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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당하신 십자가 고통

이사야 조용기 목사............... 조회 수 2855 추천 수 0 2011.11.09 2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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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53:1-12 
설교자 : 조용기 목사 
참고 : 2011.10.2 주일설교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야훼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중략)…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 이사야 53장 1∼12절

 

십자가 고통은 육체적·정신적·영적인 삼중고
예수의 희생적인 공생애는 우리를 위한 것
주님 고난 의미와 대가 알고 모두 누려야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격심하고 무자비하고 참담한 고통이 대속의 고통이라면 그 대속의 고통의 대가를 우리가 반드시 누려야 합니다.

 특히 십자가 처형은 고대로부터 사용되던 형벌로 로마 제국에 도입돼, 4세기까지 가장 잔인하고 치욕적인 사형 방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당하신 십자가의 격심하고 무자비한 고통이 아무 대가가 없고 헛되이 당한 것이라면 얼마나 처참한 패배입니까? 만약 그렇다면 정말 비참하고 참담하며 의미 없는 무기력한 고통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십자가 고통을 당하셨으면 반드시 그 대가를 우리가 취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원하든 원치 않든 예수님께서 갖은 형벌과 멸시 그리고 십자가의 고통을 통해 쌓아놓은 그 열매를 거두고 누려야 할 것입니다.

 

 1. 예수님이 당하신 육체적 고통

 예수님의 고난을 다룬 영화는 많이 있습니다. 특히, 멜 깁슨 감독이 제작한 ‘더 패션 오브 더 크라이스트(The Passion of the Christ)’라는 영화를 보고 너무나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 영화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부터 십자가에 달리셔서 숨을 거두시기까지, 예수님의 생애 마지막 열두 시간을 상세하게 영화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 군인들에게 마치 동물처럼 매를 맞았는데, 그들의 채찍 끝에는 쇠갈고리가 달려있어 그것으로 때리면 채찍에 온몸에 감기고 쇠갈고리가 몸을 파고들어가 잡아 당기면 몸이 쫙쫙 찢겼습니다. 로마시대에는 원래 사형수를 때릴 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로 서른아홉 번을 때린다고 합니다. 그 후에 친히 십자가를 짊어지시고 갈보리 언덕에 오르셔서 손과 발에 대못을 박고 십자가에 달려 온갖 조롱을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6시간 동안 매달려 있다가 최후에 그들이 와서 옆구리에 창을 찔러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도저히 인간의 말로는 형용하기 어려운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왜 고통을 당했나요? 우리 때문에 당한 것입니다. 당신 자신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죄의 형벌을 대신 짊어지고 고통을 당하시고 우리들이 당해야 될 죄의 대가를 다 청산해 버린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죄까지도 다 짊어지셨습니다. 예수님은 2000년 후에 우리가 미래에 지을 죄도 주님이 먼저 모두 걸머진 것입니다. 온 인류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매를 맞고 피를 흘려서 청산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53장 4절로 5절은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고 기록합니다.
 이 말씀을 이제 ‘우리’라는 말을 고쳐 ‘나’라고 바꿔 읽기 원합니다. “그가 찔림은 ‘나’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나’의 죄악 때문이라” 이처럼 내 허물, 내 죄악 때문에 주님이 그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깊이 감사드려야 됩니다. 우리들의 육체의 질병이 가져오는 몰인정하고 무정하며 살인적 아픔을 주님이 대신하기 위해서 채찍에 맞으신 것입니다. 즉, 다른 사람은 느끼지 못해도 예수님은 우리의 그 고통을 함께 느끼시고 대신 채찍에 맞음으로 질병을 청산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8장 16절로 17절에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누구에게 대신 맡긴 것이 아니라 친히 담당하셨고 우리의 병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모두 예수님이 고난당하여 청산하고 담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이 우리의 질병의 고통을 잠재우지 못하면 헛된 고통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고통은 그 대가를 반드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우리가 그 대가를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내가 나음을 입어야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받지 아니하면 예수님이 헛되이 고통당한 것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고통을 가치없게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그 고귀한 예수님의 고통에는 그에 합당한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 나아야 그 고통이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중요한 문제입니다. 하나님께 징계를 받으시고 저주를 받아 나무에 매달린 대가로 우리를 저주와 절망에서 건져내셔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예수님의 고난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담과 하와가 받은 저주의 대가를 십자가에서 대신 짊어지고 청산한 것입니다. 저주를 청산해야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받아 이땅에서 가시와 엉겅퀴를 제하고 이마에 땀을 흘리지 않고 살수가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13절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에 의하면 저주받은 사람은 나무에 매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왜 저주를 받습니까? 그러므로 우리의 저주를 대신 짊어졌기 때문에 예수님의 고난과 저주의 대가로 우리가 축복을 받아야 됩니다. 아브라함의 복을 받아야 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피와 땀을 흘려서 노력을 해서 사업을 일으켜놓고 그 사업의 열매를 자식에게 하나도 안주고 헐벗고 굶주리고 교육도 안 시킨다면 부모의 수고와 고생은 헛된 것 아닌 것입니까? 자식 잘되기를 원하시지요? 우리가 수고하고 고통당하면 자식을 위해서 그 수고와 고통의 열매를 다 나누어주면서 “얘야! 너를 위해서 내가 이렇게 고생하는데 공부 좀 잘하고 좋은 사람이 되어라!” 이렇게 부탁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내가 너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저주를 대신 짊어지셨으니, 너희는 모든 일에 항상 넉넉하여 착한 일을 넘치게 하라!” 그렇게 말씀할 것입니다.

