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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과 복음

이사야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136 추천 수 0 2012.01.07 12:2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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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61:1-9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562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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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사람과 복음

이사야 61:1-9, 대림절 셋째 주일, 2011년 12월11일

 

오늘 설교 본문인 사 61:1-9절은 원래 익명의 선지자에 의해서 선포된 말씀입니다. 편의상 신학계에서는 그를 제3 이사야라고 부릅니다. 그의 활동 시기는 기원전 530년 어간입니다. 기원전 6세기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치욕의 시기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처하던 그들이 기원전 587년에 바벨론 제국에 의해서 멸망당했습니다. 그리고 왕족을 비롯해서 수많은 지도급 인사들이 자그마치 50년 이상이라나 포로 생활을 했습니다. 바벨론을 제치고 근동에서 새로운 국제 헤게모니를 쥔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칙령으로 포로 생활을 끝내고 고국의 수도 예루살렘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전도 개축하고, 그동안 멈췄던 제사도 드려야 했고, 율법도 다시 체계를 잡아야 했습니다. 다윗 왕조의 정통성을 회복해야만 했습니다. 이는 마치 해방 전후시기에 한민족이 처한 상황과 비슷합니다. 포로 귀환 이후 수년이 세월이 지났지만 원래 계획했던 일들이 지지부진했습니다. 개혁의 열정만 뜨거웠지 성과는 없었습니다. 낙심하고 있던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제3 이사야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그 내용의 한 부분이 오늘 본문입니다.

 

이사야는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라는 말로 말씀을 시작합니다. 이게 무슨 뜻인지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설명할 수는 있지만 경험하기는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경험한 사람만 알 수 있는 어떤 영적 사태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사과를 먹어본 사람과 먹어보지 못한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먹어본 사람이 아무리 설명해도 먹어보지 못한 사람은 대충 그런가보다 하고 생각할 뿐이지 사과 맛을 실제로 느낄 수는 없습니다. 시인의 언어 경험과 비슷합니다. 시인들은 자기가 시를 썼다고 말하지 않고 언어가 자기에게 왔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시인은 시를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처럼 구약의 선지자들도 하나님 말씀을 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들의 말씀 경험을 가리켜 신탁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사야는 외치지 않으면 안 될 어떤 메시지를 경험한 것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 역사에서 하나님 말씀으로 살아남아서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었습니다. 그가 경험한 신탁의 내용은 무엇일까요?

 

가난한 자

 

1b절에 그 대답이 나옵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 뒤로 가난한 사람들에 포함되는 사람들이 열거됩니다. 마음이 상한 자, 포로 된 자, 갇힌 자들이 그들입니다. 이사야는 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고, 포로 된 사람에게 자유를 주고, 갇힌 자를 해방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2절은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 특정한 날을 언급합니다.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하나님의 ‘보복의 날’입니다. 은혜와 보복은 서로 대립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나 이사야는 그것이 결국 하나라고 말합니다. 억울하게 갇힌 자가 해방되는 일은 그런 억울한 일을 행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는 것과 병행합니다. 지금 이사야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로부터 당한 고통을 말하는 중입니다. 예루살렘은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성전도 파괴되고, 성전의 집기는 강탈당했습니다. 지금도 다를 게 없지만 고대 시대에 전쟁에서 진 나라는 모든 수치를 감당해야만 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죽는 것은 물론이고, 재산도 빼앗기고, 가정도 해체됩니다. 50년 이상 포로 생활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이제 이사야는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어 이스라엘의 원수를 갚으시고, 슬픔 가운데 빠져 있던 이스라엘을 위로하실 거라고 외칩니다. 아직은 그런 때가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곧 그런 날이 올 겁니다. 이런 이사야의 신탁을 이해하려면 가난한 사람들도 대변되는 이들의 심정을 구체적으로 알아야 합니다.

 

요즘 온 세계가 빈부 격차 문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는 미국의 월가 시위입니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의 논리는 간단합니다. 부자들을 더 부자가 되게 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더 가난하게 만드는 경제 구조를 바꾸라는 겁니다. 이런 문제는 부자들 스스로 세금을 올리라고 말하는 미국보다 대한민국이 더 심각합니다. 지금의 이명박 정권에 들어서서 상황이 훨씬 나빠졌습니다. 국내외에서 빈부 문제가 뜨거운 이슈로 부각되는 최근에도 정부는 부동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에게 유리한 법률을 제정했습니다. 종합부동산 세의 폐지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법에 따르면 부동산을 매매할 때 이전에 4억 원의 세금을 내야 할 사람이 2억 원만 내도된다고 합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에나 가난한 사람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문제는 상대적 박탈감의 만연입니다. 그것이 사회구조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안철수 서울대 교수가 지금 정치계에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한국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그분이 감당했고, 또 앞으로 감당해야 할 모든 기대가 큽니다. 다른 한편으로 그분이 서울시장 출마 운운한 이후로 그분이 대주주로 있는 회사의 주식이 6배로 뛰었다고 합니다. 몇 천 억 원을 벌었다는 말이 됩니다. 부도 직전의 금융 회사가 세금으로 기사회생한 뒤에 은행장을 비롯해서 이사들의 연봉은 천문학적으로 뛰었습니다. 대학총장들의 연봉과 식당 종업원의 월급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납니다. 총장의 일과 식당 일이 그렇게 큰 차이가 나는 걸까요? 제가 보기에 거기서 거깁니다. 식당 일이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총장은 연봉 5천만 원을 받고, 식당 아주머니들은 연봉 4천만 원 정도를 받는 사회는 불가능할까요?

