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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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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
이사야 6장 1-8절
사람에게는 두 가지 길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공을 지향하는 길'이 있고, 또 하나는 '사명을 지향하는 길'이 있습니다. 사람의 본능은 '성공을 지향하는 길'을 가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명을 지향하는 길'로 가라고 하십니다. 성공을 지향하는 길은 실패하면 말할 것도 없고 성공해도 그 인생이 빛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명을 지향하는 길은 성공하면 말할 것도 없고 실패해도 그 인생은 빛나는 인생이 될 것입니다.
며칠 전에 한 유력한 교단 출신의 선교사님과 속칭 대형교회에서 시무하시는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분들이 저에게 말했습니다. "목사님이 저희 교단에 속해서 활동했다면 지금 최소한 천 명 이상 되는 교회 담임목사로 계셨을 것입니다." 그 말은 결국 그분들이 속해 있는 교단으로 들어오라는 말이었습니다. 저는 그 말이 두 가지 말로 들려왔습니다. 하나는 워낙 가깝게 지내는 분들이기 때문에 저를 진심으로 생각해주는 말로 들렸고, 또 하나는 그 말이 저에게 유혹의 말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말을 들으면서 다시 한번 속으로 다짐했습니다. "하나님! 목회의 성공에 대한 생각은 철저히 지워주시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살게 하소서!"
우리는 물질에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세상적인 성공에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에 움직이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움직이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그 길을 갈 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좌 뒤편의 24장로들처럼 우리를 가장 복된 존재로 삼아주실 것입니다.
<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 >
우리는 이 땅에서 성공하지는 못해도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일은 하나님의 쓰임을 받는 일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사용하실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5가지로 같이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자기 안의 우상을 내버린 사람
오늘 본문 1절 말씀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간단한 구절이지만 이 구절은 이사야가 소명 받는 장면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 구절입니다. 당시 웃시야 왕은 청년 이사야가 우상처럼 여기던 스타였습니다.
웃시야 왕은 52년간 나라를 다스리면서(대하 26:3),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었지만 나중에 교만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전에서 스스로 제사를 드리려고 하다가 문둥병에 걸려, 결국 성전에서 쫓겨나고 죽는 날까지 별궁에 거하다가 죽게 되었습니다(대하 26:16-21).
이런 웃시야 왕의 비참한 죽음은 이사야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슬픈 마음을 부여잡고 성전에 들어갔는데 그때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안 성전을 수없이 드나들었지만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다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내가 우상처럼 여기던 '내 안의 웃시야'가 죽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말로는 아무리 "주님!"을 간절히 불러도 내 안에 물질의 웃시야, 쾌락의 웃시야, 인기의 웃시야가 있으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하나님보다 크게 보이는 웃시야가 죽어지고, 무너지고, 사라져야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은혜를 체험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다른 것은 작게 보이고,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오직 구속한 주만 보이면 누구나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영안이 열린다!"고 하는 것을 대단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영안이 열리는 것도 어렵지 않습니다. 내 안에 웃시야만 죽으면 누구나 영안이 열려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진정 은혜 받는 삶, 능력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면 끊임없이 내 안의 웃시야와 싸워 이겨야 합니다. 어떤 분은 축구공이 웃시야입니다. 조기축구를 하면 꼭 주일을 빠집니다. 어떤 분은 고기가 웃시야입니다. 낚시 가는 날은 꼭 주일을 빠집니다. 어떤 분은 바둑이 웃시야이고, 어떤 분은 컴퓨터 게임이 웃시야이고, 어떤 분은 사업이 웃시야입니다. 그런 웃시야가 제거될 때 우리는 보좌에 높은 앉으신 하나님을 뵐 수 있게 될 것입니다. 2004년에는 내 안의 웃시야를 죽이고 하나님께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는 한 해가 되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사람
