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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38: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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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남준 목사 |
참고 : | 열린교회 http://www.yullin.org |
생의 갈림길에서 8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2006-09-24
사 38:1-6
“그즈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가 나아와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 하셨나이다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 하고 심히 통곡하니 이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사야에게 임하니라 가라사대 너는 가서 히스기야에게 이르기를 네 조상 다윗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
I. 본문의 배경
구약 이스라엘 역사에서 히스기야 임금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부왕 아하스로부터 나라를 물려받을 당시 이스라엘의 세력은 매우 약한 상태였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이십 구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뛰어난 통치력과 신앙을 아울러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성경은 그를 가리켜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자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대하 29:2). 뿐만 아니라 그는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한 사람이었습니다(왕하 18:5).
히스기야 왕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있어서 마지막 영적 부흥을 가져온 하나님의 도구였습니다. 그는 왕위에 오르자 부왕인 아하스가 폐쇄하였던 성전의 문을 다시 열었으며(대하 28:24, 29:3), 성전을 정결케 하는데 힘을 기울였고, 모세의 법을 따라 번제와 화목제를 드림으로써 유다 왕국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분명히 선포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성대하게 유월절을 지킬 것을 명령하였습니다(대하 30:17). 이때에 그는 북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도 초청장을 보내어 함께 지키기를 청했고,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여 옴으로써 남북이 종교적으로 하나가 되게 하였으니 그 감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더욱이 그는 철저한 개혁을 추진하여 모든 산당들을 제하였을 뿐 아니라 모세 때부터 있던 놋뱀까지 부수고 그것을 ‘느후스단’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놋 조각”이란 뜻입니다. 비록 유서 깊은 모세의 놋뱀이었지만 백성들이 하나님께 돌릴 영광을 거기에 바치며 우상화하는 것을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이는 그가 여호와 종교의 영적 특성을 잘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히스기야에게도 위기가 찾아옵니다.
II. 중년에 찾아온 위기
히스기야가 만나게 된 위기를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즈음에 히스기야가 병들어 죽게 되니…”(1절). 그의 인생의 위기는 죽을 병과 함께 찾아 왔습니다. 그에게는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앗수르의 침공이 있긴 하였으나 하나님의 기적적인 도움으로 십팔만 오천 명의 군사를 시체로 만들고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며, 백성들에게는 선정(善政)을 펼치어 저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는 평안한 시기를 보냈습니다. 이처럼 그는 하나님과의 화목한 관계 속에서 나라를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인생의 위기가 그에게 찾아 왔으니 이는 그가 죽을 수밖에 없는 불치의 병에 걸리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 질병으로 말미암아 그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됩니다. 그것이 어떤 질병이었는지는 상세히 알 수 없으나 본 장의 문맥으로 미루어 볼 때, 몸에 치명적인 종기가 생겼던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병을 통하여 죽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 그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네 집에 유언하라 네가 죽고 살지 못하리라”(사 38:1). 이것은 그의 모든 삶의 기대에 쐐기를 박는 말씀이었습니다. 그것도 그의 중년에 말입니다. 당시 비통한 심경을 그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나의 중년에 음부의 문에 들어가고 여년을 빼앗기게 되리라”(사 38:10). 살아있는 사람이 예고 없이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된다는 것도 두려운 일이지만 그런 일이 중년에 찾아온다는 것은 더더욱 위기입니다.
