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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흥 기도의 열정

이사야 로이드 존스............... 조회 수 2404 추천 수 0 2012.09.27 22:4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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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63:15-19 
설교자 : 로이드 존스 
참고 : http://lloydjones.org/zbxe/Lloydjones02/601/page/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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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 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팍케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컨대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주의 거룩한 백성이 땅을 차지한 지 오래지 아니하여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 같이 되었나이다"(사63:15-19).

 

이사야 63장과 64장에 기록된 이사야 선지자의 위대한 기도를 생각하는 중에 이제는 특히 흥미로운 요점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우리가 지난 강론에서 살펴본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에 대한 모든 지식을 힘입어 계속 기도했습니다. 그가 분명히 인식했던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그러한 시대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언제나 해왔던 것을 반복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지금 숙고할 것은 이 선지자와 민족이 기도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러한 입장에 처한 것은 자신의 어리석음과 반역때문임을 먼저 의식하고, 회개와 뉘우침으로 하나님께 돌아섭니다. 기도는 15절에서 64장끝까지 계속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번째 부분인 63장 끝에 있는 이 대목을 먼저 숙고해 보아야 겠습니다.

 

우리가 이 기도를 살펴보면서 인식해야 할 것은, 이것이 우리에게도 유일한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현재 우리의 처지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와 거의 똑같으며, 교회가 계속해서 불순종하던 때와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점을 인식하면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이러한 유의 기도를 드리는 데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특별한 간구를 살펴보기 전에, 먼저 그 기도의 양식, 또는 제가 그 기도의 일반적인 특성으로 묘사하는 것에 대해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살펴볼 때 가장 먼저 느끼게 되는 것은 긴박성과 끈질김입니다. 이 기도에는 냉담하거나 헤이하거나 모호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그 사람의 전 영혼이 그 기도의 깊숙한 곳에 있습니다. 그 사람은 긴박합니다. 왜냐하면 자기 입장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노략질과 파멸을 당하고 성소는 더럽혀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선지자는 그것을 묘사한 다음에, 문제가 긴박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그 문제를 가지고 탄원합니다. 우리는 이미 이것을 숙고해 보았습니다만, 이 긴박성의 요점을 결코 망각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우리가 처해 있는 심각한 상황을 어느 정도 인식할 때에만 그러한 긴박성을 느낄 수 있습니다.

 

제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교회의 상태나 주변 세상의 상태를 보고도 시온에 앉아서 그처럼 안일한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놀랍습니다. 저는 핵폭탄과 무기만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산업적인 불안감과, 모든 삶의 행보나 사회의 모든 계층에 명백하게 드러나는 이기주의를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불법과 이기주의, 이러한 것들을 위해서는 오직 한 가지 치료책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다시 한번 자신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기억하고 자기들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재난이 우리를 덮치기 전에 우리는 모두 하나님 앞에 겸비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인식할 때에만 선지자의 기도를 특징짓는 그 긴박성과 끈질김을 가지고 기도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그의 강렬한 감정을 주목하십시오. 여러분은 그 사람이 기도하는 방식에서 그 점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의 기도는 일종의 형식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형식이 없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즉 그는 참회와 탄원 사이를 오가고 있습니다. 그것은 언제나 강렬한 감정의 표증입니다. 강렬한 감정을 체험한 사람은 형식이나 용어 선택이나 어떤 정해진 순서에 지나치게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는 너무나 감동받은 나머지 어떤 의미에서 질서정연한 방식대로 생각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습니다. 그는 순간적으로 주도적인 감정을 토해 낼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이 기도에 나타나 있습니다.

 

선지자는 무엇보다 먼저 자기의 간구와 탄원을 모은 다음 이러저런 이유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아니, 그 사람의 마음은 너무나 깊이 감동되었습니다. 그는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혀,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기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부흥의 상태에 있을 때마다 이와 같은 일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교회에 임하시면, 형식은 망각되고 공적인 기도서들은 필요 없어지며 성령께서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활동하십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경배와 탄원과 간구의 표현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이 대목이나, 성경의 다른 위대한 기도에서 이 점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 요소는 간청, 하나님과 논증하는 요소입니다. 실로 저는 이보다 더 강한 어휘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씨름하는 요소입니다. 여러분은 선지자가 자신의 논증을 펼쳐 나가는 방식 속에서 그것을 보았습니까? 그는 말합니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그뿐 아니라 우리는 여기서 담대함의 요소를 발견합니다. 모세의 기도처럼 여기에도 무엄하다고 할 정도의 요소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위대한 중보기도 속에서 그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탄원하며 하나님과 논증합니다. 여기 이 사람이 그 일을 어떻게 하는지 들어 보십시오.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원컨대 주의 종들 곧 주의 산업인 지파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 우리의 대적이 주의 성소를 유린하였사오니 우리는 주의 다스림을 받지 못하는 자 같으며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못하는 자같이 되었나이다."