 

한국교회는 가난과 부의 불균형 문제를 나이브하게 대합니다. 그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가난의 문제를 그리스도교 신앙과 무관한 것으로 여깁니다. 성속 이원론에 근거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은 순전히 거룩한 것에만 관심을 보여야 한다는 겁니다. 이게 어려운 문제입니다. 교회는 정치 집단도 아니고, 경제 집단도 아니고, 종교적 동호인 집단도 아닙니다. 종말론적 메시아 공동체입니다. 우리가 직접 나서서 정치, 경제, 복지 문제를 다룰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존엄성이 파괴되는 그 현상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습니다. 남북 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고, 삼천리반도 금수강산이 인위적으로 파괴되고, 경쟁력만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서 결국 삶의 질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이 상황을 모른 체 할 수 없습니다. 모른 체 하는 태도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근본적으로 훼손하는 일입니다. 독일 교회가 그런 태도를 보이다가 히틀러의 만행에 협조하게 되었고, 한국교회도 지난날 군사독재를 묵인했습니다. 모든 독일 교회와 모든 한국교회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대형 주류 교회가 그렇게 했습니다. 독일교회는 역사가 지난 뒤에 과거를 뼈저리게 반성했지만, 한국교회는 그런 반성도 없었습니다.

 

둘째, 한국교회는 가난 문제를 순전히 구제의 차원에서만 접근합니다. 교회가 사회봉사와 구제에 나서야 한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실제로 한국교회는 그런 일에 다른 종교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나섰습니다.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 목사님은 평양에 어린이 심장 병원을 세웠을 정도입니다. 지난 IMF 이후로 여러 교회가 노숙자 및 결식자를 위한 밥집을 운영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교회가 구제 기관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밥을 굶는 근본원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고 그들에게 먹을 거를 제공하는 것으로 교회의 대사회적 역할을 다 한 것은 아닙니다. 남북관계의 긴장을 녹여서 국방비의 30%만 줄일 수 있다면 구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교회가 경쟁만능, 경제만능이라는 신자유주의 귀신을 쫓아낼 생각을 하지 않고 그 귀신이 저질러놓은 뒤치다꺼리만 한다면 악령의 권세를 너무 안일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역사 패배주의, 냉소주의에 빠져 있던 기원전 6세기 예루살렘 사람들을 향해서 가난과 눌림으로부터의 자유와 해방을 선포한 이사야의 예언을 피상적으로 대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사야 예언의 성취

 

이사야의 이 신탁은 이스라엘 사람들만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놀라운 말씀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이 공생애 초기에 회당에서 하나님 말씀을 전하신 것으로 보도합니다. 예수님은 고향인 나사렛에서 회당에 들어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 구절이 바로 오늘 설교 본문인 이사야 61:1절 이하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이게 무슨 뜻일까요?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씀이 어떻게 이루어졌다는 것일까요? 예수님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의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일까요? 그건 말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모두가 가난을 면할 수는 없습니다. 이사야의 생각과 예수님의 생각 사이에, 더 정확하게는 이사야의 생각과 누가복음 기자의 생각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는 걸까요?

 

이사야는 가난한 사람이 가난을 면케 될 것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신탁을 전한 게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그런 일이 실제로 일어나지는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은 계속 패망의 길을 갔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습니다. 설령 이스라엘이 번듯하게 잘 살게 되었다고 해도 구원이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최고의 복지가 실현된 사회를 상상해보십시오. 거기서도 또 다투기도 하고, 절망하기도 하고, 허무에 빠지기도 합니다. 모두가 가난을 벗어나려고 하지만, 가난을 벗어난 뒤에는 더 큰 부를 차지하려고 하지만, 그것을 해결했다고 해서 우리의 삶이 해결되는 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60년대와 지금을 비교하면 알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은 얼마 전에 수출 1조 달러를 달성했다고 합니다. 60년대에 비해서 수천 배 이상의 수출 액수입니다. 60년대에 비해서 수천 배 행복할까요? 티베트보다 우리가 수십 배 잘 살 텐데, 그만큼 행복할까요?

 

누가복음 기자는 이사야의 예언을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해석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 전파된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곧 예수님이 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이냐 하는 질문과 직결됩니다. 여기서 가난한 사람은 단순히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사회로부터 열등한 사람으로 낙인찍힌 이들을 가리킵니다.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입니다.(눅 4:18) 이들에게 예수님이 복음인 이유는 예수 사건이 모든 업적 의로부터의 해방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지는 생명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업적을 남겨야 한다는 중압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집니다. 예를 들어, 학생들을 수능시험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인간됨으로 평가하는 제도가 있다면 점수가 낮은 학생들에게 이 제도가 복음인 것과 같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대림절 셋째 주일입니다. 내세울 게 없는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이신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을 기리는 절기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날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모든 업적 의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가난을 저주로 여기는 악한 영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자기의 능력을 드러내야만 생명을 얻을 것처럼 달콤하게 속삭이는 마귀의 궤변을 쓰레기통에 넣으셨습니다. 세상살이에 마음을 놓으십시오. 가난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업적이 궁극적인 생명 앞에서 별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눈을 뜨십시오. 그렇습니다. 기원전 6세기에 선포된 이사야의 예언은 온전히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주님이십니다. 그 주님이 지금 오고 계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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