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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비상해야 하는가?

이사야 이상호 목사............... 조회 수 1506 추천 수 0 2013.10.24 11: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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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사40:28-31 
설교자 : 이상호 목사 
참고 : 공주세광교회 http://sk8404.or.kr 

왜 비상해야 하는가?

사40:28-31                                                     

2010. 10. 24, 오전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은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28-31)


‘비상’이라는 단어는 2010년 우리 교회의 키워드가 되었습니다. 비상을 생각하고, 비상을 꿈꾸고, 비상을 계획하고, 비상의 원리를 배워야 겠습니다. 연초에 본문으로 설교한 적이 있기에 주제만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차윤덕 목사 저 「비상」이라는 책을 참고하여 전합니다.

지금은 격려할 때입니다. 어려울 때 필요한 것은 바로 격려와 용기입니다. 될 수 있는 대로 격려하고 용기를 주는 데 최선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새가 비상하지 못하면 더 이상 새가 아니듯이 교회가 비상하지 못하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비상하지 않으면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비상해야합니다. 그렇다면 왜 비상해야 할까요?

 

예) 사마이야기 등 대 공연장에서의 좋은 자리는? 입체감을 느낄 수 있는 중앙 높은 자리입니다.

 

첫째로 올라가야 내려올 수 있습니다. 십자가 신학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십자가는 비우는 것이고, 내려오는 것이고, 낮아지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비웠다는 공표요, 내려왔다는 선언이요, 낮아지겠다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독교의 진리요, 기독교의 도라고 믿습니다. 무나 허 공의 지경까지, 그리고 공의 상태까지 내려놓음은 정말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덕목 중 최고의 덕목이기 때문입니다.


무, 허, 공이란 결국 있음, 채움, 풍성함을 전제로 해야만 합니다. 버리려면 채워있어야 하고, 낮아지려면 올라가 있어야 하고, 내려놓으려면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거지에게 더 내려오고 있는 것 버리라고 주문한다면 그것은 거지들을 고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 허, 공은 강자의 미덕이 될 수는 있으나 약자의 미덕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약2:5)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을 택하여 부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내려올 수 없는데 내려오고, 비울 수 없는데 비우는 것을 우리는 겸손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자기 비하일 뿐입니다. 높은 곳에 있지 않으면 내려올 수 없고 채운 것이 없으면 비울 수 없습니다.

 

예화) 장애인 올림픽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4년간 100m 달리기를 준비했습니다. 드디어 심판의 총소리와 함께 일제히 달려갔습니다. 이번에 지면 4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오직 이번이 기회입니다. 그런데 한 선수가 넘어졌습니다. 모두가 “저 선수는 이제 탈락하였구나” 생각하고 있을 때 달리던 한 선수가 경기를 포기하고 넘어진 동료를 일으켜 세우려고 돌아온 것입니다. 이를 본 다른 선수들도 경기를 포기하고 돌아와 쓰러진 동료를 일으켜 세우고 서로 부둥켜안고 울기시작 했습니다. 그들만의 한이 한꺼번에 폭발한 것입니다. 심판, 비장애인 모두 함께 울었습니다. 그리고 재경기를 치렀습니다. 승자도 패자도 없는 그야말로 아름다운 축제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감동을 주는 것은 앞서가던 선수들이 뒤로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앞서야 되돌아올 수 있습니다.

 

EX) 러시아의 한 황제가 하루는 평민 옷을 입고 백성들의 형편을 살피러 민정시찰을 나갔습니다. 도중에 우연히 한 거만한 군인을 만나게 되어 그의 계급을 물었습니다.

“자네가 한번 맞추어 보게나.”

황제가 물었습니다. “하사관이신가?”

“아니야. 그 윌세.”

“그러면 소위이신가?”

“아니야. 그보다 위야.”

“그러면 대위이신가?”

그때야 장교는 빙그레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이며 평민 복장의 황제에게 물었습니다.

“자네도 계급이 있나?”

“네, 있지요. 한번 맞추어 보세요.”

“자네는 일등병인가?”

“아닙니다. 그 위입니다.”

“하사인가?”

“아닙니다. 그 위입니다.”

“소위인가?”

“아닙니다. 그 위입니다.”

"그럼 대위인가?“

“아닙니다. 그 위입니다.”

자기보다 계급이 높다고 하니 이제 목소리와 어투가 달라집니다.

“그럼, 대령이십니까?”

“그 위일세.”

“그럼 대장이십니까?”

“그 위일세.”

이제 완전히 목소리가 공포에 떨립니다.

“그럼 원수 각하이십니까?”

“아니 그 윌세.”