 

그는 따지고 논증하고 탄원하며 하나님과 씨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중보기도의 아주 놀라운 요소입니다. 여기에 역설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선지자는 자기의 무가치함과 백성들의 무가치함을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나님께 탄원하며 나아가 따지고 논증하고 하나님과 씨름하면서 "주님으로 가게 하지 못하겠나이다. 오, 주여, 주께서는 우리를 거절하실수 없나이다"고 말할 권리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볼때 이것이야말로 이 특별한 기도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그것을 하나의 원리로 제시하겠습니다. 여기 우리 앞에 뚜렷한 한 난제가 있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을 반역하여 죄를 범하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징벌하신 한 민족을 위하여 탄원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의 죄악성과 부끄러움을 깊이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거룩한 담대함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어떤 관계를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모든 무가치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따지고 열렬하게 청구할 권리가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 것이 바로 그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관계된 원리는, 모든 것을 다 분석해 본 결과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진리와 교리를 이해하는 데 있다는 것입니다.

 

깊은 지식은 언제나 진리를 포착하는 것을 기초로 삼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언뜻 보기에 대단히 놀라워 보이나 시련이 오면 갈피를 잃어버리는 것같은, 피상적이고 입심 좋은 기도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입심 좋은 그 기도문구는 무의미한 것으로, 입술에서만 맴돌 뿐입니다. 사람은 환난의 용광로에 있을 때, 바로 그때 자신이 절대적으로 확신하는 어떤 근본적인 진리로 돌아가게 됩니다. 위대한 기도의 열쇠는 은혜의 교리를 깊이 알고 이해하는 데 있습니다.

 

이것은 저 혼자만의 주장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러한 것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수세기에 걸친 교회사를 읽어 보면 그것이 거듭거듭 예증되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환난의 용광로 속에 서 있을 수 있는 사람들은 탄식 위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반석은 성경과 복된 교리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실제의 영역에서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이 사람의 기도의 위대한 특성들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의 실제적인 간구를 살펴봅시다.

 

물론 첫번째 간구 제목은 함축성 있는 "주여 굽어 살피소서"라는 말로 표현되었습니다. 15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물론 이것은 우리가 인식해야 하는 첫번째 요점입니다. 여기에 첫째되는 가장 큰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패배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끌려갔고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가 노예가 되었습니다. 성전과 다윗의 성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도성이 검불더미처럼 되었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무엇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 모든 것을 현대적인 언어로 옮길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현대 교회의 상황입니다.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낮아져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교회가 파멸 상태에 있습니다. 원수들이 승리의 개선가를 부르며 우리를 조롱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에 의하면 대답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시편에서도 역시 같은 것을 발견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러한 위대한 기도 속에서는 언제나 같은 것이 발견됩니다. 즉 하나님의 임재, 하나님의 얼굴울 가장 필요로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등을 돌리신 것처럼 보입니다. 저는 서슴없이 이러한 어휘들을 사용합니다. "아버지"라는 어휘가 16절에 사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 자녀들을 대하는 것처럼 우리를 대하십니다. 어린아이가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하고는 아버지께 옵니다. 그러면 아버지는 뭐라고 합니까? 아버지는 그를 보지 않고 그에게서 얼굴을 돌립니다. 그 어린아이는 계속 아버지를 쳐다보면서 아버지가 자기를 봐주기를 원합니다. 그가 참을 수 없는 일은 아버지가 자기를 바라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어린 자식은 아버지께 간청합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보고 싶어합니다. 선지자가 바로 이 기도 속에서 그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를 하감하옵소서, 오 하나님이시여 어찌하여 얼굴을 돌리시니아까? 어찌하여 얼굴을 피하시나이까? 어찌하여 우리에게 등을 돌리십니까? 어찌하여 하나님은 나그네처럼, 외인처럼 우리를 피하십니까? 우리를 하감하옵소서." 이것은 하나님의 얼굴과 하나님의 미소를 보고 싶어 울부짖는 탄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들이여, 여러분과 제 영성을 시험하는 시금석은 그러한 간구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단지 무릎을 끊고 주기도문을 암송하며, 여러분과 가족을 축복해 주시기를 간구하고 또 그 날에 해야 할 일들을 축복해 달라고 말하는 것이 기도가 아닙니다. 제가 너무 완고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것도 기도의 한 종류라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매우 하찮고 원시적인 기도 형태입니다. 그것은 초심자의 기도입니다. 우리를 진정으로 시험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미소를 보고 싶어하는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쳐다보고 계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눈 아래서 살고 움직이고 있음을 진정으로 알고 싶어하는지의 여부입니다. "긍휼과 은혜의 하나님이시여 주의 얼굴의 광채를 보여 주소서" 선지자는 바로 이것 때문에 고민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돌리셨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오 여호와여 우리를 하감하소서."