중년의 때는 매우 위험한 시기입니다. 그래서 시인도 말하기를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시 102:24)라고 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두 시기에 크게 경험합니다. 첫째는 청소년기이고, 둘째는 중년의 때입니다. 특별히 중년의 시기에 직면하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전자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칩니다. 생명의 기운이 서서히 고갈되기 시작하고, 죽음의 기운이 스며들기 시작한 때에 죽음을 실감하는 것은 생명으로 충만한 청소년기에 느끼게 되는 그것과는 매우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중년의 히스기야에게 이런 죽음을 선고하시고, 또 다시 그를 살려주신 모순된 일에 대하여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 깊은 지혜를 모두 다 헤아릴 수는 없지만 우리들이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중년의 위기를 통해 히스기야의 영혼과 마음을 온전히 쇄신시키셔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이스라엘 역사의 비탈길에서 이 한 사람 히스기야의 마음과 영혼 안에 일어나는 놀라운 일들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속에 여호와 유일신 신앙이 부흥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를 죽음의 기로에, 그 두려움의 위기 속에 서게 하셨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새로운 영혼과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우리를 쇄신시키고자 하십니다. 때로는 우리가 사랑하고 안주하던 사물의 질서들을 흔들어 놓으심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게 하시고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 속에 스며들어온 모든 죄와 불결들을 보게 하십니다. 위기 앞에서 하나님을 붙들며 분투하는 모든 시간들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바꾸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하심으로써, 인생의 계획에도 없는 위기를 맞이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마음을 바꾸고 영혼이 새로워지게 하십니다. 인생에서 만나는 모든 고난과 위기가 언제나 우리의 마음과 영혼을 새롭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어떤 사람들은 위기 속에서 마음이 강퍅하여지고, 고난 속에서 마음이 굳어지기도 합니다. 고난 그 자체는 우리를 거룩하게 만들거나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그 어떤 힘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러한 일들을 대면하는 인간의 마음입니다. 어떠한 마음과 신앙으로 그 고난을 대하며 반응하는가에 따라 이는 기회가 되기도 하고, 파멸로 들어가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III.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히스기야는 이러한 인생의 기로에서 가장 아름다운 영혼으로 반응한 사람이었습니다.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었지만 그는 이 아름다운 선택으로 말미암아 인생의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중년의 때에 인생의 기로에 세우심으로 거기서 하나님을 찾게 하시고 만나게 하심으로써 그의 온 마음과 영혼을 쇄신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에 유일신 신앙의 영향을 끼친 왕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있던 히스기야의 어떠한 모습을 보시며 그를 건져 내셨을까요?
A. 하나님만 바람
첫째로, 그는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2절). 이사야 선지자가 그에게 찾아와 죽을 것이라고 예언한 것은 그가 병든 후의 일이었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 수 없으나 모든 병이 그러하듯이 그의 병도 시작이 있었고 또한 중하여져 가는 과정도 있었을 것입니다. 처음에 그는 그 병이 일반적인 병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때문에 아마도 그는 의원을 불러 적절한 치료를 계속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병은 점점 더 중하여져 가고 그는 곧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이사야 선지자가 하나님의 선고를 전해주었을 때에 그가 찾은 것은 이제 의원이 아니라 하나님이었습니다. 얼굴을 벽으로 향하였다는 것은 그가 자기의 상황에 대하여 인간적인 모든 기대와 노력을 포기하고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었다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처지를 위로하기 위하여 방문하는 그 누구도 만나기를 거절한 채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실제로 하나님에 의해 죽음을 선고당한 히스기야의 처지는 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그런 절망적인 벽과 같은 처지에서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었습니다. 이는 마치 포로귀환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 타락했다는 소식을 듣고 하나님의 전 앞에서 엎드려 울던 에스라를 생각나게 합니다. “에스라가 하나님의 전 앞에 엎드려 울며 기도하여 죄를 자복할 때에…”(스 10:1).
하나님께서 불세출의 믿음의 사람, 히스기야에게 이처럼 커다란 고난을 허락하신 것은 바로 적절한 때에 그의 마음을 고쳐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국사를 돌보면서 만나는 일상적 어려움이나 평소 생활에서 직면하게 되는 곤란은 그의 영혼의 시선을 오직 하나님께만 고정시키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하시고, 삶에 대한 모든 기대를 오직 하나님께만 걸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죽는다고 선고하셨으니 누가 그 일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여호와께서 친히 살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으니 누가 그것을 거역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하나님의 선고를 비껴갈 어떠한 가능성도 다른 곳에서는 발견할 수 없게 하셨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하나님을 바라지 않으면 안 되는 막다른 길에 서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위기를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것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곳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던 우리의 마음을 청결하게 씻어내기 위함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그 많은 기회와 자원들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그것들을 통해 영광을 받으시지만, 그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하나님만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안목을 스쳐가는 이 세상의 수많은 표상들, 의미를 가장하며 떠오르는 그 많은 사물의 표상들과 헛된 영광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만 향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우리들이 부단한 자기 부인과 깨어짐 속에 명정한 지성을 소유하고, 온전한 의뢰의 마음을 갖고 있지 않는 한 우리는 수시로 그렇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장 큰 의무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며, 그분 밖에서 어떠한 행복도 기대하거나 꿈꾸지 않는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은 하나님께로 나오고, 좋은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지 않는 것은 나쁜 것이며, 아무리 고통스럽고 어려운 것이라도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가장 좋은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 그것이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삶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만을 바라며 살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시인은 말합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시 42:5). 그들은 하나님만을 바라며, 그의 마음을 지키기 위하여 애썼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수시로 변하는 이 세상의 질서 속에서 마음의 평정을 잃어버리고 하나님만을 올곧게 바라는 영혼의 주시를 잃어버릴 때가 있기에, 그들은 수시로 찬송하고 고백함으로 자기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붙들어 매었습니다. 시인은 또 다른 곳에서 말합니다.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오직 저만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니 내가 크게 요동치 아니하리로다”(시 62:1-2).
