.
자기는 무엇보다도 하찮은 존재이며 더러운 존재임을 깊이 경험하게 된 것이다.
사실 깊은 영광의 경험은 놀라운 축복인데, 오히려 선지자는 순결하고 위대하신 주님 앞에 자신이 너무나 더러워 견딜 수 없다라며 두려워 떠는 상태에 들어간다.
우리는 이런 상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주님을 만난 사람의 표가 바로 이것이다.
사울이 빛으로 나타나신 주님을 만났을 때, 그 찬란한 영광의 임재 앞에서 위와 똑같은 두 가지를 경험했다. 그 탁월하심 앞에서 쓰레기와도 같은 자신을 깨달아, 다 부서지고 무너진 상태로 들어감으로 무엇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는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먼저 일어나야 할 상태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을 위해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고 주님을 위해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애쓴다. 그러나 정말 중요한 문제는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고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것이 진짜 하나님의 영광을 돌리고자 함과 맞아 떨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비젼은 품었으나, 그 분 앞에 무너져 본 적이 없는, 즉 그 앞에서 비천하기 이를 때 없는 더러운 존재라는 자기 인식이 없기 때문이다.

 

당신은 무너져 본 적이 있는가! 이사야가 선지자로 세움을 받기 전, 그는 철저히 무너진 사람이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라고 하면서, 자신 앞에 나타난 찬란한 임재의 영광과 자신의 미약하고 비참한 존재사 이에 있는 이 무서운 존재적인 격차, 곧 도덕적인 격차로 인해 탄식하고 통곡하게 되었다.

 

그 때, 천사가 와서 제단 숯불로 입술에 대니, 그 입술이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그것이 입술이었던 이유는 그가 선지자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의 제유적 표현으로 두 가지를 의미한다. 하나는 태워버리는 심판을 의미하며, 그 다음은 그렇게 함으로 정결케 됨을 뜻한다. 그러한 심판과 정결케 됨의 역사를 통해서 이사야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하늘에서 놀라운 음성이 들려 이제 네가 사함을 받아 깨끗하게 되었다 하시고, 그러면서 들려오는 음성이 오늘 본문의 말씀이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여기서 놀라운 헌신의 소명이 주어진 것이다.

은혜의 경험 안에는 이미 소명이 포함되어 있다.

 

글서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여 자신의 비참함을 깨닫고, 이 심판과 죄사함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를 겪고 나니까 누구에게도 들려지지 않던 하나님의 음성이 선지자에게 들려진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보여주시는 것은, 그 은혜의 영광을 많이 보여주시어 사람으로 깨어나게 하시는 것은 역설적으로 할 일이 많기 때문에 이사야 선지자처럼 부르시고 계시다는 것이다.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주님을 믿고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된 순간 다시 그 자리로 파송된 것이다. 다시 말해, 영적으로 주님을 믿은 순간 우리가 머물렀던 그 자리로 파송된 것으로, 옛날의 그 가정, 직장, 교회가 아니라 은혜 받은 그 순간 있는 그 자리로 다시 파송된 것이다.
이 같은 하나님의 심정과 상관없이 그냥 이 세상에서 살았고 일하고 그러다 죽은 사람은 주님을 한 번도 섬긴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은혜 안에는 반드시 엄중한 소명이 내표되어 있다.
여러분 삶의 자리를 돌아 봐라. 거기가 어디든지 간에 주님의 향기가 필요 없는 곳이 없다. 망가진 세상이 어디에건 없으며, 고쳐지지 않아도 될 영역이 어디 있는가.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 파송시키시는 것이다.
거기에서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하시고 그 앞에서 자신의 비참을 깨닫게 하시어, 사죄의 구속 은혜를 베푸신 것은 여기 이곳으로 보내기 위함이셨다.

그렇다면, 그 파송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사야 선지자가 애끓는 심정으로 순교에 이르는 순간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온 맘과 온 뜻을 다해 죽기까지 외치는 가운데 그의 중요한 중심의 기도는, 찬란한 영광을 비추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이름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시고 계심을 가슴아파하며, 자신이 그 영광스러운 분 발 앞에 엎드려 인정했듯 세상 사람들도 인정하길 바랬던 것이다.
이렇게 소명 받은 자의 삶은 반드시 헌신적이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며 무너지고 망가지고 고장 나기 시작하며, 파괴된다.
이러한 가장 큰 보본을 예수님께서 가장 잘 보여주셨다.
특별히 예수님의 소명의 길은 고난의 가시밭길이었다.
순종하는 신앙생활이 고통일 없을 것이라는 생각은 사행심어린 신앙심이다.
주님을 의지해도 괴롬을 당할 때가 있다.
그래도 하나님이 이길 힘을 주신다.
위로가 고통보다 크면 살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순종하며 길을 걸어가도 고난이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마면 안 된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가 무어라 하시든 ‘아멘’ 이요 충성된 종으로 일생을 사셨던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신의 자리는 어디인가. 어디였는가.
보내려한 자리에 내가 없으면 그 자리는 비어 있다.
또한 우리가 마음 드렸다 다시 찾아 온 그 자리가 비고 나니까 그 자리에 원수들이 점령해 버리게 된 것이다.
거기 내가 지금 죽기 싫어하는 그 자리에서 주님이 죽으셨다.
나의 몸과 맘 받쳤다가, 다시 찾아 온 그 자시에서 주님이 피 흘리신 것이다.
처음 주님을 만나 눈물을 흘리며 주님이 날 여기 세워주셨다고 고백하던 그 자리, 섬김이 있고, 십자가의 고난이 있던 그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잘하고 못하고는 주님이 세워주신 것보다 더 큰 것이 아니다. 회개하여, 주님이 우리를 세워주셨던, 은혜를 주셔서 우리에게 감당하라고 하신 그 자리로 다시 가서, 훔쳐와 버려두었던 몸과 마음을 다시 돌려 드릴 때, 주님께서 사랑스럽게 보시며 진정으로 기뻐하신다. 2005-0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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