 

저는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처한 입장이며,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저는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 충분히 민감한지 의심스럽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보고 미소 지으시는 것과 미소짓지 않으시는 것의 차이를 아십니까? 이것이 바로 설교자를 시험하는 시금석입니다. 단순히 인간적인 이해와 힘으로 설교하는 것과, 하나님의 미소를 의식하며 설교하는 것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그 차이를 여러분에게 묘사할 수 없습니다. 둘 사이에는 정말 영원한 차이가 있습니다. 제게 있어서 설교자가 하나님의 미소를 의식하지 않고 강단에 혼자 올라가는 것처럼 무서운 일은 없습니다. 선지자가 "하감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미소를 아십니까? 그렇다면 그것은 박탈당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돌려 다시 자기를 쳐다봐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는 교회로부터 얼굴을 돌리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우리에게 흥미를 잃으신 것 처럼 보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나아가서 이사야가 정확히 그 기도에서 실제로 어떻게 하는가를 봅시다. 그는 하나님께 다시 한번 자기들을 하감하시고 미소를 보여 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런데 여기 여러 가지 단계가 있습니다. 그 단계는 반드시 거쳐야 합니다. 다른 길이 없습니다.

 

첫번째 단계는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입니다. 그 말을 들어 보십시오. "굽어 살피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디로부터 굽어 살펴 달라는 것입니까?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우리는 여기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우리 자신에서부터 출발하면 안됩니다. 언제나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할 때, 우리가 그분에 대해서 인식해야 할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차라리 우리는 무릎을 꾾지 않고, 기도를 시작하지 않는 편이 더 낫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합니까? 우리가 누구에게 아룁니까? 우리는 하늘에 계신 분께 아뢰는 것입니다. "하늘에서 굽어 살피소서." 우리는 너무나 자기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자기 자신에게만 관심을 갖는 나머지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우리의 개인적인 필요와 교회의 필요를 쏟아 놓기에 급급합니다. 계속 그렇게 해 나갑니다. 성도 여러분, 멈추십시오! 만일 지옥이 여러분 밑에서 입을 벌리고 있는 것처럼 느낀다 할지라도 여러분의 곤경이 무엇인지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의 원수들이 함께 모여 여러분을 대적한다 해도 저는 관심이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께 기도하려 한다면,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디에 계신지를 알아야 합니다.

 