B. 마음을 쏟은 기도
둘째로, 그는 마음을 쏟아 기도하였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심히 통곡하니”(2, 3절). 그의 기도는 통곡하는 기도였으며, 눈물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그것은 곧 그가 온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붓는 기도를 드렸다는 의미입니다. 이 절망적인 선고 앞에서 히스기야가 얼굴을 벽으로 향한 것이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삶의 고백이었다면, 통곡과 눈물로 기도한 것은 보다 적극적인 모습이니,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쏟아 붓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만 바라는 마음과 그 마음을 하나님께 온전히 쏟아 붓는 기도 사이의 밀접한 연관성을 발견합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교훈을 생각나게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마 6:6). 왜 예수님께서는 기도하라고 명령하시기 전에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으라고 가르치셨을까요? 이는 기도하기 전에 마음의 준비가 선행되어야 함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친밀한 기도 속으로 들어가고 싶어 하고, 자신의 간구가 온 맘을 쏟아 붓는 간구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기도하려고 한다고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기도야말로 마음의 작용입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이 하나님만을 바라고 있을 때, 그것은 이미 하나님께 기울어진 마음이며, 하나님께 기울어진 그 마음은 간절한 간구 속에서 그분께 쏟아 부어지기 쉬운 마음입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선고를 들은 히스기야의 마음이 이렇게 준비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마음을 쏟아 눈물로 간구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삶은 마음의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영혼의 상태가 죄의 지배 아래 있다 할지라도 잠시잠깐 마음이 착하고 올바르게 되면, 일시적이나마 어린 아이와 같이 착하고 순수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또한 영혼의 상태가 은혜의 지배 아래 있다 할지라도 어느 한 순간 마음이 더럽혀지면, 일시적이지만 그 때만큼은 악한 행동을 하게 됩니다. 물론 죄의 지배 아래 있는 사람의 착한 행동은 단속적(斷續的)이고, 악한 행동은 지속적이지만 말입니다. 결국, 마음의 중요성이 강조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닫히지 않도록, 더럽혀지지 않도록 유의하여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가 매일 매일 힘써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그렇게 살아야지만 수시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토하는 기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 62:8). 하나님께서 당신의 마음에 합하여 살아왔던 믿음의 사람 히스기야에게 이처럼 인생의 위기를 허락하신 것은 그가 다시 한번 온 마음을 쏟는 기도를 하게 하심으로써 그의 마음과 영혼을 쇄신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값비싼 향유일수록 깨끗한 그릇에 담기는 법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 너무나 소중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혹하리만치 정결한 마음과 영혼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아온 그 사람에게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되는 위기를 만나게 하심으로 흩어진 마음을 하나님께 모으게 하시고, 그 마음 안에서 자신을 쏟아 붓는 기도 속으로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인간 존재의 가치는 덕(德, virtus)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인간 존재의 가치를 행복에 있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참으로 덕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면, 그가 행복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참 행복이 아닙니다. 참된 신자와 형식뿐인 신자와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참된 신자는 행복해지기보다는 덕스러운 사람이 되기를 원합니다. 이 덕은 그의 존재와 삶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향하는 것이며, 이는 반드시 하나님을 향한 마음으로부터의 전인격적 사랑을 내포합니다. 행복해지기보다는 거룩해지기를 바라는 신자의 마음이 바로 이런 덕을 찾아가기 원하는 심정의 발로입니다. 그 덕 안에서 우리가 참으로 행복해 질 수 있으며, 그것이 우리에게 만족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께 온전히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가 누구이든지, 어디에 있든지, 그는 하나님 앞에 탁월하고 아름다우며 선한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히스기야를 보십시오. 