이사야가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날 때 하나님과 보좌 주위에 스랍천사도 보였습니다. 2절 말씀을 보면 스랍 천사는 여섯 날개를 가졌는데, 두 날개로는 얼굴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발을 가리고, 두 날개로는 날았습니다. 이 천사의 모습은 겸손의 중요성을 가르쳐줍니다.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린다"는 것은 "저는 너무 부족한 존재입니다"라는 말이고, "두 날개로 발을 가린다"는 말은 "저의 가는 길을 주님께 온전히 맡깁니다"라는 말입니다. "두 날개로 난다"는 말은 "저는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라는 말입니다. 누가 겸손한 사람입니까? 자기의 부족함을 알고, 자기의 가는 길을 온전히 주께 맡기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겸손하면 두 가지 큰 축복을 얻습니다. 첫째, 문제가 작게 보입니다. 어차피 인생은 문제의 연속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크게 보면 문제는 작게 보일 것입니다. 기독교인의 가장 기초적인 사고방식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안에서는 반드시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사고방식을 가지고 넉넉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면 축복의 길은 열리게 되어 있습니다. 며칠 전에 자욱한 안개가 낀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앞이 30미터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답답했지만 목표지점에 가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는 30미터를 가면 또 그 앞의 30미터는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앞만 바라보고, 보이는 만큼만 전진하니까 어느새 목표지점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때로 안개가 낀 길을 달리는 것과 같은 상황을 만납니다. 그래도 뚜렷한 비전을 가지고, 앞만 바라보고, 보이는 부분까지만 조금씩 전진하다 보면 어느새 비전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내 앞에 산더미 같은 과제가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나씩 해 나가면 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의 과제를 해결하면 그 해결한 일이 다른 문제까지 해결해주는 경우도 많습니다.
인생을 암담하게 볼 필요는 없습니다. 비전은 멀리 보되 문제는 멀리 볼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크게 보되 나는 작게 보면 됩니다. 그러면 문제도 작게 보여지게 될 것입니다.
둘째, 겸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보입니다. 겸손한 사람에게는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교만하면 아무리 은혜의 조건이 많아도 은혜라고 여기지 못하고, 겸손하면 아무리 은혜의 조건이 적어도 다 은혜로 여기게 됩니다.
어떤 분이 소록도를 방문해서 예배를 드리는데, 통성기도 시간에 옆에서 한 형제가 통곡하며 투박한 충청도 사투리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다 갚는데유." 그렇게 울며 기도하니까 "도대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기에 그러나?"하고 그 형제를 쳐다보았더니 한쪽 눈은 골아서 없었고, 귀와 코는 문들어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습니다. 입은 돌아간 상태였고, 손가락은 다 없어져 뭉뚝한 두 팔뚝만 보였습니다. 그 팔뚝으로 예배당 바닥을 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다 갚느냐?"고 울며 기도하는 것을 보고 그분은 충격을 받아 그 형제를 붙들고 함께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예배 후에 그 형제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은혜를 받았기에 그렇게 기도하십니까?" 그 형제가 말해주었습니다. "내가 병드니까 제일 먼저 7년 연애하고 결혼한 아내부터 나를 버리고 도망갔고, 곧 형제들도 나를 버렸고, 나중에는 저를 보고 눈물 짖던 부모님도 저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죽으려고 했는데 그때 하나님이 저를 만나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찬송을 펼칠 때마다 저를 반겨 주셨고, 성경을 펼칠 때마다 저를 위로해 주셨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저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셨고, 저를 사랑하신다고 하셨으니 그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다 갚습니까?"
그 형제의 고백을 들으면서 그분은 마음의 상처가 다 녹아 내리는 체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 형제가 그렇게 큰 은혜를 고백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얼마나 더 크게 고백해야 합니까?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겸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크게 보일 것이고, 우리의 마음의 각종 상처도 다 씻어지게 될 것입니다.
3. 자신의 실상을 깨닫는 사람
이사야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뵙고 나서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본문 5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이사야가 하나님을 만나고 처음 보인 반응이 "나는 망할 놈의 자식이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제까지는 기도도 많이 하고, 성전을 사랑하고, 대단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처럼 자기의 부족한 실상을 깨닫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바로 그때가 은혜 받는 때입니다.