원수보다 위라면 황제뿐이라는 생각에 이 장교는 부들부들 떨며 죽을죄를 지었다고 사죄하였습니다. 그때 황제가 부드러운 모습으로 대위를 일으키며 말합니다.

“너나 나나 마찬가지일세. 우리 위에 하나님이 계시니까.”

이 이야기의 감동 포인트도 바로 황제라는 지극히 높은 사람의 내려옴에 있습니다.

 

비상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올라가야 용서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용서 자체이십니다.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십니다. 죄를 짓는 것이 인간이 하는 일이라면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입니다.

 

* 영화 '밀양' 이야기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잘 보여 준 ‘밀양’이라는 영화에서 주인공 신애는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고 아들 하나만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정착하여 새 인생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그 하나뿐인 그 아들이 다니던 웅변학원 원장에게 유괴를 당해 죽습니다. 본래 신앙이 없던 신애는 이 엄청난 슬픔을 오직 하나님 신앙으로 극복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범인을 용서하려고 교도소에 갔다가 예수 믿고 회개하여 용서받았다는 범인의 말을 듣고 그만 정신을 잃고 쓰러지고 맙니다.

“내가 용서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하나님이 용서할 수 있나요? 그 인간이 이미 용서받았다는데 내가 어떻게 용서할 수 있나요? 나는 이렇게 괴로운데 그는 평화롭습니다.”

앞에서 신애의 용서는 위선적인 용서였습니다. 분노가 폭발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녀는 이제 타락한 생활을 합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께 반항합니다. 진정한 용서를 하지 못한 신애는 자신도 서서히 죽어갑니다.

요셉은 형들이 정말로 잘못을 뉘우치고 있는지 확인하고서야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형들을 용서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바로 요셉의 성공에서 나왔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힘도 없으면서 용서하겠다는 것은 일종의 굴종이며 항복입니다. 힘 있는 사람의 용서는 즐거움이지만 힘없는 사람의 용서는 고통입니다. 힘이 있어야 합니다.


“주머니가 작으면 큰 물건을 담을 수 없고 두레박줄이 짧으면 깊은 우물을 길을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용서는 하나님의 몫이기에 예수님처럼 큰 사람이 아니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사람을 용서할 수 있었던 것은, 예수님이 지극히 크신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전에서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고 계신데 바리새인들은 성전에서 죄를 고발하고 있었습니다. 완벽하게 준비했다가 간음 현장을 덮쳤기 때문에 이 여자는 지금 꼴이 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 여인의 죄를 포용한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율법에 매여 열심히 죄를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용서의 필요성을 아예 없애기 위해 선악을 구별하지 않는 예수님과 같이 큰 사람이 되는 것이 용서의 참된 비결입니다.

 

비상해야 할 세 번째 이유는 올라가야 풍성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간은 애당초 풍성하게 창조되었습니다. 잘 사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자기만 잘 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부끄러운 것입니다. 하나님이 풍성한 분이시고 예수님이 우리를 풍성케 하려고 오셨다면 우리는 당연히 풍성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부자, 섬기는 부자, 나누는 부자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초등 5학년 때 D가 하나고 F가 전부였던 벤 카슨이라는 흑인소년이 예일대학과 미시간대학 의학부를 졸업하고 흑인 최초로 세계적 의대인 존스 홉킨스 병원의 소아외과 과장에 오릅니다. 세계 최초로 머리가 붙은 삼썅둥이 분리시술에 성공합니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그의 자서전 『크게 생각하라』를 읽어보면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어머니의 격려와 위로입니다. 또 하나는 독서의 능력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긍정적인 사고라는 말이 싫다면 크게 생각하라.”("Think Big") 기왕이면 큰 것을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의 거장입니다. 그의 제자 애들러는 인간의 모든 본능을 성본능으로 설명하는 프로이드를 비판하며 인간은 타고난 열등감을 극복하고 성취하려는 존재라는 “열등감 이론”을 창시했습니다. 그는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거인 어깨 위의 난쟁이는 그 거인보다 훨씬 멀리 볼 수 있다.”


생각의 틀보다 행동의 결과가 더 클 수는 없습니다. 사고의 틀을 넓혀야 합니다. 높으신 하나님과 함께하면 내가 미약하더라도 얼마든지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집나간 탕자의 비유는 잘 아는 얘깁니다. 후반부에 큰 아들과 아버지의 얘기인데 ‘즐기다’라는 단어가 많이 나옵니다. “우리가 먹고 즐기자” “즐거워하더라” (눅15:23-24) 아버지는 지금 즐기자고 합니다. 그러나 형은 인생을 즐기지 못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즐겁게 사는 것이 마땅합니다. 즐기며 사는 것도 믿음입니다. 누리는 것도 믿음입니다.