 

 2. 예수님이 당하신 정신적 고통

 이사야 53장 7절로 8절은 예수님께서 당하신 정신적인 고통을 말씀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

 마땅히 형벌 받을 우리를 대신해서 예수님은 고통을 당했는데 육체적 고통만 당한 것이 아닙니다. 정신적으로도 큰 고통을 당한 것입니다. 그 고통의 대가로 반드시 믿는 자는 용서하시고 의롭다 칭하시는 은혜를 주려고 주님께서는 결정하신 것입니다.

 로마서 3장 23절로 24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값없다’는 말을 우리가 잊어서는 안됩니다. 값은 예수님이 지불했기 때문에 우리는 또 지불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믿음으로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값을 지불했습니다. 2천년 전에 지불했습니다. 우리는 공짜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장 30절에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 지혜를 주시옵소서. 의로움을 주시옵소서. 거룩함을 주시옵소서. 구원을 주시옵소서하고 믿음으로 취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주님께서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 때문에 절대 고독, 절망의 고통의 대가로 화해와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버렸습니다. 죄인과 대화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버렸습니다. 십자가에서 절대적인 고독과 괴로움을 당한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 고통을 청산하므로 우리 죄인들이 와서 하나님 찾고 하나님을 모실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0절은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죽음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했으니 이제 살아난 예수님이 그 가운데 계시므로 더욱 구원은 문제없이 받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절망적인 죽음의 고통과 공포를 당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인간들이 죽음의 공포에서 허덕일 때 그 죽음에서 놓아주기 위해서 대신 죽음을 걸머지고 죽음의 공포를 다 당한 것입니다. 우리가 죽을 때 두려움 없이 평안하게 죽을 수 있는 은혜를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히브리서 2장 14절로 15절에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 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라고 말씀합니다.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고 협박 공갈하는 마귀를 없애버렸습니다. 마귀를 무력화시켜 버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평안하고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 이 세상에서 저 영원한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3. 예수님이 당하신 영적 고통