왜 사람들이 교만합니까?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함부로 남을 정죄합니까? 자신의 실상을 보지 하기 때문입니다. 왜 자신의 실상을 보지 못합니까? 하나님을 만난 경험이 없기 때문입니다. 혹은 하나님을 만났어도 지금은 하나님과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빛이 강해도 멀찌감치 떨어져 있으면 흠과 티가 커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빛에 가까이 가면 흠과 티가 적어도 잘 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가까이 있으면 나의 흠과 티가 크게 보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실상이 보이게 됩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연약한 실상을 볼 수 있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멋지게 사용하신 이유는 사도 바울이 항상 "나는 죄인 중의 괴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진정 문제가 풀리고 환경이 변화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좀더 가까이 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 앞에 가까이 가면 남의 허물은 작게 보이고 나의 허물이 크게 보입니다. 문제가 내 남편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아내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자녀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나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처럼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과거에 대한 해석도 달라지고, 환경에 대한 해석도 달라집니다. 하나님과 멀리 있을 때에는 불평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내가 왜 이런 선택을 했나? 내가 왜 이런 남편을 만났나?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하나?" 그러나 하나님과 가까워지면 상황이나 환경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해석이 달랍니다. "아! 하나님께서 다 뜻이 있어서 이런 환경을 허락하시고, 이런 선택을 하게 하시고, 어떤 일을 당하게 하셨구나!"
그렇게 나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고, 환경과 상황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고 있다면 그 사람은 지금 은혜를 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4. 언어가 정결한 사람
이사야가 자신의 실상을 깨닫고 어떤 말을 합니까? 5절 말씀 하반부를 보십시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기의 허물을 말하면서 특별히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러자 스랍 천사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 핀 숯을 손에 가지고 와서 이사야의 입에 대고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해졌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누구를 사용하십니까? 특별히 입술이 정결한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그만큼 말이 중요합니다. 말이 좋지 못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없습니다. 사람이 성령 충만하게 될 때 가장 먼저 변하는 것이 말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성령께서 임할 때 초대교인들의 입술을 붙잡아 천국의 방언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성령이 임함으로 다른 방언을 말하게 되었다는 것에는 여러 가지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다른 방언이란 '못 알아듣는 말, 신비한 천국 말'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더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말을 하게 되었다는 말도 되고, 다른 나라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말, 즉 다른 사람을 위한 말을 하게 되었다는 말도 됩니다.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만물을 창조하셨고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지금은 성령님께서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말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의 말로 말씀화 할 때 그 안에서 능력이 나오게 되고, 그 안에 행복이 있고, 그 안에 성공이 주어지게 됩니다.
인생이 좋은 인생이 되기를 원하면 다른 것보다 먼저 말을 바꿔야 합니다. 말을 행복의 말, 사랑의 말, 감사의 말로 바꾸면 인생도 반드시 바꾸어집니다. 또한 말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온갖 저주와 질병까지 물리치게 합니다. 성경에 수많은 기적은 우리의 신앙의 말과 믿음의 말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사실상 좋은 말을 하는 것은 영적으로 살아있는 증거이고, 나쁜 말을 하는 것은 영적으로 죽은 증거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말을 하는 사람에게 그 말한 대로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5. 부르심에 응답할 줄 아는 사람
이사야의 입술이 깨끗하게 된 순간,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신기한 일은 입술이 깨끗하게 되면 귀가 열립니다. 웃시야가 사라지면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우리 안에 웃시야가 계속 남아 있으면 마음에 굳은살이 끼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그 굳은살을 벗겨내야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게 됩니다.