 

“디저트는 오르가슴이다.” 라는 말이 있습니다. 디저트가 요리에서 클라이맥스라는 말입니다. 젖이 중요하지만 인생을 풍성하게 하기 위해서는 꿀이 있어야 합니다. 98%의 젖을 얻은 사람이 인생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2%의 디저트가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첫째 아들은 디저트를 즐기지 못했습니다. 잔치를 보고 화를 냈습니다. 이것이 죄입니다.


어린 손녀가 어머니를 따라 장에 갔습니다. 물건을 많이 샀더니 주인 아주머니가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얘야, 네 마음껏 체리를 가지렴. 아줌마가 선물로 그냥 줄게” 그러나 망서리는 아이에게 아줌마가 한 움큼 주었습니다. 돌아오면서 엄마가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아까는 왜 그냥 있었니?” “엄마, 아줌마가 내 손보다 크잖아요.” 하나님의 손은 더욱 크고 풍성합니다.

 

결론적으로 비상의 영역은 ‘물질의 풍요, 마음의 풍요, 영혼의 풍요’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먼저 우리를 ‘푸른 초장’에 누이십니다. 풍요로움, 풍성함, 지위와 명예의 풍성함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지친 영혼을 소생시키십니다. 영혼을 풍성하게 하십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우리는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흙의 요구가 있습니다. 명심보감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가난하면 왁자지껄한 시장에 살아도 서로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요, 부자로 살면 깊숙한 산 속에 살아도 친척이나 친구가 있다. 사람의 의리는 다 가난한 곳에선 단절되고 세상의 인정은 돈이 있는 집으로 향하는 것이다. 큰 부자는 하늘로부터 말미암고 작은 부자는 부지런한 곳에서 말미암는다.”

가난한 아버지는 말합니다. ‘돈을 좋아하는 것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 반대로 부자 아빠는 이렇게 말합니다. ‘돈이 부족한 것은 모든 악의 근원이다.’ 돈은 반드시 필요합니다.


인간은 냉혹한 현실에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을 수밖에 없는 부족한 존재입니다. 아브라함은 비겁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음식이 가물어서 그랬습니다. 돈이 가물어 그랬습니다. 가난해서 그랬습니다. 물질이 부족하면 시험에 들기 쉽습니다.


예수님은 ‘일용할 양식’을 구하라고 했습니다. 어렵고 힘들고 가난한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양식까지 일용할 양식에 포함한다면 문제는 달라집니다. ‘우리에게’라는 말은 다른 사람을 섬기고 도울 수 있을 정도로 풍족한 양식을 달라는 기도라고 믿습니다.


김영봉 목사는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라는 책에서 성경이 말하는 부의 태도는 자발적 가난, 또는 영적 가난인 우리의 소유를 나누는 데 있다고 주장합니다. 진정한 성경적인 복은 영적인 복이고 나눔의 복이라고 말합니다.

나라의 모든 일이 잘되어 가고 있지 않은데도 부귀를 누린다면 부끄러운 일입니다. 우리가 구하는 “일용할 양식”이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풍성한 양식”이 되어야 합니다. 돈을 사랑하여 나누지 않는 부자가 나쁩니다.


청빈의 문제는 사회 경제 구조의 문제입니다. 열심히 그리고 깨끗하게 살았는데도 가난하게 살 수 밖에 없다면 그것은 그 사회에 문제가 있습니다.

돈이 있는 곳에 다툼과 분열과 시기가 있습니다. 유산이 그렇고 이권이 그렇습니다. 밥그릇에는 항상 개미가 모입니다. 돈이 있는 곳에 말이 많아집니다. 소리가 높아집니다.


결국 풍요는 돈이 아니라 마음의 문제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더 큰 목장, 더 큰 교회, 더 큰 공장 운영하지 못했다고 후회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더 사람답게 살지 못했다고, 내가 더 사랑하지 못하고 살았다고, 내가 더 섬기지 못하고 살았다고 후회합니다.


“네가 좌 하면 나는 우 하고 네가 우 하면 나는 좌 하리라.” 자기의 기득권을 과감히 포기하는 큰마음, 이것이 바로 비상할 사람이 가져야 할 마음입니다.

물질의 풍요도 좋고 마음의 풍요도 좋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풍요, 생명의 풍요가 없으면 모든 것은 다 잠깐 있다가 없어질 안개에 불과합니다. “번쩍인다고 다 황금이 아니다.” 풍성하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물질의 풍요도 필요하고 마음의 풍요도 필요하지만 반드시 영적으로 풍성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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