"하늘에서 굽어 살피소서....."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지만, 실제로 인식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기도문에 너무 친숙한 나머지 사실상 그 기도를 드리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께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말하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우리는 땅에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여러가지 난감한 일에 둘러써여 있고,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상황에 있으며, 공산주의나 다른 "주의"의 힘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두려워떨고 흔들리기 시작한다는 이유 한가지만으로도 그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가 모든 것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 보신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는 그 모든 것의 흐름 밖에 계십니다. 이것을 기억하면 우리는 즉시 바르게 설 것입니다.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보옵소서" 어디에서 봅니까?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우리 주님은 "그렇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한결같으며 변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이 누구신지 기억합니까? 우리는 그에게 아룁니까? 이 용어를 사용합니까? 우리는 그것을 생각해냅니까? 하나님의 거룩성을 기억합니까? 이러한 것들을 스스로 상기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주님을 보십시오. 그분이 이 세상에 계실 때, 땅 위에 계셨지만 하늘에도 계셨으며,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이셨습니다. 그가 기도하실 때 "거룩하신 아버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인식하지 않는 한 바르게 기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응석받이 자녀들 같습니다. 죄 용서를 바라고 축복을 원하며 이것저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잠깐 기다리십시오. 우리는 거룩하신 아버지께 다가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기억할 때, 우리의 죄와 우리 자신의 무가치함을 기억하게 됩니다. 우리의 권리와 요구사항을 잊게되고, 다만 하나님 앞에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하나님 영광은 어느 사람도 규정지을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의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속성입니다. 그것은 그의 위대하심과 찬란하심과 위엄입니다. 우리 모두의 진정한 문제는 거듭 말씀드리지만 하나님을 모르는 데 있습니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모릅니다. 하나님의 영광, 여러분이 그것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시편 기자는 그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았습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 그는 악인 중에서 권세를 차지하고 가장 중요한 요지에 있는 것보다 차라리 현관문에서 찬송가를 나눠주거나 심지어 가장 미천한 일을 하는 것을 더 좋아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은혜와 영광 때문입니다. 장막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때때로 문을 통해 하나님의 쉐키나의 영광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다른 말로 해서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얼굴을 언뜻 보고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주여 하늘에서 굽어 살피시며 주의 거룩하고 영화로운 처소에서 보옵소서." 선지자는 이것부터 시작합니다.

 

그 다음 그는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관계를 상기시킵니다.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먼저 말한 다음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여기서 그가 사용하는 어휘를 보십시오. 그는 이것을 질문 형태로 표현합니다. "주의 열성과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 그는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그는 과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역사와, 그들을 다루신 하나님의 처사에 대한 역사를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 대해 무엇을 말씀하셨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을 위해서 행하신 일도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위해 열성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오래 전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애굽에서 포로생활을 할 때가 있었습니다. 애굽인 감독들은 채찍으로 등을 때리며, 짚은 더 적게 주면서 더 많은 벽돌을 만들게 했습니다. 그들은 처참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일어나셔서 모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나는 네가 이 백성들을 인도하여 내기를 바란다." 모세가 묻습니다. "내가 바로에게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걱정하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간섭하시고 능하신 일들을 행하심으로 그들을 거기서 이끌어 내신 이야기를 읽어 보십시오. 선지자는 이 백성들을 위한 하나님의 열성에 대해 말합니다. "그 열성이 이제 어디 있습니까?" 늘 그러하셨는데 주님의 열성이 어디 있나이까?" 하나님께서 여전히 우리와 우리 일을 위해서 열성을 가지셨다면 우리가 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나타내셨던 그 힘이 어디 있나이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내 눈의 눈동자 같다 말씀하셨고, 아무것도 우리를 상하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의 열성이 어디 있나이까? 이것이 바로 그의 기도입니다. 그는 그 나라와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옛 관계와,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열성을 상기시켜 드리고 있습니다.

 

그런 다음 다른 어휘를 덧붙입니다. 즉 "주의 열성이 어디 있나이까"라고만 말하지 않고 "주의 능하신 행동이 이제 어디 있나이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매우 놀라운 하나님의 전능한 힘, 능력, 권능을 말하는 것입니다. 저는 여기서 선지자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을 좋아합니다. 그는 능력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는 능력이 있다는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 성을 함락시키고 백성을 포로로 잡아갔던 바벨론과 갈대아 사람들의 세력 앞에 직면해 있습니다. 그들은 물론 이러한 일이 자기들에게 일어난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막을 힘이 없으시고 그 원수들을 이길 만큼 강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말합니다. "아니,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동일한 능력을 갖고 계시다.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빛들의 아버지"이십니다(약1:17참조). 그렇습니다. 그는 능력을 갖고 계십니다. 문제는 그것이 어디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있기는 한데 우리에게 그것을 행사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이 점에 대해서 분명히 하지 않으면 이러한 시대에 우리는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회가 어째서 이 모양인가? 하나님의 일이 어째서 이렇게 쇠퇴하는가? 원수가 득세하고 이기는 것은 어째서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멈출 수 없기 때문인가?" 아닙니다. 능력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어디 있느냐고 하나님께 질문합시다. 어째서 우리에게 그 능력을 보여 주시지 않습니까?" 주의 능하신 행동이 어디 있나이까?"