우리와는 비교가 안 되는 탁월한 덕을 갖춘 사람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순종의 사람, 말씀의 사람, 지혜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고통 가운데 정련(精鍊)하셔야 할 필요를 느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더 그럴 필요가 있는 사람이겠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기록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 한 때 하나님만을 사랑했던 다윗도 마음이 더러워져 육욕을 따랐습니다. 그렇게 겸손했던 사울도 마음이 교만하여져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아사 왕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는 히스기야 왕과 함께 청사에 길이 빛날 훌륭한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우상을 섬기는 모친을 태후의 위에서 폐할 정도로 마음이 온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후일 그 마음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인 우리의 시각 속에 들어온 히스기야 왕은 온전하고 뛰어난 사람처럼 보일런지 모르나 하나님은 아마도 외적인 온전함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불순종의 씨앗들, 그리고 미끄러지려는 마음을 발견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 중년의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게 하시고, 거기서 자신의 마음을 다 쏟는 기도를 하게 하심으로써 하나님 앞에 마음과 영혼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모든 성령 안에서 드리는 기도는 마음을 쏟는 기도이며, 기도자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 쏟는 것 없이는 누구도 성령 안에서 삼위 하나님과 교통하는 기도의 진수를 누릴 수 없습니다. 쏟아 부어지는 하늘의 은혜, 삼위 하나님께로부터 비치는 그 신령하고도 초자연적인 빛, 세상의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 따뜻한 사랑의 부으심, 그리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독점적 사랑의 희열 같은 것들이 기도의 진수를 형성합니다. 하나님의 엄위와 거룩하심 앞에서 두려우면서도 알 수 없는 사랑의 힘에 의하여 발생하는 이끌림은 모두 마음을 쏟는 기도 속에서 경험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드리던 기도를 생각나게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천사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던 때는 예수님이 자신의 온 힘을 쏟아 기도하시던 때였습니다.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 22: 44).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기도의 정수를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요? 이러한 기도의 진수를 누리며,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은 얼마나 소수일까요? 이 모든 기도는 마음을 쏟는 기도입니다. 마음을 쏟는 기도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을 변화시키기 전에 먼저 자기 자신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가 직면한 인생의 문제가 아무리 크고 어렵다 하더라도 우리가 이렇게 기도할 수만 있다면 인생의 위기가 오히려 기회일 것입니다. 그 두려움은 변하여 기도가 될 것이고, 그 한숨은 변하여 노래가 될 것입니다. 죽음의 기로에서 오히려 부활의 위대함을 경험하게 될 것이며, 꿈꾸는 것 같은 위대한 일들이 우리의 눈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하늘의 창고를 열고 모든 것을 후히 주시려고 하시는 하나님은 당신을 향하여 마음을 쏟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당신께 온전히 기울어진 마음에 임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런 기도를 드리지 못하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 것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기도하는 그 순간에 마음을 쏟아 부어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은 삶의 전 영역에서 날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사람입니다. 삶의 양태가 어떠하든지, 그를 둘러싼 사물의 질서가 어떠하든지, 마음을 하나님께 고정시킨 사람입니다. 그의 영혼은 그분의 얼굴 빛으로 기뻐하고, 그의 마음과 온 몸은 그분의 은총의 증거 앞에서 경건한 떨림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를 찾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떤 인간적인 희망도 보이지 않는 인생의 막다른 길로 인도하실 때, 삶의 모든 역경이 재난이 되어 우리의 목에 칼을 겨눌 때, 주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성경은 말합니다.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 ”(잠 23:26). 하나님의 사람 히스기야를 죽음의 선고로 다루시면서까지 그의 마음을 쏟게 하신 그의 열심은 지금도 우리를 향하여 계속됩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나셨습니까?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서 계십니까? 하나님이 받으시기 원하시는 그것을 내 놓으십시오. 고난은 끝날 것이고,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을 다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고통을 면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지 않았던 지난날의 미끄러짐을 참회하며 자신을 다 쏟아 붓는 진지한 열망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십시오. 