그 음성을 듣고 이사야가 고백했습니다.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나님은 누구를 사용하십니까? 성령의 음성에 예민하고 하나님의 뜻과 사명과 기대에 반응하고 부응하는 사람을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할 때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내가 음성 들었다!"라고 여기 저기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는 사람이 있고, "나를 보내소서!"라고 하고 실질적으로 자기의 있는 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전자에게는 관심이 없으시고, 후자에게 면류관을 예비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무감각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생활 오래 할 때 가장 위험한 것이 바로 무감각한 사람, 미지근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 영혼의 굳은살을 벗겨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하나님의 쓰임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는 가끔 발에서 굳은살을 벗깁니다. 그래도 하나도 아프지 않고 오히려 기분이 좋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경이 없이 죽어버린 굳은살을 벗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에 한나가 귀를 후벼줄 때 닿지 않아야 할 곳을 조금 살짝 스쳤는데 온 몸이 깜짝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귀 안에는 굳은살이 없어 예민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영혼과 신앙은 '발의 굳은살'처럼 되지 말고 '귀의 속살'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에 예민하고, 성령의 음성에 예민해야 합니다. 왜 요새 시험이 많고 실망도 많습니까? 가장 큰 이유는 성령의 음성에 대해 예민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심정을 생각해본 적이 없고 내 심정만 생각하니까 시험도 많고 실망도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과 영혼에 굳은살을 떼어내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애타는 심정도 모르고, 하나님의 뜻을 외면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지 못해서 잃어버린 영혼을 보고도 무감각하고, 가족들이 지옥으로 가는 것을 보고도 그저 무감각하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이제는 영적으로 더욱 민감해져야 합니다. 섭섭한 일에 대해서는 민감하지 말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심정에 대해서는 민감해야 합니다.
< 하늘의 스타가 되십시오 >
1987년 저는 선교사가 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미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처음에는 풀러 신학교에 가려고 했는데, 지금 미국의 한인세계선교협회의 사무총장으로 계시는 목사님의 권고로 뉴욕에 있는 얼라이언스 신학교에 들어가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아무 것도 모르면서 가슴에 뜨거운 열정만 가지고 "선교! 선교!" 하면서 보냈습니다.
그런데 점점 선교에 대해 공부하고 깊이 알아가면서 저는 '전방 선교사'의 길보다는 '후방 선교사'의 길을 가기로 진로수정을 했습니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첫째 이유는 "나는 전방 선교사의 자질로서 너무 부족한 것이 많구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고, 둘째 이유는 "제가 속한 미국 기독교 선교 연합회(C&MA)의 100년 이상 된 선교의 노하우를 한국 교계에 접목시키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신학교를 졸업하고 '후방 선교사'의 비전을 가지고 귀국했습니다. 그리고 '선교사 훈련 센터'에 대한 비전을 가지고 만나는 사람마다 선교를 역설했습니다. 그러나 참 어려운 난관이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힘든 일은 '선교의 비전에 동참하는 동역자가 참으로 적다는 것'이었습니다. 가끔 선교에 대한 관심을 포기하고 싶은 생각도 있지만 "이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이다!"라고 생각하니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가 C&MA 선교사님들과 협력선교사님들 및 협력선교기관을 위해 '선교 정보'를 나누고, 기도해 드리고, 물질적으로 후원하고, 동역자를 모으는 일을 하고 있지만 앞으로는 선교 훈련 센터를 세워 직접 선교 후보생을 발굴하고 교육시켜 파송하는 일까지 관심을 두어야 할 것입니다. 선교 훈련 센터 세우는 일을 처음부터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무실 하나와 강의실 2개 정도의 공간만 있으면 시작할 수 있습니다.
저만 '후방 선교사'입니까? 우리 모두 '후방 선교사'들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필요로 하는 곳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요청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이 임하기 전에는 항상 내가 필요한 곳, 내 욕심을 채우는 곳으로 갔지만 성령이 임한 후에는 항상 주님께서 필요로 하는 곳, 주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처럼 이사야가 주님의 부르심에 반응했기에 이사야는 그가 스타로 여기던 웃시야 왕보다 훨씬 소중한 하늘의 스타가 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 땅의 스타를 꿈꾸지 말고, 하늘 나라의 스타를 꿈꾸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곳으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즉시 대답할 수 있는 하늘의 스타가 되어야 합니다. 은혜 체험이란 최종적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실천할 때 진짜 은혜 체험을 한 것입니다. 이제 주님이 요구하실 때에 지체하지 말고, 주님께서 부르실 때에 귀를 막지 않고 잘 반응하여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사람이 다 되기를 바랍니다.
이한규목사(분당 샛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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