 

그런 다음 가장 특이한 용어가 나옵니다. "주의 베푸시던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내게 그쳤나이다" (영어성경에는 "간곡한 자비와 긍휼이 어디 있나이까?라는 질문 형식으로 나타나 있음 - 역자 주). 물론 이것은 전형적인 성경적 표현입니다. 특히 구약적인 표현입니다. "주의 창자의 울림" (한글 개역 성경에는 "간곡한 자비"로 표현되어 있음 - 역자주). 고대인들은 창자를 감정의 자리라고 믿었습니다. 왜입니까? 사람이 강한 감정을 느끼면 자기 창자가 뒤틀리는 것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통과 쓰림을 느낄 것입니다. 강한 감정은 창자를 요동하게 만듭니다. 이 사람이 말했던 것도 그것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주의 창자의 울림과 주의 긍휼의 울림이 어디 있나이까?"

 

예레미야가 고통 중에 "나의 창자야 나의 창자야"라고 울부짖었던 것을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렘4:19)참조. (한글 개역 성경에는 "마음속"으로 번역되었음-역자주). 그는 자기 백성의 상태 때문에 고뇌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는 창자에서 그것을 느꼈고, 그 괴로움을 창자와 연관시켰습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선지자는 무엄하게도 그 모든 것을 하나님께 아룁니다. "어찌하여 옛적처럼 우리에게 마음을 기울이지 아니하십니까? 어찌하여 그전처럼 우리에게 정을 주지 아니하십니까? 주의 창자의 움직임과 동요와 울림, 우리를 향하신 주의 긍휼의 동함과 울림이 어디 있습니까? 어째서 우리는 것을 알지 못하고 체험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선지자자가 두번째로 기도하는 제목입니다.

 

그 다음 우리는 이 위대한 기도의 세번째 면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그가 드리는 실제적인 탄원입니다. 그것은 삼중적인 탄원입니다.

 

첫째로, 저는 어떤 의미에서 그것을 "....이 어디 있나이까?"라는 말로 이미 설명한 바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구하는 이러한 자비가 여전히 있음을 잘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변하실 수 없으시니 변하지 않으셨다는 것을 잘 압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러하신 분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사실이 나타나는 것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그는 자기의 죄와 그 민족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합니다. "어떻게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감하실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긍휼과 인휼과 자비를 베푸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다 박탈당했습니다. 어떻게 그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우리에게 관심을 기울이실 수 있겠습니까? 오, 주여, 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저는 탄원합니다. 다만 자비와 긍휼을 구할 뿐입니다. 굽이 살피소서.....보옵소서."

 

그런 다음 17절에서 "주의 종들.....을 위하사 돌아오시옵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오, 하나님 우리에게 돌아오소서, 어찌하여 외인과 나그네와 같으시고, 어찌하여 우리에게 돌아오지 아니하십니까?"

 

오 거룩하신 비둘기여,

부드러운 평안의 사자여,

돌아오소서, 돌아오소서!

윌리엄 쿠퍼

 

이것이 선지자의 두번째 간구 제목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요청할 아무런 권한을 갖고 있지 않음을 인정하면서도, 그는 하나님께 다시 돌아오셔서 긍휼과 자비와 능력을 베풀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런 다음 세번째로, 모든 간구 중에서 가장 특이한 것이 17절에 나옵니다. "여호와여 어찌하여 우리로 주의 길에서 떠나게 하시며 우리의 마음을 강팍케하사 주를 경외하지 않게 하시나이까?" 여러분은 이것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이 사람이 말하고 있는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인식하셨습니까? 우리는 이 점에 대해서 명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난제를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대변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강팍해지도록 내버려두셨다는 뜻에 불과하다고 말함으로써 난제를 피하려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로 그 길에서 떠나도록 내버려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그러한 일을 일으키셨다고 말합니다. 그들을 떠나게 하고, 그들의 마음이 강팍해지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이미 6:9-10에서 이것을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선지자에게 말씀하십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 백성의 마음으로 둔하게 하며 그 귀가 막히고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컨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서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나님께서는 선지자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하십니다. 물론 신약성경에서도 우리 주님께서 친히 요한 복음 12:37-41에서 그 말씀을 인용하십니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가로되 주여 우리에게 들은 바를 누가 믿었으며 주의 팔이 뉘게 나타났나이까 하였더라, 저희가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