막혔던 기도의 문이 열리고, 어두웠던 심령에 은혜의 빛이 들어올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만나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C. 눈물을 보신 하나님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마음을 쏟는 기도 안에서 흐르는 눈물을 보셨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내가 네 기도를 들었고 네 눈물을 보았노라”(5절). 히스기야 왕의 기도는 심한 통곡과 눈물이 있는 기도였습니다. 인생의 중년,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통곡하며 드리던 기도 속의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이 땅에 사는 동안 한 인간이 하나님께 보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하나님을 배향하며 살았던 자신의 모든 삶을 총체적으로 후회하며 눈물을 흘리는 것일 것입니다. 배향하던 삶의 모든 죄악을 떠나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그 사랑으로 돌이키는 것일 것입니다. 기도 속에 흘리는 통한의 눈물, 자신의 그릇된 삶에 대한 철저한 회개와 더불어 흘리는 통곡의 눈물, 그것은 곧 정결한 마음의 원인이며, 하나님을 배향(背向)하던 삶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전향(轉向)하는 작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덕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보다 오히려 이들에게 더 큰 기쁨을 나타내 보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 15:7).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 눈물을 보셨습니다. 모든 기도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것이 아니듯이 모든 간구가 똑같은 정도로 하나님의 마음이 열납(悅納) 되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한 기도에 특별히 귀를 기울이십니다. 특별한 기도제목에 귀를 기울이시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기도자의 특별한 간구에 더 많이 귀를 기울이십니다. 형식적으로 이스라엘 나라에 임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보다는 아들 하나를 낳게 해달라는 한나의 마음을 쏟아 붓는 눈물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더욱 붙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히스기야를 통해서 기울어져 가는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유일신 신앙을 보존하시고 싶으셨습니다. 히스기야 왕의 마음과 영혼의 갱신은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의 그 모든 갱신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의 마음에 있는 모든 찌꺼기를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의 눈물과 흐느끼는 통곡을 통해 씻어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한번 그의 마음에 하나님만이 소망이 되게 하셨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이러한 인생이 위기 앞에서 고난을 당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아직 회복하지 못했을 때에는 언제나 이러한 인생의 고난이 자신이 잘못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보복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자신의 불순종과 죄악에 대한 진노를 심판을 통해 푸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당신의 언약의 백성들을 그렇게 다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그 큰 고난과 위기를 통하여 우리의 마음과 총체적인 삶을 다시 당신께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여호와는 자비로우시며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 103:8).
이 일을 위해 사랑하는 당신의 백성들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게 만드십니다. 그들이 사랑하는 이 세상으로부터 배반을 당하게도 하시고, 그들이 탐욕으로 쫓던 많은 것들에 의해 실망하게도 하십니다. 정욕에 굴복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을 때,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영혼의 고통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시려고 한동안 그 얼굴빛을 가리우기도 하십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도 당신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향한 복수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영혼의 어두움의 때를 통해 그들로 하여금 잃어버린 하나님의 사랑을 갈망하게 하시고 보좌 앞에 엎드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 그 마음을 정위(正位)하도록 모든 희망들을 끊어버리시고, 그 마음을 하나님께 물같이 쏟아 기도하도록 인도하십니다. 깊은 참회와 간구 속에서 그의 영혼이 곤고와 쇠사슬을 벗고 진리와 성령으로써 자유를 찾을 때 까지 사랑하는 자녀들의 눈에 눈물이 흐르게 하십니다. 그 눈물 속에서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인생의 죽음과 같은 위기 앞에서 마음을 하나님께 쏟으십시오. 그리고 거기에 엎드려 우십시오. 그리고 많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대의 마음에 흐르는 눈물을 보실 때 까지…….