 마태복음 27장 39절로 42절에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육체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뿐 아니라 영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얼마나 모욕감을 느꼈겠습니까? 그런 모욕을 당하고 영적인 괴로움의 대가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확증을 얻을 수 있도록 ‘성령’을 주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을 주셔서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인케 하셨습니다. 로마서 8장 14절로 16절에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시나니”라고 말한 것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고 피와 DNA가 아버지와 아들을 증명하고 연결고리가 되는 것처럼 성령은 하나님과 우리 믿는 사람들의 영적인 DNA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십자가에서 마지막 기도가 거부당했습니다. 마태복음 27장 46절에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 말씀에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주님 이름으로 구하면 우리가 응답을 받을 수 있는 은혜를 베풀기 위해서 주님이 그 고통을 대신 짊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4장 14절에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기도 응답 못 받는 고통을 대신 짊어졌으므로 너희는 이제 무엇이든지 내 이름으로 구하라 내가 중보를 써서 응답받도록 해주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 인류의 모든 죄를 걸머지고 아버지로부터 버려졌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를 다 지불할 때까지 그는 죽음의 형벌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 고통을 당한 것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 이름으로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갈 수 있으며 버림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온 세상 다 날 버려도 주 예수 안버린다”는 찬송가의 가사처럼 버림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53장 11절로 12절에 “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 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 나의 의로운 종이 자기 지식으로 많은 사람을 의롭게 하며 또 그들의 죄악을 친히 담당하리로다 그러므로 내가 그에게 존귀한 자와 함께 몫을 받게 하며 강한 자와 함께 탈취한 것을 나누게 하리니 이는 그가 자기 영혼을 버려 사망에 이르게 하며 범죄자 중 하나로 헤아림을 받았음이니라 그러나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며 범죄자를 위하여 기도하였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죄와 범죄를 대속해 주시고 기도해 주시므로 이제는 우리가 언제나 주님께 부르짖으면 응답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환영받고 영접 받는 사람들이 되어 어깨 펴고 주님 앞에 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의 대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이 되고,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원수된 담이 헐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 자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주안에서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써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화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장 14절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자기 육체로 담을 헐어버리고 또 우리가 우리 형제, 우리 자매 이웃과의 원수된 것을 당신의 몸을 깨어서 담을 허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가장 슬퍼하는 것은 자신이 피로 산 형제간인 우리 성도들이 화목하지 못한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기를 때 자식들끼리 싸우는 것이 제일 마음이 괴롭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서로 미워하고 다투고 시기하고 질투하면 하나님 가슴에 못을 박고 하나님의 마음을 할퀴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에게 있어 못나도 내 자식, 잘나도 내 자식입니다. 못났다고 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버리고 잘났다고 해서 끌어안지 않습니다. 오히려 못난 자식 더 불쌍히 여기사 끌어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용서하고 ‘하나님 때문에’ 사랑해야 됩니다. ‘나’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 때문이라면 내가 얼마든지 미워할 수도 있고 용서 못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아니라, ‘하나님’ 때문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용서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 행함에 대한 결정은 나의 권리가 아닙니다. 내가 싫다고 싫어할 수도 없고 내가 좋다고 특별히 그 사람만 좋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너희가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시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몸을 찢어 자신을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의 죽음은 누구 죽음입니까? 내 죽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부활도 내 부활, 예수 승천도 내 승천, 예수 천당도 내 천당’입니다. 이제 예수님과 우리는 하나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우리의 죄와 허물, 질병과 저주, 죽음을 청산해 버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열매를 누려야 주님의 고통을 가치 없게 만들지 않습니다. 용서주기 위해서 고난당했으므로 용서받은 우리는 의인이 됐고 허물을 제하셨으므로 거룩한 성령을 모셨습니다. 저가 채찍에 맞았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으며, 저가 저주를 받았으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복을 받았습니다. 저가 죽었으므로 우리는 삽니다. 당연한 일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찬을 대할 때마다 느껴야 될 것은 잔을 마실 때 ‘이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흘리신 피다. 내가 그 피를 마신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아무 의미 없이 그 보혈을 마신다면 마시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좋은 하나님이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면 좋은 일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내가 온 것은 너희로 생명을 얻게 하려 풍성히 얻게 하려 왔다”고 말씀하셨으니 그의 살을 먹고 그의 피를 마셔서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마땅히 좋은 일이 일어날 줄로 믿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은 요한삼서 1장 2절에서 “사랑하는 자여 내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에 잘되며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고 말씀 합니다. 그렇게 간절히 원하는 심정으로 우리를 위해 몸을 찢고 피를 흘려주셨으니 오늘 그 대가를 우리의 믿음으로 다 받아 누리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의 하나님! 우리의 죄를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당하신 고난과 십자가의 육체적, 정신적, 영적인 고통을 기억합니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듯 예수의 승리와 예수의 부활이 우리의 승리와 부활이 된 것을 믿습니다. 우리가 세상에 살면서 그 거룩한 죽음의 대가를 누릴 수 있는 믿음을 소유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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