 

사도행전 28장에도 같은 말씀이 인용됩니다. 그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로마서 9:18에서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 하시느니라." 어떤 이는 그 모든 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라고 물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순종하는 것은 가공스럽고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것이 그 질문에 대한 답변입니다. 왜냐하면 때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불순종을 징벌하시되 우리로부터 얼굴을 돌리시고 우리 혼자 내버려 두실 뿐만 아니라, 심지어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고 실수하게 하며 마음을 강팍하게 하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는 환란과 질고를 보내시고 그 질고는 우리를 강퍅하게 합니다. 우리를 징벌하시는 하나님의 방식 중 하나가 그것입니다.

 

선지자가 기도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오, 하나님, 그렇게 법적으로 우리를 다루시는 것을 그만두소서. 우리는 마땅히 그것을 받을 만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범죄했습니다. 반역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했고 하나님 없이 우리 혼자 가도록 내버려 달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고, 우리로 고집을 부리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시여, 긍휼을 베푸소서."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하나님을 대할까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스스로 "나는 하나님께 죄를 범할 수 있고 그런 다음 회개하며 돌아와서 내가 원할 때마다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해봅니다. 때로 여러분은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렇게 하고 싶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음속에 무서운 강팍함과 냉담함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해 어떠한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은 갑자기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죄악을 밝히시고 비열함을 알게 하시기 위해 징계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다음 할 일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하나님께 돌아서서 "오 하나님, 이제 저를 법대로 처리하지 마소서. 저는 그것을 받을 만합니다만 제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저를 녹이소서. 저는 스스로 그것을 할 수없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긍휼과 인애에 전적으로 여러분 자신을 맡깁니다. 이것이 바로 세번째 위대한 간청입니다.

 

이렇게해서 우리는 선지자의 방식과 그의 경배와 찬미를 보았습니다. 우리는 그의 삼중적인 탄원을 들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가 논증을 어떻게 끌고 나가며, 감히 어떠한 근거에서 그러한 탄원을 하는가를 살펴봅시다. 그것들은 얼마나 흥미롭습니까? 그는 백성들 속에 있는 어떤 것을 근거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들 속에는 어떠한 공로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자격이 없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도, 그의 거룩함에 대해서도, 여러분 마음의 부패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오 주여!"라는 말밖에 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의 기도에 "오"라는 말이 있습니까? 그것은 기도를 테스트하는 또 하나의 매우 좋은 시금석입니다. "오, 여호와여." 아니면 여러분은 이런 저런 조직을 움직이느라 바쁜 복음주의자들로서 선하고 훌륭한 일들을 행하며 오직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시고 계속 우리를 지켜 달라고 기도하는 것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입니까? "오, 주여"라고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선지자는 그런 방식으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언제나 그런 방식으로 기도했습니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부흥이 오는 것을 보여주는 가장 좋은 표증은 "오"라는 말이 사람들의 기도 속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오, 주여!"

 

그런다음 그가 탄원을 드리는 근거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는 먼저 언약적인 관계를 들어 말합니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고 그는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문제는 언제나 아브라함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우리 아버지시다"라고 그들은 말했습니다. "이방인들은 누구인가? 아브라함은 우리 아버지시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에 의지했습니다. 세례요한은 이 점을 매우 잘 알았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설교할 때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마3:8-9)고 말한 것을 기억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는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때 단순히 전통이라는 이름으로나, 조상들의 이름으로나, 우리 앞에 간 사람들의 이름으로 나아가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누구이든지, 그들이 메소디스트 조상들이든지, 청교도 조상들이든지 또는 종교 개혁자들이든지 관계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아브라함이든 야곱이든, 그들의 이름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주는 우리 아버지시라." 종교 개혁자들도, 청교도들도, 메소디스트 조상들도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조상들을 의지하는 데 정말 심각한 위험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그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선지자의 말이 얼마나 옳습니까? 언약을 맺으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소유한 것은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세우셨습니다. 비록 아브라함과 야곱을 통해서였지만, 그들이 우리의 아버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그런 다음 그는 또 다른 언약을 말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16절). 물론 아브라함은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야곱도 기이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도 죽었고 야곱도 죽었습니다. 그들은 일어나서 우리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그리고 그것은 영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 자의 하나님이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조상들이 아무리 위대하고 뛰어나다 할지라도 그들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돌아갑니다. 그뿐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제 생각에는, 그가 이 어구를 말하면서 다음과 같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께서도 아시지요, 아브라함과 야곱이 돌아와 우리를 볼 수 있다 한들 그들이 우리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인정치 않을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들은 "그 사람들은 내게 속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내 소생이 아니다. 나는 그들을 거절하겠다"고 말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거룩한 사람이었고 야곱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하고 우리를 용납지 아니하며 우리를 후사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주는 우리의 아버지십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영광 중에 계신 거룩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아브라함과 야곱이 가졌던 것보다 더 많은 사랑과 긍휼을 가지고 계십니다. 아니, 그 두 사람이 가진 것을 무한정 확대시킨다 할지라도 주님의 사랑과 긍휼을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 아버지십니다. 그들은 아마 우리를 거부할 것입니다."