IV. 쇄신된 영혼을 기뻐하심
하나님께서 그렇게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는 히스기야에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가 네 수한에 십오 년을 더하고 너와 이 성을 앗수르 왕의 손에서 건져내겠고 내가 또 이 성을 보호하리라”(5, 6절). 그가 마음을 쏟아 통곡과 눈물로 간구한 것은 오직 한 가지 기도제목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선고된 죽음이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자신이 하나님 앞에 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살아온 지난날들을 추억하며 하나님 앞에 기도하였습니다. “여호와여 구하오니 내가 주의 앞에서 진실과 전심으로 행하며 주의 목전에서 선하게 행한 것을 추억하옵소서…”(3절). 그의 일생은 사명을 향하여 달려온 길이었습니다. 선고된 죽음 앞에 눈물로 기도한 것도 그런 인생을 더 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선고되었습니다. 그는 오직 이 한 가지 기도 제목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마음을 쏟으며 매달렸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이사야에게 말씀으로 임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응답과 함께 하나님께서는 그가 예기치 않았던 놀라운 은총을 약속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 신흥국가 앗수르의 위협은 가장 큰 어려움이었습니다. 북방 민족인 그들은 끊임없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였고, 이로 인해 유대 왕국은 수시로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 큰 근심까지 면하도록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셨습니다. 앗수르 왕의 손에서 그들을 건져 내시고, 또 앞으로도 그들을 보호해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히스기야의 쇄신된 영혼을 얼마나 기뻐하셨는지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마음을 쏟아 붓는 기도와 통곡 속에서 그의 마음과 영혼은 쇄신되었고, 그의 온 지성과 의지는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고 따르기를 사모하는 덕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가 간구하지 않은 것 까지도 그에게 모두 주셨습니다. 우리는 흔히 깨끗하게 하시는 은혜의 작용과 깨끗해지려는 신자의 의지 사이에서 무엇이 먼저인지 묻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깨끗해지려는 사람에게 깨끗케 하시는 은혜를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자비한 자에게는 주의 자비하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특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리심을 보이시리니 주께서 곤고한 백성은 구원하시고 교만한 눈은 낮추시리이다”(시 18:25-27).
우리는 흔히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일에 있어서 자원의 부족에 마음을 많이 씁니다. 그러나 더 고민해야 할 것이 있으니 이는 이미 주신 자원들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입니다. 주께로부터 받은 자원이 많음을 자랑하지 말고, 마음을 하나님께로 향하며 이미 받은 작은 것이라도 온전히 그분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을 즐거워하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당신의 쇄신된 영혼, 온전케 된 마음을 기뻐하실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영혼은 고귀한 것이 틀림없으나 영혼의 고귀함은 단지 영혼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진리이신 하나님을 붙들고 있음으로 고귀한 영혼이 되는 것이니, 그 안에서 영혼은 아름답고 탁월한 존재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보다 더 귀한 영혼을 탁월하고 아름답게 하시기 위하여 덜 귀한 우리의 육신을 결핍과 고통가운데 두심으로써 그것들을 새롭게 하시기도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 맘을 다하여 쇄신된 영혼, 온전해진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값지게 하는 것은 그의 소유나 자원이 아니라, 그렇게 쇄신된 마음과 영혼이기 때문입니다.
V. 결론
우리의 인생에는 언제나 위기가 있습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를 삶과 죽음의 기로에 세우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과 영혼이 온전히 쇄신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살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는 늘 행복해지기를 원하지만 하나님은 덕을 좇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있는 것이 창조의 목적에 이바지하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은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따뜻한 배려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그 안에서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생의 모든 위기와 고난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십시오. 그 위기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여러분들이 인생의 위기 앞에서 스스로 마음을 쏟고 기도함으로 새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 나눔의 시간 ::
1. 지난 주의 말씀 “인생의 황혼에 찾아온 위기(삼상 8:1-5)”를 듣고 한 주간 실천했던 삶이나 받은 은혜들을 나누어 봅시다.
2. 히스기야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리고 그의 신앙적 업적은 무엇이었습니까?
3. 히스기야에게 찾아 온 인생의 위기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처한 위기에 대해서도 나누어 봅시다.
4. 하나님만 바라는 마음과 그 마음을 쏟는 기도는 어떤 것입니까? 그러한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5. 하나님께서 쇄신된 영혼을 기뻐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 자신의 쇄신의 경험을 나누어 봅시다. 2006-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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