 

"그러나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시130:4) 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있고 사람에게 속하지 않은 것을 하나님게 감사드립니다. "아브라함은 우리를 모르고 이스라엘은 우리를 인정치 아니할지라도 여호와여 주는(여전히) 우리의 아버지시라 상고부터 주의 이름을 우리의 구속자라 하셨거늘."

 

그런 다음 계속 그는 말합니다. "주의 산업인 지파들." 우리는 주위 산업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주의 백성들입니다. 다른 민족들은 주의 백성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의 것이요, 주는 결코 다른 민족들을 노골적으로 다스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칭함을 얻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진술입니다. 주의 분깃은 그의 백성들입니다. 비록 우리가 현재처럼 죄와 무가치함으로 가득 찼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의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우리는 그에게 나아갑시다. 그것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상기시켜 드립시다. 우리가 아무리 나쁘다 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가 탄원합시다. 그에게로 돌아갑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입니다.

 

그런 다음 그의 마지막 논증은, 이 다른 백성들 - 선지자 시대의 갈대아 사람들이나 그보다 더 앞선 시기의 애굽 사람들-은 하나님과 어떠한 관계도 맺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들은 애굽 사람들과 갈대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복을 받았고, 번창했으며, 소유가 풍부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다른 사람들, 이스라엘 사람들은 노예였고 포로였습니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오, 하나님, 이런 일을 계속하실 수 있습니까? 이 큰 나라들이 주님의 백성이라는 인상을 주는 방식으로 계속 행동하실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백성들이 아닙니다. 주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땅을 소유했지만 잠시 동안이었습니다. 우리는 그 땅을 빼앗겼습니다. 갈대아 사람들이 그 땅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 땅은 그들의 소유가 아닙니다. 우리 원수들이 주님의 성소를 짓밟았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것이요, 주님은 결코 그들을 다스리시지 않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이름으로 칭함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기도여야 합니다. 경건치 않은 세상은 그 광채와 영광을 지니고 서 있습니다. 시편73:4-7에 표현된 것차럼 말입니다. "저희는 죽는 때에도 고통이 없고.....살찜으로 저희 눈이 솟아나며." 그들은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으며, 그것도 고난받고 고통과 문제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세상은 그들을 비웃으며 "저들의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고 말합니다.

 

우리는 겸손함과 확신과 담대함을 가지고 그것을 기도로 환원시켜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서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오, 주여, 주께서 계속 이러한 일을 하실 수 있습니까? 그들은 주님의 백성들이 아닙니다. 그처럼 번성하도록 허락하신 이 사람들은 주님의 백성들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고, 우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원수들입니다. 오 하나님, 그러한 일을 계속하실 수 있습니까? 아무리 우리가 약하고 힘이없으며, 현재 넘어져 있고, 반역했으며, 악하고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주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이시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를 살펴보소서. 우리를 보시고 미소를 지으시며, 우리를 알아보시고 우리에게로 다시 돌아오소서. 오 이제 더 이상 우리로부터 멀리 떠나 계시지 마소서. 돌아오소서."

 

오 거룩하신 비둘기여,

부드러운 평안의 사자여.

돌아오소서, 돌아오소서!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것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돌아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일어나소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소서.

 

하나님이시여,

선자자처럼 기도하도록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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